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단기 4348)년 12월8일 개최된 [제149회 국민강좌] 에서

조성재소장(무천문화연구소장) "상고사속의 무속이야기" 주제로 발표한 자료입니다.



              상고사 속의 무속 이야기


                                           조 성 제 <무천문화연구소>



1. 역사학계의 잘못된 인식

- 무속을 바로 보는 시각이 말과 생각이 다르다


2. 무교의 시작과 상고시대의 무교

문헌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제의로는


<삼국지/위지 동이전>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같은 제천의식

우리 말에  「쇠꼬리 쥔 놈이 임자」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그 당시 쇠꼬리를 쥔 사람이 임금이라는 말일 것이다.


??牛尾   舞者所持以指麾 란 기록이 있다. <강희자전>

모모우미   무자소지이지휘

<삼한관경 본기 제4편?에 「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려 갈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라고 하였다. 
 


  <설문해자>에

能劑肅事神明也    在男曰覡   在女曰巫 라 하였다.   

능제숙사신명야    재남왈격   재여왈무


<초어楚語>에

神明降之在 男曰覡女曰巫 란 기록이 있다.


신명강지재  남왈격여왈무

즉, 남자 무당은‘격覡’, 여자 무당은 ‘무巫’라는 기록이다.

또 ‘격覡’을 축祝이라고 한다.

<희남자 설산훈>에 「醫師在女曰巫 의사재여왈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로 무녀가 바로 의사라는 말이다. 지금도 병원이나 의사라는 뜻의 ‘의’(?)자에 무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3. 고구려의 무교

고구려의 巫風을 살펴보면 무당이 사람의 병을 알아맞히고 뱃속의 태아의 후를 알아맞히며 능히 전재지변 등 재앙을 예언 한다.

그 당시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 반드시 사무師巫에게 물은 것을 알 수 있다.

보장왕4년(AD645) 여름 5월 당나라가 침공 시 주몽사에 무당이 제사 지내다.

4. 백제의 무교

백제는 삼국의 다른 나라와 달리 무속의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의 근본이 부여와 고구려라는 것을 생각하면 백제의 무속도 고구려와 비슷하지 않나 유추해 볼 수 있다.


《후주서》에 『백제는 음양오행의 술을 풀이하였고』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시조 온조왕 25년에 왕궁의 우물물이 넘치고, 머리하나에 몸이 둘 달린 소가 태어나자 일관日官에게 물었는데, 여기서 일관이 바로 무당이라고 볼 수 있듯이 백제도 역시 무풍巫風을 숭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장왕 20년에 귀신이 「백제는 망한다.」하고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려 그곳을 파보니 거북이 등에 『백제는 월륜月輪같고 신라는 월신月新 같다는 의미를 무당에게 물으니 차면 기울고 차지 않으면 점차 차게 된다고 하니 무당을 죽여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5. 신라의 무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무풍이 훨씬 강했다는 것을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웅雄을 무당이라 하는 것은 신시 환웅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삼국에서 불교를 가장 늦게 국교로 공인한 나라로 법흥왕 15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고구려나 백제보다 155년이 늦었다는 것은 그만큼 무풍이 거셌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라왕들의 호칭이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호칭한 것은 왕권을 상징하기 보단 제사장의 개념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유신에 관한 민간설화에 천관녀天官女의 집을 찾아간 백마의 목을 쳤다

또 김유신의 어머니가 萬明부인이다. 만명이란 이름에서 그녀도 무당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무당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만명, 또는 말명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6. 고려의 무속

고려 때까지만 해도 무풍의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고려사/오행지》기록을 보면

현종 12년(1021) 5월 가뭄이 들어 무격을 모아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등 기우제를 지낸 인종, 명종, 고종, 충렬왕, 충숙왕 등 10번이 더 나온다. 

고려 때는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별기은)

또《고려사》를 보면 무당은 근본이 없이 귀인이나 천인이나 모두 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도읍인 개성군에서는 상류집안의 여자가 신이 내리면 선관仙官이라 하고, 하류 집안의 여자가 신이 내리면 무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관들은 고려 왕실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팔관회를 주관하게 된다,

충숙왕 때 좌정승 강융의 누이가 무당이 되어 선관이라 부르며 송악사에서 받들었다.

