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336] 대진-신라 남북국시대 신라 연대기 3
2012년 06월 01일 (금) 06:21:36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52. 제52대 효공왕(897~912)
서기897년에 헌강왕의 서자인 태자 요가 즉위하였다.
서기899년에 양길이 궁예를 치려 하였다가 오히려 기습을 받고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궁예는 신라의 북부지역을 거의 장악하였다.
<후백제 건국>
서기900년에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국원, 청주, 괴양의 괴수 청길과 신훤 등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후고구려 건국>
서기901년에 궁예가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때 궁예는 약40세였다.
서기904년 가을에 궁예가 청주의 민가 1천여호를 철원성으로 옮기게 하고 수도를 철원으로 정하였다.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사벌주(상주)와 북쪽으로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서기905년에 궁예가 도성에 화려한 궁전과 누각을 지었다. 평양성주 금용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서기911년에 궁예가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正開)라 하였다.
서기911년경에 박문현(朴文鉉:810~?) 선생이 효공왕의 왕위 계승에 분쟁이 있으므로 100세의 고령으로 국중에 발언하여 세론을 환기하여 말하기를, “신라 입국의 근본은 부도(符都)를 다시 세우는 데 있는 까닭으로, 위에 있는 자는 반드시 이 일에 힘쓸 것이요, 감히 사사로이 영화를 도모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니, 이는 입국 당시의 약속이며 비록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어제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본의를 잊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조선(朝鮮)은 곧 사해(四海)의 공도(公都)요, 한 지역의 봉국(封國)이 아니며, 단씨(檀氏)의 후예는 즉 제족의 공복(公僕)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동해로 피난하여 와서 방비를 설하고 나라를 칭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며, 결코 본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이 다른 나라와 현저히 다르며, 우리들은 마땅히 이에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고 마음을 돌이키어 반성함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국론이 크게 바로 잡혀 조정이 숙연하게 되고 왕위를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제1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하니, 이가 신덕왕(神德王)이다.
서기911년에 효공왕이 첩들과 어울려 놀며 나라일을 돌보지 아니하므로 대신 은영이 효공왕의 첩들을 죽였다.
서기912년에 효공왕이 아들이 없이 붕하였다.
53. 제53대 신덕왕(912~917:박씨)
헌강왕의 사위이자 8대 임금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인 박경휘가 즉위하였다.
소순공주(昭順公主)가 조겸(曺謙)의 배필이 되었다.
54. 제54대 경명왕(917~924:박씨)
신덕왕의 태자 승영이 즉위하였다.
서기917년에 왕건의 딸 덕흥공주가 탄생하였다. 후에 덕흥공주가 조겸(曺謙)과 혼인하였다.
<고려 건국>
서기918년에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 6월에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로 곡식더미 위에서 즉위하고, 네 장군과 1만여 군사를 이끌고 궁예의 왕궁으로 쳐들어가 승리하였다. 이때 궁예는 변장을 하고 왕궁을 빠져 나갔다가, 분노한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왕건이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서기919년에 수도를 송악의 남쪽에 정하였다.
서기920년에 신라는 고려와 수교하였다. 이때 백제도 고려와 수교하고서는 신라를 침공하여 대야성을 빼앗고 진례성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경명왕이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고 고려가 군사를 보내자 견훤이 군사를 돌렸다.
55. 제55대 경애왕(924~927:박씨)
경명왕의 아우 위응이 즉위하였다.
서기925년에 신라의 고울부 장군 능문이 고려에 항복하였으나 고려가 반려하였다. 고려군이 조물성(경상도 북부)에서 후백제와 크게 전쟁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은 견훤에게 화친을 청하고 인질을 교환하였다.
<대진국의 멸망>
서기926년 1월에 대진국(大震國)이 거란(契丹, 遼)에 망하였다. 북쪽에서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한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자 기꺼이 받아 들였다.
서기926년에 후백제의 인질 진호가 고려에서 돌연 사망하자, 견훤은 고려의 인질 왕신을 죽이고 고려의 공주성을 침공하였다.
서기927년에 고려가 후백제를 치자 신라는 군사를 보내어 도왔다. 이에 후백제군은 근품성(상주)을 버리고 고울부를 습격하였다. 경애왕이 경주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견훤의 군사가 들이닥쳐 경애왕이 도망하였다가 붙잡혀 견훤의 명으로 자결하였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즉위시켰다.
56. 제56대 경순왕(927~935:김씨)
문성왕의 6세손인 김부가 즉위하였다.
서기927년에 공산(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의 장수를 잃고 간신히 도망하였다.
서기930년에 고려가 고창(안동) 전쟁에서 후백제를 크게 이겼다.
서기931년 봄에 고려 왕건이 기병 50여명을 이끌고 경기 땅에 이르자 경순왕이 영접하였으며, 수십일간을 머물다 경순왕의 사촌동생 유렴을 볼모로 데려갔다.
서기934년에 신라의 30여개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후백제 견훤왕이 맏이 신검을 제쳐두고 넷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 신검(神劍)이 막내인 금강(金剛)을 죽였다. 이해에 견훤왕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로 삼고 양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서기935년에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려 하자, 이에 태자는 홀로 항복을 반대하고, 궁을 떠나 개골산에서 평생 삼베옷을 입고 살아 마의태자라 불렸다. 결국 경순왕이 왕건 태조를 찾아가 항복하였다. 이에 왕건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어 사위로 삼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내렸다.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억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서기전57년부터 서기935년까지 56대 99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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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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