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7만년 한 민족사

4. 삼한시대

양해천 2018. 1. 23. 15:05

44. 삼한시대

가 개요

삼한 시대는 인류 최초의 집단이며 언어의 발상지로 호모사피엔스가 생긴 한국의 지경이 홍수 이후 히말라야 동쪽 지역으로 그 지경이 줄어들고 각기 삶의 방식에 따라 세 개의 한국으로 분리된 시대를 말한다. 그 시기는 홍수가 그치고 난 후인 기원 전 1만 5천 여 년부터 기원전 5천년 전까지 약 1만년의 시대이다. 홍수 기간과 홍수가 안정된 때까지 고대국가가 지역별로 건국되어 언어가 각기 차이를 가지고 고정된 문자 역사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삼한은 모한(母韓) 진한(眞韓) 번한(繁韓)인데 모한은 바이칼 언어발생지역 인근을 말하고. 진한은 말은 전파하려고 멀리 이동한 제사장 집단을 말하며 번한은 황하의 인구폭발로 인구가 번성했던 지역이다. 셋 다 한국의 가지이고 한국인들이 가졌던 심성을 가졌다. 서양사람들이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한은 지금의 러시아, 몽골을 비롯한 북쪽 지역으로 말을 키우고 목축을 하는 초원지대이고 번한는 불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벼농사를 하는 농경지역으로 중국이 되었고 진한은 제사장 집단으로 처음에는 기득권을 가지고 자연에서 식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안을 낀 높은 산악지역(고조선)에 자리를 잡았으나 점차 번한에 영토를 빼앗기고 모한의 일부(고구려)와 합쳐 지금의 한국이 되었다.(예 신라) 참고로 일본은

여기에 끼지 못하고 섬으로 피난하거나 도망한 한 맺힌 집단이다.

나. 문헌과 유적 상 삼한 정리

1) 개요

환단고기에 삼성기전 하권 고려시대 학자 이암에 의하면 한국의 12연방 시대가 한웅조선이 건국되기 전 63.182년 전부터 있었다고 쓰고 있다. 유적은 홍수 이전 것만 발견되고 홍수 기간 중 유적은 아리안의 흔적이 간지스강 인근에 일부 있는 것 잉외에 거의 없다. 홍수 이전 유물의 여를 들면 미국의 역사 미술학자 카터 코벨 부부에 의하면 홍수가 시작되기 전 기원전 1만7천 년 전에 이미 요동성 인근에서 타다만 볍씨와 인간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유골의 DNA 분석결과 수명이 천년에 달했던 점이 확인되었다.

- 삼한의 유지 기간: 기원전 15.000년-기원 전 5.000 년(만 년)

- 위치: 12연방 지역 중 수밀이(메소포타미아), 비리(페르시아, 이란), 서납아(인도)를 제외한 히말라야 동방 지역

- 어원: 중국 측 한문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하고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남부 등 다양한 설이 제기 되어왔으나 필자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삼이라는 숫자는 인류가 아프리카에서부터 쓰던 말이고 한은 한국의 한으로 바이칼 창시자 효과 이후 6만년 이상 써 오던 호모사피엔스는 원래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었다. 삼한은 일한 즉 한이 세 개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며 고대에 삼이라는 숫자는 조상들이 삼신(천지인)을 뜻할 때 쓰던 말이었다. 따라서 삼한의 어원은 한문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일 한이 세 개로 분리된 역사에서 과학적으로 찾아야 한다.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지구에는 지금으로부터 만 5천년 전 전부터 5 천년 전까지 1만 년 간 많은 비가 내렸고(성경에서의 노아의 홍수의 기원) 140미터 정도 해수면의 상승이 있었다. 따라서 그 전에 낮은 지역 강 유역이나 바닷가에 모여 농사를 지으며 번식을 계속하던 인류는 모두 멸망하거나 높은 곳으로 피난했고 바이칼 호는 다행이 해발 545미터의 높이에 있어 안전했다. 카터 코벨의 요동성 인근에서 발견했다는 천년 수명의 인골과 군량미 볍씨는 아틀란티스, 요나구니 해저 유물과 함께 이 때에 없어진 유적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 비를 속세를 만든 인류에 대한 하늘의 징계로 여겼고 그래서 성경에는 노아의 홍수가 인류 멸망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삼한이라는 명칭이 생긴 시기는 홍수가 끝나고 저지대에서 집단 농경과 한문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로 벼농사의 시작 시기인 배달 국 건국 이후로 봐야 한다. 그 사용집단은 물론 한문을 처음 만든 배달국 제사장 집단이다.

