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국학(國學) 자료

조선상고사 - 신채호

양해천 2018. 1. 2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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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사


차례

제1편 총론

제2편 <수두>시대

제3편 三朝鮮 분립시대

제4편 列國의 爭雄시대

제5편 高句麗 전성시대

제6편 고구려의 衰微와 北扶餘의 멸망

제7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8편 남방 여러 나라의 對 고구려 攻守同盟

제9편 삼국 혈전의 시작

제10편 고구려와 隨의 전쟁

제11편 고구려와 唐의 전쟁

제12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 1편 총론

제1장 역사의 定義와 조선사의 범위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

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英)ㆍ로(露 : 러시아)ㆍ법

(法 : 프랑스)ㆍ미(美) 등을 비아라고 하지마는 영ㆍ로ㆍ법ㆍ미 등은 저마다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

라 하며, 무산(無産)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

마다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의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비아 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

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개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첫재, 상속성(相續性)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끊어지지 아니함이요, 둘째, 보편성이니, 강간에 있어서 영

햐의 파급이다.

그러므로 인류 아닌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거나 혹은

전연 없어서 상속적ㆍ보편적이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造作)은 인류에게만 주어졌다. 사회를 떠나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범위가 너무도 약소하여 역시 상속적ㆍ보편적이 못 되므

로 인류에게 있어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되는데, 한 사건으로 두 가지 속성-상속ㆍ보편의 강약을 보

아 역사의 재료가 될 만한 분량의 크고 작음을 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석문(金錫文)은 300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앞장서 주장한 조선의 학자이지마는 이를 후루노의

지원설과 똑같은 역사적 가치를 쳐주지 못하는 것은, 저편은 그 학설로 인하여 유럽 각국의 탐험열이 크게 왕

성해진다,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마는 이편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여

립은 400년 전에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마는 그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작

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여립의 설에 영향을 입은 검계(鈐鍥)나 양

반살육계(兩班殺戮鍥 : 다 무력 폭동 단체) 등의 번갯불이 한 번 번쩍하는 것 같은 행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루소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는 비길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이를 없애어 비아에 공헌하

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자취만 끼친다. 이는 고금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라, 승리

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가 다 같이 지니고 있는 성질인데 번번이 예기와 어긋나서 승

리자가 안 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기는

것이지마는,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있다. 말하자면 조선민족 즉, 아가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이며 지나족(支那族)등 비아가 있었을 것이니, 이는 선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ㆍ지나족 등 비아의 상대자가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를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

(五軍 : 전ㆍ후ㆍ좌ㆍ우ㆍ중의 다섯 군단)을 둔다 하는 등 아의 작용이 생기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인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인 것을 유지하되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패망의 구렁에 빠진다. 유태의 종교나 돌궐(突厥 : 몽골 중앙 아시아에 있던 유목민족)

의 무력으로도 침륜(沈淪)의 화를 면치 못한 것은 후자(後者)가 부족한 까닭이며, 남미의 공화(共和)와 애급(埃及

: 이집트) 말세의 학문의 융흥(隆興)으로도 쇠퇴의 환(患)을 구해내지 못한 것은 전자(前者)가 부족한 까닭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려 함에 있어 조선민족을 아(우리)의 단위로 잡아,

(가) 우리의 생장 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첫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1) 최초 문명의 기원은 어디서 되었는가.

2) 역대 강역의 신축(伸縮)은 어떠하였던가,

3)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왔는가,

4)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때에 가장 쇠퇴하였는가,

5) 여진(女眞)ㆍ선비(鮮卑)ㆍ몽고(蒙古)ㆍ흉노(匈奴) 등이 본래 우리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고 분리된 뒤

에 영향이 어떠하였는가,

6) 우리의 현재의 지위와 부흥 문제의 성부(成否)가 어떠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며,

(나) 우리의 상대자인 주위 각 민족과의 관계를 서술의 둘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1) 우리에게서 분리된 흉노ㆍ선비ㆍ몽고와, 우리 문화에서 자라온 일본이 우리의 큰 적이 되어 있는 사실과,

2)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는 직접으로, 우리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

족의 활기가 여위어 국토의 범위가 줄어졌는가,

3)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잘 씹고 소화하여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여 위의 (가)ㆍ

(나) 두 가지로 본사(本史)의 기초로 삼고,

(다) 말과 글 등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연장의 날카롭고 둔함은 어떠하고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없는 폐물이 되었지마는 고대에는 확실히 한 민족의 흥망 성쇠의 관건

이었는데, 우리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마) 학술ㆍ기예 등 우리의 천재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바) 의ㆍ식ㆍ주의 형편과 농ㆍ상ㆍ공의 발달과 땅의 분배와 화폐의 제도와 그 밖의 경제조직 등이 어떠하였

으며,

(사) 인민의 이동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많아지고 줄어듦이 어떻게 되었으며,

(아) 정치제도의 변천이며,

(자) 북벌(北伐) 진취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나아가고 물러선 것이며,

(차) 귀하고 천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각 계급의 압제와 서로 대항한 사실과 그 성해지고 쇠해진 대세며,

(카) 지방자치제가 태곳적부터 발생하였는데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사라진 원인과 결과며,

(타) 외세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손실과 그 반면에 끼친 다소의 이익과,

(파) 흉노ㆍ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의문이며,

(하) 옛날부터 문화상의 창작이 적지 아니하나, 매양 고립적ㆍ단편적이 되고 연계적ㆍ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

이한 원인 등을 힘써 참고하면서 논술하여 위의 (다)ㆍ(라) 이하 여러 문제로 본사(本史)의 요목(要目)을 삼아

서, 일반 역사를 읽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면목의 만의 하나라도 알게 하려고 한다.

제 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舊史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슨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딱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

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의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고 혹은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상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

을 그리자면 모습이 괴걸(魁傑)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姜邯贊)을 그리자면 몸집이 왜루(矮陋)한 강

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것과 저것을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 그리면 화가

의 본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의 면목도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사실 그대로 영국사(英國史)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고 노국사(露國史)를 지으면 노국사가 되며, 조선

사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동국(東國 : 우리나라)

의 고사(古史)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계속과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 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ㆍ곳〔地〕ㆍ사람

〔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

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사람됨은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성과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등 여섯 부(部)의 사

람〔人〕으로써뿐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곳〔地〕과 고구려ㆍ백제와 한 시대인 때〔時〕로써 신라가 된 것이

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인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인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六部) 사람들의 질직(質直)과 계림(鷄林 : 慶州)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당시의 신라와 똑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

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

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 : 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

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 : 만주 遼東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 혹은 안주(安州)에 갖다놓으며, 아사산(阿斯山 : 단군이 國都를 옮긴 곳)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땅의 빙거(憑據)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

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劃定)하려 하며(我邦疆域考), 무극(無極) 일연(一然) 등 불자(佛子)가 지은 역사책(三國遺事)

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ㆍ인명이 가득하며,

김부식 등 유가(儒家)가 적은 문자(三國史記)에는 공자ㆍ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 무사의 입에서 경전(經典)

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三國史 : 중국 역사책의 하나) 열전에 있는 여려 백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祥)ㆍ남석행(南石行) 등 네 대성(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

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만 세세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원효(元曉)ㆍ의상(義湘) 등 여러 철인

들의 불학(佛學)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 태조(王太祖)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이

통일 이후에 그가 올렸다는 간불소(諫佛疎)만 적혀 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때〔時〕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

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여 신랑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 : 왕족)이라 하며

(三國遺事), 고구려의 추모왕을 고신씨(高辛氏 : 五帝의 한 사람)의 후손이라 하며(三國史記), 게다가 조선 전 민족

을 중국 진(秦)ㆍ한(漢)의 유민이라(東國通鑑ㆍ三國史記 등), 혹은 한인(韓人) 이동으로 온 것이라(東史綱目)고 하기

까지하였다. 이조 태종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런 맹목파들이 급선봉이 되어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

(書雲觀 : 觀象臺)의 책들을 공자의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이두형(李斗馨 : 조선 정조때 사람?)이 말하기를, “근일의 어느 행장(行狀)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든지, 그 주인공

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端嚴)하고 덕성은 충후(忠厚)하며, 학문은 정주(程朱 : 중국의 程子와 朱子 또 그들의 性理

學)를 조종으로 삼고 문장은 한유(韓柳 : 중국의 문장가 韓愈와 柳宗元)를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千篇一律)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 전기(傳記)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지마는,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春秋)의 부월(斧鉞) 아래에서 자라난 후

세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에 스스로 만족한 이조

당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上古地理)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

(東北國 : 渤海)이나, 고려나 이조 ――――――5천년 이래의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땅이 늘

고 줄어듬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이 갈린 금을 도무지 찾

을 수가 없다.

크롬웰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그 왼쪽 눈 위의 혹을 배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고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

었다. 조서사를 지은 기왕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

나 그네들의 쓴안경이 너무 볼록하므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

디서 수없는 정말 혹을 가져다가 붙여놓았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

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

겠는가? 사금(沙金)을 아는 사람이 모래 한 말(一斗)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

하기도 하나니,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운지라,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

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金石學)ㆍ고전학(古錢學)ㆍ지리

학ㆍ미술학ㆍ계보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급

한 대로 있는 사책(史冊)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급무인가 한다.

제 3장 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略評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 : 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

(應製詩 : 임금의 명예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서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蘇塗]’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首座)

인 벼슬 이름 ‘신치[臣智]’이니 (蘇塗와 臣智의 자세한 것은 思想史에 보임), 역대의 ‘신치’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

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번역하여 왕

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誌秘詞) 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 기록이 사실보다 잠언(箴言)이 많아서 옛날 사람이 왕왕 예언의 유로 보았었으나, 이조 태종(太宗)이 유학

을 중심으로 하고, 그 밖의 것은 일체 배척하여 이단시하는 글들을 모두 태워버릴 때 신지도 함께 액운을 면

치 못하여 겨우 고려사(高麗史) 김위제전에,

‘칭추(秤錘), 극기(極器), 칭간(秤幹), 부소(扶), 양추(樑錘)와 같은 모양의 것이 오덕(五德)의 땅이요 백아강(白牙岡)을

극기(極器)로 삼으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地德)을 힘입어서 신(神)을 두호할 것이며 수미

(首尾)를 정(精)하게 하고 평위(平位)를 고르게 하면 나라가 흥(興)하고 대평(大平)을 보전하리라. 만약 삼유(三諭)의

땅을 폐하면 왕업이 쇠경(衰傾)하리라.’

의 열 귀절만이 전하여왔다. 만일 그 전부가 남아 있다면 우리의 고사(故事)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을 주랴.

북부여(北扶餘)는 왕검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보장(寶藏)을 지켜서 태평하고 부유함을 자랑하였으니(晉書 夫餘傳

: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被破. 나라가 성하고, 부유하니, 스스로 선대부터 내려오니, 아직까지 이르러 깨뜨리지 못하였다.)

볼 만한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募容廆)의 난(서기 285년의 침범)에 그 나라 이름과 함께 다 없어지고 고구려에는 동

명성제(東明聖帝)와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에 사관(史官)이 조선 상고(上古)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상 사실을 기

재하여 유기(留記)라 이름한 것이 100권이었는데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의 난(244년에 고구려에 침입, 서울

丸都城을 함락)에 다 빼앗겼다. 단군 왕검의 이름과 삼한(三韓 : 馬韓ㆍ辰韓ㆍ弁韓)ㆍ부영의 약사(略史)가 위서(魏書 :

魏의 역사)에 다 실려 있음은 위나라 사람이 유기(留記)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뒤 백제 중엽에 고흥박사(古興博

士)가 신집(新集)을 짓고 신라는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전성 시대에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고사(故事)를 갖추어놓

았으나 오늘에 그 한 구절 한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이는 천하 만국에 없는 일이다. 역사의 영혼이

있다 하면 처참한 눈물을 뿌릴 것이다.

이상 말한 바는 다 일종의 정치사이거나와, 고구려ㆍ백제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무를 그만두고 문을 닦아서

상당한 사서(史書)가 간간 나왔으니, 무명씨(無名氏)의 선사(仙史)는 종교사로 볼 것이요, 위홍(魏弘)의 향가집(鄕

歌集)은 문학사로 볼 것이요,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과 화랑세기(花郞世記)는 학술사로 볼 것이니, 역사

학이 얼마만큼 진보했다 할 것이나, 이것들도 모두 글자없는 비석이 되어 버렸다.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

식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인데 그 전하

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 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 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徒)가 한 파가

되었다.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

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ㆍ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塵土)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草芥) 속에 던지고 이두문(吏讀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서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

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取捨)에 흘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홀필렬(忽必烈 : 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

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名詞)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

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獨立自存)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

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

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高宗) 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깎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禮幣)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

하게 사책(史冊)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權近)ㆍ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

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

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前代 : 고려)의 실록은 민

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奎章閣) 안에 비장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

가,

1) 자기네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2) 지나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成祖)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고,

3)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張寧)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의 그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조선 문헌의 정리를 자임(自任)하여 불경을 간

행하고 유학을장려하는 외에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과 조선 풍토사

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동국병감은 文宗때, 여지승람은 成宗때 편찬), 그 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으나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 것이다.

선조(宣祖)ㆍ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ㆍ문학의 큰 인물이 배출되고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許

穆)의 단군ㆍ신라 등 각 세기(世記)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나 왕왕 독특한 견해가 있으며, 유형원(柳馨遠)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 저서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이 또한 사학계의 보탬이 적지

않았으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십 줄에 지나지 않는 간단한 논문이지마는 일반 사

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서 그 뒤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疆域考)며, 한진서(韓鎭書)의 지리(地理)며, 안정복의 동

사강목(東史綱目)에 실린 강역론(疆域論)이며, 그 밖의 조선 역사 지리를 설(說)하는 사람은 모두 한 선생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이 범엽(范曄 : 後漢

書의 저자)이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천 년 동안의 지리를

단정하여, ‘동국(東國)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三韓)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하였다.’라는 결론을

내렸음은 너무도 맹목적이요, 무단적(武斷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생이 삼신(三神)ㆍ삼경(三京)ㆍ삼한(三韓)ㆍ삼조선(三朝鮮)의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發朝鮮)ㆍ발숙신(發

肅愼)ㆍ부여조선(夫餘朝鮮)ㆍ예맥조선(濊貊朝鮮)ㆍ진국(辰國)ㆍ진번조선(眞番朝鮮)ㆍ진한(辰韓)ㆍ마립간(麻立干)ㆍ마

한(馬韓)ㆍ모한(慕韓)등이 동음이역(同音異譯)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것이다. 그러나 동이열

전에 보인 삼한으 위치는 선생이 비로소 간단 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의 기록만 있고 역사의 연

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사학의 실마리를 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5백 년 이래 유일한 빈한한 선비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

국사기 같은 것도 그 늘그막에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한 동사강

목에 궁예(弓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웃음거리를 남겼으며, 지나의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

략(魏略)이나 남제서(南齊書)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公丘 : 孔子)의 춘추(春秋)며, 주희(朱憙 : 朱子)의 강목(綱目)의 웅덩이에 빠져 기자본기(箕子本紀) 아래 단군

과 부여를 덧붙이로 하였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僭主 : 스스로 왕이라 참칭하는 군주)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하기로는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지(地志)의 잘못의 교정과 사실의 모순의 변

증(辨證)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 3백 년 동안 문

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

고 이종휘(李鍾徽)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학가의

노예 사상을 갈파하였는데, 특별한 발명과 채집(採集)은 없다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남을 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ㆍ일본 등의 서적 가운데 보이는 우리 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히 방대한 저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에서 빠진 부여ㆍ발해ㆍ가락(駕洛)ㆍ숙신(肅

愼) 등도 모두 한 편의 세기(世紀)를 구성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없는 저근(姐瑾)ㆍ사법명(沙法名)ㆍ혜자

(慧慈)ㆍ왕인(王仁) 등도 각각 몇 줄씩의 전기(傳記)가 있고 궁중어(宮中語)ㆍ문자ㆍ풍속ㆍ등의 부문이 있다. 게

다가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서 뒷사람들의 고증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

학에 두뇌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1) 너무 글자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夫婁)와 하우(夏禹)

의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사자(蒼水使者)와 2천 년 동안 흉노와 연(燕)과 삼

조선(三朝鮮)이 혹은 화의하고 혹은 싸운 전후 큰 일들을 다 빠뜨렸고,

2) 유교의 위력에 눌려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갈래임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성명을 빠뜨렸고,

3) 서적의 선택이 정확하지 못하였으니,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의하면, “우(禹) 임금이 백익(伯益)을

죽이고,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본(眞本)이요, 현존

한 죽서기년은 가짜인데, 이제 그 가짜를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武陵書)는 당나라

사람의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하여 인용하였고, 이 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인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

나를 속이고 모욕한 것을 많이 그대로 수입하였으니, 이것이 그 책의 결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조(正宗朝) 한때의 기록을 엮은 수서(修書)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官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재(朝野僉載) 등 몇

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

개 열에 일고여덟이 사색(四色)의 당쟁사(黨爭史)임은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니 아, 이조 이래 수백 년 동안의 조

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대개가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것은 몇이 못 됨이 첫째 유감이

요,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서가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 : 시작과 끝)를 삼았음이 유감이요, 공구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중국을 숭앙하고,

이민족을 배척하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李修山 일파를 제하고) 자기 나

라의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넷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래 편안했던 이조 일대는 제하고)과 자연의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라고 인위(人爲)의 장애를 이룬 것을 들건대,

1) 신지(神誌) 이래의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이전에는 동국통감, 고

려사 등 몇몇 관에서 간행한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수광(李脺光)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당대 왕조의 잘잘못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다른 나라에도 간혹 있거니와, 지나

간 고대의 역사마저 사사로이 짓거나 읽는 것을 금함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별

로 없었고,

2) 송도(松都 - 고려 태조 왕건의 수도 송악)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의 기와가 남아 있는

가? 한 개의 주초가 남아 있는가? 막막히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닌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

조의 아버지 뻘로 멀지 않은 고려조의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情)이 없는

빈터만 남았는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

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 것이다. 신라가 일어나매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고,

고려가 되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대신하매 고려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顯宗)이,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 : 기록을 맡은 관리)은 그 문답한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

다.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 남짓이 하고 이만합니다.’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하고 꾸짖었다.

숙종(肅宗)이 박태보(朴太輔)를 친히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刑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한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지마는, 반면에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기구가 부족함이요,

4) 회제(晦齊 : 李彦迪)나 퇴계(退溪 : 李滉)더러 원효나 의상의 학술사상(學術史上)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의 대

답을 못 할 것이요,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 : 솟대)나 내을(柰乙 : 박혁거세의 탄생지)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 시대의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의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ㆍ거처(居處)ㆍ신앙ㆍ교육 등 일반 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몹시 변하여 오늘의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 러시아 사람됨가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

니, 이는 역사 사상의 연락이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인상 몇 가지

원인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학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동안 사색(四色)의 당파 싸움이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마는, 당론이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사로운 기술이 성행하고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

라서 조정의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작의 금기자 깨뜨려져서 마침내 한백

겸ㆍ안정복ㆍ이종휘ㆍ한치윤 등 사학계의 몇몇 인물이 배출되었음도 그 결과이다.

혹 어떤 이는, “사색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의

난관이 된다.”고 하지마는, 그들의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이라,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 임금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것이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인 윤백호(尹白湖 : 尹鐫)를 걸물(傑物)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ㆍ화담(花潭 : 徐敬德)ㆍ퇴계ㆍ율곡(栗谷 : 李珥) 등의 학술상 공헌의 많고 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자학

의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戱談)이 될 뿐이요, 노론(老論)ㆍ소론(小論)ㆍ남인(南人)ㆍ북인(北人)의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며, 이조의 충성된 종 되고 못 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

요, 개인의 사사로운 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모함하여 죽인 허

다한 사건들은 그 반면에 있어서 당시 사회 알력의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조의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

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

든가, 민족의 성쇠라든가 하는 큰 문제에 주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것을 구하여 조선 사학계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 중의 급무라 생각한다.

제 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 : 한일합방)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支那式)의 연의(連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의 독단(獨斷)임과 행동의 대담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

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나아간 것이 촌보(寸步)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

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 일찍이 사곽잡록(四郭雜錄 : 저자 미상)을 보다가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嶺)

아래에 고구려 옛 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申砬聞先春嶺下有高句麗舊碑),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

본(拓本)을 떠왔는데(潛遺人 渡豆滿江 模本而來), 알아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所可辨識者 不過三

百餘字). 그 글에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요(其曰皇帝 高句麗自王稱也), 그 상가(相加)

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其曰相加 高句麗大臣之稱也).’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

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千古) 고사(故事)의 이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비석쪽이 이것 하나뿐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몹시 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

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서 있는 윤관(尹瓘, 혹은 蓋蘇文)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

(奉天省城)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였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

: 夫餘의 왕)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아노라는 이야기며, 발해의 옛 서울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鏡泊

湖 : 古史에는 忽汗海)의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1만 길 비폭(飛瀑)을 구경하였다고 하

는 말이며, 해룡현(海龍縣)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

왕(文武大王 : 신라)의 유묘(遺廟)를 예배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

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城)을 얼씬 보았음이 나

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

그린 금척(金尺)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 파는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

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하였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하였을 뿐이었다(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 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게 광개토왕릉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

(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하는 꿈 같

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

(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ㆍ예술ㆍ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

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하는 단안

을 내렸다.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 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것이 많았고, 한성

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

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

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고 했으나, 삼국사

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

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

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므로 이인(夷人 :오랑캐)이 그들을 화

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

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ㆍ신당서(新唐書) 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皀衣先人 또는

帛衣先人)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 : 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掾那皂衣)라 하

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翳屬先人)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또는 선인(仙人)은 다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皀衣)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

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

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 명사(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ㆍ신당서ㆍ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

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요, ②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

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

穡)의 정관음(貞觀吟 : 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 “어찌 현화(玄花 : 눈)가 백우(白羽 : 화살)에 떨어질 줄 알았

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

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

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에 뺀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사람 진정(陳霆)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 의거하건대,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

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

史)나 요사(遼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

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

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

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貞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

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 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목(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게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가 정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ㆍ소공(昭公) 등이 살해당하

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

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 : 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隋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

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

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 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

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

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 : 이맥의 저서)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 진정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

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 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 : 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항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

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 3년(서기 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와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라는 것이다. 이 수십자를 얻기

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

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승군(僧軍)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로우며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

써서 탐색하느냐 할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전하는 것을 바로잡아

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끼쳐주는 것이니, 승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

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

심과 강감찬의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主力)이 다 무엇이었던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영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

이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高

宗)과 그 신하가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前提)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이던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마인지를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

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시킬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3)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에 대하여 - 우리 나라는 고대 후에니키 인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

을 만든 것처럼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의 음을 딴 것도 있고 혹은 그 뜻

을 딴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으로는, ‘소지(疎智), 일명 비처(毘處)’라 함은 빛의 뜻이 소

지가 된 것이고 음이 비처로 된 것이요, ‘소나(素那), 일명 금천(金川)’이라 함은 뜻이 금천, 음이 소나로 된 것

이요, ‘거칠부(居漆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 뜻이 황종으로 된 것이요, ‘개소문

(蓋蘇文), 일명 개금(蓋今)’은 ‘신’의 음이 소문, 뜻이 금으로 된 것이요,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苔宗)’은 ‘잇

위’의 음이 이사부, 뜻이 태종(訓蒙字會에 苔를 ‘잇’으로 읽음)으로 된 것이다.

지명(地名)으로는 ‘밀성(密城), 추화(推火)라고도 함’은 ‘밀무’의 음이 밀성, 뜻이 추화로 된 것이요, ‘웅산(熊山)

공목달(功木達)이라고도 함’은 ‘곰대’의 뜻이 웅산, 음이 공목달로 된 것이요, ‘계립령(鷄立嶺), 일명 마목령(麻木

嶺)’이라 함은 ‘저름(겨릅)’의 음이 계립, 뜻이 마목으로 된 것이요, ‘모성(母城), 막성(莫城)이라고도 함’은 ‘어미’

의 뜻이 모, 음이 막으로 된 것이요, ‘흑양(黑壤), 금물노(今勿奴)라고도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이 흑, 음

이 금물로 된 것이요, 양과 노는 다 ‘라’의 음을 취한 것이다.

관명(官名)으로는 ‘각간(角干)을 혹은 발한(發翰)이라 함’은 ‘불’의 뜻이 각, 음이 발로 된 것이고, 간(干)과 한

(翰)은 다 ‘한’의 음을 취한 것이나, 불한은 군왕(郡王)을 일컬음이요, ‘누살(耨薩)을 혹 도사(道使)라 함’은 ‘라’의

뜻이 도, 음이 누로 된 것이고, ‘살’의 뜻이 사, 음이 살로 된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음이요,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三神)에서 근원한 것인데, 뜻으로는 천일(天一)ㆍ지일(地一)ㆍ태일(太一)이 되고, 음으로는

마한ㆍ변한ㆍ진한으로 된 것이요, ‘도가’, ‘개가’, ‘크가’, ‘소가’, ‘말가’는 다섯 대신의 칭호인데, ‘도ㆍ개ㆍ크ㆍ

소ㆍ말’ 등은 뜻으로, ‘가’는 음으로 저가(猪加)ㆍ구가(狗加)ㆍ대가(大加)ㆍ우가(牛加)ㆍ마가(馬加)로 된 것이다.

이같이 자질구레한 고종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는가? 이것은 자질구레한 듯하나 지지(地誌)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 사료의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募漱)와 유화왕후(柳花王后)가 만난 압록강이 어디인가?

지금의 압록강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합이빈(哈爾濱)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지 못하였더니, 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에 지금의 압록강을

아리수(阿利水)라 하였음을 보고 압록의 이름이 아리(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

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인즉, 혼동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하는 가설을 얻었

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 고이(考異)에, ‘삼국유사의 ’요하(遼河) 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

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마한전(馬韓傳)에 ‘비리(卑離)’를 건륭제(乾隆帝)의 삼한정류(三韓訂謬)에는 만주의 패륵(貝勒 : 패리)과 같은 관명

(官名)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삼한의 비리는 삼국지리지(三國地理志) 백제의 부리(夫里)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의 취음(取音)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벽비리

(壁卑離)는 백제의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

(毛良夫里)요, 감해비리(鑑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록 이 음과 저 뜻이 이역(異譯)이 있기는 하나 그 대

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지나 산서성(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에

비이(卑耳)의 계(谿)를 두었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의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의 ‘울’이 곧 산해관(山海關)

서쪽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이 역사상의 큰 일이 아니지마는 도리어 역사상

의 큰 일을 발견하는 연장이라 하겠다.

만일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訓蒙字會), 처용가(處容歌),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옛 말을 연구

하고, 삼국유사에 씌어 있는 향가에서 이두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뒤로 부터는 한 권의 책을 얻기가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얻어볼 수 없었다.

4) 위서(僞書)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 우리 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같은)

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

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

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ㆍ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

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

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그렇지마는 그 가짜에 구별이 있다. 하나는 가짜 중의 가짜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진본이 없어

지고 위작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이 늘 고기(古記)의, ‘단군은 요 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섰다(檀君 興堯竝立於戊辰).’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의 연대

에 비교코자 하며 요 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續綱目 : 金仁山 저술)에 고준(考準)한다. 그러나 주소(周召

: 厲王代의 周公과 召公)의 공화(共和 : 厲王이 달아나고 주공과 소공이 의논하여 정치를 행한 14년) 이전의 연대는 지

나 역사가의 대조(大祖)라 할 만한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의 사기(史記) 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늘 하

물며 그보다도 더 요원한 요 임금의 연대라.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가짜 죽서기년에 의거하여 적은 연대이

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함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에, '구려 한맥(句麗駻貊)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지나의 주무

왕(周武王)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안국(安國)이 지금의 황제

의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安國爲今皇帝傳士蚤卒).”고 하였으니, ‘지금의 황제’는 무제(武帝)이다. 무

제를 ‘지금의 황제’라 한 것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고, 안국

을 ‘일찍 죽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이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안국은 사마천

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 시대에 창

설한 금성군(金城郡)이란 이름이 있으니, 공안국이 그가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

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이 위서(僞書)임이 또한 분명하고 거기 기록된 구려ㆍ한맥 등도

자연 명백해질 것이다.

다음은 진짜 주의 가까인데,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① 하나는 보넛의 위증(僞證)이니, 초학집(初學集), 유학집(儒學集) 등은 전겸익(錢謙益)이 저술한 실제로 있는

것이지마는, 그 글 가운데 씌어 있는 우리 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요, 실제로 없는 것이 많으

니, 이런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이 있거니와, 만

일 우리 역사의 반박할 재료가 없어지고 저네의 거짓 기록만 유전(流轉)된 것이 있으면 다만 가설의 부인만으

로는 안 될 것이니 어찌하면 옳을까?

옛날에 장유(張維)가 사기(史記)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武王封箕子干朝鮮).”고 한 것을 변정

(辯正)하는데, 첫째로 상서(尙書)에,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我罔爲臣僕).”고 한 말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무왕의 봉작(封爵)에, “기자가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箕子

避地干朝鮮).”고 한 것을 들어 반고(班固)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

기에 기록된 기자의 봉작설을 빼버리고 봉작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 침입 이전)에 우리 나라 형세가 강성하여 지나에 대하여 전쟁으로 맞설 때에도 저에

게 보낸 국서에 우리르 낮추어 한 말이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來朝

: 조공왔다)라고 썼음은 지나인의 병적인 자존성에 의한 것이니, 이는 근세 청조(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

영(英)ㆍ로(露) 등 여러 나라가 와서 통상한 사실을 죄다 “모국이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某國稱臣奉貢).”

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니, 그네의 기록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지나인이 만든 열조시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 시화(詩話)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

가 게재할 때에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수 있으니, 우리의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

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위력이 우리 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의 악부(樂府)ㆍ사책(史冊)을 가져다가 황

도(皇道)ㆍ제경(帝京)ㆍ해동천자(海東天子) 등의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ㆍ고려사 등도 지나와 관계된 문제는 실제의 기록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은 사증(事

證)이다.

연전에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歷史輯略)과 장지연(張志淵)의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 일본의 신공여주(神

功女主) 18년에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설치하였다는 것을 모두 일본

서기(日本書紀)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奈解王) 4년(서기 199)이요,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 터인데, 이제 내해왕이 아리나례(阿利那禮 : 압록강)을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함이 무슨 말이며, 수

인주는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의 일본의 임금이니, 백제의 봉직(縫織)도 수입이 안 된 때인데, 수인주 2년에 임

나국(任那國) 사람에게 붉은 비단[赤絹] 2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쩐 말인가? 이 두 가지의 의문에 답하기 전에

그 두 사건의 기사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증(理證)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僞證)을 인(人)으로

사(事)로 또 이(理)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임을 알 것이다.

② 후세 사람의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이 문구를 보태어 위증한 것이다.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안서고(顔師古) 등으로 하여금 곡필(曲

筆)을 잡아 고치고 보태고 바꾸고 억지의 주를 달아서, 사군(四郡 : 樂浪ㆍ臨屯ㆍ眞番ㆍ玄免)의 연혁이 가짜가 진짜

가 되고, 역대 두 나라의 국서가 더욱 본래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 2장 지리연

혁(地理沿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가짜 가운데 진짜니, 마치 관자(管子) 같은 것은 관중(管仲)의 저작이

아니고 지나 육국(六國) 시대의 저작인 위서(僞書)이나 조선과 제(齊)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 위

서로서도 진서(眞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5) 만(滿)ㆍ몽(蒙)ㆍ토(土) 여러 종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다. 김부식은 김춘추(金春秋)ㆍ최치원(崔致遠) 이래

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에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氏 : 고대 중국 5

제의 한 사람)의 후예다, 김수로(金首露)는 금천씨(金天氏 : 黃帝의 아들 少昊)의 후예다, 진한(辰韓)은 중국 진인(秦

人)이 동래(東來)한 것이다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는 지나족을 동종(同

宗)으로 보아,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가 없었으므로, 우

리 부여의 족계(族系)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캄캄한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姓)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 있

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

(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鞮)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

(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

다. 인축(人畜)ㆍ회계(會計)하는 곳을 담림(儋林) 혹은 대림(蹛林)이라 함이 ‘살임’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

고, 휴도(休屠)는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大休屠)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

처에 또 소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틀림이 없었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한방 안의 형제였다는 의안(疑案)을 가져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

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지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요(遼)ㆍ금(金)ㆍ원(元) 세 역사의 국어해(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하여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加)’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말 김가 이가 하는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석하여 가(家)의 잘못이라 하였으며, 금사(金史)ㆍ발극렬(勃極烈)을 음

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래[弗矩內]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淸朝)의 패륵(貝勒 : 패리)의 동류라 한 것

등의 잘못이 없지 아니하나, 주몽(朱蒙)이 만주어(滿洲語) ‘주림물’ 곧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 하고, 옥저(沃沮)

가 만주어의 ‘와지’ 곧 삼림의 뜻이라 하고, 삼한의 벼슬 이름의 끝자 지(支)가 곧 몽고어 마관(馬官)을 ‘말치’,

양관(羊官)을 ‘활치’라 한 '치‘의 유라 하고, 삼한의 한(韓)은 가한(可汗)의 한(汗)과 같이 왕을 일컬음이고 국호

가 아니라고 한 것 등 많은 상고할 거리를 얻었다. 또 그 뒤에 동몽고(童蒙古)의 중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ㆍ

서ㆍ남ㆍ북을 물으니 연나ㆍ준나ㆍ우진나ㆍ회차라고 하여, 고려사의, “동부를 순나라하고(東部曰順那), 서부를

연나라 하고(西部曰涓那), 남부를 관나라 하고(南部曰灌那), 북부를 절나라 하고(北部曰絶那)”고 한 것과 같음을

알았다. 또 그 뒤 일본인 조거용장(鳥居龍藏)이 조사 발표한 조선ㆍ만주ㆍ몽고ㆍ토이기 네 종족의 현행하는 말

로 같은 것이 수십 종(이에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貴子를 ‘아기’라, 乾醬을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 뿐임)이 있음을

보고, 첫째 조ㆍ만ㆍ몽ㆍ토 네 가지 말은 같은 어계(語系)라는 억단(臆斷)을 내렸고, 지나 24사(史)의 선비ㆍ흉

노ㆍ몽고 등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서로써 흉노의 유종(遺種)이

토이기(土耳其 : 터키)ㆍ흉아리(匈牙利 : 헝가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考閱)하여, 조선ㆍ만주ㆍ몽고ㆍ토이기

네 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의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 뿐 아니라 만주어ㆍ몽고어 등도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ㆍ벼슬 이름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移住)하고 교통한 자취며, 싸우고 빼앗은 자리며, 풍속의

같고 다른 차이며, 문야(文野 : 문명과 야만)의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잘못

된 문헌의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재료의 수집과 그 선택 등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경력을 말한 것이다. 조선ㆍ지

나ㆍ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으나, 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

서는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外府)의 곳집이 되고 또 서적의 구독과 각종 사료의 수집이 우리같이 표랑생활 중

에 있는 한사(寒士)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요,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

나, 지금가지 동양학(東洋學)에 위걸(偉傑)이 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자가

백조고길(白鳥庫吉)이라 하지마는, 그가 저술한 신라사(新羅史)를 보면, 배열ㆍ정리의 새로운 형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2줄 생략) 좁은 천성(天性)이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하여 공평을 결

함으로 인한 것인가? 조선 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開端)하기를 바라리요마는, 조선

의 보장(寶藏)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암매(暗昧) 중에 썩임을 개탄하고 아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제 5장 역사의 개조에 대한 愚見

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없어진 것을 채우고 빠진 것을 기우며, 거짓을 제거하고 헐뜯은 것을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새로운 체제의 역사를 지었다는 한두 가지 새 저서가 없지 아니하나, 그것은 다만 신라사ㆍ고려

사 하던 왕조 독립의 식을 고쳐 상세(上世)ㆍ중서(中世)ㆍ근세(近世)라 하였고, 권1, 권2라 하던 통감(通鑑)ㆍ분

편(分編)의 이름을 고쳐 제1편, 제2편이라 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ㆍ이단(異端)이라 하던 것을 예

술이라 학술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요, 근왕(勤王)이라 한외(捍外 : 외적을 막음)라 하던 것을

애국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新舊)의 명사(名詞)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 장책(韓裝冊)

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우리 역사의 개조 방법의 대강을 말하자면,

1) 그 계통을 찾을 것이다. 구사(舊史)에는 갑(甲) 대왕이 을(乙) 대왕의 아버지요 정(丁) 대왕이 병(丙) 대왕의

아우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

에서 거인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이 솟아 오른 듯하여, 한 편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다. 역사

는 인과의 관계를 밝히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의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하여 무엇하랴. 그것

은 지은 사람의 부주의에 의한 것이요, 본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

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이 진흥대왕(眞興大王)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때까지 전성하여, 사다함(斯多含)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의 대성(大聖)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 밖에 현상(賢相)ㆍ양장(良將)ㆍ충신ㆍ용사가 모두 이 가운데

서 났다(삼국사기에 인용한 金大問의 설)고 하였으나, 그 동안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고 성식(聲息)이 아주 끊어

져서, 국선 이전에 국선의 개조(開祖)도 볼 수 없고, 국선 이후 국선의 후계자도 볼 수 없이 갑자기 왔다가 갑

자기 갔으니, 이것이 어찌 신라의 신괴록이 아니랴? 고기(古記)에서 왕검이 국선의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

에서 조의(皀衣) 선인(先人) 등을 알 것이며, 국선의 하나됨을 찾으매, 이에 국선의 내려온 근원을 알 것이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선랑(仙郞)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爭論)과 예종(睿宗)이, “사선(四仙)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하고, 의종(毅宗)이, “국선의 복로(伏路)를 다시 열라.”고 한 조서를 보매,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이 있었음을 볼지니 이것을 계통을 찾는 방법의 한 예로 든다.

2) 그 회통(會通)을 구할 것이다. 회통이란 전후ㆍ피차의 관계를 유취(類聚)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라

는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회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

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구름과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

도 그치는 선풍(旋風 : 돌개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 : 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

國)을 치자.‘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

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

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이 거란(契丹 : 뒤의 遼)과 국교를 끊고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光宗)ㆍ숙종(肅宗) 같은 이는다

태조의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고,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ㆍ곽원(郭元)ㆍ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치 못하고 윤관(尹瓘)이 군신이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

간 시험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이 구성(九城)까지 금(金) 태조(太祖)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고, 그 뒤에 금의 태조가 요(遼)를 토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 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女眞) 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노민(奴民 :

高麗圖經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女眞奴奉高麗).”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김경조(金景祖)의 국서에도,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았다(女眞以高麗爲父母之邦)”고 하였음)이었는데 갑자기 강성해져서 형제의 위치로 바뀌었

다(고려사에 실린 金景祖의 국서에, “형 大金皇帝가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兄大金皇帝致書干弟高麗國王).”고 하였

음).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 좀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나라가 조공온다(定都平壤三十六國來朝).”하는 도참(圖讖)을

가지고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의 편벽된 소견을 가진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며, 무장(武將)인 최봉심(崔逢深)이며, 문무가 겸전(兼全)한 윤언이(尹彦燎 : 尹瓘의 아들)

등이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묘청의 하는 짓이 미치고 망령되

어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왕의 좌우에 모시고 있던 정지상은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과 함께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었다. 이것이 묘청이 실패

한 원인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

의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이로 하여 조선이 쇠약해질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

하는 한 예를 보인 것이다.

3) 심습(心習)을 제가할 것이다. 영국 해군성(海軍省)의,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祖)는 1592년경의 조선 해

군 대장 이순신(李舜臣)이다.”라고 한 보고가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본 배가 철갑(鐵甲)이

요,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것이라고 반박하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것을 과장하기 위

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하여 조선과 일본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창조하였는가 논쟁하게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가 없는 위안(僞案)이라 족히 따질 것이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설명한 귀

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미고 철판으로 꾸민 것이 아닌 듯하니, 이순신을 장갑선(裝甲船)의 비조

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조자라 함이 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창

조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의 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

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조하였다든 문구가 발견되었다 하

더라도 우리가 신용치 못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겠다.

4) 본색(本色)을 보존할 것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

이나 새끼 가진 짐승을 함부로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의 주인이 저녁 밥상에 자기의 다리살을 베어놓고, 공(公)은

어진 이가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고 하였다.”고 한 말이 있다.

이는 대게 신라 당시에는 영랑(永郞)ㆍ술랑(述郞) 등의 학설이 사회에 침투되어 국선 오계(五戒)의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

리라는 반감(反感)으로 주막의 주인이 이렇게 참혹하게 무안을 준 것이다. 그것이 수십 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

이지마는, 신라 화랑사(花郞史)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미천황기(美川王紀)에,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咄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 : 美川王의 이름)이 겁이 나서 달아나

수실촌(水室村) 사람인 음모(陰牟 : 당시 부호의 이름인 듯)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가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 옆의 늪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라 하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견디다 못 하여 1년 만에 달아나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소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이

르러 소금 짐을 강동(江東)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부렸다. 한 노파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에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는데 노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었다가 을불이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서 도둑으로 몰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발하여 짚신 한 켤레

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도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마는 또한 봉상왕 시대의 부호의 포학과 시민과 수령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약도이니, 그 시대

풍속사의 일반(一班)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 없는, ‘어느 임금이 즉위하였다’, ‘어느 대신이 죽었다.’ 하는 등의 연월

(年月)이나 적고, 보기 좋은 ‘어느 나라 어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왔다.’하는 등의 사실이나 적은 것들이요, 위

의 3), 4) 두 절(節)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儒敎徒)의 춘추필법(春秋筆法)과

외교주의(外交主義)가 편견을 낳아서, 전해내려오는 고기(古記)를 제멋대로 고쳐서 그 시대으 사상을 흐리게 한

것이다.

옛날 서양의 어느 역사가가 이웃집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말을 역력히 다 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들이 말

하는 그 두 사람의 시비는 자기가 들은 것과는 전연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의 역사가 모두 이 두 사람의 시비

와 같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고 자기가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탐보원(探報員 : 취재 기자)이 들어다가 보고하고 편집원이 다시 교정하고 그러도고 잘못이 생기는 예가 있는

신문ㆍ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이 이러하다 하면

을의 신문은 저러하다 하여, 어느 것을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학가가 자기의 좋아

하고 싫어하는 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마

지막 왕 우(禑)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이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하여 백

방으로 우는 원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 신돈(辛旽)의 천첩(賤妾) 반야(般若)의 소생이라 하고, 경

효왕(敬孝王 : 恭愍王?)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데려왔다느니, 반야가 우를 궁인 한씨(韓氏) 소생으로 정하는

것을 보고 통한(通恨)하여 울부짖어 우니 궁문(宮門)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하여 아무쪼록 우가 신

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는 오히려 송도(松都) 유신(遺臣)들이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의 무함당함을 절규하였으므로, 오

늘날 사학가들이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가 왕씨요, 신씨가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大兵)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

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

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가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

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 위에서 아래

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

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

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기훤(箕萱)에게로 갔다가 뜻이 맞지 않아 다시 다

른 도둑의 괴수 양길(梁吉)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 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

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

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

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끊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갈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

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인 논리관(論理觀)으

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

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

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史官)이 구태

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

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일 뿐이요, 정론(正論)이라, 사론(邪論)이라 하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

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이 있고, 쓰는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것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의 성이 왕(王)인가 신(辛)인가를 조사하여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의 지나에 대하여 선전(宣戰)하

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이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성패간에 그 결과가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말함이 옳을 것이고,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

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 이래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이 궁예 패망의 도

화선이니, 만일 왕건이 아니더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 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의 옳고 그름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이 논쟁하는 문제

다. 이조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退溪山人 :

李滉)의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 5백 년 동안의 사회는 세종ㆍ퇴계가 만든 것이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

년 동안은 영랑(永郞)ㆍ원효(元曉)가 각기 당시 사상계의 한 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나고 원효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나서 일진일퇴(一進一退) 일왕일래

(一往一來)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覇王)이 되었으니, 6백 년 동안의 사회는 그 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가?

백제의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溫祚大王)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마무리하였고, 발해의 정치 제도는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마무리하였으니, 만일 온조왕과 고이왕이 아니더면 백제의 정치가 어떤 형

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더면 발해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

경(三京) 오도(五都)의 제도가 왕검과 부루(夫婁)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의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주성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엽에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이르러 원효종(元曉宗)은 이미 쇠미해지

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뛰어난 이가 없고, 다만 10만 명의 반승회(飯僧會 :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와

백만 명의 팔관회(八關會 : 천신에 제사 지내어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빌고 온갖 놀이도 즐기는 모임)로 제물과 곡식

을 낭비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이

에 안유(安裕)ㆍ우탁(禹倬)이며 정몽주가 유교의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가 났으니, 그러면

세종의 세종됨과 퇴계의 퇴계됨이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고 함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천군(蘇塗天君)의 미신이나 율

종소승(律宗小乘)의 하품(下品) 불교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서 사회가 그 새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다 여러 교종 통일의 새로운 안을 내놓으려 한 일

이 있었다. 그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고 원효가 화엄(華嚴)의 자리를 베풀었으며, 최치원이 유도

에서 불도로 불도에서 선도로 바꾸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각계가 갈체하여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

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 다 본인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에 따라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가 된 것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희랍 철학의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拿破崙 : 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큰 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 읽던 시절에 도산사원(陶山書院) 부근에 태어났더면, 무러가 송시

열(宋時烈)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洪景來)가 되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 그와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면목이 아주 달라졌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

(論調)가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루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도 없고 사회도 자주성이 없으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주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

선이며 만주며 토이기며 헝가리가 3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 그대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서 대륙의 동서가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

은 온대 혹은 한대로 분포하여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보수 등으로 생활과 풍속

이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간격이 생겨서 각자의 자주성을 가졌다. 이것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

이라 하는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가 고려 시대와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東北國 : 渤海ㆍ濊貊 등)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아니하며, 왕검ㆍ부루 시대와도 같지 아니하다. 멀면 1천 년의 전후가 다르고, 가까

우면 1백 년의 전후가 다르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문명의 진보가 더욱 빨라서, 10년 이전이 홍황(鴻荒 : 오랜

옛날)이 되고, 1년 이전이 먼 옛날이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社會

性)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佛子)가 되었

을는지 모르는 일이거니와, 도양(跳揚) 발달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만 삼가 지키는 퇴계가 되라 한

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한다

면 이도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낳는 원료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

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과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어떠하였으니, 을이라는 민족이 갔더

라도 마찬가지 성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두 가

지 개성이 있으니, 그 하나는 항성(恒性)이요, 다른 하나는 변성(變性)이다. 항성은 제1의 자중성이요, 변성은

제2의 자주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치 못하여 절멸(絶滅)할 것이요, 변성이 많고 항성이

적으면 나은 자에게 정복당하여 패할 것이니, 늘 역사를 회고하여 두 가지 자주성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

겁고 가벼움을 평균하게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한 가지로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의하는 수밖

에 없다.

5)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愚見)으로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

으니, ①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②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

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

지 않는다.”하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行義)

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

주(尊周 : 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 : 司馬懿)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

하게 한 구석에서 정통이 다 무엇하는 것이냐.”하며 공자ㆍ주자의 역사 필법(筆法)을 반대하니, 그의 제자 신극

성(辛克成) 등은, “이는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

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부식(扶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

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은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장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하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곧 ① 에 속하는 것이다.

최치원이 지나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

다.”라고 하여 하나의 한문 졸업생이 되는 것을 바랐을 뿐이었고, 최치원이 돌아와서, “무협(巫峽) 첩첩한 봉우

리를 헤치고 중원에 들어가 급제하여 벼슬에 놀기 3년, 금의(錦衣)로 동국에 돌아왔다.”하고 노래하여 또한 스

스로 하나의 한문 졸업생 되었음을 남에게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보지 못

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 지나화하려는 것뿐이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으로 백일(白日)을 대하

며, 황화(黃化)로 녹초(綠草)를 대하는 사륙문(四六文 :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문 문체의 하나)에 능

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과 원효의 두 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마치 굶주

린 사람이 밥을 구함과 같았으니 그래서 대 선생의 칭호가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천추

(千秋)의 혈식(血食 : 나라에서 제사를 지냄)까지 그에게 바쳐,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 두 파의 자리를 마

주 대하고 되었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성공한다.’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이는 ② 에 속하는 것이다.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훤(箕萱)과 양길(梁吉)도 한때에 크게 펼쳐짐은 신라 말엽의 안정

되지 않은 판국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李澄玉)이나 홍경래가 거연히 패망함이 이조의 안정되어 있는 판국에

서 그리 된 것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六朝 : 後五代, 곧 唐과 宋 사이 53년 동

안에 일어났다 사라진 後粱ㆍ後唐ㆍ後晉ㆍ後漢ㆍ後周의 다섯 왕조)를 만났더라면 돌림천자는 얻어 했겠다.”고 하였

다.

임백호 같은 시인에게 육조ㆍ오계의 유유(劉裕 : 南宋의 武帝)ㆍ주전충(朱全忠 : 後粱의 太祖) 같은 도둑의 괴수

와 같이 되어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지나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

ㆍ당의 치세보다 육조ㆍ오계의 난세(亂世)가 더 쉬울 것은 자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의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敷演)하고 이것을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

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미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 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안정되지 않

은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ㆍ혁명적 남아라야 할 듯하나,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도 아니하여, 작은 칼로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下品)의 재주꾼(최치원 같은)으로서의 외국인의 입을 흉내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함이 그

럴듯하여 사람들을 움직일 만하면 거연히 인물의 지위를 얻기도 하나,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파묻어버리고, 변성(變性)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제 2편 수두 시대

제 1장 고대 총론

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아시아 동북의 종족이 ① 우랄 어족 ②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족(漢族)ㆍ묘족(苗族)ㆍ

요족(猺族) 등은 후자에 속한 것이고, 조선족ㆍ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것이다. 조선족이 분화(分化)하여 조선

ㆍ선비ㆍ여진ㆍ몽고ㆍ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이동하여 분산하여 돌궐(突厥 : 지금의 新疆族)ㆍ흉아리

(匈牙利 : 헝가리)ㆍ토이기(土耳其 : 터키)ㆍ분란(芬蘭 : 핀란드) 족이 되었다.

