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41] 고려(高麗) 연대기 3

양해천 2018. 1. 23. 13:13

[홍익인간 341] 고려(高麗) 연대기 3

2012년 06월 05일 (화) 06:00:00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7. 제7대 목종(穆宗:서기998년~서기1009년) 

친모인 헌애왕후가 섭정하였다.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면서 김치양을 불러들였다. 이후 김치양은 관리 임명권과 파면권을 쥐고 흔들었다. 헌애왕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았다. 태조왕건의 손자인 대량원군이 삼각산 신혈사로 쫓겨났다. 

서기1004년에 과거시행법을 실시하였다 

<강조의 정변> 
서기1009년에 목종이 관등놀이 중에 상전전에 불을 지르고 혼란한 틈에 시해하려하다가 호위병들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에 목종이 충격으로 병이 들었다. 목종은 신임하던 신하 채충순을 불러 대량원군을 김치양 일파가 눈치 채지 못하게 환궁시키도록 하고 서북면 순검사 강조에게 급히 와서 호위하라 편지를 보냈다. 이에 강조가 급히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가다가 도중에 김치양 일파를 만났는데, 그들이 김치양 일파가 반역하기 위하여 왕명을 날조한 것이라 하여, 강조가 군사를 돌렸다. 

다시 강조는 왕이 붕하였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서울로 향하였으나, 평주에 이르러 왕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알고는 반역을 면하기 위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하여, 신하 김응인을 신혈사로 보내고, 목종에게는 잠시 귀법사로 피신하면 역적을 처치하고 모시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강조는 부장 이현운을 먼저 궁궐로 보내 김치양 일파를 모조리 체포하였다. 

김응인이 대량원군을 모셔오자 강조는 대량원군을 즉위시켰다. 

8. 제8대 현종(顯宗:서기1010년~서기1031년) 

태조왕건의 손자인 대량원군이 18세로 즉위하였다. 

김치양 부자와 일당은 처형되고, 헌애왕후의 친족은 귀양을 보냈다. 귀법사에 피해 있던 목종과 헌애왕후는 평민이 되어 몸을 숨겼다. 그러나, 강조는 현종에게 알리지 않고 목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강조의 부하들이 목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자 살해하고서는 자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목종은 30세였다. 

침략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고려가 전왕을 폐위한 경위를 따졌다. 이에 현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조에게 군사30만을 주어 거란군을 막게 하였다. 

<거란의 제2차 침입> 
서기1010년 11월에 거란의 성종이 몸소 40만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하였다. 성종은 홍화진을 포위하고 강조를 내 놓으라 하였다. 거란의 성종이 비단옷과 은그릇 등을 보내어 홍화진의 장수들을 꾀었으나 듣지 않자, 군사 20만을 홍화진에 남겨두고 20만을 이끌고 강조가 있는 통주로 갔다. 그러나, 거란군은 강조의 검차(칼수레)의 공격으로 번번히 패하였다. 강조가 방심한 틈에 거란군이 기습하여 강조를 사로 잡았고 성종 앞에 끌고 갔다. 강조는 거란의 신하가 돼라는 성종의 말을 거절하다 죽임을 당하였고 신하 이현운은 거란의 신하가 되었다. 

거란군이 서경을 함락하였다. 이때 강감찬 장군이 나섰다.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떠났고 고려군은 거란에 반격을 시도하였다. 홍화진의 양규와 구주의 김숙흥의 활약으로 거란군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양규와 김숙흥이 전사하였다. 이에 현종이 하공진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이에 거란 성종은 고려왕이 거란에 와서 입조하고 강동6주를 돌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회군하였다. 

거란이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어 강동6주를 돌려주고 거란에 입조하라 하였으나 고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다. 

<초조 대장경> 
서기1011년부터 대장경(초조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였다(~1029년). 

<거란의 제3차 침입> 
서기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3차) 침입을 하였다. 이때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20만의 군사를 훈련시켜 놓은 상태였다. 강감찬(서기948년~)을 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았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진입로를 예측하여 홍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쇠가죽 수백장으로 막아놓고 날랜 군사 12,000명을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다. 거란군이 물을 건너자 막았던 물을 터뜨렸다. 이에 거란군은 수공을 당하고 고려군의 공격을 받았다. 소배압은 홍화진 싸움에서 패하였으나 개경에서 백리 떨어진 신은현까지 진출하여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군과 대치하여 더 이상 가지 못하였고, 이때 뒤에서 강민첨이 공격하자 소배압은 거짓으로 화친을 제의하고는 군사를 돌려 도망하여 귀주에 이르렀다. 

<귀주대첩> 
서기1019년 강감찬 장군의 계책으로 거란군은 귀주에서 몰살당하였다.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의 주장대로 개경 외곽에 성을 쌓았다. 

황주량에게 태조에서 목종까지 왕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서기1033년 덕종3년에 완성) 

<초조 대장경 완성> 
서기1029년에 6천여권의 초조대장경을 19년만에 완성하였다. 

서기1031년 5월에 현종이 40세로 붕하였다. 

9. 제9대 덕종(德宗:서기1031년~서기1034년) 

현종의 태자 흠이 16세로 즉위하였다. 

국자감 시험제도를 도입하였다. 

<천리장성> 
서기1033년 거란을 경계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서기1034년에 7대실록을 완성하였다. 덕종이 병으로 붕하였다. 

10. 제10대 정종(靖宗:서기1035년~서기1046년) 

덕종의 아우 평양군이 17세로 즉위하였다. 

팔관회를 서경과 개경에서 열었다. 

거란이 성을 쌓는 것을 중지하고 국교를 정상화하자고 제안하여, 정종은 거란에 잡아둔 고려의 사신을 돌려주고, 뺏아간 압록강 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거란은 압록강에 군사를 보내어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거란은 거란의 연호를 쓰면 사신을 돌려준다 하여, 정종은 온건파의 말대로 거란의 연호를 쓰기로 하고 서기1038년에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서기1039년에 노비종모법을 마련하였다. 

서기1044년에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서기1045년에 비서성에서 예기정의, 모시정의 등을 간행하였다, 

서기1046년에 장자상속법을 제정하였다. 정종이 병으로 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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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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