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7만년 한 민족사

6. 한웅(배달) 조선

양해천 2018. 1. 23. 15:06

6. 한웅(배달) 조선

가. 개요

한웅 한국은 일명 배달이라고 하는데 이는 벼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이므로 중국음식을 나르는 뜻인 배달(配達)로 함부로 불러서는 안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 홍수 처음에는 제사집단과 농경 집단이 혼거 하다가 탁록 전투이후 헌원의 농경 집단이 삼한에서 실질적으로는 분리되고 모한과 진한은 한웅 조선으로 남아있었던 시대이다. 탁록 전투 이전(14대 한웅 치우 이전)은 중국과 우리가 함께 태호 복희씨(태우의太虞義 한웅韓雄)를 같은 조상으로 알고 있다. 한웅은 여성 중심 집단이 남성중심 집단으로 바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웅은 중국인들이 말하는 곰 웅(熊)자가 아니고 수컷웅(雄)자 이다.

태호 복의씨 외에 중국 삼황 중 둘째인 염제 신농씨는 황하의 농경 신이고 황제 헌원씨는 우리의 14대 한웅 자오지 한웅(통상 치우천왕이라고 부름)과 번한의 독립을 두고 탁록에서 싸운 인물이다.

한웅조선의 년대는 단군조선 건립(기원 전 2096년) 이전 1.565 년 간이고 18세이다. 제위기간을 보면 그들의 수명이 현재와 홍수 이전 수명의 중간쯤 되는 것이 흥미롭다. 성경에는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과 땅의 딸들의 혼혈로 수명이 짧아졌다고 기록되어 있나. 한웅 한국의 연대는 다음과 같다.

1대 한웅(거발한). BC 3898~3805년까지 94년 간 재위

2대 거불리(BC 3804~2719) 86년 간 재위

3대 우야고(BC 3718~3620) 99년 간 재위

4대 모사라(BC 3619~3513) 107년 간 재위

5대 태우의 (BC 3512~3420) 93년 간 재위(중국인은 태호 복희씨로 알고 있음)

6대 다의발(BC 3419~3322) 98년 간 재위 7대

거련(BC 3321~3241) 81년 간 재위

8대 안부련(BC 3240~3168) 73년 간 재위,

9대 양운(BC 3167~3072") 96년 간 재위.

* 이때 양자강 일대를 농경지역으로 개발한 것 같다

10대 갈고(독로한. BC 3071~2972) 100년 간 재위.

11대 거야발(BC 2971~2880) 92년 간 재위.

12대 주무신(BC 2879~2775) 105년 간 재위

* 아무 치적이 없어서 잔(경어로 주무신)왕이 된 것 같다.

13대 사와라(BC 2774~2708) 67년 간 재위

*교환을 강조한 한웅으로 보인다.

14대 자오지(치우. BC 2707~2599) 109년 간 재위 치우 천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

15대 치액특(BC 2598~2510) 89년 간 재위

16대 축다리(BC 2509~2454) 56년 간 재위

17대 혁다세(BC 2453~2382)년까지 72년 간 재위

18대 거불단(단웅. BC 2381~2334년) 48년 간 재위 

* 한웅의 재위기간으로 미루어 수명이 200년-300년으로 추정되어 동시대의 성경 인물들(아브라함, 야곱)의 수명과 일치한다 

* 탁록 전투이후 266년 간 한웅 시대가 지속됨 

* 헌원의 근거지는 황하(희대)지역이고 치우의 근거지는 산동반도(이후 웅진)이었으므로 한웅의 기반은 그 이전부터 샤머니즘에 입각한 한반도 ,요동, 황해 연안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 영토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제사 집단의 특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관련된 조상들의 기록

원동중(고려 말 반 이씨조선 중신): 서자 한웅, 홍익인간. 태백산, 다스리다, 3천 명, 반고 분리(라림 동굴, 10간, 12지, 공공, 유소, 유묘, 유수, 삼위단)

신시, 풍백, 우사, 운사. 생명, 형벌, 벼, 선악, 360가지 인간사 주관, 천경과 신고 교육, 땅 개간, 구리와 쇠 채굴, 군대, 산업, 소도., 구한, 삼한

안함로(신라시대 고승): 백산, 흑수, 천평, 청구, 사람이 모임, 천부, 오사, 홍익인간, 배달, 제사, 근신, 주문, 8궤, 신을 움직임,

- 주요 내용: 유적과 기록으로 미루어 마한과 한웅 조선은 기원 전 4천 년 경에 요하의 홍산 문명을 이르키고 진한은 양자강 하구의 장강 문명을 일으켰는데 이 시기에 이미 제사장들의 주도 아래 천체 괸측, 문자(한문) 시작, 국가, 군대 및 영토 개념, 부계 사회, 샤머니즘(8궤, 주문, 삼신 신앙)시장, 성씨 등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나. 한웅 조선(배달국=마한+진한)의 어원 및 강역

