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47] 고려(高麗) 연대기 9

양해천 2018. 1. 23. 13:18

[홍익인간 347] 고려(高麗) 연대기 9

2012년 06월 11일 (월) 07:53:11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23. 제23대 고종(高宗) 안효대왕(安孝大王:서기1214년~서기1260년) 

강종의 태자 철이 22세로 즉위하였다. 

서기1216년에 거란(대요수국)은 고려의 의주와 삭주 등 북쪽 지방을 휩쓸며 약탈하였다. 변방의 군사들이 도망을 하였고 이에 백성들은 거란군을 피하여 피난을 떠났고 거란군이 쳐들어와 개경까지 내려왔다. 김취려 장군에 의하여 거란군이 물러갔다가 다시 여진과 합세하여 쳐들어 왔는데, 김취려와 조충의 군사에게 쫓겨 강동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와 고려를 도와주려 하였다. 

<몽고와 통교> 
서기1219년에 김취려는 몽고군과 함께 강동성을 공격하여 거란의 항복을 받았다. 

<최우 집권> 
서기1219년 9월에 최충헌이 죽고 아들 최우가 권력을 물려받았다. 최우는 선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몽고가 고려와 형제국이 된 후 고려에 지나친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때 압록강 근처 만주 지방의 여진족들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몽고를 치자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저고여 피살> 
서기1225년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살해당하니 몽고는 고려와의 외교관계를 7년간 끊었다. 

<정방> 
서기1225년에 최우가 정방을 설치하였다. 

<왜구침입> 
서기1226년에 왜구가 경상도를 침입하였다. 

<몽고 제1차 침입> 
서기1231년, 고종 안효대왕 18년에 몽고의 태종(오고타이)이 살리타이를 보내어 제1차 침입하였다. 이때 문대(文大)는 낭장(郎將)으로 서창현(瑞昌縣)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는데, 몽고병이 철산성(鐵山城)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 안의 사람들을 큰소리로 설득하게 하였다. 몽고병이 문대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시켰으나, 이에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몽고병이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시켜보니 다시 똑 같이 하므로 마침내 문대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아주 급하게 공격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하였다. 이때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 안의 부녀자와 어리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하였다. 

귀주성에서 서북면 병마사 박서와 김경손이 결사대12명을 구성하여 싸우는 등 성을 굳게 지키니 몽고군은 귀주성을 포기하고 돌아가서 다른 성들을 함락시키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최우는 몽고와 화친을 청하여 항복하였다. 

몽고군은 고려에 다루가치 72명을 두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귀주성을 총공격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으므로 살리타이가 고종에게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라는 어명을 내리게 하였고 이에 귀주성이 항복하였다. 

<강화천도> 
서기1232년에 최우는 몽고군이 수전에 약한 것을 알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개경의 약10만 민가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몽고 제2차 침입> 
서기1232년에 몽고의 살리타이가 2차 침입을 하였다. 몽고군은 서경과 개성을 거쳐 처인성(용인)까지 진격하였으나 승려 김윤후가 이끄는 의병이 공격을 막았다. 다음날 몽고군은 2차 공격을 하다가 살리타이가 고려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전의를 상실한 몽고군은 돌아갔다. 

김윤후는 살리타이를 죽인 공로로 섭랑장이 되었다. 

서기1234년에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간행했다. 

<몽고 제3차 침입> 
서기1235년에 몽고군은 제3차 침입을 하여 경주까지 진격하였고, 황룡사 9층탑과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판이 불타는 등 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다. 

<목판 팔만대장경 재조> 
서기1236년 병신년(丙申年)에 고려는 강화에서 <재조 목판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서기1251년 9월). 

서기1237년에 이규보(70세)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완성되었다. 

서기1239년에 고려의 항복을 기다리다 지친 몽고는 고려 희종에게 직접 항복하려고 몽고에 입조하면 물러가겠다 하여 고려는 왕족 영녕공을 태자라 속이고 몽고로 보냈다. 

<금판 팔만대장경 완성 및 목판 팔만대장경 판각 시작> 
서기1239년 기해년(己亥年)에 개경(開京)의 안화사(安和寺)에서 서기1193년부터 만들던 금판 팔만대장경이 47년만에 완성되었다. 이해에 목판 팔만대장경을 실제로 판각하기 시작하였다. 

<몽고 제4차 침입> 
서기1247년 몽고는 제4차 침입을 하여 고려왕이 몽고에 입조하고 개경환도를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이 끝까지 버티자 몽고군은 소득없이 돌아갔다. 김윤후는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있으면서 몽고의 제4차 침입을 맞아 충주성을 끝까지 지켰다. 

<최항 집권> 
서기1249년에 최우가 죽고 아들 최항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서기1251년에 몽고가 사신을 보내어 개경환도를 요구하였다. 

<재조 목판 팔만대장경 완성> 
서기1251년 9월에 고려대장경(목판)을 16년만에 완성하여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보관하였다. 이후 서기1398년 무인년에 조선 태조 7년에 해인사로 옮겼다. 

<몽고 제5차 침입> 
서기1253년에 몽고는 제5차 침입을 하였다. 

<몽고 제6차 침입> 
서기1254년에 몽고는 제6차 침입을 하여, 고려인 20만명을 끌고 갔다. 

<최의 집권> 
서기1257년에 최항이 죽고 최의가 물려받았다. 몽고는 다시 고려의 태자를 입조시키라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태자 대신 다른 사람을 보냈다. 

<몽고 제7차 침입> 
서기1257년에 몽고는 제7차 침입을 하였다. 

<최씨 정권 붕괴> 
서기1258년에 유경, 김준, 임연 등이 최의를 살해하고 대사성 유경이 제1인자가 되고 김준은 제2인자가 되었다. 고려조정은 몽고에 사신을 보내고 개경환도와 태자입조를 약속하니 몽고군을 회군시켰다. 

서기1258년에 몽고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다. 

서기1259년에 고려 태자와 40여명의 신하들이 몽고에 입조하였다. 

서기1259년에 고종이 68세로 붕하고 몽고에 있던 태자가 급히 돌아와 41세로 즉위하였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