2) 삼한(마한, 진한, 번한)의 각각의 이름을 짓게된 유래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한이 남긴 유적은 고대로부터 공통적으로 천문 관측 유적이 특징이다. 우선 진한은 언어를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지도 집단으로 산맥을 따라 사방으로 간 제사 집단이다. 이들은 기원전 2-3

만년 경에 인도북부 초원지대와 14.000 년경 양자강 상류에 도달해 있었다. 진짜 한이라는 의미에서 진한(眞韓)이었고 진 조선이라 고도 불리워졌다. 중국(반한)인들이 이 진한을 조작하여 진한(辰韓), 또는 묘족이라고 불렀으나 당나라 이전까지 충칭에는 박창범 교수가 증거한 이 진한의 조선 천문대가 있었으므로 이 진한의 이동이 청해성, 신강성, 운남성을 따라 양자강 중류까지 확장했음을 증거하고 한단고기에는 후에 아라비아 일본에 이르는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세계였다. 文芸春秋’ 4월호 長江문명 발굴기 좌담-<월간중앙2002년5월호>에는 일본인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작가,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靜岡大學 조교수)의 황하 문명 천년이전에 있었던 이 진한의 장강 문명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홍산 문명과 같은 샤머니즘 관련 옥기와 매장, 농사의 유적이 나왔다.

변한(弁韓)은 농사를 지으려 황하로 간 사람들로 원래는 번성한 지역이라는 뜻으로 번한(繁韓)이었으나 나중에 기자의 번한이 되었고 서기전323년 연나라 왕 읍차 기후(허)가 이 번한을 침공해 와 64대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암살 당하자 실질적으로 번한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지역에 고구려 출신의 온조가 기원전 58년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이 지역이 황하 농경 문명으로 백 가지 성이 산다고 해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백제(百濟)라고 부르다가 산동 반도 쪽으로 국토가 좁아지면서 기원 후50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망하였다. 그 후 중국인(주로 선비족: 이씨) 들에게 의해 통치되다가 1. 911신해혁명 이후 손문에 의해 중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중국인들의 기록대로 군사력과 영토 개념으로 만들어진 인간 국가인 진(辰),한(漢),원(元),명(明),청(靑)이었다. 백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북경이 중심이었고 천안문에 천문대가 있었으나 중국 농경민족에게 붸겨 해안(웅진, 산동반도)으로 붸기다가 7대 동성왕 때 기원 후 500년 중국인 태수 7명에게 치리권, 제사권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한반도로 와서 죽었다. 박창범 교수의 천문 览측 기록 분석에 의한 결과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즉 백제의 천문대는 변한 시절부터 끝까지 천안문 광장에 있었다. 막(莫)한은 처음에는 막막한 북쪽이어서 막(莫)한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말이 많다고 해서 마(馬)한이라고 불렀으며 중국인들은 지금도 북쪽을 막 북(莫北)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지역에 벼를 처음 심기 시작한 한웅의 중심 요동이 있었고 요하의 홍산 문명이다. 이는 황하 문명보다 천년이전이다. 여기서 막조선, 구이, 구한 또는 고구려가 나왔다. 고구려의 천문대는 박교수의 검증 결과 내몽고 졸본에서 하얼빈에 걸쳐 있었다. 홍수 이후 6만 5천 년 전부터 12연방으로 불리워 지던 바이칼 호모사피엔스(고대 한국인)는 히말라야 동쪽, 소위 동방에서는 이렇게 마한, 진한, 번한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마한은 과거 국막한국, 구모액국 지역이었고 진한은 구다천국, 양운국, 일군국 지역이었으며 번한은 객현한국, 매구여국이었다. 이 때부터 삼한 이전, 12연방 지역은 비리(페르시아: 이란)과 서납아(인도)가 분리되고 중국(번한)을 중심으로 히말라야 동쪽 지역을 일컬어 구한(九韓) 또는 삼한(三韓)으로 불리어 지기 시작하였고 인류의 수명은 1.000 년에서 500년, 300년, 100년으로 짧아졌다. 이것이 삼한의 기원이다. 이 때부터 수 만 년 계승되던 샤머니즘은 삼한으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방법으로 계승되어 묘족, 중국인, 북방 기마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른 언어, 심성 및 체질로 분리되었다.