어원: 한이라는 이름이 먼저 붙어 있으므로 수 맘 년 지속된 한국이 뿌리다. 홍수 이후 높은 곳에서 저지대와 강 어구, 해안으로 내려와

벼농사를 시작한 집단이다. 다만 웅(雄)자가 수컷을 의미하므로 남자가 주도권을 쥔 시대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여성이 중심이 된 모계 사회였다. 한문도 이때에 생기 기 시작하였고 한단고기 기록도 이때부터 쓰여졌다. 중국인(실은 번한 인)들은 한웅조선의 이 웅(雄)자를 그들의 한문 역사 속에서 곰 웅(熊)자로 바꾸어 제사장 집단을 비하하였다. 그들의 가지인 이씨조선은 동시에 단군이 웅녀와 결혼했다면서 이를 한국인의 토템으로 바꾸었다. 한웅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황하 유역에 번한을 중심으로 한 농경집단이 생기고 한문글자를 중심으로 문명이 번성하자 황하 문명이 등장하고 홍수 이후 삼신 일체, 한 생명 사상을 유지해 오던 조선에 대항을 시작한데 있다. 이 농경집단의 침략에 마한과 진한을 보호하려고 생겨난 제사 중심 집단의 본부가 한웅 조선이다. 그래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와 삼조(三祖)가 모두 한웅의 무리이고 조선의 가지(支那)이다. 

* 3황5제 재 해석

3황은 일반적으로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여와씨(女?氏)를 말하며 사마 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頊高陽) ·제곡고신(帝?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인데 복희씨는 태우의 한웅, 여와는 그의 부인이며 헌원은 14대 한웅 치우천왕과 4촌지간이고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은 모두 헌원의 자손이고 신농씨만 농사 신을 의인화 한 것이다 

* 삼조

그래서 중국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3조는 황제, 치우, 염제(신농씨)이다.

다. 한웅조선 유적 

* 한웅조선 유적지

*한웅조선 유물







라. 한웅 조선 시대의 주요 사건

1)삼한의 등장

삼한은 홍수 이후에 생겨났다. 그것도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자연을 극복하면거 농경을 시작한 황하문명 때문에 생겨났다. 홍수 이후 농경지역에 나타난 이들 호모사피엔스의 성품은 이전의 삼한의 자연적 성품과는 구별이 된다. 언어를 비롯하여 종교, 생활 습관, 체질, 통신 수단등이 인본주의 집단 생활에 맞게 변해 갔다. 따라서 수 만 년 바이칼 에서 자연에 적응하면서 형성된 호모사피엔스의 전통은 산지에 살던 진한과 마한 인들을 통해 이어져 온 것으로 봐야 한다. 강 유역과 저지대에 살던 호모사피엔스는 성경의 기록대로 8천 년 간 계속된 비로 모두 멸절되고 여기에서 낮은 곳에서 농사를 짓고 인간 집단을 이루며 사는 것은 속세고 죄라는 성경의 홍수 기록과 그 이전 농경 종족이 수렵 종족을 죽이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삼한의 각각의 이름은 황화 문명 지역에서 농사를 통해 인구가 번성한 지역이리는 뜻에서 번한이 먼저 생기고 마한과 진한은 산악과 바다 등 자연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산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은 해안과 산악을 낀 지역으로 삼한의 모체가 되고(모한) 말로 이동하며(마한) 넓은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2) 한웅(남성) 제사장 집단의 등장

한단고기의 기록으로 볼 때 한웅 시대는 기원전 1만 4천 년 부터 홍수를 피해 삼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기원 전 8천 년 경 홍수가 그

치자 산에서 아래로 내려온 사람들 중 일단의 제사 엘리트들이 홍수 전 모계 사회에서 남성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부계 사회를 유지하면서 농사를 짓고 기상을 관측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치료를 하는 삼신사상을 삶의 지도 이념으로 삼고 구리와 쇠 채굴하며 군대와 산업을 일으키며 천신 제사를 지내면서 중국과 동방을 관할하던 기간이다.

한단고기에는 이 때에 반고가 라림 동굴에서 분리되어 10간, 12지, 공공, 유소, 유묘, 유수와 삼위단으로 황하 유역에서 백성을 분리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3) 인본주의 농경 국가 대두

기원 전 3천 년 전 번한 지역인 황하 일대를 중심으로 소위 농경 문명에 대두되었는데 이들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최초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자가 제사장의 역할을 주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번한 농경 민족과 마한, 진한 샤먼민족과의 무력 대결이 시작되었다. 양 측 간 최대 결전이 바로 전술한 기원전 2,600년 경 탁록(?鹿)의 전투이다. 그래서 국호가 배달<볏알<벼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4) 문자의 생성 발전

우리가 아는 동방의 대부분의 문자는 이 때에 생긴 것으로 전자, 녹도 문자 등 한문의 기초가 된 상형 문자와 후에 단군 조선 시대에 완성된 가림토가 여기에 속한다. 

