얼(뿌리를 찾아서)/국학(國學) 자료

훈민정음 반대 최만리 상소문

양해천 2017. 12. 4. 11:12

최만리 등의 상소문
자료출처 : http://cafe.daum.net/hanjungil.net/Qlch/10 http://cafe.daum.net/hanjungil.net/Qlch/11 http://cafe.daum.net/hanjungil.net/Qlch/12


앞 장에서 훈민정음서문을 살펴보았는데, 정말로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진 것인가에 대해 이 상소문을 통해 다시 알아보자. 더불어, 이 상소문의 반박문이라 할 수 있는 정인지의 후서後序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훈민정음의 정체나 목적은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와 있고, 서문만으로도 그 정체나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현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른바 강단학계 즉, 주류학계의 나태함과 뻔뻔함, 교만함과 거짓말이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필자가 이렇게 붓을 들어 이 상소문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소문의 해석을 보고서도 그들은 끝까지 거짓말을 계속할 것이다. 동국정운서문이나 홍무정운역훈서문, 훈몽자회범례 등이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한번 눈이 가린 저들은 쉽게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이 상소문을 살펴봄으로서 훈민정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왜곡된 동국東國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상소문은 실록에 기록된 것이지만, 해석함에 있어 실록 보다는 한글과 관련된 다른 기록이나 서적들을, 주主로 참조하여 해석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실록은 필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해석이 틀렸다면, 이 상소문과 실록의 다른 부분들은 서로 반대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을 필자가 올바로 해석하였다면, 학자들이 해석한 실록의 내용 중에서 이 상소문과 상반相反되는 부분들은, 그 해석이 틀렸거나 변조된 것이다. 실록은 그 권수卷數가 분명하여 마음을 먹으면 변조가 가능하지만, 다른 서적들은 그 권수나 존재여부를 알 수가 없어 변조를 시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동국정운서문이나 홍무정운역훈서문, 훈몽자회범례 등을 주로 참조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상반되는 실록의 부분은 참조하지 않았다. 물론, 상반되지 않는 부분들은 당연히 참조하였다.

사실, 실록을 검증檢證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일부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만, 강단학계에서는 침묵으로 덮으려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바로 조선왕조실록이 변조되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실록에서 상반되는 내용들이 있다면,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분명히 어느 한쪽이 변조된 것이다. 이른바 민족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이 실록을 어찌해볼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었고 어찌해볼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는 부분들은 변조되지 않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실록을 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있었던 이들 즉, 일제日帝나 그 하수인이 실록을 변조하였다면 우리에게 유리하게 변조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이 상소문의 내용은 변조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상소문과 상반되는 실록의 부분들은, 해석이 잘못되었거나 일제에 의해 변조된 것이다.

이 상소는 1444년 2월 20일(음력)에 있었던 일이고 훈민정음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 1446년 9월이라, 시기적으로는 이 상소문이 서문 보다 더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애초의 ‘세종의 뜻’이 반영된 것이 서문이고 그 ‘세종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이 상소이니, 서문이 이 상소문 보다 앞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소는 서문에 대해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문이 실린 예의편은 반포시에 써진 것이 아니라 1443년 12월에 써진 것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래서, 필자가 서문을 먼저 해석하고 이 상소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상소문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두면 좋은 것이 있는데, 세종과 최만리 등을 비롯하여 당시의 사람들 모두에게 있어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상소문 전체에 전제前提되어 있는 옛것과 사대모화이다. 옛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즉, 모범이나 기준을 의미한다. 사대모화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나 조직, 개인에게 있어 추구되는 보편적 가치이다. 이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인 세종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지금의 ‘민주주의’가 공산권 국가나 독재국가, 심지어 군주제 국가에서도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옛것이나 사대모화 그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행위에 있어 그 행위가 옛것이나 사대모화에 들어맞는 것이냐 어긋나는 것이냐의 다툼이 있을 뿐이다.

이 상소문을 보면서, 독자들은 학자라는 이들이 얼마나 나태懶怠하고 거짓말을 잘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밥벌레라는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렇게, 필자와 같은 범부凡夫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왜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혹자는, 필자를 대단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한문에 대해 잘 알아서 이렇게 이 상소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학창시절에 한문과목은, 한문과목도 낙제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붓을 들 수 있는 것은, 필자에게 밥벌레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들이 다 이루어 놓은 것에 숟가락만 담그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막 갖다붙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기본에 충실하여, 기존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뿐이다. 필자가 많이 배웠다면,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을 믿고 오히려 자의적이고 엉뚱한 해석을 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학자라는 이들은 ‘訓’을 단순히 ‘(새로운 것을) 가르치다’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필자는 당시에 그렇게 쓰였고 현재에도 그렇게 쓰이고 있는 ‘訓’의 올바른 뜻인 ‘바로잡다’로 해석하였다. 순우리말인 ‘가르치다’는 ‘새로운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잘못을 고치어 바로잡는 것’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국어사전만 뒤져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순우리말을 한자로 옮겨서, 새로운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교敎이고 잘못을 고치어 바로잡는 것이 훈訓이다. 즉, 새(新) 것을 알려주는 행위는 교敎이고 바른(正) 것을 알려주는 행위는 훈訓인 것이다. 이처럼 기본에 충실하고 오류만 바로잡는 것뿐이다. 또, 학자라는 이들은 기존의 역사지식에 맞추어 원문原文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필자는 해석을 먼저하고 그 해석에 맞게 역사적 사실을 추론하고 있을 뿐이다.

강단이나 재야나 둘 다,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둘은 알아도 셋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강단은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재야의 일부(대륙조선론)는 동국과 중국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강단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동국과 중국이 하나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글로 인해 진실이 조금이나마 자리 잡길 바랄 뿐이다.

이 글이 역사학계나 국어학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올 수도 있지만, 그저 그런 일개의 설에 불과한 평가를 받고 조용히 묻힐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아니, 진실이 이기는 경우가 더 적은 것이 세사世事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진실을 알아버린 촌놈이, 촌놈이지만 거짓이 판을 치는 것을 그냥 묵과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양심에 찔린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庚子/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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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는 상소문의 첫 구절부터 엉터리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냥 모든 것을 설렁설렁하고 있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여기의 ‘언문제작諺文制作’을 ‘한글(ㄱㄴㄷㄹ... ㅏㅑㅓㅕ...)을 만들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처럼 잘못된 해석이 따로 없다. 국어사전이나 실제 쓰임을 살펴보면, 제制는 ‘~의 틀을 만들다, ~로 틀을 만들다’이고 작作은 ‘만들어진 ~’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만들다’는 製를 쓴다. 制는 주로 ‘공적公的인 만들기’를 의미하여 제도나 법률, 형식 등을 정定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언문제작은 ‘언문의 틀을 만들다, 언문으로 틀을 만들다 + 만들어진 언문’이 되므로 결국, ‘언문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된다. 정리하면, 언문제작諺文制作은 ‘언문을 만들다’가 아니라 ‘언문을 이용한 운서나 언해서적’을 가리킨다. 운서나 언해서적은 공적인 만들기 즉, 언문을 제도화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언문을 만들다’로 해석하려면 制가 아니라 製가 쓰였어야 한다. ‘창물운지’의 창물創物은 현대의 용어로 발명發明에 해당되고 운지運智는 발견發見과 같은 개념의 단어라 할 수 있다. 창물운지가 천고에 뛰어나다는 것은, 언문을 이용하여 한문서적을 언해하려는 것과 운서의 발음표기를 언문으로 하려는 것이, 당시까지 세종 말고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최만리 등이 보기에, 언문을 문자의 발음표기나 한문서적의 역譯에 이용하려는 것이 정말로 기발한 재치(아이디어)이나, 그 결과인 언해서적과 언문운서에 문제가 있어 보여서 이렇게 상소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소를 올리게 된 사정이 어떠한지, 상소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실록의 1443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이자 마지막 기사로서, 이 기사의 뒤는 여백으로 남아 있다. 혹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나중에 추가된 기사가 아닐까라고 추정하는데, 필자는 ‘기자방고전, 훈민정음’이라는 말 때문에 나중에 추가된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여기에서도, 製가 아니라 制가 쓰였다.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制諺文二十八字’는 언문28자(ㄱㄴㄷㄹ...)를 세종이 창제創製했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 세종이 직접 제안하여 언문28자를 제도화制度化(공적公的으로 사용使用)하였다는 뜻이다. 즉, 세종의 아이디어로 언문을 운서나 언해에 이용하였다는 뜻이다. 운서나 언해는 국가의 정책이고 국가적 사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制’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범우문자급본국리어凡于文字及本國俚語, 개가득이서皆可得而書’는 언문의 쓰임새 즉, 언문을 운서나 언해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于文字及本國俚語’는 ‘문자에서 본국의 리어까지’라는 뜻으로서 그 쓰임새의 주主는 운서(한자의 발음표기)이고 언해(한문서적의 한국어 번역)는 부副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是謂 訓民正音’이라 하여 한자의 발음표기가 훈민정음의 목적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기존의 지식인 세종이 28자를 창제했고 한국어표기가 주목적이며 운서 등에 이용된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위 기사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于文字及本國俚語라는 말 때문이다. 及은 ‘미치다, 닿다, 이르다, 함께, 더불어, 및, 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于~ 及~’은 ‘~에서 ~까지’라고 해석된다. ‘문자에서 본국리어까지’는 언문의 쓰임새를 그냥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문자와 리어가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문자가 주목적이고 리어가 부목적 또는 부수적인 효과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于~及~)은 병렬식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언문을 문자文字에 쓰는 것이 주主이며 리어俚語에 쓰는 것은 부副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만으로도, 기존의 지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문자(한문, 한자)를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 남의 것을 빌렸다고 여기는 태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기존 학계의 주장은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국어 표기’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于文字及本國俚語는 훈민정음의 목적이 ‘문자의 발음표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 장에서 살펴보아 알고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의 발음표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한자발음표기를 위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너무 과하게 공들인 것이며, 지금처럼 한국어표기에 널리 이용되기에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 따라서, 한글이 한자발음표기나 한국어표기를 위해서 ‘창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즉, 한글은 창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었다는 말이 되고 그 당시의 명칭이 바로 ‘언문’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국인 동국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언문을 공식적으로 천하에서 사용하겠다는 것이 훈민정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품어야 한다. 왜 리어俚語라는 표현 대신 본국리어本國俚語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 그에 대해 궁구窮究해야 함에도, 학자라는 이들은 아주 가볍게 넘어간다. 리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국어(한국어)를 가리킨다. 그런데, 리어라는 표현도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어國語, 국지어음國之語音 등의 표현을 다 놔두고 왜 리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왜 한국어를 리어라 하였을까? 설사, 리어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이상하지 않다 하더라도, 왜 굳이 본국리어라 하였을까? 여기의 본국은 동국 즉, 지금의 한국을 가리키는데, 동국東國이나 조선朝鮮, 아국我國 등의 표현을 쓰지 않고 왜 본국이라 하였는가? 강단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학자라는 이들이 이런 기초적인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화나게 한다.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지만, 본국本國은 지류支流 즉, 지나支那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지류支流 즉, 종속국從屬國을 거느린 종주국宗主國을 지칭하는 단어이다(본인本人, 본좌本座, 본토本土 등도 다 같은 형태의 단어이다). 본국本國은 자기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지칭하거나 어떤 대상의 고국故國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그 뜻이 왜곡되어 사용된 것뿐이다. 실록은 천하天下를 경영經營하는 과정이나 결과를 조정朝廷의 입장에서 기록한 기록물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조정에서 중국으로 즉, 천하에 내려 보낸 것이다. 따라서, 조정의 입장에서 훈민정음의 쓰임새가 동국 즉, 본국의 말을 표기하는 데까지 사용되니 본국이라 한 것이며, 훈민정음이 내려진 중국의 방언方言과 구별하기 위해서 리어라 한 것이다. 본국리어는 동국東國이 본국이라는 뜻이며 본국의 언어를 가리켜 리어俚語라 부른다는 말이다.

12월 중에 세종이 언문을 제도화 하겠다고 발표를 하고 신하들과 논쟁을 했다면, 1443년 12월이나 1444년 1월에 그 내용이 실렸을 것인데, 조용히 있다가 두 달이 지나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무래도, 이전부터 쌓여왔던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2월 16일에 있었던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한 일이, 상소하게 된 계기로 추정된다. (여기의 번역이라는 것은 한자의 발음을 언문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즉, 반절식 표기를 언문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지, 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2월의 친제언문은 세종이 번뜩이는 재치로, 언문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최만리를 비롯한 언문반대론자들은 세종이 언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또, 사관史官들도 언문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달 정도가 흐르면서 언문을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인지 알게 되고, 운회를 번역하게 하는 일이 발생함으로서, 논지를 모아 4일 뒤인 2월 20일에 상소를 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상소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상소 이전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느 정도의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서문이나 정인지 후서, 상소문, 운서들의 서문, 실록 등을 살펴보면, 세종이 언문과 관련한 무엇을 하는 데에 있어, 비밀리秘密裏에 하였거나 중국의 눈치를 보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가 없고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였으며, 최만리 등의 반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반대하는 자는 생길 수 있어서, 그러한 반대는 ‘예측 범위’의 안에 있는 것인데, 세종에게 있어 최만리 등의 반대는 ‘예측 범위’를 벗어난 뜻밖의 일로 보인다.

이 상소문에 있어 첫 번째에 언급된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인데, 그 첫째 항에 ‘字形雖倣古之篆文’이 나와 있다. 이는 세종이 먼저 언급한 것이 아니라, 최만리 등이 먼저 시비是非한 것에 대한 세종의 변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세종이 스물여덟 자의 자형字形에 대하여 스스로 설명을 한 것이 아니라 최만리 등이, 언문제작이 옛것에 위배된다는 시비를 걸고 나서, 세종이 그에 대한 변명으로서 옛것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자방고전이라 기록된 부분은 이 상소문이 있기 전, 며칠 이내에 있었던 옛것에 대한 논쟁이 없고서는 기록될 수가 없다. ‘기자방고전其字倣古篆, 자형수방고지전문字形雖倣古之篆文,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은 모두 옛것에 대한 논쟁에서 나온 말이지, 언문이 어떤 문자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제자원리製字原理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기준基準에 대한 얘기이다. 만약, 어떻게 만들어진 문자인가에 대한 설명이라면, 훈민정음의 예의나 해례 등에서 그 부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텐데 전혀 없다. 결국, 12월의 기사는 이 상소문의 논쟁이 있고 난 뒤인, 세종의 사후에 실록편찬과정에서 추가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또, 훈민정음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등장할 수는 없다. 12월 며칠이라 말하지 않고 12월이라 한 것도 이상하지만,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완성하고 반포하기 전에 훈민정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맞지 않다. 이 상소문에서도 언문이라고 나와 있지 훈민정음의 훈자도 꺼내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이 반포 된 이후에도 계속 언문이라 언급하고 있다. 언문을 친히 만들었다(製)면서 언문을 가리켜 훈민정음이라 한다니, 스물여덟 자의 이름이 언문이라 하였으면서 다시 훈민정음이 이름이라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세종 당시에 작성된 사초史草에 기반基盤한 기록이 아니라, 세종 사후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따로 추가 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친제언문親制諺文, 언문제작諺文制作, 아전하창제정음我殿下創制正音 등’을 ‘한글을 만들다’라고 해석하여 세종이 28자를 직접 창제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크나큰 잘못이다. 친제언문은 ‘언문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책이 임금의 머리에서 직접 나왔다’이고 언문제작은 ‘공적으로 만들어진 언문서적’이라는 뜻이며 아전하창제정음은 ‘정음을 한자의 발음표기에 사용하겠다는 정책을 세종이 독창적으로 시행했다’는 뜻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創製하였다는 말은 맞지만 언문 28자를 창제創製하였다는 말은 틀렸다.

강단학계에서는 언문이 훈민정음의 별칭 중에 하나였다라고 말하고, 재야학계에서는 가림토가 훈민정음의 기원이라 말하지만, 둘 다 틀렸다.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다. 곧, 언문을 한자의 발음표기에 이용한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말이다. 물론, 언문의 기원이 가림토인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상소문을 비롯하여 여러 운서, 훈몽자회, 실록 등을 살펴보면, 훈민정음을 얕잡아 보아 언문이라 호칭한 것이 아니라, 스물여덟 자의 원래 이름이 언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언문을 문자 보다 낮추어 본 것은 맞으나, 이는 언문의 쓰임이 문자 보다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언문이라는 이름 자체에 ‘깔보다’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언諺이란 바로 리어俚語를 가리킨다. 동국이 아닌 곳 즉, 천하天下의 선비는 사士이고, 언彦은 동국 즉, 본국의 선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동국의 선비들이 쓰는 언어인 동국어 즉, 한국어가 바로 언諺이고 그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쓰이는 문자가 바로 언문諺文이다.

언문이 훈민정음을 낮게 보는 훈민정음의 별칭이고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발견된 한글과 관련된 기록 중에서 첫 기록인 실록의 기사에서,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라고 했는데 이를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28자를 지었으면 그냥 훈민정음이라 하면 될 것을 ‘언문 28자’라 이름할 이유가 없다. 이는, 동국어인 언諺을 표기하기 위한 문자인 언문諺文이 이미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諺, 언어諺語, 언언諺言, 언음諺音, 언문諺文, 언서諺書, 언자諺字, 언해諺解, 언간諺簡, 언찰諺札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언諺은 동국어를 가리키는 단어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넓게 많이 쓰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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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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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왜곡이 심한 것들 중에, 이 부분이 그 중에 하나이다.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자기 자신의 일을 논쟁하고 있는데, 엉뚱하게 남의 나라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엉터리 해석이 더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은, 최만리 등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조선의 국시國是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국시를 언급하고 국시에 어긋나는 ‘창작언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국시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로서, 현재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아조我朝는 ‘우리 조정朝廷(朝庭)’이라는 뜻이지 조선朝鮮이 아니다. 아조我朝, 본조本朝, 전조前朝 등은 모두 조정朝廷을 말하는 것이다. 아조가 ‘우리 조선’이면 본조는 ‘본래의 조선’이고, 전조는 ‘고조선古朝鮮’을 말하는 것인가?