유적을 통해 정리하면 기원전 4천 년 전의 요하 문명이 한웅과 고구려 문명이고 같은 시기에 산맥을 따라 남하한 묘족이 양자강 상류를 거쳐 동진하여 해안에서 일으킨 문명이 장강 문명으로 신라와

일본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그로부터 천년 이후 홍수가 그친 것이 확인된 시기에 후발주자로 남하한 묘족(한국인)의 농경 문명이 황하 문명이고 백제 문명이다. 따라서 중국은 조선의 가지이다. 그래서 독립 선언서에 중국을 가지로 나갔다는 의미에서 지나(支那)라고 불렀다.

3) 삼한(三韓)관경(觀景)

삼한관경이라는 용어는 이렇게 환경이 서로 다른 각각의 한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인들이 황하를 중심으로 농경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삼한의 역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12연방에서 삼한으로 바뀐 범위는 다음과 같다. 마한 진한 번한의 위치는 각각 요하 문명, 장강 문명, 황하 문명으로 그림과 같다.

라. 한인 시대 6만 년 타지역 문명 설명

서양학자들은 이 기간에 서양을 중심으로 아틀란티스,. 곤드와나,

무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인도나 일부 동양학자들 간에는 티벳

산지에 140여 개의 지저(地貯) 낙원도시 문명인 아갈타 삼발라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아틀란티스는 홍수 때 갈아 앉은 홍수이전 유적으로 무 대륙의 경우는 기원 전 15세기 것으로 판명이 났고 아갈타 삼발라는 홍수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안전한 산악 동굴에 서 살고싶어한 염원의 표현으로 보이며 불교 밀교를 통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 단군세개 BC 426 44세 단군 구물 때 우화충 죽임 장당경(북경)에서 즉위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어 부름


다. 사머니즘

1) 사머니즘의 서양식 어원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샤머니즘의 어원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이나 종교이다. 엑스터시[忘我·脫我·恍惚]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17세기 후반 트란스바이칼 지방과 예니세이강가에서 퉁구스인(人)계 에벤키족을 접했던 한 러시아인에 의하여 서양에 알려졌고 시베리아를 근거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원시적인 종교형태라고 하나 사실은 샤먼이 아니고 삼한이며 이 삼한은 일한(한국)에서 홍수 후 삼한으로 전환될 때 호모 사피엔스에게 계승된 홍수 이전 5-6만년간 인간의 삶의 전승을 말한다. 즉, 천지인이 한 생명체라는 알 사상을 말한다. 현대 한국에서는 "샤먼을 한자(漢字)로 무격이라고 쓰는데, 무(巫:여성), 격(覡:남성)을 차용한 말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을 무격신앙 ·무속(巫俗)신앙이라 하며, 샤먼을 무(巫) ·무녀(巫女) ·무당(巫堂) ·무자(巫子) ·무복(巫卜) 신자(神子) ·단골 ·만신 ·박수 ·심방 등으로 부르지만 대개는 남녀의 성에 따라 박수(남성) ·무당(여성)의 호칭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한국 무속의 샤머니즘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긍정 ·부정으로 학설이 나뉘어 있으나 무속은 그 전체가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筃)이자 무칭(巫睨)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무당의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다수 민중 속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존속되어 왔다. 무당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는데, 남부지역은 혈통을 따라 대대로 무당의 사제권이 계승되는 세습무가 지배적인 데 비해, 중 ·북부지역은 신(神)의 영력(靈力)에 의해 무당이 되는 강신무가 지배적이다. 이 같은 무당의 성격차에 따라서 무속의 신관(神觀) ·신단(神壇) ·제의식(祭儀式) 등 전반에 걸쳐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조상의 기록(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을 무시한 서양의 기록을 흉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샤머니즘의 진실