마. 한웅조선(치우계)의 특징: 샤먼 집단의 경우

- 유적으로는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주류를 이루며 이는 고비사막 서북부에서 발굴한 만 3천 년 전 흑피옥과 같은 재료로 만든 것으로 한인 조선의 유적과 일치하므로 한웅 조선의 유물임이 틀림없다.

- 한웅 문명 발생 지역이 요하 상류이고 요하 상류가 흑룡강(원어는 알물=현재 러시아어로는 아무르 강이지만 중구인들은 흑룡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류와 만나는 지역임을 미루어 한인시대의 사람들 중 아무르 강을 따라 남하한 사람들이 홍수로 계속 산 위에 머물다가 점차 저지대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인다.

- 남성 중심 제사권

한웅 시대에 와서 그 이전 오랜 동안 유지되었던 모계 사회가 사라지고 농사를 남성의 완력에 의존하게 되자 제사권이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그들의 제후들에게 넘어갔다. 즉 샤머니즘에 변화가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역대 한웅은 조상들의 오랜 전통인 하늘 나라(한국)의 제정 일치 정치 방식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 삼성기 전(全)하권 桓雄님들이 다스린 倍達國後 桓雄氏喩興 奉天神之詔 후에 환웅씨계흥하시어 봉천신지조하시니 이후 환웅님들은 대를 이어 번성하시고

천신을 정성으로 제를 지내어 받들었으니~ 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강우백산흑수지간허사어 착자정녀정어천평하시고 흑수를 따라 백산에 이르러 넓고 좋은 땅에 모든 이들이 먹을 우물을 파시고~ 劃井地於靑邱 획정지어청구하시며 푸르른 구릉에 농지를 만드시고~,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하 지천부인하시어 주오사하시며 재세이화하시고 홍익인간하시고 

* 제세이화는 세상을 이치에 맞도록 교육한다는 뜻이고 홍익인간은 모든 인간을 두루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구약의 많은 자손을 통한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 위주 축복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신으로 부터 받으신 부와 인을 지니시고 만사를 주관하시니 세상은 바른 게 되고 넓게 이로운 인간들이 되니~ 

- 동방예의 지국

공자의 7대 후손 공빈이 배달국과 단군조선에 대해 말하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단군(檀君)임금이 계셨는데 구이(九夷: 동이 9족=구려=구리=고리=고려=KOREA)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하나라 요왕 때의 일이다.

순은 동이(단군조선)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셨다.

동이나라(배달국)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배달국 제14세 치우환웅 당시의 선인) 이라는 도통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중국의 시조)" 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웠다.

그는 염제 신농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중국 고대 나라인 하나라 우왕이 참석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

동이의 부루(夫婁:단군조선 제2대 단군임금)태자께서 친히 오셔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 졌다. 동이인 유위자(有爲子:제13대 흘달 단군 임금 당시의 선인)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그 분에게서 '중국'이라 하는 이름을 얻었고 이윤(은나라 개국 공로자)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은나라 탕 왕의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이윤이 말하기를 "동이(단군조선)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함부로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번조선 지역 서화)으로 갔다.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도 동이로 가고 싶어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인 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 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王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원문

東方有古國 名曰東夷星分箕尾 地接鮮白始有神人 檀君 遂湗九夷之推戴而爲君 樳堯병立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

爲帝,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睨之,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可謂東方巤儀之君子國也,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余亦欲居東夷之意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東夷蓋自千有余年以來 樳吾中華 相有友邦之義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 백의 민족 










또 백의 민족이라는 이름도 이때가 최초로 죄악시하는 농경 인간 집단을 인정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으므로 한웅이 통솔가능 했던 구리 지역만이라도 위생을 위해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 레위기, 신명기의 복잡한 정결 의식 대신 간단히 흰옷을 입도록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 성씨의 시작

우리의 성씨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한단고기가 도가 사서로서 가진 커다란 가치 중 하나는 한중일 3국의 성씨에 대한 기원을 자세히 밝혀준다는 사실이다. 태백일사 신시 본기에는 최초의 성씨로 5600년 전의 인물인 동이족 태호 복희씨의 성인 풍씨로 나왔으나 15대만에 끊어져 전하지 못하고 그 후손이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씨로 각각 나뉘어 살았다고 한다. 

