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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64]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9

양해천 2018. 1. 23. 13:31

[홍익인간 364]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9

2012년 06월 28일 (목) 08:34:50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강화도조약 : 병자수호조약> 
서기1876년 2월에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1.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2. 부산과 2개의 항구를 개항한다. 
3. 일본은 조선의 연해를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 
4. 조선에서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은 일본 관리가 재판한다 등 

<보충 협약> 
서기1876년 7월에 일본과 조선은 몇 가지 보충 협약을 맺었다. 
1.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통행거리를 정한다. 
2.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3. 일본 선박의 항해세를 면제한다. 
4. 일본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물리지 않는다. 

서기1879년에 지석영이 종두법을 실시하였다. 

서기1881년에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임오군란> 
서기1882년에 월급을 13개월째 받지 못하던 구식의 군대가 선혜청에서 모래가 섞인 쌀을 한달치 월급으로 나누어 주자, 분노가 폭발하여 선혜청 창고에서 소동을 벌이고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으며 이어 대원군의 집인 운현궁으로 몰려갔는데, 이때 대원군은 심복 허욱을 불러 병사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허욱의 지휘로 병사들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검으로 부장한 뒤, 일본 공사관과 별기군 훈련소로 쳐들어갔다. 이에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무사히 도망쳤으나 별기군 일본인 교관과 조선어를 배우던 일본 학생 3명이 죽음을 당했다. 다시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몰려가니 결국 고종이 대원군을 불러 사태 수습을 맡겼다. 대원군이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이 환영하였으며 이때 곁에 있던 민겸호는 살해되었다. 병사들이 민비를 찾았으나, 이미 민비는 변장한 뒤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창덕궁을 빠져나간 뒤였다. 병사들이 계속 민비를 찾으려 다니자 백성들이 불안해 하므로 대원군이 사태수습을 위해 민비가 죽었다고 거짓 발표를 하고 장례를 치렀고, 다시 실권을 잡은 대원군은 정부제도를 바꾸고 민씨일파를 조정에서 쫓아냈다. 

민비와 김홍집 등 개화파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대원군은 청나라의 마건충에게 속아 그만 납치되었다. 이에 조선 병사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으나 청나라 군사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실패하고 많은 병사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민비 세력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였다. 사태가 해결된 뒤에도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는 철수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의지한 민비와 민씨 일파의 사대당, 일본을 본받자는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으로 갈렸다. 

서기1882년에 미국, 영국, 독일 등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서기1883년에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원산학사를 설립하였다.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갑신정변> 
서기1884년 갑신년에 사대당으로부터 위기를 느낀 개화당이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민태호, 조영하 등이 죽음을 당하고 민씨 일파는 조정에서 쫓겨났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당이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때 개화당은 정강14조를 발표하였다. 

사흘 뒤, 민비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창덕궁으로 쳐들어오니, 개화당과 일본군이 대적하였지만 10배가 넘는 청나라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군과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민씨 일파와 사대당이 다시 정권을 쥐었다. 

서기1885년에 일본과 청나라는 천진(톈진)조약을 체결하고 각각 군대를 철수시켰다. 

서기1885년에 검문도 점령사건이 일어났다. 광혜원을 설립하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전신이 개통되었다. 

서기1886년에 육영공원과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서기1889년에 함경도에 방곡령이 실시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서기1892년에 삼례에서 동학교도 9천명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충청과 전라 감사에게 요구조건을 말하였다. 
1.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 
2. 초대 교주 최제우의 명예회복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더 많이 걷어가는 등 폭정을 하자 농민들이 전창혁을 대표로 뽑아 군수와 담판하게 하였으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에 농민들이 서기1894년 1월에 전창혁의 아들이자 동학교도인 전봉준의 지휘하에 들고 일어났다. 이때 조병갑은 전주 감영으로 도망하였다가 조정에서 조병갑의 벼슬을 빼앗고 박원명을 새 군수로 보냈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을 체포하고 집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전봉준은 동학교도인 손화중, 김개남과 농민군을 조직하여 다시 들고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보냈으나 농민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한편으로 농민군과 휴전을 하였다. 

서기1894년 6월에 농민군은 관군과 화해하면서 조건을 걸었다. 
1. 탐관오리 처벌할 것 
2. 노비문서 소각할 것 
3. 과부의 재혼 허락할 것 
4. 못된 부자 벌할 것 
5. 불필요한 세금 없앨 것 
6. 외국인과 내통하는 자 벌줄 것 
7. 땅을 골고루 나누어 농사 짓게 할 것 등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이 사실을 일본은 공사관과 일본인 보호를 내세우고서 일본 군대를 들여 왔다. 

