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7만년 한 민족사

III. 신약 성경 바로 보기

양해천 2018. 1. 23. 15:47

III. 신약 성경 바로 보기
1. 신약 탄생의 배경
가. 유럽의 인본주의 유일신의 발호 

왜 예수 그리스도가 호모사피엔스의 발상지인 알타이 산, 천산, 바이칼 호가 아닌 유라시아의 서쪽에 오셨을까? 그 이유는 그곳이 모두 인본주의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인본주의의 발단은 자연이 허락하는 데로 살지 못하고 3만 년 전에 고조선을 떠나 인도를 계급화 한 알 족(아리안)의 남성 제사장들이다. 이들은 원래 고조선의 자연 유일신을 믿으며 아시아의 북부 스탭 지역에서 이동을 하면서 2-3만 년을 살았다. 이들은 기원 전 만 2천년 전에는 인도의 북부 지역으로 들어와 그 때 까지 자연신 유일신을 섬기며 잘 살고 있던 인도를 침략하고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고조선의 삼신제사장 대신 자신들이라야만 진정한 신의 사제라고 하면서 브라만 크샤트리아 수그라 베이스라는 인도의 브라만교를 만들었다. 견디다 못한 드라비다인과 타밀인들은 힌두교를 만들어 버티었으며 북부지역 조선인들은 불교를 만들어 괴로운 현실을 마음 수련으로 극복하려 했다(기원 전 7세기) 인도를 인본적인 욕심으로 망쳐버린 아리안인들은 이번에는 페르시아와 중동을 거쳐 약 60만 년 전부터 따뜻한 곳을 찾아 대서양 연안과 지중해지역으로 들어간 선주 네안데르탈인들(유럽의 백인들)과 혼혈이 되며 섞였고 인도 유로어 족 군을 만들었다. 이 지역은 대부분 바다 접경 지역이어서 인간의 힘으로 먹고 살았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가축을 키우거나 고기를 잡아 자연과 함께 먹고사는 동방과는 차이가 나는 지역이었다.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 연안 지역은 배를 타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지역으로 아리안과 백인들은 여기서도 인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모아 집단농사를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같은 현상이 중국의 황하와 나일강 유역에도 일어났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고조선의 자연주의 유일신 사상에 배치되는 인간이 하느님, 즉,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유일신 사상이 이 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들은 인간끼리 힘을 모으고 시공간을 넓혀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 문자를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인류 문명이라고 한다. 4대강 문명은 호모사피엔스가 6만년 이상 자연에서 느껴온 자연주의 유일신 사상에 대항하는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 4대강 문명이후 인류의 모든 전쟁은 자연신주의자들과 인본신주의자(휴메니스트)들 간의 전쟁이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것과 하느님의 징계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수 천년간 있었던 모든 전쟁은 거의 모두가 중국화 해 가면서 일어난 같은 형태의 전쟁이다. 고조선의 하느님은(샤머니즘=삼한이즘=삼신사상) 서는 이러한 반동 인간 세계를 속세라고 했고 죄로 여겼다. 
나. 백인의 식인 전통의 계승
유럽인은 속칭 코카시안(백인종)으로 피부색이 흰, 체격과 눈이 큰 인종을 말하는데 이러한 진화는 어두운 지역에서 오랜 기간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생인류의 미토콘드리아이브유전자 이동도에 의하면 15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형성된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현대 호모사피엔스가 되기까지 해를 따라 아시아로 와서는 따뜻한 지중해 지역으로 퍼져나간 인류가 주종을 이룬다. 북 구라파 백인들 중에는 시베리아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이후 시베리아 북부 저지대 스텝지역을 따라 스칸디나비아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원조격인 유럽인들에게 1차로 충격을 준 민족은 고조선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노예국가로 만든 다음 인도 유로어를 구성하고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하여 유럽인들을 지역 별로 혼혈 화 한 아리안 민족이다.(대표적으로 힛틀러의 독일 민족) 이들은 북쪽에서 남하한 몽골계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삼신신앙(그들이 말하는 샤머니즘)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사제도와 천문관측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독일의 정령 숭배, 북 구라파의 신들 및 창조 설화가 그 증거이다. 유럽의 지리적인 특징은 평균 위도가 한국보다 20-30도가 더 위인 평균 70-80도 이고 따라서 대부분 지역이 백야 현상이 있는 어두운 지역으로 태양 빛이 부족하다. 그래서 북위 30도 내외의 온대 지방처럼 열매 맺는 과일이나 관엽 수가 자라지 않으며 침엽수나 생존력이 강한 잡초들이 대륙을 뒤덮고 있다. 가축과 열매가 없으니 영양이 부족하게 되고 어두워 식생이 어려워지나 동물을 잡아먹고 생존을 위해 인류간 인육을 섭취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러한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인류는 가족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먹이와 짝짓기)이 우선되었다.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동굴과 프랑스의 쇼베 동굴, 그리고 프랑스 남부 베제르 계곡의 크로마뇽 동굴에 그려져 있는 약 3만5천년전의 벽화에 인간이 서로 잡아먹는 그림과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그림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으나 유럽 인들은 이를 숨기고 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근본적으로 밤의 문명이다. 햇볕을 좋아하고 모든 드라마와 영화를 비롯하여 모든 이벤트와 예술(뱀파이어, 언드 월드, 그림형제, 런던올림픽 개 폐막 식, 음악 등. 성탄이브문화 등이 모두 밤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의 피를 좋아하며 전쟁을 좋아하며 살육을 즐긴다. 지금도 매일 총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며 전쟁을 즐긴다. 그들의 언어는 동물적으로 행동하는 순서대로 말을 하는 도치어(倒置語)(중국어도 마찬가지다)이며 밤의 언어를 쓴다. 어두워 아무도 믿지 못하니 격과 시제가 필요하고 보는 것이 없으니 수동태가 된다. 여성을 포함하여 인간의 수가 부족하니 근친상관과 동성애가 성행하고 짝짓기가 부모나 자식보다 우선이다. 살육과 타락 이것이 아브라함과 그들의 선조 장사치들이 유럽을 돌면서 배운 유럽인들의 삶이고 이런 현상이 그대로 구약성경에 반영되었다.(소돔과 고모라,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부인 팔기, 일부다처, 다윗 가계의 근친상간, 간통, 소로몬의 3천 여부인 등등) 유럽인에게 음악은 어둠의 세계에서 받는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수 만년 동안 청각이 발전되었으며 그들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 그들의 음계가 천주교의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백인들의 상황은 셈계(조선인들 최초의 호모사피엔스) 에벨의 자손으로 수메르의 가지 인 아람인 장사치들의 눈에는 유럽은 에굽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호구였을 것이다. 
유럽에 1차로 인간이 하느님이다라는 인식, 즉 인본주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립된 것은 기원전 3천년 전후 인도유로어를 가진 아리안 족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스칸디나비아로 들어온 핀 족이나, 바이킹, 렙 족의 하느님인 자연이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말을 탄 무사들의 집단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2차로 유럽에 인본주의 하느님이 들어간 것은 수메르 문명이 에집트 나일강과 연결되면서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진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와 그 가지인 아람 인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2세기경에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바닷가에서 다신 인신과 함께 등장한 것이 이 때이다. 유럽에서 동방(조선)의 자연이 하나님이라는 인식은 나타나기 힘든 풍토였다. 이후 유럽은 인류의 전쟁 역사를 혼자서 장식하는 민족들이 되고 이후에 적은 규모로 생긴 민족들보다 그 수가 101%도 채 안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동에 온 이유, 즉, 다른 말로 자연의 하느님이 동방에 오지 않고 유럽에 오신 이유는 수 만년동안 기아와 어둠 속에서 고난을 겪어온 버려진 (페르시아, 베르린, 발칸, 발틱)서쪽 달지는 곳에 해가 없는 곳에 살아온 백인들에게 동방 조선의 하나님인 자연의 하느님으로 빛으로 오신 것이다. 지금 예수를 믿는 아리안 족의 가지(미국)이 우리를 돕는 것은 인본주의의 극치의 위협에서 자연의 하나님의 원조의 나라 (제사장 존: Priest Jhon's Country)를 돕기 위하여 온 것이다. 참고로 유럽에는 지금도 자신들이 어둠 속에서 죄를 많이 지으면 제사장 존의 나라(존스 칸츄리: 조선 나라)에서 징계를 하러 매 천년마다 온다는 밀레니엄 신드럼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힘만 세고 야행성이며 동물적인 백인들을 망쳐놓은 것은 두 가지인데 둘 다 호모사피엔스의 원조인 조선에서 흘러 들어간 것으로 하나는 아리안 족들이 가지고 간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생각(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로 인한 사회조직인 노예 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수메르의 가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나중에 성경과 함께 가지고 들어간 피조물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었으며 이 두 가지가 발단이 되어 수메르 문명, 나일강 문명, 미케네, 그리스, 로마 문명을 만들고 이 지역에서 자연의 하느님은 죽고 로마의 식민 지배 사회가 되고 압제가 계속되자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 지금의 세상처럼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공산주의, 즉 인본주의 하나님의 세상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과 재림 그리고 심판을 예언한 이유가 그것이다.
다. 메시아 탄생 직전 유럽의 상황
유럽에서 처음에 예수는 동시대인들이나 당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된 것 같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 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시대 역사 학자들의 저서에 예수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는 신약 성경 외애는 어디에도 없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 만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4복음서를 증거물로 제시할 것이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4 복음서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포함하고는 있으나, 역사적 행적에 대한 기록물로 보기에는 많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최근의 방대한 연구 실적들은 크게 
(1)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신화설) 주장하는 류와 
(2) 예수의 실체는 인정하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와는 상치된 예수를 재구성해 내는 류로(재구성 파) 구분 할 수 있다. 재구성 파 안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여, 여러 모습의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성경 구절이 진짜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학회 회원
들의 투표로 결정, 발표하여 물의(?)를 빚는 서양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임인 예수 학회(Jesus Seminar)가 이 재 구성 파의 대표격이다. 어쩌면 "신성 모독"이 될 수도 있는 학설들이 자유로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을 우리가 무시 할 수만 없는 것은 이들이 양심적인 학자들이며, 왜곡된 기복 신앙과 무지한 성경 지식에서 기인하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부작용에, 최소한도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예수의 기록이 전해지는 책들 중에는 타시투스Tacitus(AD 55~120)라는 로마의 역사가가 쓴 책에서 짤막히 예수라는 인물이 십자가 처형에 처해졌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예수의 처형이 있은 후 약 80년 정도 지난 AD 112 년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미 예수 신화가 로마에도 널리 보급된 후의 일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더구나 동시대 다른 역사가들은 Tacitus를 기독교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 AD93년에 출간된 죠세푸스(AD37년 출생)의 "유태인 연대기" (Jewish Antiquities)에도 예수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두 군데("증언" 구절과 "형제"구절) 있으나, 학자들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신화 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 먼저 믿을 수 없는 부분은 "연대기"의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조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증언"구절은 324 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형제"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연대기가 발간된 게 93년경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 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연대기는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도,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백 년이 넘도록, "조세푸스"의 저술을 잘 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구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조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조세푸스"의 책을 읽어 본 "오리겐"도 "조세푸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을 뿐이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조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 "오리겐"은 "형제"구절은 읽었는데 "증언"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증언" 구절은 그 후에 첨가되었다고 보여진다.
■ "조세푸스"의 책 "유태인 전쟁"은 "안티오쿠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태인 연대기" 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되었는데 "유태인 전쟁"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증언"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 유세비우스 본인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 해낸 이 증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유태인 "조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래서 "조셉 윌레스"는, 기독교의 문서변조를 증명하기가 "예상 밖으로 쉬웠다"고 하였다. "문서변조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부들 자신의 서술과 구교의 교회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예수를 찾아서>중에서 ]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가 실존인물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역사기록은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타시투스, 수에토니우스, 플리니, 탈루스 조세푸스 등의 기록들은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는 사실의 기록이라고 보기 어렵거나 위조된 것이라고 의심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렇게 기록이 없는 걸까? 사후에도 동시대의 동향인들(심지어 부모까지)이 그렇게 많이 살아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개인에 대한 관심이 그토록 없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은 핍박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일까? 로마인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신학자를 포함)은 사상이나 종교에 매우 관대했던 로마의 법률 등을 고려하면 그 시대, 그 곳에서 기록도 못할 정도의 핍박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더 비중을 둔다. 기독교인들은 단군을 신화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보다 무려 2,000 뒤에 탄생하고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신화로 간주될 정도면 정말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아닌가? [출처: 한국기독교성서포럼] 
라. 당시 그 밖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 
■ 예수가 메시아로 조작되었을 가능성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창조되었을 가능성마저 제시하고 있다. 실제 예수라는 인물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성서에 그려진 내용처럼 그런 인물이 아닐 확률이 근세의 연구 결과물들에 의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신약의 예수는 Paul(바울)과 그 추종자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인물로 재구성과 재 포장을 통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서양의 철학자 칸트, 피히테, 셸링 등에 의해 신약 속의 바울 사상이 구별되어 지고 에른스트 카제만(Ernest Kasemann)같은 신학자들이 나타나, 기존 기독교 교단에서 절대 금기시하는 의심을 품기에 이른다. "기독교는 바울에 관한 종교다.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을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대치해 놓았다." - 빌헬름 네슬(Wilhelm Nestle). 신약성서가 바울의 사상이라거나 원시 기독교 교리에 바울 주의 사상과 역사 끼워 넣기를 통해 만들어진 사상 최대의 집필진을 가진 총체적 종합서로 평가를 받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기독교를 바울 교라고까지 평하고 있을 정도니까... 이러한 것은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이나 헬뭇 쾨스터(Helmut Koester) 등이 신학적으로 정립한 바 있다. 
■ 예수의 존재에 관한 의문? 
초기 로마제국시대에는 수많은 판본의 사도행전과 고백록, 서한, 문서들이 지하에서 편집되고 수정되었다. 그러다 이들 수많은 판본의 성경들 중에서 대부분은 교단의 주류에 의해서 모두 소각 당하고 파묻어졌다. 그 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판본은 19세기까지 교황청에 의하여 공개 금지되다가 몇몇은 햇빛을 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예수는 목수 요셉이 술 취한 사이에 외간남자가 마리아를 범하여 낳았다"(마케도니아에 포교하던 사도들의 기록), "어린 예수는 벌써부터 신의 아들임을 현실로 나타내셨다. 동네 아이들이 사생아라 놀리자 어린 예수께서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와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들 성경들이 적어도 서기 320년 무렵까지는 일반에 유포되던 판본의 하나였고 공식적인 성경 편찬 과정에서 모두 의도적으로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누락의 이유는 판본의 정확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내용이 일반에 알려질 경우 신앙심을 떨어뜨릴 가능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seenew.htm


