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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 박해일이 쏜 편전(片箭)이 만주족 병사의 발목을 그대로 관통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잠깐 나왔지만 인상적인 관통력을 보여주었던 편전은 일반적인 화살인 장전(長箭)에 비해 길이가 매우 짧은 화살을 뜻한다. 편전은 우리말로 애기살이라고도 부르며, 이를 번역해 동전(童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전(童箭)·변전(邊箭)도 편전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의 병기도설은 "철촉에 화살대의 길이가 1척2촌인 화살을 편전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척은 주척(周尺)일 경우는 20cm 내외, 영조척(營造尺)일 경우 30cm 내외이므로 길이가 1척2촌이라면 대략 24~36cm 정도에 해당한다.1) 실물 유물을 살펴보면 기록보다 조금 더 긴 것도 많아 45~46cm급도 흔하다. 한국의 전통무기를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존 부츠가 수집한 편전을 보면 길이가 1.5피트(45.72cm)로 일반적인 전투용 화살의 길이인 2피트10인치(86.36cm)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각궁에서 활 시위를 당기는 거리(Draw Length)를 감안해 보면 이렇게 짧은 화살은 활에 제대로 걸쳐서 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편전을 쏠 때는 [최종병기 활]에 잘 나오듯이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통아(桶兒)에 화살을 넣어서 쏘아야 한다. 즉, 편전이란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 내지 그런 화살을 사용한 사격법을 뜻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최종병기 활]의 주인공인 남이는 대부분 일반 화살로 쏘고, 편전은드물게 사격했지만 실제 조선 시대에는 편전은 최고의 무기로 평가받는 핵심 병기였다. 무예 쪽으로도 일가견이 있었던 태종 이방원(1367~1422)은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 편전만한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편전 사격 훈련을 권장했다. 세종대에도 국방을 책임진 부서인 병조에서 국왕에게 “편전은 적을 막는데 중요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조선군 각급 부대의 무기 보유 목록을 보면 편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 무기 중의 하나였다. 무과시험에서도 편전은 대표적인 평가 항목 중 하나였다.
1929년에 조선궁술연구회가 펴낸 [조선의 궁술]에는 “과거시험에서는 편전을 130보 거리에서 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규정일 뿐 1,000보(약 1,200m) 이상을 능히 도달하며, 두껍고 무거운 갑옷도 관통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한 때 편전의 사거리가 1,000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왕 태종은 편전의 사거리가 200보(약 240m)라고 언급했고, 세종대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이천은 “편전은 아무리 약한 활을 쏘아도 300보(약 360m)나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1,000보라는 사거리는 일반적인 편전의 사거리라고 할 수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 “강가(대동강 남쪽)에서 왜군이 쓴 조총이 1,000여 보를 날아와 대동관에 이르렀다. 연광정 방패 뒤에서 군관 강사익으로 하여금 편전을 쏘았더니 화살이 강 건너 왜적이 있는 모래벌판 위까지 날아갔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류성룡의 목격담은 결국 편전도 1,000여보 가까이 날아갔다는 이야기여서 [조선의 궁술]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 대동관 정면 대동강의 실제 강폭은 500m 미만이어서 ‘1,000여보’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이고 실제 사거리는 500m 내외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실제 편전의 사거리는 일반적인 화살보다 길어 약 200~300m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예외적인 경우 약 500m까지 날아갔을 가능성은 있지만, 1,000보(1,200m)라는 이야기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무기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한 서구권 학자인 존 부츠는 1934년 그의 논문 [한국의 무기와 갑옷KoreanWeapons and Armor]에서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일본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해 “1592년 히데요시의 침략(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궁 사거리 350야드인데 반해 편전의 사거리는 500야드(457.2m)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이 기록도 편전 사거리의 최대치가 대략 500m였음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비록 1000보는 되지 않는다고해도 사거리가 500m 정도면 전근대 활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한다. 사거리가 가장 긴 활로 알려진 튀르크 활(Turkish Bow)의 기록상 최대사거리는 800m가 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고, 일반적인 튀르크 활의 사거리는 최대사거리는 300~500m 정도다. 영국 장궁(English Longbow)의 최대 사거리도 200 ~ 300m 수준이다.
활은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명중률에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단순히 긴 사거리 때문에 편전을 그렇게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활만 있으면 쏠 수 있는 일반적인 화살과 달리 편전은 사격할 때 통아라는 보조기구가 필요하므로 사격법이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그럼에도 조선에서는 시종일관 편전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심지어 만주족(야인), 왜인(일본인)들에게 편전 사격기술이 넘어갈까봐 국경지역에 편전 사격 연습을 금지하거나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편전 사격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편전을 비밀무기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편전은 사거리 외에 또 다른 장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조선시대 기록을 찾아보면 편전의 장점으로 사거리와 함께 관통력, 적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 등 세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편전의 관통력, 달리 말하면 살상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한 약포 정탁(1526~1605)의 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탁은 활의 위력이 조총보다는 못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편전의 경우에는 조총과 맞먹는다고 주장했다. 정탁은 그의 문집에 “편전은 멀리 쏘는데 장점이 있다”며 “30~40보 거리에서는 2명을 쓰러트릴 수 있고, 100보까지는 1명을 쓰러트릴 수 있으며, 200보(240m)까지도 중상을 입힐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1619년 조선 원병이 명나라를 도와 만주족과 싸우다가 참패한 사르후전투에 참전했던 이민환은 조선군이 얼마나 처절하게 패전했는지 그 참상을 적나라한 기록으로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이민환조차도 편전에 대해서는 “적(만주족)들은 먼 곳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는 편전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언급해 편전의 위력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재확인시켜 준다.