* <밀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처 마침내 진에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중국 기록은 염제 신농이 강수에 살면서 성을 강씨로 삼았는데 이 강씨가 곧 인류 성씨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또 대륙 백제의 8대 성씨 (사(沙), 연(燕), 협(協),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묘(苗))

라고 하며 일본은 6세기 경부터 100여 년 간 고대 일본을 지배한 최고의 권문인 소가씨는 바로 위의 8성 중 하나인 목씨이라고 한다. 9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도 당시 일본의 지배계급을 이루던 1182개 성씨 대부분이 한국계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필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원래 성씨를 만든 목적은 신라의 진골, 성골 제도처럼 중요하거나 힘이 있는 가계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한문이 생긴 이후인 기원전 26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본다. 위의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판단해 본다면 최초의 성씨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한반도에서는 박(朴)씨이다. 이 글자가 가진 상형적 의미는 나무 아래에서 점을 치는 사람이라 뜻인데 이 나무는 원래 벼 또는 한웅의 웅을 의미했으므로 제사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 박씨는 10% 가량 있다. 많은 인원이 신라 김씨 왕조 이후 일본으로 갔다. 그 다음에 생긴 성은 김(金)씨 이다. 이 역시 골드(Gol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금속인 쇠를 의미하는 것으로 천자문에서도 쇠금이라고 읽는다. 철기, 청동기, 합금이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농기구나, 전쟁무기를 다루던 대장장이나 무사들의 성이다. 박씨들을 따라온, 신라 건국 계급에도 이 김씨가 있었고 한 무제 때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선우의 아들 김알지도 김씨였으며, 헌원도 자칭 김씨였다. 1992년 기독교 고신 전흥상 목사님이 시리아의 라스샤무라 점토판을 탁본해 번역을 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나는 수메르의 왕, 수콜로티(숫골 씨) 나는 왕 중 왕 나는 김씨이다" 이 김이라는 성을 서양 사람들이 킹(king)으로 잘못 발음하여 쓰고 있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는 오랜 옛 날부터 천산에서 난 금속을 무기로 사용해온 스텝 민족 무사들의 일반적인 성씨가. 김씨이고 징기스칸도 청태종도 김씨이다. 한국에 김씨는20%가 넘는다. 그 다음에 생긴 성이 벼농사를 통해 낳은 자식들이라는 의미인 이(李)씨이다. 하늘과 땅에서 나왔다는 의미도 있고 구리의 이와 발음이 같다. 이들은 모두 조선의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북방계와 황하계의 혼혈이고 당나라 이세민(李世民)을 필두로 중국 성의 대다수가 이씨거나 이씨의 가지이다. 고려 건국 시조 왕건도 이씨이다. 몽고 침략이후 개성으로 피난 와서 한반도에 살게된 왕(王)씨 변을 가진 성(全, 玉, 申, 車, 柳, 玉)씨가 그들인데 이성계가 그들 중 20만 명을 죽이고 만주 이씨들을 한 반도로 데리고 들어와 지금 한국에는 약 10-20%가 이씨 계열이다. 그래서 해방 후 김씨의 발호가 가장 심했고 그 다음이 이씨이며 가장 오래된 박씨들은 한 맺힌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바. 한문의 발전

중국 지배 계급들은 한웅 시대까지는 한국 민족과 조상이 같다. 현재 중국인들은 원래 이 지역으로 온 네안데르탈인들과 북쪽에서 남하한 삼한 민족의 혼혈로 보인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인 들의 역사에 그들의 조상이라고 기록한 삼황오제가 모두 역대 한웅이거나 14대 한웅 치우의 사촌인 헌원의 후손들이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말하는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하는데 태호 복희는 태우의 한웅의 막내 아들이고 염제 신농은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농경신으로 토착민 출신으로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경 역사가 발전하면서 중국인 스스로는 염황(염제)의 자손이라 하고, 황하 유역에서 기원하는 화하(華夏) 민족이라고 하는 문화의 일원론이 나왔다. 화하(華夏) 집단이 정치적인 우월감에서 점차 문화적 우월감으로 바뀌어 그들이 천하의 중심에 살고 있기에 중국이란 단어는 문화가 우월하다는 인식을 굳히게 되었고. 중국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예(四裔)로 보고 '만이융적(応夷戎狄)'으로 불렀다.

여기서, 스타로스틴의 <Altaic loans in old Chinese>에 나온 중국의 언어와 한문에 관한 중심가설을 요약한 것을 살펴보자.

1. 알타이어의 원형과 중국어의 조상은 많은 수의 비슷한 어근이 발견된다. 알타이어의 원형은 터어키어, 몽골어, 퉁구스-만주어, 한국어, 일본어의 공통된 조상이다.

2. 중국어는 초기의 문자화된 텍스트로 볼 때, 프로토-시노티베탄 즉, 중국과 인도, 네팔, 버어마에서 말해지는 많은 언어들의 조상으로부터 발전한 언어가 아니고 아프리카 기초어 스와질랜드어이다..

3. 의문이 되는 알타이어의 원형은 항상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발견되고, 이들은 그들 조상어에서 한국어와 일본어에 전해진 것이다.

4. 고대 중국어는 아프라카의 르완다 어가 기초가 되어 한국어와 일본어로부터 많은 단어를 빌려 왔는데 일본어는 한국어의 가지이므로 옛 한국어라고 할 수 있다.