지성사대는 ‘지극한 정성으로 큰 것을 섬기다’이고 일준화제는 ‘하나로 좇아 제도를 꽃피우다’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약자가 강자를 지성으로 떠받드는 경우가 없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소인배도, 기회가 생기면 자신이 모시던 강자를 밟고 올라서려 한다. 하물며, 조선의 선비가 강자에게 굴종하고 그것도 지성으로 섬긴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한때 강자를 섬길 수는 있지만, 수백 년을 한결같이 섬기는 것뿐만 아니라 별다른 반대가 없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또한,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강자를 섬길 수는 있지만 지성至誠으로 섬길 수 있는가? 그렇게 강자를 섬기는데, 몽골에 항쟁한 것은 무엇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또 무엇인가? 흉노, 선비, 거란, 몽골, 여진, 일본 등의 이적夷狄은 중국을 탐내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한번도 중국을 탐내지 않는가? 우리나라는 왜 중국만 떠받들고 다른 나라는 이적이라 하며 무시하는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성사대가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이라 해석하고 일준화제가 중국의 제도를 따라하는 것이라 해석하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지성至誠과 일준一遵은 처세處世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대한 추구追求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대事大의 대大는 그냥 ‘큰(것)’이라는 뜻이다. 이소사대以小事大이건 이소역대以小逆大이건 원래는 그냥 ‘큰 것’을 의미한다. 어느 문장에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문맥을 살펴 ‘큰 나라(大國)’로도 해석되고 ‘큰 것’으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사대의 해석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맹자의 양혜왕 하편에 나오는 이대사소以大事小와 이소사대以小事大는 교린交隣 즉, 이웃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말한다. 소국小國인 이웃나라와 문제가 있을 때, 대국大國인 인자仁者는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덕德으로써 소국을 포용함으로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그릇이 된다는 것이 이대사소이다. 대국인 이웃나라와 문제가 있을 때, 소국인 지자智者는 혈기를 내세우지 않고 대국의 비위를 맞춰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 이소사대이다.

이소역대以小易大 역시 맹자의 양혜왕 상편에 나오는 말인데, 역시 제선왕과 관련된 일화이다. 큰 동물인 소 대신에 작은 동물인 양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이는 측은지심에 대한 얘기인데, 뒤에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만 생략한다.

예例에서 보듯이, 비슷한 구조의 말인데도 이쪽에서는 나라를 뜻하고, 저쪽에서는 동물을 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소역대以小易大의 출처를 몰라 그 뜻을 모른다면, 이 역시 나라로 해석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바꾼다, 작은 나라를 큰 나라로 바꾼다’라고 해석할 것인가? 지성사대와 이소사대의 사대事大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또, 위화도회군의 명분인 이소역대以小逆大는 이소역대以小易大와 비슷한 형태인데 역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다’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없고, 회군의 명분에 저런 말도 안 되는 것을 갖다 붙일 수 없다. 이소역대는 ‘작은 것이 큰 것을 어긋나게 하다, 작은 일이 큰 일을 그르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소역대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서, 작은 것인 요동의 땅을 직접 지배하는 일 때문에 동국과 중국이 서로 다투어, 큰 것인 천하를 경영하는 일에 차질을 빚어 천하 백성에게 해害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동국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맞지만 중국을 통해서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事大는 현대의 우리들도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아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理想이다. ‘큰 인물이 되거라’, ‘통 크게 살아라’, ‘작은 일에 매이지 말고 크게 보아라’, ‘대범大汎하거라’, ‘대한국大韓國, 대한국인大韓國人’, ‘大+나라=>대한민국大韓民國, 대몽골제국大蒙古帝國,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대영제국大英帝國’, ‘대박’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나 큰 것을 추구하고 있다. 설문에서 대大를 ‘惟東夷從大大人也(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라 하였고, 동양권에서는 대인大人, 대부大夫, 대장부大丈夫라는 말을 쓴다. 우리나라도 임금을 대왕大王, 태왕太王이라 하고 벼슬아치에게 대부大夫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지성사대의 사대가 이소사대의 사대와 전혀 다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의 사대를 어찌 ‘큰 나라를 섬기다’로 해석할 수 있는가? 사事는 ‘일, 섬기다, 부리다, 경영하다, 다스리다, 힘쓰다 등’이므로 사대는 ‘큰 것을 섬기다, 큰 것을 부리다, 큰 것을 경영하다, 큰 것을 힘쓰다, 큰 것을 추구하다, 크게 만들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지성至誠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처럼, 지성이라는 말은 아무데나 쉽게 쓰는 말이 아니다. 이소사대의 사대는, 자신의 힘이 현재 약하기 때문에 강해질 때까지 대국을 섬긴다는 것으로서, 지성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지성사대는 ‘지성으로 ~을 크게 하다’이다.

일준一遵은 ‘하나로 좇아, 꾸준히, 한결같이’라는 뜻이고, 화제華制는 ‘제도를 빛나게 하다, 제도를 꽃피우다’이다. 일준화제는 ‘꾸준히 ~의 제도를 꽃피우다’이다. 사대모화事大慕華는 ‘지성사대, 일준화제’의 준말인데, 모慕가 ‘그리다, 그리워하다, 생각하다, 바라다, 원하다, 탐하다 등’의 뜻이므로, 모화慕華는 ‘꽃을 바라다, 꽃피는 것을 바라다’라는 뜻이 된다. 이를 ‘중국의 문화를 모방하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이는 ‘중국(조선)의 문화가 꽃피기를 바라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지성사대 일준화제(사대모화)’를 이른바 ‘사대주의’라 부르며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무식無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 올바른 뜻은 ‘지극한 정성으로 천하(조선)를 키우고 꾸준히 제도(문화)를 꽃피우다’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대모화는 치자治者나 유식자有識者라면 그 누구나 지상至上의 목표로서 하여 추구하는 이상理想이다.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동문은 문자의 통일을, 동궤는 도량형, 규격 등의 통일을 뜻한다. 이를, 조선(동국)의 문자와 도량형을 중국의 것과 똑 같게 맞춘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하나의 문자, 하나의 규격만을 사용하는 것,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자治者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정책이다. 즉, 동문동궤는 자신이 다스리는 통치구역 내의 통일을 의미하지, 자기 것을 남의 것에 맞추어, 남의 것을 따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동문동궤의 동同은 ‘내(予) 통치구역 내內의 각 지방들 간間의 차이差異를 같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내 것을 남의 것에 맞추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동문동궤는 조선 즉, 구주지내의 통일을 가리킨다.

동문동궤의 원래 출전 즉, 동문동궤의 유래는 중용인데 그 원문은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이다. 뜻은 ‘천하 즉, 구주지내의 규격과 문자와 윤리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문동궤가 ‘내 것을 남의 것에 맞추다, 남의 것을 따라하다’가 아니라 ‘내 것의 통일’을 뜻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내 것’은 바로 ‘중국대륙의 천하天下’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금 최만리 등은 ‘자신의 천하(중국대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동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중국의 경우를 인용하여 동국내東國內의 통일을 의미한다거나 중국의 것에 동국의 것을 맞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중국의 것에 동국의 것을 맞춘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는가?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는 자기가 통치하는 구역 내의 통일을 의미하지 남의 것에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조정은 조종 때부터 이래로 지성으로 (조선을) 키우고 꾸준히 (조선의) 제도를 꽃피워서, 이제 (조선의) 문자와 규격을 통일한 때를 맞아’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를, ‘작은 나라인 동국이 큰 나라인 중국을 섬겨서 중국의 제도를 따라하여, 이제 문자와 규격을 중국과 같게 하여’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면, 사대모화의 대상이 중국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다 알다시피 화華는 화하華夏, 화음華音, 중화中華라는 단어로 쓰여 곧, 중국을 의미하는 글자로 사용된다. 정확히는, 이상적인 중국의 문화(culture, 문물예악文物禮樂)인 문명文明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중국이 바로 조선이며 조선이 바로 천하天下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국이 중국을 섬기는 것은 조선을 섬기는 것이며 곧, 동국이 조선을 키우는 것이 바로 사대모화인 것이다. 이것은, 동국이 꽃피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꽃피는 것이다. 동국의 이상理想은 중국을 크게 하고 중국을 꽃피게 하는 것이다. 사대모화의 결과인 중국이 꽃핀 것을 가리켜 중화中華라 하는 것이다.

창작언문創作諺文을 ‘언문을 창제創製하다’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역시 큰 잘못이다. 창작소설, 창작동요, 창작가요, 창작예술, 창작영화 등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창작언문의 언문은 스물여덟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창작은 모방이나 표절, 비슷한 형식이 아닌 독창성이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창작~’은 ‘~’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를 가리킨다. 즉, 창작언문이라는 것은 언문이라는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지 스물여덟 자를 창제했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창작언문은 언해서적이나 언문운서를 가리킨다.

최만리가 굳이 ‘창작’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창작이란 옛것을 본받지 않은 독창성을 지닌 것을 말하는데, 세종의 언문서적이 ‘옛것을 저버리고 새것을 좇는 행위, 기준을 어긴 행위’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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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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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강단학계나 재야학계 모두가 헤메고 있다. 심지어, 한문을 일상으로 사용하던 조선시대 때에도 그랬고 특히, 19c 중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 ‘諺文皆本古字 ~ 實無所據’의 전체를 해석해야지 달랑 ‘字形雖倣古之篆文’의 이 부분만을 해석하려 하니 엉뚱한 얘기들만 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지서의 ‘象形而字倣古篆’도 이 상소문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 부분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여기의 ‘언문’과 ‘용음합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당왈儻曰은 ‘(세종이) 설혹 말하기를’이라는 뜻이다.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는 세종이 말한 것이지 다른 누가 말한 것이 아니다. 여기의 ‘설혹 말하기를’은 ‘사실이 아닌 일을 가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여 가정한 것’이다. 즉, 전일前日에 있었을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에서 세종이 주장했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세종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이고,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는 세종의 주장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문제작’과 ‘창작언문’이 언문서적을 뜻한다고 하였으므로, 문맥상 이 부분의 ‘언문’도 ‘언문 28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문서적을 가리킨다. 현대의 우리도, ‘한글’이라 하면은 원래 24자모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한국어를 가리키기도 하고, 24자모가 합해져 이루어진 한글문장을 가리키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라 인식하기도 한다. 또,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을 한글화라 이름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상소문에 등장하는 ‘언문’들을 무조건 같은 뜻으로 해석하여 ‘언문 28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상소문은 언문 자체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언문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는 것’ 즉, ‘언문을 한자의 발음표기에 사용하는 것’과 ‘언문을 공문서公文書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시비이다.

여기의 언문이 언문서적을 뜻한다고 했는데, 그럼 언해서적일까, 언문운서일까? 이 상소문이 있기 바로 전에 운회를 번역하라 하였고, 5항에서 운서를 고치게 하고 그것에 언문을 사용한 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고, 여기 1항에서 용음합자를 거론하고 있으니, 당연히 언문운서를 가리킨다. 즉, 1항은 언문운서에 대해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이전의 운서와 이후의 운서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면, 이 1항은 쉽게 해석된다.

잠깐 이 상소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1항과 2항이, 3항과 4항이, 5항과 6항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고 1항, 3항, 5항이 주 내용이고 2항, 4항, 6항은 그 앞항의 내용을 보충하거나 부연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1~4항은 내용적인 면인 실질적인 문제점을 다루고 있고 5, 6항은 절차적인 면인 방법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리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된 운서에 대한 것을 1항에서 다루고 있다.

강단은 세종이 직접 언문 28자를 창제創製했다는 전제하에, ‘字形雖倣古之篆文’에서 전篆을 ‘소전小篆, 전서체篆書體’라 해석하여 ‘한자를 만드는 방법’이나 ‘한자의 구조적 모양’을 모방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등의 말만들기를 하고 있고, 재야는 전篆이 가림토를 뜻한다고 해석하여, 가림토를 그대로 모방해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형수방고지전문’은 뒤에 오는 ‘용음합자진반어고’와 서로 대응하는 말이다. 따라서, ‘용음합자진반어고’를 해석하지 못하면서 ‘자형수방고지전문’을 해석할 수는 없다. 두 문구의 해석이 서로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달랑 ‘자형수방고지전문’만 해석하려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두 문구의 앞에 오는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가 이 논쟁의 시작인데도, 이 부분은 해석하지 않고 ‘자형수방고지전문’만 해석하려 하니,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강단의 주장대로 ‘한자를 만드는 방법’을 모방한 것이라 하면, ‘용음합자진반어고’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모양은 한자를 만드는 방법을 따라했는데 용음합자는 ‘한자의 용음합자’를 따라 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할 것인가? 그럼, ‘용음합자’가 무엇인지는 아는가? 또, ‘本古字非新字’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재야의 주장대로 골동품인 가림토를 부활시킨 것이라면 용음합자가 옛것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묻혀있어 쓰지 않던 것인데, 옛것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고 있는가?

강단이나 재야나 여기의 언문을 한글 즉, ㄱ, ㄴ, ㄷ, ㄹ ... 로 보았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의 언문은 한자 즉, 운서의 발음기호로 사용된 군君, 나那, 두斗, 려閭 ...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최만리 등이 상소를 하게 된 이유는 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문의 쓰임’ 때문이므로, ㄱㄴㄷㄹ 때문이 아니라 君 那 斗 閭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운서에 있어서 최만리 등에게 ㄱㄴㄷㄹ이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ㄱㄴㄷㄹ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2항에서, 한자 외에 새로운 문자가 퍼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3항에서는, 언문 때문에 한자가 죽게 되어 문명이 퇴보한다고 말하고 있어, 언문인 ㄱㄴㄷㄹ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훈민정음 이전부터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정하건대, 이 상소가 있기 4일 전에 세종이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라는 명을 내릴 때, 운회의 번역에 있어 그 발음기호를 ‘예전부터 운서편찬에 사용되던 글자가 아닌 새로운 글자’인 君 那 斗 閭 등을 사용하는 것은 안 된다고, 최만리 등이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세종이 君 那 斗 閭 등은 본래 다 고자古字이지 신자新字가 아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등은 두 달 동안 지켜봐온 것도 있고 하여, 다른 문제들도 함께 묶어 이 상소를 하게 되었고, 이 상소문의 1항에서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훈민정음 이전의 운서 즉, 중국의 운서에서 사용된 발음기호는 견見, 니泥, 단端, 래來 ... 등이었다. 그러데, 세종이 군君, 나那, 두斗, 려閭 ... 등의 글자로 바꾸려 한 것이다. 그러니, 최만리 등이 옛것(古字)이 아닌 새것(新字)을 써서는 안 된다 한 것이다. 생각하건대, 운서의 발음기호로 쓰이는 한자는, 가장 널리 쓰이고 가장 발음하기 쉽고 가장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는 글자일 것이다. 따라서, 운서의 발음기호는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음기호를 바탕으로 모든 한자를 읽게 되는데, 갑자기 발음기호가 바뀌어 버리면 한자를 읽지 못 하거나, 바르게 읽지 못 하는 사람이 생길 수가 있다. 고자古字는 ‘예부터 써왔던 글자’를 의미하므로, 새로운 글자들에 비해 ‘널리 쓰이는 글자’를 가리키고, 기준이자 표준이 될 수 있는 글자로서 운서에 쓸 수 있다. 신자新字는 ‘새로 생긴 글자’를 의미하므로, 고자에 비해 ‘널리 쓰이지 못하는 글자’를 가리키고, 정자正字가 아니기에 운서에 쓸 수 없다. 신자新字는 약자略字, 속자俗字 등을 포함해서 답畓처럼 새로 만들어진 글자를 가리킨다.

세종은 스스로 운서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다 자부하고 있어, 기존에 쓰이던 발음기호가 아닌 새로운 발음기호를 쓴 것이다. 세종은 그 새로운 발음기호가 신자가 아닌 고자라서 괜찮다고 한 것이며, 최만리 등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최만리 등이 세종의 주장을, 신자가 아니라 고자라는 주장을 인정한 것이 바로 ‘則字形雖倣古之篆文’인 것이다. 자형字形은 한자漢字의 구성요소인 모양(形), 뜻(義), 소리(音) 중의 하나인 모양을 가리키는 것 즉, 같은 한자끼리 서로를 구별하는 의미로서의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자를 만드는 방식(상형문자, 표음문자, 표의문자 등)으로서의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논쟁은 운서편찬에 대한 것이므로 당연히, 문자를 만드는 방식이 아닌 한자의 구성요소로서의 모양(形)을 말한다. 따라서, 이 상소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는 ‘정인지 후서’에서의 상형象形도 같은 의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방倣을 이른바 ‘모티브를 따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데, 방倣은 글자의 원래 뜻인 ‘본뜨다, 본받다’로 해석하여야 한다. 또, 전문篆文이나 전篆을 서체書體(筆體)로 해석하여 소전小篆의 획劃과 한글의 획을 비교하기도 하는데, 전篆이 대전大篆이든 소전小篆이든 여기에서의 전篆은 한자의 기원起源(오리지널)을 의미한다. 한자의 기원이 갑골문이니 금문이니 하는데, 현재 우리가 쓰는 한자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대전이나 소전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은, 세종 당시의 정자正字의 필체나 획이 소전의 필체나 획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글자가 나중에 생긴 새 글자가 아니고 그 기원이 소전에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지전문古之篆文은 고자古字와 같은 뜻이 된다. 실제로, 바로 앞부분에서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고 하여, 분명하게 古字와 新字를 말하고 있어 ‘古之篆文=古字’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결국, 이 부분의 해석은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이지만 (글자의 소리는 옛것이 아니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눈 뜬 장님들은 篆이라는 글자에 정신이 팔려, 전서체니 가림토니 하며 엉터리 해석을 하고 있다.