2. 신약 성경 개요
가. 신약의 뜻

성경전서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있다. 즉 구약과 신약이다. 그런데 신약이라는 He Kaine Diatheke(헤 카이네 디아테케)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새 계약, 또는 새 언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옛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이(출24:1-8) 구약이고 예수가 최후 만찬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맺은 것이 신약(눅22:14-20)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이 잔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상징적으로 한 말이다.

신약성서는 27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적 성격에 따라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처음 4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복음서 
(2) 역사서 1권-사도행전은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처음 3권을 공관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서로 다른 견지에서 예수님의 생활과 사역을 똑같이 기술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한 쌍을 이루는 책으로서 예수께서 이 세상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이 활동한 이야기가 계속 기록되고 있으며 특히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울의 생애가 강조되고 있다. 다음 21권의 책은 서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다음 책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1서 등은 주로 교리적(Doctrinal)책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기록되었는데 각 교회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요소들과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실천을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것들은 아마 로마서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논증하려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주로 교회들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비공식으로 다루면서 그 해결책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책들-디모데 전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요한2,3서등-은 개인적인 책들이다. 이 책들은 어떤 무리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사사로운 서신으로 쓴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가르치고 충고하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의 수취인들이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이 책들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개인적 서신으로 보다는 교회들을 위한 공공의 문서로서 받아 드린 것이다. 한편 위의 서신들을 저자에 따라서 분류하여 바울 서신, 히브리서 및 보통서신으로 나누기도 한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예언적(Prophetic)인 책이다. 이 책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환상들과 초자연적 현상들이 포함되어 있어 크게 상징적인 스타일을 취하고 있어서 계시문학에 속한다. 
나. 신약 책들의 기원
최초의 완역성서는 옥스퍼드의 학자 존 위클리프와 그의 후계자들의 번역본이며 이 필사본은 1420년경에 번역된 신약성서로 오늘날 현존하는 170권 중 의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거의 20년 동안은 신약의 어느 책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이 기록되기까지는 약 65년의 세월이 경과하였다. 다시 말해서 주 후 50년경에 야고보서가 최초로 기록되고 그리고 96년경에 요한계시록이 최후로 기록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초대교회는 유일한 성서로 구약성서를 소유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구약에 기초해서 그리스도를 전하였으며 (행2:16-21), 스데반은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의 설교에서 인용하였고(행7:), 빌립은 이사야 53장을 가지고 에디오피아의 한 내시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행8:). 그리고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 구약을 인용해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이렇게 초대그리스도 인들이 구약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복음의 사역자 들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 승천에 관한 이야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자서전을 기록하시거나, 또는 가르치신 교훈과 행하신 기사와 이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기록하신 일이 없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그런 것을 기록하라고 명하신 바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다만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의 분부대로 복음을 구두로 선포하였다. 더욱이 예수가 승천(?)한 후 얼마동안은 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여 예수님의 생애나 교훈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기록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데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거기에다 근거 없는 전설이 끼어 들게되고 교회 안에는 일정한 교리와 규칙이 없어서 신앙과 사상에 혼란이 생기게 되고 이단 사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실정아래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생애와 교훈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현재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대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가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 아니고 서신들이 먼저 기록되었다. 바울은 복음에 열심 있는 사도였다. 그는 갈라디아와 소아시아 각지를 비롯해서 멀리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여 그 결과 각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많은 그리스 도 인들을 얻게 되었다.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인 각 곳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해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고 그리고 이에 대한 사실을 권위 있게 기록한 해석도 필요하였다. 한편 교회와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 안에는 개인적으로나 또는 단체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자연히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서 소식만 듣게 되는 경우 바울을 위시한 다른 사도와 전도자들은 불가불 붓을 들어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 서신과 기타 서신은 바로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기록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와 때를 거의 같이 하거나 또는 조금 뒤늦게 그리스도 생애 자체에 대한 권위 있는 설명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수에 관한 허다한 전설이 그 냥 구전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약간의 문서로 기록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문서를 재료로 하여 오늘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이 기록되었다. 한편 사도 행전은 사도 시대에 권위 있는 역사를 기록할 필요성으로 인해 기록되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만물의 최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제시하기 위해서 기록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에게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들, 계시록으로 알려진 영감 받은 권위 있는 문헌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신약과 나란히 구약을 병용하였던 것이다. 
다. 신약 성경를 기록한 언어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고전 헬라어와 일반 헬라어의 두 종류가 있었다. 일반 헬라어를 코이네(koine) 라고 하는데 신약성서는 바로 이 코이네로 기록되었다. 이 일반적인 헬라어인 코이네는 고전 헬라어에 비해서 속된 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본래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고 로마 권 판도에 통속적 세계어인 헬라어 코이네를 통용시켰다. 그것은 당시 세계 공통어인 코이네를 보급 시켜서 범 세계적인 문화교류와 정식적인 통일을 기도한데서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누구나 읽을 수가 있었고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라. 정경으로서의 인정
정경은 헬라어 캐논(Canon) 에서 온 말로서 둥근 자 막대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주전 776년이래 올림픽 경기에서 판정을 내리는데 캐논을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여러 종교 문헌 가운데서 진위를 한정하여 신앙의 기준이 되는 책을 골라서 정경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경는 기독교인의 정경이다. 이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지금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만이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다 더 많은 복음서들이 복음서가 기록된 후에도 교계에 나돌아 다녔다. 그밖에도 많은 행전 들, 서신들 그리고 묵시들이 유포되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책으로 로마의 클레멘트가 기록한 서신인 클레멘트 1서, 12사도의 교훈으로 알려진 디다케, 바나바 서신, 바울 행전, 허마의 목양서 및 베드로의 묵시를 들 수가 있다. 이러한 책들이 일부에서는 신약의 문헌들과 동등한 권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또 어떤 문헌은 어떤 한 지방에서는 성서로 인정받아 사용되었으나 다른 지 방 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도 주 후 2세기 말에 이르러 신약은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성경을 인정하는 것과 같이 인정을 받는 동일한 책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들이 반드시 정경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요구되는 4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사도성(apostolicity)이다. 
책이 반드시 사도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 또는 책이 사도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을 경우라도 적어도 그 책의 저자가 사도와의 관계를 뒷받침해서 자기가 쓴 책이 사도가 기록한 책과 동일 수준에 오르도록 되어있느냐는 문제이다. 
둘째는 내용(contents)이다. 
어떤 책의 내용이 정경의 계열에 오를 만큼 내용이 영적 성격을 띠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세째는 보편성(universality)이다. 
그 책이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아 용납되었느냐 하는 문제다. 
네째는 영감성(inspiration)이다. 
그 책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증거를 내보이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것이 최종적인 시험인데 이상의 모든 것이 결국은 영감 성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위와 같이 4가지 조건에 의해서 정경으로 받아들이는데 대체로 두 그룹이 있었다. 하나는 만민이 보편적으로 논란이 없이 정경으로 인정했던 책들(이것을 호모로구메나 Homologoumena-라고 한다)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경으로 인정 받기에 다소간 반대를 당했던 책들(이것을 안티레고메나 antilegomena-라고 한다)이 있었다. 오늘날의 성서가운데서 초대교회 소수 지도자들에게 정경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했던 책은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2서, 요한3서, 히브리서, 및 계시록 등의 책이었고 나머지 책들은 아무 논란 없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정경을 재정 할 때에 우연히 어떤 개인의 의견으로 단시일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사람의 신중한 연구와 토의 끝에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정경을 재정 하는 운동이 개인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주 후 140년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였다. 그 후에도 189년 이레니어스(Irenaeus)와 367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등에 의하여 정경이 선포되었으나 이러한 선포나 주장은 다 개인의 의견이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이를 채택할 수가 없었다. 3세기 동안에 걸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티레고메나의 정경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는데 동방 교회에서는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반대하는가 하면 서방 세계에서는 히브리서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4세기 동안에 걸친 정경에 대한 논란은 서방세계에서 먼저 일단락 되었다. 그간에 여러 번 종교회의가 있었지만 정경에 관한 문제를 회의가 취급하지 않았었다. 397년 칼타고에서 어거스틴이 친히 참석한 제 3차 종교회의에서 처음으로 정경에 대해 회의상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가운데에는 (정경으로 인정받은 책)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책도 성경이란 이름 아래 교회에서 읽을수 없노라고 했다. 그리고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책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오늘의 27권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었다. 이 회의 후로는 서방 교회에서는 어느 책에 대해서도 반발이 없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그 후에도 일부 책에 대한 논쟁이 한동안 계속 되었으나 5세기 말에 가서 정경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후 현대에 와서 1546년 트렌트(Trent)회의에서 다시 한번 27권을 신약의 정경으로 선포하였으며 1643년 위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는 27권의 이름을 밝혀 다 싣고 있다. 위에서 본대로 약 250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경합되어 신약성서가 27권으로 낙착된 것이다. 성서가 27권으로 낙착된 과정은 예수의 영향을 받은 백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마. 신약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각 책의 주제
1. 마태복음 : 메시야의 복음 (왕되신 예수)
2. 마가복음 :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섬기러 오신 예수)
3. 누가복음 : 구주의 복음(잃은 자를 찾으러오신 예수)
4. 요한복음 : 믿음의 복음(하나님의 아들 예수)
5. 사도행전 : 성령의 복음
6. 로 마 서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7. 고린도전서 :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
8. 고린도후서 : 바울의 사역 편지
9. 갈라디아서 : 그리스도인의 자유
10.에베소서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연합
11.빌립보서 : 그리스도 안의 기쁨
12.골로새서 : 그리스도의 우월
13.데살로니가전서: 새 교회의 성장
14.데살로니가후서: 교회의 기대(주의 재림과 교회)
15.디모데전서 : 젊은 교역자 에게 주는 충고
16.디모데후서 : 복음 위해 싸우는 예수의 군병
17.디 도 서 : 건전한 교회
18.빌레몬서 :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
19.히브리서 : 영원하신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20.야고보서 : 생활의 표준(산 믿음)
21.베드로 전서 : 고난을 통한 구원(산 소망)
22.베드로 후서 : 하나님의 참 지식(보배로운 믿음)
23.요한 1서 : 영생의 확신(하나님의 참 사랑)
24.요한 2서 : 충성(참 진리)
25.요한 3서 : 진리의 실천
26.유 다 서 : 배교에 대한 경고
27.요한 계시록 :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6. 신약의 저술 시기, 저자, 저작 장소
1. 마태복음은 80-90경 디아스포라 출신의 한 레위인 그리스도교도가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썼다고 하며 그는 사도 마태와는 다른 인물이다
2. 마가복음은 50-70경 한 레위인 그리스도 교도가 갈릴레아(또는 로마?)에서 썼으며 16장9절 이하는 후세의 사본가가 가필을 하였다. 
3.누가복음은 저자가 바울의 제자 누가라고 하나 바울 계통의 이방인 그리스도교도가 80-90경 불명의 장소에서 누가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한다. 
4 요한복음은 그노시스 파가 아닌 그리스도 교도로써 여러 종교와 사상을 잘 아는 인물이 0-100년 어간에 시리아에서 썼고 후에 유대 계와 헬레네즘계의 교회적 편집가필이 있었다고 본다. 
5 사도행전은 80-90년 경 누가복음의 경우와 같으며 사실은 누가복음의 제2부가 된다.
6 로마서는 57-58년경 바울이 고린도에서 썼고 그리스에 있는 미지의 로마교회 방문하면서 쓴 그의 사상적 자기소개이다.
7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55-56년 경 에베소에서 썼으며 그 목적은 소아시아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8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55-57년 경 마케도니아에서 썼다.
9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57-58? 에베소?에서 신앙 칭의론을 중심으로 썼다.
10에베소서는 제2의 바울이 80-100 경 소아시아에서 쓴 편지 형식의 교회론이다
11빌립보서는 바울이 57-61년 가이샤라 감옥에서 쓴 옥중편지이다.
12 골로새서는 바울 또는 제2의 바울이 58-100년 가이사랴의 옥중에서 쓴 편지
13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50년경? 고린도?에서 쓴 바울의 편지 중 가장 오랜 편지이다.
14 데살로니가 후서 제2바울의 문서로서 1세기말 불명의 장소에서 쓴 편지 체제의 종말론이다.
15 디모데 전서 제2바울의 편지 형태 문서로 통칭 목회서신이다.,
16 디모데 후서 동일저자에 의해 2세기초 불명의 장소에서 쓴 편지체제의 교회 운영의 교훈이다.
17 디도서
18 빌리몬 서 바울이 58-60 년 가이사랴?에서 쓴 개인에게 보내는 옥중 편지
19 히브리서 헬레니즘과 유대교를 잘 아는 인물이 80-90 유대인의 개종을 위해 쓴 신학이며 논문이다.
20 야고보서 어느 유대인이 야고보의 이름을 빌어 1세기말경 편지 체제로 쓴 바울주의 식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다. 
21 베드로전서 90-95 도미니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이 심했던 시절 로마?에서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 쓴 것으로 사도 베드로와는 무관하다. 
22 베드로후서 100-130경 미상 인물이 유다서를 자료로 썼다 
23 요한1서 요한복음의 영향 90-110 시리아? 편지가 아니라 신학논문을 받은사람
24 요한2서 23의 저자와 비슷하나 90-110 시리아? 실제의 편지
25 요한3서 다른사람?
26 유다서 유대인 그리스도교 1세기말에 불명서 2세기초
27 요한계시록 유대인 그리스도교도가 90-95년 경 소아시아에서 쓴 것으로 도미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아래 쓴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과 무관하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sumnew.htm


