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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15]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11

양해천 2018. 1. 22. 09:46

[홍익인간 215]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11

2012년 02월 02일 (목) 12:29:12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단군조선(번한,마한)과 하은주(夏殷周)의 관계역사 5- 

[단군조선과 하(夏)나라 시대] 

10. 하나라 제10대왕 괴(槐) 

하나라 왕 괴는 분(芬)이라고도 하며, 서기전2040년부터 서기전2015년까지 26년 재위하였다. 

[중] 서기전2038년 "제괴(帝槐) 3년 구이(九夷)가 내어(來御)하였다. 이르되,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라"<죽서기년> 

여기서 왕 괴라 하지 않고 제(帝)를 써서 제괴(帝槐)라 하여 폭군(暴君)임을 나타내고 있다. 괴가 폭군이기 때문에 구이가 감시하거나 견제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이 되며, 중국기록은 괴가 구이를 제압하였다는 식으로 애매한 글귀로 윤색한 것이 된다. 

구이(九夷)는 위에서 열거하고 있듯이 황이(黃夷), 양이(陽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견이(畎夷:犬夷), 풍이(風夷), 적이(赤夷), 백이(白夷), 현이(玄夷)이다. 신인(神人) 단군(檀君) 즉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는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풍이는 남이(藍夷)라고도 한다. 여기서 양이(陽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견이(畎夷:犬夷)는 황이의 분파가 된다. 

황이는 한단조선(桓檀朝鮮)의 종주(宗主)로서 지금의 시베리아를 포함하여 황하 이북의 대부분의 지역에 살던 이족(夷族)이고, 양이는 황이의 분파로 개마(백두산)의 남쪽인 지금의 한반도에 살던 이족이며, 우이는 황이의 일파로 백두산 동쪽에 살던 이족이고, 방이는 황이의 일파로 송화강 북쪽에 살던 이족이며, 견이는 황이의 일파로 삼위산(三危山) 부근에서 서안(西安) 근처에 살던 이족이고, 풍이와 남이는 태호복희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회대(淮岱)지역과 섬에 살던 이족이며, 적이는 양자강에 걸쳐 살던 이족이다. 

또, 백이는 마고성(麻姑城)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백소씨(白巢氏)의 일파인 지소씨족(支巢氏族)의 후손으로서 파미르고원의 동쪽으로 가서 사막에 걸쳐 살던 족속으로 후대에 호족(虎族)이 여기서 나오며 서이(西夷)라고도 불리고, 현이는 마고성에서 남쪽으로 간 흑소씨(黑巢氏)의 일파로 추정되는데 동북으로 이동하여 흑수(黑水:흑룡강) 물가에 정착하여 살던 이족이 된다. 

구이가 내어(來御)하였다는 것은 글의 취지로 보면 구이가 제괴에게 와서 복종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된다. 그러나, 구이가 내어하였다는 말은 내빈(來賓)하였다는 말보다 격이 높은 말로서 구이가 하나라 왕 괴에게 위엄을 보였다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정확한 풀이가 될 것이다. 즉 내빈(來賓)은 손님으로 왔다는 뜻이니 내어(來御)는 와서 복종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다스리려고 왔다, 임금으로 왔다는 뜻으로 풀이하여야 할 것이다. 한문(漢文)의 한계가 드러나는 애매한 문장이 된다. 

11. 하나라 제11대왕 망(芒) 

하나라 왕 망(芒)은 서기전2014년부터 서기전1997년까지 18년 재위하였다. 

[중] 서기전2012년 "제망(帝芒) 3년에 구이가 내빈하였다"<冊府元龜> 

여기서 제망(帝芒)의 제(帝)라는 글자로 보아 제망이 폭군임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구이가 내빈(來賓)하였다는 것을 와서 복종하였다는 뜻으로 쓴 취지이나, 실제로는 구이가 조공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라의 폭군인 망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이 된다. 

12. 하나라 제12대왕 설(泄) 

하나라 왕 설(泄)는 서기전1996년부터 서기전1981년까지 16년 재위하였다. 

13. 하나라 제13대왕 불항(不降) 

하나라 왕 불항(不降)은 서기전1980년부터 서기전1922년까지 59년 재위하였다. 