5. 중국인이 홍수 이전에 한국에서 시작되었던 한문을 활용하게 된

동기는 바이칼에서 창시자 효과를 겪은 한국인들에 비해 뱃길로 중국 해안에 온 말을 할 줄 모르고 귀가 뚫리지 않은 르완다어(아프리카 기초 언어 8 천여 개)를 쓰는 아프리카 인들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즉 언어적으로도 중국인의 한문은 상형 모양에 한국어와 일본어 단어를 차용해서 갖다 붙이고 알기 쉽게 행동하는 순서대로 나열한 도치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단군 조선 말기까지 삼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삼한의 이름을 지우려고 한(漢)이라고 이름을 지은 나라를 세우기도 했으나 우리는 그들을 놈(漢)들이라고 불렀다.

바. 치우와 헌원

- 탁록의 전쟁

기원 전 2.700년 경 자연신을 섬기는 한웅시대의 제14대 자오지 한웅(치우)과 농경신을 섬기는 중국의 실질적인 시조라는 황제 헌원 간 황하유역 땅의 주도권을 두고 도합73회의 전쟁을 벌렸는데 우리는 치우가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 측 기록에는 저들의 조상인 헌원이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하튼 큰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이후 삼한은 번한(중국)이 독립하고 모한과 진한은 조선으로 남아있었다. 탁록의 전투 때 치우의 군사는 銅鐵器를, 헌원의 군사는 석기를 사용했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치우는 전쟁의 神으로 중국인들로부터 숭상되고 있다. 치우기라고 하여 군신이자 전쟁별로 숭배된다. 치우는 동서남북 중앙으로 땅을 나누고 그 책임자를 帝라 명명하여 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가 그들이다. 그래서 황제란 이들 중 중앙을 관활 하는 총독을 말한다. 치우는 자기에게 패한 헌원을 중앙을 다스리는 黃帝로 임명했던 것인데, 이 때문에 황제 헌원이 탄생된 것이다. 헌원은 동서남북중의 중앙의 임금이라는 뜻에서 누를 황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전쟁 이후 화하족의 힘은 날로 강성해져 중국의 대 부분은 헌원을 시조로 하는 농경민족이 점령했고 번성했다 하여 그 이름을 번한이라 했고 그 후 요, 순, 하, 은, 주 가되었다. 한웅은 그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농경 민족에게 붸긴 자연 민족은 만주일대와 자연적으로 먹고살기 좋은 중국의 서해안, 한 반도, 일본으로 모여들었다. 치우는 중국의 관경을 개척하고서도 농토를 황제가 이끄는 농민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이 탁록 전쟁 이후 중국 대륙 삼한이 황해 연안 3 조선(고구려, 백제, 신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중국으로 무대가 바뀌었으나 유라시아 대륙에서나 한 반도에서 정령숭배, 천문관측, 년, 월, 일 시간 개념, 주술 등 삼한이즘은 없어지지 않았다. 

* 삼성기 전(全)하(下)

《밀기(密記)》에서 말한다.「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强族)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佺戒)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時族筃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 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匘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 其途也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 지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찍이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 여기서 범은 중국인들을 가리킨다 

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 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왕(熊女君)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神戒)의 무리(神戒之盟)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

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有産)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虎)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四海)로 내쫓았다.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後有葛古桓雄樳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炩而有慈烏支桓雄神勇冠絶以銅頭 鐵額能作大霧造九冶而採圠鑄鐵作兵天下大畏之世筃爲蚩尤天王蚩尤俗言 雷雨大作山河改換之義也

뒤에 갈고(曷古) 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慈烏智) 한웅이 나셨는데, 신(神)같은 용맹이 뛰어 났으니(神勇冠絶)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철의 모습(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불렀으니 치우(蚩尤)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 염제 신농은 황제 헌원과 같이 농경 집단을 이끈 지도자이다. 후절은 치우의 중국 관경을 농토로 바꾼 역사의 시작을 말하는 것 같다. 

蚩尤天王見炎農之衰遂抱雄宜屢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及 軒侯之立也直赴0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

워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帝곡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蘇塗之立皆有戒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

蘇塗之側必立0堂使未婚子弟講習事物蓋讀書習射馳馬巤節歌樂拳搏0術釗六芸之類也

소도(蘇塗)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 

* 소도는 옛말로 솟대 즉 솟아 오른 대라는 뜻이고 하늘나라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성화의 표현이다 

時天下鼎峙0之北有大撓東有倉?西有軒轅自相以兵欲專其勝而未也初軒 轅稍後起於蚩尤每戰不利欲依大撓而未得又依倉0而不得二國皆蚩尤之徒 也大撓嘗學干支之術倉?受符宜之文嬾時諸侯罔不臣事者亦以此也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大撓)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大撓)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간지(干支)의 술(術)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符都)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 치우와 헌원을 서로 사촌 형제지간이다(전흥상 목사님 주장) 

司馬遷史記曰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天下莫能伐軒轅攝政蚩尤有兄弟 八十一人拄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丘杖刀戟太弩威振天下蚩尤古天子 之筃也

사마천의《사기》에 말하기를,「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치우 때 처음으로 그 일부가 산동 반도를 통해 한반도로 이동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전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치우를 이해하면 한웅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후대에 영향을 미친 치우의 중요한 행적은 다음과 같다.

