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였다가 인도에 가서 영적 스승을 만나 수행자가 된 람다스(이름도 인도식으로 바꾸었다)는 예배 의식을 올리는 작은 단 위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놓곤 했다. 사람들이 보고 수군거렸다.
“맙소사! 이 친구는 정말 에고가 강하군. 신이나 스승님에게 예배하는 단에 자기 사진을 올려놓다니!”
하지만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연습이었으며, 자신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든 감사하기 위함이었다.
람다스는 나무에 비유해 설명한다. 숲에 가면 다양한 나무가 보인다. 어떤 나무는 구부러져 있고 어떤 나무는 곧으며, 어떤 나무는 상록수이고 또 어떤 나무는 침엽수이다. 우리는 그 나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구부러진 나무는 햇빛을 충분히 받기 위해 그런 형태가 되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그 자세를 잃는다. 끊임없이 '너는 너무 이래. 나는 너무 이래.’ 하고 말한다. 판단하는 마음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람다스는 사람을 나무로 바꾸는 수행을 한다고 했다.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배단에 자기 사진을 올려놓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람다스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사실은 그 이전부터) 나는 글 쓰는 책상 위에 내 사진을 세워 놓았다. 때에 따라 타고르와 헤세와 니체 사진도 있고 나에게 영감을 준 영적 스승들의 사진도 붙여 놓지만, 언제나 그 중앙에 내 사진이 있다(위대한 인물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더 돋보인다!). 나는 햇빛을 잘 받은 똑바른 나무가 아니고 삶의 굽이마다에서 구부러진 나무이다. 마음의 계절에 따라서는 풍성한 나무일 때도 헐벗은 나무일 때도 있었다. 그것이 나이며, 내가 통과해 온 모든 환경에 감사한다.
수행자들의 일화 중에 내가 감동받은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인도에서 만난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스승 밑에서 함께 배운 제자의 집을 찾아갔다. 그 제자는 스승이 자신에게 남겨 준 것을 꺼내 이 사람에게 보여 준다.
제자가 오래된 나무 옷장 문을 열고 맨 아래 선반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동안 이 사람은 흥분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스승이 남긴 것이기에 소중한 물건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유품은 낡고 때묻은 천에 덮여 있다. 제자가 천을 벗기자 알루미늄으로 된 낡고 찌그러진 밥그릇이 나온다. 인도의 부엌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그릇이다. 그 제자가 이 사람에게 묻는다.
"스승이 나를 위해 이것을 남겼어요. 보여요?"
이 사람이 영문을 몰라 대답한다.
"뭐가 보이느냐는 거죠?"
그 제자는 강렬하게 이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은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천으로 그릇을 싸서 옷장 선반에 넣는다.
나는 온전한 그릇으로 태어났지만 삶의 여정에서 어떤 부분은 부딪쳐 찌그러지고 어떤 부분은 금이 갔다. 물론 부지런히 닦아 윤기가 나는 부분도 있다. 아름다운 면과 아름답지 않은 면, 희망과 절망, 신비와 폐허를 동시에 가진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제자가 찌그러진 밥그릇을 대하는 것 같은 애정으로.
artwork_Nancy Mc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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