기존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자. 새 문자를 만들었는데 새 문자는 이미 한자漢字와 모양이 다르고, 중국을 배신하고 이적처럼 두 가지의 문자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제자원리가 한자의 제자원리와 같다고 하여, 중국을 배신하고 이적처럼 두 가지의 문자를 가진 잘못이 줄어드는가? 한자의 제자원리와 같다는 것이, 한자의 용음합자와 다르다는 것을 덮을 수 있는가? 제자원리가 같다는 것이 새 문자 창제의 정당성이 될 수 있는가? 척 보면 한자와 한글이 상관없다는 것을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데, 한자와 한글의 획이 비슷하다고 하여, 한자와 한글의 제자원리가 같다고 하여, 한자와 한글이 서로 연관이 있다며 엮는 것이 중국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한글 창제의 명분이 될 수 있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너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운서韻書에서는 발음기호로 쓰이는 한자의 모양(象形)도 중요하지만, 그 발음기호를 사용하여 모든 한자의 음(字音)을 올바르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즉, 음音이 더 중요하다. 그 발음하는 방법이 바로 ‘用音合字’인 것이다. 용음합자를 ‘음을 사용하여 글자를 합하다’라고 해석하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데, 용음합자는 용음과 합자가 별개로서, 용음은 현대식 용어로 ‘발음發音’이고 합자는 현대식 용어로 ‘음소音素를 합해서 음절音節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합자에 있어서 훈민정음 이전까지는 ‘자음字音=자모字母(聲母)+운모韻母+성조聲調’이었는데, 이후로는 ‘자음=초성(字母)+중성+종성+성조’로 바뀌게 되니 즉, 운모가 중성과 종성으로 나뉘게 되니 ‘反於古’라 한 것이다.

용음用音이 옛것에 위배된다는 것은, 자음字音이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최만리 등이 3항에서 설총의 이두를 거론하니, 세종 역시 설총의 이두를 거론하면서, 음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薜聰吏讀 亦非異音乎). 그 음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세종 이후 4백여 년이 흐른 뒤에 지은 책이라, 현대의 우리들처럼 훈민정음이나 언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낭설이나 추측도 싣고 있다. 그런데, 추측 중에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經史篇1 경전류經傳類2 소학小學 훈고訓詁 : 반절反切과 번뉴翻紐에 대한 변증설辨證設’에 나오는 말이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반절의 말은 한(漢) 나라 이전부터 이미 있었으며<송(宋) 나라 때 심괄(沈括)은 “옛 말에 두 소리가 어울려 한 글자가 되는 것은 이미 있었다. 불가(不可)가 파(叵)가 되고, 하불(何不)이 합(盍)이 되며, 여시(如是)가 이(爾)가 되고, 이이(而已)가 이(耳)가 되며, 지호(之乎)가 저(諸)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 증거가 《주례(周禮)》의 사사(士師)의 오계(五戒)에 있는데 ‘첫째, 서(誓)는 군려(軍旅)에 쓰고[用于], 둘째, 고(誥)는 회동(會同)에 쓰며 [用之于], 셋째, 금(禁)은 전역(田役)에 쓰고[用諸], 넷째, 두(紏)는 국중(國中)에 쓰며[用諸], 다섯째, 헌(憲)은 도비(都鄙)에 쓴다[用諸]’ 하여 느리게 발음하면 지우(之于)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저(諸)로 줄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고, 《소이아(小爾雅)》에는 “저(諸)는 지호(之乎)이다.” 하였으며, 정초(鄭樵)는 “느리게 발음하면 두 음절이 되고 빠르게 발음하면 한 음절이 된다는 것은, 느리게 발음하면 자언(者焉)이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전(旃)이 되며, 느리게 발음하면 자여(者與)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저(諸)가 되며, 느리게 발음하면 이이(而已)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이(耳)가 되며, 느리게 발음하면 지의(之矣)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지(只)가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두 자를 합하여 한 음으로 만든 것은 주(周)ㆍ진(秦) 때부터 있었다.
송 나라 송상(宋庠)의 《국어보음(國語補音》) 행옥이십곡(行玉二十瑴)의 아래에 “상고하건대, 모든 책에 이십(二十)이란 글자를 입(卄)자로 쓴 데가 없고 옛 음에만 입자가 나왔으니, 그렇다면 마땅히 음은 입이어야 한다.
안지추의 계성부(稽聖賦)에 “위 나라 여자[魏嫗]는 어찌 그리 많은가? 한번에 애기를 40명이나 배었네. 중산(中山)은 어찌 그리 많은가? 아들이 백이십[百卄]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하나의 증거이다.
또 30을 삽(卅)으로 쓰는데 음은 소합반(蘇合反)이며, 40을 십(卌)으로 쓰는데 음은 선립반(先立反)이다. 모두 진(秦) 나라 때 예서(隸書)가 나온 후에 되도록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글자마다 따로 음이 있으니, 이것은 대저 빠르게 말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것은 모두 두 자를 한 자로 만든 것으로, 반절과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여 변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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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以爲翻切法 中原則兩字相摩 以爲聲韻 謂之翻切 我東則二字先去後後去先 合以成音 盖兩字先印音 而取訓民正音書之 如吽字呼後切 則呼字爲호 先去後<先書字 去下畫 留上畫之謂也> 則只存ㅎ而去ㅗ也 後字爲후 後去先<後書字 去上畫 留下畫之謂也> 則只存ㅜ而去ㅎ也 合前ㅎ後ㅜ 則成후字 音爲后也
내가 생각하기에는 번절법翻切法이 중국의 것은 두 글자가 서로 갈리어(相摩) 소리(聲韻)가 되는 것을 번절이라고 하나, 우리나라는 두 글자 중에 앞의 것은 뒤를 버리고, 뒤의 것은 앞을 버린 후 합하면 소리(音)가 되는 것인데, 대개 두 자를 먼저 우리 소리(東音)로 한 다음 훈민정음을 취하여 쓰는 것이다.
가령, 吽(후, 우, 음, 흠)자가 호후절呼後切이라고 한다면, 호呼자는 ‘호’가 되므로, 앞의 글자는 뒤의 것을 떼어 버리라고 했으니<먼저 쓴 글자의 아래 획을 떼어 버리고 위의 획만 남겨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ㅎ’만 남고 ‘ㅗ’는 없어지며, 후後자는 ‘후’가 되므로, 뒤의 글자는 앞의 것을 떼어 버리라고 했으니<뒤에 쓴 글자의 위의 획을 떼어 버리고 밑의 획만 남겨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ㅜ’만 남고 ‘ㅎ’은 없어지는 것인데, 앞 자의 ‘ㅎ’과 뒷자의 ‘ㅜ’를 합하면 ‘후’자가 되고 소리는 후后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정리해보자. 예를 들면, 훈민정음 이전의 반절은 ‘之乎切, 之于切’이 ‘諸/저/’이지만, 훈민정음 이후의 반절로는 ‘之乎切, 之于切’이 ‘諸/조/, 諸/주/’가 되어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저=>조, 주). 즉, 훈민정음 이전의 반절법은 두 글자를 빠르게 발음하는 방식으로 ‘기+아=갸’가 되고, 이후의 반절법은 ‘기’의 ㄱ과 ‘아’의 ‘ㅏ’를 합쳐 ‘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중국이나 동국 둘 다 훈민정음식의 반절이 이미 자리를 잡아, 이규경도 당시에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고 단지, 예전 방식의 흔적을 옛 서적에서 읽은 것이다.

그래서, 세종의 운서편찬에 있어 발음기호는 옛것을 썼지만, 그 발음과 음절 만드는 방식이 옛것과 다르다고, 최만리 등이 주장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1항은 언문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언문이 발음기호로 사용된 운서의 편찬 방식에 대한 논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훈민정음과 운서의 편찬방식을 정리해 보자. 세종이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며 최만리 등이 무엇을 반대한 것인지 알아보자. 훈민정음 직전直前에는,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데에 있어 반절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운서를 편찬하는 데에 있어 기본적인 방법은, 모든 한자를 사성四聲으로 나누고 다시 운韻으로 나누고 다시 성모聲母로 나누어 반절식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이후의 동국정운을 비롯한 주요主要 운서들도 훈민정음 이전의 편찬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훈민정음 이후에 달라진 것은 바로 반절식 표기법이다. 즉, 기존의 반절법을 훈민정음으로 대체하겠다는 것, 한자의 발음표기를 한자가 아닌 언문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발음기호를 한자에서 언문으로 바꾸겠다는 발상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東 德紅切 => 東 동, 諸 之乎切 => 諸 저]. 이렇게 바꾸면, 한자를 읽기가 매우 편해질 뿐만 아니라 한자의 발음이 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東이라는 한자의 발음이 변하는 것에는, 東 자체의 발음이 변하는 것도 있지만 德이나 紅의 발음이 변해도 변하고, 德과 紅의 발음이 변하지 않았다고 해도 두 글자를 반절하면서, 풍습風習이나 기습氣習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언문을 익혀 발음하게 되면, 언문의 발음이 변하지 않는 한 한자의 음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문은 애초부터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언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절되지 않는 한, 발음기호 그 자체의 발음이 변하지는 않는다. 물론, 발음하기 어려운 발음을 간략히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A라는 한자의 발음이 ‘삻’이라고 할 때, ‘삻’을 발음하기 어려워 ‘살’로 그 발음을 바꾸더라도, 그 한자의 발음이 변한 것이지, 표기법으로 쓰이는 문자(한글)의 발음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반절법을 언문표기로 바꾸는 데에서, 기존의 발음이 변하게 된 것이다. 물론, 동국정운이나 홍무정운역훈 등에서, 36자모字母(聲母, 初聲)를 23자모 또는 31자모로 바꾸어 한자의 발음이 달라진 것은, 이 논쟁과는 상관없다. 이전의 반절법은 두 글자(德紅)를 빠르게 읽어서 한 글자(東)처럼 발음되게 하는 방식인데(/덕+홍/ => /동/), 이후의 방식은 기존의 반절식으로 표기된 발음기호(德紅)를, 앞글자의 성모聲母인 초성(ㄷ)과 뒷글자의 운모韻母인 중성·종성()을 합하여 언문으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이 주장하는 바는, 같게 발음되는 /동/이라도 /덕+홍/과 /ㄷ+/은 다르다는 것이다. ‘東 德紅切’ 같은 경우는 발음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諸 之乎切, 之于切, 之於切’ 같은 경우는 /저/에서 /조, 주, 저/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빠르게 발음해서 발음되는 음을 언문으로 표기했다면, 이 부분(用音)을 최만리 등이 시비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세종은 일률적一律的으로 ‘앞글자의 초성+뒷글자의 운모’라는 방식으로 한자음을 언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사실, /덕+홍/을 정확히 /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덩/으로 들릴 수도 있고 //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세종이 일률적으로 ‘앞 글자의 초성 + 뒤 글자의 운모’라는 방식을 택한 것일 수 있다. 세종 스스로 음성학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 ‘한자의 발음’에 있어 혁명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합자合字가 옛것에 반反한다는 것은 이러하다. 東의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데 있어, 기존의 방식은 ‘德紅’이지만 언문으로 표기하게 되면 ‘斗洪業’이 되어, 2자에서 3자로 합자의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에는 ‘초성+중성, 초성+중성+종성’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표기법을 쓰고 있는데, 한자음표기에는 ‘초성+중성+종성’의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다. 합자合字라는 것은 문자를 만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것, 음절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용음과 합자는 둘 다 한자의 발음에 대한 얘기이고 운서의 편찬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한 것일까? 초성(ㄱㄴㄷㄹ...)을 표기하기 위해 동국정운은 23개, 홍무정운은 31개를 만들었으면, 운모(      ...)를 표기하기 위해 동국정운 같은 경우 91운이니, 91개의 문자를 만들지, 왜 이렇게 3개가 합하는 방식으로 만든 것일까? 이유는, 언문이 이전부터 존재했었고 동국어(俚語)를 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문을 훈민정음에 이용한 것이지, 리어를 표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 훈민정음을 한자음표기에도 이용한 것이거나, 애초에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문맹퇴치나 우리말표기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면, 한자음표기에 그렇게 공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면서, 한글전용은 못할망정 한자음표기에 ‘3자字 합자合字’의 방식을 고집하여, 순우리말표기와 한자어표기가 서로 동떨어지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맹인 백성에게 한자를 배우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면서, 배우게 한다 하더라도 중국식 발음을 배우게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모든 백성을 중국화 하기 위하여 3자합자라는 어려운 방식, 발음하기 어려운 표기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무지렁이 백성을 위해 한문서적을 언해하는 것이라면, 언해서적의 한자음에까지 꼭 3자합자로 하여, 중국식 발음을 고집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렇게 한자음표기에 공을 들인 것은, 애초부터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자음표기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두 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면, 한자음표기나 순우리말표기나 동일한 방식으로 하지 굳이, 따로 따로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표음문자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한자의 발음표기까지 연구했다는 것, 거기다가 중국의 발음까지 따라 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했다는 것은, 더구나 속국의 왕이 그런 일을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세종 이전에 언문이 동국에서 한창 잘 사용되고 있었고, 훈민정음은 그 언문을 이용하여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그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졌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若流中國’을 ‘만약 (동국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만약 (동국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중국에 흘러들어, 만약 (한글 서적들이) 중국에 흘러들어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역시 잘못된 해석이다. 유流를 ‘방랑하다, 떠돌다, 표류하다, 흘러들다 등’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유流는 ‘흐르다(水行), 퍼지다, 펴다(布), 전하다(傳), 내리다, 내치다, 흘리다, 흐르게 하다, 귀양 보내다 등’의 뜻을 가진 글자로서, 원래 가장 기본이 되는 해석은 ‘흐르다’이다. ‘흐르다’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으로서, 약류중국은 ‘만약 중국에(으로) 흐르면, 내리면, 내려지면, 내려 보내면, 퍼지면, 펴면, 전하면, 흐르게 하면’으로 해석해야 한다. 동국에서 중국으로 내리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유流자를 쓰는 것이다. 유流는 능동적인 행위이지 수동적인 행위에 쓰는 단어가 아니다. 즉, 유流를 ‘어쩌다 중국에 알려지다’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떠돌다’나 ‘흘러들다’로 해석되는 경우는 표류漂流, 유랑流浪 등이지만, 이때는 표漂와 랑浪 때문이지 유流 때문이 아니다. 이 부분은, ‘만약 (언문운서를) 중국에 내려 보내면’으로 해석해야 한다.

‘或有非議之者’를 ‘혹시 (동국이 한글을 만든 것을)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으로 해석하는데, 과연 이것이 대한민국의 학문을 책임지는 전문가들의 해석인지, 놀라고 또 놀랄 일이다. ‘비난非難’과 ‘비의非議’가 같은 뜻인가? 동의同義는 ‘같은 뜻’이라는 뜻으로서 ‘엄마와 어머니는 동의어同義語이다’처럼 쓰이고, 동의同意는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서 ‘어떤 것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다’처럼 쓰이고, 동의同議는 ‘의견意見이나 주의主義가 같은 의론議論’이라는 뜻으로서 ‘여러 사람의 모아진 의견意見’처럼 쓰인다. 동의同意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게 객관화가 되면 동의同義가 되는 것이고, 동의同意가 모아지면 동의同議가 되는 것이다. 3항에 나오는 정의正議는 ‘바른 동의同議’라는 뜻으로서, 단순히 의견이 모아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의견이 모아진 것을 말한다. 즉, 동의同議는 ‘정부의 A라는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의 동의同議가 있었다’처럼 쓰인다. 따라서, 비의非議는 그 반대의 뜻으로서 ‘정부의 A라는 정책에 비의非議하는 국민들이 있었다’처럼 쓰이는 것이다. 즉, 비의非議는 ‘아니라고 말하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의론議論’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식 용어로 바꾸면 ‘반대여론反對輿論’ 정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혹유비의지자或有非議之者를 ‘(우리나라가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을) 혹시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은, 양심을 저버리고 대중을 속이는 행위이다. 바로 앞 구절에 나와 있듯이, 비의자非議者가 생기는 것은 ‘진반어고盡反於古, 실무소거實無所據(다 옛것에 위배되어, 실로 근거根據할 바가 없다)’ 때문이지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든 것 때문이 아니다. 언문운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만드는 방식이 규범規範에 어긋나기 때문에, 혹시 비의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만리 등의 주장이고 실제로 비의자가 생길지는 미지수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들었는데, 중국인이 비의非議할 일이 뭐가 있는가? 비난非難을 했으면 했지, 비의를 할 이유가 없다. 오랑캐처럼 한자 외에 다른 문자를 갖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들지 말라는 반대여론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든 것 때문이 아니라, 만드는 방식이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언문운서를 동국에서 중국으로 내려 보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동국이 상국上國이고 중국이 하국下國이라는 뜻이며, 동국이 아버지이고 중국이 아들이며, 동국의 왕이 회장會長이고 중국의 왕이 사장社長이 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豈不有愧於事大慕華’를 강단은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역시 웃음 밖에 안 나온다. 한문이나 국어에 평생을 바쳐 공부하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 정도의 수준 밖에 안 되다니, 이 나라가 이 정도나마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괴愧는 ‘부끄럽다’라는 뜻 말고는 없다. 괴愧는 5항에도 나오는데, 역시 중국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죄나 허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작용을 참慚, 자신의 죄나 허물에 대하여 남을 의식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 작용을 괴愧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 ‘부끄럽다’는 자신과 대등하거나, 자신 보다 아랫사람을 상대로 사용하는 말이다. 자신 보다 윗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아직 한창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부모에게 혼날까봐 걱정하고 부모에게 죄송한 것이지, 부모에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이 부모에게 부끄러우면 그는 이미 어른이다. 부모가 잘못을 하면 자식에게 부끄러운 것이고 스승이 잘못을 하면 제자에게 부끄러운 것이며, 상관이 부하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잘 키울 책임이 있어서, 자식에게 모범이 되고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모범이 되지 못하고 해로운 것을 주고 나쁜 것을 가르쳐서,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님, 어찌하여 제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십니까? 부모님, 제게 밥을 주셔야지 어찌 불량식품을 주십니까?’라고 했을 때,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는가?

