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45] 고려(高麗) 연대기 7

양해천 2018. 1. 23. 13:17

[홍익인간 345] 고려(高麗) 연대기 7

2012년 06월 09일 (토) 07:47:38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18. 제18대 의종(毅宗:晛:서기1146년~서기1170년) 

인종의 태자 현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서기1146년에 정서가 정과정곡을 지었다. 

의종은 즉위 후에 예부시랑 정습명의 말을 점점 듣지 않고 멀리하고 내시와 궁녀들과 어울려 격구와 수박 경기를 즐겼다. 의종이 정습명을 멀리하려 하자 내시 정함 등의 청으로 정습명을 관직에서 쫓아냈다. 이후 정습명은 깊은 병이 들어 약을 마시지도 않다가 사망하였다. 

이후 의종은 내시 정함과 정함이 추천한 김존중과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정함과 김존중은 의종에게 아첨을 일삼았다. 이에 의종이 정함에게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주는 서대를 하사하였고, 이를 본 우간의 대부 왕식이 정함의 서대를 빼앗았다. 정함은 이를 의종에게 일렀고 의종은 다시 서대를 하사하고 정함에게 합문지후의 벼슬까지 내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합문 밖에서 사흘간 농성을 벌이고 출근을 하지 않았다. 이 중서문하성의 관리들도 합세하자 의종이 정함으로부터 서대를 환수하였다. 정함은 이 일로 앙심을 품었다. 

서기1157년에 정함이 의종에게 어사대가 왕경을 왕으로 세우려고 모의하고 있다고 모함하여 이 일로 많은 신하들이 쫓겨나고 왕경은 천안부로 귀양 갔다. 

점쟁이 출신으로 의종의 신임을 얻어 내시가 된 영의는 법회를 핑계로 어명을 받아 지방의 관아로부터 관곡을 받아 착복하였고, 정함의 졸개인 내시 백선연도 의종의 신임을 얻자 누명을 씌워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관리들이 백선연, 정함, 영의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에 좌정언 문극겸이 의종에게 그들의 횡포를 고하였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아 쫓겨났다. 이리하여 정치는 내세들이 좌지우지하는 지경이었고 백성들은 궁핍하게 되었다. 

의종의 유흥과 내시들의 횡포는 무신들도 괴롭혔다. 왕이 문신, 내시들과 유흥을 즐길 때 무신들은 항상 경비를 서야 하였으며 문신들의 갖은 멸시를 참아야 하였고 놀이가 끝나면 뒤치닥꺼리까지 해야 하였다. 

이에 무신들이 상장군 정중부에게 불만을 털어 놓았고, 정중부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 수염이 불태워지고 모욕당했던 사건을 털어놓았다. 정중부는 연회장에서 김돈중에게 수염을 불태워지자, 김돈중을 김돈중을 폭행하였고, 이에 신하들이 정중부를 매질하여 벌하라 하자, 의종이 몰래 풀어주었던 것이다. 

서기1168년에 이규보(李奎報)가 출생하였다. 

<정중부의 난> 
서기1170년 8월에 정중부의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의종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보현원으로 가 던 중, 쉬던 곳에서 무관들이 무술 시합을 하였는데, 이때 3품의 대장군 이소응이 어린 장교에게 패하자 6품의 문신 한뢰가 느닷없이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이때 이를 보던 중정부가 한뢰를 죽이려 하였으나 의종이 용서하라 하여 넘어갔다. 이에 정중부는 문신들이 분명히 자신을 벌 줄 것을 염려하여 심복인 이고와 이의방을 불러 의종이 보현원에 들어간 후 문신들이 들어오면 모조리 죽여라 하였던 것이다. 

한뢰는 재빨리 용상 아래로 숨었는데, 정중부가 의종에게 한뢰를 내놓으라 하였고 이때 이고가 들어와 한뢰를 끌어내어 죽였다. 김돈중이 보이지 않자 정중부는 이고와 이의방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즉시 궁궐로 달려갔으며, 궁궐을 지키고 있던 문극겸은 살려두고 궁궐 안에 있던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내시 영의와 왕광취 등도 죽였다. 

정중부는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의종의 아우 익양공 호를 즉위시켰다. 

19. 제19대 명종(明宗:서기1171년~서기1197년) 

의종의 아우 익양공 호가 정중부에 의하여 즉위하였다. 이에 정중부는 고려의 제1인자가 되었고 무신들의 회의기관인 중방에서 나라 일을 처리하였다. 

이때 이의방보다 낮은 벼슬을 받은 이고는 법운사의 중 수혜와 개국사의 현소와 결탁하여 이의방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는데, 이를 엿들은 이고의 심복 하나가 채원에게 알렸고 채원은 이의방에게 고했으며, 이에 이의방은 즉시 이고 일당을 처치하였다. 

서기전1173년 동북면의 병마사로 있던 김보당이 거제도로 귀양갔던 의종을 경주에 모셔놓고 복위를 시도하였는데, 김보당의 부하 몇 명이 이를 정중부에게 고해 바쳐 많은 문신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정중부는 부하 이의민을 불러 경주로 가서 의종을 처치하라 하니 이의민이 경주로 내려가 김보당 일당을 처치하고 의종을 붙잡아 연못에 빠뜨려 죽였다.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와 혼인시키려 강요하였고 이에 태자는 태자비를 내쫓고 이의방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차에, 서기1174년에 서경 유수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자비령 이북의 군사들이 무신정권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에 이의방이 윤인첨을 보냈으나 실패하여 직접 조위총을 치러갔는데, 정균의 명을 받은 승려 종참에게 살해되었다. 이어 정균은 이의방의 측근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조위총의 난은 결국 윤인첨이 진압하였다. 

이의방의 딸이던 태자비는 역적의 딸이 되어 쫓겨났다. 태자가 서기1211년에 제22대 임금인 강종으로 즉위하여 이씨 태자비를 왕후로 들이려 하다 실패하였다. 태자비가 죽은 뒤 사평왕후로 불렸다. 

이의방이 제거되자 정중부는 문하시중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였고 아들 정균은 왕명을 전하는 승선이 되었다. 정균은 아내의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내쫓고 상서 김이영의 딸과 강제로 혼인하였다. 나아가 정균은 명종에게 공주를 달라고 강요하는 등 궁녀들을 희롱하고 안하무인의 행동을 계속하였다. 

이에 청주 출신으로 26세의 청년 장군인 경대승이 의협심이 강하였는데, 궁궐을 지키던 견룡대의 허승과 김광립을 불러 일을 도모하였다. 

<망이,망소이의 난> 
서기1176년에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