3. 공관복음
가 예수의 탄생
예수 탄생에 관한 이론은 1. 동정녀 탄생, 2.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여 살다가 로마 병사에게 겁탈을 당하여 사생아로 탄생, 3. 15세 때 성전을 지키던 로마병사 사이에 정분이 생겨 미혼모가 낳은 사생아 등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마리아와 로마병사 판델라와 정분을 통해(성폭행설도 있음.) 금지된 불장난 끝에 임신하자 판델라는 마리아를 버리고 군으로 가버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 마리아는 당시 부모가 모두 유개교의 절대 권력층인 레위인들이었고 아버지 요아킴이 대제사장이었던 관계로 성전에 있게 되었고 성전을 지키던 병사와 정분이 난 것 같다. 그래서 15세 된 마리아는 가난한 목수인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의 지역정세는 로마군의 지배 하에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로마의 전쟁사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로마 병사들에 의해 대부분의 유대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점령군 로마 병사로서 성소를 지키던 판델라가 당시 대제사장의 딸이었던 마리아를 강간하여 낳은 자식이라는 것이 유대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유태 5천년의 종교. 사상. 철학. 역사. 법률. 사회. 민속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정보가 전승된 유태 구전 율법 미슈나를 기록한 탈무드에는 예수의 행적에 대해 로마 병정 판데라의 아들 예수 (Jesus Ben Pandira)의 설교 전파에 대한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실제로 판델라의 묘비까지 발견되었다. 그리고 제5복음서로 지칭되는 외경 빌라도 행전에 보면 예수의 사생아 부분에 대한 논란이 기록되어 있는데 유태인 원로들이 예수 당신은 간통으로 태어났다고 외치는 기록도 남아 있다. (숨겨진 성서 109페이지, 세계의 종교 342페이지 참조) 
아래 9 항목들을 참고할 것.
1 예수가 판델라의 아들 이라는 것은 유대 기록 [Toledoth Yeshu] 에도 있다.
2 1세기 후반 로마학자 셀수스도 예수는 로마병사 판데라의 아들이라 했다.
3 삭제된 요세프스의 문서에도 예수는 로마병사 판데라의 아들이라 했다.[루브르 박물관]
4 독일 바트그로이츠나흐 마을에서 발견된 판델라묘비에도 예수는 판델라의 아들이라 했다. 
5 골고다로 끌려가기 전 대제사사장들의 법정에서 예수의 사정에 밝았다고 알려진 안나스가 "이 판델라의 자식아" 라고 조롱했다는 풍문.
6 일부 유대인 경전이 판델라를 예수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7 제인샤버그도 예수는 판델라의 아들이라 했다. 
8 세계의 종교 342P 에서도 예수는 판델라의 아들이라 했다.
9 사해사본 중 '빌라도 행전1장' 에도 예수는 간통으로 태어났다는 소문에 시달린다.

10. 판텔라는 에디오피아 출신 로마 용병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석 학자들이 재현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흑인과 유대계의 혼혈로 보이며 나중에 예수가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대신 짊어진 사람이 에디오피아인 시몬이었기 때문이다.

레위 미혼녀 사생아가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으로 둔갑하게된 경위를 알아보자. 
1. 우선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확정된 시기가 예수가 탄생한지 350년이 지난 콘스탄틴 집권 이후인 교황 율리우스 1세(재위 337~352)때였음을 미루어 이때 비로소 예수 탄생에 대한 로마 정권과 레위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의 합의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2. 로마 정권으로써는 아무리 그래도 메시아는 로마인의 핏줄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고 유대교 측은 위대한 레위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고 그것도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기독교도들은 처음부터 찬성했을 것으로 본다. 3. 이렇게 되면 레위인들에게는 로마가 원하는 예수가 메시아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어서 끝까지 반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로마는 그 동정녀를 위대한 성모로 1천년을 모시는 것을 조건으로 일괄 합의했을 가는성이 크다. 즉 로만 가톨릭의 성모 숭배는 레위의 미혼녀 숭배인 것이다. 
나. 예수의 청년 시절
"독실한 불교도였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 때 유대 법에 따라 가장권(家長權)을 갖고 결혼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났다. 이사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에서 6년 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이어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大師)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간음한 여인의 예)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 혜일대사 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 문헌(누가복음)이 다만 '그때까지(30세) 예수는 사막에 있었다'고만 막연히 기록되고 있다. 전 한양대 비교종교학 석좌 교수인 민희식 교수는 "불교 측 문헌이 정확한 이유는 순교 당시의 견문기록임에 반해, 기독교 측 문헌은 오랜 세월이 경과된 뒤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까닭"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확립을 위해 예수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히 기술한 『토마스(도마)복음서』 등이 지나치게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 바이블 편집에서 삭제했다는 것. 기독교의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법화경(法華經: 석가의 구도 입문 과정에 관한 기록)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민교수는 장자궁자(長子窮子)와 기독교의 탕자의 비유 외에도 삼위일체의 삼신불에서의 유래 등 많은 부분을 예로 들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의 뜻인 메시아의 어원은 불교에서 말세중생을 구제하러 올 미래 불인 미륵(마하트리아 혹은 메테아)에서 유래했다는 일화를 비롯,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의 이름은 한역불전(漢譯佛典)의 정반왕(석가모니의 부친)의 서양식 발음(이태리'조바니', 프랑스'장', 영국'존')에서 나왔다는 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고 민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 예수 생애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이들 불교적 자료는 한때 리처드 보크가 실제로 인도, 티벳 등을 답사, 다큐멘터리 필름(The Lost years of Jesus)에 담겨진 적도 있다고 한다. [ 주간중앙 1986. 10. 26 ] 그리고 예수가 이렇게 동양으로 구도의 여행을 다닌 사실은 리바이 도우링이라는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방법인 아카샤(akasha)라는, 우주심(宇宙心)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기록(아카식 레코드)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제3의 복음서 『보병궁 복음서』에도 나와 있다. 1884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목사가 되었고, 20세에 종군목사(종군목사)로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사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천재적인 목사 리바이 도우링(1911. 69세 사망)이 쓴 『보병궁 복음서』(성약성서)에는 4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출생과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 등 4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병궁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인도에 가게 된 동기는 인도의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했다가 총명한 예수를 보고 인도로 데려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당시 예수는 12살이었고,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 승려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인도의 최고가는 명의(名醫) 우도라카의 제자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치료법을 배우며 베다 및 불경을 공부한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승려들의 정죄에 걸려, 죽음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다. 그 뒤 성인 피자빠찌의 소개로 밀교(密敎)의 대성자인 멩그스테에게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여기서 이 절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을 그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읽었으며 이 곳을 떠날 때 광명의 부처라는 찬사를 받은 예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24년 전에 자신을 찾아준 동방박사 3인의 마기교 승려를 찾아뵈었다. 이윽고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예수는 어머니의 애정 어린 환대를 받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환대를 받지 못한다.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 미리암에게만 지난 날 구도의 과정에서 겪었던 사연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희랍으로 떠났다. 희랍의 교사 중에서 아폴로라는 성자와 함께 교사들을 가르치며 희랍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25세에 다시 이집트 조안에 가서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이라는 신전에 입회하기를 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여기서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 생사의 문제, 또한 태양계 바깥의 비밀을 배웠다. 그리고 사자의 방에서 일을 마친 뒤에 '보랏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시험을 이겨내어 '그리스도'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상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인데 인도에서의 행적 등 학자들의 연구내용과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석가와 공자가 그러했듯이 한 사람의 성인(聖人)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고 또 많은 스승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종교회의를 통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기독교 교리가 아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 진정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 예수의 죽음
- 예수의 사망 확인 관련 사건
유럽에서는 1982년 성혈과 성배라는 책이 발간되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 프랑스에 망명하여 80여세에 사망하였고 현재까지 예수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책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고 급기야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 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 )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 예수무덤 발견 기사 2007.2.27 [중앙일보] 
캐머런 감독 `유골함 이름 예수 가족과 일치`
성경 학자들 `당시엔 예수, 마리아는 흔한 이름` 
영화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제임스 캐머런 감독 등이 2007년 2월26일 미국 뉴욕에서 예수의 유골이 보관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석관을 공개했다. 이들은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며 "1980년 예루살렘 남부 탈피오트에서 발견된 이 석관에는 그들의 유골이 들어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뉴욕 AP= 연합뉴스] "여러분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유골함에는 예수와 그의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의 뼈가 담겨 있었을 겁니다."25일 오전 미국 뉴욕 맨해튼의 뉴욕공공도서관 홀. 영화 '타이타닉'으로 유명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과 고고학.통계학 교수, 신학자 등 8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설명해 나갔다. 이들은 "27년 전 예루살렘 남부 탈피요트 지역에서 발견된 무덤이 예수와 그의 가족들의 묘가 거의 확실하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폈다. 특히 예수와 막달레나의 유골함이라며 작은 석관 두 개가 공개되자 300여 명의 취재진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 설명대로라면 예수가 부활 후 승천했다는 기독교의 근본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지기 때문이다. 캐머런 등은 자신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예수의 잃어버린 무덤'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며 다음달 4일(한국시간) 월드 디스커버리 채널, 영국의 채널4, 캐나다의 비전, 이스라엘의 채널8 등을 통해 각국에 방영될 예정이다. 석관에 고대문자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 문화재 당국이 26일 공개한 것이다. [AP=연합뉴스] 문제의 동굴무덤 속에는 10개의 유골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중 여섯 개에 '요셉의 아들 예수' '마리아' '마태' '요셉' '예수의 아들 유다' '매리엄'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 요셉은 성경에서 예수의 형제로 나오며 매리엄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원래 이름이다. 하나같이 예수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다. 이로 인해 캐머런 등은 이 무덤이 예수 가족의 묘가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예수와 막달레나가 부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캐머런 등은 "유골함 내 DNA 검사 결과 예수와 막달레나 사이의 혈연 관계는 전혀 없다는 게 밝혀졌다"며 "이는 이들이 부부였음을 시사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성경 학자들은 "1세기 당시 예수와 마리아 등은 무척 흔한 이름이어서 속단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석관이 묻혀 있던 예루살렘 남부의 동굴 무덤 입구. [AP=연합뉴스] 이에 캐머런은 "무덤에서 발견된 이름들이 흔했던 건 사실이나 성경에 나온 예수의 주변 인물들과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극히 적다"고 응수했다. 캐나다 토론토대 앙드레이 퓨어버거 교수는 "통계학적으로 문제의 무덤이 예수 가족의 묘가 아닐 확률은 600분의 1에 불과하다"며 캐머런의 주장을 지지했다. 한 미국 여기자가 "그 주장이 맞다면 예수가 승천했다는 성경 얘기는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종교학자인 제임스 타보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예수에게는 영적인 신체와 육체적 신체가 공존해 있었을 것"이라며 "육체적인 부분은 남았으되 영적인 신체는 승천했을 것이므로 성경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주) 다빈치코드 : 다빈치 코드에서는 기독교 교회는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비판하는 기독교도들도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다빈치 코드의 비밀》(ISBN 8991124178)에서 저자 마가렛 스타버드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했던 것이 틀림없으며, 성배는 예수의 후손을 잉태한 막달라 마리아이며 남프랑스로 피신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심각한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마가렛 스타버드 자신도 책 서문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설을 반박하기 위한 글을 쓰기 위해 준비하다가 자기 자신이 그 설을 믿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문제가 된 책은 《성혈과 성배》(ISBN 8954403425)이며, 이 책에 기반한 소설이 다빈치 코드다.