사대모화가 중국을 섬기고 중국의 문화를 모방하는 것이라면, 어찌 중국에 부끄러울 수가 있는가? 사대모화를 못 했으면 중국에 죄송하고 황송한 것이 아닌가?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데 중국에게 부끄럽다는 말을 쓸 수 있는가? 기불유괴어사대모화豈不有愧於事大慕華는 ‘어찌 사대모화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어찌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데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로 해석해야 한다.

1항에서 최만리 등이 주장하는 바는, 언문28자 자체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언문을 이용하여 만드는 운서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며, 그 잘못된 운서를 중국에 내려 보내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를 학자라는 이들은, 언문창제에 반대하고 중국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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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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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소문에서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자기자신의 일을 논하고 있지 남의 일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자기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구주지내九州之內’가 남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종이나 최만리등은 동국인東國人이고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 그 대상이 중국이므로, 동국의 책무는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자기자신의 ‘구주지내’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방언方言을 단순히 ‘사투리’로 알고 있지만, 방언은 중국 즉, 천하의 지방어(사투리)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그리고, 방언에 상대되는 동국의 용어는 리어俚語이다.

어떻게,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동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세종과 최만리 등이 서로 논쟁하고 있는 대상이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뿐이다.

같은 실록에서, 이곳에서는 일본을 동이東夷라 하고 저곳에서는 우리나라(한반도)를 동이라 부르고 있다. 모순이 되는 내용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는 실록이 변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상소문에서는 일본이 동이라 말하고 있다. 여러 정황상,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동이가 일본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동이라 부르는 부분은 변조된 것이다. 실록을 살펴보면, 기록의 주체가 둘 이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즉, 두 개 이상의 기록물을 합쳐 놓은 것 같다는 말이다. 실록이 변조되었다는 것은, 내용상으로도 외형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부분은, ‘구주지내 즉, 중국은 옛부터 방언을 핑계로 지방마다 따로 문자를 만든 경우가 없었고 하나의 문자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지금 훈민정음(언문)을 중국에 내려 보내면 중국에 두 가지의 문자가 존재하게 되어, 중화의 중국이 이적夷狄과 같이 두 개의 문자를 갖게 되는 것이다’라고 최만리 등이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최만리 등뿐만 아니라 모든 치자에게 있어 언어나 문자, 도량형 등의 정책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자 하나의 도량형으로 통일하는 것이 기본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하나의 문자’ 정책은 당연한 것이고 옳은 것이다. 다만, 최만리 등이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차이에 대한 것을 놓친 것이다. 당시에 표의문자니 표음문자니 하는 그러한 개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도 문자(표의)와 언문(표음)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표의와 표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문자는 없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그런 문자가 발명된다면 모를까, 어떤 사회이든지 간에 하나의 문자만 가질 수는 없다. 이 부분을 최만리등은 놓친 것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한글전용과 같은 하나의 문자만을 갖기를 희망하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부분은, 중국에는 하나의 문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중국이 하나의 문자만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하나의 문자만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게 해석하려면, 강대국인 중국을 떠받들고 모방하는 것이라면 그냥 ‘중국이 하나의 문자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이적처럼 두 개 이상의 문자를 가지지 말고 하나의 문자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굳이, ‘옛부터’라는 말을 하고 풍토와 방언을 들먹여 중국의 내력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의 문자를 가지게 될 당사자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의 내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종 당시까지 풍토나 방언이 달라 언어나 문자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을 중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하나의 문자만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두 가지의 문자를 가지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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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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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 역시, 중국에 대한 얘기이지 동국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이적이 중국을 따라하면 따라했지, 중국이 이적을 따라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문명文明에 대한 최만리 등의 기준 중에 하나는 바로, 동문동궤이다. 이적은 미개하기에 통일성이 없고 임시방편의 편리만을 좇기 때문에 여러 문자를 갖게 되어, 결국에는 혼란스런 사회인 비문명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는 하나의 문자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이적을 변화시키는 중국을 모방하여 동국도 하나의 문자만을 가져야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전혀 없다.

이 부분은, 중국이 이적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두 개의 문자를 가지는 것은 중국이 이적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용하변이用夏變夷’는 속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뜻은 ‘동국東國(天國, 天毒, 天竺)이 중국인 하夏를 써서 온 세상(주변의 이적夷狄)을 문명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화하華夏=중국中國’이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하夏는 역대 중국 중에 최초의 중국(왕조)으로 알려져 있다. 중화는 문명에 이른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화하華夏는 중화(문명)에 이른 하夏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지 중국을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역대 중국 중에 ‘화하’처럼 화華를 붙여서 부르는 중국은 없다. 즉, 화하는 중화의 좋은 본보기로서 모든 중국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 상소문은 1항부터 6항까지 전부 다 중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남의 나라인 중국에 대한 얘기이거나 우리나라인 동국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인 중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국에 대한 얘기라고 착각하고 있고, 중국의 속국인 동국이므로, 중국을 롤모델로 삼은 동국이므로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언급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이 상소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한문공부를 하기 전에 국어공부나 독서량을 늘려 독해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 필자가 이 상소문을 해석하면서 느낀 것은, 한문 실력이 이 상소문의 해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독해력 즉, 한국인이 한국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 하夏를 써서 이夷를 변하게 한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얘기이지, ‘롤모델인 중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동국도 중국을 따라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중국을 따라서 동국도 그러해야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모르겠다.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중국이 어떠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눈 뜬 장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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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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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지, 어떻게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歷代中國皆 ~ 文明之大累哉’는 한 문단으로서 그 내용이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이어져야 하고, 앞부분에 이런 말이 나왔는데 뒷부분에 저런 말이 왜 나오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어야 한다. 학자라는 이들이 저렇게 해석을 해놓고 저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고 하니,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칭찬해준 것’과 ‘중국을 버리는 것’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지,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이 왜 중국을 버리는 것이며, 중국을 버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소합향과 당랑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이 부분은, ‘歷代中國皆 ~ 比擬中華’와 ‘今別作諺文 ~ 文明之大累哉’의 두 문장으로 되어있다. 먼저 앞 문장을 살펴보자. 역대중국개歷代中國皆가 전체 문장의 주어이고 비의比擬가 전체 문장의 서술어이며 문물예악은 ‘文物禮樂, 比擬中華’라는 작은 문장의 주어이다. 즉, 比擬는 ‘역대중국개’의 서술어이면서 동시에 ‘문물예악’의 서술어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문장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제일 중요한 글자는 ‘以’이다. 어떤 것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기본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해석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나서 그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고 잘못되었다 생각될 때, 의역을 한다던지 역사적 지식 등을 대입시킨다던지 하여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럼, 여기의 以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以는 ‘~써, ~로, ~로써, ~를 가지고, ~를 근거로, ~에 따라, ~에 의해서, ~ 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등’이 기본적인 뜻이다. 以를 이러한 뜻으로 해석을 하여 전체 문장과 융합되는지를 살펴보고 나서, 문제가 있을 시 다르게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순서다. 따라서, 이아국以我國은 ‘아국으로써, 아국을 가지고, 아국에 의해서, 아국 때문에, 아국으로 인하여 등’으로 먼저 해석해야 한다. 결국, 이 문장은 ‘역대 중국 모두가 기자유풍이 있는 우리나라에 의해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다’ 또는 ‘역대 중국 모두가 우리나라에 의해 기자유풍이 있어서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다’가 된다. 즉, 중화에 비의되는 것은 동국이 아니라 중국인 것이다.

비의比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견주어 비기다’인데,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비교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닮은 점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미국에 비의된다’ 처럼 쓰여 (미국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 전제하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미국처럼 발달되어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중화中華는 ‘중국이 꽃핀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물론, 중화라는 단어가 상황에 따라 중국이라는 나라를 지칭하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쓰일 때는 아무 때나 그렇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문명에 초점을 맞출 때이다. 중화의 원래 뜻은 ‘이상적인 문화 수준에 이른 중국, 문명의 중국, 중국이 꽃핀 상태’를 의미한다. 중화라는 단어는 현대의 ‘선진국, 복지국가, 일류국가 등’의 의미인데, 다른 점은 아무 나라에나 쓰는 말이 아니라 오직 중국에 대해서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을 중화에 비의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동국을 중화에 비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은 ‘역대 중국 모두’라고 하였지만 동국은 그냥 ‘동국(아국)’이다. 이것은 중국이 동국에 대해 평가한 것이 아니라 동국이 중국에 대해 평가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아국我國은 조선朝鮮(‘조선’과 ‘조선국’이라는 단어가 언제 어떻게 쓰였는지 연구가 필요하다)이 아니라 동국東國인데, 동국은 우리나라의 특정시기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체성, 전체 역사에 있어서의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최만리 등은 동국인이고 동국의 입장에서 중국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역대의 중국 모두가 최만리 등의 나라인 동국에 대해, 동국(고조선~근세조선)의 문물예악이 어쩌니 저쩌니라고 언급할 수는 없다. 특정 중국이 동국에 대해 문물예악이 어쩌니저쩌니하며 언급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하자면, 특정 중국(중화민국)이 우리나라의 역사(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어쩌구저쩌구할 수는 있어도, 역대의 모든 중국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어쩌구저쩌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역대 중국 모두가 동국의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자는, 명나라는 조선과 그 이전에 대해, 원나라는 고려와 그 이전에 대해, 송나라는 고려와 그 이전에 대해, 당나라는 신라와 그 이전에 대해 평가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각 중국이 그러한 평가를 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원나라와 그 이전 중국들의 평가는 명나라의 평가로 갈음할 수 있으므로, ‘역대 중국 모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이 중국(명나라)의 평가가 어떠하다고 말하면 될 일이다. 설사, 아국을 동국(고조선~근세조선)이 아닌 조선국(근세조선)으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명나라가 조선국을 어떠하다고 평가할 수는 있어도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등이 조선국을 어떠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동국은 그 정체성 즉, 혈통이나 법통 등이 계속 이어지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역대 중국은 각자 별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중국들 모두가 일관되게 동국을 자신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국은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것이 목적이므로, 역대의 중국들이 서로 별개일지라도 ‘역대 중국 모두가 동국에 의해 중화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소문의 이 부분과 비슷한 글이 있는데, 바로 於是以吾東國世事中華而語音不通必賴傳譯{홍무정운역훈 서}과 惟我東國世事中華語音不通必賴傳譯{사성통해 서}이다. 이를 ‘이에 우리 동국이 대대로 중국과 친교하였으나 (동국과 중국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해야만 했다’와 ‘우리 동국은 대대로 중국과 친교하였으나 (동국과 중국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학자라는 이들의 수준이 이러하다. ‘東國世事中華’가 어떻게 ‘동국이 대대로 중국과 친교하였으나’라고 해석될 수 있는가? 세사世事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호칭 중에는 ‘대한민국, 한국, 남한, 남조선, 코리아, 사우스코리아 등’이 있는데, 다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호칭인 ‘한국’만 하더라도, 같은 한국이라는 명칭임에도 대한민국의 줄임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적인 개념으로서의 한국, 민족적 개념으로서의 한국,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개념으로서의 한국, 국가로서의 한국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화도 그러한 명칭인데, 중화中華나 화하華夏를 무조건 중국이라고 해석하는 바보들이 이 나라의 학문을 책임지고 있다니, 할 말을 잃는다. 이 부분은 ‘이에 우리 동국에 의해 세상일이 중화가 되었으나 (천하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해야만 했다’와 ‘생각건대 우리 동국이 세상일을 중화가 되게 하였으나 (천하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한다’로 해석해야 된다.

두 번째 문장인 ‘今別作諺文 ~ 文明之大累哉’를 살펴보자. 두 번째 문장은 앞 문장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서로 내용적으로 연관이 있어야 하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금별작언문今別作諺文’을 ‘지금 따로 언문을 만들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作을 製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작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창작가요, 창작동화, 창작동요, 창작소설 등과 같은 형태의 단어인 창작언문創作諺文은 ‘언문 28자 그 자체를 만들다’가 아닌 ‘언문’이라는 분야에서, ‘옛부터 전해오는 것이 아닌 처음 만들어진 언문(서적)’을 의미하므로, 별작언문別作諺文 역시 ‘(문자와) 별도로 만들어진 언문서적’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언문서적이 중국에 내려져 중국에는 두 가지의 문자가 존재하게 되어,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중국이 이적과 같아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중국捨中國이 되는 것이다.

또, 작作은 ‘造짓다, 始비롯하다, 事일하다, 起일어나다, 爲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에서 별위문자別爲文字라 하였고, 바로 뒤 문장에서 별작언문別作諺文이라 하고 있어, 작作이 爲(하다)의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별위문자와 별작언문은 같은 2항에 나와 있는 문구이고, 문맥상 2항의 전체적인 요점은 ‘문자(한문漢文)와 별도로 문자(언문)가 존재하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별위문자와 별작언문은 서로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은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방언에 따라 따로 문자를 행한(爲) 적이 없고’와 ‘今別作諺文 이제 따로 언문을 행하여(作=爲)’가 되는 것이다.

捨는 ‘버리다, 포기하다, 폐하다, 내버려두다, 개의치 않다, 놓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키워야 하는 책무가 있어서,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나쁜 것이 가지 않도록 항상 살펴야 한다. 그런데, 자식에게 나쁜 것이 가는지 어쩌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그러한 경우에 쓰는 글자가 바로 사捨이다. 또한, 자신의 소유물을 방치하는 상황 즉, 자신의 휴대폰이 어디로 굴러다니는지 잘 챙기지 않는 상황을 가리킬 때 쓰는 글자이다. 중국을 떠받들고 중국을 롤모델로 삼아 중국을 따라하다가, 그러한 것을 하지 않을 때에 쓸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러한 경우에는 ‘배신背信’ 정도가 해당 될 것이다. ‘중국을 버리다’는 분명하게 동국이 상국이고 중국이 하국이라는 것, 동국이 본국이고 중국이 지나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증거이다.

自同於夷狄을 ‘동국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다’로 해석하는데, 이 역시 잘못된 해석이다. 부모가 자식을 내버려두어 자식을 망치게 되면 ‘스스로’ 망치는 것이다.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다’는 ‘중국을 버려서 (동국) 스스로 (중국이) 이적과 같아지게 하다’가 되는 것이다. 중국을 키우는 책임이 동국에게 있는데, 중국을 버린다는 것은 동국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스스로 중국을 망치는 것이다.

是所謂棄蘇合之香而取螗螂之丸也는 ‘이는 이른바 소합향을 버리고 당랑환을 취하는 것이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棄 ~ 取 ~’는 ‘~을 버리고 ~을 취하다’로서 어떤 사물을 버리고 어떤 사물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지, 어떤 사물이 어떤 것에서 어떤 것으로 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사람이) 금덩이를 버리고 돌멩이를 취하다’와 같은 문장구조이다. 그런데, 기존의 해석대로라면 ‘동국이 중화의 동국을 버리고 이적의 동국을 취하다’라는 말이 되어, ‘(어떤 덩어리가) 금덩이를 버리고 돌멩이를 취하다’는 말과 같아서, 말도 안 되는 말이 되어버린다. 중화에 비견되는 동국이 이적과 같은 동국으로 되는 것은, 변變하는 것이지 버리고 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동국이 중화의 중국을 버리고 이적의 중국을 취하다’라고 해석해야 되는 것이다.

요즈음, ‘다문화多文化’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 상소문에도 나오지만 동양에서의 문화(culture)에 해당하는 용어는 문물예악文物禮樂(禮樂文物)이다. 지금은, 문화文化(culture)와 문명文明을 같은 뜻으로 보고 있고 경우에 따라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명은 문물예악(culture)이 이상적인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문명은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하나일 뿐이다. 이런 문명 저런 문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culture, 문물예악)라는 것은 문명을 지향志向하는 것이므로 ‘다多 문화文化’가 될 수 없고 문명에 이르는 과정 중에 하나일 뿐이다. 사실, 다문화多文化라 할 때의 문화에 해당하는 단어는 ‘풍기風氣’이다. 풍기는 풍습風習과 기습氣習을 합한 단어인데, 풍습은 자연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아 특징적인 습관을 띠는 것을 가리키고, 기습은 신체적인 특성에 의해 특징적인 습관(성격)을 띠는 것을 가리킨다. 또, 풍속風俗은 중국의 풍습을 가리키는 단어이지 아무 곳에나 쓰는 말이 아니다.

이 상소문이나 여러 문헌에 따르면, 문명이란 중국이 중화의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하는데, 그 중화를 구분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동문동궤이다. 그 동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자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최만리 등의 주장이다.

