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여유(餘裕)/비움과 채움

나를 지켜준 詩

양해천 2024. 2. 3. 14:19

나를 지켜준 詩

시장에서 30년째 기름집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고추와 도토리도 빻아 주고, 떡도 해 주고, 참기름과 들기름도 짜 주는 집인데, 사람들은 그냥 기름집이라 합니다.

그 친구 가게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달력? 가족사진? 아니면 광고? 궁금하시지요?

빛바랜 벽 한 가운데 시 한 편이 붙어 있습니다. 그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시장에서 기름집을 하는 친구가 시를 좋아한다니 어울리지 않나요? 아니면?

어느 날 손님 뜸한 시간에 그 친구한테 물었습니다.
저 벽에 붙어 있는 윤동주 서시말이야. 붙여둔 이유가 있는가?
으음, 이런 말 하기 부끄럽구먼.
"무슨 비밀이라도?

그런 건 아닐세. 손님 가운데 말이야. 꼭 국산 참깨로 참기름을 짜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렇지. 우리 아내도 국산 참기름을 좋아하지.
국산 참기름을 짤 때, 값이 싼 중국산 참깨를 반 쯤 넣어도 손님들은 잘 몰라. 자네도 잘 모를 걸.

30년째 기름집 하면서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욕심이 올라올 때가 있단 말이야, 국산 참기름을 짤 때, 중국산 참깨를 아무도 몰래 반쯤 넣고 싶단 말이지. 그런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내 손으로 벽에 붙여놓은 윤동주 <서시>를 마음속으로 자꾸 읽게 되더라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구절을 천천히 몇 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시커먼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 그러니까 30년 동안 나를 지켜준 셈이야. 저 시가 없었으면 양심을 속이고 부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하하.

그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좋아하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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