1. 한인 시대 천산 지역의 금속문명의 도입 및 이를 중국의 농토 개척 및 도로 개척 도구로 활용

2. 치우의 중원 관경 개척 기록은 한웅 시대 1.500여 년의 대부분을 중국의 농토 개척에 치중한 것을 시사

3. 한웅은 자연신 제사를 중심으로 신정 정치를 했으나 헌원과 신농 등 농경 민족들은 인본 신을 섬길 것을 주장(황제를 하늘의 아들로 부르고 이 전통은 후대. 당나라까지 이어짐)하고 농경 치국을 하였다.

4. 중국이 황하를 중심으로 농경문화를 융성시킨 기원 전 3천년 경 이후 한웅조선과 단군조선은 쇠퇴해 가고 있었고 신정 선호 주민들은 중국의 동해안과,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피난했다

5. 이 때 단군조선으로 피난 사람들 중 진한 제사장들이 신라의 성씨들이고 이들이 치우 관련 습속과 전통을 신라로 가져 왔다.

사. 한반도로 이전된 샤먼(치우)전통

강릉은 현재 중국 탁록에 있던 치우의 묘지 이름인데 신라인들은 한반도에 강릉을 이 지명으로 만들고 치우의 전통을 계승하도록 했다.

단오

단오(端午)는 음력 5월 5일을 명절로 이르는 말이다. 1년 중 기가 가장 센 날로 치우의 생일이다. 이 날 한국 각 지방마다 단오와 관련된 전통적인 행사가 열린다. 대한민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릉 단오제가2005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무형유산인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에 선정되었다.

- 명칭

단오는 일명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 '오월절(五月節)'이라고도 한다. 특히 '술의 날','수릿날(戌衣日·水瀨日)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술의'와 '수리'는 모두 수레를 뜻하는 것으로, 한국의 옛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때 수레가 중요한 기구였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는, '수리'는 '신(神)'과 '높다(高)'는 뜻이 있어서, '높은 신(선황인 4천 왕중 치우 천황)이 오시는 날'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단오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명칭이 있다.

단양수리(아리와 비교되는 말로 아리가 하나님이면 수리는 최고의 인간 즉 치우를 의미한다) - 전라남도

- 며느리 날 - 경상북도. 며느리가 친정을 찾아 하루 종일 그네를 뛰며 놀 수 있는 날이라고 한다.

- 과부 시집가는 날 - 강릉

- 미나리 환갑날 - 경기도 동두천

- 소 군둘레 끼우는 날 - 강원도 삼척.(소를 이용한 것 기념)

- 시기 결정 경위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월과 일이 모두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가 되는 날은 생기가 넘치므로 좋은 날이라 생각하여 대개 명절로 정하고 이날을 즐겨 왔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 째를 뜻하는 글자이며, '오(午)'는 다섯을 뜻하므로 단오는 '초닷새(음력 5월 5일)'를 칭한다. 또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으로써 양기가 왕성한 날인데 일설에는 치우 천자의 탄생일이라고도 한다. 아울러 이 시기는 파종이 끝나는 때와 맞물려, 새로 지은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단오와 농사도 연관이 있다.

- 단오빔

한국에서는 설, 추석과 함께 단오에 연중 3회 신성 의상인 얇은 명주로 만든 빔을 입는데, 단오에 입는 빔을 단오빔이라 한다.

- 단오제

조선시대에는 군. 현 단위로 단오제가 행하여졌는데, 그 중 '강릉 단오제'가 가장 유명하다.

- 머리감기

삶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잘 빠지지 않고, 윤기도 난다 하여,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던 풍속이다. 아울러 창포 뿌리를 잘라내어 그것으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 단오선 선물하기

단오가 되면 곧 더위가 시작하므로, 단오날 임금이 직접 각 재상, 시종들에게 부채를 하사했던 풍속이다. 그 부채의 종류는승두선,어두선,사두선합죽선반죽선외각선내각선등이 있다.

- 천중부적

단오날에는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 치우 부적을 만들어 붙였다. 이를 '단오부', '천중부적', '치우부적'이라고 한다.

- 익모초와 쑥 뜯기

익모초와 쑥을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쓰기 위해 단오 날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속이다. 본래 익모초와 쑥은 한약방에서 많이 쓰이는 약초인데, 단오 무렵에 뜯은 익모초와 쑥이 약효가 많다는 데서 비롯된 풍속이다.