예수의 부활에 한 가장 과학적인 추론은 당시 레위 제사장의 딸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된 요셉이 로마 당국에 뇌물을 주고 골고다로 이동 중 사람을 구스 사람 시몬으로 바꾸고 예수는 뒤로 빠진 것이 분명하다. 사흘 후 다시 나타나 제자들에게 보린 예수는 죽지 않은 예수에 불과하며 마리아는 이 연출에 끝까지 조연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라. 예수의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그가 공식적인 사역을 한 3년 반의 기간 중 사역 기간을 말한다. 예수의 공생애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서양인들은 단순히 그들의 모든 죄악을 해결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데 해줄 메시아가 나타난 것이지만 사실은 인본주의 하나님을 그들에게서 쫒아 내기 위해 자연주의 하느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 이름을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당시 하느님, 중동 발음으로는 아누님을 거룩하게 부르지 않고 여호와 또는 수메르의 전쟁승리신인 말뚝 신인 멜기세덱만 거룩하게 부르는 유럽인들을 경계하신 기도문이고 공생애에서 거의 모든 교훈, 비유, 기적인 “들에 핀 백합화”, 치료은사, 포도주로 결혼 축복, 마음이 복이다(산상 수훈). 병 고침, 물 위를 건느심, 오병 이어, 칠병 이어의 기적, 부자에 대한 비난, 죽은 자를 살리심 등등“은 모두 당시 인간이 만든 로마의 제도나 유대인의 법규에서 온 것이 아니고 자연을 예를 들어 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과 백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신인 대문자 갓(God)이나 자식과 재물을 많이 주는 재물의 하나님으로 이름을 바꾸어 성경을 기록하고 후대에 전하여 신약의 하느님도 유대인의 돈과 백인들의 인본주의의 하나님과 혼합되게 만들었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유대의 나사렛에 어떤 신비스러운 청년이 나타나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자를 고치고 죄를 사해 주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고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했고 자신은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말했고 이 소식이 부근 마을에 두루 퍼져 나갔음을 상상해보자 물론 유대교의 실권을 쥐고 있는 래위인들은 그를 죽이려 했고 결국 죽이고 말았으나 그에 대한 경외심과 그의 말은 서민들에게 힘이 있어 측근들을 통해 자꾸만 퍼져나갔다. 즉 예수에 관한 이러한 소문은 유대를 중심으로 기워 후 33년 이후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이 신약에서 예수의 공생애만 믿을 수 있고 나머지는 이러한 현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보태거나 빼거나, 추가한 
-1. 예수를 따르던 기독교인들과
-2.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구약을 신약에 추가하거나 예수의 모든 행적이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고 신약을 조작한 레위인들과 
-3. 예수 믿는 현상을 국가 권력 유지, 강화에 이용하려고 정치적으로 묵인하고 이들과 합세한 콘스탄틴 등 로마 정권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공생애 부분에 기록된 그의 교훈, 비유, 이적들이다
1) 예수의 교훈
1.회개와 주께로 나아옴 
2.복음을 믿음 
3.거듭남 
4.성령받음과 병고침 
5.예수님을 따름 
6.기도 
7.믿음 
8.성경에서 찾음 
9.너희 빛을 비취라 
10.그리스도의 재림 
11.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사랑 
12.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 
13.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 
14.탐욕 
15.위선 
16.온유 
17.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 
18.온전한 사랑
19.죽도록 충성함 
20.복음전파 
21.지혜
2) 예수의 비유
등경 위의 등불(마5:14-15, 막4:21, 눅8:6,11:33) 
반석 위에 지은 집(마7:24-27, 눅6:47-49) 
낡은 옷에 붙이는 생베 조각(마9:16, 막2:21, 눅5:36)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은 새 포도주(마9:17, 막2:22, 눅5:37-38) 
두 명의 빚진 자의 비유(눅7:41-43) 
표적을 구하는 자의 비유(마12:38-45, 눅11:16, 24-3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6-20) 
혼인 잔치의 비유(눅12:36-38)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눅12:42-48)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13:6-9)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13:3-9, 막4:3-20, 눅8:4-15) 
알곡과 가라지 비유(마13:24-30) 
겨자씨 비유(마13:31-32, 막4:31-32, 눅13:18-19) 
누룩 비유(마13:33, 눅13:20-21) 
감추인 보화 비유(마13:44) 
값진 진주 비유(마13:45-46) 
그물 비유(마13:47-51) 
잃은 양의 비유(마18:12-14)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18:23-35)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11:5-13) 
선한 목자의 비유(요10:1-17) 
좁은 문 비유(눅13:23-30) 
큰 잔치의 비유(눅14:15-24) 
잃은 양의 비유(눅15:1-7) 
열 드라크마 비유(눅15:8-10) 
돌아온 탕자의 비유(눅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1-13)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19-31) 
종의 의무 비유(눅17:5-10)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1-8)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눅18:9-14) 
포도원 품 군의 비유(마20:1-16) 
므나의 비유(눅19:13-25) 
두 아들의 비유(마21:28-32) 
악한 농부의 비유(마21:33-41, 막12:1-9, 눅20:9-16) 
혼인 잔치의 비유(마22:1-14) 
열 처녀의 비유(마25:1-13) 
달란트 비유(마25:14-30)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 
참포도나무 비유(요15:1-11) 
3) 예수의 이적
문둥 병자 치유: 갈릴리 지방: 마 8:2,3; 막 1:40-42; 눅 5:2,13
베드로의 장모가 치유된 직후 예수님 일행을 섬김 마 8:14,15; 막 1:30, 31; 눅 4:38,39
중풍병자 치유: 친구들의 믿음과 우정, 열정이 강조되고 주님의 죄 사하시는 능력이 강조됨 마 9:2-7; 막 2:3-12; 눅 5:18-25
혈루병 앓는 여자 치유: 예수를 향한 여인의 간절한 심정 강조 됨 마 9:20-22; 막 5:25-29; 눅 8:43-48
두 소경 치유: 마 9:27-31
한 편 손 마른 자 치유: 안식일 논쟁을 야기시킴 마 12:10-13; 막 3:1-5; 눅 6:6-10
바디매오와 다른 한 소경 치유: 마 20:29-34; 막10:46-52; 눅 18:35-43
귀먹고 벙어리 된 자 치유 마 15:29-31; 막 7:31-37
벳새다의 소경 칭 : 막 8:22-26
고창 병 든 자 치유: 눅 14:1-6
열 문둥 병자 치유: 치유된 자 중 한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함
눅 17:11-19
귀 잘린 말고 치유: 눅 22:50,51
왕의 신하의 아들을 보지 않고도 말씀으로만 고쳐주심 요 4:46-54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 오래된 질병도 단숨에 고치심 요 5:1-9
나면서 소경된 자도 고치심 요 9:1-41
정신적 질환 치유 및 축사(逐邪): 돼지 떼 몰사 사건이 뒤따라 일어 남 마 8:28-34; 막 5:1-15; 눅 8:27-35
귀신들린 벙어리 치유: 마 9:32-34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 치유: 바리새인들의 비방을 받음 마 12:22; 눅 11:14
가나안 여자(이방인)의 딸 치유 마 15:21-27; 막 7:24-30
간질하는 소년을 변화 산 근방에서 아비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 주심 마 17:14-18; 막 9:17-29; 눅 9:38-43
회당의 귀신들린 자,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봄 막 23:26; 눅 4:33-35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 18년 된 귀신을 단숨에 쫓으심 눅 13:11-13
4) 자연 현상에 대한 이적
갈릴리 호수 풍랑을 잔잔케 하심 마 8:23-27; 막 4:37-41; 눅 8:22-25
갈릴리 호숫가에서 오천 명을 먹이심 마 14:15-21; 막 6:35-44; 눅 9:12-17; 요 6:5-13
갈릴리 호수의 물 위를 걸으심 마 14:25; 막 6:48-51; 요 6:19-21
사천 명을 먹이심 마 14:25; 막 6:48-51
가버나움에서 물고기 입속에서 돈을 꺼냄 마 17:24-27
예루살렘에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 마 21:18-22; 막 11:12-26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눅 5:1-1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요 2:1-11
부활 후 갈릴리 호수에서 많은 물고기 잡게 하심 요 21:1-11
가버나움의 야이로의 딸을 사망에서 구하심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심 마 9:18-25; 막 5:22-42; 눅 8:41-56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눅 7:11-15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1-14
마. 공관복음의 정경화 과정
초기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예수의 출생 장소 혹은 출생 방법들은 전혀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지구의 종말은 곧 올 것이었고 전달자 예수는 그 사실과 살아 있는 동안 오게 될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라는 것을 경고했을 뿐이다. 예수의 계시적 메시지와 회개하고 주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감안할 때, 누구의 후손이라는 전기는 그다지 불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구전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짤막하고 간결한 pericopes(짧은 경구)로 보존되었고, 예수의 추종자들은, 당시에 일어난 묵시적 운동의 특성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들을 적어 놓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자,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도들은 그동안 간결한 pericopes(짧은 경구)로 전달되었던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씩 모아져서 신약성경이 형성되게 한다.(신약성경은 기원후 1세기 이후에나 등장함. 가장 빨라도 기원 후 90년 이전에 등장하지는 않았음) 구전으로 전승되던 짤막한 예수의 가르침의 조각들이었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우선이지, 그의 출생 같은 것은 언급이 없었다. 이러한 점은 공관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마태복음은 그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복음서들이었으며 마가복음이 가장 많이 퍼져 있었다. 예수의 재림이 계속 미루어지자, 계속해서 등장하는 개종자들과 로마제국의 탄압에 그때부터 복음서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헬레니즘의 로마제국 내에 전파하기 위해서 그들의 신과 같은 것들을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사실상, 히브리의 가르침에는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나야 한다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 이사야서 역시 위에서 언급했지만, 젊은 여인이 메시아를 잉태한다고 적혀있는걸, 고의적으로 처녀가 잉태했다는 그리스 판 70인 역을 인용했다. 결국 초기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한다는 방침에 등을 돌리고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소개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가장 많이 알려진 마가 복음은 요르단 강의 세례자와 예수가 거기에서 세례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인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초기 버전들도 역시 세례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이방인들의 신과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 예수의 생애를 그리스의 구세주들처럼 손질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유포되어 있었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어린 시절 전기를 추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태복음의 처음 두개의 장과 누가복음의 처음 세 개의 장은 이교도들의 신비 종파의 신들과 같이 신성하게 태어난 구세주 신만을 받아들이려는 그리스 화 된 사람들에 의해 2 세기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두 복음서에 서로 독립적으로 글을 추가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그들은 사소한 내용에서는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예수의 족보가 두복음서가 천차만별을 보이고 있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사는 요셉에게, 누가복음에 따르면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천사 가브리엘의 마리아의 임신선언은 누가복음에는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마태복음에는 그 후에 나타난다. 또, 마태복음의 이사야서의 인용은 고의적으로 70인 역을 인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이사야서의 본문만 가지고서는 그 구절이 예수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은 근거가 없다. 이사야는 특별히 예언자가 아하스 왕에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에게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유대와 전투를 벌이지 않게 될 것임을 확신시키면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한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지금은 동정인 한 여인이 곧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면 정치적인 힘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구절일 뿐이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의 구약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70인 역을 인용하고, 이사야의 구절을 맥락에서 잘라내어 예수의 동정녀 출산을 통해 성취된 예언이라는 식으로 끼워 맞춰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 어린아이가 아직 아기일 동안에 다마스커스의 보화와 사마리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이 아시리아에 의해 약탈될 것이라고 한 점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이사야 8장3~4절에서 맥락이 잘렸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침략과 그 결과인 노획은 기원전 7 세기에 실제로 일어났다. 결국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이 후에 덧붙여졌으며, 헬레니즘의 로마제국 내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예수의 동정녀탄생에 대해서 셀수스(Celsus, 기원후 180)와 같은 이교도 철학자들이 초대기독교도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기도 했는데, 셀수스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 설화 뒤에 담긴 동기를 간파하고 이교도 구세주 신들을 모방하기 위해 예수가 동정녀 출생을 했다고 한다며 그리스도교인들을 비난했다. 첼수스의 신랄한 비난에 기독교도의 변명은 방어적인 자세를 완전히 벗어 던지지 못했다. 유세비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초기 교부들은 예수를 이교도 신들과 비교하거나 강하게 대비시키면서, 만일 예수가 거짓이라면, 미트라와 헤라클레스도 그렇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동안,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여전히 이교도적 뿌리에 매달려 있었고 어째서 자신들의 신이 미트라, 디오니소스, 혹은 기타 그리스나 로마 신들과 동등하게 간주되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보수적인 위치에서(conservative status quo position) 기독교에 반대되는 주장을 펴던 로마 비평가들과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어째서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을 지위가 확인된 그리스, 로마신들의 표준적인 레퍼토리를 가진 신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기를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구세주 신이 동정녀 출생이라는 이교도적 생각은 매우 완고했다. 그러한 이야기(동정녀 출생)가 종교적인 파벌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준 한 가지 요인은 Gilbert Murray가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교의 구세주 신들이 종종 동정녀 출생임을 지적했다. 아버지 신이 인류에게 구세주인 자신의 아들을 주는데, 이는 여신이나 인간을 임신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구세주를 출생을 위해서 임신은 육욕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 행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이오는 신성한 손위에 누움으로써 임신하게 되었고, 다나이는 황금빛 태양광에 의해 임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디에서도 공관복음의 가필이 심하게 뿌리내렸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처럼 동정녀 출생이 강하게 강조되지는 않았다. 동정녀 출생의 교리는, 그것 없이는 어떠한 예언자나 구세주 신도 신성하게 수태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어떠한 종교의 설립자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래서 고대 종파들 가운데에서 그토록 흔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예수가 태어났다는 동정녀 출생은 나중의 이교도인이 첨가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구세주를 추가로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유일한 목적에서 가필된 것이다. 유태인들에게 이단으로 배척받았던 초기 기독교도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방신들의 특성과 사건들이 자신들의 구세주에게도 일어났다고 함으로써 그를 숭배할만한 가치가 있는 신으로 전통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외경인 도마 복음에서도 예수의 설교중 한 여성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 당신을 지니고 있던 자궁과 당신을 먹여 주었던 가슴들은 축복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그것을 진실하게 지키는 사람이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신하지 않았던 자궁과 젖을 내지 않았던 가슴들은 축복받았습니다라고 하게 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Nag Hammadi, Gospel of Thomas, II, 2, (79))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은 예수가 유태인 메시아이며, 다윗과 같은 메시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성행위에 의해 태어났음을 이야기한다. 다윗의 아들이 와서 재림을 이루고 왕좌에 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던 영지주의적인 금욕주의 교파들은 그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마가복음이 기반을 두고 있는 그 이전 문헌들은, 예수가 그곳이 아닌 나사렛의 갈릴리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공관 복음들 중에서 마지막 두 개, 마태복음과 누가 복음은 예수의 출생을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림으로써 마가복음의 실수를 바로잡으려 시도한다. 
메시아에 대한 유태인들의 기대에 전혀 무관심했던 요한복음은, 오로지 그로 말미암아 군중 가운데에는 분열이 생겼다[요한 7:43]면서 소개한 갈등의 원인을 위해서 예수를 다시 나사렛으로 돌려놓았다. 이 갈등은 예수가 태어났을 때 나사렛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갈릴리에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사소한 것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나자렛은 예수의 출생지라는 소식이 유명해 진 후 기원후 3 세기경에 세워졌다.) 예수를 나사렛과 연관짓는 이러한 기묘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구전보다도 오래된 것이며 태양 숭배의 한 형태를 수행하고 있던 에세네파와 같은 묵시적 집단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태양신으로 간주한 것일 수 있다. 나자렛은 히브리어에서 (12궁도의) 열 두 표식인 Nazaroth과 상당히 유사하게 만들어진 말이다. 어근이 된 동사 nazar는 둘러싸다는 의미이며, 이는 매일 밤 머리 위를 지나치는 12궁도의 열두 별자리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2] 욥은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야웨의 거룩한 천계의 힘을 깨닫게 되었고, 야웨는 맹렬한 사막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한다. 너는 좀생이를 끈으로 묶을 수 있느냐, 또 오리온자리를 매단 밧줄을 풀 수 있느냐? 너는 열 두 궁성(Nazaroth)을 제 철에 이끌어 낼 수 있느냐?[23] 이 이론은 플리니우스가 에세네파라고 한, 사해 근처 쿰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전통적인 태음력에 기초를 둔 유태교의 달력이 아니라 태양력에 기초를 둔 달력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지지된다. 소 플리니우스는 112 CE에 Trajan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교도들은 새벽녘에 만나는, 그리스도 quasi deo(그리스도, 마치 그가 신이라는 듯이)를 존중하며 찬가를 부르는 무해한 사람들로 보입니다하고 보고했다. 참고삼아 덧붙여 말하면 1 세기 모든 문서들은 십자가 얘기가 나와도 배반자 "가롯 유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열 세 살까지 요셉의 두 번 째 부인으로 들어간 마리아의 사생아로서의 삶을 계부인 목수 요셉 밑에서 장자 노릇을 하면서 레위인 외가의 보호 아래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사. 공관복음 바로 보기
1) 개요
공관 복음을 바로 읽기 위해서는 우선 객관적으로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아로서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부분을 밝혀야 하고 그 다음에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의 내용 중 이 예수의 메시아적 삶을 어떤 인간적인 목적으로 빼거나 첨가하거나 조작한 부분이 없는 지를 확인하고 수정한 사람들과 그 목적을 확인하여 진실된 부분만 찾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밝히는 것이다. 
2) 기록에 대한 반론
가) 우선 공관복음의 명칭과 순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예수와 함께 3년 반 동안 공생애를 산 사도 요한의 증언은 무슨 신학이라고 하면서 복음서의 맨 부분에 두고 동생 야고보, 12제자 중 한 사람 유다, 수제자 베드로의 글은 짧게 한 귀퉁이에 별 볼일 없이 정리하고 배치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 둘째는 공관복음서의 저자가 요한을 빼고 모두 왜 바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며 모두 레위인일까? 하는 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레위인은 모세 종교의 주인들로서 농사, 병역, 납세 의무를 면책 받으면서 영원히 제사장, 서기관, 회당 장, 가르치는 일(랍비, 레위, 라오니, 선생)의 특권을 가진 자들이고 특히 십일조를 굴리고 돈을 관리 축적하여 이스라엘의 왕권 보다 우위의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 권력을 독점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성전 공사 노동자들(자유 석공 조합 소위 현대의 프리메이슨)을 만든 사람들이다
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예수와 만난 적도 없는 바울이 자칭 사도가 되고 그가 신약 27권 중 13권을 쓰고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레위인들이 쓴 복음서가 요한복음보다 우선이 되어 앞 부분에 자리 잡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을 전제로 하면서 신약 성경의 진실을 파 해쳐 본다. 요약하면 신약 성경 중 예수의 공생애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아래 사람들이 조작하고 가감한 것으로 보인다. 
-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나. 바울과 레위 등 예수를 그리스도화 하여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려고 한 사람들 
-다. 예수의 인기를 이용하여 지중해 연안을 안정시키고 통일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콘스탄틴 등 로마 정치가들
다) 예수의 기록 중 조작된 부분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그의 행적에 관한 연상이 필요하다. 즉“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어느 날 이스라엘 갈릴리의 어느 마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빈들에서 오천 명이 먹을 떡과 물고기를 만들고,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이한 청년이 나타났다. 자연히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체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 갔다. 이에 당황한 레위인들은 처음에는 그를 레위의 제사장 중 한 명으로 취급하여 그를 랍비, 또는 라오니, 선생이라고 부르게 했다가 나중에 그가 반 레위를 지칭하는 반 율법, 반 부자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로마 정권에 고발하여 죽여버린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를 믿는 무리가 전 지중해 국가들로 많아지자 그의 덕으로 유대교와 유대인도 살리고 돈도 계속 벌어보자 라는 욕심으로 머리 좋은 지식인 중 개종자 중 한사람인 바울을 나중에 용납하고 바울의 친 레위성을 이용하여 레위의 부와 교권을 용납하는 범위에서 로마 권력과의 결탁을 묵인 한 것이다. 그래서 신약은 실재 예수의 공생애를 빌미로 예수교인 들과 레위인들과 로마 정치권력이 만든 합작품으로 조작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진실된 부분: 공생애 3년, 죽음 등 
2) 조작된 부분: 탄생(?) 피난, 사도 신경, 부활(?)
3) 없는 부분: 청소년기
그래서 신약에서 우선적으로 믿어야 할 부분: 베드로전후서, 야고보 서, 유다 서, 요한 복음, 요한 1, 2, 3 서, 요한계시록이고 신약에서 없어도 되는 부분은 등이다. 또 신약에서 참고해야 할 부분은 들이고 신약에 추가되어야 할 부분은 예수의 유년, 청년 시절이다. 이러한 판잔을 근거로 예수가 진실로 지구 인간들에게 와서 하고자 한 일이 무엇인지 종합해 본다.

