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여유(餘裕)/비움과 채움

우리를 구원하는 건 정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연민

양해천 2024. 12. 17. 16:28

  [ 우리를 구원하는 건  정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연민 ]

 일 년 전 강원도를 다녀오면서 프리미엄 버스를 탔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늦은 밤이어서 버스 안이 어두컴컴했다.
휴대전화를 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실수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당황해서 좌석 밑을 보는데,
프리미엄 버스라 구조가 꽤 복잡했다.
조명이 약하니 잘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뒷자리로 굴러간 건 아닐까 싶어서 뒷좌석 승객에게 조심스럽게 밑에 휴대전화가 있는지 봐 달라 부탁했다.
아마 20대 여성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자기 휴대전화의 손전등을 켜더니 자리 밑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내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아 난감했는데, 자기가 손전등을 비추어 줄 테니 더 찾아보라 한다.
그가 도와준 덕에 내 전화기를 찾을 수 있었다.
가방 안에 무어라도 좋은 게 있으면 선물로 주고 싶은데,
기껏 강원도를 다녀오면서 특산품 하나 산 것이 없었다.
말로만 연신 고맙다 했는데,
웃으면서 괜찮다 한다.
그때 휴대전화를 찾았다는 안도감과는 또 다른 안도감을 느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주는 안도감이었을까?
내가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느낌?


언젠가 TV 다큐에서
한 탐험가가 밀림에서 원주민을 만났을 때 느낀 안도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경계감이 가득한 얼굴이던 원주민이 곤경에 처한 탐험가를 보고 미소를 지었을 때,
탐험가는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공유할 수 있는 친밀감, 나를 해치지 않고 도울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과 기대가 그를 안도하게 했다.


내 어머니에게는
주위에 좋은 이웃이 많다.
어머니의 요양보호사는
취미로 텃밭에서 작물을 기르는데, 수확철이 되면
신선한 야채로 어머니 냉장고를 채운다. 툭하면 입맛이 없다고 투덜대는 까다로운 노인을 위해
본인 가족을 위해 정성껏 만든 밑반찬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머니의 한 이웃사촌은
자주 어머니 집에 들른다.
말동무도 하고 음식도 해주신다.
어머니는 잘 드시면서도 맛이 없다고 타박하는데, 그래도 어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웃으며 놀다 간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 사람들 은혜를 어찌 갚을까 하는데,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이런 선행은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나를 위해 손전등을 켜 준 이,
탐험가에게 미소를 보인 원주민,
내 어머니의 투정을 받아주는 이웃은, 어두운 버스에서
휴대전화를 찾는 사람이 겪는 곤란, 낯선 밀림에 고립됐을 때 느끼는 공포, 홀로 사는 노인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그래서
연민의 마음을 갖는다.
타인의 곤경을 이해하고
그래서 연민의 마음을 갖고
그래서 작은 선행을 베푸는 일은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그 연민은 인간에게만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을 향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신의 의지가 인간 본성에 반영됐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습득됐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신의 의지의 반영이든
진화의 결과물이든, 타인에 대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연민이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은 그 마음이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손전등을 켜주었을 때 내가 고마움뿐만 아니라 안도감을 느낀 것은,
나를 살게 하는 무언가가
여전히 내 옆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면서
세상이 몹시 시끄럽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가 한국을 구원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연민이 사라지는 사회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
연민이 없는 정치는 위험하다.
게다가 혐오를 선동하는 정치라면 더 위험하다.
정치가 우리를 구하려면
그 바닥에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한다.


겨울이 되면 생계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도 있어서인지 다른 달에 비해 자선 행사나 기부금이 많아진다. 올해도 한국에서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다.
현금이 사라진 세상이라
자선냄비도 사라졌거나,
아니면 다른 형태로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어떤 식으로든, 이 겨울이 몹시 춥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 작은 연민과 선행이
인류를 지금껏 지켜왔다는 것을.


  ( 박 상 준 /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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