<갑오경장:갑오개혁> 
서기1894년 7월 23일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서 사대당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서 대원군을 앞세운 김홍집 중심의 친일 정권을 수립하였다. 일본은 오토리 공사를 불러 들이고 조선을 잘 아는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 임명하였다. 이노우에는 먼저 반일 의식이 가한 대원군을 쫓아냈다.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개화파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개혁이 실시되었다.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어 의정부를 왕보다 권한을 크게 하고,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제를 철폐하고, 연좌법을 폐지하고 조혼을 금지하고, 모든 세금을 화폐로 내게 했다. 또 홍범14조를 발표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다. 

서기1894년 9월 중순에 전봉준과 손병희는 일본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들고 일어났으나 우금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전봉준은 다음해 4월에 처형되었다. 

민비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 세력을 물리칠 계획으로 친러내각을 조직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노우에 공사를 해임하고 군인 출신의 미우라를 공사로 파견하였다. 

<을미왜변:을미사변:민비 시해 사건> 
서기1895년 8월에, 미우라 공사의 명을 받은 일본군 수비대와 폭도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의 침실이 있는 건천궁까지 침입하였으며, 숨어 있던 민비를 찾아내어 살해하고 불태워 버렸다. 

이후 다시 정권을 잡은 친일 개화파는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민비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충청도 제천의 유인석, 강원도의 이소응, 전라도 장성과 나주의 기우만 등이 크게 일어났다. 

우길준이 서유견문을 지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서기1896년에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독립협회가 설립되었다. 

<아관파천> 
서기1896년 2월에 친러파 이완용과 이범진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고종을 속여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에 친일 세력이 모두 쫓겨나고 친러파가 정권을 잡았다. 이에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광산개발과 산림채벌권 등 각종 이권을 챙겼다. 

서기1897년 2월에 독립협회의 고종 환궁 운동과 백성들의 요청 및 러시아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여긴 서구열강의 압력으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대한제국> 
서기1897년에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서기1898년에 만민공동화를 개최하였다. 황성신문이 발간되었다. 명동 성당이 준공되었다. 

서기1899년에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서기1900년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하였다. 

서기1902년에 서울과 인천 간의 전화가 개통되었다. 

서기1903년에 YMCA가 발족되었다. 

<한일의정서> 
서기1904년에 한일의정서를 맺었다. 

경부선이 준공되었다. 

<러일전쟁> 
서기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하였다. 이에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되찾았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과 협정을 맺고 조선 지배를 승인받았다. 

<을사늑약> 
서기1905년 일본 국왕의 특사 이토히로부미가 고종 황제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내각의 대신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으로부터 찬성을 얻어내어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외교권을 완전히 잃었다. 고종은 통치권을 다시 찾기 위하여 은밀히 상해와 미국 등지에 특사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서기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서기1906년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서기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이 전개 되었다. 

서기1907년 6월에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때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서기1907년 7월에,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친일파인 송병준과 이완용을 앞세워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이에 황태자가 즉위하였다. 

27. 제27대 순종(純宗:서기1907년~서기1910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고종황제의 황태자가 즉위하였다.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 
서기1907년에 일본은 통감부가 행정, 사법 등 모든 것을 맡는다는 한일 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서기1907년에 신민회가 설립되었다. 

서기1908년에 의병들이 서울 진공작전을 펼쳤다. 

서기1909년에 일본과 청이 간도협약을 맺었다.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나철 선생이 대종교를 창시하였다. 

<경술국치> 
서기1910년 경술년 8월에 일제가 한일 합병 조약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강제 합병하여 국권을 뺏았다. 

이리하여 조선은 27대 519년의 역사로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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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1914년에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 

서기1918년에 신한 청년단이 조직되었다. 

서기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기1919년 4월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서기1920년에 청산리대첩이 있었다.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서기1924년에 조선 청년 총동맹이 조직되었다. 

서기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기1927년에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서기1929년 광주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서기1932년에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서기1934년에 진단학회가 조직되었다. 

서기1936년에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서기1938년에 한글 교육이 금지되었다. 

서기1939년에 국민 징용령이 실시되었다. 

서기1940년에 한국 광복군이 결성되었다. 

서기1941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서기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다. 

서기1943년에 일제 징병령이 실시되었다. 

서기1945년 8월 15일 일제가 국제연합군에 항복하여, 나라를 회복하였다. 

서기18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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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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