사. 예수가 믿는 대상: 
1) 예수의 하느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다 삼신의 하느님이고 혈육의 아버지이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즉 하느님이 맞다. 서양 기독교와 서양 신학자들에 의해 변조된 하나님 즉 Only One God가 아니고 하늘에 계신 혈육의 아버지 Heavenly Father가 맞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에서 “내가 오늘 날 너를 낳았다”(히 5:5, 시편 13:33)고 했고 또 하늘에 있는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눅 9:35)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번역한 로스목사의 성경에도 하느님으로 쓰여져 있고 2013 년 현재 천주교에서도 하느님으로 쓰고 있으며 애국가에서 하느님으로 쓰여 있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늘님 즉 우주에 계신 우리를 낳은 하느님으로 우리 민족사의 시원(始原)인 그 하느님(한인)이 맞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우리 민족이 조상들이 지혜를 가지고 현대 과학이 진화론 적으로 말하는 지구의 생성 과정이 우주에서 비롯되었음을 미리 알려준 것이다.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식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 민족의 하느님께서 1만년-7만 년 전에 인도에 힌두교를 통해 전하신 자신을 청년 예수의 인도 수행 중에 나타내시고 중동과 서양인들을 위한 메시아 역할을 우선 하시도록 역사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단군 상 건립에 관한 기독교 내부의 시비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단군을 제사장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 하나님: 최고자(God)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호칭들 중의 하나로,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재자를 말하며 천주교나 한국의 애국가에는 하느님으로 되어 있다.