1항은 언문운서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고, 2항은 언문운서가 중국에 내려감으로서 중국에 두 가지의 문자가 존재하게 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1항과 2항은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가는 것에 대한 반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3항과 4항은 훈민정음과는 관계가 없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세종은 언문을 이용하여 두 가지의 정책을 펼치는데, 하나는 한자의 발음표기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문서公文書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자의 발음표기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훈민정음인데, 세종은 단순히 한자의 발음표기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운서의 편찬방식을 바꾸어 버리는데 이를 논한 것이 1항이다. 그리고, 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한다는 것은, 이두를 대체하여 이두 대신 언문을 사용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논한 것이 3항과 4항이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훈민정음과 이두대체표기(공문서 표기)를 하나로 보고 있는데,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한글을 한자음표기와 공문서 표기에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분명히 훈민정음과 이두대체표기는 서로 별개로서, 언문을 이용한 두 개의 정책인 것이다.

이 3항은 언뜻 보면 동국에 대한 얘기인지 중국에 대한 얘기인지 알기 어렵다. 기존에 배워오던 지식대로, 동국에 대한 얘기로 보기 쉽다. 동국에 대한 얘기로 봐도 무리가 없고, 중국에 대한 얘기로 봐도 해석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전체가 다 중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중국에 내려 보내면서, 중국의 공문서에 언문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 언문을 이용한 훈민정음이 중국에 펼쳐지는 것이므로, 똑 같은 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는 것도 중국에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항과 2항은 중국에 대해서이고 3항은 동국에 대한 정책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3항도 중국에 대한 얘기이다. 왜냐하면, 4항이 중국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3항을 보충, 부연하고 있는 4항이 중국에 대한 얘기이므로 3항도 당연히 중국에 대한 얘기이다. 따라서, 3항은 중국에 대한 얘기라는 전제하에 해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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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新羅薜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1. 신라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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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항은 ‘吏讀’와 ‘鄙俚’부터 그 뜻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데, 기존의 해석은 시작부터 헤매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한자로 우리말(한국어)을 표기하는 방법’을 가리켜 이두라 한다. 그런데, 이두吏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두는 이吏와 두讀의 합성어로서 ‘관리’와 ‘읽기’의 뜻이 합해진 것이다. 여기서의 吏는 일반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관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讀는 표의表意가 아닌 표음表音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두는 말단관리가 일반 백성을 상대로 공문서에 기록하는 표기법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 백성은 문자(한문)를 모르므로 어음(자연어)을 사용하는데, 이 자연어를 한자로 공문서에 기록하는 것을 이두라 하는 것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무식한 백성에게 한문을 익히게 하는 것(일부러 익히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보다 치자가 백성에 맞추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것이 바로 이두인 것이다.

이두 역시 중국에 내려졌다.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졌다면 이두 역시 중국에 내려진 것이 맞다.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니 정립했니 말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설총이 이두를 중국에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동국에 이미 있었던 언문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내려 보낸 것처럼, 동국에 이미 있었던 이두를 중국에 내려 보내는 일을 담당한 장본인이 설총인 것이다. 이를,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고 오해한 것이다. 한글을 세종이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것과 똑 같다.

鄙俚는 비어鄙語와 리어俚語의 합성어이다. 鄙나 俚는 ‘일반 백성의 것’을 가리키는 글자로서, 비어鄙語는 중국의 일반 백성의 어음을, 리어俚語는 동국의 일반 백성의 어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라고 해석하여, 이두와 이언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하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는데, 이두는 이언俚言이 아니라 ‘이언을 표기하는 표기법’을 가리킨다. ‘신라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비어와 리어(를 표기하는 것)이지만, 모두 공식문자(중국통행지자)를 빌어서 어조(어음을 한자로 표기할 때에 음차나 토씨 등)에 사용하였기에, 문자(한문)와 원래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므로’라고 해석해야 한다.

최만리 등이 한자(문자)를 ‘중국통행지자中國通行之字, 중국통행지문자中國通行之文字’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한자漢字만이 천하(중국)에서 통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널리 통행하는 문자를 공식문자로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인위적으로 특정한 지방어를 표준어로 강요하는 경우가 있고, 자연적으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를 표준어로 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최만리 등의 태도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국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언문을 중국(천하)에 퍼뜨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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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我國, 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可, 而執正議者必曰: “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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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해석을 잘해야 한다. ‘若我國 ~ 以爲久長之計也’는 언문을 한문 보다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통행지문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동국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중국에 대한 얘기이다. 또, 이른바 사대주의에 젖어 중국의 것을 따라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화의 당사자인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동국인東國人이므로 아국我國(東國)을 예로 들어 중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다. 동국의 정체성은, 동국은 한반도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언문이 동국에만 있고 동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문장을 쓴 것이다. 후세의 우리들을 위해 ‘언문은 동국에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 ‘결승의 세대라면 언문을 빌 수 있다’는 말은 언문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비유이지, 언문이 지금 막 창제된 글자라면 쓸 수 없는 말이다. 문자(한자, 중국통행지문자)가 없는 결승의 세대라는 것은 ‘미개한 원시’의 상태를 말하는데, 그러한 비문명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언문을 쓸 수 있다는 비유는, 언문이 동국에서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지금 막 임금이 만들어낸 문자(언문)를 결승에 비교하고 중국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로 반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종이 언문으로 이두를 대체하려고 하니, 중국통행의 문자이면서 시행한지 오래된 이두를 놔두고, 중국통행의 문자가 아닌 언문을 왜 사용하느냐고 최만리 등이 따지는 것이다. 이 부분의 올바른 해석은 이러하다. ‘동국이 문자가 없다면, 동국에서만 통행하는 언문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중국통행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옳은데, 하물며 중국이야 중국통행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따라서, 언문이 중국에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최만리 등은 동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국을 예로 들어 중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국이 문자가 없다면 임시로 언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언문이 동국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 지금 언문이 창제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라며 가정을 하고 있는 것은, 4항에서처럼 동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과 최만리 등이 동국인이므로 직접 몸으로 겪는 동국의 경우를, 예로 든 것뿐이다.

이 부분의 요점은, 천하의 중심인 중국에서 통용되는 것이냐 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냐의 문제이다. 언문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통용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국은 한쪽에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천하와 함께 하므로, 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문자를 사용하면 안 되고, 온 천하가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문漢文(한자漢字)이다. 우리는 백 년 동안 중국통행의 문자를 한문이라 배워왔지만, 이 상소문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여러 운서, 훈몽자회 등에서는 모두 일관되게 ‘문자文字’라 호칭하고 있다. 또한, 한문을 남의 것이라 여기는 태도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이라 여기고 있다. 이는, 우리가 한문을 남의 것 즉, 중국의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중국을 ‘남의 나라’로 여기지 않고 ‘내 나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문漢文, 한자漢字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어느 곳에서부터 사용되었는지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의 추정으로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의 침략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실록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실록의 변조를 의심하게 하는 여러 증거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세종이 이두를 대체하여 언문만을 사용하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부분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최만리 등은 언문이 이두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세종이 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겠다는 것은 이두를 대체하겠다는 것 말고는 없다. 4항에도 나와 있듯이, 세종이 이두 대신 언문을 사용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두와 언문을 함께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언문만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別創鄙諺無益之字乎를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로 해석하고 있는데, ‘(비어와 언어를 표기하는 이두가 있음에도) 따로 비어鄙語와 언어諺語의(를 표기하는) 무익한 글자를 시행(시작)합니까.’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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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行諺文, 則爲吏者專習諺文, 不顧學問文字, 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 “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家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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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七字諺文’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학계는 별 생각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훈민정음은 28자이다. 그런데, 이 상소문에서는 27자라 말하고 있다. 어찌 된 일일까? 그럼, 처음에는 27자였는데 반포시에 28자로 늘어났는가? 훈민정음 예의편은 세종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작성시기는 반포시가 아니라 1443년 12월로 보는 것이 맞다. 이 예의편을 바탕으로 하여 해례본이 완성된 것이고 1443년 12월의 기사가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1443년 12월부터 28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실록 편찬자나 사관이 상소문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기誤記한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1444년 2월의 사초를 기록한 사관이 정보부족으로 오기를 하였다 하더라도, 실록 편찬 과정에서 수정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또, 실록의 편찬은 세종의 사후인 145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 때에는 28자의 훈민정음을 27자로 잘못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으므로, 편찬자의 오기가 있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27자’는 이 상소문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상소문에 27자라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 최만리 등은 왜 28자가 아닌 27자라 하였는가? 고의로, 막말로 표현해서 임금을 물먹이기 위해 28자인 것을 알면서도 27자라 한 것인가? 최만리 등은 진지하게 세종을 설득하기 위해 이 상소를 하게 된 것이라, 임금인 세종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 또, 상소문 후기에도 나오듯이, 임금과 신하의 구별은 엄격하므로 신하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언행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 상소문에서도 최만리 등이 아주 공손한 표현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신의 임금이 창제한 문자에 대하여 ‘야비하고 상스러운’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고의로 28자를 27자라 말한 것은 아니다.

고의가 아니면 실수일까? 이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은 일곱 명이나 된다.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일곱 명이 모두 한번 씩 읽어 봤을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일곱 명 모두가 실수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는가? 또, 임금이 친히 창안한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그 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이 상소를 올린다는 것, 한두 명도 아닌 일곱 명 모두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상소를 올린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상소 후기에도, 세종은 다른 사항에 반론하고 있고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는 말에 발끈하고 있음에도,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28자이냐 27자이냐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 그러한 것인가?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였다면 28자이냐 27자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신하가 상소를 하면서 자신의 임금이 만든 문자의 개수가 얼마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28자이냐 27자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며, 최만리 등은 언문이 27자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언문은 27자인데 세종이 한 자를 추가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대의 중국어 발음표기를 위해 한글을 이용한 연구들이 있었는데, 모두 새로운 자음을 추가하고 있다. 한글을 외국어 표기에 사용할 때, 모음은 거의 손대지 않지만 자음은 손대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언문 27자를 한자발음표기에 사용하기 위해, 기존의 27자 외에 새로운 자음을 추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학계는 여기의 ‘27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27자라는 말은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도 등장한다. 훈몽자회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었다. 27자에 대한 말은 ‘언문자모’에 대한 주註에 나오는 말이다.

-언문자모諺文字母 <속소위반절俗所謂反切, 이십칠자二十七字> {훈몽자회 범례}

이 훈몽자회에서는 마치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훈민정음 반포 후 80여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인데, 훈민정음에는 없던 자음의 이름들이 정해져 있고 자모의 순서도 훈민정음과 다르다. 또, 28자에서 27자로 줄어들어 있다. 임금인 세종이 훈민정음에서 정해 놓은 것들을 별다른 이유나 과정도 없이, 흔적도 없이 변경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모아진 학계의 설은, 최세진이 독단적으로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정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진 것이며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최세진은 동국에서 계속 사용되던 언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알던 모르던 훈민정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언문에 익숙해 있고 훈민정음과 언문이 별다를 게 없으므로, 훈민정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문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훈몽자회의 자모 순서나 자음의 이름 등은, 훈민정음 이전부터 존재했던 언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훈몽자회에서 보이지 않는 ‘여린히읗’이 세종이 직접 창제한 글자라 할 수 있다. ‘여린히읗’은 오로지 한자음표기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자음표기를 위해 언문을 이용한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새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여린히읗’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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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 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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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는 ‘有識者 尙且鄙之思, 欲以吏文易之’로 보아야 하고, 그 해석은 ‘(이두를)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또 비어라 하여(비어라는 생각으로), 이문으로써 (이두를) 바꾸고자 하는데’가 되는 것이다. 즉, 이두는 자연어(어음)인 비어를 한자로 공문서에 기록하기 위한 표기법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이문吏文은 무엇일까? 이문 역시 공문서에 기록하기 위한 표기법이다. 일반적인 한문과 이문의 한문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으나, 이두와 이문이 서로 다른 것임을 여기서는 밝히고 있다. 지금 학계는, 이두는 한국어 표기를 위한 것이고 이문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쓰이던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두나 이문 둘 다 동국과 중국 모두에서 함께 쓰였던 것이다. 비록, 나중에는 민간에서도 널리 쓰였지만 이두라는 말 자체의 뜻은 관용官用이다.

생각건대, 이두는 자연어를 한자로 공문서에 기록하는 것이라 지역과 방언에 따라 표기가 달라진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지역에 따라 표기법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두는 일반백성을 직접 상대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사투리가 그대로 담긴다. 그런데,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각 지역의 일을 취합聚合할 것인데, 사투리로 표기된 것을 그대로 취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한문과 이두의 중간 형태의 표기법을 개발한 것이 바로 이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에 따라 무궁화를 근화, 목근화, 순화, 훈화초 등으로 부를 때, 이를 표준어화標準語化한 ‘무궁화’로 기록하는 것이 이문이 되는 것이다.

이두를 이문으로 바꾸고자 한다는 것은, 이두를 낮잡아 보고 이문을 높게 보아서가 아니라, 이두는 지역성을 띠는 것이고 이문은 전체성을 띠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의 머릿속에 항상 들어 있는 것은, 1항에서도 동문동궤를 언급하고 있듯이,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천하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또 하나, 문명文明은 표의문자인 한문에 의해 이루어지지, 표음문자인 이두나 언문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최만리 등이 현재와 같은 개념으로서의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를 구별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문자(한문)와 관계가 없는데다가, 한 지역인 동국에서만 사용되는 언문이기에, 중국(천하)에 언문이 내려가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것이다.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개의 문제이고, 세종의 언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논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혹자는, ‘其字倣古篆, 字形雖倣古之篆文, 象形而字倣古篆’의 전篆을 한자의 서체인 전서篆書라고 하면서,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의 제자원리가 한자의 제자원리인 육서법六書法을 모방한 것이라느니, 한자의 필획筆劃을 따온 것이라느니, 상상력이 풍부한 얘기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고, 여기에서도 최만리 등이 ‘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이라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한글과 한자는 아무 관계가 없다.

‘專用委巷俚語者乎’의 전용專用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혼자서만 씀(대통령 전용 비행기), 오직 그것만을 씀(한글 전용), 어떤 부문에만 한하여 씀(버스 전용 차선)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꼬불꼬불한 좁은 길이나 좁은 골목길’이라는 뜻인데 즉, 민간民間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고, 리어자俚語者는 ‘리어俚語를 쓰는 자者’라는 뜻으로서 동국 사람을 가리킨다. 정리하면, 專用委巷俚語者乎는 ‘위항의 리어자가 전용합니다, 민간의 리어를 쓰는 자만이 사용합니다, 동국의 일반백성들만이 사용합니다’가 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설사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라고 해석된다고 치자. 이게 무슨 말인가? 필자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언문을 창제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어 표기를 위해 언문을 창제했는데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라니, 그것도 ‘오로지’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언문이 동국에서 한창 잘 사용되고 있다고,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학자라는 이들은, 눈 감는 순간 까지도 양심을 팔려 할 것이다. 이것 보다 얼마나 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야,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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借使諺文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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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도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역시나 꽉 막힌 학자라는 이들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의 차사借使는 ‘가령假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령 언문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라고 해석을 하고 있으면서도, ‘가령假令’은 가정假定이기 때문에 ‘언문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가 아니라 한다. 가정假定은 ‘가짜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實際가 아니므로,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세종이 창제한 것이 맞다고 말한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 ‘유치원부터 다시 다녀라’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가정假定은 ‘(어떤 일을 실제와는 관계 없이) 임시로 정함, (일정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떤 조건을) 임시로 내세움,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임시로 인정함’이라는 뜻이라 설명하고 있다. 즉, 가정한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借使(가령)’가 들어있는 문장이라 하여 그 문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실제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실제인지 아닌지를 그 문장 내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앞뒤의 문맥을 살펴 왜 그러한 가정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그 가정이 사실로서 정한 것인지 거짓으로서 정한 것인지를 결론 내어야 하는 것이다.

3항은 언문을 이두 대신 공문서에 사용하겠다는 세종의 뜻에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종이나 최만리 등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이 보편적 가치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사대모화와 옛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등은 이 상소문 전체에서 계속, 세종의 언문정책이 사대모화와 옛것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항에서도 역시, 공문서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사대모화와 옛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통행의 문자가 아닌 동국의 언문을 천하에 퍼뜨리는 것은, 동문동궤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사대모화에 위배되고, 이미 옛것이 된 이두를 대체하여 새로이 언문을 시행하는 것은, 옛것에 위배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바로 뒤에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옛것에 위배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상소문은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이다. 우리가 서로 어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에,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그에 대해 반론을 하면, 상대방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계속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런 논쟁의 과정에서, 자신이 주장을 펼치는 순서에서, 상대방의 반론을 미리 예측하여, 가정법假定法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반론을 미리 막아버리는 논쟁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을 사용한 것이 바로 ‘借使諺文自前朝有之’이다.