샤머니즘의 의미를 정직하게 말해 본다면 그 어원은 전술한대로 샤먼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말은 17세기에 트랜스바이칼이나 퉁구스인의 발음을 게르만 계 러시아인이 듣고 그대로 옮긴 것으로 원어는 삼한이라는 국명이다. 이 말은 세 개의 한이라는 말로 호모사피엔스의 최초 집단 이름인 한국이라는 이름에서 나왔고 바이칼 지역에서 확장된 한인 한국이 홍수이후 삼한이라고 불러왔던 토착민들의 고대 언어가 그대로 전승된 현상이라고 본다. 삼이라는 숫자는 아프리카 언어로 모든 네안데르탈인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에 국가가 생기기 이전에 인간이 양심과 하늘에 대한 기원으로만 삶을 영위하던 시절 제사장 집단인 한국에서 전파된 삶의 양식이 현대에 전래되고 변형되어 러시아인에게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샤머니즘은 6만 년 삼한의 정신 즉 바이칼의 아리랑 사상이고 홍수 이후에는 삼신 사상이다.

3) 샤머니즘의 생성과 변천

아프리카에서 이동해온 네안데르탈인과 바이칼에서의 창시자 효과를 경험한 호모사피엔스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어휘가 8천 여 개에서 십 수 만개로 수십 배나 늘어났다. 최근에 발견된 당시의 유적에 내세를 나타내는 예술성이 있는 그림들과 개량된 사냥 도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창세기와 환단 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창시자 효과 이후 늘어난 이들 어휘는 우주를 포함한 하늘, 땅, 사람과 관련된 명사들과 상호 관계와 관련된 동사 및 이들을 꾸미는 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인체의 부위와 자연 현상, 동식물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계절, 기상, 자연을 알고 여기에 적응하기 위한 말, 생식과 양육을 위한 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인간 관계와 관련된 말이 생겨났으리라 본다. 반면에 아프리카 네안데르탈인들의 8천 여 개 어휘는 의식주 생존과 양육 도보이동에 필요한 기초적인 말만 가지고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창시자 효과 후 확장된 언어로 인해 인간이 갖게된 가장 주요한 심성은 자연에 적응하기 위한 생각(후에 한문이 나타난 이후에는 조화造化), 생식과 육아를 위한 생각(敎化), 인간관계를 위한 생각(治化)이었고 수 만년 동안 이를 경험한 결과를 터득하여 살 수 있도록 후손에게 전수한 것이 천지인이 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 즉 삼신사상이라고 본다. 이 삼신사상을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주 내용이며 성경의 창조자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 창시자 효과가 전 지구로 전파되는데 약 1-2만 년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리라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환단고기 삼성기 전 하권의 기록에 환국이 3.301년 또는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라는 것 중 후자에서 따 온 것이다. 그 이유는 바이칼 호수 집단생활이 6만년이 넘고 최근 고비 사막과 요동 인근에서 발견된 당시 동굴의 그림과 사냥도구 유물이 탄소 측정 결과 5만 년 전이라는 데서 추론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절대자 하나님의 등장은 그 후의 일로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인간 집단에게 가장 큰 위협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연적으로 닥치는 기상, 지진, 맹수, 식물, 질병 등 자연이 주는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창세기에 "우리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은"(창 3:1-10) 이유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신 사상이 최초 호모사피엔스에게 심어진 기본적인 심성임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첫째, 농사를 땅을 훼손하는 일로 보고 죄악 시 했다는 것이다. 강가 낮은 곳에 가서 집단을 이루면 사람과 한 생명체인 땅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죄가 되어 자연이 홍수로 벌을 내릴 것이라는 것이며

(성경) 둘째, 부도지에도 최초 인간인 궁희와 소희, 흑소, 백소, 황궁 ,청궁씨 모두 식량으로 떨어진 과일의 즙(지유: 地乳라고 불렀다)만 먹고 나무에 붙은 열매는 생명체라고 하여 먹지 않았고 사람에게 치아가 없었다고 하는 등 내용으로 이를 증거 한다.

