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부도지(符都誌)

징심록연의후기_제1장

양해천 2018. 1. 26. 14:46

要正 澄心錄演義後記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박금(朴錦) 

제1장(第一章) 

澄心錄者는 我貫祖寧海君堤上公이 在良州(梁山)伯時紀錄者也라 
累世復寫相傳하야 束置於三神匱底而嚴禁出納者니 經幾代也라 
余童稚時에 間或偸閱而畧知其要領하고 後日在於東亞日報時에 
全篇譯出하야 將欲揭載於雜誌러니 編輯者가 以爲必觸日政之忌諱故로 
乃中止而仍置於舊筐中矣라 
當二次大戰前後六年之間에 設立理學院而蟄居於錦湖하야 復得披閱之機會라 
然이나 自忙於原數理之考證하야 未嘗熟究詳解하니 至今多恨이라 
징심록자는 아관조녕해군제상공이 재양주(양산)백시기록자야라 
누세복사상전하야 속치어삼신궤저이엄금출납자니 경기대야라 
여동치시에 간혹투열이략지기요령하고 후일재어동아일보시에 
전편역출하야 장욕게재어잡지러니 편집자가 이위필촉일정지기휘고로 
내중지이잉치어구광중의라 
당이차대전전후육년지간에 설립이학원이칩거어금호하야 복득피열지기회라 
연이나 자망어원수리지고증하야 미상숙구상해하니 지금다한이라 

징심록은 우리 관조(貫祖)이신 영해군 제상공이 양주(양산)주1) 백(伯)으로 있을 때 기록한 것이다. 
여러 세대를 걸쳐 복사하여 서로 전하였다. 

묶어서 삼신궤의 밑바닥에 감추어 놓고 
그 출납을 엄중히 금한 것이 몇 대를 지나온 것이다. 

내가 어린 아이일 때 간혹 훔쳐보아, 그 주요한 강령을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뒷 날 동아일보에 재직할 때, 전편을 번역하고 장차 잡지에 게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편집자가 
이는 필시 일정의 기휘, 즉 꺼리고 싫어함에 저촉됨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 중지하고, 인하여 옛 광주리 속에 다시 안치했던 것이다. 

2차대전을 당한 전후 6년 사이에 이학원을 설립하고 금호2)에 칩거하였는데, 
이 때 다시금 이를 뜯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원래의 수리를 고증하는데 바빠서, 깊이 연구하고 상세히 해설하지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오직 한이 많을 뿐이다. 
  
주1) 양주 : 지금 경남 양산이라고 하나 박제상 선생 생존 당시 신라의 강역은 양자강 유역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주2) 금호 : 함경도 문천(文川)의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 통칭 양산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