충혜왕 후4년(1343) 무당들에게 처음으로 삼베와 곡물로 세금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왕 13년(1387) 2월에 말馬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동국통감》기록에 인종 9년(1131)에 무풍을巫風을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무당을 도성 밖으로 쫓을 것을 명하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주목할 것은 주금呪?업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금사는 당나라 때 정식으로 국가에서 임명한 후 고려도 이제도를 받아들여 주금사를 잡과 시험으로 선발하였다는 기록이 10세기부터 보인다.

주금사는 전의시典醫侍에 속하고 의약과 치료를 담당했다.

목종 때(998~1009) 태의감太醫監, 감監, 소감少監. 승丞 , 박사博士, 의정醫正이 있었다.

문종 (1047~1083) 때 감은 1명(정4품), 소감은 2명(정5품). 박사와 승은 각각 2명(종8품),

의정 2명(종9품), 조교助敎와 주금박사呪?博士 각 1명(종9품), 그 외 의침사, 주약, 약동, 주금사, 주금공 등이 있었다.


7. 조선시대의 무교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와 함께 무속도 탄압하여 무당들을 천민으로 떨어졌지만 왕실과 관청에서 아주 무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정책으론 탄압하였지만 일반 서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무풍이 성행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많은 왕족과 사대부들이 믿고 의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조보감》의 기록을 보면 태종 13년(1413)을 비롯하여 16년, 18년에 무당을 모아 홍수와 가뭄의 해소를 빌었다.


《왕조실록》의 무당이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태종 원년(1401년) 우사단雩祀壇에서 기우를 비롯해 6회

세종 5년(1423) 5월 무녀를동방으로 모아 3일 동안 기우 6회

성종이 병상에 들자 대비는 무당을 불러 기도를 시켰다.《海東名臣傳》


이익의 《성호사설》에 이르길, 대내大內로부터 주읍州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었는데, 마음대로 출입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이 미연靡然해 졌다. 대내大內를 출입하는 자는 국무녀國巫女였으며, 주읍州邑을 출입하는 자는 내무당內巫堂이었다.

고종 때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무녀 이성녀는 진령군眞靈君, 윤성녀는 현령군賢靈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조선의 무격 소속기관


성수청星宿廳

고려시대에는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별기은)이라 하여 나라의 환난患難이 없도록 기도祈禱하는 일을 맡은 임시臨時 관아官衙로 명종明宗 8년(1178)과 고종高宗 4년(1217)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조선왕조도 고려 때 왕실의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을 대신하여 성수청을 두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 9년(1503년) 5월 1일에 전교하기를 “성수청에 국무國巫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했으며, 또 12년(1506년) 3월 15일에 전교하기를 “성수청의 도무녀都巫女와 수종무녀隨從巫女들에게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주라”고 했다.

이 기록으로 봐서 성수청의 최고무녀를 도무녀都巫女라고 하였으며, 그 외 무녀들을 수종무녀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무가 굿을 하는 장소는 궁궐 안이 아니라 조선 팔도의 명산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감악산, 덕적도, 목멱산 등 여러 곳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장소가 송악, 즉 개성의 국무당이었다.

그 외 소격서와 각 관아의 부군당, 그리고 왕실의 산실청, 사신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신당 등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무녀를 탄압하고 배척하여 도성 안에는 무녀들의 거주를 금지시켰지만 많은 곳에서 무녀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위에 열거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세종 11년(1429) 예조에 계를 올려 각 관官과 마을 민호民戶에 가까이 사는 무격으로 활인원을 두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는 많은 백성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국립의료기관이다. 이 활인서에 무녀들을 배치되어 한의사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동서활인서의 운영비는 거의 무세巫稅로 충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녀가 담당하는 마을에 일 년 동안 질병 등 별 탈 없이 지나가면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동서 활인원은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설치하였다.《光海君日記》


무업세巫業稅 및 신세포神稅布

《고려사》에 충혜왕 후4년에 무업巫業과 장업匠業에 세포를 거둔 것이 시작이다.

그 당시 무당들의 세금을 업세業稅라 하여 구리와 면포, 말 그리고 쌀과 돈으로 내었다.