셋째. 천지인사상,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의식은 처음에는 하나라는 뜻으로 한이라고 불려 지다가 후에 44세 단군 구물(BC425년) 때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는데 한문을 그대로 해석해 보면 해를 보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면서 농사를 지어 땅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서 주는 생선과 양을 키워 먹고사는 나라라는 뜻이나 이 이름은 그 이전부터 삼한 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바이칼 창시자 효과 후 만 여 년에 걸쳐 인간에게 유전적으로 형성된 이 삼신사상에서 인간의 대 자연, 대 인간에 대한 최포 언어가 생겨났고 행동의 기준이 되는 소위 양심이라는 것도 생겨났으며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여러 현상으로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여러 종교와 문명 등 여러 분야의 인류이 역사가 생겨났다고 본다.

* 천부경

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하나(一)가 비롯되니 무(無)로 비롯된 하나(一)이고, 세 (개의) 극(極)으로 나뉘어, 다함이 없는 본(本)이다. 하늘은 첫 번째(一運)에서는 일(一)이고, 땅은 첫 번째(一運)에서는 이(二)이며, 인간은 첫 번째(一運)에서는 삼(三)이다

* 삼일신고

삼일신고는 원래 신시에서 나라를 열던 시대에 나왔다. 그 글은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執一含三 會三歸一)을 근본 뜻으로 삼고 있으며, 다섯 장으로 나누어져 있어 하느님의 조화와 사람과 사물에 대한 교화의 근본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다섯 장은 허공(虛空), 일신(一神), 삼신(三神), 천궁(天宮), 세계(世界), 인물(人物)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일신고 [Samilshingo, 三一神誥] (태권도 용어정보사전, 2011.3.1, 태권도문화연구소)

4) 샤머니즘의 내용

샤머니즘의 내용은 창시자 효과 이 후 문자 이전 호모사피엔스의 7만년의 삶의 기간, 즉 역사시대의 10배에 해당하는 유구한 기간에 우리가 현재 실재로 보듯이 인간이 인간다워진 기간 동안 구체적인 삶의 내용인데 시대별 삶의 내용은 그 동안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와 과학적 결론에서 유추해야 한다.

- 5만 년 전: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 발생, 호모사피엔스(슬기 인간)와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 슬기인간 소위 백인종)가 출현한 시기로 식량 부족으로 인한 인간사이의 갈등

이 없는 상태에서 하늘, 땅, 사람과, 사물의 이름을 인식하게 되고 자연에 조화롭게 적응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며, 관계의 도리를 익히게 되는 시기로 당시의 바이칼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개선된 사냥

도구와 예술성이 있는 동굴 벽화가 이를 증명한다. 이때에 인류가

모계 사회로 동굴에 살거나 숲 속에 새들처럼 둥지를 지은 것을 시사하는 기록이 박재상의 부도지 궁희(窮姬)와 소희(巢姬)에 나타나 있다. 이 때에 아프리카 네안데르탈인들 중 해안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흔적인 낚시 바늘이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걸쳐 나타나기도 하였다.

- 4만 년 전: 창시자 효과 이후 약 1만 년 간 인간이 자연의 이치

 

이해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적응한 기간이다. 일, 월, 1년, 수명 등 시간을 인식하고 우주와 하늘, 자연을 관측하며 먹을 것 입을 것 주거지를 개발한 시대로 동물의 확보를 위한 사냥과 목축, 계절에 따른 식물의 성장과 소멸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한 시대이다. 이 때에 본격적으로 모든 사물은 살아있고 사람이 자영과 한 생명이라는 천지인 삼신사상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 인구의 증가로 인한 어류와 이동 소요의 증가에 따른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동굴에서의 낚시와 신발이다.

원래 식량 부족이 없어 모계 사회였던 초기 바이칼 시대가 사냥과 이동의 필요성 증가로 이때에 부계사회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3만 년 전

이 시기와 관련된 주요 자료는 2-3만 년 전에 아리안 족이 인도 북쪽 스탭 지역에 머물렀다는 것과 3만5천 년 전 유럽의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 벽화가 주종을 이룬다. 이 벽화는 16만 년 전부터 이동한 선주 네안데르탈인이 그린 것으로 사진에는 고, 말, 사슴 등 동물들만 있지 사냥 도구나 내세를 염원하는 예술성이 있는 그림은 없다. 오히려 동물그림과 함께 인육을 먹은 그림이 있었으나 기원 후 2천년 이후 이룰 모두 지우거나 관광객이 보지 못하도록 폐쇄하고 있다.

