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60]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5

양해천 2018. 1. 23. 13:28

[홍익인간 360]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5

2012년 06월 24일 (일) 07:07:23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임진왜란> 
서기1592년 4월 13일에 수만의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 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저항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왜군은 세 갈래로 한성을 향하였다. 여진족을 물리친 신립장군이 명을 받고 왜군에 맞섰으나 패하여 자살하였다. 

선조는 한성을 떠나 평양을 향하였다. 개성에 이른 선조는 동인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했다.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7천의 군사만 왔다. 왜군이 한성을 거쳐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이때 김경서가 만여명의 군사로 평양 서쪽을 기습하여 왜의 부장을 죽였다. 

<한산대첩>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이 군량을 확보하고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대를 출동시켜 옥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대승하였다.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등장시켜 왜선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왜군의 함대가 견내량에 모여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함께 진을 쳤는데,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을 펼쳐 적선 50여척을 침몰시켰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들어와 영흥을 점령하고 회령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선조의 맏이 임해군이 회령 근처에서 피난살이 중에 노비들을 시켜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니 회령 사람들이 임해군을 미워하였다. 회령의 아전 국경인과 국세필이 모의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회령 관아로 쳐들어가 임해군, 순화군, 회령부사를 사로잡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회령으로 들어오자 바치고는 회령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의병장 정문부가 격분하여 회령의 유생 오윤적에게 지시하여 국경인 등을 죽이게 하였다. 

경상도 의령에서 홍의장군 괙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여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막았다. 

전라도 담양에서는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찔렀다.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빼앗겼던 청주를 되찾았다. 

평안도 묘향산의 휴정(서산대사), 강원도 금강산의 유정(사명당), 청주의 영규대사, 처영대사 등 승려들도 나라를 지키는 데 일조하였다. 

서기1592년 12월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4만3천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다. 

서기1593년 1월에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포위공격하여 수복하였다. 이에 황해도 등 한성 이북의 왜군은 모두 후퇴하여 한성에 집결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한성탈환을 하기 위해 진격하다 왜군의 기습공격에 놀란 명장 이여송이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에 왜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대첩> 
서기1593년에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2천여 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왜군에 맞서 싸웠는데, 부녀자들도 돌을 담아 날라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왜군은 경상도 일대 머물면서 명나라와 휴전회담을 진행하였으나, 전라도를 공격하고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명나라와 왜의 회담은 5년 가까이 끌다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유재란> 
서기1597년 정유년(丁酉年)에 왜는 14만의 대군으로 다시 침략하였다. 이때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서인 세력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원균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어 바다를 지키고 있었으나 왜군에게 대패하고 습격당하여 죽었다. 

서기1597년 8월에 왜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경상도 남서부와 전라도, 충청도까지 쳐들어왔는데, 조명 연합군과 소사평 전투에서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였다. 

<명량대첩>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키고 출전시켜야 한다고 간하여, 이순신은 남아 있는 12척의 배를 모아 진도 벽파진에 진을 치고는, 바닷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133척의 왜선을 격침시켰다. 

서기1598년에 조명 연합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고 이순신의 계속된 승리로 왜군은 군량 공급이 끊기어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노량대첩> 
서기1598년 11월 18일에 왜군은 노량 앞바다에 모두 모였는데, 이순신은 도망치려는 왜군들을 명나라 군사와 함께 가로막고 200여척의 적선을 부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7년의 전쟁이 끝났다. 

왜란의 시기에 남인의 우두머리 유성룡이 조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전쟁 말기에 왜군과 화해를 권하였다가 나중에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여 낙향하였고, 이에 북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후 북인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선조는 서기1606년에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소북편을 들어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의 이이첨, 정인홍 등을 귀양 보냈다. 

서기1608년에 선조가 갑자기 붕하고 세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15. 제15대 광해군(光海君:서기1608년~서기1623년) 

선조의 세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서기1608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광해군은 귀양갔던 대북의 이이첨, 정인홍 등을 등용하였다. 소북의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내세워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을 당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기유약조> 
서기1609년에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하였다. 

서기1610년에 허준이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계축화옥> 
서기1613년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영창대군은 유배되었다가 죽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갇혔다. 임해군도 사약을 받았다. 

서기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웠다. 일본으로부터 담배가 들어왔다. 

선조 말에 시작한 창덕궁 재건 공사를 완료하고, 이어 경덕궁, 이경궁, 자수궁을 중건하였다. 

<이괄과 인조반정> 
서기1623년에 서인인 이서, 이귀, 김유 등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괄 등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지방의 수령들을 모아 홍제원(홍제동)에서 모여 궁궐로 쳐들어 가기로 하였다가 총지휘를 맡기로 한 김유가 늦게 오는 바람에 이괄이 앞장을 섰다. 이에 광해군은 도망을 치다가 체포되어 강화도로 귀양갔다. 이에 서인들은 선조의 5자인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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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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