조선조 세종 때 호조에서 책정한 무녀들의 세금을 보면, 국무당國巫堂은 9근, 전의 국무당은 8근, 송악松嶽무당은 8근, 덕적德積무당은 6근, 삼성三聖무당은 6근, 당무녀堂巫女는 2근, 일반무녀는 1근을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정승에 해당하는 정·종일품들이 세금이 10근 이었고, 말단 종8품은 8냥쭝이었다는 것을 비교하면 국무당을 비롯한 무녀들의 세금이 얼마나 과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 20년 (1744)에 발간된 ‘속대전續大典’의 기록에 정식국가 수입 항목으로 무녀마다 베 한 필씩을 무세로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그 당시 무세를 국가의 정식 수입항목에 포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 수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19세기 국가재정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을 제외한 전국 무당들에게서 거둬들인 무세가 총 1,326필 이라고 한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무세는 지방관찰사가 직접 징수하여 북방을 경계하는 국방비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에는 무세로 무업세巫業稅만 있던 것이 점차 ‘무업세’ 외에 ‘신당퇴미세神堂退米稅’ ‘신포세神布稅’란 명목으로 세금을 수탈해 갔다.


8. 근대사회의 무속



굿 속에 살아있는 우리 상고사 흔적들


1. 日月星神맞이 굿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고조선)의 무천


2. 도산만명塗山萬明거리

황해도 굿에서만 있는 유일한 굿거리인 도산만명거리는 그 명칭부터 예사롭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도산塗山은 지금 중국 안휘성 회원현懷遠縣을 흐르는 회하淮河의 동쪽 강변에 있는 당도산當塗山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도산塗山의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산塗山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한단고기> <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임금 시절 9년 홍수를 당하여 그 피해가 만백성에 미치니 단군왕검은 순임금과 약속하여 도산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이 파견한 사공司空 우禹(하우씨-훗날 우임금) 만나게 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가르치게 하여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천부왕인天符王印을 전해 주어 모든 액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


또 『부루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우공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도산만명거리를 도산할머니라고도 부르는데, 이 말은 도산을 관장하고 있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3. 창수사자(蒼水使者)부루 창부의 신이 되다.


<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를 보면,

「부루태자가 우사공(虞司空, 禹임금)에 이르기를,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수정자의 주신(主神)은 삼신상제(三神上帝)이다. 삼신상제는 조선의 주신이자 우리 민족의 주신이다.


또한 그대의 왕(舜임금)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천부왕인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부루태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사공에게 자신을 수정자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으며 홍수를 막는 비결로 오행치수법을 기록한 금간옥첩(金簡玉牒)과 물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신침과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皇鉅宗)을 주어 홍수를 막게 하였다.

그리고 단군왕검은 용이 물을 다스리듯 부루태자가 물을 다스릴 수 있다고 창수사자(蒼水使者)부루로 불렀다. 이렇게 하여 부루태자가 홍수를 막는 등 물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용왕이 되었으며 많은 무당들이 용왕님 즉 창수사자 부루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다.


부루태자는 물만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부왕인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액을 막고 인간들을 복되게 하므로 그때부터 ‘홍수막이’란 말이 생겨났고 지금도 정월달이면 무당들이 단골들의 일 년의 액운을 막아 주는 것을 ‘홍수매기’라고 한다. 
 

4. 천신대감굿

무당들의 굿에는 천신대감 놀이가 있다.

천신대감은 도깨비대감이라고 하며 치우천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천신대감은 굴뚝과 아궁이를 넘나들면서 복과 재물을 준다고 믿고 있다.

천신대감을 놀 때는 아궁이의 검정을 얼굴과 손에 묻혀 사람들의 얼굴에 묻힌다. 그래야만 재수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치우천왕은 도깨비대왕으로 대장장이 즉, 연금술사의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황해도 굿거리에 군웅거리라는 것이 있다.

군웅거리에 사용하는 도구 중‘뚝대’라는 것이 있다.

뚝대는 귀신을 쫓아내는 방망이를 말한다. 뚝대에 매다는 방울 역시 군웅방울이라고 하는데 방울에 도깨비 모습이 새겨져 있다.

중화민족의 조상은 황제와 염제신농 그리고 치우라는 것이다.