알타미라(스페인 

북부)동굴의 3만5천 년 전 벽화

쇼배(프랑스 남부) 동굴의 3만 5천 년 전 벽화







크로마뇽 동굴(프랑스 베제르 계곡)의 3.5 만 년 전 벽화





- 2만 년 전

지금 까지 발견된 이 시기의 주요 유적은 빗살 무늬 토기인데 이 토기의 발견으로 인류가 집을 짓고 가족이 모여 살았으며 불을 이용하여 동물과 식물을 익려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빗살 무늬 토

기 유적은 바이칼에서 유럽 북부 지역까지 퍼져 있다.

빗살 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분포지역






* 빗살무늬 토기 분포지역(가족 사회 분포)에 유럽대륙이 빠져있음에 유의 할 것

마. 샤머니즘의 발전

- 하늘(태양, 달, 비, 구름, 바람 등), 자연(지형, 산, 강, 들판, 동물, 식물) 인간(암, 수, 가족)에 대한 관찰 결과 후대의 샤머니즘과 음양 오행설의 기원이 됨- 이동과 의식주에 대한 유용성 판단(최초의 사고)- 동물 사냥과 가축(식용, 이동용, 반려용)의 대동 및 사육- 집단별, 씨족별, 부족별 자손간 소통 수단으로 글자에 명

 

칭(자연, 인체)을 붙이면서(표음 문자)) 동시에 한문의 기초가 된 부호(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예: 하늘 一 땅 _ 연결자 十 王-아프리카에서부터 있었던 기본적인 숫자(1-10)외 백, 천, 만 등의 단위를 사용하여 자연관찰에 적용하고 미래를 예측하였다.- 하늘, 자연, 사람(천지인, 우주, 지구, 인류)이 한 생명으로 연결된 생명체라는 믿음: 삼한 주의(서양 사람들의 소위 샤머니즘) 여기서 퍼져나간 유럽북쪽 스칸디나비이인들은 지명을 모두 인체의 이름으로 지었고 영국의 스톤핸지는 바이칼 창시자 효과로 인한 언어가 2-3만년에 걸쳐 그곳에 전파되어 동방에서와 같은 천문관측 시설이 그곳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하늘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믿음: 어디서나 하늘이 있고 하늘에 태양이 있으며, 기상을 일으키고, 숨을 쉬게 하므로 믿게되었다. 따라서 세계 모든 인류에게는 하늘에 대한 신앙이 있다. 홍수이후에는 하늘로 인해 농사와 천재지변이 일어났으므로 문명인들의 대부분은 알이 하늘로 대체하였으나 제사집단인 고조선>신라>고려>한국인들은 지금도 하늘보다, 천지신명을 더 섬긴다. 중국(번한)에서 인신과 왕권이 강화 됨에 따라 점차 충(忠)과 효(孝),예(禮)가 인간 삶의 기준이 되었다. 이러는 동안 수 만년이 지나

- 자연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이 소위 양심이라는 의미로 정착되었다.

- 요약하면 샤머니즘은 인간이 집단생활을 시작한 7만년 이후 자연에서 나온 인간이 자연에서 나온 생명임을 규정하고 자연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정리하

여 홍수 이후 인간들에게 언어로 전달한 자연에 대한 반응체계이다.

- 한국인의 조상들은 이를 구어로는 아리랑 노래로 전하고 한문으로는 조화(造花)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세 단계로 나누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통해 삼신사상이라고 이름을 붙여 전했다. 많은 애국적인 학자(예: 박용숙 교수, 조홍근 풍수 전문가)들이 우리 민족에 대하여 "고대 세계를 지배한 7만 년 샤먼 제국이었다" 라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빗살무늬토기는 가족의 필수품임을 감안할 때 알프스 서쪽지역은 알을 벗어난 지역 즉 가족이 없고 사람이 아닌 짐승이 사는 지역이었음이 판명된다.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samh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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