-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동아줄이나 밧줄을 큰 나뭇가지에 매고 그네를 뛰는 것이다. 단오날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운 옷을 입고 그네를 뛰었다. 외출이 어려웠던 부녀자들이 단오날 만큼은 밖에 나와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여자들이 단오날 즐겨 하였다고 한다. 그네뛰기는 남쪽보다 북쪽 지방으로 갈수록 성했다.

- 씨름

씨름은 상고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남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서, 소년이나 장정들이 넓고 평평한 백사장이나 마당에서 모여 서로 힘과 슬기를 겨루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고 허리를 굽혀서 샅바를 잡아 상대방을 먼저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먼저 땅에 쓰러지거나 손, 무릎이 땅에 닿으면 지게 된다. 상으로는 보통 황소를 주었다.

- 제호탕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마시던 약이면서도 청량음료이기도 했다. 단오부터 그 해 여름까지 내내 더위를 없애고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시원한 물에 매실과 약초를 타 먹는다.

- 수리치떡

수리취나 쑥을 짓이겨 멥쌀가루에 넣어 반죽하고, 수레바퀴 모양의 떡살로 문양을 낸 절편이다

- 앵두화채와 앵두편

앵두는 오디, 산딸기등과 함께 단오 제철 과실이다. 앵두는 피를 맑게 하고 위를 보호 하는 기능이 있고, 단오 무렵부터 더위에 시달려 떨어진 입맛을 다시 돋구는 역할을 한다.

한반도의 이러한 전통은 4.700년이나 된 것이다

아. 삼한의 영토 개념

삼한의 영토 개념은 원래 관경(觀境) 개념이었고 흔히 삼한관경(三

韓觀境)이라고 한다. 구약에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셨다는 말씀 즉 창세기 13:15-16절에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라는 말씀의 기원이 곧 이 관경 개념이다. 한웅시대를 유추해서 판단해 본다면 중국의 기록에 "치우가 중국의 관경(觀境)을 개척했다"고 했으므로 농토가 부족해지자 치우는 금속제 농기구를 만들고 황하 유역 이외의 모든 지역에 우마차 길과 농토를 만든 것 같은데 이 조차 헌원 무리가 빼앗으려 하자 주로 황하의 소유권을 두고 저 유명한 탁록의 전쟁이 벌어진 것 같다. 그래서 헌원 이후에 중국의 영토개념이 삼한의 관경 개념에서 한웅 시대 말기에 영토 개념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자. 구리민족에 대한 설명

중국인이 동이족(東夷族)에게 붙인 9가지 종족 명칭으로 중국 본토 사방의 이민족인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応)·북적(北狄) 중에서 동이(東夷)에 있는 많은 이민족 혹은 대표적인 아홉 이족(夷族)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炩)에 구이의 구체적 명칭으로 견이(?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나온다. 그런데『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국어(國語)』노어하(魯語下)의 “통도우구이백만(通道于九夷百応)”,『상서(尙書)』와『이아(爾雅)』등에 나오는 구이는 반드시 동이족의 9종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九)는 고대 중국인들이 많다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했던 용어로, 구이의 구는 실제 아홉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많다’는 의미를 갖는 형용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논어정의(論語正義)』등에는 구이의 명칭이 현토(玄?)·낙랑(樂浪)·고려(高麗)·만식(滿飾)·부유(鳧臾)·소가(素家)·동도(東屠)·왜인(倭人)·천비(天鄙)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동이와는 별도의 표현으로 이해되는 범칭(凡睨)으로서의 ‘이(夷)’를 사용한 우이(?夷)·화이(和夷)·도이(島夷)·회이(淮夷)·서이(徐夷)·주이(?夷)·개이(介夷)·거이(?夷)·기이(杞夷)·내이(萊夷)·패이(?夷)·여이(黎夷)·관이(串夷) 등의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구이는 중국 고대에 존재했던 동이 집단들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명칭으로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이의 명칭이 문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구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제로 이의 종족이 단지 아홉 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적어도 이 집단 중 대표적인 것이 아홉 개정도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체로 북 쪽, 마한 쪽 사람들이 후대에 정권을 잡고 역사 기록을 주도한데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구리, 또는 고려라는 이름이 나왔다. 구리에 대한 타골의 시를 보자 

* 타골의 시『동방의 등불』전문(全文)

<The Lamp of the East(동방의 등 불)>

「In the golden age of Asia(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s(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우리나라에는 구이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구한(九韓)’이라는 표현이 있었음이『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 있다. 즉,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의 각 층에 대응되어 신라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일본(日本)·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靺鞨)·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이 있고

후대에 기록된 우리의 역사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선비(鮮卑), 돌궐(乭闕), 예맥(巤脈), 글안(궐안闕安), 여진(麗鎭), 읍루(邑褸), 숙신(주신), 倭(왜), 말갈(물길)로 많이 쓰여져 있는데 이 말들은 풀어보면 우리 민족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구이들은 한웅 시대에 부각된 것이 아니고 삼한이 중원에서 영토 개념을 상실하고 제사 권만 유지하고 있을 때 단군 조선이 계속 점령유지하고 있던 마한, 즉북방지역에 분포했던 부족들을 주로 의미한다.

