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風流]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진흥왕 조(條)’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그 표현이 나타난다.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이 글에서 최치원은 풍류를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고 있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 사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이 글에서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키며, 달리 풍월도(風月道)라고도 한다.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그 명칭을 고쳐 화랑(花郞)이라 했고, 설원랑(薛原娘)을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花郞國仙)의 시초이다(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令 選良家男子有德行者 改爲花郞 始奉薛原娘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화랑 제도가 시작되기 전에 풍류와 풍월도의 전통이 먼저 있었으며, 이를 기초로 ‘국선(國仙)’의 제도를 만든 것이 화랑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구려에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는 관직과 ‘경당(扃堂)’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전통은 꼭 신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곧 풍류는 대자연에서 노닐며 몸과 마음을 닦는 고유의 전통과 관련된 사상이며, 신라는 이를 화랑도라는 제도로 체계화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단재(丹齎) 신채호(申采浩)는 이러한 고유 사상의 전통을 ‘낭가사상(郎家思想)’이라고 표현하였다.
최치원에 따르면 풍류는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 이전에 독창적인 고유 사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유ㆍ불ㆍ도의 3교(敎)의 가르침을 모두 포용하여 조화시키고 있으며, 모든 신라인들을 교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이처럼 고유 신앙과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3교의 가르침을 융합하고 있는 ‘풍류도’를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칭하며, 포용과 조화의 특성을 지닌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곧 풍류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어울림의 사상이며,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종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풍류의 사상적 특징은 그러한 전통이 이어진 신라와 고려 사회가 어떤 특정한 종교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종교나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이나 혜심(慧諶)의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 고려 불교의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전통처럼 다양한 사상들의 조화를 추구해가는 사상적 전통이 나타났다.
고려에서도 팔관회(八關會)와 관련해 ‘풍류’라는 말이 나타난다. 팔관회는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로 <고려사(高麗史)>에는 신라의 ‘선풍(仙風)’과 관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 인종 때의 인물인 곽동순(郭東珣)의 ‘팔관회선랑하표(八關會仙郞賀表)’라는 글에는 “풍류(風流)가 역대에 전해 왔고, 제작(制作)이 본조(本朝)에 와서 경신(更新)되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풍류의 전통이 산악 숭배와 연관된 팔관회와 같은 행사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성리학이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에는 풍류가 고유한 사상적 전통이나 종교적 풍습의 의미가 아니라 자연과 가까이하고, 멋과 운치를 즐기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사람을 사귀고 심신을 단련하는 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으며, 선비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화랑(花郞)이 남자무당이나 무동(舞童)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처럼, 풍류도 점차 즐기며 노는 행위만을 나타내는 말로 바뀌어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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