[중] 서기전1976년 "후설(后泄) 21년에 견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게 (작위를) 명하였다"<竹書紀年> 

서기전1976년은 후설의 시기가 아니라 불항 5년이 되는 해이다. 즉, 설(泄)은 하나라 11대왕으로 서기전1996년부터 서기전1981년까지 16년 재위한 왕이므로, 위 후설 21년은 재위연대에 맞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불항 5년에 불항이 견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게 그 각 지위를 인정해 준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라 왕인 설 또는 불항이 견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게 (작위를) 명령하였다라고 하나, 실제로는 그럴 처지가 되지 못하였으며, 각 그 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취지가 된다. 죽서기년의 기록이 참으로 애매모호하고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며 윤색날조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14. 하나라 제14대왕 경(扃) 

하나라 왕 경(扃)은 서기전1921년부터 서기전1901년까지 21년 재위하였다. 

15. 하나라 제15대왕 근(廑) 

하나라 왕 근(廑)은 서기전1900년부터 서기전1880년까지 21년 재위하였다. 

[한] 서기전1900~서기전1880년 마한 아화(阿火:서기전1838년~서기전1864년) 때 하나라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馬韓世家> 

이제껏 죽서기년의 기록과는 완전히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마한세가의 기록은 하나라가 마한(馬韓)에 조공하였다 하여, 하나라가 일반 제후국인 천자국(天子國)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16. 하나라 제16대왕 공갑(孔甲) 

하나라 왕 공갑(孔甲)은 서기전1879년부터 서기전1849년까지 31년 재위하였다. 

[한] 서기전1854년 정묘년에 11대 도해 단군이 선사(選士)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국훈(國訓)을 가르쳐 위세를 보였다.<檀君世紀> 

이 기록은 서기전268년경에 위(魏)나라 사람인 공빈(孔斌)이 홍사(鴻史)의 서문에서 동이(東夷) 사절단(使節團)의 위엄과 절도에 관하여 적었듯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기록이다. 

즉, 단군조선의 선사(選士)가 하나라의 서울로 가서 단군조선의 국훈(國訓)을 가르쳐 위세를 보였다는 것은, 그나마 하나라 왕 공갑을 진정 천자(天子)로 인정한 것이 된다. 

17. 하나라 제17대왕 고(皐) 

하나라 왕 고(皐)는 서기전1848년부터 서기전1938년까지 11년 재위하였다. 

18. 하나라 제18대왕 발(發) 

하나라 왕 발(發)은 서기전1837년부터 서기전1819년까지 19년 재위하였다. 

[중] 서기전1837년 "후발(后發) 1년에 제이(諸夷)가 왕문(王門)을 방문하여 춤을 추었다"<죽서기년, 후한서 동이열전> 

후발(后發)이라 하여 제(帝)라 하지 않고 있어, 왕 발은 폭군(暴君)이 아닌 것이 된다. 서기전1837년은 발이 즉위한 해가 된다. 

제이(諸夷)는 많은 이족 즉 구이(九夷)에 속한 이족들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왕문(王門)은 왕의 문중(門中)을 뜻하는 말로 왕실(王室)을 가리키는 된다. 

춤을 추었다는 것은 이족(夷族)들이 하나라 왕 발(發)의 문중을 방문하여, 발(發)이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를 해 주었다는 것이 된다. 즉 왕 발의 인물 됨됨이가 좋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앞으로 발(發)이 정치를 제대로 할 것으로 축복한 것이 된다. 

19. 하나라 제19대왕 이계(履癸)와 하나라 멸망 

하나라 왕 이계(履癸)은 서기전1918년부터 서기전1766년까지 53년 재위하였다. 

이계는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桀)을 가리킨다. 

[중] 서기전1816년 "제계(帝癸) 3년 견이(畎夷)가 기(岐)에 들어와 반란을 일으켰다"<會紀> 

왕계가 아닌 제계(帝癸)라 하여 폭군(暴君)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걸왕을 제(帝)라고 하여 폭정을 펼치는 왕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견이는 삼위산에서 서안 부근에 걸치는 서쪽 지역에 살던 이족(夷族)으로 황이(黃夷)의 분파이며, 서이(西夷)의 땅이 되는 기(岐) 땅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단군조선의 명령으로 하은주(夏殷周)를 견제하던 이족이다. 견이는 단군조선의 명으로 받고 군사를 많이 움직였다. 주(周)나라 왕실은 서이(西夷) 출신이기도 하다. 

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夏)나라의 정치가 잘 행해지지 않아 서쪽 기(岐) 땅에 쳐들어가서 감시감독하고 견제하기 위하여 근거지로 삼았다라는 뜻이 된다. 