1) 선비(鮮卑)

한웅 시대에 농사를 지으러 황하로 간 이(李)씨들로 종족이름은 조선의 백성 또는 노예라는 뜻이고 나중에 황하의 토속인들과 혼혈이 되었다. 당나라의 이세민, 이조의 이성계가 모두 선비족 이씨이고 현재 중국 인구13억 중 3억 5천만 명이 이씨이고 이 이씨에서 나중에 왕건 왕씨가 나왔고 중국에 지금 1억 8천만 명이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이씨와 왕씨의 나라이고 한국은 박씨와 김씨, 이씨의 나라이다. 이씨라는 발음은 동이(東夷)의 이(夷)와 음이 같고 상형문자로써 뜻은 나무에서 나온 아들이라는 李인데 이 나무 목은 벼의 모양에서 따왔다. 왕건은 사천성 성도 출신으로 당나라 이세민의 왕손이고 그래서 이성계는 이조의 특권층의 이름을 선비라고 불렀다. 현재 남한에는 15%의 이씨가 있다.(1945년도 기준)

2) 돌궐(乭闕)

학자들은 이 돌궐은 터키라는 이름의 유래로 터키민족이 동방에 있을 때 이름이라고 한다. 터키는 돌궐(투르크)족이 중세에 북아시아에서 지금의 터키지역으로 이동하여 현지인들을 정복하여 세운 국가가 이어져 내려와서 불리는 터키공화국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위구르는 이 돌궐족이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에 남아서 활동하고 국가를 세운 집단을 말한다. 즉 같은 돌궐족이 지금의 터키지

역으로 내려가 집단을 이루고 제국을 세워 지금의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중앙아시아지역에 정착된 분파는 같은 돌궐족이다. 터키는 기워 전 3-4 세기 단군 조선이 쇠약해 졌을 때 동쪽에는 같은 조선 민족인 고구려가 있었으므로 서쪽으로 가 게르만족 대이동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름은 말 그대로 돌로 만든 궐 즉, 혼인 시대에 축성을 시작한 사람들로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을 드러내어 이름을 돌궐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3) 글안(闕安)

궐 안에 살던 사람들로 한인 시대 중 어느 시점에 실권을 장악하여 오랜 동안 안전하게 살면서 그 수를 불린 집단으로 볼 수 있다.

4) 여진(麗鎭)

고려, 또는 구리의 진(陳) 안에서 살던 사람들로 중국에 복속되지 않은 부족민들을 말한다. 여진이라는 이름은 이성계의 친구 통두란이 여진 인이며 친구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산서성 편관 지역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던 이성계의 조부 이안사와의 인연으로 이성계에게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5) 읍루(邑褸)

고을의 누각 위에 살던 사람들로 농경 문명이후 계급제도가 생기면서 상위 계급에 있었던 족속으로 판단된다.

6) 숙신(주신)

하나님이 주신이라는 뜻으로 조선이라는 이름이 이 말과 관련이 있고 제사장의 주류로 보이나 지금은 소멸되고 없다.

7) 倭(왜)

사람들이 왜소하고 여자들처럼 간사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8) 말갈(물길)

물길을 타고 왔다는 뜻이고 여기에서는 페르시아를 말하는 것 같다.(무함마드 깐수: 본명 정수일, 1980년대에 간첩혐의로 피포, 수감) 

그러나 해안을 통한 인류의 이동은 15만 년 전부터데안데르탈인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것이나 언어 폭발 이후에는 샤머니즘에 의해 더욱 빠르게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차. 한웅(샤머니즘)과 중국(번한)문명의 차이

구 분

한 웅

중국

삶의 기준

자연에서 의식주 해결. 자연에 적응

농사에서 집단 생활에서 의식주 해결

종교

자연주의 유일신

하나님->하나님

인간 유일신(타 4대강 문명도 동일

하나님->하느님

정치

제사(주술, 기도, 굿)에 치중

집단을 관리하기 위한 법과 질서 유지, 국방에 치중

전쟁

없음

빈번(농토를 뺏거나 지키기 위해)

결혼

자연 혼(일부다처, 고려 태조 왕건의 예)

일부 일처

삶의 터전 및 직업

자연적으로 의식주해결이 가능한 직업

농사 위주, 국가에서 필요한 직업

매장

산, 또는 바다 등 자연으로

평토장

문자

느낌이 같아 필요성 적음

집단정보 공유 및 집단 통제를 위한 수단

계급

제사집단과 비 제사 집단

계급이 복잡해 짐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hanwoo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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