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53] 고려(高麗) 연대기 15

양해천 2018. 1. 23. 13:23

[홍익인간 353] 고려(高麗) 연대기 15

2012년 06월 17일 (일) 07:29:49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34. 제32대 우왕(禑王:강릉왕(江陵王):서기1374년~서기1388년) 

공민왕의 아들인 우 왕자가 10세로 즉위하였다. 

서기1374년에 강릉왕(隅)이 경효왕(敬孝王:공민왕)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때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승차(承差)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되, 

“철령(鐵嶺)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開原)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軍人), 한인(漢人), 여진(女眞), 달달(達達), 고려(高麗)는 곧 요동에 속한다.” 

라고 운운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崔瑩)을 팔도도통사로 삼았다. 

<왜구 정벌> 
서기1376년에 최영이 홍산(논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중수, 금판 부모은중경 제작> 
서기1376년에 원율국사가 부석사 무량수전을 중수하다 경사된 부모은중경이 일부 유출되었다. 이에 금판 부모은중경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 
서기1377년에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성계가 지리산까지 쳐들어 온 왜구를 물리쳤다. 

서기1377년에 <직지심경>을 인쇄하였다. 

<금판 부모은중경 완성> 
서기1377년 12월에 원율국사가 금판 부모은중경을 완성하였다. 

<금판 천지팔양신주경 완성> 
서기1377년에 금판 천지팔양신주경을 완성하였다. 

서기1378년, 강릉왕(江陵王) 우(禑)의 5년 3월 신미(辛未)일에, 사자를 보내어 참성단(塹城壇)에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고 대제학(大提學) 권근(權近:서기1352년~서기1409년)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바치니 그 글에 가로되, 

“초헌(初獻)에, 바다 위의 산은 높고, 인간의 번요(煩擾)를 멀리 끊었도다. 단(壇) 가운데 하늘 가까이 가히 신선(神仙)의 강림을 맞으며, 조촐한 공물(拱物)를 진설하니 밝은 신이 계시는 듯 하도다. 재헌(再獻)에, 신의 들으심은 미혹되지 아니하시어 사람의 원을 들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사사로움이 없으시어 비추어 땅에 임하여 내리시니, 예(禮)로써 섬기면 느끼시어 마침내 통할지로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마리산(摩利山)은 단군께서 제사하시던 곳, 성조(聖祖)로부터 백성을 위하여 극(極:皇極, 임금자리)을 세우시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워셨네. 후손된 왕은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겼으나 역시 여기를 의지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까닭으로 우리 가문이 이를 지켜 끊기지 않았습니다. 짐, 소자는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습니다. 하늘이 어찌 바깥의 개같은 도적들로 우리 백성을 물고기젓으로 만들게 하겠나이까? 비록 먼 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할지라도, 오직 표(表)를 허락하시고 들으시도다! 하물며 저 읍이 침략을 당함을 그러려니 참고 보시겠으며, 어찌 밝은 위엄이 없으시겠는가? 실로 덕이 좋지 아니함이 아니로다. 참말로 남에게서 구하기 어렵고 오직 자신의 책임에 있나니, 그러한 즉 사람이 만약 그 업을 편안하게 하지 아니하면 신장(神將)께서 돌려 줄 곳이 없게 되노라. 이에 옛 법을 따름으로 인하여 감히 현재의 우환(憂患)을 고하노니, 제 정성(卑忱)은 참되고 참되며, 보배같은 규범은 밝고 밝아서, 바다로 하여금 파도를 일게 하지 않음에 이르면서, 물을 건너 항해함에 바람이 한 곳으로 몰려들어 크게 효과를 누리리니, 하늘이시어, 목숨의 빛을 펼치시고, 사직의 편안한 반석을 마련해 주소서!” 

라고 하였다. 

서기1380년에 최무선이 화약으로 왜구의 500여척을 불살랐다. 이해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전멸시켰다. 

고려는 나홍유, 정몽주 등을 일본 조정으로 보내어 왜구 토벌을 요청하였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포로 수백명을 귀환시켰다. 

서기1368년에 건국된 명나라가 원나라를 북으로 쫓아내고 중국대륙을 차지하였는데, 고려는 원나라에 사신을 왕래시키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나라가 고려에게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서기1388년에 명나라는 고려에 철령위를 설치하였음을 통보하였다. 이때 최영 장군이 부정을 저지른 이인임을 쫓아냈고, 우왕에게 요동정벌을 간하였다. 

서기1388년 4월에 최영을 8도 도통사,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았다. 이에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내세웠고 최영은 이에 반박하였는데, 최영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요동정벌 4대 불가론>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승산이 없다. 
2.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농사를 망친다. 
3. 요동정벌을 틈타 왜구가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 
4. 장마철이라 아교에 먹인 활이 풀리며 병사들이 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요동정벌 3대 가론> 
1. 명나라가 비록 크긴 하나 북원이 아직 버티고 있어 방비가 허술하다. 
2. 요동 땅은 기름져 가을에 군량을 얻을 수 있다. 
3. 명나라 군사는 장마철에 싸우기 싫어하여 요동정벌이 가능하다. 

<위화도 회군> 
서기1388년 5월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함께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안의 위화도까지 진격하였으나, 물이 지나치게 불어나 더 진군할 수 없고 병사들도 지쳐, 우왕에게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다, 

우왕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협의하여 회군하기로 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은 이성계의 반란군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최영을 유배시켰다가 처형하였다. 

서기1388년에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창 왕자를 즉위시켰다. 

35. 제33대 창왕(昌王:서기1388년) 

이성계에 의하여 우왕의 왕자 창이 9세로 즉위하였다. 

김저와 정득후는 유배생활을 하던 우왕과 함께 모의하여 예의판서 곽충보를 찾아갔으나, 곽충보는 이를 이성계에게 알렸고, 이성계는 김저 등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조정에서 내쫓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대마도 정벌> 
서기1389년에 박위가 대마도(쓰시마섬)를 정벌하였다. 

서기1389년에 이성계는 1년 5개월 만에 창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이에 제20대왕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 요를 즉위시켰다. 

36. 제34대 공양왕(恭讓王:서기1389년~서기1392년) 

정창군 요가 즉위하였다. 

이성계는 계속하여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이색과 조민수를 쫓아냈다. 우왕과 창왕이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이성계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문하시중애 올라 급진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연제도를 도입하고 원나라 관제를 폐지하고 6부제로 바꾸었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도록 하였다.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구세력인 권문세족의 토지문서를 불태우는 방법으로 토지를 몰수하여 자기 일파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조준, 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등이 막았다. 

서기1392년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세자를 마중 나갔다가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정몽주는 조준, 남은, 정도전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이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리자 급히 개경으로 돌아왔고 귀양 갔던 정도전, 조준 등이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번에는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김진양 등이 귀양을 갔다.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였다. 

서기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폐위시켜 원주로 쫓아내고, 58세의 이성계를 즉위시켰다. 

서기1394년에 폐위되어 유배됐던 공양왕은 이성계의 명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역사는 서기918년부터 서기1392년까지 역대로는 36대, 인물로는 34대 47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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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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