* 존 로스 목사(John Ross, 1841-1915) 
1841년 8월 9일 스코틀랜드, 닉(Nigg)에서 출생하여 글래스고우 대학을 졸업하고, 1862년 에딘버러 연합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 1872년 목사 안수를 받고 만주로 파송, 그 곳에서 조선어로 성경을 최초로 변역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선교의 혁혁한 공로자인 로스 목사는 한국에 주재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한국 선교의 개척자이다.

2) 예수의 하늘 나라: 
예수의 하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드리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 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는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풀들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 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아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네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6:24~34) 예수의 하늘 나라는 자연주의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소위 4대강 문명 이후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와 다르다. 배가 고프면 열매나 과일을 먹고, 물고기를 잡거나 동물을 사냥하는 죄를 모르는 삶을 사는 나라를 말한다. 마치 조선(朝鮮)처럼 말이다. 조선이라는 말의 뜻이 해를 두고 땅과 하늘을 연결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은 물가에서는 고기를 잡고 육지에서는 가축을 기르는 나라라는 뜻으로 어디를 보아도 강의 물(물水)이나 농사라는 말이 없다. 그래서 인간의 전쟁이나 집성농사를 위한 집단 생활을 하느님은 죄로 여기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 홍수로 심판하신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는 아예 쓸어버리는 수단을 지금도 비를 움직이는 자루라고 해서 빗자루라고 하는 단어가 남아 있다. 
선과 악도 그래서 생기는 괴로움도 모두 인간이 만든 세상 살이에서 오는 것으로 인간의 욕심이 만든 것이나 성경에서 모세는 이를 하와와 아담의 원죄로 돌렸고 고대에 인간 문명(메소포타미아)이 자초한 것임을 간과하였다. 예수의 하늘나라는 천국이다. 천국은 영생하는 곳으로 이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있는 것이며(눅 17:21)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계 21:4)
여기서 마음을 강조한 것은 불교 법화경의 무념(無念) 사상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하늘나라는 영생이다. 기독교의 영생은 곧 영원히 사는 것으로 천국과 상통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서 실제로 빛나고 흰옷을 입고 살아 있는 고인(故人)들(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천국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고대 수명인 일천 년(1996년 미국인 일본 미술사학자 카터 코벨의 만주인골 유전자 검사 결과 참조)과 차이가 있으나 이는 예수의 천국은 인간의 집단 생활을 전제로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 희게 빛으로 보이는 상태를 보여준 것 같다. 요한계시록의 천국에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다)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
1.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는 을 찾아 해매는 목자의 나라이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태 18:12-13) 
2.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는 배반하고 나간 아들을 맞아주는 아버지의 나라로써(눅15장) 품 군 만 있지 종은 없는 인본주의 4대 농경문명이 아니고 그 이전 가족끼리 자연의 삶을 사는 나라이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 하고 
3.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는 주인은 없고(하느님이 주인) 청지기만 있는 나라이다.(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눅 16:2 등 전체 신구약에서 9회 인용)
4.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가 하나님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는 나라이다.(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외 10회 인용) 
5.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 한 생명으로 연결된 나라이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6. 예수의 아버지의 나라의 지상의 예표는 계급이 없고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국시로 한 고조선(古朝鮮) 이다. 다른 점은 고조선의 하느님은 인간 문명을 인정하지 안으신 반면 예수님은 이를 인정하신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이러한 공통적인 하느님을 가지고 있어온 때문이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한국인을 통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전 세계에 전파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고대의 제사장 나라 조선을 조선의 한 가지인 아리안 족으로 예수의 하느님을 믿도록 하여 이들을 통해서 한국을 인본주의의 극치(북한 침략)에서 구한 뜻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것이고 그 징조가 지금 2013년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소 결론: 예수의 하느님은 불교를 모르면 알 수 없고 불교는 삼신사상을 모르면 알 수 없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commonview.htm


4. 바울의편지
가. 로마서 [ Romans ] 
로마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서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서는 그리스도 교와 정부의 관계에 지대한(아울러 논쟁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세속 정부에 복종하라고 촉구한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모든 정부를 선하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바울은 로마제국을 잘 알았다), 바울은 모든 정부가 악을 억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신의 종복이라고 주장했다.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 충고를 따랐다. 1500년대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꼼꼼히 연구한 결과,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교는 유럽 가톨릭교회의 율법주의의식주의 신앙과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하고 믿음에 의한 의를 다시 부활시켰다. 1700년대에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도 로마서를 연구하고, 감리교 운동을 창시했다.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로마서를 "역사상 가장 심오한 책"이라고 말했다. 사실 로마서는 신앙의 정곡을 찌른다. 참된 신앙은 어떤 사람이라도 개종시켜 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며, 신앙은 의식과 규칙의 문제(율법주의)도 아니고, 이기심과 부도덕을 용인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 즉 한국인에게 로마서는 맞지 않는다. 
1. 중동과 서양에서 의인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롬 1:17)이 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의인은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 
*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중동과 서양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의롭게 되는 길이 없다고 강조한 이유는 그들이 1) 어두운 지방에서 수 만년을 살면서 2) 생존을 위해 살육의 역사를 겪어 온데다 3)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에집트, 그리스 로마 문명에 이르기까지 농경사회 또는 해양 사회에 필연적인 인본주의 문명으로 백성 전체가 힘을 가진 자들의 노예가 되고 따라서 4) 무지와 부도덕이 극치를 이룬 상태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딘 구세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주장을 로마를 통해 전 지중해 지역에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서양이 기독교화가 되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방에서는 그 경우가 다르다. 한국에서 의인은 양심을 지키고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라야 되는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을 따라 믿고 지키면 예수의 가르침에 묻어 온 서양의 인본주의(인간이 신이고 힘이 최고다)와 유대인의 돈 제일주의(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금전 만능주의)가 우리에게 함께 들어와 지금처럼 한국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2.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라고 했는데 서양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말이 맞을 지 몰라도 우리 한국인들에게 믿음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이다. 즉 한국인은 듣는 것보다는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고, 판단하여 결론에 이르는 것이 최선이고 필자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 다시 보기” 책을 쓰게 된 것이다. 
3.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의 가장 큰 죄 즉 인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인본주의는 레인인들이 지은 창세기에서 여호와가 창조주이고 사람의 모습대로 인간을 지었다는 등 모든 수메르 신화의 답습에서 비롯된다. 수메르의 근본인 고조선의 하느님은 자연주의 유일신으로 수메르의 인본주의 유일신과는 적대관계로서 예수님도 자연주의 유일신의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이라고 강조하였다. 바울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인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겠다는 열의는 있었으나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은 몰랐던 것 같다. 
4.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이전부터 내려온 아람인(유대인의 전신)들의 재물 제일주의를 경계하거나 비판하지 못했다. 본인은 교회부흥을 위해 재물을 활용했으나 정작 돈의 시험과 악행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다. 유대교의 핵심이며 이스라엘 전체의 돈을 가지고 있는 레위인들은 그 돈의 힘을 이용하여 구약을 성경에 포함시킴으로서 지금도 프리메이슨을 종으로 부리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5. 바울은 이스라엘인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유대교 보다 예수교가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유대교의 회당 대신 기독교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온 정력을 쏟았으며 이는 교권주의와 국가 권력이 분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돈을 가진 유대인(레위지파)의 횡포와 독점적 권력을 영원히 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 고린도전서(Korinthos Letter)
사대 서한의 하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처음 보낸 16장(章)의 편지로, 신도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권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 1 장 십자가의 도
제 2 장 네가지보화
제 3 장 한 가지 주제의 사람
제 4 장 하나의 기초
제 5 장 질문 받고 정죄 당한 교만
제 6 장 누룩을 내 버려라
제 7 장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제 8 장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제 9 장 하늘의 달음질
제 10 장 시험을 당하는 자가 받을 위로
제 11 장 지금, 그 리고 그 때에는
제 12 장 오 세상이여, 그대가 전부요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불쌍한 자이리라
제 13 장 사망을 멸하신 그리스도
제 14 장 날마다 죽음
내용 분해
1. 인사 고전1:1-92.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들은 것에 대한 답변 고전1:10-6:203. 
2. 편지에 대한 답변 고전7:1-16:9 
1) 결혼 고전7:1-24 
2) 처녀 고전25-40 
3) 우상의 제물 고전8:1-11:1 
4) 예배 고전11:2-34(남성우위, 만찬분배) 
5) 신령한 은사 고전12:1-14:40 
6) 육체의 부활 고전15:1-58 
7) 연보 고전16:10-244. 
8) 마지막 인사 고전16:10-24
다. 고린도후서
고린도 후서는 바울 서신들 중 가장 자서전적이며 자신의 사도 적 권위를 변호한 서신이다. 초대 교회의 폴리갑,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은 본 서신을 자주 인용하였다. 또한 본 서신의 세부적 내용들의 성격과 그 자연스러움과 생생함은 본 서신의 순수성을 강하게 증거 한다. 
내용 분해
1. 인 사 고후1:1-11
2. 개인적 계획의 설명 고후1:12-2:11
3. 사도 직에 대한 변호 고후2:12-7:4
4. 편지의 결과에 대한 논평 고후7:5-16
5. 주신 은혜 고후8:1-9:15
6. 개인적 변호 고후10:1-12:13
7. 방문 준비와 결론 고후12:14-13:13
라. 갈라디아서[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Galatians] 
바울이 50년경 마케도니아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목회서신.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으나, 그가 떠난 후 들어온 유대주의 교사들이 그의 사도권(使徒權)을 부정하고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온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유대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고 자기의 사도권과 믿음의 본질을 밝히기 위하여 이 서신을 썼다.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으나, 그가 떠난 후 들어온 유대주의 교사들이 그의 사도권(使徒權)을 부정하고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온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유대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고 자기의 사도권과 믿음의 본질을 밝히기 위하여 이 서신을 썼다. 그는 자기의 사도권이 계시(啓示)를 통해 옛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며, 예루살렘교회의 인정을 받은 것임을 변호하였다(1:1~2:21). 이어서 그는 유대인의 비판에 대하여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믿음을 희구하는 은혜의 메시지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으며,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되는 것이지 모세의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3:1~4:31). 이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며,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노력보다는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였다(5:1~6:18).
그리스도교 자유의 대헌장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선언서라 부르는 이 서신은 마르틴 루터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에 눈을 뜨게 하였다. 
제 1 장 매일의 신앙
제 2 장 그리스도와 자아
제 3 장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요구
제 4 장 믿음으로 살리라
제 5 장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제 6 장 거대한 감옥과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제 7 장 엄한 교사
제 8 장 양자로 삼으심, 아들의 영과 아버지라 부름
제 9 장 성령의 첫 열매
제 10 장 이신칭의의 교리를 변호
마. 빌립보서
빌립보에서는 두 논제가 뛰어나다. 첫째는 복음인데 9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복음에서의 교제(빌1:5),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빌1:7), 복음의 진보(빌1:12), 복음을 변명 (빌1:16), 복음에 합당하게(빌1:27), 복음의 신앙(빌1:27),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빌2:22),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빌4:3), 복음의 시초에(빌4:15)등이다.
둘째는 기뻐하라 또는 기쁨이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로마에 있는 바울은 원수들 의 방해와 그리고 언제 시행될지 모르는 죽음 때문에 불행한것 같다.
내용 분해(대분류)
1. 인 사 빌1:1,2
2. 개인적 친교에 대한 감사 빌1:3-11
3. 로마에 있어서의 격려 빌1:12-2:18
4. 동지들과의 개인적 관계 내용 분해 빌2:19-30
5. 율법주의에 대한 개인적 경계 빌3:1-4:1
6. 최후의의 훈계와 인사 빌4:2-23
바. 데살로니카 전서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50-52년경)중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편지를 썼다. 대략 51년경에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필립보에서 활동 중 추방당하게 되자 데살로니카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지만 유대인의 방해로 쫓겨난다. 그러던 중 바울은 데살로니카 교인들이 환난 중에서도 굳건히 서 있다는 디모데의 보고를 받고 기뻐하며, 그곳 교인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자 이 편지를 썼다. 
또한 당시 데살로니카인들을 동요케 했던 예수 재림에 대한 문제에 대해 바로 해명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자 했다. 
모두 5장으로 데살로니카 교인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 신자다운 생활을 위한 교훈 등을 이야기한다. 
(1) 바울과 데살로니카 교회(1,1-3,13) : 바울로가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에게 품고 있는 애정을 적고 있다. 
(2) 신앙생활에 대한 훈계와 끝인사(4,1-5,28) :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 데살로니카 후서
전서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살로니카 신자들 사이에 두 가지 물의가 일어나게 되자 그곳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 즉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고, 공동체에 부담을 주는 사람들에게 엄한 경고와 훈계를 보낸 것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들이 같은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아. 디모데 전서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 어머니는 유대인 사이에서 루스드라에서 났다(행16:1, 20: 4).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의 신앙안에서 자랐으며 성서를 배웠다. 바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제일 사랑하는 제자로서 제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을 따 르기 시작 하였다(행16:1-3).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과 같이 여겼으며 그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하여 마게도냐(행19: 22), 고린도(딤전16:10), 에베소(딤전1:3)등지에 바울의 파송을 받아 가기도 하였다. 바울이 첫 번째 죄수로 로마에 있을 때 그는 함께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어 목회하게 하였다. 세월이 흘러 교회는 점차 확장 되었지만 동시에 이단을 주장하는 거짓교사도 일어나고 또 교회 치리에 필요성도 생기고 그리고 실제 생활의 순결에 대한 주의를 줄 필요 들이 생겼다. 그래서 젊은 디모데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착오없이 잘 처리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서신을 기록하여 보낸 것이다. 주후66년경 썼다고 한다.
자. 디모데 후서
디모데후서는 바울 서신 중 최후의 것으로 두 번 째 로마에 갇혀있는 동안에 기록한 것이다. 주 후 67년 경으로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일단 석방되어 그후 서반아에 갔다가 다시 동방으로 와서 고린도와 밀레도를 거쳐(딤후4:20), 드로아까지 갔다가(딤후4:13) 드로아에서 갑자기 체포되어 다시 로마로 호송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때에 바울의 제자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들이 많았으며(딤후1:15-4:10)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은 누가 뿐이었다. 또한 바울은 자기가 마지막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딤후4:6-8) 더욱 디모데를 보기를 원하여(딤후4:9,20), 이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차. 디도서
이 서신은 바울이 로마에서 첫번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온뒤 마게도냐에서 기록한 것같다. 디도는 이방인의 한사람이었으며 바울과 함께 사역을 한 청년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형편이 비관적이다. 새로이 설립된 교회로 교인들은 품행이 경솔한 것을 2장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짧은 서신 가운데서 여섯 번이나(딛1:16, 딛2:7,14,딛3:1, 8, 14)선한 일에 대해 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는 윤리적 해석(딛1:12,13)과 특히 할례당의 논쟁(딛1:10)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교회에서 디도는 목회를 한 것 같다.
카.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신약성서의 수수께끼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구약성서를 자주 인용한다는 점, 모세나 아론,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같은 히브리 인물들보다 예수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가 천상의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죄인들과 신을 중재한다고 말한다. 유대 사제들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예수는 궁극적인 사제일 뿐 아니라 궁극적인 희생자다. 히브리서 11장은 자주 인용되는 대목으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과거에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들을 '신앙의 명예 전당'에 넣어 칭찬하는 내용이 있다. 신앙의 생활을 지켜보고 권장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히브리서는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신앙이 시련을 겪게 마련인데, 바로 그것이 신이 가르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고 널리 알려진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이나 안식에 괸해 강조함으로써 유대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타. 골로세서(Colossians)
골로새라는 도시는 에배소에서 내륙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곳이며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가까우며(골4:13),함께 초대 기독교 교회의 중심지 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전도해서 세운 것이 아니었다(골2:1, 골1:4). 저자는 바울이라고 하지만 바울의 이름을 빌어 후대의 교회 확장론자 그리스도인들이 쓴 것으로 보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대주의적인 할례(골2:11), 의식(골2:14), 음식과 절기등(골2:16)의 문제
2)금욕주의와 고행(골2:16,20-23)의 문제
3) 천사 숭배(골2:18)문제
4)인간 지식 숭배(골2:8)문제 등이었다.
파. 빌레몬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노예 출신 오네시모를 부탁하면서 기원 후 63년 로마 감옥에서 쓴 글이다.
1. 인 사(빌레몬 칭찬) 몬1:1-3
2. 믿음과 교제 몬1:4-7
3. 바울의 빌레몬에 대한 간구 몬1:8-20
4. 작별 인사 몬1:21-25
하. 야고보서 [ The Letter of James ] 
62년경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쓴 신약성서 공동서신 중의 한 책. 