최만리 등이 생각하기를, 자신들이 옛것을 논리로 하여 언문정책을 반대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를 세종이 잘못 이해하고, ‘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는 정책’이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언문정책이 옛것이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므로, 그것을 미리 예측하여 반론을 전개 한 것이 바로 ‘借使諺文自前朝有之 ~ 此灼然可知之理也’이다. 따라서,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는 ‘가령 언문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 (말)한다면’이 되는 것이다. 즉, ‘가령’은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종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借使諺文自前朝有之’는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언문정책(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는 정책)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라는 뜻이다. 즉,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언문정책도 고려 때 이미 시행했었다는 것이다. 시도에 그친 것인지 시행이 됐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 구절은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언문정책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분명하게 다시 말하지만, 3항은 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로서, 언문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이두를 대체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借使諺文自前朝有之’가 기존의 주장대로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를 가정하는 것이고 또, 가정을 한 것이기에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종이 창제한 것’이라면, 바로 뒤에 따라 오는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부분을 알기 쉽게 의역하여 설명하면 ‘오늘날의 문명시대에는 법치가 이루어지도록 힘을 쓰는데, 오히려 위법적인 것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합니까. 반드시 법개정의 여론이 일어날 것이라, 이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가 된다. 이는, 최만리 등이 고려 때의 언문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때의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데, 최만리 등은 ‘실패한 정책(잘못된 정책)’을 다시 시행하려는 것은 잘못이라, 반드시 고치고자 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지금 바로 창제한 언문을 두고, 잘못된 것을 따라 하려고 하느냐며 따지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은, 분명히 언문정책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변로지도變魯至道는 ‘선왕의 유풍은 있는데, 그것이 행하여지지 않던 노나라를 변화시켜 도에 이르게 한다.’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인데, 이를 비유하여 쉽게 설명하면 ‘법대로 안하던 것을 법대로 하는 것’을 뜻한다. 요즘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만들어 놓기만 했지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법들 즉, 유명무실有名無實한 법률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따라서, 變魯至道之意는 제대로 법을 행하려는 의지意志를 말한다. 정리하면,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는 ‘비문명 즉,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는 시대가 아닌, 문명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는, 제대로 법을 행하려고 힘쓰는데, 오히려 불법(因循)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합니까?’라는 뜻이다.

이 ‘以今日 ~ 之理也’의 요점은 ‘잘못된 것을 따라하면 안 된다’이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했다는데, 뜬금없이 고려가 어쩌구저쩌구 하며 가정법을 쓰지 않나, 그 가정한 일이 잘못된 것이라 확언을 하고, 따라하면 안 된다 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대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以今日 ~ 之理也’는 ‘고려 때 시행된 잘못된 언문정책을 지금 다시 따라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결론은 확실하다. ‘세종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지, ‘고려 때부터 있었다’를 가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고 언문정책도 고려 때 이미 시행됐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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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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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언문이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역시 언문28자 그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언문정책에 대한 평가이다.

이제 4항을 살펴 볼 차례이다. 이 4항은 3항을 보충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4항 전체가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즉, 언문정책을 펴는 대상이 중국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4항은 훈민정음이나 이두가 중국에 내려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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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然自古中國言與文同, 獄訟之間, 冤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棰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冤也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1.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㶈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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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항을 이해하기 쉽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 3항은 언문정책(이두대체표기)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고, 이 4항은 세종이 언문정책의 타당성을 구체적인 한 예를 들어 주장한 것에 대해, 최만리 등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첫 부분에 세종의 주장이 나와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최만리 등의 반박이 되는 것이고, 세 번째 부분은 그 반박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ㄱ.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㶈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ㄴ. 然自古中國言與文同, 獄訟之間, 冤枉甚多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ㄷ.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棰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冤也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그런데, 역시나 학자라는 이들은, 이 뻔하고 쉬운 내용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다. 아니, 눈을 감고 있다. 이렇게 쉬운 내용을 가지고, 초등학교만 나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훈민정음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에 인용된 4항의 해석은, 굳이 따로 손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해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석된 내용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 스스로, 이렇게 제대로 잘 해석을 해놓고도, 그 내용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는 명백히 고의적인 역사왜곡이다.

ㄱ항은 세종의 주장으로서, 이두를 대체하여 언문을 사용하면, 언여문부동言與文不同으로 인해 발생하는 억울한 옥사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ㄴ항은 그 세종의 주장에 대한 최만리 등의 반박으로서, 언과 문이 같아도(言與文同) 억울한 옥사가 아주 많다는 주장이다. ㄷ항은 반박의 타당성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옥사의 억울함이 언과 문의 같고 같지 않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옥리가 어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니, 이두를 언문으로 대체하더라도 옥사의 억울함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사실, 최만리 등의 이 주장은 상당히 옳다.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얼마 전까지도 ‘강압수사, 고문수사’가 문제 됐었는데, 독재정부나 군사독재시절에는 사법기관에 의해 억울한 죽음이나 옥사가 많았었다. 그런 억울한 일이 조서의 글을 읽지 못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강압과 고문에 의해 자백을 하고, 그 자백이 중요한 증거로 인정되어 억울한 옥사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과연, 조서의 내용을 잘못 알아서 생기는 억울한 옥사가 얼마나 될까? 또, 사법기관의 사람들이 친절하다면, 피고가 글을 몰라 조서의 내용을 오해하여 억울한 상황에 빠져, 진술을 번복할 시에 이를 무시하고 억울함을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당수의 사람들이, ‘然自古中國言與文同’의 ‘言與文同’을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뜻으로 오해하고 있다. 언여문동言與文同의 언言은 종이에 써진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가리키고, 문文은 종이에 써진 글을 가리킨다. 즉, ‘조서에 기록된 사실’과 ‘조서를 소리 내어 읽었을 때의 사실’이 서로 일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서에는 ‘죄를 인정하는 내용’을 기록해 놓고, 글을 모르는 피고에게는 ‘죄를 부정하는 내용’을 읽어주어, 조서에 수결(서명)하게 하여 억울한 옥사를 만드는 것, 이것이 세종이 걱정하는 ‘글을 몰라서 발생하는 억울한 옥사’이다. 그러나, 최만리 등은 글을 몰라서 억울한 옥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옥리의 불친절함, 강압과 고문이 억울한 옥사를 만드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제 정말로 중요한 얘기를 해보자.

4항의 ㄱ항은, 세종이 옥사를 그 예로 들어 언문정책의 타당성을 주장한 것인데, 동국에 대한 얘기인지 중국에 대한 얘기인지 알 수 없다. 기존의 지식대로 보자면, 이두는 우리나라의 말을 언문일치적으로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이용한 표기법이므로, ㄱ항은 동국에 대한 얘기이다. 그런데, 만약 4항이 중국에 대한 얘기라면, ㄱ항에서 언급된 이두는 동국의 이두가 아니라 중국의 이두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훈민정음뿐만 아니라 이두도 중국에 내려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두를 내려 보낸 사람이 설총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ㄴ항과 ㄷ항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물을 설명說明할 때,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과 설명하는 부분에서, 설명 대상은 앞에 오고 설명하는 부분은 뒤에 온다. 또, 설명의 대상은 짧고 설명하는 부분은 길다. 혹여 일부러 시선을 끌기 위해 도치법을 쓰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설명을 하고 설명 대상을 뒤에 놓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도치倒置는 어떤 문장에서 어순을 바꾸는 식으로 쓰이지, 설명 대상과 설명을 도치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해야지만 설명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 편하고, 설명 대상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따라서, 설명 대상과 설명하는 부분을 도치하는 경우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ㄴ항은 앞에 오면서 짧고 ㄷ항은 뒤에 오면서 길다.

그러므로, ㄴ항이 설명 대상이고, ㄷ항은 ㄴ항을 설명하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ㄴ항은 세종의 주장인 ㄱ항에 대한 반박으로서, ‘언여문동言與文同’이라도 억울한 옥사가 많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ㄷ항은 ㄴ항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된다. ㄴ항이 설명 대상이라는 것은, 세종의 주장인 ㄱ항에 대한 반론이 ㄷ항이 아니고 ㄴ항이라는 것이다.

ㄱ항에 대한 반론이 ㄴ항이라는 말은, 세종과 최만리 등이 서로 다투고 있는 언문정책의 대상이, ㄷ항이 아닌 ㄴ항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ㄴ항은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라는 뜻인데, ‘중국은 ~ 많습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함으로서, 언문정책의 대상이 중국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또, ㄷ항은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라고 시작하여, ㄷ항이 예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ㄷ항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들어 놓은 것이 ㄴ항이라 착각하고 있다. 이른바 사대주의에 빠진 최만리 등이, ‘중국 모방하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를 먼저 설명하고, 우리나라의 사정도 중국과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ㄴ항은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이 아니다. 말과 글이 같아도 중국은 옥사에 원왕한 것이 많다라고 단정하고 있을 뿐, 왜 원왕한 것이 많은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즉, 중국의 원왕한 것이 많은 이유를 설명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동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한 ㄷ항이다. 언문정책의 대상이 중국이라는 것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굳이 필자가 이렇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딱 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마치 세상 사람들 모두가 집단최면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니, 집단최면에 빠져 있다. 이 원인은, 일제와 그 하수인의 역사왜곡 때문이다. 왜곡된 역사지식으로 인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수학 공식을 증명하듯이 ㄴ항이 설명 대상이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냥 읽어보면 어느 것이 대상이고 어느 것이 설명인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꽉 막힌 저들의 철옹성에 조금이나마 흠집을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세종과 최만리 등은 항상 중국에 대해 정치를 하기 때문에, 중국이 남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굳이 정책의 대상이 중국임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세종의 주장인 ㄱ항은 중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왜 최만리 등은 중국임을 밝힌 것인가? 그 이유는 최만리 등의 친절함 때문이다.

최만리 등이 ㄴ항에서 중국을 언급한 것은 ㄷ항 때문이다. 세종이 ‘이두를 대체하여 언문을 사용하면 (중국의) 옥사에서 억울함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였을 때, 최만리 등도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ㄴ항에 대한 설명을 함에 있어서, 정책의 대상이 중국이므로, ㄷ항에서도 만약 중국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면, ㄴ항과 ㄷ항에서 중국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4항이 중국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최만리 등은, 세종과 최만리 등은 동국인이며 동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비록 세종과 최만리 등이 중국을 다스리고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중국은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기에, 세종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동국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중국의 일을 같은 중국의 일로써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설명을 듣는 세종이 동국인이므로 중국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지 않고, 동국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ㄷ항이 동국의 일을 예로 든 것이므로 ㄴ항에서 ‘중국’을 명시明示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종과 최만리 등이 서로 언문정책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데, 그 정책의 시행지施行地가 중국 즉, 천하天下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실(fact)이다. 그렇다면, 언문정책만 그러하겠는가? 동국의 정치행위 모두가 중국에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특별히 동국을 언급하고 동국에만 시행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 한 조선왕조 즉, 조정朝廷(天朝, 本朝)의 모든 정치행위는 천하에 행해진 것이다. 대륙조선론자들이 헤매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동국의 정체를 모르고 동국과 중국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왕들이 중국의 왕이라 말하고 중국이 본조라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왕들은 동국의 왕이다. 동국이 중국을 통해 천하(조선)를 다스리는 것이다. 한반도가 동국이며 별지別地(天國)인 것이다. 중국이 천하를 다스리는데, 그 중국의 본국本國이 동국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다. 동국이 동아시아의 교황국敎皇國, 더 과거에는 아시아의 교황국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진 것이라는 사실(fact)은 이 4항 하나만 가지고도 증명되는데, 하늘이 두 쪽 나고 천지가 새로 개벽하더라도 이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필자는 이 4항의 올바른 해석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의 정체나 시행지施行地를 밝혀낸 것이 아니다. 세종의 친필인 훈민정음서문을 해석하고 그 해석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 이 상소문을 해석하게 된 것이다. 1·2·5·6항은 그 번역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올바른 번역과 해석을 할 수 있었지만, 3·4항은 해석에 난항難航을 겪었다. 3항은 그런대로 중국에 대한 얘기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지만, 4항은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아도, 자의적인 해석까지 시도해보았지만 중국에 대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중국에 내려진 것이지만 이두대체표기는 동국에 시행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4항의 ㄴ항과 ㄷ항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깨달은 것은, 4항은 번역에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1·2·3·5·6항은 번역부터 잘못되었지만, 4항은 올바른 번역이었으나, 선입견에 의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4항도 다른 항들처럼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 여긴 필자의 실수였다. 그래서, 번역에만 눈이 팔려 4항 전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서문과 상소문을 해석하면서, 필자의 해석이 옳은지 자의적인 것은 아닌지, 수십 번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지만, 이 4항을 올바로 해석하게 되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4항이 중국에 대한 얘기라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그리고, 세종이 문맹퇴치에 힘을 썼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글의 성격상 많이 언급되지는 못했지만, 배우고 익히기에 쉽고 사용하기 편한 언문을, 널리 보급하려 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훈민정음이 문맹퇴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뿐이다. 문맹퇴치에 사용한 것은 훈민정음이 아니라 언문이다. 사실상 훈민정음과 언문이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둘은 별개의 것이다. 중국에서 훈민정음을 반절이라 한 것으로 보아, 훈민정음이 중국에서 사용된 것은 분명하나 즉, 훈민정음이 한자의 발음표기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나, 중국에서 이두를 대체하여 훈민정음이 사용되었는지, 사용되었으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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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 下至百僚國人, 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1.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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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항은 절차에 대한 시비이다. 언문정책은 풍속을 변하게 하는 일이므로, 임금 혼자 독단으로 결정하지 말고 모두의 의견을 모아 신중히 시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신중함이 지나치다 싶기도 하다. 의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도 부족하여 질문하고 상고하고도 백세를 기다린다니,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임은 분명한 것 같다. 여기서도, 모든 중국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동국이 부모이고 중국이 자식임을 알 수 있다.

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를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으로 번역하여, 세종이 언문을 창제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여기의 爲는 ‘만들다’가 아니라 ‘시행하다’이다. 이 부분의 번역은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이 시행하는 것이라 한다면’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풍속風俗’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역시 그 뜻이 왜곡돼 있다. 속俗이 중국을 가리키므로 풍속은 ‘중국의 풍습風習’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는 풍속風俗을 풍습風習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동국의 역사를 잃어버려,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다른 뜻으로 쓰이는 단어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다. 중국中國, 천하天下, 세상世上, 속세俗世는 엄밀히 따지면 그 뜻이 서로 다르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중국이고 천하가 바로 세상이며 세상을 속세라 부르기도 하므로, ‘중국=천하=세상=속세’가 되는 것이다.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는 동국의 정체와 지위地位,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문장으로서, ‘모든 제왕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모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라는 뜻이다.

질質은 질정質正이란 말로서 뜻이 ‘질문質問하여 바로잡다’인데, 질質과 문問은 어떻게 다를까? 훈訓과 교敎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훈은 바른 기준에 의거하여 가르치는 것 즉, 바로잡다는 뜻이고, 교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것 즉, 알려주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질은 바른 기준에 의거하여 물어보는 것이고, 문은 새로운 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동차의 사용법을 물어보는 것은 問이고 교통법규를 물어보는 것은 質이다. 패悖는 패륜悖倫, 패자역손悖子逆孫처럼 정正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질제제왕이불패는 모든 제왕에게 질문하여 정正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의 ‘제왕帝王’은 무엇일까? 제帝와 왕王의 합성어 즉, 황제와 국왕을 아울러 이르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중국의 모든 황제와 동국의 모든 왕에게 물어본다는 뜻이 되어, 뒤 구절의 중국에 상고하는 것과 중복이 된다. 또, 동국의 모든 왕에게 물어보든지 중국의 모든 왕에게 물어보든지, 둘 중의 하나에게 물어봐야지, 상국인 중국의 황제에게 물어보면서 동시에 하국인 동국의 왕에게 물어보는 것은, 위계질서에 어긋난다. 이 부분은, 앞뒤 구절이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어 글자 개수부터 문장의 구조까지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데, 뒤 구절에서 ‘중국’이라 하였으니 ‘제왕’은 합성어가 아닌 한 개의 단어가 된다. 지금의 우리는 역사왜곡으로 인해 ‘제왕’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제와 왕의 합성어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삼신제왕三神帝王=삼신상제三神上帝=옥황상제玉皇上帝’에서 알 수 있듯이, 제왕은 천제天帝 즉, 하느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제왕일까? 중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일까? 기존의 지식대로 보자면,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황제를 천자天子라 하여 가장 높은 지위로 여기지만, 뒤 구절에서 중국에 상고한다 하였으니 여기의 제왕이 중국의 황제는 아니다. 문맥상으로 파악해도 중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너무 뻔하다. 이 상소문은 세종과 최만리 등의 다툼인데, 그들은 동국인이며 동국의 왕이고 동국의 신하이다. 즉, 동국의 왕을 가리키는 단어가 제왕帝王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필자가 직접 살펴보지 못했다. 다만,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요점만을 잠깐 읽어보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역시나 제왕운기의 내용을 엉터리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고의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거나, ‘제왕운기의 구성은 중국사, 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하여, 중국 동쪽에 독립된 고려 왕조가 존재함을 적었다. 우리 민족은 하늘(천 天)과 연결되는 단군(檀君)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다. 드디어 단군신화를 한국사 체계 속에 당당히 포함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강조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립된 국가이며 민족이라면서, 당시의 중국인 몽골에 반발하는 심리가 담겼다면서, 중국사를 시작부터 당시까지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제왕운기의 구성이 왜 그렇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사대주의와 민족주의가 함께 담겨있다나. 어떤 이는 민족주의가 담겼다하고 어떤 이는 사대주의적인 저서라 말하고 있다. 이제 이 글을 읽어봤다면, 제왕운기가 왜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지, 필자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믿는다. 제왕운기도 역시, 중국을 남의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며, 중국이 세상이고 동국은 탈속脫俗이기에, 동국의 정체성이 중국을 키우는 것이기에 그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국인 동국의 조정이 본조本朝이며 본국의 군왕이 제왕임을 말해주고 있다.