지금 몽고ㆍ만주ㆍ토이기ㆍ조선의 네 종족 사이에 왕왕 같은 말과 물건 이름이 있음은 몽고(大元) 제국 시대

에 피차의 관계가 많아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 사이에도 관명(官名)ㆍ지명

(地名)ㆍ인명(人名)의 같은 것이 많으니, 상고(上古)에 있어서 한 어족이었던 분명한 증명이다.

 조선족의 東來

인류의 발원지에 대해 ① 파미르 고원 ② 몽고 사막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아직 그 시비가 확정되지 못하였

으나, 우리의 옛 말로서 참고하면 왕성(王姓)을 ‘해(解)’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한 것이고, 왕호(王號)를 ‘불구

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빛에서 뜻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환국(桓國)이라 함은 광명(光明)에서 뜻을 취

한 것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지금의 백두산을 해와 달이 드나드는 곳, 곧 광명신(光明神)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알아 그 부

근의 토지를 ‘조선(朝鮮)’이라 일컬으니, 조선도 옛날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후세에 이두자(吏讀字)로 조

선이라 썼다.

 조선족이 분포한 ‘아리라’

우리의 옛 말에 오리를 ‘아리’라 하고, 강을 ‘라’라고 하였다. 압록강ㆍ대동강ㆍ두만강ㆍ한강ㆍ낙동강과 만주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 봉천성(奉天省)의 요하(遼河), 영평부(永平府)의 난하(灤河)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아례강(阿禮江)ㆍ아리수(阿利水)ㆍ욱리하(郁利河)ㆍ오열하(烏列河)ㆍ열수(列水)ㆍ무열하(武列河)ㆍ

압자하(鴨子河)라 하였으니, 아례ㆍ아리ㆍ욱리ㆍ오열ㆍ열ㆍ무열은 다 ‘아리’의 의역(意譯)이요, 강ㆍ하ㆍ수는 다

‘라’의 의역이다. 위의 여러 큰 강들은 다 조선족의 조상이 지은 이름이다.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이 큰 강들의 강변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삼국지에도, ‘고구려는 큰 물을 의지하여

나를 만들어 산다(句麗作國依大水而居).’라고 하였다. ‘나라’는 옛 말의 ‘라라’이니, 라라는 본래 진도(津渡), 곧

‘나루’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국가를 가리키는 명사가 된 것이다.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那)ㆍ라(羅)ㆍ노(奴)ㆍ루(婁)ㆍ누(耨)ㆍ양(良)ㆍ양(浪)ㆍ양(穰)ㆍ양(壤)ㆍ강(岡)ㆍ양(陽)ㆍ

아(牙)ㆍ야(邪)등은 다 ‘라’의 음역이고, 천(天)ㆍ원(原)ㆍ경(京)ㆍ국(國) 등은 거의 ‘라’의 의역이며, 두 가지가 다

‘라라’의 축역(縮譯)이니, 강이 어렵(漁獵) 자원이 되고, 배를 교통하는 편의가 있으므로 상고 문명이 거의 강변

에서 발원한 것이다.

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夫餘

원시 인민이 강의 물고기와 산과 들의 짐승과 풀ㆍ나무의 열매 같은 여러 가지 천산물(天産物)로 양식을 삼다

가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그 천산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목축업과 농업이 발생하였다. 농업은 대개 불

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들을 개척한 뒤에 발생하였으므로 옛 말에 야지(野地)를 ‘불’이라 하였다.

불의 이용의 발견은 한갓 농업을 유발하였을 뿐 아니라 불로 굴을 태워서 맹수도 죽이고, 그 가죽을 녹여 옷

과 신을 만들고, 진흙을 구워 성벽을 쌓고, 쇠를 달구어 기구를 만들고 그 밖에 생활의 일용에 모든 편의를 주

어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였으므로, 근세의 일반 사학가들이 고대 불의 이용의 발견을 곧 근세의 증기ㆍ전기의

발견과 같은 사회 생활의 대혁명을 일으킨 대 발견이라고 한다.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

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火神)ㆍ프러시아의 화교(火敎)ㆍ지나의 수인씨(燧人氏) 등 전설이 있고, 우리 조선

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부루ㆍ품리(稟離)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아니하여, 부여(夫餘)ㆍ부리(夫里)ㆍ불내(不耐)ㆍ불이(不而)ㆍ국내(國內)ㆍ불(弗)ㆍ벌(伐)

ㆍ발(發)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고기(古記), 고사기(古事記) 등을 참고하면 조선 문화의 원시 ‘수두’의 발원이 거의 송화강가의 합이빈(哈爾濱 :

만주 하얼빈) 부근인데, 합이빈은 그 고대의 부여이다. 그러니 송화강은 조선족이 처음으로 근거한 ‘아리라’요,

합이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野地) 곧 ‘불’이요, 그 이외의 모든 부여ㆍ부리……등은 연대를 따라 차

례로 개척된 야지-불이다.

제 2장 檀君 王儉의 건국

 조선 최초의 일반 신앙의 단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족이 각 ‘아리라’에 분포하여 각 ‘불’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 커다란 공동의 신앙이

유행하였으니 이른바 단군이다.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려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은 모든 물건을 다 신으로 인정하여

이를 예배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종교요 원시 시대 각 민족 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實在)이

다.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제 1장 참고)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太白山)의 숲을 광명신(光明神)이 살고 있는

곳으로 믿었는데, 그 뒤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매 각기 그 살고 있는 곳에 숲을 길러서 태백산의 숲

을 모상(模像)이라 하고, 그 숲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였으니, 수두란 신단(神壇)이라는 뜻이다. 해마다 5월과

10월에 백성들이 수두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한 사람을 뽑아 제주(祭主)를 삼아서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天神)이라 이름하여 여러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수두의 주위에 금줄을매어 한인(閑人)의 출입을 금

하였다.

전쟁이나 그 밖의 큰 일이 있으면 비록 5월과 10월의 제사 지낼 시기가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사 지

내고, 소의 굽으로 그 앞에서 길흉을 점쳤는데, 굽이 떨어지면 흉하다 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의 팔괘(八卦) 음획 양획(陰劃陽劃)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강적이 침입하면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서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첫째로 받

들어 ‘신수도’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밖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딸려 있

었으니, 삼한사(三韓史)에 보이는 ‘소도(蘇塗)’는 ‘수두’의 음역이고, ‘신소도(臣蘇塗)’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진

단구변국도(震壇九變局道)에 보이는 ‘진단(震檀)’의 진은 ‘신’의 음역이고, 단(檀)은 수두의 의역이요, 단군은 곧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수두는 작은 단[小檀]이요, 신수도는 큰 단[大壇]이니, 수두에 단군이 있었으니까

수두의 단군은 작은 단군[小檀君]이요, 신수두의 단군은 큰단군[大檀君]이다.

 큰 단군, 왕검이 창작한 神說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환군제석(桓君帝釋)이 삼위ㆍ태백(三危ㆍ太白 : 둘 다 산 이름)을 내려다보고 널리 인간

세상에 이익을 끼칠 만한 곳이라 하여, 아들 웅(雄)을 보내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가지고 가 다스리게 하

였다. 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神市)라 일컬으니, 이른바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웅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지휘하여 곡식ㆍ명(命)ㆍ병(病)ㆍ형벌(刑罰)ㆍ선

(善)ㆍ악(惡) 등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 범 한 마리가 있어 한굴 속에 살면서 사

람이 되기를 빌었다. 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

람의 모양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범은 그대로 하지 못하고, 곰은 삼칠일 동안 그대로 하여 여자가 되었

다. 그러나 결혼할 남자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을 향해 아이 가지기를 원하므로 웅이 남자의 몸으로 가화(假化)

하여 이와 결혼해서 단군 왕검(檀君王儉)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석(帝釋)’이니 ‘웅(雄)’이니 ‘천부(天符)’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佛典)에서 나온 명사이고 또 삼국사

에 초기의 사회에도 여성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했는데, 이제 남자는 신의 화신이고,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낮게 쳤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요, 불교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점철(點綴)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양(平壤)의 옛 이름이 왕검성(王儉城)이요, 신라의 선사(仙史)에도,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平壤都仙人

王儉之宅)”이라고 했고, 위서(魏書)에도, “지난 2천 년 전 단군 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乃往二千載前 有檀君王儉 立國阿斯達 國號朝鮮).”고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 고대

에 단군 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받들어왔음은 사실이고, 왕검을 이두자의 읽는 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

이니, 대개 ‘임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한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스

스로 상제(上帝)의 화신이라 일컫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하

고, 역대 서울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한 것이다.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 함은 삼국 시대에 수두 교도의 단체를 ‘선배’라 일컫고, 선배를 이두로 선인(仙人) 혹

은 ‘선인(先人)’이라 기록한 것이고 선사(仙史)는 곧 왕검의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후세

에 유ㆍ불 양교가 서로 왕성해지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선사도 없어져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지나의 고서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여기저기 보이는

것으로써 오히려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의 삼일신(三一神)이란 천일(天一)ㆍ지일(地一)ㆍ태일(太一)인데, 그 중에 태일이 가장 존

귀하고, 오제(五帝 : 동서남북중 다섯 방향의 신)는 태일의 보좌(補佐)라 하였으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천황ㆍ지

황(地皇)ㆍ태황(泰皇) 가운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초사에는 동황태일(東皇太一)이란 노래 이름이

있고,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태일잡자(太一雜者)라는 책 이름이 있으니, 삼일신(三一神)과 삼황(三皇)은 곧

고기에 있는 삼신(三神)ㆍ삼성(三聖)등의 유이다.

삼일신을 다시 우리의 옛 말로 번역하면 천일(天一)은 ‘말한’이니 상제(上帝)를 의미하는 것이요, 태일은 ‘신한’

이니 신은 최고 최상이라는 말, 신한은 곧, ‘하늘 위 하늘 아래에 하나이고 둘이 없다(天上天下獨一無二).’는 뜻이

다. 말한ㆍ불한ㆍ신한을 이두로 마한(馬韓)ㆍ변한(弁韓)ㆍ진한(辰韓)이라 적은 것이고, 오제(五帝)는 돗가ㆍ개가

ㆍ소가ㆍ말가ㆍ신가 등 다섯 ‘가’ 곧 오방신(五方神)을 가리킨 것이다.

차례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위(權位)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神界)와 인계(人

界)의 대권(大權)을 모두 차지하여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하므로 삼일 중에서 태일이 가장 고귀하다 하는 것이

고, ‘오제(곧 5가)는 곧 태일의 보좌이다.’라 하였으니, 신가가 다섯 가의 수위(首位)임은 ‘신’의 어의(語義)로 말

미암아 명백하니, 거북[龜]의 삼신ㆍ오제는 곧 왕검이 만든 전설이다.

 ‘신수두’의 三京ㆍ五部 제도

대단군(大壇君) 왕검이 이에 삼신(三神)ㆍ오제(五帝)의 신설(神說)로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의 제도를 정하며, 신한ㆍ말한ㆍ불한의 세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大

王)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두 부왕(副王)으로 신한을 보좌한다.

삼경을 두어 세 한이 나뉘어 머무르고, 세 한의 아래에 돗가ㆍ개가ㆍ소가ㆍ말가ㆍ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

국을 동ㆍ서ㆍ남ㆍ북ㆍ중 다섯 부(部)에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다섯 부를 나

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전시(戰時)에는 다섯 부의 인민으로써 중(中)ㆍ전(前)ㆍ후(後)ㆍ좌(左)ㆍ우(右)의 오군(五軍)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中軍大元帥)가 되고, 그 밖의 네 가가 전ㆍ후ㆍ좌ㆍ우의 네 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는 윷판이 곧 다섯 가의 출진도(出陣圖)이니,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그림 가운데 도

(刀)ㆍ개(介)ㆍ걸(乞)ㆍ유(兪)ㆍ모(毛)는 곧 이두 글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는 돗가요, 개는 개가요, 유는

옛 음에 ‘소’니 소가요, 모는 말가요, 걸은 신가니, 걸로 신가를 기록함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

에 견사(犬使)라는 관명(官名)이 있으니, 대개 견사는 신가의 별칭이므로 걸은 곧 견사의 견(犬)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돗[猪]ㆍ개[犬]ㆍ소[牛]ㆍ말[馬] 등 가축들로 오방(五方)의 신의 이름을 삼는 동시에, 이로써 벼슬 이름을 삼

은 수렵 시대가 지나고 농목(農牧) 시대가 된 증적(證跡)이다.

제 3장 수두의 弘布와 문화의 발달

 夫婁의 西行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夏禹)를 도산(塗山)에사 만났다.”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吳越春秋)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당요(唐堯) 때에 9년 동안 홍사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

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禹)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南嶽)ㆍ형산(衡山)

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

(蒼水使者)라 일컫고, 우에게 말하기를, 구산(九山) 동남쪽의 도산(塗山)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석달 동안 재계

(齋戒)하고 그것을 꺼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金簡玉牒)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五行通水)

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州愼)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井田)을 제정하고, 율도량

형(律度量衡)의 제도를 세웠다.”고 하였다.

현이(玄夷)는 당시 조선의 동ㆍ남ㆍ서ㆍ북ㆍ중 오부를 남(藍)ㆍ적(赤)ㆍ백(白)ㆍ현(玄 : 黑)ㆍ황(黃)으로 별칭했는

데, 북부가 곧 현부(玄部)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玄夷)라고 한 것이요, 창수(蒼水)는 곧 창수(滄水)이

고, 주신(州愼)ㆍ숙신(肅愼)ㆍ직신(稷愼) 혹은 식신(息愼)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창수사자이니, 이때 지나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滄海使者)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의 일부분인 오행설(五行說 : 水火金土木)을 전하고 치수(治水)

의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禹)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지나에

전포(傳布)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도 또한 지나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

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고 하였는가? 신성(神聖)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이다.

 箕子의 전래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夏)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내어 도산에서 받은 신서

(神書)를 홍범구주(洪範九疇)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는데 하가 수백 년 만에 망하고 상(商)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 만에 망하고 주(周)가 일어나서는 주무왕(周武王)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殷)의 왕족 기자(箕子)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지금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이 그것이다.

홍범편(洪範篇) 가운데, “초일(初一)은 오행(五行)이요, 차이(次二)는 경용오사(敬用五事)요, 차삼(次三)은 농용팔

정(農用八政)이요, 차사(次四)는 협용오기(協用五紀)요, 차오(次五)는 건용황극(建用皇極)이요, 차육(次六)은, 예용삼

덕(乂用三德)이요, 차칠(次七)은 명용계의(明用稽疑)요, 차팔(次八)은 염용서징(念用庶徵)이요, 차구(次九)는 향용오

복(嚮用五福)이요ㆍ위용육극(威用六極)이다. 첫재 오행은 일은 수(水), 이는 화(火), 삼은 목(木), 사는 금(金), 오

는 토(土)요, 둘째 오사(五事)는 일은 모(貌), 이는 언(言), 삼은 시(視), 사는 청(聽), 오는 사(思)요, 셋째 팔정(八

定)은 일은 식(食), 이는 화(貨), 삼은 사(祀), 사는 사공(司供), 오는 사도(司徒), 육은 사구(司寇), 칠은 빈(賓),

팔은 사(師)요, 넷째 오기(五紀)는 일은 세(歲), 이는 월(月), 삼은 일(日), 사는 성진(星辰), 오는 역수(曆數)요, 다

섯째 황극(皇極)은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 여섯째 삼덕(三德)은 일은 정직(正直), 이는 강극(剛克), 삼은 유극(柔

克)이요, 일곱째 계의(稽疑)는 택건립복서인(擇建立卜筮人)이요, 여덟째 서징(庶徵)은 우(雨)ㆍ양(暘)ㆍ오(燠)ㆍ한

(寒)ㆍ풍(風)이요, 아홉째 오복(五福)은 일은 수(壽), 이는 부(富), 삼은 강녕(康寧), 사는 유호덕(攸好德), 오는 고

종명(考終命)이요, 육극(六極)은 일은 흉단절(凶短折), 이는 질(疾), 삼은 우(憂), 사는 빈(貧), 오는 악(惡), 육은

약(弱)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문구는 곧 도산(塗山)ㆍ신서(神書)의 본문이고, 그 나머지는 기자(箕子)가 연

술(演述)한 것이다. 천내석우 홍범구주(天乃錫禹洪範九疇)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天)이라 하고 단군으로

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함이다.

이는 ‘수두’의 교의에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商)이 주(周)에

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서(漢書)에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洛水)에서 나왔으므로 우(禹)가 홍범(洪範)을 연술하였다 했지마는,

역(易)의 계사(繫辭)에,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씨가 나와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河出

書 洛出書 聖人則之).”라 하여 분명히 하도(河圖) 낙서(洛書)가 다 역괘(易卦)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는데,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위 일절은 淸儒 毛奇齡의 설을 채

택함).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또 초사(楚辭)에 의거하여 동황태일

(東皇太一) 곧 단군 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湖北)ㆍ절강(浙江)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

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자세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게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 흉노의 休屠

‘수두교’가 지나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사기, 흉노전에 의거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천체를 형상한 동인(銅人)을 휴도(休屠)라 불렀으니, 곧 ‘수두’의 번역이요, 휴도

의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休屠王)이라 하여 또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三龍)을 모시니,

용은 또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를 수입하였음이 의심없다.

고대의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의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이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

의 속지(屬地)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지나ㆍ흉노 등의 각 민족에 널리 퍼졌음으로 인하여 정치상 강

역(疆域)이 확대되었음을 볼 것이다.

 漢字의 수입과 吏讀文의 창작

조선 상고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의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땅이 지나와 이어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통

이 있었을 것이니,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

에게 금간옥첩(金簡玉牒)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글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國書)’, ‘향서(鄕書)’ 혹은 ‘가명(假名)’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通俗)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薛聰)이 지은

것이라 하지마는 설총 이전의 옛 비석(진흥왕 巡狩碑 따위)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詩歌)가 있으니, 설

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없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왕(王)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儉)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낙랑(樂浪)이라 번

역하여 낙(樂)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 년 전-기원 전 10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그림[圖繪]이 진보하여 글자[文字]가 되고 형자(形字)가 진보하여 음자(音字)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

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듦은 페니키아 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偏傍 : 글자의 한 부분)을 따라서 알

파벳을 만듦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사상의 한 진보라 할 것이요, 후세의 거란문[契丹文]ㆍ여진문(女眞文)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

러운 점은 ① 자음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지금 ‘ㄱ’과 모음 ‘ㅏ'의 음철(音綴)이요, '라'는

자음 'ㄹ’과 모음 ‘ㅏ’의 음철인데,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철이 한 글자가 되어 ‘가’를 ‘加’ 혹‘家’로 쓰고,

‘라’는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音字)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② 음표(音標)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

(白)자 한 자를 ‘백활(白活)’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위백제(爲白濟)’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며, ‘이(矣)’자 한

자를 ‘의신(矣身)’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교의(敎矣)’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칙(準則)이 없으며, ③사

음하몽(上音下蒙)의 이치를 획청(劃淸)하지 않음이니, 예컨대 ‘달이’를 ‘월이(月伊)’라 쓰지 않고 ‘월리(月利)’라 써

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를 ‘풍이(風伊)’라 쓰지 않고 ‘풍미(風味)’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언어의 근간(根

幹)과 지엽(枝葉)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

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고, 다른 시대, 다른 지방 사람은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문

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달해주기 때문인데,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

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을 시대,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利器)가 될 수 있으랴?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 지 1천여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外患)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글을 적국(敵國) 사람이 이해하

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고 삼조선(三朝鮮)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 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토거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

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이

두문의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으로 되었음이 학적 재지(才智)가 부족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 神誌의 역사

전사(前史)에 단군 때에 신지(神誌)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史官)이 됐다 하였으나, 사실은 곧 ‘신치’의 번역이

요, ‘신치’는 ‘신크말치’의 약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首席) 대

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祭日)에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ㆍ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유의,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는데, 후세에 문사(文士)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이른바 신지가 곧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

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재한 것일 것이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여칭추극기(如秤錘極器)ㆍ칭간부소량(秤幹扶蘇樑)ㆍ추자오덕

지(錘者五德地)ㆍ극기백아강(極器百牙岡)ㆍ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ㆍ뇌덕호신정(籟德護神精)ㆍ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ㆍ흥방정태평(興邦定太平)ㆍ약폐삼유지(若廢三諭地)ㆍ왕업유쇠경(王業有衰境)’의 10구를 싣고, 부소량(扶蘇樑)은 지

금의 송도(松都), 오덕지(五德地)는 지금의 한양, 백아강(百牙岡)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도ㆍ한

양ㆍ평양은 고려의 삼경(三京)이고, 단군의 삼경은 하나는 지금의 합이빈이니, 고사에 부소갑(扶蘇岬)ㆍ비서갑

(非西岬) 혹은 아사달(阿斯達)로 기록 한 것이고, 하나는 지금의 해성(海城)ㆍ개평(蓋平) 등지이니, 고사에 오덕지

(五德地)ㆍ오비지(五備地)ㆍ안지홀(安地忽) 혹은 안시성(安市城)으로 기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百牙岡)ㆍ낙랑(樂浪)ㆍ평원(平原) 혹은 평양(平壤)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두문 읽는 버베 부소(扶蘇)ㆍ비서(非西)ㆍ아사(阿斯)는 ‘스’로 읽고, 오덕(五德)ㆍ오비(五備)ㆍ안지(安地)ㆍ안

시(安市)는 ‘아리’로 읽고, 백아강(百牙岡)ㆍ낙랑(樂浪)ㆍ평원(平原)ㆍ평양(平壤)은 ‘펴라’로 읽는 것이니, 위의 비

사 10구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대게 삼국 말엽에 한학(漢學)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전에 이두문으로 기록된 시와 글을 한시와 한문으로 번

역함을 시도하였으니(최치원의 鄕藥雜詠 따위), 신지의 한시 번역도 그 한 예이다. 어찌하여 비사(秘詞)라 일컬었

는가? 고대의 역사 종류를 성서(聖書)라 하여 대궐 안에 비장해두어 민간에 유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때문이

다. 신지와 신지비사 따위가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비장이 불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

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이조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書雲觀)에 두었었는데, 역시 이조 임진왜란의 불에 타버린

것이다.

 조선의 전성시대

기원전 10세기경으로부터 그 뒤 약 5,6백 년 동안은 대 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이다.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

국(孤竹國 : 지금의 永平府)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하였는데 백이(伯夷)ㆍ숙제(叔齊) 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

위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지나의 주(周 : 지금의 陜西省)를 우람하다가 주무왕(周武王)에게 격렬히 비전론

(非戰論)을 주자하였으며, 고대 지나의 강회(江淮) 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옮겨가 살아서 숱한 소왕국을 건설하

였는데, 그 중 서어왕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인의(仁義)를 행하여 지나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殖民) 중의 한두 호결의 행동어기나와, 기원전 5,6세기 경에

불리지(弗離支)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直 )ㆍ산서(山西)ㆍ산동(山東)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代縣) 부근에 한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아 불리지국(弗離支國)이라 하니, 주서(周書)의

‘불령지(弗令支)’와 사기의 ‘이지(離支)’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 불리지는 또한 그가 정복한 지방을 그

성 ‘불(弗)’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으니, 요서(遼西)의 ‘비여(肥如)’나 산동(山東)의 ‘부역(鳧繹)’이나, 산서(山西)의

‘비이(卑耳 : 管子라는 책에 보임)’가 ‘불’의 번역이다.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땅이 연이어져 있었고,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발해의 발(渤)도 음

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가 준 이름이니,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검은 원숭이[狖]ㆍ담비[貂]ㆍ여

우[狐]ㆍ삵[狸] 등의 털가죽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하여 상업이 크게 떨쳤었다.

 조선의 쇠약

기원전 7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孤竹)을 의거해서 불리지국(弗離支國)과 합하여 연(戀)과 진(晉)을 치니, 연과

제(齊)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제의 환공(桓公)이 어진 재상 관중(管仲)과 이름난 장수 성부(城父)를 얻어 지나

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조(曹)ㆍ위(衛)ㆍ허(許)ㆍ노(魯) 등 10여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구원하고자 태행

산(太行山)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서 고죽과 싸워 이겼으므로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다 잃었다.

지나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保全)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孔丘氏 : 孔子)가 관중의 고을 칭찬하여,

“관중이 피발(披髮) 좌임(左袵)을 징계하였다.”고 하였는데,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좌임

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자(管子)》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① 지나의 문자가 부과(浮誇 : 부화하고 과장함)가 많으며,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② 《관자》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에 어떤 사람

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

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 단군 연대의 고종

전사(前史)에는 단군 왕검 1220년 후에 기자(箕子)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

이 아니고,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 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2편 제2장에 기술하겠

거니와, 이제 사실(史實)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

산(九月山)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抄錄)한 위서(魏書)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

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檀君王儉 入國阿斯達 國號朝鮮).”고 한 구절로 인하여, 아사(阿斯)를 음이 아홉[九]

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

도 문화현(文化縣 : 지금의 信川郡)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弓忽)이요, 궁홀은 이두문으로 ‘궁

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皆忽 : 音 개골)에 있는 산이므

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

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아사달은 이두문에 ‘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 합이빈(哈爾濱)

의 완달산(完達山)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上京)이요, 지금의 개평현(蓋平

縣) 동북쪽 안시(安市)의 고허(古墟)인 ‘아리티’가 중경(中京)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南京)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스대’

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은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元年) 무진(戊辰)을 당요(唐堯) 25년이라하였지마는, 지나도 주소(周召) 공화(共和 : 기

원전 841년)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년인지를 알 수 있으랴?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고기(古記)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震檀)으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고쳐서 불전(佛典)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

락한 불교도인들이, 인도 고전의 3만 년, 3천 년, 5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佛祖)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

든 말이라,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조 초에 권근(權近)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여 천 년이 지났네(傳世不知幾 曆年會過千).”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佛家)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

의 시말(始末)을 모르는 말이다.

옛날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半主權)을 가쳐 그 처음에서 끝까지

2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천 년만으로 헤아리랴.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敎政)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

제 3편 三朝鮮 분립시대

제 1 장 삼조선의 총론

 삼조선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ㆍ기자ㆍ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ㆍ불ㆍ만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大王)이요, 불ㆍ말 두 한은 부왕(副王)이다.

삼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

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ㆍ말ㆍ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이라 기

록된 것이고, 신ㆍ말ㆍ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ㆍ막(莫)ㆍ번(番)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ㆍ

말ㆍ불의 음역(音譯)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ㆍ마ㆍ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ㆍ막ㆍ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用字)가 달랐기 대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

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古典)이 거의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

(支那史)에는 왕왕 보인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 한 것은 신ㆍ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주(註)에 “번(番)은 일에 막(莫)으로도 쓴다(番一作莫)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ㆍ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진막번조선(眞幕番朝鮮)’ 혹은 그대로 써서 신ㆍ말ㆍ불 삼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 버리고 ‘진막조선(眞幕朝鮮)’이라 기록한 것은 무

슨 까닭인가?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명ㆍ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文藝)의 평순(平順)을 위하여 축

자(縮字)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의 한(韓)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管子)의 ‘발조선(發朝鮮)’과 대대례(大戴禮)의 ‘발식신

(發息愼)’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한(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삼조선

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疆域)의 범위도 기

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읍은 ① 제1편에 말한 ‘스라’-지금의 합이빈, ② ‘알티’-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안시(安市)

옛 터, ③‘펴라’-지금의 평양, 이 셋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ㆍ말 두 한이 그 부왕(副王)이었으므로, 신한이 ‘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ㆍ불 두 한은 하나는 ‘펴라’

에,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ㆍ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

을 나누어 지키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三京)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

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番汗縣),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弁韓)의 고도(古都)이다.”라 했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

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마한(馬韓)은 평양의 마읍산(馬邑山)으로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한으로 인하

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馬邑)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

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말한)의 옛 서울일 것이요,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이 두 서울이 불ㆍ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삼한’이 합이빈 곧 ‘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없다.

이에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奉天省)의 서북과 동북(開原 이북, 興京 이서)

과 지금 길림(吉林)ㆍ흑룡(黑龍) 두 성(省)과 지금 연해주(沿海州)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요동반도(遼東

半島 : 開原 이남, 興京 이서)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

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었다 하였을 것이다.

 기록상 삼조선을 구별할 조건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前史)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朝鮮)’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

이라 하고,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

이 누구랴?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本紀)에 동ㆍ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

워쏙,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ㅇ느 등 당섯 가야(伽倻)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만일 전사(前

史)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伽倻史)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ㆍ신라ㆍ

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緖論)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습견(習見)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

선의 사적(事蹟)을 구별하지 않으랴?

삼조선의 사적(史的) 재료는 오직 사기(史記),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등 지나사(支那史)뿐이지만 저 지나사

의 저작다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驕傲病)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고,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

패와 시비를 뒤바꾸어놓았음이 그 하나요, 조선의 나라 이름ㆍ지명 등을 기록 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

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東扶餘)를 불내예(不耐濊)라 하고, 오열홀(烏列忽)을 요동

성(遼東城)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筆法)이 많음이 그 둘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왔는데, 매양 기자

(箕子)나 진(秦) 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

기를 지을 때에 연(燕)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

을 것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三京)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文化故都)를 점령하였으

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朝鮮傳)은 조선의 문화적ㆍ정치적 사

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衛滿)과 한병(漢兵)의 동침(東侵)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

의 소전(小傳)이요, 한 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略史)이다. 위략,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毌兵儉)이 실어간 고

구려의 서적으로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朝鮮)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

호(東胡)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遺事)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抄出)하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마한(馬韓)ㆍ백제(百濟)의 선대는 곧 말조선의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이 갈

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 삼조선 분립의 시초

대단군(大壇君)의 정제(定制)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

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ㆍ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삼

한이 분립한 뒤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全燕時) 곧 연의 전성 시대라고 하였는데, 연의 전성 시대는 지나 전국시대

(戰國時代) 초이고, ‘발조선(發朝鮮)’을 기록한 관자(管子)는 관중(管仲)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僞書)

이며, ‘발숙신(發肅愼)’을 기록한 대대례(大戴禮)는 비록 한인(漢人) 대승(戴勝)이 지은 것이지마는, 발식신(發息愼)

운운한 것은 제인(齊人) 추연(皺衍)이 전한 것인데,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ㆍ말ㆍ불 삼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

국시대의 일이요,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세기경이니, 그러면 기원전 4세기경에 신ㆍ말ㆍ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다.

신조선은 성이 개씨(解氏)니,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箕氏)니 기자(箕子)

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말조선은 성이 한씨(韓氏)니 그 선대이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王符)의 잠부론

(潛夫論)에, “한(韓)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韓)인데 위만(衛滿)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韓西

赤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고 하였으니, 한서(韓西)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韓

氏)인가 한다.

위략(魏略)에, “기자(箕子)의 후손 조선후(朝鮮侯)는 주(周)가 쇠해지고 연(燕)이 자존(自尊)하여 왕이 되서 동쪽

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周室)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大夫禮)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

지 않았다(箕子之後朝鮮侯 見周?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赤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二尊周室 大夫禮 諫之乃止 使禮西

說燕以之止 不功).”고 하였는데,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大秦)ㆍ로마(羅馬)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

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自尊的) 병심리(病心理)를 발휘한 글이니,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

나 ‘신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ㆍ마한ㆍ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辰王)’, ‘태

왕(太王)’이라고 하였으니(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朝鮮王)이라 하여을 것이요, ‘말

한’,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左輔)ㆍ우보(右輔)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朝鮮侯)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

가 이때에 ‘불한’의 지위에 있었으니 조선후라 일컬음이 또한 옳다.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

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 사기 에 주(周)에 신

정왕(愼?王) 46년, 기원전 323년이니 신ㆍ말ㆍ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

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謀士)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ㆍ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곧 신조선의 ‘신

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대왕(大王)이라는 뜻이다.

제 2장 삼조선 분립 후의 신조선

 신조선의 西侵과 燕ㆍ趙ㆍ秦의 長城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某甲)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ㆍ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東蒙古) 등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여 연을 쳐 우북평(右北平) - 지금의 영평부(永平府)와

어양(漁陽) - 지금의 북경(北京) 부근과 상곡(上谷)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부(大同府)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弗離支)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燕王)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歲幣)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컫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某乙)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秦開)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

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 신ㆍ말ㆍ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ㆍ어양ㆍ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遼西) - 지금의 노룡현(盧龍縣)과, 요동(遼東) - 지금의 요양(遼陽)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의 5군을 두고, 2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사기(史記) 조선

열전(朝鮮列傳)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고 한 것

과 흉노열전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秦開)가 호(胡)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東

胡)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

平)에까지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

却千餘里 燕赤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遼東郡).”고 한 것과 위략에,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滿潘汗)에까지 이르렀다(燕及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

潘汗).“고 한 것이 다 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

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진개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조(趙 : 지금의 直匠

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의 무령왕(武寧王)의 장성(지금 山西의 북쪽)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屬

民)인 담림(澹林)ㆍ누번(樓煩)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진(秦 : 지금의 陜西省) 소왕(昭王)의 장성은 의거(義渠)를

토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농사가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秦)을 압박하였다. 진의 선태후(先太后 : 秦始皇

의 高祖母)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버려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 滄海力士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이 연ㆍ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韓)ㆍ위(魏)ㆍ조(趙)ㆍ연(燕)ㆍ제(齊)ㆍ초

(楚)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한인(韓人) 장량(張良)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

하였다. 왕 모병(某丙)이 장사 여씨(黎氏)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巡幸)을 기회하여 120근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陽武縣) 박랑사(博浪沙)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副車)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였다.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滄海君)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江陵)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郡長)이라고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

고, 동부여 두 나라는 ① 북갈사(北曷思 지금의 琿春) ② 남갈사(南曷思 지금의 咸興)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의 중의 하나요,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없는 말이다.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ㆍ조ㆍ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

하게 하고 장군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30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二世)가 즉위하매, 이듬해에 진승(陳勝)ㆍ항적(項籍)ㆍ유방(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李斗山)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秦)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

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萬成 : 모든 사람)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天神)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이 벽력 같

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한ㆍ위ㆍ조ㆍ연ㆍ제ㆍ초)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고 하였다.

 흉노 冒頓과 東侵과 신조선의 위축

지나의 항적ㆍ유방 등의 8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왕 모정(某丁)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上谷)ㆍ

어양(漁陽)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冒頓)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1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語系)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었는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

를 짓밟고,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歸附)가 무상하였는데, 기원전 200년경에 두만(頭曼)이 흉노선우(匈

奴單于 : 휸오 大酋長의 호)가 되어, 맏아들 모돈(冒頓)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

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閼氏 :

선우의 妻妾)를 주니,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리 구탈(甌脫)을 신조선

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구탈이란 당시 중립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

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 하느냐.”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

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鮮卑山) - 지금의 내외 흥안령(興安嶺)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

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엄복(嚴復 : 淸末의 학자)이 말하기를,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이는 한갓 사

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해보면, 흉노가 음산(陰山)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연지(臙脂)가 생산되는 언지산(焉支山)을 빼

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需要)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제 3장 삼조선 분립 후의 불조선

 불조선의 西北境을 빼앗김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

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략에, “진개(秦開)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秦開功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고 하여, 선유(先儒)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

(山海關)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縱線) 2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한서 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遼東郡縣) 중에 ‘문(汶)ㆍ번한(番汗)’의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번

한이다. 문현(汶縣)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번한(番汗)은 지금의 개평 등지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ㆍ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

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秦)나라 때 혹

은 한(漢) 나라 때의 명칭임을,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번한(番汗)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한 것일 것이다.

사기 1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천여 리는 신ㆍ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

러 지적한 것이니, 상곡ㆍ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遼東)ㆍ요서(遼西)ㆍ우북평(右北平)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만반한은 사군(四郡)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이 절(節)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 불조선과 秦ㆍ漢과의 관계

연왕(燕王) 희(喜)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옮기니,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

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故秦空地)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거하며 이때에 불

조선왕의 이름은 ‘부(否)’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

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否)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

여왕(東扶餘王)이 된 부루(夫婁)를 부(否)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기원전 200여 년경에 기준(箕準)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ㆍ항적ㆍ유방(漢高祖) 등이 모반하여 지나

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ㆍ어양ㆍ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燕)ㆍ제(齊)ㆍ조(趙)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空地)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

데,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고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사기 조선전에, “한(漢)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았다(漢興

……至浿水爲界).”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盧綰)으로 연왕(燕王)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

로 하였다(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湨水).”고 한 것(先儒들이 湨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좇는다)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浿水)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白鳥庫吉)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이다.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 衛滿의 반란과 불조선의 南遷

기원전 194년에 한(漢)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

(衛滿)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준왕(準王)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博士官)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

변(옛 중립 공지)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舊民)과 연ㆍ제ㆍ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어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 죄인을 데러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한나라 군사가 10도(道)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보고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하니,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宮人)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좇아 마한의 왕도

(王都) 월지국(月支國)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 왕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왕검성은 대단군(大壇君) 제1세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三京) -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이 이 세 곳이다.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 : 註에 滿의

도읍이라 했다)”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益山)이다.”라고 하나,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

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제 4 장 삼조선의 분립 뒤의 말朝鮮

 말조선의 遷都와 마한(馬韓)으로의 改號

말조선의 처음 도읍이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거였거니와, 그 뒤(연대는 불명)에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고

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겨 불조선왕 기준에게 망했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전사(前史)에 보

인 것이 없으나, 대개 신ㆍ불 두 조선이 흉노와 지나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풍운(風雲)이 급하매, 말

조선왕이 난을 싫어하여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

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

를 버리고, 지난날에 왕호(王號)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로 마한(馬韓)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辰王)이라 써서 ‘마한국(馬韓國) 진왕(辰王)’이라고 일컬었다.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

는 음을 따서 한(韓)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

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韓氏)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

재만 아는 고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 성 기씨(其氏)를 버리고

한씨(韓氏)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 “준(準)……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의 땅에서 살며 한왕(韓王)이라 이름하였다(準……走入海

居韓地 號韓王).”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고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準

子及親 留在國者 冐姓韓氏).”고 하였다.

월지국을 전사(前史)에는 백제의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益山)이라고 하였지마는, 이것은 속전(俗傳)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는 것을 인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諡號)라 하고, 부근 미륵산(彌勒山)의 선화부

인(善化夫人)의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善花)의 유적이라 하여, 마침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금마군(金馬郡)

에 도읍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릉의 딴 이름이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요, 말통은 백제 무왕(武王)

의 어릴 때 이름(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서동(薯童)은 그 의역이고, 고려사 지리지의 末通은 그 음역)이

요,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眞平大王)의 공주로서, 무왕의 후(后)가 된 아이고, 백제를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

에 그 예가 적지 아니하니, 이따위 고적은 한갓 익산(益山)이 백제의 옛 서울임을 증명함에는 부족할뿐더러,

마한 50여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乾馬國)이 있으니, 건마국이 금마군(金馬郡) 곧 지금의 익산일 것이므로, 월

지국 - 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나라에서 찾음이 옳다. 그 확실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백제 건국

13년)의 국경이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公州)이니,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지마는, 그 5,6백 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王號)로 쓴 이가 있다. 신라의 눌지(訥祗)ㆍ

자비(慈悲)ㆍ소지(炤智)ㆍ지증(智證) 네 왕은 다 ‘마립간(麻立干)’이라 일컬었는데,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의 주에,

“마립은 말(말뚝)이다(麻立橛也)”라 하였으니, 궐(橛)은 글자 뜻이 ‘말’이므로, 마립(麻立)의 ‘마(麻)’는 그 전성(全

聲)을 취하여 ‘마’로 읽고, ‘입(入)’은 그 초성(初聲)을 취하여 ‘ㄹ’로 읽고, ‘간(干)’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하므로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이다.

 樂浪과 南三韓의 對峙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崔氏)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나, 전사(前史)에 이른바 낙랑국(樂浪國)이 그것이다.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마한이 지금의 이

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국을 통솔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ㆍ부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

른편의 1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自治稧 : 고대에 모임을 계라 하였음)를 세워서 이

름을 ‘진한부(辰韓部)’라 하고,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

를 세워서 ‘변한부(弁韓部)’라 일컬었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弁辰部)라고도 일

컬었다. 이것이 남삼한(南三韓)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ㆍ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三神)에 따라 삼의 수

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 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ㆍ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輔相)이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은 말

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소속국)가 된 것

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좇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거니와,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 (이를테면 마한

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신한이 셋이 되니, 대개 앞의 것(신한 셋)은 삼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며, 진ㆍ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

삼한의 창례(創例)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가 많은 문제로 되었지마는 종래의 학자들이 다만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의

삼한 곧 남삼한을 의거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고 ①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② 삼한의 예제

(禮制)의 변혁을 알지 못하여,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原有)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알아내지 못하였다.

 樂浪 25국과 南三韓 70여국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이니, 조선(朝鮮)ㆍ감한(邯邯)ㆍ패수(浿水)ㆍ함자(含資 : 貪資라고도 함)

ㆍ점선(黏蟬)ㆍ수성(遂成)ㆍ증지(增地)ㆍ대방(帶方)ㆍ사망(駟望)ㆍ해명(海冥)ㆍ열구(列口)ㆍ장잠(長岑)ㆍ둔유(屯有)ㆍ

소명(召命)ㆍ누방(鎒方)ㆍ제해(提奚)ㆍ혼미(渾彌)ㆍ탄렬(呑列)ㆍ동이(東)ㆍ불이(不而 : 불내(不耐)라고도 함)ㆍ잠대

(蠶臺)ㆍ화려(華麗)ㆍ야두미(邪頭味)ㆍ전막(前莫)ㆍ부조(夫租 : 沃沮의 잘못인 듯) 등이니, 위의 25국은 한서지리지

에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25현(縣)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니라,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를 침략하려고 할 때에 그 신하와 백성들의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선이 거의 다 지나의 옛 땅임을 위증

(僞證)하고자 전대 지나의 역사책 중에서 조선에 관계되는 것들을 죄다 가져다가 만히 고칠 때, 조선 고대의

낙랑 25국을 낙랑군 25현으로 고쳐 한서지리지에 넣은 것이니, 이는 제4편에서 다시 자세히 논술하기로 한

다.

25국 중 ‘조선’과 ‘패수’는 다 평양에 있는 나라인데, 조선은 곧 말조선의 옛 땅이므로 조선이라 일컬어서, 낙

랑의 종주국이 된 것이고, 패수는 ‘펴라’로 읽을 것이니, 24속국의 하나이다. 조선국과 패수국과의 관계를 비

유하면 전자는 평양감영(平壤監營)과 같은 것이고, 후자는 이에 딸린 각 고을과 같은 것이다.

‘소명’은 지금의 춘천(春川) 소양강(昭陽江)이요, 불이는 그 뒤에 동부여가 된 것으로 지금의 함흥(咸興)이니,

낙랑국의 전체가 지금의 평안ㆍ황해 두 도를 비롯하여 강원도ㆍ함경도의 각 일부분을 차지한 것이었다. 삼한

의 여러 나라로서 역사에 보인 것이 70여국이니, 마한은 애양(爰襄)ㆍ모수(牟水)ㆍ상외(桑外)ㆍ소석색(少石索)ㆍ

대석색(大石索)ㆍ우휴모탁(優休牟)ㆍ신분고(臣濆沽 : 臣濆活이라고도 함)ㆍ백제(伯齊)ㆍ속로불사(速盧不斯)ㆍ일화(日

華)ㆍ고탄자(古誕者)ㆍ고리(古離)ㆍ노람(怒藍)ㆍ월지(月支)ㆍ치리모로(治離牟盧 : 咨離牟盧라고도 함)ㆍ소위건(素謂乾)

ㆍ고원(古爰)ㆍ막로(莫盧)ㆍ비리(卑離)ㆍ점비리(占卑離)ㆍ신흔(臣釁 : 古釁이라고도 함)ㆍ지침(支侵)ㆍ구로(狗盧)ㆍ

비미(卑彌)ㆍ감해비리(監奚卑離)ㆍ고포(古蒲)ㆍ치리국(致利國)ㆍ염로(冉路)ㆍ아림(兒林)ㆍ사로(駟盧)ㆍ내비잡(內卑雜 :

內卑離라고도 함)ㆍ감해(感奚)ㆍ만로(萬盧)ㆍ벽비리(辟卑離)ㆍ구사오단(臼斯烏旦)ㆍ일리(一離)ㆍ불미(不彌 : 不離라고도

함)ㆍ지반(支半 : 友半이라고도 함)ㆍ구소(狗素)ㆍ첩로(捷盧)ㆍ모로비리(牟盧卑離)ㆍ신소도(臣蘇塗)ㆍ고랍(古臘)ㆍ임소

반(臨素半)ㆍ신운신(臣雲新)ㆍ여래비리(如來卑離)ㆍ초산도비리(楚山塗卑離)ㆍ일난(一難)ㆍ구해(狗奚)ㆍ불운(不雲)ㆍ불

사분야(不斯濆邪)ㆍ원지(爰池)ㆍ건마(乾馬)ㆍ초리(楚離) 등 54국을 통솔하였다. 비리(卑離)의 여러 나라는 삼국사

기 백제본기(百濟本紀)의 부여와, 백제지리지(百濟池理志)의 부리(夫里)이니, 비리는 부여 - 지금의 부여이고, ‘감

해비리’는 고막부리(古莫夫里) - 지금의 공주(公州)요, ‘신소도’는 신수두 곧 대신단(大神壇)이 있는 곳이니, 성대

호(省大號, 일명 蘇泰) - 지금의 태안(泰安)이요, ‘지침’은 지심(支潯) - 지금의 진천(鎭川) 등지요, ‘건마’는 금마

군(金馬郡) - 백제 무왕릉(武王陵)이 있는 곳이다. 이 밖에도 상고할 것이 많으나 아직 두어둔다.

변한은 미리미동(彌離彌凍)ㆍ접도(接塗)ㆍ고자미동(古資彌凍)ㆍ고순시(古淳是)ㆍ반로(半路)ㆍ낙노(樂奴)ㆍ미오야마

(彌烏邪馬)ㆍ감로(甘露)ㆍ구야(狗邪)ㆍ주조마(走漕馬)ㆍ안야(安邪)ㆍ독로(瀆盧) 등 12부(部)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

다. 미동(彌凍)은 ‘믿’으로 읽으니, 수만(水灣)이란 뜻이고, 고자(古資)는 ‘구지’로 읽으니, 반도(半島)란 뜻이고,

야(邪)는 ‘라’로 읽으니, 강(江)이란 뜻이다. 위의 12부는 신라지리지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그 유지(遺址)를

찾아보면, ‘고자미동’은 고자군(古自郡) - 지금의 고성만(固城灣)이요, ‘고순시’는 고령가야(古寧伽倻) - 지금의

상주(尙州)와 함창(咸昌) 사이에 공갈못[恭儉池]이니, 공갈은 고령가야의 촉음(促音)이요, ‘반로’는 ‘벌’로 읽으니,

별[星]이란 뜻이로 성산가야(星山加邪) - 지금의 성주(星州)요, ‘미오야마’는 미오야마(彌烏馬邪)로도 써서 ‘밈이

라’로 읽으니, 임나(任那) - 지금의 고령(高靈)이요, ‘구야’는 ‘가라’로 읽으니 대지(大地)라는 뜻으로 지금의 김

해(金海)요, ‘안야’는 ‘아라’로 읽으나, 수명(水名)으로서 지금의 함안(咸安)이다. 위의 여섯 나라는 곧 뒤에 가라

(加羅) 여섯 나라(제4장 제2절 참고)가 된 것이고, 그 나머지는 자세치 아니하나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진한은 기저(己祗 : 己抵로도 씀)ㆍ불사(不斯)ㆍ근기(勤耆)ㆍ염해(冉奚)ㆍ군미(軍彌)ㆍ여담(如湛)ㆍ호로(戶路)ㆍ주선

(州鮮)ㆍ마연(馬延)ㆍ사로(斯盧)ㆍ우중(優中)ㆍ난미리미동(難彌離彌凍) 등 12부를 통틀어 일컬음으니, 위 12부는

오직 사로가 신라인 줄을 알 수 있고, 그 밖의 각부의 연혁은 알 수 없으니, 이는 신라 말에 한학자들이 그

명사를 모두 전의 이두자를 버리고 한자로 의역하였기 때문이다. 그 자세한 것은 제4편 제4장에서 논술한 것

이다(변한 12부와 진한 12부는 책에 따라 서로 드나들어 같지 아니함).

마한이 본래 거의 압록강 동쪽 전부를 차지하였으니 따라서 낙랑ㆍ진한ㆍ변한 세 나라가 생겨 지금의 조령

(鳥嶺) 이남과 임진강 이북을 나누어 차지하였으나, 진ㆍ변 두 한은 이름은 나라로되 실상은 신ㆍ불 두 조선의

유민의 자치부(自治部)로써 마한에 대하여 조공과 납세를 끊지 아니하여 낙랑 같은 적국이 아니었다.

제 5장 삼조선 붕괴의 원인과 결과

 三神說의 파탄(破綻)

앞의 제2ㆍ3ㆍ4장에서 대강 서술한 바와 같이, 신ㆍ말ㆍ불 삼조선이 이렇게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① 삼한은 원래 천일(天一)ㆍ지일(地一)ㆍ태일(太一)의 삼신설에 의하여 인민이 ‘말한’은 천선의 대표

로, ‘불한’은 지신의 대표로, ‘신한’은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큰 우주 유일신의 대표로 신앙하여오다가, 말ㆍ불

두 한이 신한을 배반하고 각기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 삼대왕이 나란히 서서 지력(智力)으로 지위를 획득하

매, 일반 사람들이 계급은 자연적ㆍ고정적이 아니고 힘만 있으면 파괴할 수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음을 깨달

아서 삼신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음이 그 원인이고, ② 역대의 삼한이 한갓 삼신이 미신으로만 인심을 끌어갈

뿐 아니라, 매양 외구(外寇)를 물리치고 국토를 확장하여 천하가 다 그 위령에 떨게 하였는데, 이제 삼국의 신

하들도 흉노와 지나의 잇달은 침략을 저항하지 못하여 국토가 많이 떨어져나가매, 일반 사람들이 이에 제왕도

사람의 아들이요, 하늘의 아들이 아니므로 그의 성패 흥망도 보통 사람과 같음을 알고, 삼한의 신엄(神嚴)을

부인함에 이르렀음이 그 가까운 원인이니, 삼신설의 기초 위에 세운 삼한이므로 삼신설의 파탄이 생긴 이후에

야 어찌 붕괴하지 않을 수 있으랴?