편지의 형식으로 시작되어 있지만 편지라기보다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권고문이다. 환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함과 동시에 신앙에 도취되어 행위를 무시하는 자를 경계하는, 일반 신도에게 주는 권고이다. 믿음은 행위에 따라 입증되며 온전하게 된다는 주제 하에 시험에 대처하는 길(1:2~13), 믿음과 실천(2:14~26), 혀의 죄(3:1~12), 참된 지혜의 추구(3:13~18), 세상의 정욕(4:1~12), 신앙생활에 대한 적응(5:1~20)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paul.htm


5. 기타의 신약 성경 
- 사도 행전[Acts of the Apostles] 
예수가 승천한 뒤 사도(使徒)들이 성령의 인도로 널리 복음(福音)을 전한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신약성서 가운데 유일한 역사문서로 평가된다. 사도행전은 복음서들 바로 뒤에 이어진다. 그 내용은 거의 전부가 베드로와 바울로 대표되는 초대 그리스도교 사회의 활동에 관한 것으로, 성령(聖靈)의 인도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 전파되는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1장 1절에 나는 먼젓번 책에서 예수의 모든 행적과 가르치심을 다 기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이 책의 저자와 《누가복음》의 저자는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문학적 형태나 의도는 복음서와는 다르며, 역사적 소재의 선택도 한정되어 있다. 한편 《사도행전》에 1인칭 복수형을 사용한 문장으로 보아, 저자는 사도 바울과 같이 다닌 사람으로도 추론이 되지만, 《사도행전》 중의 바울에 관한 기사와 바울의 편지들의 기사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꼭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2부 28장으로 되어 있다. 제1부(1~12장)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립과 그 활동(1~5장), 유대와 그 주변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전도(6~12장)가 적혀 있다. 주로 활동하는 것은 베드로이나 스데반,필립,바나바의 이름도 나온다. 제2부(13~28장)에는 바울의 이방인 전도와 이방인 여러 교회의 성립 과정 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즉, 바울의 1차 전도여행(13~14장), 예루살렘의 사도회의(15:1~35), 2차 전도여행(15:36~21:14), 바울로의 체포와 심문(21:15~26:32), 로마로의 호송과 로마에서의 바울로(27~28장)의 행적 등이다. 전체적으로 이름은 사도행전이지만 사실은 바울행전이라고 봐야 한다. 기록목적은 바울의 사도 성을 입증하려는데 있어 바울 추종자의 기록으로 보인다.
- 베드로 전서
첫 문장에서 저자는 스스로 "예수의 사도 베드로"라고 밝혔으며 이레나우스(140~203), 터툴리안(150~22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5-215)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5-253) 등 초기의 교부들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갈릴리 호수의 어부인 사도 베드로를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왔다. 베드로 전서에는 갈릴리 태생인 베드로가 접할 수 없는 세련된 도시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저자가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역사적 예수)를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서가 없다. 서한 자체에는 구약성경에 대한 약 35개의 인용이 있지만, 대부분의 성경 인용이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 성서인 70인 역 성경에서 발췌한 것이다. 더구나, 역사적인 사도 베드로가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번역한 그리스어 성경인 70인 역 성경을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히브리어와 타나크(Tanakh)의 아람어를 수월히 읽지 못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위하여 그리스어로 편찬된 번역본이 70인 역 성경인데, 역사적인 갈릴리의 시몬 베드로가 성경을 이러한 형태로 접했을 리가 없다. 저작연대는 주후 60년에서 112년으로 추정된다. 책의 첫머리에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쓰다며, 소아시아의 지방 중 다섯 지방이 명시되어 있다. 이 서한은 "널리 흩어진 이방인"들에게 씌어졌으나, 내용을 볼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으로 판단 된다. 사도행전 16:6-7과 18:23에 따르면 이 지역은 바울에 의하여 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1장 : 인사, 희망에 대한 감사,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신자 생활 (2장으로 이어짐.) 
2장 : 신자 생활, 교회의 기초와 사명, 신자와 이교인, 선량한 국민, 충실한 하인 
3장 : 아내와 남편, 참다운 신앙 공동체, 박해에 맞선 확신, 그리스도의 승리 
4장 : 참그리스도인, 종말과 공동체 생활,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 
5장 : 지도자들의 의무, 겸손과 깨어 있음, 끝 인사 
박해에도 불구하며 확고한 신앙과 인내를 지킬 것 (1-2:10) 
그리스도인의 성스러운 삶의 실천적 의무 (2:11-3:13) 
그리스도의 모범과 타 이유들을 인내와 성스러움에서 그 근원을 찾아내며 (3:14-4:19) 
황제 네로의 기독교박해로 고통받는 교우들에 대한 충고 (5장)으로 끝낸다. 
이 서한은 바울로의 교리를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통해 자신을 사도 바울로와 같은 진영에 위치시킨다.
초기부터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의심되어 왔지만 첫째 편지는 신약성경의 정경(canon)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 베드로 후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 베드로후서(영어: second eipistle of peter)는 신약성경 의 서간 가운데 하나이다. 약칭으로 벧후로 표기하며, 천주교에서는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사도 베드로가 쓴 서간이다. 신약성경 중 정경으로 인정되기까지 가장 오랜시간이 걸렸다. 초기비판자들은 베드로의 제자들이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서 썼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가 글형식에 차이가 나는 것은 베드로가 각기 다른 필사자를 고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로마황제 네로의 통치시기 후반부인 AD 66년경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에 쓴 글이다.[2] 베드로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에서 소아시아 각지에 흩어져있는 유대기독교인들과 이방기독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교회 안에서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다.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일부는 재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1장 : 인사, 그리스도인의 소명,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 
2장 :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 
3장 : 주님의 재림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고, 거짓선생들의 삶은 부도덕한 것이 특징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또한, 거짓선생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베드로후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강조한다. 네 가지 영역에 초점을 두고 진리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필요한 모든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의 썩어질 것에 참여하지 말고, 신성한 성품을 갖도록 에즈라. 인간의 탐심이 거짓선생들로 하여금 이득을 얻으려 말을 지어내게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권세로 말하는 자들만이 참된 권세를 가진다. 거짓선생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는 이러한 의심자들이 틀렸다고 말한다. 주님은 사람들처럼 시간을 계산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 주께는 하루와 같다.[8] 그리스도께서 더디게 재림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이다.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들일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9] 주님이 재림하시면, 하늘과 땅이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다.[10]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그러하듯 성령에 의해서 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따라야한다.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성경이 기록되었듯, 성령을 통해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는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하고있다. 언제나 거짓선생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서 거짓된 가르침을 물리치라고 교훈한다
- 요한 1서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 1서는 기독교 신약성경의 한 권으로 서기 90년~100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에 의해 작성되었다.
확실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박해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재외말기인 서기 95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1장 : 머리말 : 생명의 말씀, 빛 속에서 살아감 (2장으로 이어짐.) 
2장 : 빛 속에서 살아감, 사랑의 계명 준수, 그리스도인과 세상, 의로움의 실천 (3장으로 이어짐.) 
3장 : 의로움의 실천, 사랑의 실천 
4장 : 영의 식별, 사랑과 믿음 
5장 : 사랑의 뿌리인 믿음, 맺음말 : 영원한 생명 
- 요한 2서
본서는 요한일서의 축소판으로 요한일서의 내용을 보충할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요한일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천을 역설한 후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온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 특별히 경계하고 있다. 당시 영주주의에는 여러 유파가 있는데 그중 초대교회에 가장 큰 위험이 되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부인이었다. 즉 영지주의는 유체적인 것은 악하다는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여 메시야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했던 것이다.
1)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1~6절) 요한은 진리 안에 거하라는 인사말에 이어 수신자들의 진리에 대한 순종을 칭찬하고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킨다. 또한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함으로 진리를 순종하는 삶을 살 것과 성도들간에 사랑 안에서 참된 교제를 이룰 것을 역설한다.
2)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7~13절) 본문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 곧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교훈한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적인 거짓 교사들로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겉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성도들을 불신과 멸망으로 이끌어간다. 따라서 요한은 성도들에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일절 허용치 말며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 요한3서 
가톨릭 서간, 공동(katholic) 서한으로 요한의 첫째 서한, 요한의 둘째 서가톨릭 서간, 공동(katholic) 서간으로 요한의 첫째 서간, 요한의 둘째 서한과 비슷한 어휘가 사용되었다. 다른 서한들처럼 90년에서 100년 사이에 사도 요한의 제자들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가이오스(가이오)에게 자신이 원로(presbyteros)라고, 또 영혼이 편안(평안, 잘 됨)한 것처럼 몸과 모든 것이 되라고 인사한다(1절-2절). 이어 저자는 가이오스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들었다면서 자신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기쁜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이어 저자는 낯선 형제들, 곧 선교사들에 대한 협력을 강조하고(8절) 디오드레베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직접 가서 행실을 지적하겠다고 한다. 이어 가이오를 '사랑하는 이'라고 하여 요한 복음서와 같이 선한 사람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으로 선을 본받으라고 한다. 그리고 데메드리오가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서간보다 직접 가이오를 대면하는 것을 더 바라며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문안을 하고 있으며 또한 가이오도 그곳 친구들 한 사람마다 문안을 하라고 마친다
- 유다서 [ Letter from Jude ] 
120년경에 쓰여진 신약성서 중 공동서신의 한 책. 구분 신약성서 서간문 시대 120년경. 당시 이단시된 그노시스파(派)에 대하여, 교회가 참된 신앙으로 살며 그들에게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편지 형식으로 기록한 권고문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로 밝히지만 누군지 분명하지 않다. 
- 요한 계시록 [ The Revelation to John] 
저자 요한 그리스도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 요한이 파트모스(밧모)섬에서 받은 다분히 환상적(幻想的)인 계시(啓示)를 적은 것. 요한 계시록 또는 줄여서 계시록이라고도 한다. 묵시록이란, 여러 가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비(非)인간적 세계의 사건들을 묘사한 문학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계시문학서가 바로 이 《요한의 묵시록》이다. 1세기의 80년대에 소(小)아시아의 에페수스(에베소) 부근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 22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내용은, 1장은 머리말이고, 2장에는 소아시아의 7교회 앞으로 보낸 박해를 받을 때의 신앙의 자세와 반성을 적은 편지가 들어 있다. 4~22장은 4마리의 동물, 밀봉된 7개의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는 어린양(그리스도)의 이미지 등을 통하여 바빌론(로마)의 함락,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교회의 마지막 승리, 즉 그리스도의 1,000년 통치, 사탄의 결정적인 패배, 최후의 심판, 새로운 천지의 출현을 예언하고, 거기 참예하려거든 소망을 굳히고 모든 괴로움을 극복하라고 타이른다. 오소서, 주 예수여!라는 맺음말에는, 알파요 오메가인 샛별로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애절한 마음이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박해에 처한 교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고난당하는 신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환상적 신비체험 속에 본 것들을 적어 내려간 내용이어서 매우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도 요한이 썼다 기보다는 후대에 재림을 옹호하는 예수 계, 바울 계 기독교인들이 사도 요한의 명성을 빌어 쓴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교리도 더욱 확대되고 과장된 것이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ets.htm