주나라 전국시대에 들어 주나라 주변을 크게 사이(四夷)로 나누어 각 이(夷), 적(狄), 융(戎), 만(蠻)이라고 적는데, 이는 동이, 북적, 서융, 남만을 가리키고, 각 동쪽의 황이(黃夷)와 남이(藍夷=風夷)를 동이(東夷)로, 북쪽의 황이를 북적(北狄)으로, 서쪽의 백이(白夷)를 서융(西戎)으로, 남쪽의 적이(赤夷)를 남만(南蠻)으로 부르는 것이 되며, 견이(畎夷)는 위치로 보아 큰 범위에서 서융에 포함되는 것으로 된다. 

[한] 서기전1767년 갑오년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홀달 단군이 읍차 말량에게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돕게 하니, 은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며, 이에 말량에게 어명으로 군사를 돌리게 하였는데, 하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으니, 이에 은나라 사람과 함께 하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田犬)의 군대를 이끌고 가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기(岐), 빈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번한 소전(少佺, 서기전1770~1728)이 장수 치운(치雲)을 탕(湯)에게 보내어 걸(傑, 하나라 왕)을 치게 하였다.<檀君世紀, 番韓世家>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드라마와 같은 기록이다. 은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적 사실에 단군조선이 직접 관련되어 있다. 

관중은 섬서성(陝西省) 위수(渭水) 일대를 가리키는데, 기와 빈은 주(周)나라 근처에 있는 땅으로 견이(畎夷)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주(周)는 서이(西夷)에 속한다. 

이 기록은 단군조선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인 이윤(伊尹)이 은탕(殷湯)을 보좌하여 동이(東夷:단군조선)와 함께 하(夏)나라를 치고 은나라를 세우는 과정으로서, 공자순의 홍사서문에 이윤이 유위자의 제자라는 기록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즉 은나라는 서기전1766년에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건국되었던 것이다. 

번한 소전이 장수 치운을 탕에게 보내어 걸을 치게 하였다는 것은 단군의 명을 받고 그리한 것이 된다. 번한은 비왕(裨王)으로서 비상사태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독립하여 군사를 부릴 수 없다. 국호가 대부여(大夫餘)로 바뀐 서기전425년부터는 번한과 마한이 번조선왕(番朝鮮王), 마조선왕(馬朝鮮王)으로서 군사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중] 걸이 포악해지니 제이(諸夷)가 내침하였다<후한서동이열전> 

구이(九夷) 즉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은 하은주(夏殷周) 나라의 주변에서 감시감독하고 견제하고 통제하며 내정에 간섭하였다. 하나라 걸왕이 폭군이 되니 주변의 이족(夷族)들이 그냥 두지 않고 제압하기 위하여 조여 들어간 것이 된다. 

[중] 서기전1767년 "제계(걸왕) 52년 탕이 걸을 치려하자 걸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치니 탕이 사죄하였다"<設苑> 

이때는 구이가 걸의 편을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바로 위 단군조선측 기록인 "서기전1767년 갑오년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홀달 단군이 읍차 말량에게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돕게 하니, 은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며"라는 글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구이는 구한(九桓)임을 알 수 있다. 

[중] 서기전1766년 "(제계) 53년 탕이 조공을 하지 않아 걸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구이가 일어나지 않았고, 탕이 군사를 일으켜 치고 걸을 남소(南巢)로 옮기게 했다"><설원> 

이때는 구이가 탕의 편을 들자 탕이 걸을 치고 걸은 남소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즉, 탕이 걸왕에게 굴복하지 않자 다시 걸왕이 탕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구이(단군조선)가 하나라 걸왕의 약조위반으로 걸왕의 편을 들지 않고 탕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이 기록은 단군조선측 기록인 "이에 은나라 사람과 함께 하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田犬)의 군대를 이끌고 가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의 기, 빈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번한 소전(少佺, 서기전1770~1728)이 장수 치운(치雲)을 탕(湯)에게 보내어 걸(傑, 하나라 왕)을 치게 하였다"라는 글과 일맥상통한다. 

즉, 마지막으로 은탕이 하 걸왕을 칠 때, 단군조선의 군사는 은탕을 도와 합공으로 걸왕을 쳐서 멸하였던 것이다. 이 설원의 기록은 단군조선의 군사가 중립을 지킨 것으로 적고 있으나, 실제로는 은탕(殷湯)의 군사와 함께 하걸(夏桀)을 공격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은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세워진 천자국(天子國)인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임금이던 묵태씨(墨胎氏)가 번한(番韓) 사전(沙佺)의 명을 받아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하여 주었던 사실에서 입증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하나라는 서기전2224년부터 서기전1766년까지 19대 459년의 역사를 가진다. 한착(寒浞)을 빼면 18대 459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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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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