 列國의 분립

삼신설의 파탄이 생겨 삼한에 대한 신앙이 추락되니, 이는 확실히 조선 유사 이래의 큰 변국(變局)이었다. 그

러므로 일부 인민들이 신인과 영웅들의 허위를 깨닫고, 왕왕 자치촌(自治村)ㆍ자치계(自治稧) 같은 것을 설립하

여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시험하였으니, 기록에 보인 증적은 진한부(辰韓部)ㆍ변한부

(弁韓部) 같은 것이 그 일종이요, 그 밖에도 역사책에 누락된 그러한 시험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신을 타파하여 우주 문제, 인생 문제 등을 올바르게 해결한 학설이 없고, 사방의 이웃은 조선보다

문화가 낮은 예ㆍ선비ㆍ흉노ㆍ왜 등 야만족들이라 진화에 도움이 될 벗이 없으며, 지나는 비록 구원한 문화를

가졌으나 거의 군권(君權)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뿐이라, 그 문자의 수입이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하게

되었다.

민중의 지력은 유치하고 옛 세력의 뿌리는 깊이 박혀 있어서, 이에 제왕의 후예들은 그 조상의 지위를 회복하

려 하고, 민간의 사납고 용감한 영웅들은 사회의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려 하며 작은 나라는 큰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고, 큰 나라는 더욱 강토를 확장하려 하여, 혹은 신수두님[大壇君]이라 일컫고, 혹은 신한[辰王]이라 일

컬으며, 혹은 말한[麻立干]이라 일컫고, 혹은 불구래[不矩內]라 일컬으며, 혹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고, 혹은

해외에서 떠왔다 하며, 혹은 태양의 정기로 생겨났다 하고, 혹은 알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전통적 미신 세력

에 의지하여 민중을 유혹 혹은 위협하니 구구한 민중 세력의 새싹이라 할 얼마간의 자치 단체가 그 정복을 받

아 스스로 사라지고, 세력 쟁탈의 싸움이 사방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의 쟁웅시대(爭雄時代)를 형성하였다.

제 4편 列國의 爭雄시대

제 1장 열국의 총론

 列國의 연대의 正誤

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ㆍ말한ㆍ불구래 등의 참람(僭濫)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열

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열국사(列國史)를 말하려면 전사(前史)에서 열국의 연

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해야겠다.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

왕(文武王) 8년(기원 668년)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9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不及九百年).”라고 한 비기(秘記)가 유행했는데,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때(문무왕 8년)에 고구

려의 연조가 8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본기(本紀)의 705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고구려 본기로 보

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13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문에, “17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

왕에 전하였다(傳之十七世孫 廣開土平安好太王).”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세손이 아

니라, 17세손이다.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그 705년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본기로

써 상고하면 고구려 건국이 위우거(衛右渠)가 멸망한 지 72년만이지마는, 북사(北史) 고려전(高麗傳)에는 막래(莫

來)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四郡)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縣)이라고 하였다. 막래는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모본(慕本)의 잘못인가?”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우박[雹]이라는 뜻이고, 신(神)이라는 뜻이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이름 ‘무휼(憮恤)’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慕本王)이 아니라 대주류

왕일 것이요,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시의 비기(秘記)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北史)가 또한 증명하

니,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안순암(安順庵 : 安鼎福) 선생이 고구려 족자(族子)인 안승(安勝)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햇수 거의 8백

년(年將八百年)”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들었음을 인정하였으나, 실은 8백을 9백으로 하

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백을 8백으로 고쳐 고구려이 향국(享國)이 705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先後)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두짐을 부끄러이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동부여ㆍ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ㆍ백제의 부조(父祖)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ㆍ백제의 형

제뻘인 가라(加羅)ㆍ옥저(沃沮)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사(前史)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ㆍ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

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

 列國의 疆域

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북쪽의 땅을 잃고, 그 북쪽

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

하지 못하여 전대(前代)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 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

어, 조선의 지리 전고(典故)가 말할 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이 한구암(韓久庵 : 韓百謙)ㆍ안순암 등 여러 선

유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退縮)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첫째는 부여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북부여이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

였다. 삼국지에 “현도의 북쪽 천 리(玄菟之北千里)”라 하였으니,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開原)

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동부여는 갈사나(曷思那)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동부여를

칠때. ‘북벌(北伐)한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 지금의 훈춘(?春) 등지가 동부여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강

릉(江陵)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

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곧 남부여다. 동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

여는 문자왕(文咨王) 3년(기원 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ㆍ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그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四郡)이다. 위만(衛滿)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의 만반한(滿潘汗), 한서지리지의 요동군(遼東

郡) 문번한(汶幡汗), 곧 지금의 해성ㆍ개평 등지이니 헌우란이 옳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니,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데,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ㆍ강원ㆍ함경 등 여러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桓因)

등지에서 찾았다.

셋째는 낙랑국(樂浪國)이다. 낙랑국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과 각각 다른,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

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그 밖에 고구려ㆍ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ㆍ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주군(州郡)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자 한다.

제 2장 列國의 分立

 東扶餘의 分立

1. 解夫婁의 東遷과 解募漱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라 부여

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

(冒頓)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경이요, 동ㆍ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년경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전사(前史)에 동ㆍ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와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

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鯤淵 : 鏡泊湖)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相) 아란

불(阿蘭弗)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

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

하더이다.’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故都)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募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

를 타고 웅심산(熊心山, 일명 阿斯山,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에 내려와서, 채운(彩雲)이 머리 위

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龍光)

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재의 아들이라 일컬

었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

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 속에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

의 집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故都)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틀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

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

부루ㆍ해모수 두 대왕이 동ㆍ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改撰)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상가)’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相)이라 썼으

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曷思那)’라 쓰지 않고 불경(佛經)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迦葉原)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帝王)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祭司長)이며, 당시의 장상(將相)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巫師)요, 복

사(卜師)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降神術)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相加)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

관엔 내우외환 같은 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삼국지에 홍수와 가뭄

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

다 - 水旱不調 五殺不登 輒歸輒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고 하였다.

천시(天時)나 인사(人事)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 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엷어져서 대단군의 지위

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

수는 해부루와 동족이며 고주몽(高朱蒙)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

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東遷)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컫고 왕위를 도모

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都城)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

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비로

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2. 南北曷思ㆍ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

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

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

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曷思國)ㆍ가슬라(迦瑟羅)ㆍ가서

라(迦西羅)ㆍ아서량(阿西良) 등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 ‘가섭원

기(迦葉原記)’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삼국사(三國史)에 보인 것이다.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沃沮)’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

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濊) 곧 읍루(挹婁)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濊族)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라 일컬었

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北沃沮)요, 남가사는 곧 남옥저(南沃沮)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ㆍ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

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豪民)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婢妾)을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가 북 ‘가시라’ -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帶素)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某甲)과 종제(從弟) 모을(某乙)이 나라

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舊都)에 웅거하여 북갈사(北曷思) 혹은 남동부여(南東夫餘)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①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ㆍ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② 옥저가 곧 갈사(曷思)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③북동

ㆍ남도의 두 갈사가 곧 남ㆍ북의 두 갈사(兩加瑟羅)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ㆍ갈사ㆍ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으로 나누고, ④강릉(江陵)을 ‘가시라’ - 가슬나(加瑟那)라 함을 신라 경덕왕

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가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혼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曷思)ㆍ가슬(加瑟)ㆍ가

섭(迦葉)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

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ㆍ북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南?)’는 말과, 주류왕(朱留王)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北伐).’는 말로써 북 ‘가시

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3. 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黃龍國)이 고구려

유류왕(儒留王)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

ㅇ리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 부사량(扶斯樑)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김의 소련령(領)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屈曲)한 송(松 : 古名 아리라)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大珠)ㆍ적옥(赤玉)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ㆍ삵ㆍ원숭이ㆍ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

에 수출하며, 성곽ㆍ궁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神誌)라 일컫

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風月)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詩歌集)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叛)하여 고

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 고구려의 일어남

1. 鄒牟王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鄒牟 : 혹 朱蒙)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召西奴)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降生)하였다 자칭

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

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立功南海 積德北山).’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천 년 이래의 유

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東漢)의 학자 왕충(王充)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

면 기원전 58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

고, 추모(鄒牟)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경 동ㆍ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

만과 같은 때일 것이다.

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長者)가, 유화(柳花)ㆍ훤화(萱花)ㆍ위화(葦花)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

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

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사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

으므로 유화의 실행을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優渤水)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解金蛙)에게 바쳤다.

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天神)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

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오도 보

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니,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鄒牟)라 하였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朱蒙)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 풀이하였으

며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莽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

릴무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의 조서(詔書)

에는 ‘중모(中牟)’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

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ㆍ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

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濊語) - 만주족 시대

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鄒牟)라고 한다.

금와왕이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

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

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 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월 대제(大祭)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

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짐승이 대소 7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오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 은밀히 오이(烏伊)ㆍ마리

(摩離)ㆍ협부(陜父)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

부여(卒本夫餘)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살이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召西奴)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延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아서, 해

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ㆍ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

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

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紇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

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라 쓰니, 중경(中京) 또는 중국(中國)이라는

뜻이었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松讓)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빠앗아 마

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濊族)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烏伊)ㆍ부분노(扶芬奴)

등을 보내어 태백산(太白山)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 : 지점 미상)을 토멸하여 성읍(城邑)을 삼고, 부위염(扶慰猒)

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사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광개토왕비문에, “동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

었다(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이에 고구려가 섰다.

전사(前史)에 왕왕 송양(松讓)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국집(李相國集)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인용한 구

삼국사(舊三國史)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沸流王松讓)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가들었는

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

에게 장가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儒留)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추모왕을

본기(本紀)에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으나, 동명(東明)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 신수두 대제

(大祭)의 이름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尊師)하므로 한몽 -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義譯)이다.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儒留王)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에 그 아들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왕위를 이

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琉璃明王) 유리(類利)이니, 유류(儒留)ㆍ유리(琉璃)ㆍ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世)라는 뜻이고 명(明)이라는 뜻이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大武神王無恤)이니, 무(武)ㆍ

주류(朱留)ㆍ무휼(無恤)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神)의 뜻인데, 이제 유리(琉璃)와 명(明)

은 시호로 쓰고, 무휼(無恤)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琉璃)

를 유류(儒留)로, 대무신(大武神)을 대주류(大朱留)로 쓴다.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帶素王)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

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都切)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

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解明)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

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怯弱)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

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 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

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흔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 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

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결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朱留 : 본기의 無恤)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

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

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老境)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兵馬)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馬兵)이고 고구려는 보병(步兵)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鶴盤嶺)의 골짜기에 복병

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

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3. 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년에 5만의 군

사로 북벌(北伐)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麻盧)와 칼을 잘 쓰는

괴유(怪由)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 번 포위를 뚫고나

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

게 되었는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

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서는 전군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하였다.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

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계제(季弟) 모갑(某甲)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南沃沮)로 나와 사냥

하고 있는 해두왕(海頭王)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南東夫

餘)이고, 종제 모을(某乙)은 고도(故都)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北東夫餘)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

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沃沮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도

북동부여이고, 예전(濊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는 남동부여이다.

4. 大朱留王의 낙랑

최씨(崔氏)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樂浪王)이라 일컬었음은 제3편 제4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崔理)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曷思國 : 남동부여)의 왕이 그 소녀를 대주류

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호

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최이가 출행(出行)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

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崔女)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이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嫡子)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

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

로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년 여름 4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曷思王 : 남동부여왕)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위 15년 여름 4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11월에 호

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소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설혹 대주류왕 4년, 남

갈사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소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

을 낳았다 할지라도, 15년에는 겨우 11살의 어린아니니, 11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滅國)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嫡母)를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 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왕(帶素王)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

한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은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

니와, 대주류왕 20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伐樂浪滅之).’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ㆍ북동부여ㆍ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百濟本紀)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

의 출처까지 틀리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니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

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沸流)ㆍ온조(溫祚)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仁

川)에, 또 한 사람은 하남(河南)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

서노를 쑥 빼고 그 편(篇) 첫머리에 비류ㆍ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 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ㆍ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부여사람 우태(優台)이므로, 비류ㆍ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近蓋婁

王)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ㆍ온조를 추모(鄒牟)의 아들이라 하였음

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ㆍ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우령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正宮)

으로 대우하고, 비류ㆍ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유류(儒留)가 그 어머니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ㆍ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

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

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

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하

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ㆍ은ㆍ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ㆍ

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8사람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 지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

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

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이라 하여 낙랑태수라 쓴 것이며,

예(濊)라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2. 召西奴가 죽은 뒤 두 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ㆍ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

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

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ㆍ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北岳)

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ㆍ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

조는 하남 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ㆍ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년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13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分漢城民).”고 한 것은 비류ㆍ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본래는 리골)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

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

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

가 알맞고 오곡이 자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

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ㆍ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졌다.

3. 溫祚의 馬韓 襲滅

백제가 마한의 봉토(封土)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산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公州)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

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리있

는 짓이냐?”하고 꾸짖었다.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周勒)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箕準)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韓氏)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箕準滅絶

馬韓人復自立爲王).”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儒留)ㆍ대주류(大朱留) 두 대왕과 같은 시대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

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제 3장 漢武帝의 침략

 漢나라 군이 고구려에 패한 사실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武帝)의 침략이 있었다.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

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 사건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지나도 제(齊)ㆍ연(燕)ㆍ진(秦)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高潮)

가 흉노 모돈(冒頓)을 공격하다가 백등(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歲幣)를 바치고 황녀(皇

女)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武帝)에 이르

렀다.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

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

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史記 平準書도 같음)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郡)을 설치하였으니, 곧 연(燕)과 제(齊) 지방

이 크게 소란해졌다(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마침내 조선을 평정

하여 사군(四郡)을 만들었다(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遂定朝鮮爲四郡).”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衛氏)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

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

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郡縣)이라 하여 고구려와 9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 “한나라 무제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남려왕(南閭王) 등이

모반하여, 우거가 28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滄海君)으로

만들었다(漢武帝元朔元年 濊君南閭等叛 右渠率二十八萬口 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君).”고 하였고, 한서 본기(本紀)에,

“원삭 3년 봄에 챙해군을 폐지하였다(元朔三年春罷滄海君).”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公孫弘傳)에는, “공손홍

이 여러 번 간하여……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朔方)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上乃許之).”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

화지(食貨志)의 본문을 합쳐,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

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

이 다음과 같다.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濊)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남ㆍ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혼춘이요, 또 하

나는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2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

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內地)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

여 생긴 위설(僞說)이니,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임금이 아니며,

2)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에 명백히,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을 쳤다.”고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년인데, 13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主父偃列傳)의 원광(元光) 원년 엄안(嚴安)의 상소에, “지금 예주(濊州)를 공략하여 성읍(城邑)을 설치

하고자 한다(今欲……略濊州 建治城邑).”고 하였는데,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

요,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6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6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년이요, 원삭 3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

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

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滿傳)에 우

거의 한에 대한 관계, 진번진국(眞番辰國)의 옹알(壅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

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으랴?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

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衛氏)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濊傳)에 기록된 불내예왕(不耐濊王)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

(妻祖)요,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眞外曾孫)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이다.

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崔理)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의 동부

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당장의 압

박의 고통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이 없었으랴.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

랑의 여러 소국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

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漢)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衛氏)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

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사기 조선왕만전(朝鮮王滿傳)에는, “진

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고 하였다.

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

여 사정을 고하니,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燕齊) - 지금의 직예(直匠)ㆍ산동(山東)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한

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이같은 9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爲中國諱恥).’하는 것이, 공구(孔丘)의 춘추(春

秋)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宗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王肅傳)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와 무제(武帝)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孝景本

紀)와 무제본기(武帝本紀)를 삭제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宮刑)에 처해졌다.”고 하였으니,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

지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반고(班

固)의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하여, 멸(滅)자를 천(穿)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

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光武)와 같은 시대가 되고, 지나사의 낙랑 기사

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 漢武帝의 衛氏 侵滅

한무제가 9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

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이에 위씨(衛氏)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王朝)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

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

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涉河)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

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國威)로 위협하고, 금백(金帛)

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좇지 않았다.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

는 사자 우거의 부왕(副王)을 찔러 죽이고 달아나,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

리를 하니,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동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하였다.

섭하가 임지(任地)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우거가 전의 일(副王의 피살)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

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보명 5만으로 요수(遼水)를 건

너 패수로 향하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병선 군사 7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列水)로 들어가서 우

거의 서울 왕검성(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을 좌우에서 협격(挾擊)하게 하였는데, 양복은 열구(列口)

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衛山)을 보내, 금백(金帛)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

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軍中)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거는, “태

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고 하였고, 한의 장수는, “태자가 1만

의 군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

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路人)ㆍ한음(韓陰)ㆍ삼(參)과 대장 왕겹(王唊)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

고,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한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衛山)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

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全權)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많

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로 하여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무제는, “돈

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君臣)의 항복을 받지 못했다.”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한음ㆍ왕겹ㆍ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은ㆍ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이듬해 여름 삼(參)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삼

을 치니, 우거의 왕자 장(長)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最)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

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ㆍ임둔ㆍ현도ㆍ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

이때의 사살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거기에는 한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

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無帝本紀)의 화(禍 : 앞절에 보임)로 부형(腐刑)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이를테면, “위만은 병위(兵威)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고 하여 위만이 병위

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히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遺衛山 因兵威 往論右渠).’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곧 윗글의 ‘병위ㆍ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

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했음을 표시한 것이고,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

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봉후(封侯)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路人)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 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對漢 관계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ㆍ임둔ㆍ현도ㆍ낙랑 네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사군의 위치 문

제는 삼한(三韓) 연혁의 쟁론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만반한ㆍ패수ㆍ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등지(이는 제2편 제2장에 자세히 설명했음)일

뿐 아니라, 당시에 지금의 개원(開原) 이북은 북부여국(北扶餘國)이고, 지금의 흥경(興京) 이동은 고구려이고, 지

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

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백출(百出)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것이다.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패수ㆍ낙랑 등은 다 ‘펴라’로 읽을 것

으로서,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淸州)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

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패수(浿水)의 패(浿)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

고, 수(水)는 ‘펴라’의 ‘라’의 임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 밖에 낙랑ㆍ평양ㆍ평나(平那)ㆍ백아강(百牙

岡)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

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ㆍ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을 대신하였으니, 지금

의 해성(海城)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혹은 安地 혹 安市라 한 것)인데,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四郡)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므로, “한이 일어나……물러나서 패

수로 경계를 삼았다(漢興……退以浿水爲界).”느니, “위만이……동으로 달아나 새외(塞外)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

(滿……東走出寒 漢浿水).”느니 하였으며, 진번(眞番)이 비록 신ㆍ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한은 이

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하였다. 사기의, “처음에 전연(全燕)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略取)하여 예속시켰다(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고 하고, “위만은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

(滿……稍役屬眞番朝鮮).”고 한 진번조선은 신ㆍ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진번ㆍ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

였다(眞番臨屯 皆來服屬).”고 하고,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

見天子).”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리킨 것으로써,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故事)

를 설한 것이다.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薩水)의 명칭이 청천강(淸川江)이 되었으니,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

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隋)나라 군사를 깨뜨렸다.”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헌

우란 패수,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은 진번과 한 군(郡)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서 본기(本紀) 무제(武帝) 원봉(元封)3년 진번ㆍ

임둔의 주(註)에 ‘무릉서(茂陵書)에 진번의 군치(郡治) 삽현(霅縣)은 장안(長安)에서 7,640리…임둔의 군치 동이현

(東縣)은 장안에서 6,138리(茂陵書 眞番郡治 霅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臨屯郡治 東縣 去長安 六千一百三千八

里).’라 했는데,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저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가 죽고 5년

에야 천자가 비로소 후토(后土)를 제사지냈다(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하고,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원정(元

鼎) 4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元鼎四年……始立后土).”고 하였는데, 원정 4년은 기원전 113년이요,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그 5년 전인 원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이니, 상여는 원봉(元封) 3년(기원전 08년) 진번ㆍ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10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10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僞書)인 동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ㆍ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僞證)임이 의심

없으며,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郡縣志)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郡志)가 있으므로, 이를

일근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ㆍ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위략의 만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ㆍ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군 번한현(番汗縣)의 패수(沛水)임이 이미 확실한 증

거가 있으니, 지리지의 현도ㆍ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

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ㆍ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考據)가 비록 많으나, 하나도 그 정곡(正鵠)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假定)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

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 - 북옥저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 -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한무제

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

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구

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지원전 108년쯤,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여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

어졌으므로 진번ㆍ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도ㆍ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

르렀다.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

(濊傳)에, “소제(昭帝)가 진번ㆍ임둔을 폐지하여 낙랑ㆍ현도에 합쳤다(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菟).”고 하였음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지 옥저전(沃沮傳)에는

처음에 옥저로 현도성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不耐濊王)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라왕을 가리킨 것이니, 두 동부여와 낙랑국

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다

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비로소 요동 -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현

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

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海城) 등지일 것이다.

어찌하여 진번ㆍ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ㆍ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商民)이 왕래하여 물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ㆍ낙랑 두 군

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證跡)을 알

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수백 년 동안 두 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進取)를 방해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

랑(南樂浪)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을 북낙랑(北樂浪)이라 하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

는 동시에 삼국사기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雄視)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안(斷癌)하였으나, 고구려와 경제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컫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

으랴?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漢代)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 낙랑의 군치(郡治)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

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다.

제 4장 鷄立嶺 이남의 두 새 나라

 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鳥嶺 : 새재)이다. 지금 문경읍(聞慶邑)의 북산(北山)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재’이니, ‘저릅’은 삼(麻)의 옛 말이다. ‘저릅’을 이두자의 임으로는 ‘계립(鷄立)’이라 쓰고,

뜻으로는 ‘마목(痲木)’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태백산(太白山 : 奉

化의 태백산)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동과 남으로 바

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列國)의 당시에 네 부여(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 함)가 분립하

낟,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四郡)이 된다, 백제

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嶺) 이남은 그런 풍진(風塵)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진한ㆍ변

한의 자치령 수립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ㆍ보리ㆍ기장ㆍ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ㆍ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

의 봉지(奉地)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節制)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① ‘신수두’의 건설과 ②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① 해마

다의 조알(朝謁)과 ②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할 뿐이었는데,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新羅國)이 되고,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加羅) 연맹국이 되어,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 加羅 여섯 나라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3편에 제4장에 말하였거니와,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가라’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물을 막아 큰 소를 만

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加

羅)’,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야(伽倻)’ 등으로 썼으니, 야(耶)ㆍ야(邪)ㆍ야(倻)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가라’를 혹 ‘관국(官國)’이라 썼으니, ‘관(官)’은 그 음의 초성ㆍ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국(國)’은 그 뜻의 초성ㆍ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기원 42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自治部員)ㆍ아도

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신

귀간(神鬼干)ㆍ오천간(五天干) 등이 지금의 김해읍(金海邑) 귀지봉(龜旨峰) 위에 모여 대계(大稧 : 稧는 당시 自治會

의 이름)를 베풀고, 김수로(金水露) 6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김수로는 제1가라,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었으니, ‘신’은 크다는 뜻이요, 첫째는 우두머리라는 뜻이

다. ‘신가라’는 전사(前史)에 금관국(金官國)이라 쓴 것이 옳은데, 가락(駕洛) 혹은 구야(狗耶)라고 썼으니, 이 둘

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하는 것은 옳으나,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

지 않다.

둘째는 ‘밈라가라’니, 지금 고령(高靈)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이두자로 ‘미마나(彌摩那)’ 혹은 ‘임

나(任那)’라 쓴 것으로서,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大加羅) 혹은 대가야(大加耶)라

기록하였다.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지금 함안(咸安)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안라(安羅)’, ‘아니라(阿尼羅)’

혹은 ‘아니량(阿尼良)’이라 기록한 것인데,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阿尸羅)’가 되고아시라가 다시 와

전하여 ‘아라(阿羅)’가 되었다.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지금의 함창(咸昌 : 尙州郡)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古寧)

이라 기록한 것인데, ‘고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이 그 자리이다.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ㆍ연잎이 오히려 수천 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

니, 이조 광무(光武) 시절에 총신(寵臣) 이채연(李采淵)이 논을 만들려고,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

다.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星州)다. 이두자로 ‘성산

가라(星山加羅)’ 혹은 ‘벽진가라(碧珍加羅)’로 기록한 것이다.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지금 고성(固城)의 중도(中島)이다.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라 ‘고자가라

(古資加羅)’라 기록할 것인데,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小加耶)’라 일컬었다.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각각 독립국이 되

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六加羅) 본기(本紀)를 빼고 오직 신라본기와 열전(列傳)

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

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加耶)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여 쓰고,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였

다.

 新羅의 건국

종래의 학자들이 다, ‘신라사가 고구려ㆍ백데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위찬(僞撰)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

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술하려 한다.

신라의 제도는 6부(部) 3성(姓)으로 조직되었는데,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ㆍ

돌산고허(突山高墟)ㆍ무산대수(茂山大樹)ㆍ자산진지(觜山珍支)ㆍ금산가리(金山加利)ㆍ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의 여섯

마을이었는데, 신라 건국 후 제3세 유리왕 9년(기원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곧 알천

양산은 양부(梁部)라 하고 성을 이(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粱部)라 하고 성을 최(崔)로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粱部 : 一名 弁粱部)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하였으며, 자산진지는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漢祗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習比

部)라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고 한다.

3성은 박(朴)ㆍ석(石)ㆍ김(金) 세 집이니, 처음에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아래 나정(羅

井) 곁에 말이 끓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이라 한다.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는데,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나

이 13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居西干)을 삼았다.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貴人)

의 칭호라고 한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57년)이고,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신라의 동쪽에 왜국(倭國)이 있고,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는데, 그 국왕이 여국왕(女

國王)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

리라고 하니,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그 금궤가 금관국

의 해변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포구에 이르

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열고 보니까,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이때가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이었는데,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고 금궤가 와 닿

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昔)이라 하니, 석씨의 시조다.

석탈해(昔脫解) 9년(기원 65년)에 금성(金城 : 신라의 서울, 곧 慶州)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

므로,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閼智)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궤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의 출생을 신이(神異)하게 장식한 것이거니

와, 다만 6부ㆍ3성의 사적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만음은 가석한 일이다. 이를

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ㆍ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그 뒤 한문화(漢文化)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미추홀(彌鄒忽)’ 혹은 ‘매초홀(買肖忽)’이라 쓰

던 것을 나중엔 인천(仁川)이라 고친 따위인데, 이제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突山高墟) 등 한자로 지은 여

섯 마을의 이름이 6부의 본 이름이고, 양부(梁部)ㆍ사량부(沙粱部)……등 이두자로 지은 6부의 이름이 여섯 마

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불교가 성행

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예를 들면

소지왕(炤智王)을 혹 비처왕(毘處王)이라 일컫는데,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마는,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유리왕(儒理王)을 혹 세리지왕(世利智王)이라 일컫는

데, 유리나 세리나 다 ‘누리’로 읽은 것이지마는,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

쳐 만든 이두자이다. 탈해왕(脫解王)도 그 주에 일명 ‘토해(吐解)’라 하였는데,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

해’로 읽을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토해(吐解)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불경에 해탈(解脫)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脫)로

고쳐 만든 것이다.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탈출(脫出) 혹은 해출(解出)의 뜻이 없인,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附會)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3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어찌하여 3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

가 되지 않고, 박씨 시조 이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석ㆍ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는 석씨, 하나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昔脫解)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석씨(昔氏)가 되었으며, 김알지(金閼智)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

으니, 계(鷄)자변을 따서 해씨(采氏)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서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

을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破字匠)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

장사(侍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

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신라가 여러 나라 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백 년 후에야 비로소 억

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先代史)를 꾸몄는데, 그나마도 궁예(弓裔)ㆍ견훤(甄萱) 등의 병

화(兵火)에 다 타버리고,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ㆍ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는 진한 6부의 총칭이 아니고, 6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

라’로 읽을 것이요, ‘새라’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沙喙

: 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하였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 들판이기 때문에 일

컬은 이름이다.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이다.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이고, 고허촌은 곧 사량부

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공(公)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自治會)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

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부의 총왕(總王)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ㆍ사로(斯盧)ㆍ사라(斯羅)ㆍ서라(徐羅) 등으로 쓴 것이

다.

3성의 박씨뿐 아니라, 석씨ㆍ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3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

(三神說)에 의방(依倣)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년(기원 65년)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嬰兒) 김알지를 주웠

다고 하였으나, 파사왕(破娑王) 원년(기원 80년)에는 왕후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 : 추

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의 딸이라 하였으니,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許婁)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박ㆍ석ㆍ김 3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혼(聯婚)하는 거족(巨族)이었는데, 같

이 의논한 끝에 6부 전체를 가져 3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

제 5편 高句麗 전성시대

제 1장 기원 1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세기 이후로 기원 3,4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압록강 이남 곧 중부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부여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일 별로 없고,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대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된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史蹟)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 고구려 대 支那의 관계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漢)과 다투더니, 기원 1세기경에 한의 외족(外族)에 왕망

(王莽)이라는 괴걸(怪傑)이 나와서, ①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② 한문화(漢文化)로 세계

를 통일하여 일조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

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

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기실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민중에게는 한때, ‘요역(徭役)을 면제하

고 부세(賦稅)를 감해준다(省徭役 薄賦稅)’하는 6장의 혜정(惠政)으로 고식적(姑息的)인 편안을 주다가, 오래지 않

아 다시 옛 규정을 회복하여 폭(暴)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

고는 일컬을지언정,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답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

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정전설(井田說) 발생의 경과의 왕망의 약사(略史)를 말하기로 한다. 정전설은 지

나의 춘추시대(春秋時代) 말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원전 5세기경)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專權)을 하여, 사치가 극에 이르

고,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유약(有若)ㆍ맹가(孟軻 : 孟子)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

균설(土地平均說)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의 하(夏)ㆍ상(商)ㆍ주(周) 3대가

다 정전제(井田制)를 행하였는데, 정(井)자 모양의 9백 묘(畝)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백 묘씩

을 경작하고, 그 나머지 1백 묘는 공전(公田)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公用)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백 묘에서 소출의 10분에 1을 공세(公稅)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什一稅)라 일컬었다.”고

하고, “선대의 성왕(聖王)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정전에 관한 문적(文籍)까지 없애버렸다.”고 하였다.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인하는 바이니, 지나도 그 태고

에 균전제도(均田制度)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나와, 그들(有若ㆍ孟軻 등)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

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八家同田)이 아니고 사가동전(四家同田)이니,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器字形)의 고전(故田)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그 세제는 10분의 1을 취하는 ‘십일

세(什一稅)가 아니고, 20분의 1을 취하는 입일세(廿一稅)였다.’ 맹자가, ‘맥(貊 : 貊 곧 濊貊)은 20에서 1을 취한

다(貊 二十取一).’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분의 1의 세재를 10분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

는,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遺制)

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夷貊)이라 일컫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

(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십일(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맥(大貊)ㆍ소맥(小貊)이다(少

乎什一者 大貊小貊也).”라고 하고, “맥(貊)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百官)ㆍ유사(有司)

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에 1만 받아도 족하다(貊五穀不生 唯黍生之……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

足).”고 하였다. 후한서 부여ㆍ옥저 등의 전(傳)에,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土地平敞……肥美……宜五穀).”고 하였고, 위략의 부여ㆍ고구려 등의 전에는, “그 벼슬에는 상가(相加)ㆍ대로

(對盧)ㆍ패자(沛者) 등이 있다(其官 有相加對盧沛者).”라고 하였으니, 맹씨(孟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하우(夏禹)

의 정전(井田)이 조선(본문의 州愼)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

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

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財

富)를 독점하여,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세에 망하고, 8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漢)나라가

일어나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土豪)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인구

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

나, 2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巨農)과 대상(大商)이 발생하여, 부자는 여러 고

을의 땅을 가진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

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그래서 혹은 한전의(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혹은 주례(周禮)란 글을 지어,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

한 주공(周公)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帝室)은 쇠약해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대대로 대사마(大司馬)ㆍ대장군(大將軍)

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왕망이 대사마ㆍ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平帝)와 유자영

(孺子嬰)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는데, 왕망은 실로 앞에서 말한 ① 정

전제의 실행 ② 한문화(漢文化)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자였다. 그래서 주례(周禮)를 모방하

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區劃)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인

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ㆍ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

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臣僕)하였는데,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單于) 낭아지사(囊

牙知斯)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知)’라 하고, 흉

노란 ‘흉(匈)’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降奴)’라 고치고, 선우란 ‘선(單)’자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服于中國)

이란 뜻으로 ‘복우(服于)’라 고치라.’고 하였다. 낭아지사가 처음엔 듣지 않다가 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匈奴單于) 낭아지사의 인문(印文)을 버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降奴服于知)’란 인문을 받았

다.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部衆)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 되지 않

을까 하여, 그 부중을 12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服于)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고구려현(高句麗縣)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小水), 지금의 태자하(太

子河)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ㆍ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高句麗侯)라 일컬은 것이었다.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징발을 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

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왕망의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왕망이 대장군 엄

우(嚴尤)를 보내 그 고을의 후(侯) 추(騶)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長安)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

하니, 고구려현을 하구려현(下句麗縣)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漢化的) 시설을 재촉하였다. 이에 조선 여러 나라, 북부여ㆍ고구

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攻守) 동맹을 맺고,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 조선

ㆍ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

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떼를 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한나라를 중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儒留王) 31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ㆍ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로 하

였으나, 이는 삼국사기의 작자가 ① 고구려 고기(古記)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公案)이 있음을 보고 고기의 연대

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②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

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

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에까지 갔다고 함은, 저들 사대노(事大奴)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

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高句麗侯騶)’ 5자를 ‘아장연비(我將延丕)’의 4자로 고친 것이다(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

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일듯도 하다.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 년 전 인물이고,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설혹 참말로 연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ㆍ문자ㆍ종교ㆍ정치ㆍ풍속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한문화(漢文化)로 지배

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

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한나라의 유고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

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조선의 인명ㆍ지명 등 명사(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

니,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漢人)이고,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요, 고구려(高句麗)는 그 이두자인데,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句麗) 혹은 고구려(高句麗)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

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降奴)’라 ‘하고려(下高麗)’라 함이랴?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 鮮卑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컫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지금의 몽고 등

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內外興安嶺)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2편 제3장에서 말하였거니와,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는 ‘오

환(烏桓)’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

(邑落)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富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

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자(名子)로 성을 삼으며,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하고, 늙은 사

람을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信標)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扶芬奴)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부분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巢穴)을 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

다. 오환은 한의 무제(武帝)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며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

ㆍ안문(雁門)ㆍ대군(代郡) -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直匠省)ㆍ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

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뒤 소제(昭帝)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霍光)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흉노의 호연제선우(壺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한이 3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그 참혹함이 또한 심하였다.

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어지러워지니,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이 이를 기회로 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

평성(襄平城)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홀(烏列忽)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

나를 치니,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遼東郡)을 지금의 난주(灤州)에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蔡彤)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금백(金帛)으로 선비

의 추장(酋長) 편하(偏何)를 달래어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歆志濆)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

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마다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ㆍ선비ㆍ오환 세 나

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신(侍臣) 두로(杜魯)

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구가 말

하기를,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하였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

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페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

가 될 것이지마는, 모보노앙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

왕 3년(기원 55년)에 요서와 10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

열전(東夷列傳)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

(蔡彤)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 다 다시 항복하였다.”고 하였으나, 세출전(歲出錢) 2억 7천만 전이 채동전(蔡彤

傳)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歲貢)이요, 은신(恩信)이 아니다.

제 2장 太祖ㆍ次大 두 대왕의 文治

 太祖ㆍ次大 두 대왕의 世系의 잘못

왕조의 세계(世系)에 틀리고 안 틀린 것은 사학가가 아는 체할 것이 아니지만, 고대사는 세대의 사실이 매양

왕조의 보첩(譜牒)에 딸려 전하므로, 그 틀리고 안 틀림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먼저 태조왕의 세계를 말

하기로 한다.

전사(前史)에 태조왕을 유류왕(儒留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 대주류왕의 조카라 했으니,

유류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연대가 줄어진 동안에 든 제와이고, 광개토경호태왕(光開土境好太王)의 16대조이

니, 모본왕(慕本王)에게는 3대조가 될 것이요, 태조왕에게는 4대조가 될 것이다. 그러니 유류왕을 태조왕의아

버지인 재사의 아버지로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면 속인 기록이다. 재사는 그 벼슬 이름이 고추가(古鄒加)

요, 고추가는 곧 ‘고추가’를 이두자로 기록한 것이다. ‘고주’는 묵은 뿌리[古根]란 뜻이요(지금 속에어도 묵은 뿌

리를 ‘고주박’이라 함) ‘가’는 신(神)의 씨란 뜻이로, 당시 5부(部) 대신의 칭호가 된 것이니, ‘고주가’는 당시 종

친 대신의 벼슬 이름이다(지금의 속어에도 먼 동족을 ‘고죽지 먼 등그러기’라 함). 재사가 ‘고주가’의 벼슬을 가졌으

므로 종친 대신임이 분명하고, 후한서나 삼국지에, “처음에는 연나(涓那)는 왕 될 권리를 잃었으나 그 적통(嫡

統) 대인(大人)이 오히려 고추가라 일컬어 종묘(宗廟)를 세움을 얻었다.”고 하였으나 연나는 서부(西部)의 이름이

고, 계나(桂那)는 중부(中部)의 이름이니,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중부가 주가 되고 4부가 이에 복속하였으므로,

어느 임금 때에도 중부를 두어두고 서부인 연나에서 왕이 나왔을 리가 없으니, 이는 태조왕이 연나의 우두머

리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서, 왕이 되고 모본왕의 태자가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의 아들로서 물러나 연나

의 고추가가 되었음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본기에는 태조왕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들어가 왕위를

이은 이가 없고, 광개토경호태왕의 비에 대주류왕이 그 직조(直祖)로 씌어 있으니,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세손이 될 것이다.

이제 또 차대왕(次大王)의 세계(世系)를 말하고자 한다. 전사(前史)에 차대왕은 재사의 아들이요, 태조왕과 한

어머니 아우라 하였으나 태조왕 당시에 차대왕은 왕자라 일컬었으니,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우라면 어찌 왕제

(王弟)라 아니하였는가? 현재의 왕의 아들은 아니지마는 전왕의 아들이므로 또한 왕자라 일컬었다면 재사가

왕의 아버지요 왕이 아니니, 왕부(王父)의 아들도 왕자라 일컬은 예가 있는가? 태조왕이 즉위할 때에 나이 겨

우 7살이요, 생모되는 태후가 섭정하였으니, 이때에 재사가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여

자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7살된 아들에게 왕위를 내주고, 아내가 섭정함에 이른 것인데, 그 뒤

에 어찌 다시 굳세어져서 차대왕과 신대왕(新大王)과 인고(仁固)의 3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재사가 정치상

에는 싫증이 났으나,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강하였다 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6살이었

으니, 태조왕은 19년이 그가 난 해요,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살이었으니, 태조왕 37년이 그가 난

해다. 태조왕 원년에 많이 늙은 재사가 19년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20년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대개 차대왕ㆍ신대왕과 인고 세 사람은 태조왕의 서자이고,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

(莫勤)ㆍ막덕(莫德) 두 사람은 태조왕의 적자이므로,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왕자 시대의)의 전천(專擅)을

미워하였으나,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고,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

에 막근 형제는 살해하였으나,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들로 기록

한 것이 실록(實錄)이요,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본기(本紀)에 태조왕의 소자(小子)를 어수(於漱)라 하고 이름을 궁(宮)이라는 하였으나, 어수는 이두문으로 ‘마

스’라 읽을 것이고, 궁(宮)이라는 뜻이다. 전자나 후자가 둘 다 태조왕의 이름이니, 어수는 소자이고, 궁은 이

름이라고 나눌 것이 아니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수성으로 읽을 것인데, 더러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짚몽둥이’를 가리키는 말이요, 태조왕을 전사(前史)에는 시호라고 하였으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시호법을

쓰지 아니하고 생사에 그 공적을 찬양하여, ‘태조(太祖)’ 혹은 ‘국조(國祖)’라고 하는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차

대왕은 그 공적이 태조왕 다음 간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다.

 太祖王ㆍ次大王 시대의 ‘선배’제도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

(皀衣 : 다음에 자세히 설함)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ㆍ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서’의

음을 취한 것이고, 인(人)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 ‘선배’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

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활

도 쏘며, 혹은 깨끔질도 하고, 혹은 태껸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여

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일컫고, ‘선배’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

여 지방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먹으며, 앉으면 고사(故事)

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나아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길을 닦거나,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皀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 - ‘두대형(頭大兄)’ 혹은 ‘태대형

(太大兄)’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 - ‘대형(大兄)’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小兄 : 본래의 말은 상고할 수

없음)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과 같이 영광스러운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드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

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骨品 : 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

였지마는,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지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在家和尙)이란 것이 곧 고구려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

화상(在家和尙)은 화상(和尙 : 중)이 아니라 형(刑)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 : 고려도경의

저작자, 지나 宋人)이 다만 지나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라 일컬은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

상을 형벌받은 사람이라 억지의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하여 재가화상이란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松都 : 開城)의 수박(手拍)이 곧 ‘선배’의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

하였다.

 太祖王ㆍ次大王 때의 제도

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모든 작은 나라들이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규모가 초창이라 나라의 체제를 채

갖추지 못하였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차대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제도

가 대개 왕검조선(王儉朝鮮)이나 삼부여(三扶餘)의 것을 참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고, 그 뒤 대(代)마다

다소 변경이 있었으나, 대개 차대왕이 마련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신ㆍ말ㆍ불’ 삼한(三韓)의 제도

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세 사람을 두었으니, 가로되 ‘신가’ㆍ‘팔치’ㆍ‘발치’다. ‘신가’는 태대신(太大臣)이란 뜻

이니, 이두자로 ‘상가(相加)’라 쓰고, ‘신가’의 별명이 ‘마리’로 머리[頭]란 뜻이니, 이두자로 대로(對盧) (대는 옛

뜻으로 마주)라 쓰고, ‘신가’나 ‘마리’를 한문으로는 국상(國相) 혹은 대보(大輔)라 썼다. 팔치는 ‘팔꿈치(肱)’란 뜻

이니, 이두자로 ‘평자(評者)’라 쓰는데, 한문으로는 ‘좌보(左輔)ㆍ우보(右輔)’라 썼다. 위의 세 가지를 만일 한문

으로 직역하자면 ‘두신(頭臣)’ㆍ‘굉신(肱臣)’ㆍ‘고신(股臣)’이라 할 것이지마는, 글자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

하여 ‘대보ㆍ좌보ㆍ우보’라 했다.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 등의 책에 혹

앞의 것을 좇아 ‘대로(對盧)ㆍ패자(沛者)ㆍ평자(評者)’로 기록하고, 혹은 뒤의 것을 좇아 ‘대보ㆍ좌보ㆍ우보’라 하

였는데,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이두와 한역(漢譯)의 이동(異同)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

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을 만들었다.”

“패자(沛者)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

전국을 동ㆍ서ㆍ남ㆍ북ㆍ중 5부(部)로 나누어 동부는 ‘순라’, 남부는 ‘불라’, 서부는 ‘열라’, 북부는 ‘줄라’, 중

부는 ‘가우라’라 하니, 순나(順那)ㆍ관나(灌那)ㆍ연나(椽那)ㆍ절나(絶那)ㆍ계안나(桂安那)는 곧 ‘순라ㆍ불라ㆍ열라ㆍ

줄라ㆍ가우라’의 이두자인데, 관나의 ‘관(灌)’은 뜻을 취하여 ‘불(灌은 본래 부을관)’로 읽을 것이고, 그 별명인

‘비류나(沸流那)’의 비류(沸流)는 음을 취하여 ‘불’로 읽을 것이니, 지나사의 ‘관나(灌那)’는 곧 고구려의 이두자를

직접 수입한 것인데 삼구가기에는 관(灌)을 관(貫)으로 고쳐 그 뜻을 잃었다. 그 밖의 순(順)ㆍ연(涓)ㆍ절(絶)ㆍ

계(桂)의 네 나(那)는 다 음으로 쓴 것이니, 중부(中部)는 곧 ‘신가’의 관할이요, 동ㆍ남ㆍ서ㆍ북 네 부는 중부에

딸려 각각 ‘라살’이란 이름의 높은 관리를 두었는데, 이것을 이두자로 ‘누살’이라 쓰고, 한문으로 ‘도사(道使)’라

썼다. 도사는 ‘라살’ 곧 누살(耨薩)이니 도사의 도(道)는 ‘라’의 의역이요, 사(使)는 음역인데, 신당서에, “큰 성

에는 누살을 두니 당(唐)의 도독(都督)과 같고, 그 밖의 성에는 도사를 두니 당의 자사(刺史)와 같다.”고 하였음

은 억지의 판단이다. ‘신가’는 정권뿐 아니라 내외 병마(兵馬)를 광장하여, 권위가 대단해서 대왕과 견줄 만하

나, 대왕은 세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높은 자리에 있고, ‘신가’는 3년마다 대왕과 4부의 ‘라살’과 그 밖의 중요

한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고 적당한 이를 골라 맡겼고, 공적이 있는 사람은 중임을 허락하였다.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왕왕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었다. 5부는 다시 각각 5부로 나누고 부마다 또 3상(相)ㆍ5경

(卿)을 내고, 벼슬 이름[官名] 위에 부의 이름을 더하여 구별하니, 이를테면 동부에 속한 ‘순라’는 ‘순라의 순

라’이고, ‘불라’는 ‘순라의 불라’이며,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으며, 동부의 ‘신가’는 ‘순라의 신가’라 일컫고, 남

부의 ‘신가’는 ‘불라의 신가’라 일컫고,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았다.

이 밖에 ‘일치’라는 것은 도부(圖簿)와 사령(辭令)을 맡아보는데, 이두자로 ‘을지(乙支)’ 혹은 ‘우태(優台)’라 쓰

고, 한문으로 주부(主簿)라 쓰며, ‘살치’라나 것은 대왕의 시종이니 이두자로 사자(使者)라 쓰고, 그 밖의 중외

대부(中畏大夫)ㆍ과절(過節)ㆍ불과절(不過節) 등은 그 음과 뜻과 맡은 직무를 알 수 없다. 삼국지, 후위서(逅魏

書), 양서(梁書), 후주서(後周書), 당서(唐書) 등에 12급(級)의 벼슬 이름을 실었으나, 조선어를 모르는 지나의 역

사가들이 그 전해들은 것을 번역한 것이므로, 삼국지에 주부 이외에 또 우태를 실은 것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모른 때문이고, 신당서에 누사(樓榭) 이외에 또 누살(耨薩)을 실은 것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임을

모른 때문이다. 통전(通典)에 고추가(古鄒加)를 빈객(賓客) 맡은 자라고 한 것은 다시 고구려의 종친 대관(宗親大

官)인 고추가가 외교관 된 것을 보고 마침내 고추가를 외교관 벼슬로 잘못 안 것이요, 구당서(舊唐書)에, “조의

두대형(皁衣頭大兄)이 3년만큼씩 바뀐다.”라고 하였음은 ‘선배’의 수석을 대신의 수석으로 잘못 안 것이다.

제 3장 太祖ㆍ次大 두 대왕의 漢族 驅逐과 옛 땅 회복

 漢의 국력과 東侵

모본왕(慕本王)이 한때 요동을 회복화였음을 이미 제1장에서 말하였거니와, 모본왕이 살해된 뒤에 태조왕이 7

살에 즉위하여 국내의 인심이 의아해 하므로 요서에 10성을 쌓았으나, 이때에 한(漢)의 부강이 절정에 이르러

지나 유사 이래의 일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장 반초(班超)가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어, 지금 서아시아의

거사(車師)ㆍ비선(鄙善) 등의 나라를 토멸하고, 지중해(地中海)에 다다라 대진(大秦), 지금의 이태리(伊太利 : 이탈

리아)와 소식을 통해서 피부가 희고 몸이 큰 인종과 양피지에 쓰는 해행문자(蟹行文字 : 게가 기어가듯 옆으로 써

나가는 서양글자)의 이야기가 후한서에 올랐고, 두헌(竇憲)이 5천여 리 원정의 군사를 일으켜, 지금 외몽고 등지

에 나아가 북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북흉노가 흑해(黑海)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東) 고트 족(族)을 압박하여, 서

양사상(西洋史上)에 민족 대이동의 시기를 이루고 이로부터 2백여 년의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체를 뒤흔

드는 원인을 이루었다. 한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예사 땅이라 하여 영구히

내어놓으랴? 어찌 고구려나 선비에게 영구히 2억 7천만의 굴욕적 세폐(歲幣)를 바치고 말랴? 이에 세폐를 정

지하고 경기(耿蘷)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6현을 다시 빼앗고, 경기로 요동태수를 삼아 동쪽 침

략할 기회를 기다렸다.

 王子 遂成(次大王)의 遼東 恢復

후한서에는 당시 한을 침략한 중심 인물을 잘못 알았으나, 실은 태조왕은 당시 고구려에 군림한 제왕일 뿐이

고,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인 왕자 수성(遂成)이 도맡았었다.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요

동을 침략하여 빼앗는 동시에 고구려를 침노하매, 고구려는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被動的) 지위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의 변경을 잠식하매, 한이 이에 반항하

는 피동적 지위에 있었는데, 요동 회복의 전쟁은 기원 105년에 비롯하여 121년에 마치니, 전후 17년이었다.