6. 신약의 정경화 과정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출현 이후 60년이 지나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남은 유대인들이 날로 확장해가는 예수의 새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살 길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들의 경전 중 예수와 관련이 있는 내용들을 추려 정경으로 완성하고 이를 신약과 함께 성경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신약은 초대교회 교세의 전 유럽 지역 확장과 더불어 교육의 필요성에 따라 예수의 생애와. 교훈, 기적, 비유 등을 복음서에 포함시켜 정경 화되다가 점차 바울 등 예수그리스도 추종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예수 언행과 원 사도의 전승 분석 결과를 바울의 서신과 요한복음, 요한 1,2,3 서, 베드로 전후서. 야고보 서, 유다 서 등으로 추가시켰고 그 후에 비 그리스도 유대인들이 얌니아 회의를 통해 구약과 합치기로 합의했으며 로마 공 교회 화 결정이후 그리스도 교도들이 교세의 확장을 위해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을 원 사도와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했다.

* 예루살렘 함락
이 전쟁은 기원 후 66년에 발발했는데.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기원 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의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얌니아 회의
얌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는 기원후 90년경에 있었던 회의로 생각된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 랍비 요하난벤 자카이가 팔레스틴의 얌니아에 세운 학교에서 유대교인들이 구약을 완결을 시겼다는 전승이 오늘날 구약성경 정경화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발단은 예수에 관한 경전들이 많이 나오는 것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들이 경전의 마감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묵시 경향을 띤 유대교 분파와 바리새파 간에 벌어진 논쟁이 직접적인 동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정경에 주로 포함된 구약 성경의 원류에 해당하는 유대인의 성경 타나크는 대략 B.C. 1500~400년대 사이에 오랜 세월을 거쳐 바벨론, 블레셋,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 낱권들로 기록된 경전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본 얌니아 회의를 통해 현재의 분류과 확립되었다.

7. 성경 이후 유럽 2천 년
가. 기원 후- 중세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509년 성립하고 기원전 1세기경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 제국이 된다. 기독교는 기원후 4세기에 로마 제국 국교가 되고, 6세기에 중요 도시였던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 5두 주교 체제를 구성한다.
앗틸라가 이끄는 흉노(훈족: 조선인들)이 발틱3국의 선주 게르만족(아리안 족과 토착민들의 혼혈)을 공격하여 게르만의 대 이동이 시작되고 창궐하던 페스트 등 전염병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된다. 이후 서유럽은 중세 시대가 열린다. 비잔틴 제국은 동쪽에서 문명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유지한다. 451년부터 지속되던 분리 상태에 1054년 교회의 대분열이 더해지고 이어서 서방에서는 무슬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동방으로 십자군을 보낸다. 1200년 경 몽골의 침략과 흑사병으로 인해 봉건 사회는 점차 와해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함락되지만, 유럽은 신대륙을 1492년 발견한다. 유럽은 고전 문화의 재발견을 통해 중세 시대에서 깨어났다. 마틴 루터가 교황 권위를 공격하며 르네상스는 종교 혁명으로 이어졌다.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 명예 혁명은 팽창과 계몽의 시대의 주춧돌이 되었다.
나. 근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생산력을 증가시켰다. 미국은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면서 영국에 독립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은 유럽 대륙의 정치 변화에 불을 지폈다. 이후 나타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15년까지 전쟁을 통해 유럽 대륙을 정복하며 사회 구조를 개혁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선거권을 가졌고 사회주의자와 노동자 조합이 형성되어 갔고 혁명은 1848년에 잇따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농노제가 1848년에 사라졌다. 러시아의 농노제는 1861년에 사라졌다.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재차 이루었다.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에 공국의 집단이 모여 이탈리아와 독일이 형성되었다. 제국이 되어 지구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을 터뜨렸다. 전쟁의 절망에서 러시아 혁명은 사람들에게 '평화, 빵 그리고 토지'를 약속했다. 독일은 패배하였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경제적 파탄을 맞았다.
다. 현대
전 세계에 걸친 대공황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승리 이후 냉전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자리잡는다. 소련의 철의 장막에 의해 분리된 서유럽은 자유 무역 지역을 만들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 유럽 연합이 만들어졌다. 그 이후 징병제였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병역 제도를 모병제로 바꾸기에 이른다.
라. 백인의 유산
유럽인은 수 만 년간 어둡고 온난하고 어두운 지중해성 기후에서 식물 식량이 부족하고 해양에서 인간의 힘에 의존하여 살아온 환경으로 인하여 유전적으로 육식을 좋아하고 빛은 선호하며 완력이 강하고 귀가 밝으며 언어적으로는 도치어, 수동태, 격의 발달, 시제의 발달이 특징이며 습관적으로 희생제사, 밤에 일하는 것, 피를 좋아하는 것, 인신 공양, 분석적 사고, 의학과 과학의 발전, 살육, 전쟁, 음악 선호 등 특징이 있고 성경을 쓴 유대인들도 이들의 이러한 생리적, 언어적 특징과 습관을 구약 성경 기록에 많이 반영하였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가장 강한 신, 큰 신 갓“(God)로 표현 한 것 또 ”태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있다” 창조 순서에 인간의 피로를 고려하여 안식일을 만든 것, 우리들(하나님들)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든 것. 남자를 창조에서 우선 시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마. 수메르의 유산
유대인인 아브라함은 아람인으로 수메르의 가지 에벨을 조상으로 하고 있어 수메르의 특징인 인본 주의적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이것 역시 구약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즉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 주인과 종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계급사회를 만들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야 하며 인간의 자손은 식량을 확충하기 위해 지구상에서 무한대로 늘어나야 한다는 것,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남의 땅과 재산을 빼앗는 것. 기복신앙. 식민 정책, 등이 그것이다. 
바. 유대인(주로 레위지파)의 유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선민의식, 정보 조직과 정보망 확충에 밝음, 인간을 돈으로 회유할 수 있다. 힘을 가져야만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 먹을 것을 통제하면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 돈으로 돈을 만들고 그 돈은 힘이다, 나라가 없어도 돈 만 있으면 된다. 모든 기술(의학, 건강, 과학)기술의 장악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세계의 에너지를 통제하면 타민족 통제가 가능하다.
사. 요약
아리안 족과 수메르 계 유대인들에 의해 개화된 유럽인 사회는 처음에는 수메르의 인본주의적 유일신과 재물 지상주의의 영향으로 봉건화(노예, 지주의 계급제도)되었으나 기독교의 전파로 점차 자유화되다가 게르만 대 이동으로 민족이 형성된 이후 기독교가 종교개혁으로 더욱 민족화 되고 민족주의적 기독교는 결국 민족 이기심으로 발전되어 지리상 발견, 산업혁명이후에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전쟁으로 발전되어 그 후 대규모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반면에 산업혁명 이후 개인의 이기주의도 더욱 발전되어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1, 2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이러한 역사적 토양 아래에서 발발되었다. 
2천 년대에 들어온 지금에는 동방 조선이 중심이 된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자연주의 유일 신관과 힘으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인본주의 유일 신관이 대립하고 있고 개인적인 이기심도 만족과 불만족 민족 사이에서 중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성경은 유럽의 집단이기주의와 개인 이기주의 모두에 영향을 미쳤고 과학과 의료의 발전에는 기여했으나 계급사회와 인종차별, 자연 파괴의 폐습을 현대 사회에 물려주었다.

IV. 유럽 역사의 얻을 것과 버릴 것
가. 얻을 것
1) 잃었던 하느님 찾기
기원 전 7-8천년 경 한웅 조선 이후 중국 화하 족(황하 족)의 인본주의(황제 헌원의 농경문명과 한자문명을 말함) 문명의 침략으로 잃어버렸던 한국인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서양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찾아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손 선민 의식 회복
이 천손 선민은 윤치영 장로(고종 때 외무대신)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최초 애국가 가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부경, 삼일신고, 단기 고사등 모든 한국인들의 조상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가사 제정은 오랜 기간 민족 속에 살아있던 정신이 되 살아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단시 조선의 정신은 비록 서양 문물에 점령을 당했으나 살아 있었음을 의미한다. 2013년인 지금도 한국은 서양 문물에 점령당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민족 정신 속의 하느님을 찾는 것이 첩경이다. 야만 족인 서양인들이 우링늬 하느님을 찾아 개화되고 선진 된 문명 사회를 만들었는데 우리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인본주의 문명에 젖은 점을 인정하는 전재 아래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최초 애국가 가사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 안창호 등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공인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작사미상으로 남아 있어요.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은 
■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 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 안창호가 하루는 서울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의중을 다시 물으니 이에 도산께서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기 기뻐하며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는 설도 있구요. 또한 4절 첫구절도 원래는 
■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였으나 1919년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개사 한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6-IV.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