5. 물동이의 비밀

동이에 물을 담으면 물동이가 되고, 제단祭壇위에 올라가서 곡식을 담으면 단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단지壇地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늘의 가르침인 계명을 따르겠다는 전계佺戒의식을 할 때 동이를 부르는 명칭이 아닌가 한다.

물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다.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할 수도 있다.

메소포타미아 서사시에서 고귀한 ‘씨’를 담수淡水에 비교하기도 하고, 이것을 근원적인 물이라고 한다. 즉, 물이 바로 ‘씨“를 상징하고 ’정령‘이기도 하다. 즉, 해탈자의 종자라는 것이다.

바다는 한자로 ‘해海’라 하는데 ‘해’는 바로 태양을 의미하며, 물은 태양의 ‘씨’  즉 제사장인 지배자의 ‘정령’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동이가 조두俎豆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두는 항아리를 뜻한다. 고고학에서는 이를 저패기貯貝器라 부르며 조개들을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면 동이란 바로 동이족東夷族을 이야기 하며 조두俎豆란 바로 제사를 드릴 때 제기에 희생물을 올려놓는다는 뜻이다.


동굴이나 지하 신전에서 거행되는 비밀의례는 훌륭한 신녀의 몸을 빌려 항아리 속에 담아 두었던 정령을 심어 재생산하는 것이다. 즉, 요즘 이야기로 훌륭한 인자를 가진 정자로 인공수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의식을 주관하는 전문가가 바로 우리가 이야기 하는 삼신할머니로 삼신할머니는 산신産神할머니로도 통한다.


그러면 그때 벌써 무당들은 DNA 유전자 개념을 알았으며, 지속적으로 뛰어난 유전자를 이은 사람이 그들의 지배자가 되기를 기원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용화교도龍華敎徒들은 부도 즉, 동굴은 신들의 정액을 넣어두는 자궁이라 했다. 이것은 부도에는 지배자인 제사장의 정액을 넣어두는 항아리가 있다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 항아리 축제 ‘안스테리아(Anthesteria)’에서도 조두가 등장하는데 이 항아리는 샤먼들이 비밀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텍스트에는 태양이 그의 신전에서 수음을 하여 무수한 신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부도에서 행해진 비밀의례를 이야기 한 것이다.


솔로몬 왕 시대에는 성전에서 놋쇠로 만든 세례반洗禮盤으로 비밀의식을 치렀다고 하는데, 이 놋쇠그릇을 놋쇠바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신전에는 제1사제인 엔투(Entu), 제2사제인 살메(Salme), 제3사제인 지쿠르(Zikru), 제4사제인 카디슈투(Kadishtu)라는 여사제가 있었다. 이들은 신전에 공물이나 금화를 바치는 남성과는 의무적으로 성교를 하였다. 이러한 성교는 바로 신전에서 성스러운 비밀의식을 직접 주도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 비밀의식은 신비스러운 혼인이라 여겼으며, 이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을 서자庶子라고 불렀다. 서자는 성스러운 결혼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뜻으로 수메르의 길가메시와 우리의 한웅천왕이 바로 서자출신이다.


서자들은 어머니의 이름을 따르며 아멜루(Amelu)라는 사제나 전사 계급에 편입되는 특혜를 입었는데, 그 당시 사제나 전사들만이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의 기록에 부루단군은 스스로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로 水精子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바로 부루단군이 비밀의례로 태어났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굿을 할 때 물동이를 타는 것은 바로 동이는 동이족東夷族을, 그 속에 물은 그 시대 제사장인 한인천제나 한웅천왕 나아가서 단군왕검의 씨앗인 ‘정령精靈’ 즉, 태양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동이 위에 올라 선 무당은 바로 오래전부터 행하여 온 비밀의례인 태양의 ‘씨’ 즉, ‘정령精靈’을 받는 신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6. 대감거리

神市 제사를 올릴 때 각 지역의 물산들을 거두어 제사상을 차리는 임무를 맡은 사람


7. 성조거리


8. 별성거리 - 고시


9. 신장거리 - 풍백, 우사, 운사, 뇌공


10. 천수치기 - 부도지 기록 마고성을 청소한 원척적인 물

    세계 모든 종교에서 사용하는 정화도구

출처 : 국학원 http://www.kookhakwon.org


Posted by 海天(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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