이 전쟁의 초년, 기원 105년은 왕자 수성의 나이가 34살이었는데, “고구려가 비록 땅의 넓이와 인구의 수는

한에 미치지 못하나, 다만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

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平原廣野)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여,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

에 이를 격멸해야 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장기의 소란작전을 한에 대한 전쟁의 방략으로 정하고, 정예한 군

사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新昌)ㆍ후성(候城) 등 여섯 현(縣)을 쳐서 수비병을 격파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그 뒤

에 예와 선비를 꾀어서 해마다 한의 우북평ㆍ어양ㆍ상곡 등지를 잇달아 침략하여, 한은 17년 동안 인축(人畜)

과 재물의 소모가 대단하였다.

기원 121년 정월에 한의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군수(玄

菟郡守)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에게 명하여 유주(幽州) 소속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 하였다. 이

에 수성이 태조왕의 명령을 받아, ‘신치’총사령이 되어, 2천 명으로 험한 곳에 웅거하여, 풍환 등을 막게 하고

3천 명으로 사잇길을 좇아 요동ㆍ현도의 각 고을을 불 질러서 풍환 등의 후방 응원을 끊게 하여 드디어 그들

을 크게 격파하고, 같은 해 4월에 수성이 다시 선비의 군사 8천명으로 요동의 요대현(遼隊縣)을 치는데, 고구

려의 날랜 군사를 신창(新昌)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채풍 이하 장수 1백여 명을

베어 죽이고 수없이 많은 군사를 살상하거나 또는 사로잡아 드디어 요동군을 점령하고, 그 해 12월에 또 백

제와 예의 기병 1만을 내어 현도ㆍ낙랑 두 군을 점령하여, 이에 위우거가 한에게 잃었던 옛 땅 - 조선의 옛

오열홀(烏列忽)의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니, 한이 여러 해의 전쟁에 국력이 피폐한데다가 또 이처럼 크게 패하

니, 다시 싸울 힘이 없어서 드디어 요동을 내어주고 다시 세폐(歲幣)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요

청하였다. 그리고 포로는 한사람에 대해 겸(鎌 : 합사로 짠 명주) 40필, 어리아니는 20필로 속환(贖還)하였다.

요동ㆍ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왕 본기나 후한서에 보이지 아니하여으나, 당(唐) 가탐전(賈眈傳)에 가탐의, “요

동과 낙랑이 한의 건안(建安) 때에 함락되었다(遼東樂浪 陷於漢 建安之際).”고 한 말을 실었는데, 가탐은 당나라

때의 유일한 사이(四夷)의 고사(故事) 연구가이니,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나, 다만 건안은 기원 196

년 한나라 헌제(獻帝)의 원년이니까, 고구려가 중간에 쇠미한 때이므로, 건안은 곧 건광(建光)의 잘못이요, 건

광은 곧 기원 121년 한나라 안제(安帝)의 연호이다. 왕자 수성이 채풍을 죽이고 한의 군사를 격파한 때이니,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하 현도ㆍ낙랑 등의 군을 회복하였음이 의심없다.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

지하자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아 서방 경영의 본거지로 삼고, 국내성과 졸본성과

아울러 삼경(三京)이라 일컬었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의 논쟁이 분분하여 혹은 환인현(桓因縣) 부근 - 지금의 혼강(渾江) 상류

인 안고성(安古城)이라고도 하고, 혹은 집안현(輯安縣) 홍석 정자산(紅石頂子山) 위라고도 하지마는, 앞의 것은

산상왕(山上王)이 옮겨가 설치한 제2의 환도성이요, 나중 것은 동천왕(東川王)이 옮겨가 설치한 제3의 환도성이

다. 이것이 제6편에서 다시 서술하려니와, 태조왕의 환도성은 곧 첫 번째 옮겨 쌓은 제1의 환도성이니, 삼국

사기 지리지(地理志)에,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환(丸)은 우리말로 ‘알’이라고 하니, 환

도(丸都)나 안시(安市)나 안촌(安寸)은 다 ‘아리’로 읽을 것이므로, 다같이 한 곳 -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리

의 옛 자리임이 분명한데, 후세 사람들이 앞 뒤 세 환도성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고 매양 환도성을 한 곳에서

만 찾으므로, 아무리 환도성의 고증에 노력하여도 환도성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였던 것이다.

제 4장 次大王의 왕위 빼앗음

 太祖王의 가정불화

왕자 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나라의 세폐(歲幣)를 받으니 태조왕은 그 공을 상주어 ‘신가’에 임명하

고 군국(軍國) 대사를 죄다 맡겼다. 이에 위엄과 권세가 한몸에 모이고 명성과 인망이 천하에 떨치니, 수성이

만일 이 명성과 인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를 쳤으면 삼조선의 서북 옛 땅을 전부 회복하가 쉬웠겠지마는,

수성은 가정에 대한 불평이 공명(功名)에 대한 열심을 감쇄하여, 요동을 회복한 이튿날 한의 화의 요청을 허락

(앞 장에 보임)하고 귀국하였다. 수성의 가정에 대한 불화란 무엇인가? 수성은 태조왕의 서자요, 막근ㆍ막덕 형

제가 태조왕의 적자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막근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家法)에 의하여 왕위를 상속받

을 권리가 있고, 수성은 그 빛나는 무공에 의하여 또한 태자가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성은 요동

의 싸움을 마치자 급히 돌아와 원정할 생각을 끊고 밖으로는 정치에 힘쓰며, 어진 신하 목도루(穆度婁)ㆍ고복

장(高福章)을 기용하여 ‘팔치’와 ‘발치’를 삼아서 인심을 거두고, 안으로는 사사로운 무리를 길러 태자의 자리

얻기르 도모하였는데, ‘불라[沸流那]’의 ‘일치’ 미유(彌儒)와, ‘환라[桓那]’의 ‘일치’ 어지류(菸支留)와 ‘불라’의 조

의(皀衣 : 당시의 선배 수령)가 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아부하여 태자의 자리 빼앗기를 모래 모의하였다. 그런데

태조왕은 수성으로 태자를 삼자니 가법(家法)에 걸리고, 막근으로 태자를 삼자니 수성에게 걸려서 오랫동안 태

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수성이 정치를 오로지 한지 10여 년에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이따금 얼굴에 보이고, 모의하는 흔적이 때때로 겉에 드러나니 막근은 태자의 지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수성

에게 죽을까 두려웠으나, 병권도 없고 또 위엄과 명망이 수성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그 대항할 방책은 오직 태

조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에 고구려의 ‘신수두’에 신단(神壇)의 무사(巫師)는 비록 부여처

럼 정권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나, 복술(卜術)로써 남의 길흉 화복을예언한다 일컬어서 일반의 신앙을 받아 귀천

의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의심나고 어려운 일을 이 무사에게 결정을 청하는 때였으므로, 막근은 무사에게 뇌

물을 주고 도움을 빌었다. 기원 142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또 태조왕은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

어 끊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지 못하여, 무사를 불러 해몽해보라고 하니, 무사는 수성을 참소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범은 온갖 짐승의 어른이요, 표범은 범의 씨요, 범의 꼬리는 범의 뒤니 아마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

의 뒤(후예란 말)를 끊으려는 자가 있어 꿈이 그러한가 합니다.”고 하여, 넌지시 서자 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갑자기 무사의 말에 기울여지랴. 다시 ‘불치’ 고복장을 불러 물으니, 고복장은 수성의 무리는 아니지마는

아직 수성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선을 행하면 복이 내리고 불선을 행하면 화가 이릅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지만 비록 재난과 변괴와 악몽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

되겠습니까?”하고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 遂成의 음모와 太祖王의 禪位

수성이 40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아 위엄과 복을 오로지 하여, 매양 막근을 죽여서 왕위 상속의 권한을 빼앗

으려고 했지마는 , 다만 태조왕이 이미 늙었으므로 그 돌아감을 기다려서 일을 행하려고 하였는데, 태조왕은

두 사람의 감정을 조화시켜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아무런 변란이 없도록 만든 뒤에 태자를 봉하려 하여 긴 세

월을 그냥 지내왔다.

기원 146년은 태조왕이 왕위에 있은 지 94년이요, 나이 100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데, 수성도 이때에 나이

76살이라, 백 살 노인인 태조왕의 건강함을 보고 혹 자기가 태조왕보다 먼저 죽어 막근에게 왕위가 돌아가지

나 않을까 하여, 그 해 7월에 왜산(倭山 : 연혁 미상)에서 사냥하다가 지는 해를 돌아보며 탄식하니, 좌우가 그

뜻을 알고 모두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세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홀로, “대왕께서 성

명(聖明)하시어 백성이 공경하여 받드는데, 왕자가 좌우의 소인들을 데리고 성명하신 대왕을 폐위하려고 하는

건 한 가닥 실로 만 근의 무게를 끌려 함과 같을 뿐입니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치셔서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시면, 대왕께서 반드시 왕자의 선함을 아시어 양위하실 마음이 있으시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수성이 그의 말을 못마땅해하니, 좌우가 수성을 위해 그를 살해하고, 음

모가 더욱 급히 진행되었다. 고복장이 눈치채고서 태조왕에게 들어가 고하고 수성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태조

왕은 신하로서의 부기로는 수성의 마음을 달래지 못할 줄을 깨달았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여 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별궁(別宮)으로 물러가고, 수성은 자리에 올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

였다.

고구려 본기에, “태조왕 80년에 좌보패자(左輔沛者) 목도루(穆度婁)가, 수성이 딴 뜻이 있음을 알고, 병을 일컫

고 벼슬하지 않았다(左輔悖子 知遂成有異志 稱病不仕).”고 기록되었고, 차대왕 2년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라났다(左輔穆度婁 稱病退老).”고 기록되었으니, 이에 이미 15년 전에 벼을 일컫고 벼슬하지 아니한

목도루가 어찌 15년 후에 차대왕 2년에 또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고 할 수 있으랴? 김부식이 삼국사기

를 지을 때에 여러 가지 고기(古記)에 대하여 아무런 선택 없이 마구 수록하였음이 이같이 심하였다. 하물며

좌보(左輔) 패자(沛者)가 다 ‘팔치’의 번역인데, 좌보패자라는 겹말의 명사를 글에 올렸으니, 어찌 가소로운 일

이 아니랴? 또 태조왕 본기에, “94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

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九十四年八月 王遣將 襲遼東西安平 殺大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라 하였

는데, 이는 후한서에, “고구려왕 백고(伯固)가……질환(質桓)의 어간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高句麗王伯固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

子).”고 한 글을 그대로 초록한 것이다. 질환의 어간이란 질제(質帝)와 환제(桓帝)의 사이를 가리킨 것이니, 그

것은 태조왕 94년이므로, 김부식이 이 해에다 기록해 넣은 것이고, 백고(伯固)는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이니,

이때는 신대왕 원년 전 20년전이므로, 김부식이 ‘고구려왕 백고(高句麗王伯固)’의 여섯 글자를 ‘견장(遣將)’의 두

글자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때 태조왕의 가정에 차대왕과 막근의 다툼이 있어 외부의 일을 물을 사이가 없

는 때였으므로, 후한서의 질환의 어간은 환령(桓靈)의 어간 -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사이, 신대왕 때로 개

정함이 옳은데, 김부식이 이를 태조왕 94년의 일로 적어넣음이 이미 망령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친

절하게도 달까지 박아 ‘8월’이라고 하였음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국내외의 기록을 뽑

아 넣을 때에 모호한 것은 아무 근거 없이 연월(年月)을 스스로 정하고 자구를 가감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제 5장 次大王의 피살과 明臨答夫의 專權

 次大王의 20년 專制

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를 하다가 연나(椽那)의 조의(皀衣) 명림답부(明臨答

夫)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本紀)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그 전제(專制)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

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태조왕의 동모제(同母弟 : 동모제 3字는 서자로 고칠 것임)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仁慈)가 적었다. 태조왕의 양위(讓位)로 왕위에 오르니, 나이 76세였다.

2년 봄 정월에 관나(貫那 : 灌那)의 패자(沛者) 미유(彌儒)로 우보(右輔)로 삼았다. 3월에는 우보 고복장(高福章)

을 죽였는데, 그가 죽을 때에, “원통하고 원통하다. 내가 당시에 선조(先朝)의 근신이 되어 어찌 난을 일으킬

사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군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이에 이르렀거니와, 지금 임금이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政)과 교(敎)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이제 불의로 충신을 죽이니 내

가 무도한 세상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것이 낫다.”하고 형을 받으니,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가니, 환나(桓那 : 椽那로 고칠 것임)의 우태

어지류로 좌보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를 삼았다. 겨울 10월에 비류나(沸流那)의 조의(皀衣) 양

신(陽神)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우태를 삼았다. 이상은 다 왕의 옛날 친구였다. 11월

에 지진이 있었다.

3년 여름 4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왕의 원자(元子) 막근을 죽으니, 그 아우 막덕이 장차 화가 미칠까 두

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

므로 왕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왕이 무사(巫師)에게 물으니,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길한 상서가 아

닌데 게다가 흰 여우니 더욱 괴이한 변입니다. 천제(天帝)께서 인간의 임금에게 맞대해서 순수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요괴를 보여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함이니 대왕께서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돌려 복

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흉한 것이면 흉할 것이고 길한 것이면 길할 것인데, 이제 이미 흉

하다고 하고 또 길하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하고 드디어 무사를 죽였다.

4년 여름 4월 정묘(丁卯) 그믐날 일식(日食)이 있었다. 5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는데, 일관(日官)은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이는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이빈다.”고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겨울 12

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8년 여름 6월에 서리가 내려 쌓였다. 겨울 12월 천둥하고 지진이 있었다. 그믐날 객성(客星 : 彗星)이 달을 범

하였다.

13년 봄 2월에 꼬리별[孛星]이 북두(北斗)를 범하였고 5월 갑술(甲戌) 그맘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20년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3우러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돌아가니, 나이 119살이었다. 겨울 10월에 연나

의 조의 명림답부가 왕이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ㅇ르 하므로 왕을 죽이고, 그 호(號)를 차대왕이라 하

였다.”

이상이 차대왕 본기의 전부다. 맨 끝에,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

고 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도 없다. 고

복장(高福章)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막근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不仁)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인민에게는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일 뿐더러,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년

내지 3년까지의 일이니, 18년 후인 차대왕 20년에 반란을 일으킨, 명림답부의 유일한구실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ㆍ지진ㆍ성변(星變) 등뿐이니,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에 관계

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勸進)하였는데,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

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그 여러 중신이란 대개 미유ㆍ양신 등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차

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離反)에 의한 것일 것이다.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

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그 무리들이 차대왕과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一人專制)의 나라가 아니라 벌

족공치(閥族共治)의 나라이니,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專決)하지 못하고, 왕과 5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

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

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행하므로,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

(本部)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內應)하여,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하여 차대

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것이다.

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

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梟雄)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라 함은 옳지 않다.

 明臨答夫의 專權과 외교 정책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중에 숨어 있던 백고(伯固)를 세워 신대왕이라 하

고, 국내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까지도 용서하여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고, 차대

왕의 준엄한 형법을 폐지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신가’가 되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 처리하고, ‘팔치’와 ‘발치’를 겸하고, 예량(濊梁) 여러 맥(貊)의 부장(部長)을 다 차지하니,

그 위엄과 권세가 태조왕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하였다. 본기에는, “명림답부가 국상(國相)으로 패자(沛者)를

겸하였다.”고 하였고, 또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도 이때에 비롯된 것이다.”하였는데, 이는 국

상이 곧 ‘신가’인지를 모르고, 패자가 ‘팔치’ 곧 좌보인지를 모르고서 함부로 내린 주해이다.

태조왕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難舟)에 옮겨다 설치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기원 169년

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耿臨)으로 현도태수를 삼아서 대거하여 침입하였다. 명림답부가 여러 신한들

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하였는데 모두들 나가 싸우기를 주장했으나, ,

명림답부는, “우리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은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힘드니, 우리가 우

선 수비를 하여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이빈다.”고 하여 먼저 지

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한의 군사가 침입한 지 여러 달을 노략질했으나,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고 해도 응하지

아니하므로, 양식이 떨어져서 배고프고 피로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명림답부가 좌원(座原)까지 추격하여

한의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명림답부는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자 국토를 개척하려고 먼저 선비

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壇石塊)를 꾀어서 한의 유주(幽州)ㆍ병주(幷州) 두 주 - 지금의 직예ㆍ산서 두 성을 침략

하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113살이었다.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을 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엔 신대왕 4년(기원 168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와 침범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으므로, 왕이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하였다.”고 하고, 신대왕 5년(기원 169년)에, “왕이 대가(大加) 우

거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서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치게 하였다.”고 하

고, 8년(기원 172년)에, “한이 대병(大兵)으로 우리를 공격해왔으므로……명림답부가 좌원(坐原)까지 추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려 한의 군사가 하난도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앞의 두 기록은 후한서와 삼국지에

서, 뒤의 한 기록은 고기(古記)에서 뽑아 쓴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략(朝鮮史略)에는, “신대왕 5년에 한의 현도

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 ……명림답부가 좌원(坐原)에서 크게 격파하여…….”라고 하여그 인조가

후한서의,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기원 169년)에 현도태수 경림……백고(伯固)가 항복하였다(靈帝 建寧二年玄

免太守耿臨……伯固降).”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김부식이

이것을 그릇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하나는 신대왕 4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년의 조항에 기록한 것이고, 공

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한의 헌제(獻帝) 영평(永平)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

190년이요, 신대왕 5년에서 20년 후이니, 신대왕이 20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이 또한 분

명한데,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패해 달

아나 경림을 크게 이겼다고 하고,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록하였으니, 이런 곳에

서 지나사의 거짓이 많음을 보겠거니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해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8년의 일로 기록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대개 이조 초기에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

기(海東古記)등 몇 가지가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책이 더러 있었는데, 그 고기(古記)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 6장 乙巴素의 업적

 王后의 정치 간여와 左可慮의 난

기원 179년에 신대왕(新大王)이 죽고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즉하여서는, 왕후 우씨(于氏 : 椽那 于素의 딸)의 뛰

어난 자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의 친척 어비류(於卑留)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左可慮)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그 자제들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다가 첩으로 삼고, 아들과 조

카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들며 남의 좋은 밭과 훌륭한 집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서 나라 사람들이 원

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왕이 이것을 알고 죄 주려고 하니까, 좌가려 등이 마침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와이 기내(畿內)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고, 4

부(部)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덕이 백

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 4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였는데, 4부가 의논하고 동부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 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안류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고 하니 안류가 자기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하

고, 서압록곡(西鴨錄谷)의 처사(處士) 을파소(乙巴素)를 처거하였다.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인데, 고금의 치란(治亂)에 밝고,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

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서 밭갈아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 ‘일치’의 작위를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다시 다른 어질

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로 ‘신

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초양의 한미(寒微)한

처사로서 하루 아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

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입니다.”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

고 크게 대우해주는 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상과 벌을 신중히 하고, 정령(政令)을 밝혀 나

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서, 고구려 9백 년 동안 첫째가는 어진 세상으로 일컬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천왕(혹은 國襄이라 함)의 이름은 남무(男武 : 혹은 伊夷謨)로, 신대왕 배고의 둘

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拔奇)는 불초하다고,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

데,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民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상류에서 살았

다(故國川王(或云國襄 諱 男武(或云伊夷謨)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各將下戶 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하였으나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

전의 본문을 그대로 떠다가 옮겨 쓴 것으로, 발기(拔奇)는 곧 산상왕(山上王) 본기(本紀) 가운데의 발기(發岐)요,

이이모(伊夷謨)는 곧 산상왕 연우(延優)이니,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發岐)ㆍ연우(延優)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

로 잘못 전한 것인데,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고 고국천왕 남무(男武)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남무를 곧 발기(拔

奇)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재 잘못이요, 삼국지 공손도전(公孫度傳)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

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기원 190년)에 요동태수가 되어서 건안 9년(기원 204년)에 죽고, 공손강이 뒤를 이었

는데,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이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 아버지 공손도

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앞에서 말한 신대왕 5년에,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쳤다(助……公孫度 討富山賊).”고

한 것과 아울러 보면, 김부식이 곧 공손도를 어느 때의 사람인 줄을 모른 듯하니 또한 기괴한 일이다.

제 6편 고구려의 衰微와 北扶餘의 멸망

제 1장 고구려 대 支那의 패전

 發岐의 반란과 제1의 丸都 殘破

기원 197년에 고국천왕이 돌아가고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왕후 우씨(于氏)가 좌가려(左可慮)의 난리 이후

정치에 입을 벌리지 못하고 답답하게 대궐 안에 있다가, 왕이 돌아가니 정치무대에 다시 나타날 열망을 품게

되자, 애통보다 기쁨이 앞서 국상을 숨겨 발표하지 아니하고 그 밤에 미복으로 비밀히 왕의 큰아우 발기(發岐)

에게 가서 발기더러, “대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뒤를 이을 사람이 아닌가.”하고 유혹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순나(順那)의 고추가(古鄒加)로서 환도성간(丸都城干)을 겸하여 요동 전체를 관리하고 있

어서 그 위엄과 권세가 혁혁할뿐더러 또한 고국천왕이 돌아가면 왕위를 이을 권리가 당당하므로 우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엄정한 말씨로 우씨를 나무랐다. “왕위는 하늘이 명하는 것이니 부인이 물을바가 아니고, 부

인의 밤나들이는 예가 아니니 왕후의 행할 일이 아닙니다.” 우씨는 크게 부끄럽고 분하여, 그 길로 곧 왕의

둘째 아우 연우(延優)를 찾아가서, 왕이 돌아간 일과 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 본일을 낱낱이 호소하였다. 연우

는 크게 기뻐하고 우씨를 맞아들여 밤 잔치를 베풀었다. 연우가 친히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치니 우씨가

치마끈을 잘라서 싸주었다. 손목을 마주잡고 대궐로 들어가 함께자고 이튿날 고국천왕이 돌아간 것을 발표하

는 동시에 왕의 유조(遺詔)를 꾸며 연우로 왕의 후계를 삼아서 즉위하게 하였다.

발기는 연우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격문을 띄워서, 연우가 우씨와 몰래 통하고 차례를 건

너뛰어 왕위를 빼앗은 죄를 폭로하고 순나의 군사를 일으켜서 왕궁을 포위 공격하였다. 사흘 동안 격전이 벌

어졌으나 나라 사람들이 발기를 돕지 아니하므로 패하여, 순나의 인민 3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 전토(全土)를

들어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는 한말(漢末)의 효웅(梟雄)이니, 기원 190년

에 한이 어지러워지는 징조를 보고 요동태수가 되기를 자청하여 요동에서 왕노릇 하기를 꿈꾸었는데, 이때 요

동의 본토는 차대왕이 점령한 뒤였으므로 고구려의 땅이었고, 한의 요동은 지금의 난주에 옮겨다 설치하여,

땅이 매우 좁아서 공손도는 항상 고구려의 요동을 엿보고 있던 참이라, 발기의 투항을 받자 크게 기뻐하며 마

침내 정병 3만을 일으켜서 발기의 군사로 선봉을 삼아 고구려에 침입하여, 차대왕의 북벌군(北伐軍)의 본거지

이던 환도성 - 제1의 환도에 들어가 마을을 불태우고 비류강(沸流江)으로 향하여 졸본성(卒本城)을 공격하였다.

연우왕(延優王)이 계수(係數)로 ‘신치(전군 총사령관)’를 삼아서 항거해 싸워 한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좌원(左

原)까지 추격하였다. 발기가 다급하여 계수를 돌아보고, “계수야, 네가 차마 너의 맏형을 죽이려 하느냐? 불의

의 연우를 위해 너의 맏형을 죽이려느냐?”고 하자 계수가 말했다. “연우가 비록 불의하지마 너는 외국에 항복

하여 외국 군사를 끌고와서 조상과 부모의 나라를 유린하니, 연우보다 더 불의하지 않느냐?” 발기가 크게 부

끄러워 뉘우치고 배천(裵川 : 곧 沸流江)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발기가 한때 분함을 참지 못하여 나라를 판 죄

를 지었으나 계수의 말에 양심이 회복되어 함에 이르렀지마는, 그 팔아버린 오열홀(烏列忽) - 요동은 회복하

지 못하고, 공손도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공손도는 드디어 요동왕이라 자칭하고 요동 전역을 나누어, 요

동(遼東), 요중(遼中), 요서(遼西)의 셋으로 만들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고을 - 지금의 연태(煉台) 등

지를 점령하여 한때 강력한 위엄을 자랑하였다. 이에 연우왕은 지금의 환인현(桓因縣) 혼강(渾江) 상류(지금의

安古城)에 환도성을 옮겨 설치하고 그곳으로 서울을 옮기니, 이것이 곧 제2의 환도였다.

 東川王의 제1의 丸都 회복 경영

연우왕이 형수 우씨의 손에 왕위를 얻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우씨가 나이가 많음을 싫어하

여 주통촌(酒桶村)의 아름다운 처녀 후녀(后女 : 이름)에게 몰래 장가들어 소후(小后)를 삼아서 동천왕(東川王)을

낳았다.

기원 227년에 연우왕이 돌아가고 동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지나가 네 세력을 나뉘어 ① 은 위(魏)의 조

씨(曹氏)니 업 - 지금의 직예성(直匠省) 업현에 도읍하여 지금의 양자강(揚子江)이북을 차지하고, ② 는 오(吳)의

손씨(孫氏)니 건업(建業)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 도읍하여 양자강 이남을 차지하고, ③ 은 촉(蜀)

의 유씨(劉氏)니 성도(成都) - 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도읍하여 지금의 사천성을 차지하고, ④ 는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니 양평(襄平) - 지금의 요양(遼陽)에 도읍하여, 지금의 난하 동쪽과 요동반도를 차지하였

다.

고구려는 공손씨와는 적국이었고, 촉과는 길이 너무 멀어서 교통할 수 없었거니와, 위(魏)ㆍ오(吳) 두 나라와

도 왕래가 없었는데, 기원 233년에 공손연(公孫淵 : 공손도의 손자)이 간사한 꾀로 위ㆍ오 두 나라 사이에서 이

익을 취하려고, 오의 임금 손권(孫權)에게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신하라 일컫고, 함께 위를 공격하기를 청

했다. 그러니까 손권이 크게 기뻐하고 사신 허미(許彌) 등으로 하여금 수천의 군사를 주어 공손연에게 보냈다.

공손연이 허미로 위와 사귀는 미끼를 삼으려고, 먼저 허미의 보호 장사 진단(秦旦) 등 60여 명을 잡아서 현도

군 -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진단 등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서

거짓말로, “오제(吳帝) 손권(孫權)이 고구려 대왕께 올리는 공물이 적지 않았고 또한 고구려와 맹약하여 공손연

을 쳐 그 토지를 나누어 가지자는 도서(圖書)도 있었는데, 불행히 배가 큰 바람을 만나 바닷길의 방향을 잃고

요동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가 공손연의 관리에게 알려져서 공물과 도서는 다 빼앗기고 일행이 다 잡혀서 갇

혔습니다. 다행히 틈을 얻어 범의 입을 벗어나 이렇게 왔습니다.”고 하였다. 동천왕이 크게 기뻐하여 진단 등

을 불러 보고 조의 25명에게 명해 바닷길로 진조 등을 호송하였는데, 초피(貂皮)의 1천 장과 갈계피 10장 등

을 손권에게 선사하고, 고구려의 육군과 오의 수군으로 공손연을 함께 쳐서 멸망시키자는 조약을 맺었다.

이듬해 3년 손권이 사굉(謝宏)ㆍ진굉(陳宏) 등을 사신으로 보내서 많은 옷과 보배를 바치니 동천왕이 또 ‘일

치’ 착자(窄咨)ㆍ대고(帶固) 등을 보내 약간의 예물로 답사했는데, 착자가 오에 이르러 ① 오의 수군이 약하여

바닷길로 공손연을 습격할 수 없으면서 오가 다만 큰소리로 자랑하여 고구려로부터 후한 물건을 받고자 하고,

② 손권이 고구려를 볼 때에는 비록 공손하였으나 그 내용을 그 국내에 선포할 때에는 동이(東夷)를 정복하여

그 신민(臣民)을 속이고 있음을 발견하고,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동천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위제

(魏帝) 조(曹)에게 밀사를 보내서, 고구려와 위가 오와 요동에 대해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하여 고구려가 요

동을 치면 위는 육군으로 고구려를 돕고, 위가 오를 치면 고구려는 예(濊)의 수군으로 위를 도와서, 두 적을

토멸한 뒤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가 차지하기로 하였다. 그 이듬해 오의 사자 호위(胡衛)가

고구려에 오자 그 목을 베어 위에 보내서, 고구려와 위 두 나라의 교제가 매우 잦아졌다.

 公孫淵의 멸망과 고구려ㆍ魏 두 나라의 충돌

기원 237년에 동천왕이 ‘신가’ 명림어수와 ‘일치’ 착자ㆍ대고 등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내어 양수(梁水)로 나

아가서 공손연을 치니, 위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에게 명하여 또한 수만의 군사로 요수(遼水)로 나

오므로, 공손연은 곽흔(郭昕), 유포(柳蒲) 등을 보내 고구려를 막고, 비연(卑衍)ㆍ양조(楊祚) 등을 보내 위를 막았

다. 오래지 않아 위의 군사는 패하여 돌아가고, 공손연은 연왕(燕王)이라 일컬어 천자의 위의를 갖추고 전력을

다하여 고구려를 막았는데, 이듬해 위가 태위(太尉)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1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먼저 관구

검으로 하여금 요대(遼隊)를 쳐 공손연의 수비장 비연ㆍ양조 등과 대치하게 하고, 사마의는 가만히 북쪽으로

진군하여 마침내 공손연의 서울 양평을 갑자기 포위하였다. 공손연의 정예군이 다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양

수로 나가고 양펴은 텅 비어 있었으므로 비연 등이 돌아와 구원하다가 크게 패하고 공손연이 선 안에 포위당

한 지 30여 일에 굶주려 엄중한 포위를 뚫고 나오려다가 잡혀 죽으니, 공손씨가 요동에 웅거한 지 무릇 3세

50년만에 망하였다. 위가 이렇게 공손씨를 쉽게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해준 때문인데,

삼국지 동이열전(東夷列傳)에, “태위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쳤는데 궁(宮)이 주부 대가

(大加)를 보내 수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太尉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遣主 簿大加 將數千助軍).”고 한 기사

이외에는 위의 명제본기(明帝本紀)나 공손도전(公孫度傳)에는 한 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네의 역사의

고유의 ‘국내 일은 자세하게, 외국과의 일은 간략하게(詳內略外).’라는 필법을 지킨 것이어니와, 고구려 본기에

는 “위의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가 이를 도왔다(魏太傅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

之).”고 하였으니 사마의를 사마선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삼국지 동이열전의 본문을 그대로 옮겨다 적었음이

분명한데, 수천 명을 1천 명이라 고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저네와 우리의 역사의 사실에 관한 기록의

시말을 참작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위가 공손연을 토멸하여 요동의 전부가 항복하자, 위는 고구려에 대한 맹약을 배반하고 땅 한쪽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아니하므로, 동천왕이 노하여 자주 군사를 일으켜서 위를 토벌하여 서안평(西安平)을 함락시켰다. 서

안평은 전사(前史)에 지금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라 하니, 이것은 한서지리지에 의거한 것이지마는,

공손연이 왕성할 때 고구려와 오ㆍ위의 교통이 늘 서안평 때문에 바닷길로 통하였으므로 이때의 서안평은 대

개 양수 부근임이 옳다. 고대의 지명은 매양 천이(遷移)가 잦았던 것이다.

 毌丘儉의 침략과 제2丸都의 함락

기원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

로 왕이 비류수(沸流水)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베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하고, 이에 여러 장

수들은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

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만 8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錄原)으로 달아나

니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丸都 : 지금의 安古城)에 들어와서 대궐과 민가를 다 불태워버리고 역대의 문헌을 실어

위로 보내고는, 장군 왕기(王頎)로 하여금 왕을 뒤쫓게 하였다. 왕이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장수

들이 다 달아나 흩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가 왕을 시위하고 있었다. 뒤쫓는 군사가 급히 달려들

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뽑아 죽음으로써 위의 군사와 싸우고, 왕은 그 틈을타서

도망하여 산골짜기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험한 곳을 지키고, 군중에게 영을 내련 밀우를 구원하여

오는 자는 큰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니, 남부(南部)의 유옥구(劉屋句)가 이에 응하여 싸움터로 갔다. 밀우가 기

진하여 땅에 엎드러져 있음을 보고 들쳐업고 돌아오니, 왕은 자기의 넓적다리살을 베어 밀우에게 먹여 한참만

에 깨어났다. 이에 왕은 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로 달아났다. 그러나 위병의 추격은 다급해졌다. 북부(北部)의

유유(紐由)가, 국가의 흥망이 달린 이같이 위급한 판에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위태로운 판국을 돌이킬 수 없

다 하고, 음식을 갖추어가지고 위의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글을 바치고, “우리 임금께서 대

국에 죄를 해변에 이르러 다시 더 갈 곳이 없으므로 항복을 비시고, 먼저 얼마 안 되는 음식으로 군사들을 호

궤하고자 합니다.”고 하니, 위의 장수가 그를 불러보았다. 유유는 음식 그릇 속에 감추어 갔던 칼을 빼어 위의

장수를 찔러 죽였다. 왕이 군사를 명하여 위의 군사를 반격하니 위의 군사가 무너져서 다시 진을 이루지 못하

고 요동의 낙랑으로 달아났다. 이 싸움에 대한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古記)를 뒤섞어서 고구려 본기

에 넣었으므로 앞뒤의 기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① “관구검이 군사 1만 명으로 고구려를 침

략하였다.”하고 “왕이 보기(步騎) 2만 명으로 거역해 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군사가 위의 군사보다 갑절

인데, 그 아래 동천왕의 말을 싣되,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고 하였음은 무슨 말인

가? ② 비류수에서 위의 군사 3천 명을 목베고, 양맥곡에서 또 위의 군사 3천여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를

목베었다고 하였는데, 1만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어 다시 군대를 이룰 수 없었겠는데, 그

아래에 “왕이 철기(鐵騎) 5천으로 추격하다 크게 패했다.”고 한 건 무슨 말인가? 관구검전에 그 결과를 기록하

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출사한 군사의 많음과 싸움의 크기를 가

히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겨우 1만 명의 출병이었으랴? 다만 저네의 역사에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예를 지켜 그 기재가 이에 그쳤을 뿐이다. 고구려 본기에는 이 싸움을 동천왕 20년(기원245년)이라 하였으니,

동천왕 20년은 위의 폐제(廢帝) 방(芳)의 정시(正始) 8년이요,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정시(正始) 중에……현도의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고……6년에 다시 정벌하였다(正始中……出玄免討句驪……六年復征之).”라고 하였으므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정시 5년과 6년의 두 번의 전쟁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정시 5년과 6년은 동천왕

18년과 19년이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에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幽州刺史毌丘儉 討高

句驪).”고 하여 고구려 본기와 맞는다. 어느 쪽을 좇음이 옳은 것인가? 최근 1905년 청(淸)의 집안현 지사(輯安

縣知事) 아무개가 집안현 판석령(板石嶺) 고개 위에서 발견한 관구검의 기공비(記功碑)의 파편에 ‘6년 5월’의 글

자가 둘째 줄에 보였으니, 만일 이것이 진정한 유적이라면 정시 6년, 동천왕 19년이 곧 그 싸움의 시작이고,

다시 싸웠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그러나 옛 청조(淸朝)의 인사들이 고물(古物) 위조의 버릇이 매우 많아서, 지

나 현대에 빛을 보게 된 옛 비석, 옛 기와가 거의 가짜라 하여 그 비서의 파편은 아직 고고학자의 심정(審定)

을 요할 것이고, 설혹 이것이 진짜 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불내성(不耐城)의 명(銘)이요 환도성의 것은 아니

다. 왜냐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제3의 환도성이요, 제3의 환도성은 동천왕 때에는 아직 건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2장에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 제2의 丸都城이 파괴된 후 평양에 還都

제2의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그의 서북쪽 정벌의 웅대한 마음이 찬 재[冷灰]가 되어 지금 대동강의 평

양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고구려가 처음으로 남천(南遷)한 것이다. 평양 천도 이후 대세가 변한 것이 둘

이니, 그 하나는 남낙랑에 딸린 작은 나라들이 비록 고구려에 복속하여 있었으나 오히려 대주류왕이 최씨를

멸망시킨 옛날 원한을 생각하여 복종과 배반이 드리없다가 평양이 고구려의 서울이 되어 제왕의 대궐과 군사

의 본영이 다 이곳에 있게 되니, 작은 나라들이 기가 누러 차차 아주 꺾였고, 또 하나는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ㆍ지나 등과 충돌이 잦다가,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ㆍ신라ㆍ가라 등과

접촉을 하게 되어 북쪽보다는 남쪽에 대한 충돌이 많아졌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려가 서북의 나라가 되지 않

고 동남의 나라가 된 것은 곧 평양 천도로 원인한 것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는 제2환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

니 그러므로 제2환도의 파괴가 고대사상 비상한 대사건이라 할 것이다.

제 2장 고구려 대 鮮卑의 전쟁

 鮮卑 慕容外의 강성

선비가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비록 단석괴(壇石塊)의 용맹으로도 오히려 명림답부의 절제를 받다가, 고구려

가 발기의 난을 지나 요동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형세가 약해지니, 선비가 드디어 배반하여 한에 가 붙었다.

한말에 원소(袁紹)와 조조가 서로 맞섰을 때 선비와 오환이 원소에게 붙었다가 원소가 망하니, 기원 207년에

조조가 7월의 장마를 기회하여 노룡새(盧龍塞) 5백 리를 몰래 나와서, 선비와 오환을 불시에 공격하여 그 소굴

을 파괴하였다. 오환은 마침내 망하고 선비는 그 뒤에 가비능(軻比能)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강대해져서 자주

한의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를 침략하였는데 한의 유주 자사 왕웅(王雄)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였으므

로 선비는 다시 쇠약해졌다.

기원 250년경에 선비가 우문씨(宇文氏)ㆍ모용씨(慕容氏)ㆍ단씨(段氏)ㆍ척발씨(拓跋氏)의 네 부로 나뉘어 서로 자

웅을 다투더니, 모용씨에 모용외(慕容外)란 자가 있어 용감하고 꾀가 뛰어나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는데 창려(昌

黎) 태극성(太棘城) - 지금의 동몽고 땅 특묵우익(特黙右翼)의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서 사방으로 노략질을 하였

다. 이때에 지나의 위ㆍ오ㆍ촉 세 나라가 다 망하고 진(晉)의 사마씨(司馬氏)가 지나를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

외에게 패하여 요서 일대가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역사가들이 왕왕 모용씨가 웅거한 창려를 지금의 난

주 부근이라 하지마는, 진서(晉書)의 무제(武帝) 본기에, “모용외가 여창을 침노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창려 - 지금의 난주가 진(晉)의 창려가 아님이 분명하니, 곧 나중의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서울한 용

성(龍城)과는 멀지 아니한 땅일 것이다.

 北扶餘의 파멸과 依慮王의 자살

북부여는 제3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여러 나라의 문화 원천의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ㆍ고구려 이래로

압록강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의 영역 밖의 나라라 하여 그 역사를 정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모수왕 이후로 그 치란(治亂)과 성쇠를 알 수 없거니와, 다행히 지나의 역사가들이 저희의 정치적으로 관계

된 사실을 몇 마디나마 기록하였으므로, 그 대강을 말할 수 있다.

후한(後漢) 안제(安帝)의 영초(永初) 5년, 기원 112년에 부여왕(이름은 모름)이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

고 한의 낙랑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역사에 보인 북부여의 외

국에 대한 용병의 시초일 것이요, 연광(延光) 원년, 기원 121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한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ㆍ마한[百濟]ㆍ예ㆍ읍루(挹婁) 등을 격파하였다고 했으나, 이듬해 한이 차대왕에게

화의를 청하고 배상으로 비단을 바친 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이 고구려를 격파하였다는 것은 거짓 기록일 것이

다. 기원 136년에 위구태가 왕이 되어 2만의 기병으로 한의 현도군을 습격하고 그 뒤 공손도가 요동왕이 되

어서는 부여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종실(宗室)의 딸로 아내를 삼아서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동맹을 맺었

으니, 위구태왕은 마치 고구려의 차대왕처럼 가장 상무(尙武)한 임금이고, 또 그가 왕위에 있던 동안이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일 것이다. 위구태왕의 뒤에 간위거왕(簡位居王)에 이르러서는 적자가 없어 마

여(麻餘)가 즉위하였는데, 오가(五加) 중의 우가(牛加 : 이름은 모름)가 반역할 마음을 품었으나, 우가의 형의 아

들은 왕실의 충성되고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재물을 잘 베풀어주어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

다. 우가 부자가 모반하니 위거가 이를 잡아 죽이고 그 재산을 압수하고, 마여왕이 죽으니 위거가 마여왕의

아들 의려(依慮), 겨울 6살 난 어린아이를 세워 보좌하였다.

위거가 죽고 의려가 왕위에 오른 지 41년만에 국방이 소홀해졌는데, 드디어 선비 모용외가 이를 정탐해 알

고 무리를 이끌고 북부여와 서울 아사달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외가 침입하니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하

여 막아내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해서 나라를 망친 죄를 국민에게 사과하고, 유서로 태자 의라(依羅)

에게 왕위를 전하여 나라의 회복에 힘쓰게 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을 힘쓰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한 죄는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항복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義氣)를 가져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뒷사람의 기억에 남겼으니, 어찌 성하(城下)의 맹세를 맺어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하려는

용렬한 임금에 비할 바이랴.

의려왕이 자살하니 의라가 서갈사나(西曷思那) - 지금의 개원(開原) 부근의 숲속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해

선비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험한 곳을 지켜 새 나라를 세웠다. 아사달은 왕검 이래 수천 년 문황의 고도로써

역대의 진귀한 보물뿐 아니라 문헌도 많아, 신지(神誌)의 역사며, 이두문으로 적은 풍월 등이 있었고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를 가르쳤다고 하는 금간옥첩(金簡玉牒)에 쓴 글도 있었는데, 모두 선비의 만병(蠻兵)에 의해

타버리고 말았다.

 고구려의 濊亂 討平과 명장 達賈의 참사

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인 기원 280년에 고구려는 예(濊 : 本紀의 肅愼)의 반란이 있었다. 예는 원래

수렵시대의 야만족으로서,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해 있었는데, 북부여가 조세를 과중하게 받자 배반하고 고

구려에 가 붙었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나라의 형세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입하여

수없이 인민을 죽이고 가축을 약탈하였다. 서천왕(西川王)이 크게 걱정하고 장수될 인재를 구하니, 여러 신하

들이 오아의 아우 달가(達賈)를 추천하였다. 달가는 기묘한 계교로 예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추장과 6,7백 집

을 포로로 하여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그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으니, 서천왕이 달가를 안국군

(安國君)에 봉하였다.

서천왕이 죽고 아들 봉상왕(烽上王)이 즉위하였는데, 왕은 천성이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하여 달가가

항렬로 숙부요, 위명(威名)이 전국에 떨치므로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였다.

국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안국군이 아니더면 우리가 예맥(濊貊)의 난리에 죽은 지가 오래였을 것이다.”하

고 슬퍼하였다.

 募容廆 取退와 烽上王의 교만 포악

모용외는 일대의 효웅이었다. 진의 정치가 부패하여 지나가 장차 크게 어지러워질 것을 내다보고, 바야흐로

전 지나를 아울러 가질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만일 동으로 고구려를 꺾지 못하면 뒷걱정이 적지 아니할 것을

잘 안 그는, 북부여를 격파한 뒤에 그 이긴 형제로 곧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했는데, 다만 안국군의 위명을 꺼

려 주저하다가 안국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기원 292년에 날랜 군사로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침범하였다. 이때 봉상왕이 신성에 순행해 있었는데, 모용외는 이를 알고 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여 매

우 위급해졌다. 신성 성주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백 기병으로 모용외의 군사를 돌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리고 왕을 구해냈다. 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의 작위를 높여 북부대형(北部大兄)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가 또 공격해와서 졸본(卒本)에 침입하여 서천와의 무덤을 파다가 구원병에게 격퇴당했

다. 왕이 모용씨가 자주 침노해옴을 걱정하니, ‘신가’ 창조리(倉助利)가 아뢰었다. “북부대형 신성의 성주 고노

자는 지혜와 용맹이 다 완전한 장수인데, 대왕께서는 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를 근심하십니까?”하고 왕에게

권하여 고노자로 신성의 태수를 삼았다. 고노자가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여러 번 모용외의 침략군

을 격퇴하여 국경이 안정되고 모용외의 군사가 다시 침노하지 못하니, 봉상왕은 그만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여

래 해 흉년으로 국민이 굶주리고 피로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인부를 징발하여 대궐을 지으니, 국민

이 달아나서 인구가 자꾸 줄어들었다. 기원 300년에 이르러서는 왕이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다 물리치

고 나라 안의 15살 이상의 남녀를 죄다 징발하여 건축에 부리니 ‘신가’ 창조리가 간했다 “천재(天災)가 잦아 농

사가 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인민이 장정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구렁에 빠져 죽는데, 대왕께서는 이

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의 역사를 시키시니, 이는 임금의 할 일이 아닐 뿐더러, 하

물며 북쪽에는 강적 모용씨가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아니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아니하면 충(忠)이 아니므로, 신이 이미 ‘신가’의 자

리에 있어 말할 것을 숨길 수 없어서 아룁니다.” 그러나 왕은,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임금이 사

는 대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백성이 무엇을 우러러보겠소? ‘신가’는 백성을 위해 명예를 구하지 마

오. 죽지 않으려거든 다시 말하지 마오.”하였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줄을 깨닫고, 동지들

과 비밀히 의논하여 왕을 폐하였다.

 烽上王의 폐위와 美川王의 즉위

봉상왕은 처음에 그 숙부 달가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咄固)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乙

弗)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봉상왕은 그 뒤에 여러 번 을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

은 도망하여 성명을 갈고 몸을 팔아,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뢰(陰牢)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음뢰가 일

을 매우 고되게 시켜, 낮으면 나무하고 밤이면 쉴 사이 없이 그 집 문 앞 늪에 돌을 던져 개구리를 울지 못하

게 해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히 자게 하였다. 을불이 견디다 못 하여 1년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소금을 사서 배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여와 소금집을 강동(江東) 사수촌

(思收村) 사람의 집에 부려놓았다.

그 집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1말쯤이나 주었는데도, 노파는 마음에차지 않아 더 다라고 보채

었다. 을불이 주지 않았더니 노파는 도리어 꽁한 마음을 먹고, 해치려고 소금짐 속에다가 몰래 신 한 켤레를

묻어놓았다가, 을불이 그 집을 떠나오자 뒤쫓아와서 소금을 뒤져 신을 찾고, 을불 등 두 사람을 절도로 말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소하여, 을불은 태형(笞刑)을 맞고, 소금은 빼앗아 노파에게 준다는 판결이 내렸다. 을불

은 이에 소금장사도 할 수 없고 머슴살이 할곳도 얻을 수가 없어서, 숱한 마을 온갖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걸

식하여 날을 보냈다. 옷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얼굴은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아무도 옛날의 왕손(王孫)인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이때 ‘신가’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하면, 임금 될 인재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여, 북부(北部)의 ‘살이’ 조불(祖弗)과 동부(東部)의 ‘살이’ 소우(蕭友) 등으로 하

여금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모습을 알고 있었

으므로, 그에게 나아가 절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의 의논하

여 지금 임금을 폐하고 왕손(王孫)을 세우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시어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하다

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치 마십시오.”하고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의 동지 조맥남(鳥陌南)의 집

에 숨겨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侯山)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

고 외쳤다. “나를 좇으려는 이는 나와 같이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으시오.”하니 모든 사람이 다 창조리의 뜻

을 알고 일제히 갈대잎을 갓에 꽂았다. 이에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딴 방에 가두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을불이 왕위에 오르

니 곧 미천왕(美川王)이다.

 美川王의 遼東 전승과 鮮卑 구축

기원 197년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고부터 기원 370년경인 고국원왕(故國原王)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의 중엽

시대인데,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中衰) 시대 중에서 가장 왕성한 때이다.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桓因縣)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지방의 문사 왕자평(王子平 : 본래 만주인)의 말을 들으니, “고구려의 고대에 ‘우굴로’란 대

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루(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 함은 그 대왕의 이름으로 이름 지

은 것입니다.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하도록 곤궁하였지마는, 늘 요동을 되찾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요동 각지

를 돌아다닐 때, 산과 내의 험하고 평탄한 것,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길

가에 뿌려 그 지나간 길을 기억했으므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우

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가 을불뿐이니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

이 한미할 때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미천왕은 기원 300년부터 331년까지 무릇 31년 동안을 왕위에 있은 제왕이고, 그 31년 동안의 역사가 곧

선비 모용씨와의 혈전한 역사다. 간략하고 허술한 고구려 본기와 허황하고 과장된 진서(晉書)를 합하여 그 진

실에 가까운 것을 뽑아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의 회복 -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의 소유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하고는 그 제2년에 곧 현도성을 격파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현

도성을 점령하였다.