편전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이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91년 만주족이 평안도 창성에 침입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쪽 사람이 처음에 장전(長箭)으로 쏘았더니, 저들 중 갑옷을 입은 자는 뛰면서 휘두르기도 하고 , 혹은 그 화살을 주워서 도로 쏘았다. 그래서 편전으로 쏘았더니 저 사람들이 피할 수가 없어서 두려워했다.” 1555년 왜구들이 전라도에 침입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된다. 당시 전투 참전자들은 조정에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片箭)을 쏘자 왜인들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화살을 칼로 받아칠 정도였지만, 편전은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아직까지 편전의 성능에 대한 정확한 측정은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방송사 다큐 프로그램의 재현 시범에서는 개량 각궁을 사용한 일반적인 화살의 비행속도가 59.8m/s인데 비해, 편전의 비행속도는 71.8m/s라는 결과가 나왔다. 화살의 비행속도는 발사 직후의 속도와 평균 속도가 차이가 날 수 있고 화살의 무게, 활의 성능, 활을 쏘는 사람의 힘에 따라서도 편차가 있지만 유사한 조건에서 사격할 경우 일반 화살보다는 편전의 비행속도가 빠르다는 점은 확인된 것이다. 조선시대 방식으로 제작한 각궁을 이용한 비공식적인 각종 실험에서는 77~90m/s 정도의 속도를 기록한 적도 있다. 측정 방법과 기준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전에는 특정 수치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이 같은 속도는 현대 양궁의 화살 속도인 66m/s보다 빠른 것이고, 뿔과 힘줄과 나무를 조합해서 만든 합성궁(Composite Bow) 중에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튀르크(투르크) 활 중에서도 평균 이상에 속하는 활이 낼 수 있는 속도라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동하는 물체의 에너지는 질량에 비례하고,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편전의 무게에 대해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화살의 4/5 수준이라는 견해가 있다. 즉 편전은 일반적인 화살에 비해 20% 정도 무게를 줄이는 대신 속도를 15~33% 정도 높임으로써 운동에너지를 높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편전의 과학적 메커니즘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지만 이렇게 상대적으로 큰 에너지를 지닌 화살을 보다 가까운 표적에 쏠 경우 관통력은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편전의 비행속도가 일반적인 화살보다 대략 15~33% 정도 빠르다고해도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주족과 왜인들은 조선군의 장전을 피하거나 칼로 쳐내면서도, 편전에는 대응하지 못했을까. 그 의문을 풀어주는 해답은 태종 이방원의 목격담에서 찾을 수 있다.
1413년 태종 이방원은 편전의 사격장면을 직접 본 후 “크기가 작아 보기가 어렵지만, 맞추면 반드시 물건을 파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상대적으로 짧은 길이 때문에 실전에서 화살의 비행궤적을 보기가 훨씬 어렵고, 그 때문에 대응하기도 힘든 것이 편전의 또 다른 장점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편전을 사용할 때 사용하는 통아가 일종의 착시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부츠는 그의 논문에 조선 구식 군대 병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아군이 편전을 쏘아도 손에 그대로 통아가 남아있어, 적이 활을 아직 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아군을 지켜보는 순간 적에게 편전에 명중된다”고 설명한 것이 전형적인 사례다.
세종(1397~1450)이 국왕으로 있던 1435년에 조선 조정은 편전이 만주족(여진족)에게 전해지면 안된다며, 비밀 유지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1437년 3월6일에는 왜인(일본인)이 편전을 모방할 우려가 있다며, 외국인이 있는 장소에서는 편전을 쏘지 말라는 조정의 정식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같은 해 3월19일에는 만주족 거주지와 가까운 함길도 지역에도 편전 사격을 비밀리에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연산군 재위시절에는 1503년에는 중국 명나라에 편전을 보내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편전은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이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알게 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기록도 나온다. 즉 편전은 만주족이나 왜인들에게는 그 사격법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무기였고, 명나라에서도 별로 사용하지 않던 무기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 "편전은 우리나라에만 있다"며 "중경유수 김강신이 원병(몽골군)에게 포위되어 병기가 모두 떨어졌을 때 원병의 화살 하나를 얻으면 넷으로 잘라 통편으로 쏘니 이것이 편전의 시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덕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대몽항전기(1231~1259) 때 처음으로 생긴 우리나라 고유 무기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에도 당나라(618~907)의 통전(筒箭)이나 통사(筒射)가 편전과 유사한 무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잔틴제국(330~1453)의 경보병이 사용했던 솔레나리온(solenarion)도 편전과 거의 동일한 개념의 무기라고 할 수 있고, 이후 튀르크나 아랍 국가들도 유사한 무기를 사용했다. 솔레나리온은 정확도를 약간 희생하는 대신 속도를 높인 화살로 일반적인 화살보다 약 2배의 사거리를 기록했다고 한다.
즉,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편전이 우리나라만의 고유 무기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중국의 명나라는 편전이라는 무기의 개념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에 대량 사용한 사례가 없고, 만주족과 왜인들도 마찬가지여서 14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편전은 우리나라만의 특색 있는 무기였다고 간주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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