혹자는 아직도 제왕이 제와 왕의 합성어라 믿고 싶을 것이다. 제제왕諸帝王은 뒤 구절의 제중국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제중국諸中國은 역대중국개歷代中國皆와 같은 말이다. 천하에 중국은 하나만이 존재하지 여러 개의 중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위진남북조와 같은 시대가 있었지만, 이는 중국이 분열된 것이지 두 개의 중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제중국의 諸는 공간적인 의미가 아닌 시간적인 의미로서 歷代를 가리킨다. 따라서, 뒤 구절의 제중국과 대구를 이루고 있는 제제왕諸帝王도 시간적인 의미로서, 역대제왕개歷代帝王皆와 같은 말이 되고, 이는 동국의 역대 제왕을 가리킨다. 혹자는 뒤 구절이 시간적 의미이므로, 대구를 이루는 앞 구절은 공간적 의미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의 제왕은 중국의 황제와 동국의 왕을 가리키는데, 한글을 창제하면서 중국의 황제에게 질정하고 세종 자신에게 질정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아무리 대국이라지만 중국은 남의 나라이다.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닌, 중국의 황제에게 질정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세종이 자기자신에게 질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중국의 황제와 동국의 왕, 둘을 가리켜 諸라고 하는 것도 어색한 표현이 된다. 즉, 황제와 왕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꼴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식으로 해석하더라도 제왕은 동국의 왕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동국의 왕인 세종이 천제天帝(天父, 하느님)이고 중국의 왕이 천자天子(하늘아들)라는 것을, 동국이 천국天國이며 선계仙界이고 중국은 천하天下이며 속세俗世라는 것을. 이것이 동국의 올바른 역사이다. 천국이 중국의 동쪽에 있기에 중국(천하)에서 동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동국이 있으니 서국西國도 있다는 엉터리 말만들기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고조선의 멸망으로 동국의 역사가 끝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 년 전까지 동국은 그 법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대 하느님을 모신 신전神殿이 바로 동국의 종묘宗廟인 것이다.

모든 제왕이란, 역대 왕조의 모든 제왕을 말하지 이씨왕조의 제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제왕에게 묻는다는 것은, 동국의 정체성에 합치하느냐를 묻는다는 것이다. 동국의 정체성 즉, 동국의 국시國是인 사대모화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패不悖라는 단어를 써서, 제제왕諸帝王과 세종의 관계가 상上과 하下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모든 제왕은 세종에게 있어 조상祖上(선조先祖)이고 세종은 그 후손後孫이므로 당연하다 할 것이다. ‘모든 제왕’은 기준 즉, 정正이므로, 그 기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고(考)하다는 ‘과거를 돌아보다’는 말인데, 모든 중국에 상고한다는 것은 중국의 역사를 살핀다는 뜻이다. 중국의 역사를 살핀다는 것은,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기 위해, 동국이 역대 중국에게 어떠한 일들을 해왔는지를 살펴, 이번의 일이 과거의 일들과 비교하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모가 자식을 키움에 있어, 지금까지는 일정수준 이상의 정성을 쏟았는데, 이제 그 수준에 맞는 정성을 쏟았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 역시, 사대모화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중국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1항의 사대모화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사대모화의 대상이 중국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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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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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항이 언문운서에 대한 반대 주장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단순히 언문을 한자발음표기에 이용한 것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운서 편찬 방식을 바꾸는 것(이미 이룩한 운서를 고치고)과 한자와 관계가 없는 언문을 한자발음표기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그리고, 운서를 고친다 함은 용음합자가 달라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해석에 중대한 착오가 있다. 엄연히 ‘천하天下(中國)에 광포廣布’한다고 나와 있는데, 모두가 장님이 돼버렸다. 天下를 단순히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하고 있다. 세상世上은 상황에 따라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정 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천하天下도 원래는 ‘온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특정 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니, 천하는 동방東方에서 ‘특정 사회’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쓰였다. 그런데, 그 특정사회는 오직 중국을 가리킨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천하라는 단어가 ‘중국대륙’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다는 말이다. 천하가 20c에 들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과거의 동방에서는 ‘중국대륙’을 가리키는 뜻으로만 쓰였다.

천하가 중국대륙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것을 필자가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필자는 지금까지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진 것이라는 등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글을 쓰고 있지만, 이번에는 학계에서 천하가 단순하게 ‘세상’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여, 한반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증명할 차례이다. 천하가 중국대륙을 가리킨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상식이므로, 한반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는 학자들이 증명해야 한다.

여기 5항에서 분명하게 천하(중국)에 광포한다고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의 역사왜곡으로 인해 학자들은 장님이 돼버렸다. 廣布를 한반도에 반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도량度量(scale)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는 ‘劇欲廣布其於天下, 後世公議何如’로 해석해야 한다. 그 뜻은 ‘급하게 그것을 천하에 광포하고자 하시니, 후세에 공의가 어떠하겠습니까’이다. 혹여,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로 해석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 널리 반포하였는데, 왜 천하에서 공의(공적인 여론)가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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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歉,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또한 이번 청주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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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으로서는 급할 수 있었겠지만, 최만리 등의 주장은 옳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세종의 의지대로 언문정책이 모두 시행됐지만, 그 결과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언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직 한반도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한글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세종 덕분이 아니다. 물론, 세종의 정책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한글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대중大衆 덕분이다. 지금 한글이 한국에만 있고 아주 활성화가 잘 된 이유가, 세종 때문이 아니라 대중 때문인 것이다. 즉, 대중 스스로 한글을 열심히 사용한 결과인 것이다.

설령, 언문이 세종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치자. 원시한글을 부정하는 혹자는, 세종 이전에 원시한글이 있었다면, 편하고 유용한 원시한글이 왜 세종 때까지 전해지지 않았겠느냐며 원시한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효율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나 정치상황 등에 따라 비효율적인 것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 우리나라가 한글을 퍼뜨리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데, 효율성을 따지자면 전 세계에 급속히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세종 이전에 원시한글이 있었다는 것을 효율성으로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무지한 견해이다. 그런데, 다행히 원시한글(언문)이 세종 이전부터 잘 사용되고 있었다 한다.

세종의 정책이 비록 실패라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의미한 일인가? 세종의 애민정신이 평가 절하될 수 있는가? 세종이 백성을 사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만리 등도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서 반대한 것은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최만리 등은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계책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종은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안목으로 백성을 사랑하려 한 것이다. 어쨌든,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동국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있어,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혹자는,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졌으면, 한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그 흔적이 왜 남아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오히려 되묻고 싶다. 지금 우리가 한글을 쓰고 있는 원인이 세종 덕분이라는 근거가 있는가? 중국대륙은 세종 이후에 명과 청이 교체되고, 동국과 중국(청나라)이 같은 시기(1910~1912)에 망하게 되고, 일제의 침략을 받고 사회주의를 비롯한 사상사의 변혁이 있었으며, 크고 작은 여러 전쟁을 겪었다. 또,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고 문화혁명이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동북공정을 비롯한 ‘동국사東國史지우기’와 역사왜곡이 있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세종의 언문정책이 당시에 얼마나 잘 시행되었는지도 의문인데, 거기다가 수많은 일들을 겪고 육백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세종이 언문정책 즉, 훈민정음과 언문표기(이두대체표기)를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까지도 우리나라(동국)는 언문표기 보다 이두표기가 더 많이 사용됐다. 이두를 대체하여 언문이 시행되었는데, 조선말까지 이두가 동국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두가 대세였다. 동국에서도 언문이 이두를 대체하지 못했는데, 중국에서 언문의 흔적을 찾기가 쉬울 수는 없다. 결과만 놓고 봐서는, 세종의 언문정책은 실패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한글생활을 세종 덕분이라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언문 때문이다. 세종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언문을, 대중大衆이 꾸준히 사용한 덕분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언문 즉, 대중이 언문을 줄기차게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의 우리야, 백성을 위하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믿고 있고 1450년에 세종의 생이 끝남을 알고 있으므로, 언문정책이 너무 급하다는 최만리 등의 주장이 잘못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최만리 등의 주장은 옳다. 세종의 건강에 문제가 많아 요양을 위해 청주에 행차했는데, 급하지 않은 언문정책에 매달려 있으면 신하된 도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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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先儒云: “凡百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 今東宮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罄肺腑, 仰瀆聖聰.
1.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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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항 역시 절차에 대한 시비이다. 5항에서 임금에 대해 언급하고 여기 6항에서는 세자에 대해 시비함으로서, 6항은 5항에 대해 보충적인 성격의 글임을 알 수 있다.

6항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特文士六藝之一耳’이다. 기존의 해석대로 따르면, 언문을 창제한지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문사의 육예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평가가 있을 수 있는가? 더구나, 앞에서 언문이 야비하고 상스럽다고 했으면서 선비의 육예에 해당한다고 하니, 선비가 야비하고 상스러운 일을 육예로 삼고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평가들, 문사의 육예 중에 하나라는 평가와 야비하고 상스럽다는 평가는,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士는 중국의 선비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언彦은 동국의 선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중국의 선비는 본국인 동국의 언문을 익혀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국에서만 언문이 사용되고 있지만, 동국이 본국이므로 중국의 특별한 선비들이 언문을 익히고 있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이를 동국의 선비라고 해석하면, 기존의 해석이든 필자의 해석이든 모두가 모순이 돼버린다. 최만리 등은 중국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기에, 언문이 유익하다 하더라도 중국에서는 특별한 선비들만 익히고 있고, 그것도 육예의 하나에 불과하므로 중국에 널리 퍼지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상소문 곳곳에서, 세종 이전에 이미 언문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 뜬 장님들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 과연 정말로, 필자가 이 상소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 독자라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 스스로도 감히 완벽하게 해석하고 있다 자신하지 못한다. 해석에 흠이야 다소 있겠지만,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고 훈민정음은 한자발음표기를 위해 언문으로 만든 것이며, 훈민정음과 언문정책이 중국에 펼쳐진 것이라는 사실(fact)은 너무나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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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以薜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固當參決, 況諺文乎? 若使世子常吊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만리(萬理)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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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의 음이 달라진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말한다. ‘개똥이, 이쁜이’를 이두로 표기하면 ‘개동介同, 입분立分(이분伊分)’이 되는데, 同의 /동/이 /똥/으로, 立의 /입/이 /이/로, 分의 /분/이 /쁜/으로 그 음이 변한다. 최만리 등이 상소에서, 설총의 이두를 언문과 비교하여 먼저 언급했기 때문에, 세종이 반론에서 설총의 이두를 언급하는 것이다. 문자의 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언문운서를 반대하는 것이라면, 설총의 이두도 음이 달라지는 것인데 언문정책을 반대하고 이두를 계속 써야한다는, 최만리 등의 주장은 잘못이라는 세종의 주장이다.

결국, 설총의 이두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고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니, 음이 조금 달라졌다고 하여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주장이다. 음이 달라진다는 것은 문자(한자)의 음이 달라지는 것을 가리키지, 다른 뜻이 아니다. 즉, 이두도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고 언문운서도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라, 문자의 음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시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기존의 해석대로, 언문(ㄱㄴㄷㄹ...)에 대한 시비라면 ‘ㄱㄴㄷㄹ...’의 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훈민정음이 가림토를 모방한 것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다는 소리가, 용음합자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라 해석하여 무슨 말인지 자신들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용음합자用音合字, 진반어고盡反於古’가 ‘음이 달라지는 것(異音)’을 말한다는 것을,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문자(한자)의 음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ㄱㄴㄷㄹ...’의 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종은 여기에서 언문운서의 자음字音이 달라진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만약, 1항이 언문운서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언문28자에 대해 논하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세종이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말하는 것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된다. 상소문 5항에서 운서를 고치는 것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있지만 5항은 절차에 대한 시비일 뿐, 상소문 그 어디에서도 운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즉, 1항이 언문운서에 대한 논쟁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종은 운서의 음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운서를 바로잡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세종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반절反切의 기원에 대해 탐구해보면, 세종 당시까지의 반절법이 어떤 확고한 철학적 견해에 의해 체계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니 결과물이 많아지고, 그 결과물을 정리할 필요성이 생기다 보니, 어찌하여 반절법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세종 이전의 반절법에도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지만, 자음字音을 표기하는 데에 있어서는 훈민정음의 반절법이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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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理等對曰:
“薜聰吏讀, 雖曰異音, 然依音依釋, 語助文字, 元不相離。 今此諺文, 合諸字而竝書, 變其音釋而非字形也. 且新奇一藝云者, 特因文勢而爲此辭耳, 非有意而然也. 東宮於公事則雖細事不可不參決, 若於不急之事, 何竟日致慮乎?”
만리(萬理)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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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와 언문운서 둘 다 문자의 음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둘은 차이가 있다. 즉, 이두는 원래의 자음字音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이두로 표기할 때만 음이 달라지는 것이지만, 언문운서는 자음이 아예 영원히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依音依釋의 의음依音은 음차자音借字를, 의석依釋은 훈차자訓借字를 가리키는 것이다. 언문운서가 그 음과 해석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중에 해석이 변하는 것이라는 말은, 원래의 반절이 단순히 자음표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를 빠르게 발음하는 ‘줄임말’로도 사용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만리 등의 주장 중에 하나는, 언문정책이 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세종은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하나에 ‘필이 꽂히는 일’이 생기면, 그 당사자는 그 하나에만 집중하고 매달리며 급해진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급하지 않을 수 있다. 세종은 자음표기와 이두대체표기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아주 기발하다고 여겨 언문에만 매달릴 수 있지만, 최만리 등에게는 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최만리 등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도 언문정책은 1~2년 안에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언문은 급하지 않은 일’이라는 주장은 옳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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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曰:
“前此金汶啓曰: ‘制作諺文, 未爲不可.’ 今反以爲不可. 又鄭昌孫曰: ‘頒布<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耳, 何必以諺文譯之, 而後人皆效之?’ 此等之言, 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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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의 말에 세종이 발끈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치政治하는 유자儒者가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자질 여하에 달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유자로서의 직무유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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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此, 上敎昌孫曰:
“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昌孫乃以此啓達, 故今有是敎.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辭以對,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學崔萬理,直提學辛碩祖,直殿金汶,應敎鄭昌孫,副校理河緯地,副修撰宋處儉,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 命釋之, 唯罷昌孫職. 仍傳旨義禁府:
金汶前後變辭啓達事由, 其鞫以聞.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김문(金汶), 응교(應敎)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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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논쟁은 세종이 졌다고 할 것이다. 서로의 논쟁에 있어 최만리 등이 이겼으나, 세종이 임금의 직위를 이용해 억지를 부린 면이 적지 않다. 분명히, 최만리 등의 반대를 논리가 아닌 임금의 권위로 물리친 것이다.

정창손을 파직시킨 것은 치자治者의 도리를 저버렸기 때문이고, 김문을 국문하게 한 것은 말 바꾼 것을 책망責望한 것이다. 이것 역시, 세종이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한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김문과 정창손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두 의금부에 하옥한 것은 임금의 직위를 이용한 다분히 감정적인 일처리이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는 세종이 최만리 등의 반대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전일前日에 최만리 등과 언문정책에 대해 가벼운 논쟁이 있었을 터이지만, 이렇게 상소를 하면서까지 반대하고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사대모화와 옛것에 위배된다고 하니, 동국의 임금인 세종으로서는 다분히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왜 자연어가 아닌 인공어, 문자어를 통일하려 했을까? 넓은 지역에서 풍토風土나 기질氣質에 따라 언어의 발음이 달라지는 것, 언어가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문자는 ‘문명文明의 도구道具, 척도尺度’이기 때문이다. 음성언어인 자연어도 통일하려면 통일할 수 있겠지만, 다시 지방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어는 그 순간에 직접 입과 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풍습風習이나 기습氣習에 따라 어법구조나 발음, 단어의 활용 등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처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서로 음성으로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문자는 자연어에 비해 지방별 차이가 없다. 정치권 즉, 국가가 다르면 변하기 쉽지만 하나의 권역에서는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런 문자의 특성에다가 음성을 첨가한 것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문자(문자어)이다. 그리고, 음성을 그대로 표기한 표음문자와 달리 뜻을 표기한 표의문자가 문명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제 필자의 해석을 첨가하여 상소문 전체를 정리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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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을 제도화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창물, 운지가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하시옵기를 바랍니다.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우리 조정은 조종 때부터 이래로 지성으로 (조선을) 키우고 꾸준히 (조선의) 제도를 꽃피워서, 이제 (조선의) 문자와 규격을 통일한 때를 맞아 창작하신 언문운서는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씀하시기를, ‘언문운서는 모두 본래 옛 글자이고 새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본받았을지라도 용음과 합자는 다 옛 것에 반하니 실로 의거할 바가 없사옵니다. 만약 중국에 내려 보내서 혹시라도 비의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조선을) 키우고 꽃피우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1. 옛부터 구주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방언에 따라 따로 문자를 행한 적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서하·여진·일본·서번의 무리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다 이적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는 말에 ‘하를 써서 이를 변하게 한다’하였고, 이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의 중국 모두가 기자유풍이 있는 우리나라에 의해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행하여 중국을 버려서 스스로 이적에 같아지게 하니, 이것은 이른바 소합향을 버리고 당랑환을 취함이라,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新羅薜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若我國, 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可, 而執正議者必曰: “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若行諺文, 則爲吏者專習諺文, 不顧學問文字, 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 “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家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 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借使諺文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1. 신라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1. 신라설총의 이두는 비록 비어와 리어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에 사용하였기에, 문자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나 복예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행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나 기회 등의 일에 방애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비어와 언어의 무익한 글자를 시작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또 비어라 하여 이문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민간의 리어를 쓰는 자만이 사용합니다. 가령 언문정책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 하셔도 문명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는 변로지도에 힘쓰는데 오히려 인순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합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정책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一,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然自古中國言與文同, 獄訟之間, 冤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棰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冤也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1.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㶈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1.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에 대한 옥사 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 사이에 원왕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一,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 下至百僚國人, 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 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歉,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1.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1. 무릇 사공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행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 선경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모든 제왕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모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라도 성인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하여 공장 수십 인을 모아 각본하여서 급하게 그것을 천하에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후세에 공의가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에 맡기시었는데,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一, 先儒云: “凡百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 今東宮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罄肺腑, 仰瀆聖聰.
1.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1. 선유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는 대개 지기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에 이르러서는 유자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에 잠심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설령 유익하다 할지라도 특별한 문사의 육예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에 대죄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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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서문을 잠깐 살펴보자. 전체를 자세하게 살피는 것은 번거로우니 중요 부분만 즉,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나 해석이 잘못된 부분만을 살펴본다. 실록본과 훈민정음본이 약간의 글자차이가 있지만, 그 해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편의상 실록본을 해석한다. 필자의 해석은 ‘해)’로 표시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매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해) 사방四方은 네 방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즉, 천하를 의미한다. 지금 정인지가 말하고 있는 사방은 동국이 아니라 천하이다. 방方은 네모(사각형)로서 그 자체로 천하 즉, 地를 뜻한다. 천하 또는 방이라 하지 않고 사방이라 한 것은 ‘구별區別’ 때문이다. 사방과 구별은 ‘나뉘어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천하나 중국을 표현할 때 ‘방’이라는 한 글자의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즉, 방은 사방, 방언方言 등처럼 사용되지 ‘방’ 단독으로 사용되어 천하를 뜻하는 경우는 없다. 천하 각 지역의 언어(어음)가 풍토에 의해 달라짐을 말하고 있는데, 여러 운서의 서문과 서적에서 당시의 치자들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보고 있다.