2) 낙랑의 회복 - 낙랑도 또한 한나라 무제(武帝) 4군(郡)의 하나로서 대대로 드리없이 옮겨졌지만, 대개 역시

요동 땅에 가설(假設)한 것이고,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동천왕(東川王) 본기에, 위군(魏

軍)이 낙랑으로 물러갔을 때 동천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위ㆍ진(魏

晉)의 태수는 여전히 존재하였으니, 만일 지나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 - 남낙랑이라 한다면 이는 평양이 고

구려의 왕도인 동시에 또 지나 낙랑군의 군치(郡治)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같은 모순 당착(撞着)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랴? 미천왕의 낙랑 점령은 그 재위 14년, 기원 313년의 일이니, 진(晉) 사람 장통(張統)이

낙랑ㆍ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의 假設郡이요, 長湍 혹은 鳳山의 帶方國이 아님)에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이를

공격하니, 장통이 항거할 힘이 없어 모용외의 부하 장수 낙랑왕 모용준(募容遵)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은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마침내 장통을 꾀어 백성 1천여 집을 몰아가지고 모용외에게 투항하

여, 모용외는 유성(柳城) - 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에 또 낙랑군을 가설하여 장통으로 태수를 삼았으니 이제 요

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3) 요동에서의 전승 - 요동의 군치는 양평(襄平), 다시 말하여 지금의 요양(遼陽)이니, 진서(晉書)에 의하면,

“미천왕(美川王)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고 물러나고 도리어 맹약을 청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梁書)

에는 “을불(乙弗 美川王)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하였다(乙弗頻冠遼東 廆不能制).”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책이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이 지은 것

이고, 당태종은 요동이 아무쪼록 지나의 요동임을 거짓 증명하여, 저희 나라 신하와 백성드을 고무해서, 고구

려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을 일으키려 하여, 전대의 역사책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

國志) 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열국(列國), 그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에 관계되는 문구를 많이 고쳤으니, 하물

며 그 자신이 지은 진서(晉書)에서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그러니 양서(梁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도리어 진

실하고, 현도와 낙랑이 이미 차례로 정복되었으니 겨우 몇 현(縣)밖에 남지 않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되돌아왔

을 것이지마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하여둔다.

4) 극성(棘城) 전쟁 - 기원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宇文氏)와 단씨(段氏)와 진(晉)의 평주자사(平州刺

史) 최비(崔毖)와 함께 연합하여서 모용외의 서울 극성으로 쳐들어갔다. 모용외가 네 나라의 사이를 이간시키

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서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

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訶城)에 웅거해 있다가 모용외가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서

(晉書)에 전해진 것으로서 거의 사실인 듯하며, 여노자는 고노자(高奴子)의 잘못인 듯하나,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 번 격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에게 붙잡혔다는 말이 자못 의심스럽고, 또한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에

는 다시 본기(本紀)에 보이지 아니하니 그 동안에 이미 죽었을 것인데, 근 40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아마도 거짓 기록인가 싶다.

 제3의 丸都, 지금의 輯安縣 紅石頂子山의 함락

기원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교(釗)가 왕위를 이었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도 죽고 그의 세자 황

(皝)이 왕위를 이었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아버지 외보다 뛰어난 효웅일 뿐더러, 그의 서형(庶兄) 한(翰)과 그의 두 아들 준(雋)과 각(恪) 등

이 다 절세의 기재(奇才)였다.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西北)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지금의 집안현 홍석

정자산(紅石頂子山) 위에 새로 환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 이것이 제3의 환도성이니, 태조왕(太祖王) 때에 왕

자 수성이 쌓은 제1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東川王)이 쌓은 제2환도도 너무 적국에 가까

이 있으므로, 나아가 싸우기에 편하고 물러나 지키기에 용이한 지방을 가려 서울로 하려고 이 제3의 환도성을

쌓은 것이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제3의 환도성에 천도하였다는 말을 듣자, 고구려가 장차 북벌할 것을 알

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는 동시에, 겉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멀리 달아날 곳을 가장하여 고구

려로 하여금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하려고, 극성 - 모용한(募容翰)이, “우문씨는 비록 강성하나 실로 지킬 뜻을

가졌을 뿐인데, 고구려는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만일 우문씨를 쳤다가는 고구려가 우리의 뒤를 엄습할 염

려가 없지 아니하니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고구려를 치자면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북치(北置)

로부터 환도성으로 향하는 북도(北道)인데, 북도는 평탄하고 넓으나 남도는 험하고 좁아서 고구려가 남도보다

도 북도를 더 엄중히 방비할 것이니, 우리가 먼저 일부 군사를 내어 북도로 침입한다 일컫고, 가만히 대군을

내어서 남도로 공격하면 환도성을 개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여, 황은 한의 계교를 채용하였다.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군사가 북도로 침입해온다는 보고를 듣자 저들의 계교를 모르고 아우 무(武)를 보내 5

만의 군사로 북도를 방비하게 하여, 무는 황의 장군 왕부(王富)를 목베고 그 군사 1만 5천을 전멸 시켰으나,

왕은 적은 군사로 남도를 방어하다가 황의 대군을 만나 크게 패하여 단기(單騎)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되어 왕태후(王太后) 주씨(周氏), 왕후 모씨(某氏)도 다 적병에게 잡혔다. 모용황은 환도성을 얻고

다시 왕을 쫓으려다가, 황의 장군 한수(韓壽)가, “고구려의 왕이 비록 패해서 달아났으나, 여러 성의 구원병이

다 모여들면 넉넉히 우리 대군의 적수가 될 것이고 또 고구려의 국내에는 험한 산이 많아 추격하는 것이 위험

하니,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무덤을 파서 해골을 가지고 그 모후(母后)와 아내를 잡아가면, 그는 죽은 아버지

와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할 수 없이 항복할 것이니, 그런 다음에 은혜와 믿음으로 무마하

여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장래 우리의 중원(中原) 경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

이 그의 말을 쫓아 국고(國庫)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태우고 모든 진귀한 보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성곽과

대궐과 민가를 모조리 파괴하고, 미천왕의 능을 파 그 시체와 왕태후 주씨, 왕후 모씨를 싣고 돌아갔다. 적병

은 비록 돌아갔으나 죽은 아버지와 생모가 적국에 잡혀갔으므로, 고국원왕은 부모를 찾아오기 위해 공손한 말

과 많은 예물로 모용씨와 교제하고, 하는 수 없이 지나 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약

한 나라가 되었다.

환도성의 세 번의 천도는 고구려 상대(上代)의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니,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 : 뒤의 次大王)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의 환도성을 지금의 개평 부근에 처음으로 쌓던 때가 고구려의

가장 강성한 때이고, 발기가 모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복하므로 산상왕(山上王)이 제2의 환도성을

지금의 환인현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이것까지 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파괴당하려 하던 때가 고구려의 쇠퇴해

진 시기이고,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ㆍ현도ㆍ요동 등 군을 차례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중도에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가지고 제3의 환도성을 지금의 집안현 부근에 다시 쌓았다가 또 모용황

에게 파괴당하니, 이때는 고구려의 가장 쇠미해진 시기였다. 삼국사기에는 비록 이러한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

지 못하였으나, 본기(本紀)의 지리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그 대강을 얻을 수 있고 삼국지(三國志)에 이이모(伊夷

謨)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 것은 곧 제2의 환도성 신축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조선사략(朝鮮史略)과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어니와, 진서(晉書)는 이미 대

략 말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헐뜯고 욕하기 위해 허다한 사실 아닌 기사를 거짓으로 만든 것이 많은

글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하니,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갔다

고 하였으나, 미천왕 때의 고구려 서울은 평양이었고, 미천왕이 돌아간 지 12년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

도하였으니,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다 당시 왕도(王都)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은 돌아간 뒤에 반드시 평양

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성에 묻히지 않았을 것인데, 환도성을 침략한 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

을 파갈 수 있으랴? 그러므로 미천왕의 능을 파갔다는 말이 극히 의심스러운 동시에, 그 이하에 기록된 왕태

후와 왕후를 잡아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다만 이 뒤에 고구려가 30여 년 동안 곧 모용씨가 멸망하기 이전

에는 다시 지나 대륙을 경영하지 못했음을 보면 모용씨에게 크게 패하여 불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은 사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제 7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 1장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관계 유래

 南樂浪ㆍ北扶餘의 存亡과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관계

고추모(高皺牟)와 소서노(召西奴)의 한 쌍 부부가 분리하여 고구려ㆍ백제의 남북 두 왕국을 건설한 후에 고구

려는 북쪽 여러 나라들을 차차 정복해 들어가 북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동시에,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통일하고, 진(辰)ㆍ변(弁) 두 나라와 신라 가라(加羅)를 정복하여 남방의 유일한 강대국

이 되었음은 이미 제4편ㆍ제5편에서 대강 서술하였다. 두 강대국이 이처럼 남북에서 대치하였으나 수백 년

동안 피차 한 번의 접촉도 없었음은 남낙랑과 동부여가 두 나라 중간에서 장벽이 되었던 때문이다. 이제 두

나라의 접촉 사실을 쓰려고 하매,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존망(存亡) 관계부터 말할밖에 없다. 남낙랑과 동부

여의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의 정복을 받고는 고구려를 원망하여 늘 지나의 후원을 얻어 이를 보복하려고 하

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이 한(漢)과 싸워 이기고 요동과 북반랑을 회복하니, 남낙랑

과 동부여는 물론 고구려에 눌려 꼼짝을 못 하고, 백제도 고구려에게 신복(臣僕)하여 그 요구에 응해 기병을

내서 고구려의 서정(西征)에 참가하였으니, 이는 제4편과 5,6편에 말하였거니와 백제사가 중간에 연대가 줄어

들어 고구려 태조왕 때가 백제의 어느 왕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지 아직 발견할 수 없고, 백제 초고왕(肖古王)

이후에야 그 연대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었는데, 초고왕 32년은 곧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원년(기원 197년)이

니, 고구려가 발기(發岐)의 난으로 하여 요동과 북낙랑을 한인(漢人) 공손씨(제5편 제1장 참조)에게 빼앗기자 남

낙랑과 동부여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자립하였으며, 남낙랑의 남부인 대방(帶方) - 지금의 장단(長湍) 내지 봉산

(鳳山) 등지의 호족(豪族) 장씨(張氏)가 또 남낙랑을 배반하고 대방국(帶方國)을 세우니, 백제도 이를 기회하여 고

구려와 관계를 끊고 자립하고, 초고왕의 아들 구수왕(仇首王)은 예(濊)의 침노를 물리쳐서 나라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다.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은 초고왕의 한 어머니의 아우인데, 기원 234년에 구수왕이 돌아가니, 구수왕의 태자 -

자기의 종손(從孫) 사반(沙伴)이 나이 어림을 기회하여 그 왕위를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하고 낙랑을 습격하여 남낙랑의 옛 서울 - 지금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옮기

고, 남낙랑은 풍천원(楓川原) - 지금의 평강(平康)ㆍ철원(鐵原) 부근으로 옮기자 고이왕이 남낙라의 변경을 침노

하여 그 백성들을 붙잡아갔다.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기고 회군하는지라, 고

이왕은 아직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백제로서 위(魏)를 대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그 약탈한 사람들을 돌려주

고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유무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덟 나라를 다 남낙랑에게 떼어붙이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진충

(眞忠)으로 하여금 대방(帶方)의 기리영(畸離營 : 지역 미상)을 거쳐 궁준(弓遵)을 목베고 위의 군사를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寶菓)를 고이왕(古爾王)의 태자 책계(責稽)에게 시집

보내서 백제와 북방에 대항하는 공수동맹을 맺었다. 기원 285년에 책계왕이 장인과의 동맹의 의리를 위해 대

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의 첫 충돌이었다.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慕容氏)의 발흥(勃興)으

로 하여 서북쪽 방어에 급급해서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성해짐을 시기

하여 기원 298년에 두 나라가 진(晉)의 구원병과 합력하여 침노해왔다. 책계왕이 나아가 싸우다가 흐르는 화

살에 맞아 죽고, 분서왕(汾西王)이 서서는 아주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을 당하고, 비류왕(比流王)이 섰다.

고구려 미천왕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격파하여 선비를 격퇴할 뿐 아니라 또 남쪽의 경영에도 힘을 써서

남낙랑과 대방을 토멸하고, 오래지 않아 백제와도 결전을 하게 되었으나 미천왕이 죽어 그 문제가 유야무야의

속에 묻히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서서 선비에게 패했음은 앞편(編)에서 말했거니와 고국원왕이 북방 경

영을 포기하고 남진(南進)주의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노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을 만나 패

해 꺾여서 드디어 남북혈전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다음 장에서 이를 서술하려 한다.

제 2장 近仇首王의 英武와 고구려의 쇠퇴(附 : 百濟의 海外 征伐)

 백제의 帶方併吞과 半乞壤의 接戰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처음에는 왕후 진씨(眞氏)를 몹시 사랑하여 왕후의 친척 진정(眞淨)을 신임하고 조

정 좌평(朝廷 佐平 : 형벌과 옥에 관한 일을 담당)을 삼았는데 진정이 권세를 믿고 함부로 날뛰어 모든 신하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서 20년 동안 국정을 어지럽혔다. 그러다가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영특하고

밝아서 마침내 진정을 파면하고 폐단을 고치고, 대방의 장씨(張氏)를 낮추어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만들고 육

군의 군제(軍制)를 개정하고 해군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를 침략할 야심을 품었다.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丸都)를 버리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선비에게 실패한 치욕을 남쪽에서 풀려고 자

주 백제를 침노하다가 기원 369년에는 마병ㆍ보병 2만 명을 황ㆍ청ㆍ적ㆍ백ㆍ흑의 다섯 기(旗)에 나누어 거느

리고 반걸양(半乞壤) - 지금의 벽란도(碧瀾渡 : 예성강의 한 나루)까지 이르러 근구수왕이 나아가 싸웠다. 이보다

앞서 백제의 나라 말 목자(牧子) 사기(斯紀)가 잘못하여 말의 굽을 다치고 죄가 두려워서 고구려로 달아나 고구

려의 군인이 되어 이 싸움에 왔는데 비밀히 탈출하여 근구수왕을 보고 “저네의 군사가 비록 많지마는 거의 남

의 이목을 속이려고 수채움한 의병이요, 오직 적기병만이 날래고 용감합니다. 그러니 이것만 개뜨리면 그 나

머지는 스스로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근구수왕이 그의 말을 좇아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뽑아

적기병을 격파하고, 고구려의 군사를 죄다 쳐 흩어서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新溪) 서북쪽까지 진격하여

돌을 쌓아 기념탑을 만들고 패하(浿河 : 대동강 상류, 지금의 谷山ㆍ祥原 등지) 이남을 거두어 백제 영토를 만들었

다.

 故國原王의 전사와 백제의 載寧 천도

반걸양(半乞壤) 싸움 후 3년에 고국원왕이 그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정병 3만으로 패하(浿河)를 건넜다. 근

초고왕(近肖古王)이 근구수(近仇首)를 보내서 미리 강 남쪽 언덕에 복병하였다가 불의에 맞아 싸워서 고국원왕

을 쏘아 죽이고, 패하를 건너 서울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이에 다시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

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小朱留王 : 본기의 小獸林王)이 서서 백제를 방어했다. 근초고왕

이 상한수(上漢水) - 지금의 재령강(載寧江)에 이르러 황기(黃旗)를 세워 크게 열병식을 행하고 서울을 상한성

(上漢城) - 지금의 재령(載寧)으로 옮겨 더욱 북방 진출을 꾀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地理志)에는 고국원

왕의 평양 천도를 기록하고 소주류왕의 국내성 재천도는 기록하지 아니하여, 역대의 사학가들이 모두 고국원

왕 이후에는 고구려가 내처 평양 등지에 서울한 줄로 안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내성을 고국천(故國川)ㆍ고국양

(故國壤)ㆍ고국원(故國原)이라 일컬었으니, 고국원왕의 시체가 그 천도의 역사(役事)를 따라 북쪽에 옮겨 장사지

내졌으므로 고국원왕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는 이때 고구려가 국내성에 환도(還都)한 한 증거다. 광개토경평안

호태왕(光開土境平安好太王)의 비문에 의하면 평안호태왕은 국내성에서 생장하여 국내성 부근에 장사지냈음이

분명하니 이는 평안호태왕의 전대(前代)에 국내성에 환도한 또 한 증거다. 국내성 환도는 곧 백제의 침략을 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漢城)에 도읍

하였다.”고 하였고, 지리지에는 한성을 곧 남평양(南平壤)이라 하였으며, 이 밖에도 삼국사기 가운데 한성을 고

구려의 남평양으로 친 데가 대여섯 군데나 된다. 그러나 지금의 한성은 오직 장수왕(長壽王)이 한 번 함락시킨

일 이외에 그 이전에는 어느 해 어느 달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연 없으니 북평양(北平壤)은 북낙

랑(北樂浪) 곧 요동의 개평(蓋平)ㆍ해성(海城) 등지요, 남평양은 곧 지금의 평양이니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

이 지금의 한성(서울)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한 증거요, 지리지에 중반군(重盤郡 : 지금 재령의 딴 이름)이 한성

(漢城)이라 하였으니, 백제가 이미 평양을 함락하고 북진하여 지금의 재령에 도읍하였을 것이 사리에 맞을뿐더

러 만일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이라고 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하였다.”

고 기록하거나 “고구려의 한성을 빼앗아 도읍하였다.”고 기록하지 않고 구태여 평양과 한성을 갈라서 “고구려

의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에 도읍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랴? 이것은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한성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또 하나의 증거이다. 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물러난 한성 부근에 한수(漢水)ㆍ청목령

(靑木嶺) 등 지명이 있으므로 어떤 이는 위의 한수를 지금의 한강(漢江)이라 하고, 위의 청목령을 지금의 송악

(松嶽)이라고 하지마는 대개 고대에 서울을 옮기면 그 부근의 지명도 따라 옮겼으니 위의 한수ㆍ청목령 등은

다 근초고왕이 천도할 때에 따라 옮긴 지명이요, 지금의 한강과 지금의 송악이 아니다. 백제에 원래 세 한강

이 있었으니 지금 한성에 가까운 한강이 그 하나요, 앞에 말한 재령(載寧) 한성의 월당강(月唐江) 한강이 그 둘

이요, 나중에 문주왕(文周王)이 천도한 직산(稷山) 위례성(慰禮城) 한성에 가까운 지금 양성(陽城)의 한내가 그

셋이다. 이 책에서는 그 구별의 편의를 위하여 제1은 중한수(中漢水)ㆍ중한성(中漢城)이라 하고, 제2는 상한수

(上漢水)ㆍ상한성(上漢城)이라 하고, 제3은 하한수(下漢水)ㆍ하한성(下漢城)이라 한다.

 近仇首王 즉위 후의 海外 經略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연(燕)과 부씨(符氏)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

의 요서(遼西)ㆍ산동(山東)ㆍ강소(江蘇)ㆍ절강(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이런 기록이 비록 백제 본기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양서(梁書)와 송서(宋書)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晋平郡)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百濟 略有遼西晋平郡).”고 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부여(扶餘)가 처음에 녹산(鹿山)에

웅거하였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燕) 가까이로 옮겼다(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개 근구수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軍國) 대사를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고는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北京)을 빼앗아 요서(遼西)ㆍ진평(晋平)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 지금의 합이빈(哈爾濱)까지 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

서성(陝西省)에서는 진왕(秦王) 부견(符堅 : 역시 선비족)이 강성해지매,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워 지금의 산동(山

東)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피곤하게 하였으며, 남으로 지금의 강소ㆍ절강성 등지를 차지하고 있는 진(晋)

을 쳐서 또한 얼마간의 주군(州郡)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책의 기록이 대략 이러한 것이다.

그러면 진서(晉書)나 위서(魏書)나 남제서(南齊書)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

(國恥)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 지나에 들어가 주인 노릇한 모용씨의 연(燕)이나 부씨(符氏)의 진(秦)

이나 척발씨(拓跋氏)의 위(魏)나 근세의 요(遼)ㆍ금(金)ㆍ원(元)ㆍ청(淸) 같은 것은 저들이 자기네의 역대 제왕으

로 인정하므로 그 공업(功業)을 그대로 기록하였거니와 그 외에는 거의 이를 삭제하였을뿐더러 당태종(唐太宗)

이 백제와 고구려를 침노하여 핍박할 때 그 장사를 고무하기 위해 양국의 지나 침입 기록을 없애버리고는 조

선의 양국 토지의 절반이 본래 지나의 소유였다고 위증(僞證)하니, 진서는 당태종 자신의 저서이므로 말할 것

도 없이 백제 근구수왕의 대 지나 전공(戰功)을 뺐을 것이고, 위서ㆍ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것이므로

또한 구수왕의 서정(西征) 이야기를 뺐을 것이며, 오직 양서(梁書)나 송서(宋書)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

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疏略)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流傳)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

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뺐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

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이 10여 년은 태자로, 10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백제서기(百濟書記) - 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밖에 없

다.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

다. 근구수의 근(近)은 음이 ‘건’이니 백제 때에는 성(聖)을 ‘건’이라 하였으므로, 근초고ㆍ근구수ㆍ근개루(近蓋

婁)의 근(近)은 다 성(聖)을 의미하는 것이요, 구수(仇首)는 음이 ‘구수’, 구수는 마구(馬廐)를 일컬음이므로 일본

의 성덕태자의 성덕(聖德)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近)을 가져간 것이요, 성덕태자가 마구간 언저리에서 났으므

로 구호(廐戶)로 이름했다고 하는 것은 근구수의 구수(仇首)를 본받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덕태자가 헌법

17조를 제정했다.’고 하는 것과 ‘불법(佛法)을 들여갔다.’고 하는 것도 다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

여 이를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전 가운데 넣은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기원

384년)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晋)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이를 빙거하여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지마는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일을 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쓴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할 것이거니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 기원 383년이요, 침류왕 원년 기원 384년이 아니다.

제 3장 廣開土大王의 북진정책과 鮮卑 정복

 광개토대왕의 北討南征의 시초

기원 384년에 근구수왕(近仇首王)이 죽고 맏아들 침류왕(枕流王)이 왕위를 이은 지 2년 만에 죽으므로, 둘째아

들 진사왕(辰斯王)이 즉위 하였다. 진사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다 일컬어졌으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

구수왕이 성취한 강대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인민을 가혹하게 부려서 청목령(靑木嶺) - 지금의 송도(松都)로부터

팔곤성(八坤城) - 지금의 곡산(谷山) 등지까지 성책(城柵)을 쌓고, 다시 서쪽으로 꺾어 서해(西海)까지 이르러 천

여 리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게 하고,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장려한 대궐을 짓고 큰

연못을 파서 여러 가지 고기를 기르고 연못 가운데는 가산(假山)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이상한 풀을 길러서 오

락이 극도에 이르러 인민이 원망하고, 해외의 영토는 다 적국에게 빼앗겨 나라의 형세가 점차 쇠약해졌다.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은 곧 진사왕과 한때이니 조왕(祖王) 피살의 원수와 국토를 깎인 치욕을 갚기 위해

늘 백제 치기를 별렸다. 이때 선비의 모용씨(慕容氏)가 진(秦)에게 망하고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강성하여 90

만 군사로 동진(東晋)을 치다가 크게 패했는지라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하여 요동ㆍ북낙랑(北樂浪)ㆍ현도 등 군

을 다 회복하였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수(慕容垂)란 자가 다시 궐기하여 지금의 직예성(直匠省)에 웅거하여 천

왕(天王)의 자리에 나아가 나라 이름을 다시 연(燕)이라 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직접

거리고, 또 몽고 등지에 와려족(䂺麗族 : 本紀의 契丹)이 강성해져서 고구려의 신성(新城) 등지를 침략하였다. 그

래서 고국원왕은 즉위 후에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고 와려족을 몰아내서 북쪽 경계를 지키기에 급급하

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고국양왕 말년에 이르러 태자 담덕(談德) 곧 뒤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병마(兵馬)

를 맡아 매양 신속한 전략으로 백제의 군사를 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회복하니, 진사왕이 여러 번

크게 패하여 드디어 한강(漢江) 남쪽의 위례성(慰禮城) - 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南漢山)으로 도읍을 옴기고,

담덕의 군사가 두려워서 나아가 싸우지 못하여, 중한수(中漢水) 지금 한강 이북의 땅이 거의 고구려의 차지가

되고 관미성(關彌城) - 지금의 강화(江華)는 예부터 천험(天險)으로 일컫는 곳이지마는 또한 담덕의 해군에게 함

락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을 기록하였으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석에는 이런 말이 없음은 무슨 까닭

인가? 삼국사기는 원래 고기(古記)에 의거한 것인데, 고기가 이제 전하지 않지마는 여러 책에 인용된 고기의

문자를 보면 편년사(編年史)가 아니고 기전체(紀傳體)이기 때문에 연대의 조사가 매우 곤란하다. 김부식이 착실

히 조사해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모든 사실을 각 왕의 연조에 분배하였으므로 아라가라(阿羅加羅)의 멸망은 법

흥왕(法興王) 원년의 일인데 진흥왕(眞興王) 37년의 일이라 하였고, 담덕의 석현(石峴) 등 성의 회복과 나려족의

격퇴는 고국양왕 말년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태자 담덕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왕이 된 뒤의 일로 잘못 기록하

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잘 분별한 뒤에 삼국사기를 읽는 것이 좋다.

 광개토대왕의 䂺麗 원정

고구려 태자 담덕(談德)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려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즉위 5년,

기원 395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ㆍ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부락 6, 7백을 파

괴하고 소ㆍ말ㆍ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산은 수문비사(修文備史)에 지금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와룡(臥龍)

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甘肅省)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蒙古地

誌)에 의하면 소금기[鹽分]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吉蘭泰)란 염수가 있어 물가

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

금의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이 원정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누락되었고, 광개토왕의 비문에만 기록되었는데 와려가 혹시 본기에 있는 대로 글안

[契丹]이 아닌가 하지마는 실은 글안은 선비(鮮卑)의 후예니 광개토왕 당시의 선비는 모용씨ㆍ우문씨 등이요,

글안이란 명칭이 없었으니 본기의 글안은 곧 후세 역사가들이 와려를 글안으로 망령되게 고친 것이다. 와려가

글안이 아니면 어느 종족인가? 위서(魏書)나 북사(北史)에 의하면 흉노(匈奴)의 후예인 유유(蠕蠕)라는 종족이 지

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한때 강성하였으니 와려나 유유가 그 글자의 음이 ‘라라’이니 와려는 곧 흉노의

후예이다.

 광개토대왕의 倭寇 격퇴

왜(倭)는 일본의 본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北海道)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

은 대화족(大和族)이라한다. 그러나 일본음에 화(和)ㆍ(倭)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本

州ㆍ四國ㆍ九州)에서 고기잡고 사냥으로 생활을 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縫織)과 농작(農作)과 그 밖의 백공(百工)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

(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쳐주고 백제의 가명(假名) 곧 백제의 이두자(吏讀字)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假名)

란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자라는 것이다. 왜가 이와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

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해서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여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빼앗김을 통분히 여거 기원 391년(광개토왕 원년)에 왕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

을 맺었다. 5년(기원 395년)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 백제의 연해(沿海)와 연강(沿江)의

일팔성(壹八城)ㆍ구모로성(臼模盧城)ㆍ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ㆍ관미성(關彌城)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

(彌鄒城)ㆍ야리성(也利城)ㆍ소가성(掃加城)ㆍ대산한성(大山韓城)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

리수(阿利水) - 지금의 월당강(月唐江)을 건너 백제 군사 8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다급하여

왕제 한 사람과 대신 10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1천 명,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고 ‘노객(奴客)’의 맹서(盟

書)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蛇山) - 지금의 직산(稷山)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新慰禮城)’이라 일컬었다.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의 싸움이 있을 적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倭兵)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

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機先)을 제어하여 왜를 격파해서 신라

를 구원하였다. 임나가라(任那加羅) - 지금의 고령(高靈)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신라의 내물왕(奈勿王)이 몸소 광

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 407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水戰)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만여 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가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

 광개토대왕의 丸都 遷都와 鮮卑 정복

광개토왕은 야심이 많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인물이지마는 동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만은 대단하였다. 그래

서 백제를 공격함은 그가 왜와 결탁함을 미워해서이지 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쪽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奉天省)ㆍ직예성(直匠省) 등지를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남쪽

에 대한 전쟁은 늘 소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요, 북쪽의 전재이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제5의 서울인 안시성(安市城) - 지금 개평(蓋平) 부근으로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10여 년 전쟁에 계속

하여 매양 허를 찔러 불의에 쳐서 선비를 격파, 마침내 요동으로부터 요서(遼西) - 지금의 영평부(永平府)까지

차지하니, 상승(常勝)의 명장이라 일컫던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도 패하여 물러나고, 그 뒤를 이은 연왕(燕

王) 성(盛)ㆍ희(熙) 등 지나 역사상 일대의 효웅들이 다 꺾여서 할 수 없이 수천 리의 땅을 고구려에게 떼어주

어 광개토왕이란 그 존호(存號)와 같이 국토를 넓혔다. 진서(晉書)에 겨우 “태왕(太王 : 好太王)이 연 평주(燕平州)

의 숙군성(宿軍城)을 침노하므로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달아났다.”고 기록하였을 뿐이고, 그 외에

는 도리어 연(燕)이 상승한 것으로 기록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춘추(春秋)에 적(狄)이 위(衛)를 멸망시킨 것을

기록하지 않음과 같이 외국과의 전쟁에 패한 것을 숨기는 것은 지나 사관(史官)의 상례거니와 당시 이 모용씨

(慕容氏)의 연이 멸망하고 척발씨(拓跋氏)의 위(魏)가 강성하였음도 호태왕이 연을 공격한 것과 직접으로 관계가

있고, 동진(東晋)의 유유(劉裕)가 일어나서 선비족(鮮卑族)과 강족(羌族)을 이기고 송고조(宋高祖 - 앞서 말한 劉裕)

가 황제될 터를 닦은 것도 호태왕의 연을 공격한 것과 간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인데, 저들이 그 완고하고 편벽

된 상례를 지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원 5세기 초의 지나 대국(大局)의 변화한 원인이 가

려진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晉書)완 달리 곧 호태왕의 후손 제왕이 세운 것인데, 그 가운

데 선비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

해 집안현(輯安縣)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영자평(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필담(筆談)으로 한 비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譆 : 역시 만주 사람)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기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칼과 도끼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 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의 정작 선비(鮮卑)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平州)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 자꾸 나아갔더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전호 이상으

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신(燕臣) 풍발(馮跋)이 연왕 희(熙)를 죽

이고, 고구려의 선왕의 서손(庶孫)으로 연에서 벼슬하던 고운(高雲)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

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北進) 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호태왕은 기원 375년(백제 근구

수왕 원년)에 나서 기원 391년에 즉위하여 413년에 돌아가니 나이 39살이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조각난 비석이 지금 봉천성 집안 현 북쪽 2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대략 21척(폭 4척 7

촌 ~ 6척 5촌)이니,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榮禧)라는 이가 발견하여 인행(印行)하였는데 비석에 떨어져나간 글

자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 사람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해서 팔았으나 그 떨어져나간 글자를 혹 석회로 발

라서 글자를 만든 곳이 있어서 학자들이 그 진상을 잃었음을 한탄한다.

제 4장 長壽太王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 長壽太王의 歷代 政策의 변경

기원 413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491년에 돌아가니 재위 79년이었는데, 이 79년 동

안은 조선 정치사상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기간이다. 무슨 변화인가? 곧 고구려 역대 제왕들이 혹은 북진

주의(北進主義)를 쓰고 혹은 남북병진주의(南北竝進主義)를 써왔는데 북수남진주의(北守南進主義)가 장수태왕 때부

터 비롯되어 드디어 남방 세 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을 환기(喚起)시켰다.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졌고,

신라와 가라(加羅 : 駕洛)도 차차 강성해져서 전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고구려 정치가가 되어서는 부득이

남쪽을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광개토왕은 다만 외족(外族) 여러 나라 지나ㆍ선비ㆍ와려(䂺麗) 등을 정복하여 동족 여러 나라는 자연 그 깃발

아래 무릎을 꿇도록 하였거니와 장수태왕은 이 정책을 위험시하여 먼저 도족 여러 나라를 통일한 뒤에 외족과

싸우는 것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광개토왕의 정책을 변경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수남진주의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에 연(燕)의 신하 풍발(馮跋)이 연왕 희(熙)를 죽이고 고구려의 지손(支孫) 고운(高雲)을 세워 황제를 삼아

서 광개토왕의 문죄(問罪)를 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서서 천왕(天王)이라 하였

다. 제2세 홍(弘)에 이르러는 선비 별부(別部)의 척발씨(拓跋氏)가 지금의 산서(山西) 등지에 나라를 세워 날로

커져서 황하(黃河) 이북을 거의 다 차지하고 군사를 내어 연을 치니 홍의 국토가 날로 줄어들어서 견디어내기

가 극히 어려우므로 자주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서 구원을 빌었다. 장수왕은 북수남진(北守南進)이 그의 작정한

정책이었으므로 위(魏)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연이 모용희(慕容熙) 이래로 백성의 힘을

빼앗아 대궐과 동산을 극히 장려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중에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수없이 모아들여서 음탕과

호사가 모든 나라의 으뜸이었으므로, 비상한 이기심을 가진 장수왕이 이를 탐내어 연의 사신을 속여 “고구려

가 남쪽 백제의 난이 있어 아직 큰 군사를 낼 수 없으나 연왕이 즐겨 고구려에 와서 머무르면 마땅히 장사를

보내서 영접하고 일후에 기회를 보아 구원해주겠느라.”고 하니 연왕 홍(弘)이 이를 허락하였다.

기원 426년에 위가 기병 1만과 보병 수만을 내어 연의 서울 화룡(和龍) - 지금의 업(鄴)을 침노하매, 장수왕이

‘말치[左輔]’ 맹광(孟光)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연왕 홍을 맞이하게 하니, 위의 군사가 이미 연

의 서울에 이르러 서문으로 입성하는지라 맹광이 급히 동문으로 들어가 위에 항복한 연의 상서령(尙書令) 곽생

(郭生)의 군사와 싸워 곽생을 쏘아 죽이고 격파하고 대궐에 불을 지르고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거두어가지고

돌아왔다. 위의 임금은 그 보물과 미인을 빼앗겼음은 나무라지 못하고, 다만 연왕 홍이 고구려에 머무름을 싫

어하여 그를 넘겨주기를 청하였으나 장수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환심을 잃지 아니하려 하여

자주 위와 교통하고 또 남지나의 송(宋)을 친히 사귀어 위를 견제하였다.

 圍碁僧의 음모와 백제의 疲弊

장수왕은 외교의 수단으로 지나의 위(魏)와 송(宋)을 견제하고는 백제를 파멸시키기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왕

은 부왕 광개토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측하고 악독한 음모가였다. 적국에 대하여 칼이나 활로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심복을 썩인 뒤에 손을 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

양으로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문란케 할 기묘한 계략을 가진 책사(策士)를 구하였는

데, 그 조서에 응하여 불교승(佛敎僧) 도림(道琳)이 나섰다.

당시 백제의 근개루왕(近蓋婁王)은 바둑의 명수였고 도림도 바둑의 명수였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비밀히 아뢰

어 거짓 죄를 지은 사람의 행장으로 차려 백제로 들어가서 근개루왕을 만나보고 바둑동부가 되어 아침 저녁으

로 근개루왕을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 근개루와은 자기의 바둑 적수가 천하에 오직 도림 한 사람뿐이라 하여

사랑하기 짝이 없었다. 도림이 몇 해 동안 근개루왕의 곁에 있어 왕의 성격과 행동을 자세히 알아보고는 “신

이 한낱 망명해온 죄인으로서 대왕의 총애를 받아 의식 거처를 이같이 사치하고 아름답게 하니 이 은혜를 갚

을 길이 없습니다. 이제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한 마디 대왕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왕의 나라가

안으로는 산을 끼고 밖으로는 바다와 강이 둘러 있어 적병이 백만이라도 어찌하지 못할 천험(天險)이니, 대왕

께서 이같은 천험에 의하여 숭고한 지위와 부유한 왕업을 가지고 사방의 눈과 귀를 일으켜세울 만한 기세를

지으시면 사방의 여러 나라들이 바야흐로 존숭하여 섬기기를 겨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을 높이

쌓지 못하시고 대궐을 크게 짓지 못하시며 선왕의 해골을 작은 뫼에 파묻고 인민의 집은 해마다 장마에 떠내

려 보내서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 많으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우러러보며 높이 받들려고 하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근개루왕이 그의 말을 달게 여겨 전국의

남녀를 전부 징발하여 벽돌을 구워 둘레 수십 리나 되는 왕성(王城)을 높이 쌓고 성 안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대궐을 짓고 욱리하(郁里河) - 지금의 양성(陽城) 한래 가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대석관(大石棺)을 만들어 부왕

의 해골을 넣고 큰 왕릉을 만들어서 묻고, 왕성의 동쪽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쌓아 어떠

한 장마에도 물의 재난이 없도록 하였다.

이 같은 공사를 치르고 나니 국고가 탕진되고 군자(軍資)도 모자라고 백성들의 힘도 쇠잔해지니, 도둑이 벌떼

처럼 일어나서 나라 형세가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았다. 이에 도림이 성공한 줄을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

에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 고구려군의 침입과 近蓋婁王의 순국

장수왕이 도림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치’ 제우(齊于)와 백제의 항복한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ㆍ고

이만년(古爾萬年) 등을 보내서 3만의 군사로 백제의 신위례성(新慰禮城) - 지금 직산(稷山) 부근의 고성을 치니,

근개루왕이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도림의 간사한 계책에 속은 줄 알고 태자 문주(文周)

를 불러 “내가 어리석어서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가 이 꼴이 되었으니 비록 위급한 환난이 있은들 누가

나를 위하여 힘쓸 이가 있겠느냐? 고구려 군사가 이르면 나는 국가의 희생이 되어 속죄하려니와 네가 나를

따라 부자가 함께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는 빨리 남쪽으로 달아나 의병을 모으고 외국의 원조를

청하여 조상의 업을 이어라.”하고 울면서 문주를 떠나 보냈다. 제우(齊于) 등이 북성(北城)을 쳐 7일 만에 함락

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성(南城)을 치니, 온 성중이 떨고 소동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근개루왕이 친히 나가서

싸우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잡혔다. 걸루(桀婁)ㆍ만년(萬年) 등이 처음에는 전일 군신의 의리를 차려 말에서 내

려 두 번 절하더니 갑자기 왕의 얼굴에 세 번이나 침을 뱉어 꾸짖고, 왕을 결박하여 아차성(阿且城) - 지금의

광주(廣州) 아차산(峨嵯山)에 이르러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해쳤다. 이에 신위례성

- 지금의 직산(稷山) 이북이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을 피해 신위례성으로 서울을 옮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정다산(丁茶山)이

직산을 문주왕(文周王) 남천(南遷) 후의 잠도(暫都 : 임시로 잠시 있던 서울)라 한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사성(虵

城)은 직산의 옛 이름이고 숭산(崇山)은 아산(牙山)의 옛 이름이니, 이 장(章)을 참고하면 직산 위례성이 문주왕

이전 곧 아신왕이 천도한 곳임이 더욱 명백하다.

제 8편 남방 여러 나라의 對 고구려 攻守同盟

제 1장 네 나라 연합군과의 싸움과 고구려의 퇴각

 신라ㆍ백제 두 나라 관계의 유래와 비밀동맹의 성립

장수왕의 남진정책(南進政策)이 비록 한때 백제를 무너뜨렸으나 마침내 남쪽 세 나라 - 신라ㆍ백제ㆍ가라의

연맹(聯盟)을 이루게 한 원인이 되어 역사상 초유의 대변국(大變局)을 이루었다. 이 연명의 주력이 신라에 있었

으므로 이제 그 경과를 서술함에 있어, 먼저 신라 대 백제ㆍ고구려 관계의 유래부터 대략 말하려 한다.

신라는 원래 그 지방이 고구려와 멀고 백제와 가까워서 고구려보다 백제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신라ㆍ백제 관계의 기록은 믿을 것이 적으니 그 한두 예를 들어보겠다. 이를테면 신라

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이후로 백제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

山) 봉산(烽山)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으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

고,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당년에 벌써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어찌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백

명 정도의 군사를 내었으랴? 또 한 가지, 두 나라가 간혹 화호(和好)한 일이 있으나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

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큰 나라로서 어찌 늘 먼저 굴복하였으랴? 백

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加羅) 6나라와 사벌(沙伐)ㆍ감문(甘文) 등 완충국(緩衝國)이 있었는데 어찌 백제가 가라

등의 나라들과는 한 번의 충돌도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하였으랴?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

므로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지나의 삼국지(三國志)ㆍ남사(南

史)ㆍ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

한 기록일 것이다.

근구수왕(近仇首王) 이후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을 벌이는 동안에 신라는 비로소 자립하여 백제와 대항하다가

오래지 않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나와 국위가 크게 떨치자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왜병(倭兵)을 불러 북으로

고구려를 막고 남으로 신라를 치니, 신라의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은 고구려의 구원병을 얻어 왜를 물리치고

몸소 광개토왕에게 조알(朝謁)하고 왕족 실성(實聖)으로 볼모를 삼았다. 내물이사금이 돌아가자 내물의 아들 눌

지(訥祗)가 아직 어리므로 실성이 귀국하여 왕위를 잇고, 눌지ㆍ복호(卜好) 형제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에 실성왕이 고구려의 귀인(貴人)과 결탁하여 눌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고구려 사람이 듣지 않고 눌지를 돌

려보내서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눌지이사금(訥祗尼師今)이 이와같이 고구려로 하여 왕위를 얻었으나 고구려가 백제를 아우르면 신라도 홀로

견디어내지 못할 것을 알고, 박제상(朴堤上)을 보내서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정서이 한낱 볼모의 있고 없음을

달리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고구려의 군신을 꾀어 왕의 사랑하는 아우 복호(卜好)를 돌려오고 비밀히 백제와 통

하여 고구려를 막으려 하였으며, 백제도 왜(倭)는 멀고 신라는 가까우므로 왜를 끊고 신라와 사귀어 고구려를

막기로 결정하여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동맹이 성립하였다. 삼국사기에, 눌지이사금 39년, 기원 455년에 고

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눌지이사금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곧 위에 말한 두 나라

동맹으 결과이거니와 이 밖에도 고구려 대 동맹 양국의 침략전과 동맹 양국 대 고구려의 방어전이 잦았을 것

인데 기록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사문(史文)이 떨어져 나가 없어진 때문이다.

 신라ㆍ백제ㆍ任那ㆍ加羅 네 나라의 동맹

장수왕이 신위례성(新慰禮城)을 침노하자 근개루왕(近蓋婁王)의 태자 문주(文周)가 신라에 와서 급함을 고하니,

신라는 동맹의 의리로뿐 아니라 그 자위상(自衛上) 부득이 출병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이

군사 1만으로 구원에 나섰으나 근개루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은 벌써 무너졌으므로, 문주왕(文周王)은 서울을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 웅진(熊津)에 도읍하니 웅진은 광개토왕의 비문에 고모나라(古模那羅)라고 한 곳이다.

둘 다 ‘곰나루’로 읽을 것이니 전자는 뜻으로 쓴 이두자요, 후자는 음으로 쓴 이두자이다. 지금의 공주(公州)가

당시의 ‘곰나루’이다.

이때 지금의 한강(漢江) 이남에 신라ㆍ백제 이외에 가라(加羅) 등 여섯 나라가 있어서 지금의 경상남도를 나누

어 웅거하였음은 제3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최초에는 신가라가 종주국(宗主國)이고 임나(任那)ㆍ아라(阿羅)ㆍ고자

(古自)ㆍ고령(古寧)ㆍ벽진(碧珍)의 다섯 가라는 이에 딸려 있었는데 그 뒤에 신가라와 다른 세 가라는 미약해져

서 정치문제에 관여할 권리를 잃고 오직 임나와 아라 두 가라만이 강성해져 신라와 맞섰다. 그래서 광개토왕

이 왜를 칠 때에도 상당한 군사를 내어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도와서 왜와 싸웠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신

위례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니 두 가라가 다 크게 놀라 스스로 보전하기를 도모하는 동시

에, 신라와 백제도 그 두 나라의 힘이 고구려를 막아냄에 부족함을 느끼고 드디어 두 가라의 동맹가입을 권유

하여, 이에 신라ㆍ백제 두 나라 대 고구려의 공수동맹이 신라ㆍ백제ㆍ임나ㆍ아라 네 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

으로 변하였다. 장수왕은 신라가 전번의 고구려의 큰 은혜 - 광개토왕이 왜군을 정벌한 일을 잊고 백제와 연

합함을 크게 분하게 여겨 기원 481년에 대병을 일으켜 신라의 동북부를 침공하니, 신라의 소지마립간(炤知麻

立干)이 몸소 비열홀(比列忽) - 지금의 안변(安邊)에 이르러 방어하다 크게 패하여 고구려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남으로 나와 고명(孤鳴) - 지금의 회양(淮陽) 등 일곱 성을 함락시키니, 백제의 동성대왕(東城大王 : 다음

장 참조)이 두 가라국(加羅國)과 연합하여 길을 나누어 응원해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그 잃은 땅을 회복하

였다.

 네 나라 동맹이 40년 계속됨

네 나라 동맹으로 인하여 장수왕의 남진 철편(鐵鞭)이 꺾이고 백제와 신라가 다 스스로 보전함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 조선 정치사상 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백제 동성대왕이 해외를 경략(經略

: 다음 장 참조)하여 백제가 고구려 이상의 강국임을 자랑하던 때까지도 이 동맹이 오히려 계속되었다. 기원

494년에 신라가 살수(薩水) - 지금의 대동강 상류 부근에서 고구려와 싸우다가 견아성(犬牙城)에서 포위당하여

구원을 청하므로 백제의 동성대왕이 군사 3천을 보내 고구려를 격퇴하고 포위를 풀었으며,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의 반걸양(半乞壤)을 치자 신라 소지마립간이 또한 구원병을 보내 고구려 군사를 격퇴하였으니, 이 동맹이

대개 40여 년 계속되었음이 분명하며, 이 동맹이 해체된 뒤에야 신라가 가라(加羅) 침략을 시작하였다.

제 2장 백제의 魏寇 격퇴와 해외 식민지 획득

 東城大王 이후 백제가 다시 강해짐

백제는 신위례성(新慰禮城)이 무너져서 외우(外憂)가 한창 심한 가운데 내란이 또한 잦아 문주왕(文周王)은 곰

나루[熊津]로 천도한 뒤 4년(연표에는 3년) 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 해구(解仇)에게 죽임을 당하고, 맏아들 임

근왕(壬斤王 : 본기에는 三斤이라 하였으나 그의 딴 이름 壬乞로 보면 三斤의 三은 壬의 잘못)이 13살의 소년으로서

즉위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좌평(佐平) 진남(眞男), 덕솔(德率) 진로(眞老)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해구를 벤 영

주(英主)였지만 3년 만에 15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그 해 기원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마모대(摩牟大)이니 전사(前史)에 마모(摩牟)라 쓴 것은 끝의 한 자를 생략한 것이고 모대(牟大)라고 쓴 것은 위

의 한 자를 생략한 것이다. 왕이 즉위 당시의 나이가 얼마였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나 임근(壬斤)

의 종제(終弟)이니까 열너덧 살에 지나지 못했을 것이다. 왕은 어린 소년으로 이같이 어려운 판국을 당했지마

는 천성이 숙성하고 백발백중의 활쏘는 재주가 있어 고구려와 위(魏)를 물리쳐 국난을 평정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 지나의 지금의 산동(山東)ㆍ절강(浙江) 등지를 점령하고 일본을 쳐서 속국을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전공이 허다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만 당시 천재(天災)인 한두 번의 홍수와 가뭄과 왕의 사냥한 일을 기록하

였을 뿐이요, 그 나머지는 모두 뺐으이 니는 신라 말기의 문사들이 삭제한 것일 것이다. 이제 다음에 그의 약

사(略史)를 말하기로 한다.

 장수왕의 음모와 魏兵의 침입

이때 지나는 황하(黃河) 남북으로 갈려 곧 위(魏)ㆍ제(齊) 두 나라로 분립하였다. 위는 곧 선비족(鮮卑族)의 척

발씨(拓跋氏)로 모용씨(慕容氏)의 연(燕)을 대신하여 일어난 나라인데, 그 세력이 대단히 커져서 당시 유일한 강

국으로 치게 되었다. 그런데 장수왕은 남쪽 네 나라의 동맹으로 인해 백제를 합치지 못하겠으므로, 손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신랄한 수완을 부려 제3국으로 하여금 먼저 백제를 격파하게 하고 자기는 그 뒤에서 이

익을 거두려고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황금ㆍ명주 10되를 위왕에게 보내주다가 3년 만에 사신 예실불(芮悉弗)

을 빈 손으로 위에 보냈다. 위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예실불이 “사비(泗沘) 부여(扶餘)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

라(涉羅 : 지금의 濟州)에는 명주연(明珠淵)이 있어 두 가지 보물이 한량없이 나므로 전일에는 이를 캐어서 폐하

에게 바친 것인데, 이제 사비부여는 백제의 서울이 되고 섭라도 백제가 정복하여 황금산과 명주연이 다 그의

손에 들어가서 우리 고구려인은 그 두 가지 보물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폐하께 갖다드릴 것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위의 김금과 신하들이 이 말을 곧이듣고 백제를 쳐서 황금산의 황금과 명주연의 명주를

빼앗을 야욕이 치밀어 이에 동침(東侵)의 군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에는 위서(魏書)에서 뽑아다가 예실불의 일을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文咨王) 때의 일로 기록하였으나

남양예씨(南陽芮氏)의 족보에 의하면 예실불을 그 시조라 하고 그가 위에 사신간 일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기

록하였으니, 대개 위가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제(齊) - 곧 그 육지가 맞닿아 있는 나라를 두어두고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싸운다는 것은 해운(海運)이 불편한 고대에 있어서 땅을 다투려는 자의 일이 아니니 예실

불의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가지려 하였음이 사실인 듯하고, 위의 백제 침입이 장수왕 때요 문자왕 때가

아니니 삼국사기의 연대가 틀린 듯하므로 이제 삼국사기를 버리고 예씨의 족보를 좇는다.

 魏兵의 再敗

지나 대륙의 나라로 조선에 침입한 자가 많으나 그 군사의 수가 대략 10만에 이른 것은 척발씨의 위가 시초

였고, 이같이 큰 적을 격퇴한 이는 백제의 동성왕이 처음이었다. 위서(魏書)에는 그 나라의 수치를 숨기기 위

해 이를 기록하지 않았고, 삼국사기는 백제의 고을 샘하여 그 사적을 삭제한 신라의 사필(史筆)을 그대로 좇아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오직 남제서(南齊書)에 그 대략이 기재되었으나 그것도 당 태종(唐太宗)의 훼방으로 대부

분은 빠지고 겨우 동성왕이 남제(南齊)에게 보낸 국서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의 편린(片鱗)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국서는 완전한 원문이냐 하면, “중국인이 남의 시문(조선인의 詩文)을 고침에 대담하여 중국을 ‘수방(殊方)’

혹은 ‘원방(遠邦)’이라 쓴 자구는 저네가 채집(採輯)할 때에 반드시 ‘황도(皇都)’ 혹은 ‘대방(大邦)’등으로 고친다.”

라고 한 박연암(朴燕巖) 선생이 말이 있으니, 심상한 음풍영월(吟風咏月)의 시나 글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정치상

에 관계되는 국서이랴. 우리가 그 국서로 인하여 ① 기원 490년에 위가 두 번이나 보병ㆍ기병 수십 만을 내

어 백제를 침노하였음과 ② 동성왕이 첫 번째에 삭녕장군(朔寧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 건위장군(建威將

軍) 팔중후(八中侯) 부여고(扶餘古), 건위장군 부여역(扶餘歷), 광무장군(廣武將軍) 부여고(扶餘固)를 보내어 위병을

맞아 싸워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음과 ③ 동성왕이 두 번째에는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 사법명(沙法

名),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辟中王) 찬수류(贊首流),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 해례곤(解禮昆), 광위장

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 목간나(木干那)를 보내어 또 위병을 맞아 쳐서 수만 명을 목베었음과 ④ 동성왕이

이 두 번의 큰 싸움에 큰 승리를 얻고 국서와 우격(羽檄 : 나라의 급한 일에 내는 檄文)을 여러 나라에 보내서 이

를 과시하였음과 ⑤ 동성와이 여러대 이래로 쇠잔해진 백제에 나서 국세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두 번의 큰

싸움의 승리를 의지하여 국운을 만회하고 마침내 해외 경략(經略)의 터를 닦았음과 ⑥ 당시 출전하 대장들은

저근ㆍ사법명ㆍ부여고ㆍ부여역ㆍ부여고ㆍ찬수류ㆍ해래곤ㆍ목간나 등이 있었음을 알 뿐이요, 전선(戰線)이 얼마

나 길었으며 싸움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후자는 육전(陸戰)이거니와 전자는 육전이었는지 해전이었는지 이는

다 분명치 아니하다.

어찌하여 전후 다 차례의 전쟁에 대장은 각각 네 사람이었던가? 이는 백제왕도 부여나 고구려와 같이 중(中)

ㆍ전(前)ㆍ후(後)ㆍ좌(左)ㆍ우(右)의 5군(軍) 제도를 써서 동성왕이 중군(中軍)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네 사람은

각기 네 원수가 된 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왕의 신하로서 또한 왕이 되었는가? 신(伸)

은 조선의 고제(古制)이니 대왕은 ‘신하’의 번역으로 곧 한 나라에 군림한 천자를 일컫는 것이고, 왕은 ‘한’의

번역으로 곧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小王)들의 칭호이기 때문이다.

 東城王의 海外 經略과 중도에 돌아감

조선 역대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것은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과 동성왕 두 시대이다. 동성왕 때

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영토가 넓었으므로,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되, “서

(西)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

(倭)에 이른다(西渡海至越州 北渡海至高麗 南渡海至倭).”라고 하였는데,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이니 회계 부근이

다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고도(古都)를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고, 고려는 당인(唐人)이 고구려를 일컬은 명사이다. 고구려의 국경

인 요수(遼水) 서쪽 - 지금의 봉천(奉天) 서쪽이 다 백제의 소유였으니,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 “금주(錦州)ㆍ

의주(義州)ㆍ애훈(愛琿) 등지가 다 백제이다.”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

인용한 구당서의 위 두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을 의심할 나위 없다. 백제

가 위의 해외 식민지를 어느 때에 잃었는가 하면 성왕(聖王)의 초년에 고구려에게 피하고 말년에 신라에게 패

하여 나라의 형세가 한때 쇠약해졌으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해외 식민지가 거의 몰락하였을 것이다.

동성왕이 이같이 전공을 이루었으나 수해와 한재가 심한 때임을 돌아보지 않고 화려하고 큰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그 앞에 원림(園林)을 만들고 못을 파서 진기한 새와 기이한 고기를 기르고 또 사냥을 즐겨 자주 거동을

하였는데, 기원 501년 11월에 사비부여(泗沘扶餘) 마포촌(馬浦村)의 사냥에서 큰 눈을 만나 묵고 있다가 왕을

원망하던 위사좌평(衛士佐平)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苩加)의 자객 칼에 죽으니 재위 23년이요 그 나이 겨우

30여 살이었다.

제 9편 三國 血戰의 시작

제 1장 신라의 발흥

 眞興大王의 花郞 설치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가 발호(跋扈)하여 사대주의

파(事大主義派)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ㆍ풍속ㆍ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는 판

에 이에 반항ㆍ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

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화랑파(花郞派)에 스스로 기록

한 문헌인 선사(仙史)ㆍ화랑세기(花郞世紀)ㆍ선랑고사(仙郞故事) 등은 다 없어져서 화랑의 사적을 알자면 오직 화

랑의 문외한인 유교도(儒敎徒)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불교도 무극(無極 : 一然)의 삼국유사 두 책 가운데

과화숙식(過火熟食 : 생각지 않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유익하게 됨)으로 적은 수십 줄의 기록을 신뢰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수십 줄의 기록이나마 정확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이제 삼국사에 보인 화랑 설치의

실록(實錄)을 말하려 한다. 사기 진흥대왕 본기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37년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

가 모여서 떼지어 놀게 해서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채용해서 쓰고자 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골랐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그 무리가 3백여 명이 모였는데 두 여인

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억지로 술을 권하여 몹시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이 쳐형되니 무리들이 불화해져서 다 흩어져버렸

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골라 몸을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여 받드니 무리가 구

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道義)를 연마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기도 하며, 산수

(山水)를 유람하여 아무리 멀어도 아니 가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바로고 그름을 알아서 착한

사람을 골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래서 김대문(金大門)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

기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

序)에는 ‘나라에 현묘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교를 베푼 근원으로 신사(神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 : 유교ㆍ불교ㆍ선교)를 포함하고 있어 인간을 접화(接化)하며 또한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고 한 것은 노사구(魯司寇 : 孔子)의 취지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柱史 : 老子)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

어 행하라고 한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 釋迦)의 교화(敎化)이다.’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

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貴人)의 자제로서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몸을 단장하게 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여 섬겼다.’고 하였다.(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二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 以殺

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

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崔致遠鸞郞碑序曰 ‘國

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

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大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글의 끝에 김대문과 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화랑을 몹시 찬미한 듯하나 자세히 상고해보면 크게 잘못되고

황당하다. 사다함전(斯多含傳)에 의하면 사다함이 가라(加羅) 정벌에 참여한 것이 진흥대왕(眞興大王) 23년이니,

37년 이전에 이미 화랑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이제 37년에 화랑이 비롯하였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삼국유사

에 의하면 원화는 여자 교사이니 원화를 폐지한 뒤에 남자 교사를 두어 국선(國仙) 혹은 화랑이라 일컬었는데,

이제 원화를 화랑이라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김부식의 때에는 화랑의 명칭도 아주 끊어지지 않고, 화랑의

문적(文籍)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지은 소위 사기에는 그 설치의 연대를 모호하게 하고,

그 원류(源流)의 구별을 가리지 못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김부식은 유교도의 영수(領袖)로서 화랑파 윤언이(尹

彦頤)를 내쫓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한 자이니 그의 마음대로 하자면 삼국사기 가운데 화랑이라는 명사(名詞)를

한 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겠지마는 다만 그는 지나를 숭배하는 사람이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이고 지나의

서적에 나왔으면 이를 사기에서 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화랑을 시샘하여도 다만 지나의

대중 유사(大衆遺事)ㆍ신라국기(新羅國記) 같은 글 속에 화랑이라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은 사기에서도 빼지 못하

였다. 그가 이 장끝에 인용한 신라국기가 겨우 ‘택귀인자제(擇貴人子弟)’ 이하 모두 24자에 지나지 아니하나 도

종의(陶宗儀)의 설부(說郛)에 인용한 신라국기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

여……채용하여 쓰고자…….’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그 이하의 사실과 김대문ㆍ최치원의 논평

까지도 대개 신라국기의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와같이 신라국기에 있는 화랑 설치의 사

적을 인용하고,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말살해버렸다.

그 다음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랑의 실록은 다음과 같다.

“진흥왕이 즉위하였다……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남의 집 아름다운 처녀를 골라서 원화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 선비를 뽑고, 또 효ㆍ제ㆍ충ㆍ신(孝悌忠信)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

요(大要)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 俊貞娘) 두 원화를 선출하니 무리가 3,4백 명이나 모였다.

교정랑이 남모랑을 투기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남모랑을 취토록 마시게 하여 몰래 끌어다가 죽이고 북천(경

주 북쪽에 있는 내) 물 속에 돌로 눌러 매장시켰다. 무리들이 그녀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슬피 울며 흩어졌는

데 어떤 사람이 그 음모를 알고,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돌아다니며 부르게 하였다. 남모랑의 무

리가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대왕(진흥왕)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

였는데 몇 해 뒤에 왕이 다시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風月道 : 花郞道)를 일으켜야 하겠다고 생각

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로서 덕이있는 사람을 뽑아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고치고, 처음 설

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眞興王……卽位……多崇神仙 擇人家娘子

美艶者 捧爲原花 要聚徒選士 敎之以孝悌忠信 赤理國之大要也 及取南毛娘ㆍ姣貞娘兩花 聚徒三四百人 姣貞娘嫉妬毛娘多置酒

餘毛娘 至醉 潛舁去北川中 擧石埋殺之 其徒岡知去處 悲泣而散 有人知其謀者 作歌 誘街巷小童 唱於街 其徒聞之 尋得其尸於

北川中 乃殺姣貞娘 於是 大王下令 廢原花累年 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令 選良家男子 有德行者 改爲花郞 始奉薜原

花 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하여 좀 자세하나 상말에 이른바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이 나온 소리가 적지 아니

하니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선을 숭상하여 원화ㆍ화랑을 받들었다 하였으니 원화나 화랑이 도사(道士)나 황관

(黃冠 : 野人)의 종류란 말인가? 삼국유사의 작자는 불교도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작자인 유교도같이 남을 배

척하는 심술을 가지지 아니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기록이 모호하기는 매일반이다.

국선ㆍ화랑(國仙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선배’를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

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썼음은 이미 제3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선배’를 신수두 단(壇) 앞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

문을 힘쓰고 수박(手搏)ㆍ격검(擊劍)ㆍ사예(射藝)ㆍ기마(騎馬)ㆍ태껸ㆍ깨끔질ㆍ씨름 등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고

사방의 산수를 탐험하며 시와 노래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자고 먹고 하며, 평시에는 환난(患

難)의 구제, 성ㆍ길 등의 수축 등을 스스로 담당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서 공익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國仙)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위에 국

(國)자를 더하여 지은 이름이고, 화랑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배’가 조백(皀帛)을 입어 조의(皀衣)라 일컬은 것과

같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일컬은 것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이름이다. 원화는 마치 유

럽 중고시대 예수교 무사단(武士團)의 여교사(女敎師)처럼 남자의 정성(情性)을 조화하기 위하여 둔 여교사이니,

소재만필(昭齋謾筆)에 “화랑의 설(說)에 사람이 전쟁 중에 죽으면 천당(天堂)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노인이 되며,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소년이 된다고 하여 화랑들이 소년

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으니, 다만 국선(國仙)의 선(仙) 자로 인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구하

는 지나의 선도(仙道)로 알면 큰 잘못이다. 최치원이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株史)의 종지이다.”라고 한 것은 다만 국선의 교가 유ㆍ불ㆍ도 삼교의 특징을 갖추어 가졌음을

찬탄한 말이니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무위나 불언과는 거리가 아주 천만 리나 떨어진 교이다. 앞에 말한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玄妙)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삼국유사의 “득오(得烏)는 이름이 풍

류(風流)”라 이름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고, 앞에 말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

으켜야 한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 검군전(劍君傳)의 “나는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도를 또한 풍월이라고 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풍류는 지나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

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고, 풍월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咏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

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것이니, 대개 화랑의 도가 다른 학문과 달라 기술도 힘쓰지마는 음악과 시

가에 가장 전념하여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보인 진흥왕이 지은 도령가(徒領歌)와

설원랑(薛原郞)이 지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물론 화랑이 지은 것이거니와, 삼국유사에 이른바 “신라 사람

들이 향가(鄕歌)를 매우 숭상했다. 그러므로 왕왕 능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일이 많았다.(羅人尙鄕歌者 尙

矣……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 非一)”라고 한 향가 또한 거의 화랑의 무리가 지은 것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鄕

樂雜詠)을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많이 연극을 행했으니, 부여 사람이나 삼한 사람이나 노래를 좋아하여 밤

낮으로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아니했다 함은 삼국지에도 분명히 실려 있거니와, 신라가 습속(習俗)으로 교도(敎

導)의 방법을 세워 시가ㆍ음악ㆍ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하였기 때문에, 원래 조그만 나라로서 마침내

문화상ㆍ정치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의 원류(源流)를 적은 선사(仙史)ㆍ선랑고

사(仙郞故事)ㆍ화랑세기(花郞世紀) 등이 다 전해지지 않았으나, 선사는 곧 신라 이전, 단군 이래 고구려ㆍ백제까

지의 유명한 ‘선배’를 적은 것이니, 고구려 본기의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이

라 한 것이 곧 선사 본문의 한 구절일 것이고, 선랑고사ㆍ화랑세기 등은 곧 신라 이래의 선배를 적은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간혹 그것을 초록(抄錄)한 것이 있으나 이는 모두 의로운 다툼에 공이 있는 화랑의 졸도

(卒徒)들뿐이고, 3백여 화랑, 낭도(郎徒)의 스승들은 하나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여기서도 김부식이 화랑을 말살

하려는 심리가 나타나 있다.

 여섯 加羅의 멸망

김수로(金首露) 여섯 형제가 신가라(지금의 金海)ㆍ밈라가라(지금의 高靈)ㆍ안라가라(지금의 咸安)ㆍ구지가라(지금

의 高城)ㆍ별뫼가라(지금의 星州)ㆍ고링가라(지금의 咸昌)에 나뉘어 왕노릇을 하였음과 밈라ㆍ안라 두 가라가 네

나라 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방어했음은 이미 제4편과 제8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신라의 지증

(智證)ㆍ법흥(法興)ㆍ진흥(眞興) 세 왕이 연이어 여섯 가라를 잠식해 들어가서 진흥왕 때에 이르러는 여섯 나라

가 다 신라의 차지가 되어 지금 경상도가 완전히 통일되었다. 이제 여섯 가라 흥망의 약사(略史)를 말하고자

한다.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금관국(金官國)이라 한 것인데, 시조 수로왕(首露王) 때에는 신라보다 강성하

여 신라의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그 이웃의 조그만 나라인 음집벌(音汁伐 : 지금 경주 북쪽)과 실직(悉直 지금

의 三陟)과의 국토 분쟁을 해결짓지 못하여 수로왕의 중재를 청했는데, 수로왕이 말 한 마디로 해결을 지으니

세 나라가 다 기꺼이 복종하였다. 그 결과로 파사와이 수로왕에게 잔치를 베풀어 사례하는데, 신라 육부(六部)

의 우두머리의 한 사람인 한기부장(漢祗部長) 보제(保齊)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손을 접대하게 하였으므로 수

로왕이 노하여 종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보제를 죽였다. 파사왕은 감히 수로왕과는 맞서지 못하고 다만

탐하리를 죄주려 하여, 탐하리를 숨긴 음집벌국을 쳐 멸망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수로왕 이후에는 나라의 형

세가 날로 미약해져서 밈라가라의 침노를 받다가 신라 법흥왕 19년, 기원 532년 그 제10대 구해왕(仇亥王)이

국탕(國帑 : 나라의 재물)과 처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해버렸다. 안라가라는 그 연대와 사실을 거의 모르게 되

었으나,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남정(南征)할 때에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붙어 백

제에 대항하고,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구원을 빌었을 때에는 신라 네 나라 동맹에 참가하여 고구려를 방어했

으니, 비록 작은 나라였지마는 당시 정치문제에 빠지지 아니하는 나라였다.

전사(前史)에 안라가라가 멸망한 연조를 기록하였으나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증왕(智證王) 15년에 “소경(小京)

을 아시촌(阿尸村)에 두었다.”고 하였는데, 안라의 이두자가 아시촌이니, 지증왕 15년 이전에 안라가라가 이미

멸망한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는 “법흥왕이 대병으로 아시량국(阿尸良國)을 멸망시켰다.”고 했는데, 먼저 임금이

돌아간 해를 새 임금의 원년으로 잘못 기록함은 삼국사기에 여러 군데 보이는 일이라 지증왕 15년 지증왕이

돌아간 해는 곧 법흥왕의 원년일 것이니, 안라가라가 법흥왕 원년에 망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지증왕 때에 김이사부(金異斯夫)가 연변군관(沿邊軍官 : 국경 지방을 맡아 방어

하는 官吏)이 되어 말들을 국경에 모아놓고 날마다 군사들로 하여금 타고 달리게 하니, 가야(加耶) 사람들이 이

것을 늘 보아 예사로 알고 방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이사부가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는데, 이 가

야는 곧 안라가라를 가리킨 것이니 안라가라가 대개 지증왕 말년에 이사부의 손에 망하여 법흥왕 원년에 그

서울이 신라의 소경(小京)이 된 것으로서, 지리지의 말은 틀린 것이다.

밈라가라는 여섯 가라 중에서 그 건국 이후에 가장 신라와 악전고투하던 작은 강국이었다. 처음에는 거의 신

라와 싸울 때마다 이기다가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4년 기원 209년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포상팔국(浦

上八國 : 대개 지금의 南海ㆍ泗川 등지)이 배반하여 연맹군을 일으켜서 밈라에 침입, 크게 승리하고 천 명을 포로

로 하므로 밈라왕이 그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구원병을 빌려, 신라의 태자 석우로(昔于老)가 6부의 정병을 거

느리고 가서 구원하여 포상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빼앗아 밈라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부터 밈라는 국세가 허약해져서 신라에 대항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신라와 합세하여 고구려의

광개토왕도 돕고, 네 나라 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도 구원하여 주었는데, 신라의 지증(智證)ㆍ법흥(法興) 두 대왕

이 안라가라 등을 토멸하자 그 제6대 가실왕(嘉實王)이 두려워서 신라 귀골(貴骨) 비조부(比助夫)와 결혼하여 스

스로 보전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신라의 습격을 당하여 망하고, 그 뒤에 가실왕이 왕족과 신라에 복종치 않

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미을성(未乙城) - 지금의 충주(忠州)로 달아나서 백제에 의지하여 신라를 막고 미을성으

로 서울을 삼았다.

기원 554년에 백제 성왕(聖王)이 구양(狗壤 : 音 - 글래), 지금의 백마강(白馬江) 상류에서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밈라의 군사도 이를 따라갔다가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 : 신가라의 왕 仇亥의 아버지)의 복병을 마나

양국의 연합군이 전멸하였다. 이것은 제10편에서 자세히 서술하려니와 기원 564년에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침입하여 이 옮겨앉은 밈라가라까지 멸망시켰다.

전사(前史)에는 모두 대가야(大伽倻) 곧 밈라가라가 지금의 고령(高靈)에 건국하였다가 고령에서 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제 어느 책에 의거하여 밈라가 지금의 충주(忠州)에 웅거하였다 하는 것인가? 삼국사기 열

전(列傳)에 “강수(强首)는 중원경(中原京) 사량부(沙良部) 사람이다.(强首中原京沙粱部人也)”라고 하고, 또 강수의

진술을 기록하여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입니다.(臣本任那加良人也)”라고 하였으니 중원경은 곧 충주

요, 임나가량은 곧 밈라가라이니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하였던 한 증거요, 악지(樂志)에 “우륵(于勒)은 본래

성열(省熱) 사람이다.(于勒省熱人)”이라 하였는데, 우륵은 밈라가라의 악공(樂工)이요 서열현(省熱縣) - 지금의 청

풍(淸風 : 丹陽)은 당시에 충주 곧 미을성에 딸린 땅이었으나,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했던 또 하나의 증거요,

신라 본기 진흥왕(眞興王) 15년, 기원 554년에 “백제와 가라가 와서 관성(管城)을 공격하였다.(百濟……興加良來

功管山城)”고 했는데, 가량(加良)은 또한 밈라가라를 가리킨 것이고, 관성(管城)은 백제의 고시산(古尸山) - 지금

의 옥천(沃川) 구양(狗壤) 부근이니 이때의 밈라가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옥천을 친 것은 장차 지금의 영동(永同)

을 지나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고령(高靈)의 옛 서울을 되찾으려다가 패해 망한 것이니, 이는 밈라가라가 충

주에 천도한 셋째 증거이다.

밈라가라는 비록 멸망하였으나 강수(强首)의 문학과 우륵의 음악으로 이름을 전하여 여섯 가라 중에서 가장

일컬을 만한 나라였다.

‘구지’ ‘별뫼’ ‘고링’ 세 가라는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 다만 “신라에게 멸망하였다.”고 하고 어느 때임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구지’는 밈라가라와 가까우니 그 운명이 밈라가라와 같았을 것이다. 여섯 가라가 이미

멸망하니 신라가 계립령(鷄立嶺) 이남을 전부 통일하여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혈전이 시작되었다.

제 2장 두 嶺 以北 10고을의 쟁투

╺╺╺ 고구려ㆍ신라ㆍ백제 세 나라 사이의 100년 전쟁과 지나 隋ㆍ唐 침입의 끄나풀이 된 문제 ╺╺╺

 武寧王의 북진, 고구려의 쇠퇴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비록 반신(叛臣) 백가(苩加)에게 암살당했으나 그 아들 무령왕이 또한 영특하고 용감

하여 곧 백가의 난을 쳐 평정하고, 같은 해 고구려의 방비없음을 틈타 달솔(達率) 부여우영(扶餘優永)으로 하여

금 정병 5천으로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신계(新溪)를 습격하여 깨뜨리고서 그 뒤 수년 동안에 장

령(長嶺) - 지금 서흥(瑞興)의 철령(鐵嶺)을 차지하여 성책(城柵)을 쌓아서 예(濊)를 방비하니 이에 백제의 서북

쪽이 지금의 대동강에까지 미쳐 근구수왕(近仇首王) 때의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기원 505년에 고구려 문자왕

(文咨王)이 그 치욕을 씻으려고 대병으로 침입하여 가불성(加弗城 : 지금 어디인지 미상)에 이르니, 무령왕이 정병

3천으로 나가 싸웠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음을 보고 방비를 베풀지 아니하는지라 왕이 기묘한 계교

로 이를 갑자기 공격, 크게 깨뜨려서 10여 년 동나 고구려가 다시 남쪽으로 침범해오지 못하였다.

왕이 그 틈을 타서 안팎의 놀고 먹는 자들을 모아 농토에서 일하게 하고, 둑을 쌓아 논을 만들게 하여 나라

의 창고가 더욱 충실해지고, 서쪽으로 지나와 서남으로 인도(印度)ㆍ대식(大食) 등의 나라와 통상하여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니 왕의 재위 24년은 또한 백제의 황금 시대라 일컬은 만하였다.

 安藏王의 戀愛戰과 백제의 敗退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文咨王)의 태자이다. 그가 태조로 있을 때 한 번은 상인 차림을 하고 개백(皆伯) - 지

금 고양(高陽)의 행주(幸州)에 가서 노는데, 그곳 장자(長者) 한씨(韓氏)의 딸 주(珠)가 절세의 미인이었다. 안장

이 백제의 감시원의 눈에 띄어 한씨의 집으로 도망해 숨었다가 주를 보고 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마침내 몰래

정을 통하고, 부부의 약속을 맺고는 가만히 주에게 “난 고구려 대왕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많은 군사를 몰아

이곳을 차지하고 그대를 맞아 가리라.”하고 달아나 돌아왔다. 문자왕이 죽고 안장왕이 왕위를 이어 자주 장사

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늘 패하고, 왕이 친히 나서서 정벌하였으나 또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곳 태

수가 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주의 부모에게 청하여 결혼하려 하였다. 주는 하는 수 없이 “난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는데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남자의 생사나 안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다.”고 하였

다. 태수가 크게 노하여 “그 남자가 누구냐? 어찌하여 바로 말하지 못하느냐? 고구려의 첩자라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 적국의 첩자와 정을 통하였으니 너는 죽어도 죄가 남겠다.”하고 옥에 가두어 사형에 처하리라

위협하고 일변 온갖 달콤한 말로 꾀었다. 주가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죽어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

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하고 노래부르니 듣는 이가 다 눈물을 흘렸다.

태수는 그 노래를 듣고 더욱 주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안장왕이 주가 갇혀 있

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여러 장수를 불러 “만일 개백현(皆伯縣)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萬戶侯)의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왕에게 친누이동생이 있어 이름을 안학(安鶴)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늘 장군 을밀(乙

密)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다가 허락하

지 아니하므로,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

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이

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

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

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을밀이 수군(水軍)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

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줄르 만나

실 겁니다.”하고 비밀히 결사대 20명을 봅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태수

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

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

려줄 것이니,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주가 대답하였다.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내가 사

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舞客)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 10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

지러워졌다.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부고(府庫)를 봉하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

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이상은 해상잡록(海上雜錄)에 보인 것인데, 삼국사기 본기에는 비록 안장왕이 개백현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없

으나 그 지리지의 개백현 주(註)에는 “왕봉현(王逢縣)은 일명 개백현이니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다.(王

逢縣 一云皆伯 漢氏美女 迎安臧王之地)”라고 하였고 달을성현(達乙省縣) 주에는 “한씨 미녀가 높은 산에서 봉화(烽

火)를 들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뒤에 이름을 고봉(高烽)이라 하였다.(漢氏美女 於高山頭 點烽火 迎安臧王之處

故後名 高烽)”고 했으니, 한씨(韓氏)는 곧 해상잡록의 한씨(韓氏)일 것이고 한씨 미녀는 곧 한주일 것이며 달을

성현은 지금의 고양(高陽)이니, 곧 을밀이 개백현을 점령하고 대왕으로 하여금 한주를 만나게 한 곳일 것이다.

그리고 개백은 ‘가맛’으로 읽을 것이니, ‘가’는 고구려에서 왕이나 귀죽을 일컫는 명사요, ‘맛’은 만나본다는

뜻이다. 개(皆)는 음이 ‘개’이므로 그 음의 상ㆍ중성(上中聲)을 빌려 ‘가맛’의 ‘가’로 쓴 것이니, 아래 글의 ‘왕기

현(王岐縣) 일명 개차정(皆次丁)’이라 한 것이 더욱 ‘개’가 왕의 뜻임을 증명하고, 백(伯)은 뜻이 ‘맛’이므로 그

뜻의 소리 전부를 빌려 ‘가맛’의 ‘맛’으로 쓴 것이다. 그러니까 개백(皆伯)은 이두자(吏讀字)로 쓴 ‘가맛’이요, 왕

봉(王逢)은 한자로 쓴 ‘가맛’이다. 가맛은 곧 한주가 안장왕을 만나본 뒤의 이름인데, 역사가들이 그 본명을 잊

고 또 이두문의 읽는 법을 몰라서 마침내 개백을 안장왕 이전의 이름으로 안 것이다. 백제 본기 성왕(聖王) 7

년(안장왕 11년, 기원 529년)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 혈성(穴城)을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혈성은 혈구(穴口) - 지

금의 강화(江華)니 이것이 곧 을밀이 행주를 함락하는 동시에 점령한 곳으로 생각된다. 단심가(丹心歌)는 정포

은(鄭圃隱)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위의 기록으로 보면 대개 옛 사람이 지은 것, 곧 한주가 지은 것을 정포

은이 불러서 이조 태종(太宗)의 노래에 대답한 것이며 포은의 자직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 異斯夫ㆍ居漆夫 등의 집권과 신라ㆍ백제 두 나라의 동맹

고구려와 백제가 한창 혈전(血戰)을 하는 동안에 신라에 두 정략가가 나왔으니, 하나는 김이사부(金異斯夫)요

또 하나는 김거칠부(金居漆夫)다. 삼국사기 열전에 ‘이사부는 일명 태종(苔宗)’이라고 하였으나 훈몽자회(訓蒙字

會)에 ‘태(苔)’를 ‘잇’으로 풀이하였으니, ‘이사(異斯)’는 음으로, ‘태(苔)’는 뜻으로 ‘잇’을 쓴 것이고, ‘황(荒)’은

뜻으로 ‘거칠’을 쓴 것이다. 부(夫)는 칠서언해(七書諺解)에 사대부(士大夫)를 ‘사태우’로 음해(音解)하였으니, 그

음이 ‘우’이고, ‘종(宗)’은 뜻이 ‘마루’이다. 그러니까 이두자 읽는 법으로 ‘이사부(異斯夫)’나 태종(苔宗)은 ‘잇우’

로, 거칠부(居漆夫)와 황종(荒宗)은 ‘거칠우’로 읽을 것이다.

이사부는 기지(機智)가 대단하여 젊어서 가슬라(迦瑟羅)의 군주(軍主 : 각 고을 군사의 장관, 뒤의 都督)가 되었는

데,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가 모반하니 모두 군사를 내어 토벌하자고 하였으나 이사부는 “우산국은

조그만 섬이지마는 습속(習俗)이 우둔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굴복시키려면 많은 군사를 가져야 할 것이니 계책

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고는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가서 우산국 부근에 배를 멈추고 “너희

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노아 죄다 밟아 죽을 것이다.”하니, 우산국이 두려워 항복하였다. 그뒤

에 ‘안라’ ‘밈라’ 등 가라를 정복하고 지증(智證)ㆍ법흥(法興) 두 왕조를 섬겼다. 진흥왕(眞興王) 원년(기원 540년)

에는 진흥와이 7살된 어린아이로 즉위하여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하고, 이사부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전국의

병마(兵馬)를 도맡고, 모든 내정과 외교에 다 참여하였다.

거칠부의 할아버지 내숙(乃宿)은 쇠뿔한(신라 宰相의 일컬음)이고, 아버지 물력(勿力)은 아찬(阿湌)이었으니, 왕족

으로서 대대로 장상(將相) 집안이었다. 거칠부는 젊을 때 큰 뜻을 품고 고구려를 정탈하려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고구려 들어가서 각지를 정탐하고 법사(法師) 혜량(惠亮)의 강당(講堂)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혜량

은 눈치 빠른 중이었으므로 거칠부를 달리 보고 사미(沙彌 : 새로 중이 된 사람)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거

칠부가 “저는 신라 사람으로서 법사의 이름을 듣고 불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혜량은 “노승이 알

아보오. 고구려 국내에 어찌 그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소. 빨리 돌아가오.”하고 후일에 거칠부의 소개로

신라에 투항하기를 희망하였다. 거칠부는 돌아와 한아찬[大阿湌 : 大官의 이름]이 되어 이사부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여 먼저 백제와 동맹해서 고구려를 깨뜨리고 또 시기를 보아 백제를 습격하여 국토를 늘리기를 꾀하였

다.

이때 백제의 성왕(聖王)이 한강(漢江)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신라와 동맹하려고 하였는데, 신라가 동맹

하였던 여섯 가라(加羅)를 합쳐버렸으므로 성와은 동행하는 것이 달갑지 아니하였지마는 당시에 가라가 이미

망하여 동맹할 만하 제삼국이 없으므로 사신을 신라에 보내니, 이사부가 흔연히 이를 승낙하여 신라ㆍ백제의

대 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성립되었다.

 신라의 10郡 탈취와 攻守同盟의 결렬

기원 548년에 고구려의 양원왕(陽原王)이 예(濊)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한북(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

니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에 따라 장군 주진(朱珍)을 보내 정병 3천으로 응원해서 고구려 군사를 격퇴하였다.

이때에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戀愛戰)으로 인하여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있었는데, 이 한북이란

어느 곳인가? 이는 대개 지금 양성(陽城) 한래(한자로 번역하면 역시 漢江)의 북쪽을 가리킨 것이요, 독산성은 지

금 수원(水原)과 진위(振威 : 平澤郡) 사이의 독산(禿山) 고성(古城)으로 생각된다. 양원왕이 이 보고를 받고 다시

대병을 내어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듬해에는 지금의 충청도 동북쪽 일대를 들어왔다. 고구려는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청안(淸安)에 웅거하고 백제는 금현성(金峴城) - 지금의 진천(鎭川)에 웅거하여 한 해 남짓 혈전을 벌

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신라는 백제의 동맹국이었지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듬해 기원 551년에 돌궐족(突厥族)이 지금의 몽고로부터 동침(東侵)해와서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

岩城)을 공격하므로, 양원왕이 군사를 나누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는 동안에 백제의 달솔(達

率) 부여달기(扶餘達己)가 정병 1만으로 평양을 급습하여 점령하니,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長安城)을 신축하고

서울을 옮겼다.

장안성은 지금의 평양이라고도 하지마는 만일 평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난

것이 되니 어떻게 말이 되는가? 장안성은 대개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이요, 당시의 신평양(新平壤)이니 안동도

호부(安東都護府 : 지금의 遼陽)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 8백 리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고구려 본기 평원왕(平原

王) 28년에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겼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양원왕이 한때 이곳에 천도하였다가 곧 평양으로

환도하고, 뒤에 평원왕에 이르러 다시 장안성, 곧 신평양으로 서울을 옮긴 것이다.

신라가 만일 그 동맹의 의를 다하여 백제와 협력해서 고구려를 쳤더라면, 고구려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미워하는 터였고, 또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토멸하

면 그 결과로 백제가 강성해져서 신라로서 대적하기 어려울 것을 아는 터이므로, 진흥왕이 가만히 백제의 뒤

를 습격해서 새로 얻을 땅을 빼앗기로 작정하고,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지금의 충청도 동북

으로 지군하게 하고, 한아찬[大阿湌] 거칠부(居漆夫)로 하여금 구진(仇珍)ㆍ비태(比台)ㆍ탐지(耽知)ㆍ비서(比西)ㆍ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ㆍ비차부(比次夫)ㆍ미진부(未珍夫) 등 팔로(八路)의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 이북으

로 진군하게 하니, 백제는 이를 동맹국의 출병(出兵)이라 하여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나라끼리의 투쟁에 무

슨 신의가 있으랴? 이사부가 백제와 협력하여 도살성(道薩城)을 도로 빼앗고는 곧 백제의 군사를 갑자기 공격

하여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키고, 거칠부는 군사를 나누어 죽령 밖의 백제의 각 군영(軍營)을 쳐 깨뜨려서 백

제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 밖 고현(高峴) 이내의 10고을을 빼앗으니, 이에 백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이라 하기보다 독에 든 쥐요, 함정에 빠진 범의 꼴이 되었다. 그래서 10고을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쳐들어갔던 수만의 대병도 진퇴유곡(進退維谷)으로 패망하였다.

위의 전황은 신라가 그 맹약을 배신한 행위를 숨기기 위해 백제의 평양 격파를 본기에서 빼버렸고, 거칠부의

10고을 탈취를 누구와 싸운 결과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가 먼저 평양을 공격해 깨뜨렸다.(百濟先

攻破平壤)”고 한 일곱 자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이것이 거칠부전(居漆夫傳)에 게재되어 그 일을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청안(淸安)의 옛 이름은 도살(道薩) 혹은 도서(道西)이니 다 ‘돌시울’로 읽을 것이고, 진천(鎭川)의 옛 이름은

흑양(黑壤)ㆍ금양(金壤)ㆍ금현(金峴)ㆍ금물내(金勿內) 혹은 만노(萬弩)이니, 우리의 옛 말에 천(千)을 ‘지물’, 만(萬)

을 ‘거물’이라 하였는데, 진천은 ‘거물래’이므로 흑양의 흑(黑)과 만노의 만(萬)은 ‘거물’의 뜻을 쓴것이고, 금물

(今勿)ㆍ금물(金勿)은 ‘거물’의 음을 쓴 것이며, 양(壤)ㆍ내(內)ㆍ노(弩)는 다 ‘래’의 소리를 쓴 것이고, 금양(金壤)

ㆍ금현(金峴)의 ‘금(金)’은 금물(金勿)을 줄인 것이고, ‘현(峴)’은 금물내(金勿內)의 산성(山城)을 가리킨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요, 충청도의 충주(忠州)ㆍ괴산(槐山)까지도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근세에 정다산(丁茶山)ㆍ한진서(韓鎭書) 등 여러 선생이 다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의 땅을 한

발자욱도 밟아본 때가 없다.”고 하여 사기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니, 이 도살성의 점령으로 보건대 고구려가 한

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말이 어찌 잠꼬대가 아니냐?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한때의 점령이고 오랜 동안은 황해

도까지도 늘 백제의 땅이었으니, 충청북도 각지를 고구려의 고을로 만든 삼국사기가 잘못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죽령(竹嶺) 밖 고현(高峴) 안쪽의 10고을은 어디인가? 죽령은 지금의 죽령이요, 고현은 지금의 지평

(砥平 : 楊平郡) 용문산(龍門山)의 명치(鳴峙)이고, 10고을은 지금의 제천(堤川)ㆍ원주(原州)ㆍ횡성(橫城)ㆍ홍천(洪

川)ㆍ지평(砥平 : 楊平)ㆍ가평(加平)ㆍ춘천(春川)ㆍ낭천(狼川 : 지금의 華川) 등지이니, 뒤에 신라 9주(州)의 하나인

우수주(牛首州) 관내의 군현(郡縣)이 그것이다.

 백제 聖王의 전사와 신라의 국토 확장

신라가 10고을을 빼앗고는 고구려와 강화하고, 어제의 동맹국 백제를 적국으로 삼아서 그 동북쪽을 침략하

여 지금의 이천(利川)ㆍ광주(廣州)ㆍ한양(漢陽) 등지를 취하여 신주(新州)를 두니 백제는 패하여 고립되었다. 그

러나 그 분함을 억제하지 못하여 밈라가야의 유민(遺民)을 꾀어서 국원성(國原城) - 지금의 충주(忠州)를 떼어 주

어 다시 왕국을 건설하게 하고, 기원 554년에 밈라와 군사를 합쳐 어진성(於珍城) - 지금의 진산(珍山 : 錦山郡)

을 쳐 신라 군사를 격파하여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하고 나아가서 고시산(古尸山) - 지금의 옥천

(沃川)을 공격하니 신라의 신주(新州)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과 삼년산군(三年山郡 : 지금의 報恩郡) 고우도(高于

都)가 대병으로 원조하였다. 성왕이 정병 5천을 뽑아 신라의 대본영(大本營)을 야습하려고 구천(狗川 : 음이 ‘글래’

이니 沃川의 이름이 여기서 생겼는데, 지금의 백마강 상류)에 이르러 신라의 복병을 만나 패전하여 죽었다. 신라의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백제의 좌평(佐平 : 대신) 네 사람과 군사 2만 9천 명을 목베고 사로잡으니 백제 전국

이 크게 동요 하였다.

신라는 그 뒤 더욱 백제를 공격하여 남쪽으로 비사벌(比斯伐) - 지금의 전주(全州)를 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

하고 북쪽으로 국원성(國原城)을 쳐서 제2의 밈라를 토멸하여 그 땅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진흥왕이 이와

같이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楊州)ㆍ충주(忠州)ㆍ전주(全州) 등 곧 지금의 경기ㆍ충청ㆍ전라도 안의 요지를

얻고, 곧 고구려를 쳐서 동북으로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만주 길림(吉林) 동북쪽을 차지하니 이에 신라

국토의 넓기가 건국 이래 제일이었다.

삼국사기의 진흥왕 본기는 연월(年月)의 뒤바뀜과 사실의 탈락이 한둘이 아니다. 화랑을 설치한 연대가 틀림

은 이미 제1장에서 말하였거니와, 14년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取

百濟東北鄙 爲新州)라 했고, 겨울 10월에는 “백제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소비(小妃)를 삼았다.(娶百濟王女 爲小妃)”

고 하였으니, 아무리 교전이 무상한 때이지만 어찌 넉 달 전에 전쟁을 하여 그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하다가

넉 달 후에 결혼하여 장인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랴? 하물며 이는 고을을 빼앗긴 뒤 3년밖에 안 되었으니, 3

년 전에 백제가 신라와 화호(和好)하다가 그렇게 속고, 3년 뒤에 또 딸을 주어 그 왕으로 사위를 삼았으랴? 진

흥왕 12년에 “왕이 순수(巡狩)하여 낭성(娘城 : 지금 忠州의 彈琴臺 부근)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 제자 이문(尼

文)이 음악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불러보았다.(王巡狩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고 하였으

니, 악지(樂志)에 우륵은 성열현(省熱縣 : 지금의 淸風) 사람으로,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귀순하니, 진흥왕이 국원(國原)에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는데, 대개 우륵은 본래 제1밈이라, 지금의

고령(高靈) 사람으로, 제2밈라에 들어와 지금 청주(淸州)의 산수를 좋아하여 그곳에 머물러 살다가 제2밈라가

강성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신라에 귀순하니, 진흥왕이 제2밈라를 쳐 평정한 뒤에 국원(國原)에 안치한 것이

다. 그 뒤 순행하는 길에 우륵을 불러 거문고를 타게 하여 들어본 곳이 지금의 충주 탄금대(彈琴臺)요, 국원성

- 지금의 충주가 신라 소유로 된 것이 진흥왕 16년이므로 진흥왕이 우륵의 거문고를 들어본 것도 16년 이후

일 것인데, 어찌 12년에 낭성(娘城)에 순수하여 우륵의 거문고를 들었다고 하였는가?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북쪽 봉우리에 진흥왕 순수비(巡狩碑)가 있으니 이것은 왕이 백제를 쳐서 성공한 유적이거니와, 함흥 초방원(草

坊院)에도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으니 이것은 왕이 고구려를 쳐서 송공한 유적인데, 진흥왕 본기에 이같은 큰

사건이 다 탈락되지 아니하였는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길림유력기(吉林遊歷記)에 의하면, 길림(吉林)은 본

래 신라의 땅이요, 신라의 계림(鷄林)으로 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진흥왕이 고

구려를 쳐서 땅을 개척하여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도 차지하였던 한 증거다. 박연암집(朴燕巖集)에는 복건성(福

建省)의 천주(泉州)ㆍ장주(漳州)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어느 책에 의거한 말인지 알 수 없어

서 인용하지 못하거니와 진흥왕이 혹 해외 경략(經略)하여 그 유적을 끼친 곳이 있지 않은가 한다.

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침략과 바보 온달의 전사

고구려는 평양이 백제에 함락될 때 신라의 요청에 응하여 통호(通好)했으나, 진흥왕이 그 동쪽 변방을 습격하

여 남가슬라(南迦瑟羅)로부터 길림(吉林) 동북쪽까지 공격하여 차지하므로, 부득이 전투를 벌여 비열홀(比列忽)

- 지금의 안변(安邊) 이북을 회복했으나 그 나머지 땅 -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고 안장왕(安藏王) 이후에 다시

점령하였던 계립령(鷄立嶺) - 지금의 조령(鳥嶺) 서쪽과 죽령(竹嶺) 서쪽의 여러 고을은 끝내 찾지 못하고, 당시

작전상 가장 요긴한 북한산(北漢山)은 신라가 차지한 뒤로 길이 이 땅을 갖자는 생각으로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노래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거의 해마다 군사를 동원 신라를 침

노했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溫達)의 전사극(戰死劇)이 연출되어,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이두문으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해져서,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

욱 굳세게 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전사(前史)에 실려 있는

온달의 이야기를 다음에 말하고자 한다.

온달(溫達 : 옛 음은 ‘온대’니 百山의 뜻)은 얼굴이 울툭불둑하고 성도 없는 한 거지였다. 그러나 마음은 시원하

였다. 집에 눈먼 노모가 있어 늘 밥을 빌어다가 대접하고 그 밖에는 일이 없어 거리를 오락가락하였다. 가난

하고 천한 자를 업신여긴느 것은 사회의 상정(常情)이라 바보도 아닌 온달을 모두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원

왕(平原王)에게 따님 하나가 있어 어릴 때 울기를 잘하므로 평원왕이 사랑 끝에 실없는 말로 달래기를 “오냐

오냐, 울지 마라. 울기를 좋아하면 너를 귀한 집 며느리로 주지 않고 바보 온달의 계집으로 만들 것이다.”하

고 울 때 마다 을렀는데, 따님이 장성해 시집갈 나이가 되어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

다. 따님은 “아버님께서 늘 저더러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시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아니합니까? 저는 죽어도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하고 반대하였

다. 평원왕이 크게 노하여 “너는 만승천자(萬乘天子)의 딸이 아니냐? 만승천자의 딸이 거지의 계집이 되겠단

말이냐?” 그러나 따님은 듣지 않고 “필부(匹夫)도 거짓말이 없는데 만승천자로서 어찌 거짓말을 하실 수 있습

니까? 저는 만승천자의 딸이기 때문에 만승천자의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달에게 시집가

렵니다.”라고 하였다. 평원왕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너는 내 딸이 아니니 내 눈 앞에 보이지 말아라.”하고 대

궐에서 내쫓았다.

따님은 나올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다만 금팔찌[金臂環] 수십 개를 팔에 끼워가지고 나와

서 벽도 다 무너지고 네 기둥만 남은 온달의 집을 찾아들어갔다. 온달은 어디 가고 노모만 있는지라 그의 앞

에 절하고 온달이 간 곳을 물었다. 노모가 눈은 멀었지만 코가 있어 그 귀한 따님에게서 나는 향내를 맡고 귀

가 있어 그 아리따운 미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그 명주같이 보드랍고 고운 손을 만

지며, “어디서 오신 귀하신 처녀인지 모르지만 어찌하여 빌어먹고 헐벗은 내 아들을 찾습니까? 내 아들은 굶

다굶다 못 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이나 벗겨다가 먹으려고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

다. 따님이 온달을 찾아 산 아래로 가서 느릅나무 껍지을 벗겨 짊어지고 오는 사람을 만나 곧 온달인 줄 알고

그 이름을 물은 다음 자기가 찾아온 이유 - 혼인하고자 하는 생각을 말하였다. 온달이 생각하기를 사람으로서

야 어찌 부귀한 집의 아름다운 여자로서 빈천한 거지의 남편을 구할 리 있으랴 하고 소리쳤다. “너는 사람 홀

리는 여우나 도깨비지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해가 졌으니 네가 나에게 덤비는구나.”하고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

고 달려 돌아와서 사립문을 꼭 닫아 걸고 들어갔다. 따님이 뒤쫓아와서 그 문 밖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

날 또다시 들어가 간청하였다. 온달이 대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자 노모가 말하였다. “내 집같이 가

난한 집이 없고 내 아들보다 더 천한 사람이 없는데 그대가 한 나라의 귀인으로서 어찌 가난한 집에서 남편을

섬기려고 하오.?”그러나 따님은 “종잇장도 마주 들면 가볍다고 하였으니,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하고, 드디어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과 논이며 종과 소며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사

들여서 빌어먹던 온달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따님은 온달을 한갓 부자로 만들려 함이 아니었으므로 온달더러 말타고 활쏘기를 배우기 위해 말을

사오라 하였다. 이때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마정(馬政)을 매우 중히 여겨 대궐의 말을 국

마(國馬)라 하여 잘 먹여 잘 기르고 화려한 굴레를 씌웠는데, 다만 왕이 말을 타다가 다치면 말먹이와 말몰이

를 죄주었으므로, 말먹이와 말몰이들이 매양 날래고 굳센 준마가 있으면 이를 굶기고 때려서 병든 말을 만들

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따님은 비록 깊은 대궐 안의 처녀였지마는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말을 살

때에 온달에게 “시장의 말을 사지 마시고 버리는 국마를 사오십시오.”해서 사다가 따님이 몸소 먹이고 다듬어

말이 날로 살찌고 웅장해졌다. 온달의 말타고 활쏘는 재주도 날로 진보하여 이름난 사람이 온달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3월 3일 신수두 대제(大祭)의 경기회에 온달이 참예하여 말타기에 우등을 하고 사냥해 잡은 사슴도 가장 많았

다. 평원왕이 그를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였으나 따님에 대한 분노가 아주 풀리지를 아니

하여 아직 사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에 주(周 : 宇文氏)의 무제(武帝)가 지나 북쪽을 통일하여 위엄을

떨치고,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遼東)에 침입해와서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었다.

왕이 탄식하며 “이는 진정 내 사위로다.”하고 이에 온달을 불러 대형(大兄 : 五品쯤 되는 벼슬 이름)에 임명하고

총애가 극진하였다. 평원왕이 돌아가고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

嶺) 서쪽의 땅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신라에게 빼앗겨 그 땅의 인민들이 항상 원통하게 여기고 부

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한 번에 그 땅을 회복하

겠습니다.” 영양왕이 이를 허락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온달은 군중에서 맹세하기를 “신라가 한수(漢水) 이북

의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 만일 그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온

달은 아차성(阿且城 : 지금 서울 부근 廣津의 峨嵯山) 아래 이르러 신라 군사와 접전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환장(還葬) 하려고 하자 관(棺)이 땅에 붙에 떨어지지 아니하므로 따님이 친히 가서 울면서 “국토를 못

찾고야 임이 어찌 돌아가시랴. 임이 아니 돌아가시니 이 첩이 어찌 홀로 돌아가랴.”하고 역시 까무러쳐서 깨

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따님과 온달을 그 땅에 나란히 장사지냈다.