盖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 以通其用, 是猶柄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 여기의 외국外國은, 몽고·서하·여진·일본·서번 등을 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의 외국에 우리 동국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다. 정인지는 동국인인데, 아무리 사대주의자라 하여도 자신의 나라인 동국을 외국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지금의 우리는 외국을 타국他國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타국은 자국自國의 상대어이고 외국은 내국 즉, 중국의 상대어이다. 이 정인지의 서문은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 대한 반론이 목적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상소문에 대해 반론하고 있다. 상소문 2항에서 ‘구주지내九州之內’와 ‘이적夷狄’을 언급하고 있는데, 구주는 중국이 직접 지배하는 지역을 가리키므로 구주가 곧 중국을 뜻하기도 한다. 외국은 구주지외九州之外 즉, 이적을 말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천하는 구주지내를 가리키는 것이라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이적도 천하에 포함된다. 구주지내 즉, 구주는 중국이 직접 지배하는 것이지만 외국 즉, 이적은 중국이 통치하지 않는다. 그 이적까지 포함해서 즉, 중외中外(중국과 외국)를 동국이 통치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 중외를 통치하는 방법이다. 즉, 교린은 단순히 타국他國과의 외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적을 다스리는 동국의 통치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예로, 일본에 보낸 통신사通信使가 그러한데, 통신사는 천사天使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광포중외廣布中外의 중외를 한반도의 서울과 지방이라 말하고 있는데, 중외는 중국과 일본, 월남 등을 가리킨다. 예로, 동의보감을 광포중외하였다는 것은, 동의보감을 중국과 일본, 월남 등에 내려 보냈다는 것을 뜻한다.

해) 이 부분, 정인지가 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가? 이 당시의 외국 즉, 몽고, 일본 등은 문자(한자)를 쓰고 있지만 자국의 문자를 따로 만들어, 한자와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런데, 상소문의 2항에서 최만리 등이 말하기를, 구주지내 즉, 중국은 하나의 문자를 가져야하고 하나의 문자를 가지는 것이 문명인데, 몽고, 일본 등이 한자 외에 따로 문자를 갖고 있으나 그들은 이적이므로, 미개한 비문명이므로 문자 외에 따로 문자를 갖든 말든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정인지의 반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최만리 등의 생각을 살펴보자면, 최만리 등의 숨어있는 주장을 추정하면, 할 수만 있다면 이적도 문자(한자)만 사용하도록 해야 되고 따로 문자를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최만리 등의 생각은, 그것이 온 세상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고 동국의 책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인지의 주장은 다르다. 물론, 동국의 책무가 온 천하를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라는 데에는 최만리 등과 다를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그 수단이나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인지가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지의 주장은, 외국은 중국과 따로 소리가 있음에도 한자로 자신의 소리를 표기하고 있으니, 소리와 글이 서로 어긋나 문자생활에 막힘이 있으니, 오히려 문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니, 외국은 모두 각기 처지에 따라 편하게 해야되고, 중국처럼 하나의 문자만을 강요하는 것은, 중국의 한자로 외국의 소리를 표기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해) 최만리 등의 주장이, 중국이 문자 외에 따로 문자를 가지는 것은 이적과 같은 행위이므로, 중국을 망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반론한 것이 이 부분이다. 외국을 각기 처지에 따라 따로 문자를 갖게 함으로서, 몇 가지의 문자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문자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명의 척도가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이 문자 외에 언문을 따로 가지는 것은, 비문명의 이적과 같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문자생활을 활성화하는 것이므로 정당하다는 것을 돌려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상소문에서는 몽고, 일본 등을 이적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정인지는 외국이라 표현하고 있는 까닭이다.

해) 이 부분은, 동국이 중국만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까지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동국이 중세 가톨릭의 바티칸과 같은, 바티칸 보다 더 강력한 교황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즉, 동방東方을 동국이 다스리고 있다는 말이다.

吾東方禮樂文物,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우리 동방의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해) 오吾는 아我와 이자동의인데,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흔히 기미독립선언서가 인용된다. 그 선언서 안에 吾와 我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첫 부분인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가 둘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오등吾等은 ‘우리’라는 뜻으로서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가리키고, 아조선我朝鮮은 ‘우리 조선’이라는 뜻으로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吾는 아我에 비해 더 직접적인 경우에 즉, 더 주체적인 경우에 사용되고, 아我는 비교적 관망觀望적인 태도에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국가대표팀을 한 국민이 ‘우리 대표팀이...’라고 했을 때는 我를, 대표선수가 ‘우리 대표팀이...’라고 했을 때는 吾를 쓰는 것이 더 적당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오국吾國·오동방吾東方이 아국我國·아동방我東方 보다 더 강한 소속감을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해) 동방東方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동쪽의 천하’ 또는 ‘천하의 동쪽 부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과 중국은 모두 ‘천하의 동쪽 부분’으로 풀이하고 있다. 중국은 서양西洋에 대응되는 동양東洋의 뜻으로 쓰고 있는데, 이 때의 양洋은 세상世上을 뜻한다. 한국은 ‘중국대륙의 동쪽 부분’으로 풀이하여 ‘동방東方=동국東國’ 즉, ‘한반도’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서양은 ‘동쪽의 바다, 서쪽의 바다’를 말하지 ‘바다의 동쪽 부분, 바다의 서쪽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또, 한반도가 중국대륙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것은 맞지만, 중국대륙의 동쪽 부분이라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동방의 상대어는 서방西方이 아니라 서역西域이다. 동방·서방은 ‘동쪽의 천하, 서쪽의 천하’이고 서역은 ‘서쪽의 지역’을 뜻한다. 서방은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현실이 아닌 낙원 또는 저승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결론적으로, 동방은 현재의 동아시아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즉, 동방은 ‘동쪽의 천하, 동쪽에 있는 천하’를 뜻하는 단어인 것이다. 따라서, 동방東方은 천하天下를 가리킨다. 이것은, 천하의 영역이 동쪽으로 줄어들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서역을 서방이라 하지 않는 까닭이다. 만약, ‘천하의 동쪽 부분’으로 해석하면 ‘천하의 서쪽 부분’도 존재하여, 천하를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 부분만을 통치하는 것이 되어, 중국이 천하를 통치한다는 관념에 위배되고,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상황이 돼버린다.

해) 정인지가 오동방吾東方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동국이 동방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밥벌레들은 ‘동방=동국’이라 말하는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필자는 도저히 모르겠다. 홍무정운역훈서문에서 ‘~吾東方千百載所未知者, 可不浹旬而學, 苟能沈潛反復, 有得乎是, 則聲韻之學, 豈難精哉, 古人謂, 梵音行於中國, 而吾夫子之經, 不能過跋提河者, 以字不以聲也, 夫有聲乃有字, 寧有無聲之字耶, 今以訓民正音譯之, 聲與韻諧, 不待音和~{~우리 동방 수천 년간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되어 배우게 되니, 진실로 침잠하고 반복하여 이를 깨우칠 수 있다면 곧, 성운학도 어찌 정통하기가 어렵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범음은 중국에서 행하는데, 우리 부자의 경서가 발제하를 넘지 못하는 것은 글자는 있되 소리가 없음이다.” 하였지만, 대저 소리가 있으면 글자가 있는데 어찌 소리가 없는 글자가 있겠는가? 지금 훈민정음으로 이를 번역하니, 성과 운이 잘 맞아서 음화할 필요가 없으니~}’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동방이 동아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홍무정운역훈과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열흘이 못되어 배우는 것은 한글이 아니라 훈민정음 즉, 한자의 정음이다. 신숙주는 고인古人이나 중국을 남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 고인이 동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알 수 없으나, 남이 아닌 우리의 조상임은 분명하다. 부자의 경서 즉, 자음을 올바르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홍무정운을 번역하는 것이다. 이는 동방 즉, 동아시아를 위해서이지 동국을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 동국만을 위해 이러한 일을 한다면, ‘범음이 중국에서 행해지는데, 우리 공자의 경서가 인도에서 행해지지 않는 이유가 소리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글귀를 인용하고, 글자의 소리를 정음으로 표기함은, 너무 건방지고 주제 넘는 짓이다. 한자는 중국의 글자이고 중국은 남의 나라이고 중국이 상국인데, 속국의 신숙주가 저런 글귀를 인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해) 실록에서는 예악문장이 아니라 예악문물이다. 모의侔擬는 비의比擬와 같은 뜻이다. 화하華夏를 중국이라 번역해서는 안 된다. 화하는 역대 중국의 롤모델로서, 가장 크게 중화를 이룬 중국이다. 또, 최초의 중국으로서 동방 문명의 시원始原을 뜻한다. 방언方言은 천하의 지방어地方語를 가리키고 리어俚語는 동국의 지방어를 말한다. 지금의 우리는 같은 뜻, 같은 단어로 알고 있는 말들이, 동국과 천하 즉, 선계仙界와 속계俗界를 구별하는 단어인 것이다. 여기의 방언과 리어도 그러하다. 방언리어는 자연어 즉, 어음을 가리킨다. ‘吾東方禮樂文物,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는 ‘우리 동방의 예악문물이 화하에 비교되나, 다만 방언과 리어가 화하와 같지 않다.’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예악문물은 화하 때처럼 발달했으나, 어음은 화하 때처럼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당시의 지식인들은 화하 때는 천하의 어음 즉, 자연어가 통일되어 있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를, 방언과 리어가 시간이 흘러 언어의 변화가 있었다거나, 동국의 방언리어가 중국의 방언리어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은, 방언과 리어가 서로 통하지 않고 각 지방의 방언끼리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훈민정음서문이나 상소문, 정인지서문, 동국정운서문, 홍무정운역훈서문 등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지역 간의 어음이 달라졌고 어음의 영향을 받아 자음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훈민정음이나 각종 운서를 통해 천하의 자음을 통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자들은 어음이 달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여겨, 어음을 통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해) 세종과 최만리, 정인지 등은 언어를 통일하는 것 즉, 음성언어(字音)를 통일하는 것에 힘을 쏟고 있다. 최만리 등은 언문정책 즉, 훈민정음과 이두대체표기가 음성언어의 통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며, 세종과 정인지는 훈민정음이 음성언어의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해)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의 해석은 이러하다. 지금의 한국은 각 지방의 사투리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표준어가 널리 통용되어, 어음이 통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로인해 서울에서 시골구석의 학생까지 어떤 교과서를 배우는데 있어, 교과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어음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교과서를 배우는데 있어서 각 지방에 따라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 어려움을 덜려면, 사투리에 따라 교과서를 다 따로 만들어야 한다. 법조인 역시 어음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법률 업무에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법조인은 자신의 고향에서만 근무할 수도 없고, 자신의 고향에서 근무한다 하더라도 중앙에 올리는 문서에는 표준어를 기록해야 하고, 서울에서 근무할 경우 사투리를 다 알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서도 상소문 4항에서도 옥사를 예로 들고 있는데, 옥사 즉, 법률 업무가 예나 지금이나 그 사회의 중요 화두이다.

昔新羅薛聰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해) 시작始作은 ‘처음으로 만들다’가 아니라 ‘처음으로 행하다’이다. 비루鄙陋는 비언鄙言(鄙語)과 루언陋言을 말한다. 자료가 부족하고 연구도 거의 되어있지 않아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루언은 향찰로 표기되는 언어와 관계가 있다. 즉, 루언도 동국어를 가리키는 단어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무계無稽를 ‘근거가 없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상고할 것이 없다, 살펴 볼 것이 없다, 쓸모가 없다, 가치가 없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소문 5항에서 附會無稽之諺文이라 한 것에 대한 반발로, 여기에서는 오히려 이두가 무계하다고 말하고 있다. 상소문에서 이두를 언문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그에 대한 반론이다. ‘非但鄙陋 無稽而已’는 ‘다만 비언과 루언 아니고는 무계할 따름이다’는 뜻인데, 의역하면 ‘다만 비언과 루언을 표기하는 것 말고는 달리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최만리 등은 이두에 대해, 이두가 비록 비어와 언어를 표기하는 것이지만, 문자를 빌어 사용하는 것이므로 흥학興學에 일조一助하는 것이라 하여, 이두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인지는 이두에 대해, 문자를 빌어 사용하는 것이라 어렵고 막힘이 있어서, 비언과 루언을 표기하는데 쓰는 것 말고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하여, 이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해)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의 至於言語之間은 이두로 표기한 것을 해석하여 읽지 않고, 음차는 음으로 훈차는 훈으로 읽지 않고 모조리 자음字音으로만 읽는 것을 말한다. 이두는 음차자는 음으로 읽고 훈차자는 훈으로 읽어야, 제대로 된 어음(자연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두문장을 자음대로 읽게 되면, 어음도 아니고 문자도 아니게 되어 음성언어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의 사이에서는 그 만분의 일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두를 음성언어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癸險,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해) 여기서도 제製가 아니라 제制가 쓰였다. 훈민정음과 관련한 당시의 그 어떤 기록에서도 제製가 쓰인 적은 없다. 언해본에서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라 한 것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지은 것을 말하는 것이지, 28자를 만든(製)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언해본 서문에서 ‘신제이십팔자新制二十八字’라 하여 분명히 제制를 쓰고 있다.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해) 모든 사람들이 여기의 象形而字倣古篆을 한글의 자형字形에 대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자 즉, 한자의 자형을 말하는 것이다. 역시, 상소문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상소문에서는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였는데, 유리한 부분은 집어넣고 불리한 부분은 쏙 빼버렸다. 대신, ‘因聲而音 ~ 莫不該括’이라 하여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현학적衒學的인 표현을 하고 있어, 필자도 더 이상은 해석할 능력이 없다.

해) 어찌됐든, 28자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음은 무궁하고, 반절 보다 표기나 발음에 있어서 간요簡要하고, 배우고 익혀서 사용하기에도 반절 보다 훨씬 정통精通하기 쉽다.

故智者不崇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해) 홍무정운역훈서문에서도 ‘可不浹旬而學’이라 하고, 여기에서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하였는데, 한글 28자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정음으로서의 28자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결과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관념은 엄연히 다르다.

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鎰其情.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해) 여기의 글(書)이나 송訟은 종이에 써져있는 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 구현한 것 즉, 읽었을 때 귀에 들리는 소리를 가리킨다. 즉, 올바른 자음으로 발음하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의 중국어와 같은 문자어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以是解書를 ‘한글로 한문을 풀이하다’로 해석하면, 그것은 언해서적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 문장은, 일부 한문서적을 언해하겠다는 것이 아니며, 송사에 있어서도 이두를 대체하여 한글을 사용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서적과 송사의 모든 과정을 한글로 표기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그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잘 알고 있다시피, 언해서적은 소수이고 송사에 있어서도 언문이 사용된 것은 일부이다. 또, 언해하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꼭 언해해야만 뜻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운서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또한, 송사를 한글로 기록해야만 그 정상情狀을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한자의 정음正音에 대한 얘기이고 문자어에 대한 얘기이다.

해) 상소문 4항에서, 초사를 언문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여기의 청송聽訟은 한문을 배운 관리官吏가 하는 일이다. 즉, 한문을 배운 관리를 위해 언문을 사용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관리가, 언문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면 그 정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문자로 대화하는 것에 대한 얘기로서, 정음正音으로써 청송聽松하면 그 정상情狀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字韻則淸濁之能卞,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해) 이 역시 한자에 대한 얘기이다. 자운字韻, 악가樂歌, 율려律呂는 자음에 대한 얘기이지 한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바람소리, 학의 울음, 닭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등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운서에도 나오는 말이다. 사실, 어려워서 그렇지 여러 운서들도 완벽하게 발음된다면, 지금의 한글 보다 표현할 수 있는 음이 더 많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운서의 초성이나 운모가 한글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 於是, 臣與集賢殿應敎崔恒, 副校理朴彭年·申叔舟, 修撰成三問, 敦寧注簿姜希顔, 行集賢殿副修撰李塏·李善老等謹作諸解及例, 以敍其梗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없는 바이다.

恭惟我殿下天縱之聖, 制度施爲, 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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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훈민정음서문을 비롯하여 최만리 등의 상소문, 정인지후서 등을 살펴보았다. 이들을 해석하고 나니,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확실한 것 세 가지가 있다.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표기를 위해 만든 것이며 그 훈민정음은 중국에 내려 보낸 것이고,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글을 다 읽고서도, 아니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양심을 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가? 하늘이 알고 내가 아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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