관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리가 있을까? 당시의 치상(治喪)하는 사람들이 온달의 관을 가지고 돌아가려

하다가 온달의 애국충렬에 감동하고, 또 전날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말을 생각하고 차마 관을 들 수가 없어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삼

국사기 온달전(溫達傳) 끝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사생은 이미 결정났습니다. 돌아가십시다.’하니 마

침내 관이 떨어져 장시를 지냈다.(公主來 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고 하였는데, 그러나 만일 이같이

공주가 그렇게 말하고 울었다면 공주는 국토에 대한 열정이 없을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사랑도 담박(淡薄)하

다고 할 것이고, 온달의 관이 이 말에 떨어졌다면 온달은 국토의 회복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고 상사병에 걸

려 죽은 것이니, 공주가 전날에 말을 사다가 온달을 가르친 본의가 무엇이며 온달이 편안한 부귀를 버리고 전

쟁에 나선 진정(眞情)이 어디에 있는가? 조선사략(朝鮮史略)에 “국토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공이 어찌 돌아가실

수 있으랴? 공이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내가 어찌 혼자 돌아갈 수 있으랴 하며 통곡하고 기절하니, 마침내 고

구려 사람들이 공주를 나란히 그곳에 장사지냈다.(國土未還 公能還公旣未還 妾安能獨還 一慟而絶 高句麗人 遂竝葬公

主於其地)”고 하였으니, 조선사략은 물론 시대의 차이로 보아 그 믿음성이 삼국사기만 못하지마는 이 대문의

문구는 군국시대(軍國時代)의 사상을 그린 것이므로 본서에서는 이를 채택한다. 정다산ㆍ한진서 등의 선생이

온달의 한수 이북 운운한 말에 의하여 고구려가 한수 이남을 차지해본 때가 없음을 증명하였지마는 그렇다면

온달의 계립령 이서가 우리 땅이라고 한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구려가 장수왕 몇 해와 안장왕 이후

의 몇 해에 한수 이남을 점령하였던 것은 분명하니 온달이 말한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수[漢水]가 아니라 지

금 양성(陽城)의 ‘한래’이다. 연전에 일본인 금서용(今西龍)이 북경대학에서 조선사를 강연할 때에 온달전은 역

사로 볼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차으로 문맹(文盲)의 말이다. 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ㆍ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 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온달전은 삼국시대의 두드

러지게 중요한 문자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첨삭(添削)을 지나 그 가치가 얼마만큼 줄어졌음은 올바른 독사자

(讀史者)만이 이해할 뿐이다.

제 3장 同婿戰爭

 백제 王孫 薯童과 신라 공주 善花의 결혼

기원 6세기 하반에 백제 위덕왕(威德王)의 증손 서동(薯童)은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 중에 크게 이름이 났었

고,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둘째 따님은 삼국 중에 가장 이름난 어여쁜 아가씨였다. 그런데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몇을 낳은 가운데 선화가 꽃같이 어여쁘므로 가장 사랑하여 “신라으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

라, 선화의 아버지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라고 하며 늘 선화를 위해 사윗감을 구했는데, 서동의 이름을 듣고

는 선화의 남편으로 희망하였고, 위덕왕은 그 증손 서동을 위해 증손부(曾孫婦)감을 구하였는데, 또한 선화의

이름을 듣고 서동의 아내로 희망하였다. 가족 제도의 시대라 한 가정의 어른, 양편의 주혼자(主婚者)로서 하물

며 각기 한 나라의 대왕으로서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 결혼이 물론 쉬웠을 것이지마는 그 결혼은 쉽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절대로 되지 않을 사정이 있었다. 설혹 누가 그 결혼을 제의한다고 하더라도 진평왕이나 위덕왕이

반드시 크게 노하여 역적놈이라고 처벌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무슨 사저인가 하면 신라는 여래 대 이

래로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성이 서로 결혼하여 그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왕위를 잇

게 하여 왔으므로, 타성의 딸은 혹 세성의 집으로 데려올 수 있으나, 세 성 집안의 딸은 타성에게로 시집가지

못하는 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지왕(炤智王)이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에게 딸을 주었다고 하고, 법흥왕(法興

王)이 밈라가라의 가실왕(嘉實王)에게 누이동생을 주었다고 한 것은 실은 친딸 친누이동생이 아니라, 육부(六部)

귀골(貴骨)의 딸이나 누이동생을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김씨인 진평의 딸 선화의 장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 석씨가 아니면 그 동성 김씨라야 하였으니 어찌 신라 사람도 아닌 백제의 부여씨(扶餘氏) 서동의 아내가

될 수 있으랴? 이는 선화 편의 사정이거니와, 백제는 신라처럼 결혼에 관하여 성자(姓字)에 엄격한 제한은 없

으나 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聖王)을 죽인 자가 누구인가 하면, 곧 진평왕의 아버지인 진흥왕(眞興王)이요, 진

흥왕은 누구인가 하면 성왕의 사위였다. 증손부 며느리를 어디서 데려오지 못하여 아버지 죽은 원수의 손녀를

데려오랴? 장인을 죽인 괴악한 사위의 손녀를 데려오랴? 엄중한 심리상(心理上)의 꾸중이 있으니, 서동의 장래

아내가 백제의 목씨(木氏)ㆍ국씨(國氏) 등 8대성(八大姓)의 여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민가의 여자는 될지언정

어찌 전대의 원수인 진흥왕의 자손이 될 수 있으랴. 이것은 서동 편의 사정이었다. 백제나 신라의 여러 신하

들의 거의가 전쟁에서 서로 죽이던 이의 자손이라 모두 그 결혼을 반대할 것이었다. 이것도 양편이 결혼할 수

없는 부속된 사정이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동은 커갈수록 백제 왕가에 태어나지 않고 신라의 민가 자제로나 태어났더라면

선화의 얼굴이라도 한 번 바라볼 수 있을 것을, 선화의 눈에 내 모습이라도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마침내 백제 왕궁에서 탈출하여 신라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慶州)를 찾아

갔다. 가서는 머리를 깎고 어느 대사(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이나 왕의

가족들이 궁중에 중을 청하여 재도 올리고 백고좌(百高座)도 베풀고 이름난 중의 설법도 듣고 하는 때였으므

로, 서동은 법연(法筵)을 기회하여 오래 그리던 선화와 만날 길을 얻었다. 만나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선

화는 백제의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나이라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다 하고 그날부터는 서동에 대한 생각

을 버리고 중을 그리게 되었으며, 서동 또한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버리리라.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라.”하여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맺어졌다. 그래서 서동이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을 타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하였다. 선화는 서동이 아니고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를 하였지만, 주위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데야 어찌하랴? 서동과 선화는 의논한 끝에 차라리 이

일을 드러내서 세상에 널리 알려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서

동이 가끔 엿이며 밤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겨 가지고 있으나 상

사병에 병들어 있다네. 서동이여, 어서 오소서. 어서 와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아가씨를 살리소서.”하고

노래부르게 하여 그 노래가 하루 아침에 신라 서울 동경(東京)에 쫙 퍼져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선화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바른대로 고하며, 다른 사람과 결혼

하라하면 죽기로 반대하였다. 진평왕과 위덕왕은 처음에는 부모나 조부모 몰래 남녀가 사통한 것은 가정의 큰

변이라 하여 당장 사형에 처할 듯 했지마는 그러나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손자를 어찌하랴? 진평왕은 박ㆍ석

ㆍ김 세 성의 결혼 습관을 깨뜨리고, 위덕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고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하여 두 나라

왕실이 다시 새 사돈 사이가 되었다.

 결혼 후 10년 동안의 두 나라 동맹

두 사람이 결혼한 뒤에는 두 나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말이 없으니, 그것은 신라

가 나중에 고타소랑(古陀炤娘)의 참혹한 죽음(다음 절 참조)으로 인하여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벌한 다

음에 그러한 기록을 모두 태워버려서 신라 왕가의 여자로서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겨버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이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에 가서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했다고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무강왕(武康王)이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에 장가들어 용

화산(龍華山)에 미륵사(彌勒寺)를 짓는데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 도왔다고 하였으며, 고려사 지리지에

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 기준(箕準)의 능을 세상 사람들이 말통대왕(末通大王)의 능이라 한다고 하고, 그 주

(註)에 백제 무왕(武王)은 소명(小名)을 서동(薯童)이라 한다고 하였다. 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아 42년 만

에 돌아가서 시호를 무왕이라 하였으니, 무강왕은 후조선의 기준이 아니라 무왕의 잘못이요, 서동과 말통(末

通)은 이두로 읽으면 서동의 서(薯)는 뜻을 취하고 동(童)은 음을 취하여 ‘마동’으로 읽을 것이요, 말통(末通) 두

글자가 다 음으로 ‘마동’으로 읽을 것이므로, 말통대왕릉은 곧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를 합장(合葬)한 능이다.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이 된 뒤에 곧 신라와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신라가 그 적국에 대해 백공을 보내서 절

짓는 것을 도왔을 리가 만무하다. 미륵사의 건축은 대개 서동이 왕손(王孫)으로 있어 원당(願堂)으로 지은 것이

고, 그 원당을 지을 때에는 신라ㆍ백제 두 사돈의 나라가 서로 환호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으므로

진평왕 원년 내지 24년까지, 곧 백제의 위덕왕 26년 내지 45년을 지나 혜왕(惠王) 2년과 법왕(法王) 2년을 거

쳐 무왕 2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한 번도 전쟁이 없었고, 또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隨)

에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를 치기를 청하여 수의 문제(文帝)ㆍ양제(煬帝) 두 대의 침입(제 10편을 참고)을 일으키

게 하였다.

 東婿戰爭 - 龍春의 총애 다툼과 武王의 항전

백제가 위덕왕(威德王) 말년이거나 혜왕(惠王) 법왕(法王) 연간, 곧 서동(薯童)이 왕증손(王曾孫)이었던 때이거나

왕손(王孫) 또는 태자(太子)였을 때에는 늘 신라와 좋게 지내다가 무왕(武王) 3년 곧 서동이 왕이 된 뒤 3년(기

원 602년)에 신라와 전쟁이 벌어져서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阿母山城 : 지금의 雲峰)을 치고, 신라는 소타(小陀)

ㆍ외석(畏石)ㆍ천산(泉山)ㆍ옹잠(甕岑 : 지금의 德裕山)에 성책을 쌓아 백제를 막았다. 백제는 좌평(佐平) 해수(解

讎)로 하여금 네 성을 공격하여 신라의 장군 건품(乾品)ㆍ무은(武殷)과 격전을 벌여 이 뒤부터는 지금의 충청북

도 충주(忠州)ㆍ괴산(槐山)ㆍ연풍(延豊)ㆍ보은(報恩) 등지와 지금의 지리산 좌우의 무주(茂朱)ㆍ용담(龍澹)ㆍ금산

(金山)ㆍ지례(知禮) 등지와 지금의 덕유산 동쪽 함양(咸陽)ㆍ운봉(雲峰)ㆍ안의(安義) 등지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과

재산을 버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차극을 연출함에 이르렀다. 진평왕은 무왕이 사랑하는 아내의 아

버지니 속담에 아내에게 엎어지면 처가의 밭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였는데, 무왕이 어찌하여 자기가 왕이

되어 정치의 세력을 잡자 도리어 그 유일한 애처의 아버지의 나라를 말뚝만큼도 여기지 아니하여 날마다 군사

로 유린하려 하였는가?

신라에서 왕위를 박ㆍ석ㆍ김 세 성이 서로 전하는 것은 그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때부터 확정된 명문(明文)

의 헌법이 아니라, 처음에는 박ㆍ석 두 성이 서로 혼인하여 두 성의 아들이나 사위만 왕이 될 권리를 가지다

가 건국 3백 년쯤 후에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김씨로서 점해왕(沾解王)의 사위가 돼서 두 성에 끼어들어 세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었으니, 6백 년 후에 부여씨(扶餘氏)가 세 성에 끼어 네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인가? 백제의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신라는 원래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전왕의 뒤를 이었는데, 하물며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

들은 없었으며, 비록 맏딸 선덕(善德)이 있었지마는 그는 출가해서 여승(女僧)이 되어 정치에 관하여지 아니하

니, 선화가 둘째딸이지만 선화의 남편 무왕이 맏사위이므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무왕은 신라의 왕이 될 희망을 가졌었을 것이고, 진평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해줄 생각을 가졌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박ㆍ석ㆍ김ㆍ부여 네 성이 서로 전해주는

판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쳐져서 한 나라가 되어 두 나라 인민의 뜻없는 혈전을 면했을 것이다.

백제에는 부여씨 아래 진(眞)ㆍ국(國)ㆍ해(海)ㆍ연(燕)ㆍ목(木)ㆍ백(苩)ㆍ협(劦)의 여덟 대가(大家)가 있었으나, 실

상은 부여씨가 정권을 독차지하여 고구려의 벌족공화(閥族共和)와 다르고, 신라는 원래 박ㆍ석ㆍ김 세 성의 공

화(共和)의 나라였으나 이때는 김씨 한 집안이 거의 그 왕위 상속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두

나라의 왕만 마음이 맞으면 양국의 결혼적 연합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그렇게 평순하게 진행되랴? 두 나라 여러 신하들은 거의 다 이를 반대했겠지마는

그 중에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이는 김용춘(金龍春)이었을 것이다. 김용춘은 누구인가? 곧 진평와의 셋째딸

문명(文名)의 남편이다.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서 떨어져 있으니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 이 문명에게 쏠리

고, 따라서 첫째사위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사위 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용춘은 만일 신라의

왕위가 서동에게 가지 않으면 곧 자기에게 돌아올 필연성을 가졌으니, 왕위가 서동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

는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저지하였을 것이다. 그 반대가 성공하여 진평왕은 드디어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

각을 끊고, 그리고 출가해서 중이 된 맏딸 덕만(德曼), 곧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을 불러다가 왕태녀(王太女)를

삼았다. 그리고 왕은 용춘을 중히 써서 장래 명색은 선덕여왕이라도 실권은 용춘에게 있게 하였을 것이다. 용

춘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고 덕만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융화시키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러나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라 어찌 그런 수단에 속으랴? 그러므로 그는 즉위 후에 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용춘이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참모가 되어 있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內省

私臣)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직접 전선에 나타나서 악전고투가 해마다 계속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

(東婿戰爭)이다.

 東婿戰爭의 희생자

이 전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동서 사이의 신라 왕위의 쟁탈전이었으니, 두 사람의 비열한 이기주의

의 충돌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마는 명의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걸어 피차 그 나라 안의 인심을 고동(鼓動)

하고 명예와 벼슬로 결사의 군사를 동원하니, 한편에 비애에 우는 인민이 있으에 불구하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여지승람(輿地勝覽) 합천(陜川) 부자연(父子淵)의 고적에 의하

면 신라가 전쟁이 지루하게 오래 가서 민가의 장정들이 전쟁에 가면 몇 번을 돌아온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했는데, 어떤 늙은 아버지가 여러 해 만에야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마중나가 이 소(沼)

위의 바위 위에서 부자가 서로 껴안고 울며불며 오래 그리던 자애의 정희와 생활의 곤란을 하소연하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서 이 소에 장사지냈으므로 부자연(父子淵)이라 이름하였다고 했고, 삼국사기 설씨녀전(薛氏女傳)

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설씨녀는 집이 가난하고 일가도 없었으나 얼굴이 아름답고 행실이 정숙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지만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의 그의 늙은 아버지가 먼 곳에 수자리

를 가게 되어 그녀는 크게 걱정하고 이웃집 소년 가실(嘉實)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가실은 자기가 대신

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가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니 그녀는 가

실에게 전장에 가서 3년이면 돌아올 것이니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하므로 가실이 허락하고 자기의 말을 그녀

에게 주고, 훗날의 신표(信表)로 거울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이 한쪽씩 가졌다. 가실이 수자리를 나가서는 3년

을 곱하여 6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일ㅇ르 민망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듣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억지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녀가 도망하려고 가실이 준 마

을 타고서 막 떠나려고 하는데 이때 가실이 달려왔다. 의복이 남루하고 형용이 여위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

다. 가실이 깨어진 거울을 꺼내서 맞추어보고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위의 두 가지 기록이 비록 당시 전국시대의 정황(情況)의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아니하나 또한 그때 인민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무사(武士)의 사회는 이와 전혀 다르니 아래에 그 몇 가

지를 기록하려고 한다.

1) 귀산(貴山)은 파진간(波珍干) 무은(武殷)의 아들이요, 사량부(沙粱部) 사람이었다. 어릴 때 추항(箒項)과 친하

게 지내 함께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청하니,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에 열 가지 계행(戒行)

이 있는데, 너희들은 남은 신하로서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려니와 화랑(花郞)의 다섯 가지 계행에 있어 임

금을 충성으로 섬기며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싸움에는 용감하게 나아가며 생물을 살

상함에는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너희는 이것을 받들어 행하여라.”하였다……진평대왕(眞平大王) 건복

(建福) 19년(기원 602년)에 백제가 침노하여 아모산성(阿母山城 : 지금의 雲峰)을 포위하고 공격하므로 왕이 파진

간(波珍干) 건품(乾品)ㆍ무은(武殷) 등을 보내서 방어하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따라갔다. 그런데 백제가 거

짓 패하여 천산(泉山 : 지금의 咸陽)으로 퇴각하여 복병으로 신라의 추격하는 군사를 격파하고 쇠갈구리로 무은

(武殷)을 얽어매어 사로잡으려 하였다. 귀산이 “우리 스승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싸움에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하셨으니 어찌 감히 물러나랴.”하고 추장과 함께 창을 들어 죽기로 싸워서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아버지 무은

을 구원하였는데……금창(金瘡 : 칼이나 창에 찔려서 난 상처)이 온몸에 가득하여 중도에 죽었다.

2) 찬덕(讚德)은 모량부(牟梁部) 사람이었는데 용기와 절개가 있었다. 진평왕 건복(建福) 27년에 가잠성주(椵岑

城主)가 되었는데, 이듬해 10월에 백제가 공격해와서 포위당한 지 백여 일이 되었다. 왕이 상주(上州)ㆍ하주(下

州)ㆍ신주(新州)의 군사 5만 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찬덕이 분개하여 군사들에게

“세 주(州)의 군사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못하고, 성이 위태로움을 보고도 구원하지 못하니 그것은 의

(義)가 없는 것이다.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하고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시체

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이듬해 정월에 다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머리로 괴목

(槐木)을 들이받아 골이 깨져서 죽었다.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槐山)이니, 괴산은 찬덕이 머리로 괴목을 받은

까닭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3) 해론(奚論)은 찬덕(讚德)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 35년에 금산당주(金山幢主)로서 한산주(漢山主) 도독(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가잠성(椵岑城)을 회복하려 하였고, 싸움이 시작되자 해론은 “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전사하

신 곳이다.”하고 단병(短兵)으로 달려나가서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시인들이 장가(長歌)를 지어 그를

조상하였다.

4) 눌최(訥催)는 사량부(沙粱部) 사람이다.……진평왕 건복 41년(기원 614년)에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속함(速

含)ㆍ앵잠(櫻岑)ㆍ기잠(岐岑)ㆍ봉잠(蜂岑)ㆍ기현(寄顯)ㆍ용책(冗柵) 등 여섯 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상주ㆍ하주ㆍ귀

당(貴幢)ㆍ법당(法幢)ㆍ서당(誓幢)의 다섯 군사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다섯 장군은 백제의 진영이 담

당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그 중의 한 장군이 말했다. “대왕께서 오군(五軍)을 우리 여러 장군에

게 맡기시어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 싸움에 달려 있지마는 가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나라는 것이 병가

(兵家)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이제 적의 형세거 저렇듯 강성하니 만일 나아갔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

이 있겠습니까?” 모두들 그 말이 옳다 하여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너무 면목이 없어서 노진성(奴珍城)을 샇고

돌아갔다. 이에 백제는 더욱 급히 공격하여 속함ㆍ기잠ㆍ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다. 눌최는 앵잠ㆍ봉잠ㆍ기현

세 성을 굳게 지키다가 다섯 장군이 다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분개하여 군사들을 돌아보고 “봄이 되면 초목

이 다 무성해지지마는 겨울이 되면 소나무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이제 구원병은 없고 세 성이 심히 위태로

우니, 이는 지사(志士)와 의부(義夫)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 사졸들이 다 눈물을 뿌리

며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따. 성이 함락되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못 되었지만 끝까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이상 네 전쟁은 곧 신라의 파진간이며 도독이며 다섯 장군들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 의사의 약사(略

史)이다. 백제에 있어서는 큰 전쟁이었으므로 역사에 특기한 것이고, 이 밖에도 자질구레한 싸움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백제사(百濟史)는 거의 다 없어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나 백제가 신라보다 강하고 사나운 호전국

(好戰國)이었으니 그 희생된 충신 의사도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동서, 곧 두 개인의 이기주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민을 죽이는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 의사도 또한 가치없는 충신

의사들이라 할 것이다.

제 10편 고구려와 隋의 전쟁

제 1장 臨渝關 싸움

 고구려ㆍ隋 전쟁의 원인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비록 수많은

족속이 대립하였지마는 다 무무하고 미개한 유목의 야만족드이라 혹 한때 정치상 세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문

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붕괴하는 날에는 다시 일어날 터까지 없어지거니와, 토착(土着)한 민족으

로 오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지나와 조선이었다.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

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파탄과 불안이 있어서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였을 것이다.

상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구려 건국 이래로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 상태에 있어 여러 나라가 서로 번갈

아 침범하므로 외정(外征) 할 힘이 없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다. 태조(太祖)ㆍ차대(次大) 두 대왕 때에는 고구려가 비록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는 거의 대적할 세력이 없었으므로 한을 쳐서 요동(遼東)을 점령하는동시에

직예(直匠)ㆍ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 안에 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하여 왕위 쟁탈의 난리가 거듭

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을 들어 공손도(公孫度)에게 항복해서 고구려는 가장 인민이 많이 모여 사는 기

름진 땅을 잃어 약한 나라가 되었다. 고구려가 그 약한 나라의 지위를 면하려고, 조조(曹操) 자손의 위(魏)며

모용씨(慕容氏)의 연(燕), 곧 지나 북방의 나라들에 향하여 도전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쪽에서 일어나 고

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었다. 고국양(故國壤)ㆍ소수림(小獸林)ㆍ광개토(廣開土) 세 대왕이 일어나서 요동을 치

고, 또 서북으로 글안을 정복하여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 동안 백성의 힘을

길러 인구가 크게 불고 나라의 힘이 팽창하여 지나와 맞서 싸울 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 네 나라의 고구

려에 대한 공수동맹이 이루어져서 뒤에서 견제를 받아 장수왕 이래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쪽 통일에

힘썼고, 지나도 남북으로 나뉘어서 산해관(山海關) 동쪽을 엿볼 겨를이 없으므로 위(魏)의 척발씨(拓跋氏)의 백

제 침입(제8편 제2장 참고), 주(周)의 우문씨(宇文氏)의 고구려 침입(곧 溫達이 격퇴한)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

나 피차의 흥망을 다투는 계속적 혈전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경에 이르러 우문씨의 제위(帝位)를 빼앗

은 수(隋)의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江南 6국의 하나)을 아우르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

이 되어(수의 황가와 장국이나 재상들이 거의 다 鮮卑族으로 지나에 同化된 지 오래임)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깔보았

는데 북쪽의 돌궐(突厥)이나 남쪽의 토욕혼(土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였고, 오직 동

쪽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저 오만하고 자존(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을 수 있

는 일이랴.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첫째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 년 동안 서로 풀지 못할 원수를 맺었지마는 갑자기 옹서(翁婿)간의 나라가 되어서(제9편

제1장 참고) 피차 화호(和好)하고 두 나라가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각기 사신을 수(隋)에 보내서 고구려 치기를

청하고, 또 가끔 고구려 국정의 허실을 수에 알려주어 수의 임금과 신하의 야심을 조장시켰다.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둘째 원인이었다. 뒤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구구한 반 독립국이나마 지녀 내려온

것은 고구려의 오랜 동안 끈덕진 저항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었던 때문이니, 만일 고

구려가 수에게 망했더라면 백제나 신라도 다 수의 한 군현(郡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

를 읽을 때에 신라ㆍ백제가 수에 대해 응원을 청한 사실을 보고는 책을 물리고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 隋文帝의 모욕적인 글과 姜以式의 북벌 주장

기원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文帝)가 진(秦)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誣罔)이 심하

고 패만(悖慢)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

로방지(圓顱方趾)로 각기 그 천성(天性)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 해마다 조공(朝貢)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 그렇게 썼을 뿐 대등한 나라

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임) 비록 번부(藩附)

라 일컫기는 하지마는 정성이 미흡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

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가두어 왕의 신첩(臣妾)을 만들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를

사모한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이 심하냐?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쓰고

자 할진대 아뢰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

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으 무엇을 하려 함이냐.……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

는 이제 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랴.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

찌 비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陳國)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

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리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

를 바란다.”

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기원 590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

에는 문제의 개황(開皇)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년은 문제 개황 17년이 아니니, 삼국

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

록한 것이다.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양 그 사실을 보고해온 해애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

조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

인데, 삼국사기는 평원(平原)ㆍ영양(嬰陽)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를 좇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

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

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

(姜以式)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하고 곧 개전(開戰)하

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명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渝

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遼西)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

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수서만을 뽑아 기록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대

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 때

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

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

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좇는다.

 臨渝關 전쟁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

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

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睺)로 수군총관(水軍總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

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영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

고 나가 싸우지 말라 하니, 수의 군사는 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마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아홉이었다.”고 하여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

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

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었다.

제 2장 薩水의 싸움

 고구려ㆍ隋가 다시 싸운 원인과 동기

고구려가 장수왕(長壽王) 이래로 남진주의(南進主義)를 취해 서북의 지나와는 친교를 맺고 남쪽의 신라ㆍ백제

에 대하여 군사를 쓰다가 수(隋)가 지나의 남북을 통일하니, 고구려가 이를 두려워하여 우리도 빨리 신라와 백

제를 토멸해서 조선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주 남쪽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끼리

의 전쟁으로 인하여 서로 화합할 여지가 없게 되어 해마다 무력으로 다투는데, 게다가 북쪽 고구려의 침략이

있어 국력이 피폐해져 견디어낼 수 없으므로 두 나라는 제각기 사신을 수에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종용하였

다. 그러나 수는 임유관 싸움에 혼이 나서 고구려를 가벼이 대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이를 거절하였는데 문제

(文帝)가 죽고 양제(煬帝)가 즉위하여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전국이 부유해지고 각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찼다. 양제는 순유(巡遊)를 좋아하여 지금의 직예성(直匠省) 통주(通州)에서 황하(黃河)를 건너 지금의 절강성(浙

江省) 항주(杭州)에까지 3천 리 긴 운하를 파서 용주(龍舟 : 제왕이 타는 배)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토곡혼

(吐谷渾) - 지금의 서장(西藏), 서돌궐(西突厥) - 지금의 몽고(蒙古), 돌궐(突厥) - 지금의 몽고 동부 등 여러 나

라의 조공을 받아 이 하늘 아래에는 오직 수만이 강대한 제국이라고 자랑하여 하는데, 동방의 고구려가 있어

조선의 서북쪽 - 지금의 황해ㆍ평안ㆍ함경 세 도와 지금의 봉천(奉天)ㆍ길림(吉林)ㆍ흑룡(黑龍) 세 성을 모두 차

지하여 토지는 비록 수보다 좁지마는 인구가 번식하고 군사가 용감하여 수와 겨루려 하니, 일찍이 병마도원수

로 강남(江南)의 진(陳)을 토평하여 무공을 자랑하고 허영적 야심이 가득한 양제가 어찌 잠시인들 고구려를 잊

으랴? 그 폭발하지 않은 것은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 607년(양제 즉위 후 3년)에 양제가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림(楡林)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하(寧

夏)에 이르러 돌궐의 계민 가한(啓民可汗)의 장막에 들렀다. 이때 돌궐이 비록 수에 대해 신하라 일컫고 있었으

나 또한 고구려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두 나라 속국의 구실을 하므로 고구려가 답

사(答使)를 보냈는데, 양제가 이것을 알고 계민 가한을 위협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보았다. 양제의 총신 배구

(裵矩)가 양제를 꾀어 “고구려의 땅은 거의 한사군(漢四郡)의 땅인데, 중국이 이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

입니다. 선제(先帝 : 文帝)가 일찍이 고구려를 토멸하려 하셨으나 양양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어찌 이를 잊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양제는 고구려의 사신을 보고 “만일 고구려 왕이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出巡 : 침입한다는 뜻)할 것이다.”하고 을러댔다. 사신이 귀국하여 보고

하는 말을 들은 고구려 조정의 의논이 어떠하였던가는 역사책에 빠져서 알 수 없거니와 배구는 동번풍속기(東

藩風俗記) 30권을 지어 양제에게 울렸는데 그 가운데 평양의 가려(佳麗)함과 개골산(皆骨山 : 金剛山)의 영수(靈

秀)함을 격찬하여 순수를 좋아하는 양제의 동침(東侵)할 욕심을 더욱 부채질하여 명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동

양 고사상 미증유의 대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 隋煬帝의 침입과 그 전략

기원 611년 6월에 수의 양제가 고구려를 치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군사를 이듬해 정월 안으로 탁군(涿郡) -

지금의 직예성(直匠省) 탁현(涿縣)에 모이게 하고, 유주총관(幽州總管) 원홍사(元弘嗣)를 보내 동래(東萊) - 지금의

연태(烟台) 해구(海口)에서 병선 300척을 만들게 하고, 4월에 강남(江南)과 회남(淮南)의 수수(水手) 1만 인, 노

수(弩手) 3만 인과 영남(嶺南)의 배랍수(排鑞手) 3만 인을 징발하여 수군을 증강하고, 5월에 하남(河南)ㆍ회남에

조서를 내려 병거(兵車) 5만 대를 만들어서 군사와 무기와 군막(軍幕)을 실어 나르게 하고, 7월에 강남ㆍ회남의

민부(民夫)와 배를 징벌하여 여양창(黎陽倉)ㆍ낙구창(洛口倉) 등 창고의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하니, 강과 바

다에는 배들이 1천여 리에 널리고 육지에는 각지의 물건 운반하는 일꾼이 항상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양제가 탁군에 이르러 모든 군사를 지휘하는데 좌우 각 12군으로 나누어 한 군단에 대장과

아장(亞將) 각각 한 사람을 두고, 기병은 40여 대(隊)인데 1대는 100인이요, 10대가 1단(團)이 되어 네 단에

나누고, 보병은 80대인데 20대가 1단이 되어 또한 네 단에 나누고 치중병(輜重兵)과 산병(散兵)도 또한 각각

네 단에 나누어 보병 사이에 기우고, 갑옷 투구와 기치(旗幟)는 단마다 빛까을 달리하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머

무르고 걷는 것이 정연하니 모두 24군단이었다. 하루에 한 군단씩 40리만큼 영(營)을 지어 출발하는데 40일

만에야 다 출발하니 머리와 끄이 서로 닿아 고각(鼓角) 소리가 산하를 뒤흔들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마지

막으로 어영군(御營軍)이 출발하는데 또한 80리에 뻗치니, 정규의 군사가 합 113만 3천8백 명이라 200만이라

일컬었고, 뒷바라지하는 군사는 400만이나 되니 지나 유사 이래의 대동병(動兵)이었다.

수서(隋書)에 양제 출군의 명령을 기록하되, 좌군(左軍) 12군단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

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

가고 우군(右軍) 12군단은 점선(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彌)ㆍ임둔(臨屯)ㆍ후성(候城)ㆍ제해(提奚)ㆍ답돈(踏頓)ㆍ

숙신(肅愼)ㆍ갈석(碣石)ㆍ동이(東)ㆍ대방(蔕方)ㆍ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가서 다 평양에 모이라고 하였다. 명해

는 지금의 강화(江華)요, 옥저는 함경도와 훈춘(渾春) 등지요, 임둔과 동이는 지금의 강원도이니, 평양에 모이

라는 군사가 어찌 훈춘이나 함경도나 평양 이남의 땅으로 나왔을 것인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여러 군단의

진행한 실황을 기록하여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右

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

道)로 나가고, 우효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

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위장

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

道)로 나가고, 우어위호분낭장(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가서 다 압록수(鴨綠水) 서쪽

에 모였다고 하였는데, 낙랑ㆍ현도는 한(漢) 이래로 요동에 가설(假說)한 북낙랑ㆍ북현도도 있으니 압록수 서쪽

에 모였다 함도 옳거니와 옥저가 어찌 압록수 서쪽이 되는가? 그러므로 지명이 거의 임시로 가정한 이름이고

고구려의 본 지명이 아니니, 이로써 그 행군의 노선을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이제 그 전쟁의 광경에 의하여

미루어보건대 양제의 작전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24군단을 수륙(水陸) 두 방면으로 나누되 육군은 다시 두 부로 나누었다. 그 하나는 어영군(御營軍)과 그 밖의

10여 군단이니 양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의 여러 성을 치기로 하고, 또 하나는 우익

위대장군 우문술 등 9군단이니, 우문술이 사령(司令)이 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참모가 되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서울 평양에 침입하기로 했으며, 수군이 또한 여러 만 명이니 좌익위대장군 수군총관(水軍總管) 내호아

(來護兒)와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양식 실은 배를 영솔하여 바닷길로 쫓아 대동강으로 들어와서 우문술과 합

세하여 평양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개 태조왕(太祖王) 때에 왕자 수성(遂成 : 뒤의 次大王)이 한(漢)의 군사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 이를 격파한

이래 고구려에서 항상 북방의 침입을 방어할 때 수성이 쓴 계책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고 북방의 침입

자들도 이것을 가장 경계하였으므로 이제 수의 양제는 육군은 가는 동안의 식량만 가지고 가며, 목적지인 요

동ㆍ평양의 두 성에 이르는 수군에 의뢰하여 운반해온 양식을 먹고 두 성을 포위하여 지구전(持久戰)을 벌여서

뒤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려 함이었다.

 고구려의 방어와 그 작전 계획

후세에 살수대전(薩水大戰)을 말하는 이가 거의 을지문덕(乙支文德) 한 사람의 계획으로 치고 또 을지문덕이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수의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줄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다.

고구려가 망할 때에도 그 상비군이 30만이나 되었으니, 하물며 영양왕(嬰陽王)의 전성시기일이랴. 이때에는

오히려 30만 명이 넘었을 것이고 또 광개토왕의 비문에 “왕이 친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한 것으

로 보거나 양제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宣戰) 조서로 보거나 아무튼 고구려 수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수군은 대략 수만 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30여만 명으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경계하는 데 몇만 명이 들

었을 것이거니와, 그 나머지도 20여만 명이 되니, 이 20만 명은 수에 대항하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수륙군의 대원수(大元帥)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요 육군의 원수는 을지문덕이었는데, 양제가 수륙 양면의

방어를 다 중히 여기는 가운데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는 것으로 계획의 중심을 삼아 육상의 장사들은 인민

에게 명하여 양식을 거두어가지고 모두 성에 들어가게 하고, 수군도 각각 요새 항구의 안전지대로 물러나 지

켜 싸움을 피하다가 수의 군사가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공격하게 하였다.

 고구려의 浿江 승전

을지문덕이 수의 군사를 깊이 꾀어들이려고 요하(遼河) 서북쪽에있던 군사를 거두어들여 요하를 지키니, 그 해

3월에 수의 군사가 요하에 이르러 서쪽 연안 수백 리에 진을 쳤다. 마치 벌떼처럼 우글우글하고 군사의 장비

와 군기가 울긋불긋 햇빛에 빛났다. 수의 군사 중 첫째가는 용장 선봉의 맥철장(麥鐵杖)이 부교(浮橋)를 매어

동쪽 언덕에 대려고 하므로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맡아 치게 해서 맥철장 등 장사 수십 명과 군졸

1만여 명을 목베고 부교를 끊어버리니, 수의 군사 중에서 잠수 잘 하는 자와 헤엄 잘 치는 자가 상을 탐내서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격전을 벌이면서 부교를 다시 매었다. 문덕이 예정한 계획에 따라 거짓 패하여 퇴군하

니, 수의 양제가 그 전군을 휘몰아 요하를 건너와서 어영군(御營軍)과 좌익위대장군 등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게 하고, 좌둔위대장군 토우서(吐禹緖) 등 10여 군단으로 하여금 그 부근의 성들을 포위 공격하게

하고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등 9군단은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평양을 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양식 실은 배를 호위하

여 동래(東萊) - 지금의 연대(烟帶)에서 출발, 창해(滄海 : 渤海)를 건너 패강(浿江 : 대동강) 어귀로 들어오므로,

왕제 건무가 비밀히 수군(水軍) 장졸을 후미진 항구에 숨겨두고 평양서 아래 인가에는 집집마다 재물을 내놓고

수의 군사가 상륙하는 것을 내버려두니, 내호아가 정병 4만 명을 뽑아서 패강을 거슬러올라와 성 아래로 돌진

하였다. 재물을 노략질하느라 대오가 어지럽게 무너지니, 이때 건무가 결사대 5백 명을 뽑아 성곽과 빈 절에

서 내달아 돌격해서 깨뜨리고 모든 군사에게 호령하여 수의 군사를 추격하게 하였다. 여기저기 수어 있던 수

군들도 일시에 내달아 함께 공격하니 수의 군사가 강 어귀에 이르러 배를 다투어 서로 짓밟아 죽는 자가 수없

이 많았고 양식 실은 배가 모두 바다 속에 가라앉아서 내호아는 단신으로 조그만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양식

실은 배가 다 없어지니 이미 평양성에 침입해 있던 우문술 등의 대군이 무엇을 먹고 싸우랴? 고구려가 이때

에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

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구인가?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인가 한다.

 고구려의 薩水 승전

을지문덕이 요하에서 퇴군하여 수의 군사의 허실(虛實)을 탐지해보고자 하여 거짓 항복을 청하는 사자가 되

어, 수의 진중(陣中)에 들어가서 그 내부 형편을 살펴보고 돌아오는데, 우문술 등이 그의 용모와 체구가 위엄

있고 건장함을 보고 놀라 이 사람이 고구려의 대왕이나 대대로(大對盧)인가 보다 하고 사로잡지 못했음을 후회

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만나기를 청하였다. 문덕은 이때 이미 패강의 승전을 듣고, 우문술 등의 모든 군사

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눈치채었으므로, 이미 반드시 이길 기틀을 잡았는데 어찌 다시 범의 굴에 들어

가랴? 달려 돌아오면서 수의 군사를 유인하기 위해 요새(要塞)를 만나면 가끔 머물러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하루 동안에 일곱 번 패하니 우문술 등이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 군사는 하잘것이 없다고 내쳐 달려와 살수(薩

水 : 지금의 천청강)를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평양에 이르니 성 안과 성 밖의 인가가 고요하여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개소리 닭소리도 들리지 아

니하므로 우문술이 의심이 나서 바로 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닫힌 성문을 두드리니 성중에서 대답하기를

“우리가 곧 항복하려고 땅과 인구의 문서와 장부를 조사하는 중이니 대군은 성 밖에서 닷새만 기다리시오.”했

다. 전보 같은 것이 없던 고대이므로 우문술 등은 내호아가 패전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내호아가 오기를 기다

려서 함께 공격하려고 성 안에서의 요구를 승낙하고 성 부근에 진을 쳤다. 군사들이 시장하여 약탈하려고 하되

집집이 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닷새가 지나 열흘이 되어도 성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우문술

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공격하니, 성 위 사면에 고구려의 깃발이 일시에 꽂히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이 쏟아

졌다.

을지문덕이 통역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너의 양식 실은 배가 바다에 가라앉아 먹을 양식은 끊어지고 평양성

은 높고 튼튼하여 넘어올 수 없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외치게 하고 포로로 한 수의 수군(水軍)

장졸들의 도장과 깃발을 던져주었다. 수의 군사가 그제야 내호아가 패했음을 알고 군심이 갑자기 소란해져 싸

울 수가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러나 돌아가는데, 을지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서 모래 주머니로 살수의 상류를

막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서 천천히 한가롭게 수의 군사를 뒤쫓게 하였다. 살수에 이르니 배가 하나도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의 깊고 얕은 데를 알지 못하여 머뭇거리는데 돌연 일곱 사람의 고구려 중이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오면서 “오금에도 차지 않는 물이오.”하고 건너가니 수의 군사가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물에 들어섰다. 채

중류에 미치지 못했을 때 상류의 모래주머니로 막은 물을 터놓아 물이 사납게 내리닥치는데 문덕의 군사가 뒤

쫓아와서 맹렬히 공격하니, 수의 군사는 거의가 칼과 화살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숨을 건진 자는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450리나 도망가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우문술 등 아홉 군단 30만

5천 명이 다 죽고 겨우 2천7백 명밖에 안 되었으니 백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고 무기와 그 밖의 몇만 수레

의 물건들이 죄다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다.

 고구려의 烏列忽

양제(煬帝)의 어영군과 그 밖의 10여 군단 수십만 명 군사가 오열홀과 요동 각지의 성등을 공격하였으나 하

나도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3월부터 7월까지 무릇 4,5달 동안에 고구려 사람들의 화살에 맞아 죽어서

성 아래에는 해골이 산을 이루었고, 또 양식을 얻지 못하여 장졸이 굶주리다가 우문술 등이 패하여 돌아감을

보자 더욱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양제는 오히려 최후의 요행을 얻을까 하여 모든 군사들을 오열홀 성

아래에 집합시켰는데 을지문덕이 이를 깨뜨려 사람과 말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물건이 한없이 많았다.

뒤에 고구려가 망하매 당(唐)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그 경관(京觀)을 헐고 백탑(白塔)을 세웠는데, 세상 사람

들이 이를 당태종(唐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침공할 때 당의 장수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세운 것이라 하지마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 수의 24군단 수백 명이 이에 전멸하고, 오직 호분낭장(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의

패잔군 수천이 남아 있어 양제를 보호해가지고 도망하였다.

수서(隋書)에 살수에서의 우문술의 패전을 기록하고 오열홀에서의 양제의 패전은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이른

바 높은 이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니, 춘추필법을 알아야만 지나 역사를 읽을 수가 있다.

요하를 건너 〇〇리에 발착수(渤錯水)가 있는데, 이것을 수(水)라 이름하였지마는, 시른 수(강물)가 아니라 유

명한 요동의 200리 진수렁이요 그 일명을 요택(遼澤)이라 하는 것으로, 당태종 요택 매골(遼澤埋骨)의 조서를

보면, 당시 수의 군사가 이 땅에서 매우 많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도 대개 고구려 군사의 추격에 죽은

것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전쟁은 패강(浿江)ㆍ살수(薩水)ㆍ오열홀(烏列忽) 3대전(大戰)을 포함한 것으로 으뜸가

는 공(功)은 패강의 싸움이고 다음은 살수의 싸움이고 마지막은 비열홀의 싸움이었는데 모두 통틀어서 살수

대첩(薩水大捷)이라 일컬음이 옳지 않지마는, 오랜 동안 씌어온 것이므로 그대로 쓴다.

제 3장 烏列忽ㆍ懷遠縝 두 싸움과 隋의 멸망

 隋煬帝의 두 번째 侵寇와 烏列忽 城主의 방어

수의 양제가 패해 돌아가서는 그 패전의 죄를 우문술(宇文述) 등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파면하여 옥에 가두

고, 패전의 치욕을 씻으려고 이듬해 정월에 다시 전국의 군사와 말을 탁군(ㆍ郡)으로 소집해서 요동의 옛 성

(지금의 永平府니 고구려 태조왕이 요동을 차지한 뒤에 漢이 이 땅에 옮겨다 설치한 것)을 수축하여 군량을 저축해놓

게 하고 “제장(諸將)의 전번 패전은 군량이 모자란 때문이요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하여 전국에 알리고,

다시 장군들의 직위를 복직시켜서 고ㅜ려 칠 계획을 세우는데 “작년에 요동을 평정하지 못하고 평양을 공격한

것이 실책이었다.”하여, 이에 조서로서는 대개 작년과 같이 여러 장수들의 출정할 길을 지정하였으나 내용은

먼저 오열홀을 쳐서 이를 함락시킨 뒤에 차차 그 지리(地理)의 차례에 따라 각 주군(州郡)을 평정하고 평양까지

내닫자는 것이었다.

이때 수는 크게 패한 뒤라 국고가 텅 비고 군대의 수효가 줄어 많이 모자라고 백성의 힘이 고갈하여 인심이

물끓듯해서 반란을 기도하는 자들이 지은 무향용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가 유행하였다.

양제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남자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군사로 삼

아서 교련한 지 몇 달 만에 요동으로 향하게 하고, 우문술ㆍ이경(李更)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응원하는 길을 막게 하고, 양제는 몸소 어영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열홀을 공격하였다. 당시 오열홀

의 성주(城主)의 이름은 비록 역사에 보이지 아니하나 대개 지혜롭고 용감하고 침착하고 의연한 인물이요 성

안의 모든 장졸들은 거의 다 수없이 많은 싸움을 경험한 용사들이었으므로 양제가 비루(飛樓 : 이동하는 누각)를

맨다, 운제(雲梯 : 높은 사닥다리)를 세운다, 지도(地道 : 땅굴)를 판다, 토산(土山)을 쌓는다 하여 성 공격하는 방

법을 모조리 다 써보았지마는, 성주는 그때그때 알맞은 방어전을 벌어서 서로 대치한 지 수십 일에 수의 군사

가 수없이 많이 죽었다.

수의 동도수장(東都守將)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기별이 와서 양제는 무기와 물자와 성 공격하는

기구 등을 다 버리고 밤 이경(二更)에 비밀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황급히 군사를 돌이켰으나 성주에게 발각되

어 그 후군(後軍)이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였다.

 煬帝의 세 번째 侵寇와 弓弩手의 저격

양제는 비록 양현감의 반란을 평정하였지마는 국력이 피폐하고, 인민의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양

제는 오히려 패전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국내의 병마(兵馬)를 또 징집하여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아가는데, 군

사들이 전번 두 번의 패전으로 인하여 가면 죽을 줄 알므로 도중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고 이미 반란을 일으킨

지방은 징집에 응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양제는 싸우기 어려울 것을 깨닫고 중지하려고 하다가 그러면 더욱

온 나라 안의 웃음거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할 수 없을 것을 생각하고, 어떤 구실이라도 잡아서 휴전을 하려고

고고구려에 대해 반신(叛臣) 곡사정(斛斯政)의 인도를 유일한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하였다. 곡사정은 곧 양현감

의 무리로서 고구려에 투항한 사람이다. 이때에 고구려의 국론이 두 파로 갈리니 한 파는 남쪽의 신라ㆍ백제

를 토멸하기 전에는 지나에 대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물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전자에 지나에 대한

교제가 너무 강경하여 여러 해 전화를 일으켰으니 오늘부터라도 다시 정책을 변경하여 수와 화의하자 하였고,

또 한 파는 신라와 백제는 산과 내가 몹시 험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며 또 백성들이 굳세어 좀

처럼 굴복하지 않는데, 지나의 대륙은 이에 반하여 넓은 들이 많아서 가장 군사를 쓰기가 좋고, 백성들이 전

쟁을 두려워하여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동요하므로 장수왕의 북수남진책(北守南進策)이 원래 잘못된 것이

다, 오늘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리고 남쪽은 방어만 하고 정병을 뽑아 수를 치면 비록 많은 군사가 아니라도

성공하기 쉬우며, 성공한 뒤에 백성을 위무하고 인재를 채용하면 전 지나를 통일하기가 용이하다고 하였다.

앞의 것은 왕의 아우 건무(建武)의 일파이니 많은 호족(豪族)들이 이에 속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수에 대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나라 사람들의 신망이 다 같이 높았으므로 따라서 두 파의 세력도 거의 비슷하였다.

영양왕(嬰陽王)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찬동하였으나 고구려는 호족 공화(共和)의 나라였으므로 왕이 또한 건무

의 파의 의견을 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양제가 곡사정의 인도를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하자, 나라 안이 건무

파에 많이 붙좇아 우세해져서 드디어 망명해온 가련한 곡사정의 인도를 허락하는 동시에 사자가 국서를 받들

고 양제의 군영으로 갔는데, 어떤 장사가 이를 몹시 분개하여 소뇌[弩弓]를 품고 사자의 수행원으로 가장하고

가만히 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양제의 가슴을 쏘아맞히고 달아났다. 비록 이로써 화의를 깨뜨리진 못하고

곡사정의 인도도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나 양제의 넋을 빼앗고 고구려의 사기가 왕성함을 보임에는 넉넉하였다.

그 화살을 맞고 돌아간 양제는 병도 들고 부끄럽고 노여워서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나라 안이 크게 이저리워

져서 몇 해 안 가 암살당하여 수는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이 전쟁을 논평하다가 영양왕이 살수 승전의 위세로 수의 양제의 아비 죽은 죄를 성토

하고 을지문덕 장군을 호령하여 수를 합병하지 못했음을 한하였으나, 양제가 아비 죽인 설은 의문이 있는 일

일 뿐 아니라 또한 수의 궁중 비사(秘史)라 고구려 사람이 듣지 못했을 것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나 해상

잡록(海上雜錄)에는 분명히 이 전쟁 끝에 을지문덕의 일파가 북벌을 주장하였음을 기록했는데, 선생이 이를 그

의 저서 동사강목(東史綱目)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비사(秘史)의 설을 정사(正史)에 넣을

수 없다 함인 것 같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ㆍ동국통감 등은 사대주의의 기록이기 때문에 지나와의 전쟁에

대해서는 오로지 저네의 기록만 인용하였으니 비사의 설이 도리어 정확한 재료가 아닌가 하여 본서에서는 이

를 채록(採錄)하였다.

제 11편 고구려와 唐의 전쟁

제 1장 淵蓋蘇文의 西遊와 그 혁명

 연개소문의 출생과 소년시절의 西遊

연개소문은 ① 고구려 9백 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②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의 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西國) 제왕 당태종(唐太宗)을 격파하여 지

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

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실은 겨우 김유신전(金庾信傳) 가운데 “개금(蓋金 : 연개소문)이 김춘추(金春秋)

를 객관(客館)에 머무르게 했다.”는 한 마디가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오로지 신ㆍ구 두 당서(唐書)와 자치통

감(資治通鑑) 등 지나사를 뽑아 기록한 것뿐인데, 저 지나사는 곧 연개소문을 상대해서 혈투하던 당태종과 그

신하들의 입과 붓에서 나온 것을 재료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매우 적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

(西部)의 세족(世族)이요, 서부의 명칭이 연나(淵那 : 涓那)이므로, 성이 연(淵)인데, 삼국사기에 성을 천씨(泉氏)

라 한 것은 당나라 사람이 그 고조(高祖)의 이름 연(淵)을 피하여 천으로 대신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가 기록한

것이다.

당의 장열(張悅)이 규염객(虯髥客)의 사실을 기록하여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태원(太原)에 이

르러 이정(李靖)과 친교를 맺고 이정의 아내 홍불지(紅拂枝)와는 남매의 의를 맺고자 중국의 제왕이 되려고 도

모하다가 당공(唐公) 이연(李淵)의 아들 세민(世民 : 唐太宗)을 만나보고는 그의 영기(零氣)에 눌려 이정더러 중국

의 제왕 될 것을 단념했노라 하고 귀국하여 난을 일으켜서 부여국 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虯髥客傳의 大意),

선배들이 “부여국은 곧 고구려요, 규염객은 곧 연개소문이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의 영기에 눌려 지나의 제

왕되기를 단념한 것은 제왕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요 구구한 지략있는 자가 엿볼 것이 아니라는 저네 소설가의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 필법일 뿐이거니와 연개소문이 지나를 침략하려 하여 그 국정을 탐지하기 위해 한 번

서유(西遊)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중국에 전하는 갓쉰동전(傳)은 이것과 같은 소설이니 그 대강이 다음과 같

다.

연국혜라는 한 재상이 있었는데 나이 50이 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하늘에 제사를 올려 아들의 점지를

기도하여 한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갓뒨동이라고 하였다. 갓 쉰 살 되던 해에 낳았다는 뜻이었다. 자라나매 용

모가 비범하고 재주가 월등하므로 연국혜가 손 안의 구슬 같이 사랑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갓

쉰동이가 7살 되던 해에 문 앞에서 장난을 하고 노는데 어떤 도사(道士)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아깝다, 아

깝다.”하고 갔다. 연국혜가 그 말을 듣고 뒤쫓아가 도사를 붙잡고 그 까닭을 물으니 도사가 처음에는 굳이 사

양하고 말하지 아니하다가 나중에 하는 말이 “이 아이가 자라면 부귀와 공명이 무궁할 것이지마는 타고난 수

명이 짧아서 그때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오.”하였다. 그러면 그 액을 면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으니까 “십오년

동안 이 아이를 내버려 부모와 서로 만나지 못하면 그 액을 면할 것이오.”하였다. 연국혜는 차마 못할 일이었

지마는 도사의 말을 믿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하인을 시켜서 갓쉰동이를 멀리멀리 산도 설고 물도 선 어느 시

골에 데려다 버리게 하였는데, 다만 훗날 도로 찾을 표적을 만들기 위해 먹실로 등에다가 ‘갓쉰동’이란 석 자

를 새겨서 보냈다. 갓쉰동이가 버려진 곳은 원주(原州) 학성동(鶴城洞)이었다. 그 동네의 장자(長者) 유씨(柳氏)

가 그날 밤 꿈에 앞내에 황룡(黃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새벽에 앞내에 나가보니 한

준수한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 등에 새긴 글자를 보고 이름을 그대로 ‘갓쉰동’이라 불렀

다.

갓쉰동이 자랄수록 미목(眉目)이 청수하고 용모가 영특하나 그 내력을 알 수 없어 온 집안이 천한 사람으로

대접하였다. 장자는 그를 사랑하기는 하였으나 남의 시비를 싫어하여 그 신분을 높여주지 못하고, 다만 글을

약간 가르쳐 자기 집 종으로 부렸다.

하루는 갓쉰동이가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는데 난데없는 청아한 퉁소 소리가 들리므로 지게를 버티어놓고 소

리 나는 곳을 찾아가닌 한 노인이 앉아서 퉁소를 불고 있었다. 노인이 갓쉰동이를 보더니 “네가 갓쉰동이가 아

니냐?”하고 학문의 필요함을 이야기해주었다. 갓쉰동이는 그 이야기에 취하여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는

데 노인이 석양을 가르키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라고 하며 어디로인지 휙 가버렸다. 갓쉰동이가 그제야 깜

짝 놀라 내가 나무를 하러 왔다가 빈 지게를 버티어놓고 해를 다 보냈으니 주인의 꾸중을 어찌하나, 하고 내려

와 보니 누구의 짓인지 나무를 베어 지게에 지워놓았다. 갓쉰동이가 그 이튿날부터 나무를 하러 가면 반드시

그 노인을 만나고 만나서는 검술(劍術)ㆍ병서(兵書)ㆍ천문(天文)ㆍ지리(地理) 등을 배우고, 그리고 내려오면 반드

시 그 지게에 나무가 지워져 있어서 지고 돌아올 뿐이었다. 장자는 아들은 없이 딸만 셋을 두었는데 문희ㆍ경

희ㆍ영희라 하였다. 세 사람이 다 뛰어난 미인인데 영희가 더욱 뛰어났다. 갓쉰동이가 15살 되던 해 봄 어느

날, 장자는 갓쉰동이를 불러 세 아가씨를 가마에 태워가지고 화류(花柳) 구경을 가라고 하였다. 갓쉰동이 그의

말에 따라 교군(轎軍)을 가지고 문희의 방 앞에 가서 “아가씨, 가마를 대령했습니다.”라고 했다. 문희가 버선발

로 마루 끝에 나서더니 “아이고, 맨 땅을 어떻게 디디겠느냐? 갓쉰동아, 네가 거기 엎드려라.”하여 갓쉰동이

의 등을 밟고 내려와 가마에 들어갔다. 경희를 태울 때 경희도 그러는지라 갓쉰동이 노하여 한 주먹으로 때려

주고 싶었지마는 장자의 은혜를 생각하여 꾹 참고, 영희의 방에 가서는 이 년도 그 년의 동생이니 별다르겠느

냐 하는 생각이 나서 “가마를 대령하였습니다.” 한 마디 하고는 미리 뜰에 엎드렸다. 영희가 문에서 나와 보

고는 놀라 “갓쉰동이, 이것이 무슨 짓이냐.”하였다. 갓쉰동이가 말했다. “갓쉰동이의 등이야 하느님이 아가씨

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까? 이 등으로 나무를 져다가 아가씨들의 방을 덥히고, 이 등으로 쌀을 실어다가 아

가씨들의 배를 불리고, 아가씨들이 앉고 싶으면 갓쉰동이의 등을 자리로 쓰시고, 아가씨들이 곧고 싶으면 갓

쉰동이의 등을 다리로 삼으시고…….” 말이 채 끝나지 아니하여 영희가 달려들어 “아서라, 이게 무슨 짓이냐?

사람의 발로 사람의 등을 밟는 법이 어디 있느냐?”하고 갓쉰동이를 일으켰다. 갓쉰동이는 일어나 영희의 꽃

같은 얼굴, 관옥 같은 살결과 정다운 말소리에 마음을 잡지 못하며, “나도 어렴풋이 어릴 때의 일을 생각하면

너와 결혼할 만한 집인데…….”라고 말하며 눈물이 글썽해졌다. 영희도 갓쉰동이의 용모가 범상치 아니하고

음성이 우렁참을 보고 이같은 남자가 어찌하여 남의 집 종이 되었을까 생각하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

다.

이 뒤로부터 갓쉰동이는 영희를 생각하고 영희는 갓쉰동이를 사랑하여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점점 두터워졌

다. 갓쉰동이가 “내가 일곱 살 때 집을 떠나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아마 우리 부모가 도사의 말을 믿고

나를 버려 훗날 다시 찾으려 한 것 같다. 나도 집에 돌아가면 귀한 집 아들이니 너 나하고 결혼하자.”라고 하

니 영희는 “나는 귀인의 아내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 만일 네가 사나이가

아닐진대 귀한 집 아들이라도 내 남편이 못 될 것이고, 네가 사내라면 종이라도 나는 너 아니면 아내가 되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그 회포를 말해보아라.”하였다. 갓쉰동이 “달딸이는 늘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백성을 괴

롭히는데 우리는 다만 침입하는 달딸이를 물리칠 뿐이요 달딸국에 쳐들어가지 못했으니 나는 이것이 분하여

늘 달딸이의 땅을 한 번 쳐서 백 년의 태평을 이룩하려고 생각한다.”하고 요즈음 나무하러 가서 어떤 선관(仙

官)에게 날마다 검술ㆍ병서ㆍ천문ㆍ지리 등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영희는 크게 기뻐하며 “그렇지

만 적국을 치자면 적국의 형편을 잘 알아야 할 것인데 네가 친히 달딸국에 들어가 그 산천을 두루 돌아다녀서

국정을 살펴보아 훗날 성공할 터를 닦아가지고 오면 나는 너의 아내가 못 되면 종이 되어서라도 네 앞에서 백

년을 모시려 한다.”고 하였다. 갓쉰동이가 쾌히 허락하고 장자의 집에서 달아났는데 영희는 제가 가진 금가락

지와 은그릇 등을 주어 노자를 만들게 하였다.

갓쉰동이가 달딸국에 들어가서는 달딸의 말도 배우고 달딸의 풍속도 익히고, 또 그 내정을 알기 위해 이름을

돌쇠라 고치고 달딸국왕의 가노(家奴)가 되었는데 행동이 영리하므로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영매하고 또 사람을 잘 알아보아 갓쉰동이는 비상한 영걸이요 또한 달딸의 종자가 아니니 죽여서 그 후환을

없애자고 그 아비에게 고하여 철책 안에 잡아가두고, 음식을 끊어서 굶겨 죽이려고 하였다. 갓쉰동이는 곧 자

기의 몸이 위태로움을 깨달았으나 계책이 없어 답답히 앉아다가 자기 곁에 매를 길들이려고 잡아넣은 새장을

보고 와락 달려들어 새장을 부수고, 그 안에 있는 매를 다 날려보냈다. 이때 마침 달딸왕 부자는 다 사냥을

나가고 달딸왕의 공주가 그를 지키고 있다가 놀라 “네가 왜 매를 놓아 보내느냐? 더욱 우리 아버지와 오빠에

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냐?”하였다. 갓쉰동이가 말했다. “내가 나 갇힌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갇힌

매를 보니 곧 매가 답답해 할 것을 생각하였다. 나를 풀어주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내 곁에 갇혀 있는 매

를 풀어 보내지 못한다면 매가 얼마나 나를 원망하랴. 차라리 매를 위해 죽을지언정 매의 원망을 받지 않으리

라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갇혀 있는 매를 놓아주었다.” 공주가 그의 말을 듣고 측은히 여겨 “내가 우리

둘째 오라버니에게 들으니 네가 우리 달딸을 멸망시키려고 생긴 사람이라 하던데 네가 어찌하여 달딸을 망치

려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갓쉰동이가 말했다. “하늘이 나를 달딸을 망치려고 내셨다면 너의 오라버니가 나

를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이고, 또 나를 죽일지라도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올 것이다. 너의 오라버지에게

이렇게 잡혀 죽게 된 몸이 어찌 달딸을 멸망시킨단 말이냐? 공주가 만일 나를 풀어주면 나는 저 매와 같이

산으로 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공주를 사랑하고 보호해달라고 외울 뿐이요, 다른 생각

이 없겠다.”공주가 더욱 측은히 여기는 빛이 있더니 “오냐, 내 아무리 무능한 여자인들 우리 아버지의 딸이요

우리 오라버니의 동생이니 어찌 너 하나를 살려주지 못하겠느냐? 얼마 안 가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돌아

오시거든 너의 무죄함을 아뢰어 너를 돌아가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갓쉰동이 공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

다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공주는 애쓰지 말라. 돌쇠 한 놈 죽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나는 들으니 부처님

은 사람을 구할 때에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고한 일이 없다던데…….” 공주가 그 말에 얼굴빛이 더욱 변하더

니 내전(內殿) 불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열쇠로 철책의 문을 열어 갓쉰동이를 내보냈다. 공주가 손목을 잡고

“내가 너를 처음 보았지마는 너를 보내는 데 내 마음도 따라간다. 네 몸은 매같이 훨훨 날아서 가더라도 네

마음일랑 나를 주고 가거라.” “공주가 나를 잊을지언정 내가 어찌 공주를 잊겠는가?”하고는 갈길이 바빠 걸음

아 날 살려라 두 주먹 불끈 쥐고 도망하여 성문을 나와 풀뿌리 캐먹으면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달딸의

국경을 벗어나 귀국하였다. 달딸의 둘째왕자가 돌아와 공주가 갓쉰동이를 사사로이 놓아준 것을 알고 크게 노

하여 칼을 빼서 공주의 목을 베었다.

이 이야기는 계속해서 갓쉰동이가 귀국한 뒤에 책문(策文)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일이며 영희와 결혼한 일이

며 달딸을 토평한 일이며 그 밖에도 이야기들이 많으나 다 생략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연개소문이 지나를

정탐한 전설의 일단(一段)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갓쉰동은 곧 개소문(蓋蘇文)이니 개(蓋)는 갓으로 읽고 소문(蘇

文)은 쉰으로 읽을 것이며, 국혜는 곧 남생(男生) 묘지(墓誌)에 보인 개소문의 아버지 태조(太祚)니, 하나는 그

이름이고 하나는 그 자(字)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혜가 혹 소설의 작자가 사사로이 지은 이름일 것이다. 달딸

국왕은 곧 당고조(唐高祖)요 둘째왕자는 곧 당고조의 둘째아들 태종이니, 어찌하여 당고조와 태종을 달딸왕이

라 달딸왕자라 하였는가하면 이는 여러 백 년 이래 사대주의파의 세력에 눌러 언문책(諺文冊)이라고 천대하던

우리 글로 쓴 여염집 부녀자가 읽는 책에서도 당당히 지나 대륙의 정통 제왕을 공격 혹은 비난하지 못하였으

므로, 당(唐)을 달딸로 당고종을 달딸국왕으로 태종을 달딸국 둘째왕자로 고친 것이다. 연개소문이 병력으로

임금과 대신과 가족 등 수백 명을 죽인 사실이 왜 갓쉰동전에 빠졌는가? 이것도 구소설의 권선징악(勸善懲惡)

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고친 것이다.

연개소문의 시대에는 조선에 과거(科擧)가 없던 시대라 책문(策文)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이를 천선(天仙)같이 본 이조의 습관에 의해 덧붙인 것이다. 갓쉰동전은 이같이 옛 전

설을 고치고 새 관념으로 첨삭하여 지은 소설이니 그 본래것의 신용가치의 여하를 말할 수 없음이 아깝다.

규염객전과 갓쉰동전 두 책의 기록이 좀 다른데, 이제 두 책의 기록의 진위(眞僞)를 추론하건데, 이때에 고구

려가 새로 수양제(隋煬帝)의 수백만 군사를 대파하여 전 지나가 크게 놀라 떨고, 당고조(唐高祖)의 부자는 수양

제 치하(治下)에 있는 태원(太原)의 소공국(小公國)이요, 이정(李靖)은 태원의 한 작은 벼슬아치였다. 태원이 옛

날부터 많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지방이므로 더욱 고구려 사람을 경계하였을 것이며, 당태종은 안으로 전

지나를 평정하고 밖으로 고구려를 토멸할 야심을 가져 늘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들의 행동을 주목하였을 것이

다. 그래서 당태종은 여러 노복들 중에서 변장한 고구려 사람 연개소문을 발견한 것이니 얼마나 놀랐으랴? 하

물며 당서(唐書)에도 연개소문은 모습이 괴이하고, 의기가 호매(豪邁)하다고 하였으니, 당태종이 이를 발견하자

곧 자기네 장래의 강적이 자기네 수중에 잡혔음을 알고 비상한 요행으로 여겼을 것이고, 또한 얼마나 좋아하

였으랴? 그 놀라움, 그 좋아함 끝에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을 것도 불을 보는것과 같이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이치로 미루어보아 갓쉰동전은 믿을 만한 점이 많고, 신구 두 당서에 당태종의 말을 기록하여 “개소문은 방자

하다.” “개소문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개소문은 이리 같은 야심…….”이라고 한 말들이 비록 개소문을 미

워한 말이지마는 반면에 개소문을 꺼렸음을 드러난 것이다. 이위공병서(李衛工兵書)에 “막리지(寞離支) 개소문은

스스로 군사병법을 안다고 하였다.”고 한 문구가 또한 개소문을 모멸하였다는니보다 두려워 공경한 뜻이 엿보

인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만나보고 영기(英氣)에 눌려 동으로 나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두 기록을

대조해봄에 있어 규염객전은 의심할 만한 점이 많으므로, 본서에는 규염객전을 버리고 갓쉰동전을 취하였다.

 연개소문 귀국 후의 내외 정세

연개소문이 지나로부터 귀국한 것은 대개 기원 616년(?)경이다. 연태조(淵太祚) 부부는 등에 새긴 이름을 증

거삼아 아들을 찾았고, 만리 밖 미혼부(未婚夫)를 기다리던 유씨 집의 영희는 신랑을 맞아 한때 기이한 이야기

로 고구려 국내에 널리 퍼졌다고 하였다. 이는 다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 못 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거니와

개소문이 귀국한 뒤에 수(隋)의 양제(煬帝)는 신하 우문화급(宇文化及 : 살수에서 패해 돌아간 장군 宇文述의 아들)

에게 참살당하고, 군웅(群雄)이 우우 일어나 서로 힘을 다투어 지나 전국이 끓는 물같이 부글부글하다가 오래

지 않아 앞에서 말한 당공(唐公) 이연(李淵)의 아들 이세민(李世民 : 곧 당태종)이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또한

반란군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오히려 수(隋)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다가 마침내 군웅을 말끔히 토멸하고는 드디어 아버지 연

을 추대하여 당황제(唐皇帝)를 삼고 또 오래지 아니하여 당태종은 형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元吉)이 권력 다툼

함을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건성ㆍ원길을 죽이고 아버지 연을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섰다.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고 15년 동안이나 정치와 전쟁에 애쓰며 이름난 신하와 어진 재상을 등용하여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국가 사회주의를 행하여 국내의 땅들을 모두 공전(公田)으로 만들어서 백성들

에게 대략 공정하게 분배하였으며, 16위(衛)를 세우고 고구려의 징병제(徵兵制)를 참작하여 상비군 이외에 예비

병을 두어 전국 백성이 해마다 농사의 여가에 말타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정(李靖), 후군집(候君集) 등 여

러 장수들을 내보내서 돌궐(突厥) - 지금의 내몽고와 철륵(鐵勒)의 여러 부(部) - 지금의 외몽고와 토곡혼(吐谷

渾) - 지금의 티베트를 정복하여 문치(汶治)와 무공(武功)이 다 혁혁하니 이것이 지나사에 가장 떠드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라는 것이다.

그러면 연개소문이 귀국한 이듬해 수가 망한 뒤로부터 정관 15년까지 26년 동안 고구려의 내정은 어떠하였

던가? 왕의 아우 건무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의 군사를 쳐 물리친 두 대원훈(大元勳)이지만, 을지문덕은 북진남

수(北進南守) 주의를 지키고 건무는 북수남진(北守南進) 주의를 주장하여 두 사람이 서로 정견을 달리했는데, 영

양왕(嬰陽王)이 돌아가고 건무가 즉위(기원 618년)하고부터는 더욱 북수남진 주의를 굳게 지켜 수ㆍ당이 일어나

고 망하는 사이에 을지문덕 일파의 여러 신하들이 그 기회를 타서 북으로 강토를 늘리자고 주장했으나 왕이

억제하여 듣지 아니하고, 당에 사자를 보내서 화호(和好)를 맺고 수의 말기에 사로잡은 지나인을 다 돌려보내

고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을 다시 써서 자주 군사를 내어 신라와 백제를 쳤다.

연개소문이 이를 반대하고 “고구려의 우환이 될 것은 당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니다. 지난날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우리 나라의 땅을 침노해 빼앗은 일이 있으나 이제는 형편이 이미 변하여 신라와 백제가 서로 원수

로 여김이 이미 깊어져서 여망(餘望)이 없으니, 국가에서 남쪽에는 견제책(牽制策)을 써서 신라와 동맹하여 백

제를 막거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막거나, 두 계책 중에서 하나를 쓰면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통에 우리

나라는 남쪽의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이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여 다투는 것이 옳다. 서쪽 나라는 우리 나라

와 언제나 양립하지 못할 나라이니 이것은 지나간 일에 경험하여 보아도 분명한 것이므로 국가에서 왕년에 몇

백만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때 곧 대군을 내어 토벌하였더라면 그 평정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

을 것인데, 그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잃었음이 이미 뜻있는 이의 통분히 여기는 바요, 오늘날도 좀 늦기는

하였으나 저네의 형제가 화목하지 아니하여 건성은 세민을 죽이려 하고 세민은 건성을 죽이려 하는데, 이연

(李淵)이 혼암(昏暗)하여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니 이러한 판에 만ㅇ리 우리가 대군으로 저네를 치면

건성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거나, 세민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을 것이요, 설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저네가

수의 말년에 우리에게 크게 패하고, 또 여러 해 난리가 뒤를 이어 백성의 힘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전쟁을 할 여력이 없을 것이니 이것도 비상한 좋은 기회이거니와 만일 저네 두 형제 중 한 사람이 패

해 죽고 한 사람이 전권(專權)하여 세력이 통일된 뒤에 폐정(弊政)을 고치고 군제(軍制)를 바로잡아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땅의 크기와 백성의 많기가 다 저네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고구려가 무엇으로 저네에게 대항할 것인

가? 국가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 있는데 모든 신하와 장수들이 이를 아는 이가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

랴?”하여 극력 당의 징벌을 주자하였으나 영류왕(營留王)과 다른 신하들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따.

기원 626년에 이르러 세민(世民 : 당태종)이 그 무덕(武德) 9년에 아버지의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때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서로 전쟁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오래지 않아 다시 을지문덕의 전승 기념으로 쌓은 경

관(京觀)이 두 나라 평화에 장애가 된다 하여 철회를 요구해왔다. 영류왕은 크게 놀라 오래지 않아 당의 침입

이 반드시 있을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오히려 북수남진의 정책을 그대로 지켜 남쪽의 침략을 그만두지 않는

동시에 국내의 남녀를 징발하여 북부여성(北扶餘城)에서 지금의 요동반도(遼東半島) 남쪽 끝까지 1천여 리의 장

성을 16년이나 두고 쌓으니 그 역사(役事)가 전쟁보다 더 거창하여, 남자는 농사를 짓지 못하여 여자는 누에를

쳐 길쌈을 하지 못하여 국력이 크게 피폐해졌다. 삼국유사에는 그 장성을 연개소문의 주청(奏請)에 의해 쌓은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연개소문이 노자상(老子像)과 도사(道士)를 청해왔다.”고 하는 말과 한가지 거짓말

이다.

 연개소문의 혁명과 大殺戮

기원 646년경에 서부(西部)의 살이(薩伊) 연태조(淵太祚)가 죽으니 아들 연개소문이 살이의 직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늘 격렬하게 당을 치기를 주장하므로, 영류왕과 모든 대신과 호족(豪族)들은 다 연

개소문을 평화를 파괴할 인물이라고 위험시하여 그가 직위 물려받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는 곧 연개소

문의 정치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자기의 소신이 아주 굳어서 “내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할

사람이 없다.”하고 자처하는 인물이었지만 또한 어릴 때 타향과 외국에서 두 번이나 종 노릇한 경력이 있어

굽혀야 할 때 굽힐 줄을 아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다. 직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곧 사부(四部)의 살이와 그 밖의

호족들을 찾아다니며 “개소문이 불초하나 여러 대인들께서 큰 죄를 가하지 않으시고 다만 직위 계승만 못하게

하시니 이것만도 그 은혜가 지극하여, 오늘부터 개소문도 힘써 회개하여 여러 대인들의 교훈을 좇으려 합니

다. 바라건대 여러 대인들께서는 개소문으로 하여금 직위를 계승케 하셨다가 불초한 일이 있으면 직위를 도로

빼앗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여러 대인이 그의 말을 애처롭게 여겨 서부 살이의 직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서울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북쪽으로 쫓아내 북부여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서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할 날짜까지 정하였다.

전에 당태종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보냈는데 당인(唐人)은 번번이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발각되므로, 남해 가운데 있는 삼불제국(三佛齊國)의 왕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의 군사 수효와 군대의 배치와

군용 지리와 그 밖의 내정을 탐정해주기를 부탁하였다. 삼불제국은 남양(南洋)의 한 조그만 나라로 옛날부터

고구려에 호시(互市 : 국제 무역)를 하고 조공을 바쳐 그가 오면 마음대로 각지를 돌아다닐 수 있었으므로, 삼

불제국의 왕이 이를 쾌히 승낙하고 조공한다 일컫고 정탐할 사신을 고구려에 보냈다. 그래서 사신이 와서 여

러 가지를 정탐하여 귀국한다고 하고는 바다로 나가 당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바다 가운데서 고구려의 해라장

(海邏長) - 해상경찰장(海上警察長)에게 잡혔다. 해라장은 강개(糠慨)한 무사요, 연개소문을 천신(天神)같이 숭배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늘 조정이 연개소문의 계책을 써서 당을 치지 아니함을 분개하다가 이제 당의 밀정 삼불

제국의 사신을 잡으니, 그 비밀 문서는 빼앗아 조정에 올리고 밀정은 옥에 가두려다가 “아서라, 적을 보고도

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조정이 있단 말이냐?”하고 문서는 모두 바다 속에 던져버리고 사신은 먹으로 얼굴

에다가 다금과 같은 글자를 새겼다. “해동 삼불제(三佛齊)의 얼굴에 자자(刺字)하여 내 어린아이 이세민(李世民)

에게 이른다. 금년에 만약 조공이 오지 않으면 명년에 마땅히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키리라.(面刺海東三佛齊 寄

語我兒李世民 今年若不來進貢 明年當起問罪兵)”라는 한시 한 편을 새기고 다시 “고구려 태대대로(太大對盧) 개소문

의 군사 아무개 씀(高句麗 太大對盧 淵蓋蘇文 卒 謀書)”이라고 덧붙였다. 얼굴은 좁고 글자 수는 많아 먹의 흔적

이 흐리어 알아볼 수가 없다 하여 다시 그것을 종이에 베껴서 그 사신에게 주어 당으로 보냈다. 당태종이 이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곧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하니 모시고 있던 신하가 간하였다. “대대로(大對

盧)는 연개소문이 아니니, 이제 사신의 얼굴에 자자한 연개소문이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하물며 누구

인지도 알 수 없는 연개소문의 부하 군사의 죄로 맹약을 깨뜨리고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

니다. 먼저 사신을 보내서 밀서(密書)로 왕에게 알아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당태종이 그의 말을 좇아 사

실의 진위(眞僞)를 알려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영류왕이 밀서를 보고 군사를 보내 해라장을 잡아다가 문초하였

다. 해라장이 강개하여 자백하고 조금도 기탄하지 아니 하니 영류왕이 크게 노하여 서부 살이 연개소문 한 사

람만 빼놓고 다른 여러 살이와 대대로 울절(鬱折) 등 여러 대신을 밤에 비밀히 소집하였는데, 해라장이 당의

임금을 모욕한 것은 오히려 조그만 일이거니와 그 끝에 태대대로도 아닌 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쓴 것과 또

허다한 대신들 가운데 다른 대신을 말하지 않고 홀로 연개소문ㅇ르 들어 그의 휘하 군사로 일컬은 것을 보면

저들 연개소문을 따르는 잔들이 그를 추대하는 것이 분명하고 또한 연개소문이 항상 당나라 칠 것을 선동해서

조정을 반대하여 인심을 사니, 이제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후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벼슬을 박탈하고

사형에 처함이 옳다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전일 같으면 한 번 명령하여 군사 한 사람을

보내서 연개소문을 잡아오면 되겠지만 지금은 연개소문이 서부 살이가 되어 많은 군사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

억센 천성이 체포를 받지 않고 열에 아홉은 반항할 것이 틀림없으니, 조서로 연개소문을 잡으려면 한바탕 국

내가 소란해질 것이었다. 이제 연개소문이 장성의 축조 역사 감독의 명을 받아 떠날 날이 멀지 아니 하였으므

로 오래지 않아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러 올 것이니, 그때에 그의 모반한 죄를 선포하고 잡으면 한 장사의

힘으로도 넉넉히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 하열 여러 대신들은 왕의 앞에서 물러나와 비밀히 그날이 오기만 기

다렸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사람의 예상대로만 되지 않는다. 아침 저녁 시시각각으로 의외로 돌변하는 것이다. 어전

회의의 비밀이 어떻게 누설 되었는지 연개소문이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심복장사들과 비밀히 모의하고 선수를

칠 계교를 세워서 떠나기 전 어느 날,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한다고 하고 왕과 각 대신

들의 참석을 요청하고 각 부(部)에도 알렸다. 각 부의 살이와 대신들은 가기 싫었지만 안 가면 연개소문의 의

심을 사서 큰일에 불리하다 하여 일제히 참석하기로 하고 오직 왕은 존엄을 지켜 시위병을 거느리고 그대로

왕궁에 있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면 연개소문이 비록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왕의 위엄에 눌려 감히

어찌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날이 되자 모든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장에 이르러 유량히 울려퍼지는 군악 아래 인도되어 군막 안에

들어 자리에 앉았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연개소문이 갑자기 “반적(反賊)을 잡아라.”하고 외치고, 주위에

대령하였던 장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칼ㆍ도끼ㆍ몽둥이로 일제히 외치니, 참석한 대신들도 다 백전노장이

었지마는 겹겹이 포위뒤었고 게다가 수효가 너무도 적어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대신과 호족(豪族)

수백 명이 한꺼번에 어육이 되고 온 식장이 피로 물들었다. 이에 연개소문이 부하 장사를 거느리고 왕의 긴급

명령이 있어 왔다고 일컫고 성문을 지나 대궐문으로 들어갔다. 막아서는 수비병을 칼로 치고 궁중에 뛰어들어

서 영류왕을 죽여 그 시체를 두 토막 내어 수채에 던져버렸다. 시위병들은 연개소문의 늠름한 위풍과 신속한

행동에 놀라고 질려서 한 사람도 대항하는 자가 없어 20년 전 패강(浿江) 어구에서 수나라 장수 내호아(來護兒)

의 수십만 대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천하에 이름이 진동하던 영류왕이 의외에 무참히도 연개소문에게 죽음을

당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곧 왕의 조카 보장(寶藏)을 맞아들여 대왕을 삼고 자기는 ‘신크말치’라 일컬어

대권을 잡았다. 보장은 비록 왕이라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고, 연개소문이 실권을 가진 정말 대왕이었다. ‘신

크말치’는 곧 태대대로(太大對盧)다. 고구려가 처음에 세 재상을 두어 ‘신가’ ‘말치’ ‘불치’라 일컬었는데 이것을

이두자(吏讀字)로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라 썼다. ‘신가’는 정권(靜權)과 병권(兵權)을 다 장악하였는

데 그 뒤에 ‘신가’가 권력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여 그 이름까지 폐지하고 ‘말치’ ‘크말치’라 일컬어 병권은 없

이 오직 왕을 보좌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수석(首席) 대신일 뿐이었는데, 이제 연개소문이 ‘크말치’의 위에 ‘신’

자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일컬어 정권과 병권을 다 맡아보았으며, 살이의 세습을 폐지하고 모두 연개소문의

무리로 임명하였으며, 4부 살이의 평의제(評議制)를 폐지하여 관리의 출척(黜陟)과 국고의 출납과 선전(宣戰)ㆍ

강화(講和) 등 큰일을 모두 ‘신크말치’의 전단(專斷)으로 하고, 와은 옥새만 찍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 년 동안의 장상 대신들뿐 아니라 고구려 9백 년 동안의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쥔 사람이 되었다.

 연개소문의 對唐 정책

당에 대적하여 이를 쳐 없애고 지나를 고구려의 부용(附庸 :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은 연개소문의 필생의 목적

이었다. 연개소문이 젊을때 서유(西遊)한 것은 물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거니와 혁명적 수단을 써서

왕을 죽이고 각 부의 호족을 무찌르고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거두어 잡은 것도 또한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은 땅의 크기와 인구의 많기가 다 고구려의 몇 갑절이므로 연개소문은 이를 침에 있어서는 고구려

혼자의 힘으로 하느니보다 여러 나라의 힘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와 당 이외에 몇몇 나라가 있었으니 첫째 고구려의 동족인 남쪽의 신라ㆍ백제가 있었고, 둘째

고구려의 이족(異族)인 돌궐(突厥 : 지금의 내몽고)ㆍ설연타(薛延陀 : 지금 서부 몽고 등지)ㆍ토곡혼(吐谷渾 : 지금의

티베트) 등이 있다.

연개소문은 처음에 영류왕에게 아뢰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세 나라가 연합하여 당과 싸우려 하였으나 영류왕

이 듣지 아니하였고, 김춘추(金春秋 : 뒤의 신라무열왕)과 고타소랑(古陀炤娘)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구려에 와서

구원을 청하니(제12편 참고)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서로 천하의 대세를 이야기하고,

이어 춘추에게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조선 세 나라가 제휴하여 지나를 칩시다.”라고 하였으나 김춘추는 한창

백제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때였으므로 또한 듣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김춘추의 내빙(來聘)을 보장왕(寶藏王) 원년(기원 642)이라 하였으나 이것은 이 사기

가 늘 전왕(前王) 몰년(沒年)의 일을 신왕 원년으로 내려쓴 때문이고, 김유신전(金庾信傳)에는 태대대로 개금(蓋

金)이 김춘추를 객관에서 묵게 하였따고 했으나, 이는 연개소문의 훗날의 직함을 가져다 미리 쓴 것이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니 신라는 이미 당과 동맹하였으므로 드디어 백제 의자왕(義慈王)과 사신을 통하여,

백제가 신라와 싸우면 고구려는 당을 쳐서 당이 신라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면 백제는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에 응하지 못하게 하자 하는 교환 조건으로 동맹을 체결하고 연개소문은 또 오족루(烏

族婁)를 돌궐(突厥) 등 여러 나라에 보내서 고구려가 당과 싸우게 되면 저들로 하여금 당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운동하였으나 이때에 돌궐 등 여러 나라가 이미 당에게 정복되어 세력이 미약해서 겨우 설연타(薛延陀)의 진주

가한(眞珠可汗)이 이를 허락하는 외에는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다. 연개소문은 탄식하며 “고구려가 남진책을

굳게 지키다가 천채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제 2장 遼水 싸움

요수 싸움은 전사(前史)에 몽땅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고려전(高麗傳)에 신라가 구원을 청하므

로 황제(당태종을 가리킨 것)가 오선(吳船) 4백 척을 내어 양식을 운반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으로 하

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기원 645년 안시성(安市城) 싸움 전에 요수에서 큰 싸움이 있어서

당이 완전히 패했으므로, 당의 시관(史官)들이 나라의 수치를 숨기는 춘추(春秋)의 필법을 써서 이같이 모호하

고 간략한 몇 구절의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는 대개 당태종이 연개소문의 혁명 뒤에 고구려 인심이 위태로이 여기고 의심함을 기회하여 신속히 수군을

내어 침노하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한 것이다. 기록이 넉넉지 못하므로 그 실제를 자세히 적을 수 없으나 이

것이 안시성 싸움의 초본(草本)이요, 두 나라 충돌의 첫째장이므로 이제 그 눈동자만 보여둔다.

제 3장 安市城 싸움

 안시성 싸움 전 피차의 교섭과 충돌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수(隋)와 당(唐)과의 두 번 싸움의 사실이 거의 수서(隋書)와 당서(唐書)를 추려

기록한 것이고, 그 두 싸움에 관한 수서ㆍ당서의 기록이 거의 거짓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수서는 수

가 그 싸움 뒤에 곧 멸망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 자가 수의 사람이 아니요 당의 사람이므로 거짓이 오히려 적

거니와, 당서는 당의 연대가 오래 계속되어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곧 당 때의 사관(史官)이 적은것이기 때문에

시(是)와 비(非)와 이기고 짐을 뒤집어 꾸며서 거짓이 얼마인지를 알 수 없다. 이제 신구 당서ㆍ자치통감(資治

通鑑)ㆍ책부원귀(冊府元龜) 등에 보인 두 나라의 교섭ㆍ충돌의 경과를 대강 기록하여 그 진위(眞僞)를 분별한 다

음 당시의 실정을 논술하려고 한다.

1) “정관(貞觀) 17년 6월……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려(고구려)에 사신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에

수비병을 더 두어 고구려를 압박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먼 곳의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아

서 오게 할 것이요, 1,2백 명의 수비병으로 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위복(威服)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

소.(貞觀十七年六月……太常丞鄧素 使高麗還 請於懷遠鎭 增置戍兵 以逼高麗 上曰 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未聞 一二百戍

兵 能威絶域者也)”하였다. 등소가 고구려를 보고 온 결과 고구려의 강석함을 두려워하여 수비병을 증가시키기를

청한 것인데 그 수가 단 몇백을 청한 것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한갓 업신여겨 쓴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2) 윤(閏) 6월 양제(煬帝)가 방현령(房玄齡)에게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독단하니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오. 지금의 우리 병력으로 쳐서 빼앗기가 어렵지 아니할 것이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어 우선

글안[契丹]과 말갈(靺鞨)로 하여금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閏六月 煬帝渭房玄齡曰 蓋蘇文 弑其君 而

專國定誠不可以忍 以令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且使契丹靺鞨 擾之 何如)” 하였는데 말갈은 곧 예(濊)이니

고구려에 복속(服屬)한 지가 이미 여러 백 년이요, 글안도 장수태왕(長壽太王) 이후에 고구려에 속하였으니 당태

종이 어찌 예와 글안을 시켜 고구려를 침노하게 할 수 있으랴? 당태종이 비록 망령이 들었더라면 이 따위 실

제에 맞지 아니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대개 사관의 망령된 기록이다.

3)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고려(고구려)를 치기를 권하였으나 황제는 상 중(喪中 : 영류왕의 죽음)이라 하여

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或勸帝 可遂討高麗 帝不欲因喪伐之)”라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

인 적이라 하여 이를 치려고 하였다면 춘추의 의리로 보더라도 상 중에 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당태종이 도

리어 상 중이라 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고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당태종이 이때에는 아직 동침(東侵)의 방략

을 완전히 정하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니 사관의 해설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4)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고려가 백제와 동맹하여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합니다……하여 당제(唐帝 : 태

종)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를 타이르기를,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를 맡겼으니 너희와 백제는 각기 군사를 거둘 것이다. 만약 다시 공격하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라고 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현장이 평양에 이르니 막리지(연개소문)는 이미 군사를 내

어 신라를 쳐서 그 두 성을 깨뜨렸었다. 현장의 요구로 고구려 왕이 막리지를 불러 돌아오자 현장이 그를 타일

러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옛날 수(隋)가 우리 나라를 침노하자 신라는 우

리의 허를 틈타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으니 원래 우리가 땅을 침노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키

기가 두려워서 아직까지 못했을 뿐이다.(新羅遺使言 高麗百濟聯和 將見討……唐帝 命司農承相里玄獎 齎璽書 諭高麗曰

新羅委質國家 爾與百濟 各宜戢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翌年正月 玄獎至平壤 寞離支已發兵 擊新羅 破其兩城 高麗王

使召之 乃還 玄奬諭使勿攻新羅莫離支曰 昔隋人入寇 新羅乘虛 奪我地五百里 白非歸我侵地恐兵未能已)”고 하였는데, 상리

현장이 이와 같이 오만한 국서를 가지고 왔다면 훗날 장엄(莊儼 : 아래 글에 보임)과 같이 잡혀서 옥에 갇혔을

것인데 어찌 무사히 돌아갔으랴? 또 연개소문이 이때 신라 정벌 중에 있었다면 어찌 당의 사신 현장의 청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으랴? 신라 본기에 의하면 수가 침노해왔을 때 허를 타 5백 리 땅을 빼앗은 일도 없고

또 연개소문이 두 성을 격파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은 대개 당태종이 현장의 사신갔다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 나라 안에 선포하려고 조작한 말일 것이다.

5) “황제가 고구려를 치고자 고구려를 속일 사자(使者)를 모으는데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니, 장엄(蔣儼)이

분연히 나서서 천자의 위무(威武)에 사이(四夷)가 다 두려워하는데 어느 나라가 감히 명을 받들고 간 사람을 도

모하겠느냐? 만약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마침내 자기가 가기를 청하여

갔다가 막리지에게 구금되었다.(帝將伐高句麗 募僞使者 人皆憚行 蔣儼奮曰 以天子威武 四夷畏威 蕞爾國 敢圖王人 如有

不幸 固吾死所也 遂請行 僞莫離支所囚)”고 하였는데 장엄이 무슨 사명을 띠고 갔는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

으나 만일 그 전에 연개소문에게 잡혀서 죽은 당의 사신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모두 가기를 꺼려하기에 이르렀

으랴? 이로써 당의 사관(史官)들이 그 나라의 치욕을 숨기기 위하여 교섭의 전말을 많이 빼버렸음을 볼 수 있

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 강약을 다투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너 나의 우열을 내기하

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인데, 이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두 나라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

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이었다. 만일 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일렀더라면 당태종이 동침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서정(西征)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다만 당태종이 지나를 통일한 지 30년, 또 제왕이 되

어 모든 시설을 재지(才智)껏 정비한 지 20년, 또 돌궐ㆍ토곡혼 등의 나라를 정복한 지 10년이 된 뒤에야 연개

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자기

가 고구려 내정과 외교의 모든 큰 사건을 다 정리한 뒤에 전쟁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마는 이는

사세(事勢)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서 남으로 백제와 동맹을 맺고 서북으로 설연타(薛延陀)

등을 선동하여 여당(與黨)을 만들 뿐이었다. 당태종은 수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망했음이 징계

되었으나 또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음을 자각했으므로 연개소문의 내부세력이 아직 완전히 굳

어지기 전에 이를 꺾으려고 서둘러서 군사를 동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양편의 형세였으니 이 밖의 저네의

역사의 춘추필법적 기재와 우리의 역사의 노예 근성적 편집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망령된 말일 뿐이다.

 당태종의 전략과 侵入 路線

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지마는 그 경영의 거의 20년 동안의 일이었다. 진(秦)ㆍ한

(漢) 이후에 흉노(匈奴)가 쇠하고, 위(魏)ㆍ진(晋) 이후도 오호(五胡)는 다 지나에 잡거(雜居)하였으며, 그 밖에 돌

궐ㆍ토곡혼이 가끔 지나의 서북에서 일어났으나 다 오래지 않아 잔약해지고, 오직 고구려만이 동남ㆍ동북에서

지나에 대치하여 척발씨(拓跋氏)의 주(周)와 겨루고 수(隋)에 이르러는 양제(煬帝)의 수백만 군사를 전멸시켜서

위무(威武)가 일세를 진동하여 놀라게 하는 동시에 지나와 맞서서 ‘신수도’의 교의(敎議)며 이두자(吏讀字)의 시

문(詩文)이며, 그 밖에 음악ㆍ미술 등이 다 그 고유의 국풍(國風)으로 발달하여 정치상뿐 아니라 엄연한 일대

제국을 형성하였으므로, 당태종이 지나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음을 시기하여 정관(貞觀)의 치(治) 20년 동안에

겉으로는 편안하고 한가롭게 여러 신하들과 도를 닦는 길을 강론하였지마는 그의 머릿속에는 유악(帷幄)의 모

신(謀臣)인 방현령(房玄齡) 등도 알지 못하게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계획이 오락가락하였던 것이다. 그는 고

구려를 치려면 먼저 수의 양제가 패한 원인을 구명하여 그와 반대되는 전략을 짜야겠다고 하여 이에 다음과

같은 초안을 작성하였다.

1) 수의 양제가 패한 첫째 원인은 정병(精兵)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취하여 숫자상의 군사는 비록 4백만에 이

르렀으나 전투를 감당할 만한 자는 수십만에도 차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10년 양성한 군사 중에서 특별히

정예한 군사 20만을 골라내고,

2) 수의 양제가 패한 둘째 원인은 고구려의 변경(邊境)부터 잠식(蠶食)해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뜸 대군으로 평

양에 침하였다가 양식길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평양에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이 각 고

을을 정복하려 하였고,

3) 수의 양제가 패한 셋째 원인은 수백만 육군이 제각기 먹을 양식을 스스로 지고 가 도중의 군량을 삼고 따

로 수군으로 하여금 배로 각지 창고에 있는 양식을 물로 운반해서 목적지에 가져다가 머물러 있는 군사의 양식

으로 삼게 하였다가 양식 실은 배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모두 격침된 때문이라 하여 배로 운반하는 양식의 위

험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에 소ㆍ말ㆍ양 등의 목축을 장려해서, 전사(戰士) 한 사람에 대해 타는 말과 양식 실

은 소 각 한 마리와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주어 양식을 군사가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여, 도

착한 뒤에는 배로 운반해오는 양식을 기다릴 것 없어 양식이 충족하게 하고 또 소ㆍ양ㆍ말 등의 고기를 먹게

하려 하였다.

4) 수의 양제가 패한 넷째 원인은 다른 여러 나라의 원조가 없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싸운 때문이라

하여, 신라 김춘추가 구원을 청하자 공수동맹의 의를 맺어 고구려의 뒤쪽을 교란시키게 하려 하였따.

이상과 같은 방략을 주도면밀하게 작성한 뒤 기원 644년 7월에 각 군대를 낙양(洛陽)에 집결시키고, 군량은

영주(營州)의 대인성(大人城 : 지금의 泰皇道)에 모으게 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에게 명하여 유(幽)ㆍ영

(營) 두 주(州)의 군사를 인솔하고 요동 부근을 유격(遊擊)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더듬어 알아보게 하고, 장작대

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으로 평안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을 삼고, 상하(常何)ㆍ좌

난당(左難當)으로 부총관(副總管)으로 삼고, 방효태(龐孝泰)ㆍ정명진(程名振)ㆍ염인덕(冉仁德)ㆍ유영행(劉英行)ㆍ장

문간(張文幹)으로 총관(總管)을 삼아서 강(江)ㆍ회(淮)ㆍ영(嶺)ㆍ협(峽)의 정병 4만 명과 장안(長安)ㆍ낙양(洛

陽)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말로는 평양으로 향한다고 하고 실은 요하(遼河)로 향하였다.

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왕도종(王道宗)으로 부총관을

삼고, 장사귀(張士貴)ㆍ장검(張儉)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ㆍ강덕본

(姜德本)ㆍ오흑달(吳黑闥)로 총관을 삼아서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여 두 군사가 요동에서 합세하게 하고 당태종

은 친히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르기로 하였다.

 연개소문의 방어 겸 進攻의 전략

당의 군사가 침입해온다는 기별이 이르니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항할 계책을 강구하는데, 혹은

평원왕(平原王) 때에 온달(溫達)이 주(周)와 싸웠을 때와 같이 기병으로 마구 무찔러서 요동 평야에서 격전을 벌

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은 영양왕(嬰陽王) 때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와 싸웠을 때와

같이 마을과 들의 백성과 곡식을 죄다 성으로 옮겨 지키게 한 뒤에 평양으로 꾀어들여 양식길을 끊어서 굶주

려 피곤해졌을 때를 타서 쳐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연개소문이 말하였

다. “전략은 형서에 따라 정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형세가 평원왕 때나 영양왕 때와 다른데 어찌 그때의 형세

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한단 말이오. 오늘에 있어서는 위치를 골라 방어하고 기회를 따라 진공해야 할 것이니

옛날 사람의 규정한 것을 그대로 지켜서는 아니되오.” 그리고 그는 명령을 내려 건안(建安)ㆍ안시(安市)ㆍ가시

(加尸)ㆍ횡악(橫岳) 등 몇몇 성읍(城邑)만 굳게 지키게 하고, 그 나머지는 곡식과 말먹이를 혹은 옮겨놓고 혹은

태워버려 적으로 하여금 노략질할 것이 없게 하고, 오골성(烏骨城) - 지금의 연산관(連山關)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감한 장수와 군사를 배치해놓고, 따로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과 오골성주(烏骨城主) 추정국(鄒定國)

에게 비밀히 일러 “지금 당나라 사람들이 수나라의 패전한 것을 징계삼아 양식에 특별히 유의해서 장래 군량

이 모자랄 때 보충하려고 군중에 소ㆍ말ㆍ양을 수없이 가져왔는데,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풀들이 다 마르

고 강물도 얼어버리면 그 가축들을 무엇으로 먹이겠소. 저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빨리 싸워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오. 그러나 저네가 수나라의 패전을 징계삼아 평양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이

니, 양공(楊公 : 萬春)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양공은

안에서 나와 공격하고, 추공(鄒公 : 定國)은 밖에서 진격하오. 나는 뒤에서 당의 군사를 뒤를 습격하여 아주 돌

아갈 길이 없게 해서 이세민(李世民 : 唐太宗)을 사로 잡으려 하오.”하였다.

 上谷의 횃불과 당태종의 敗走

해상잡록(海上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일찍이 당의 첫째가는 명장 이정(李靖)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으려고 하니까 이정이 사양하며 “임금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직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에 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는데 그 뒤에 폐하를 도

와 천하를 평정한 것이 다 그의 병법에 힘입은 것이니, 오늘에 와서 신이 어찌 감히 전일에 스승으로 섬기던

개소문을 치겠습니까?”하였다. 태종이 다시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중의 누구와 견줄 만하오?”하고 물

으니, 이정은 “옛날 사람은 알 수 없거니와 오늘날 폐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는 그의 적수가 없고, 비록 천

자의 위엄으로 임하시더라도 이기시기 어려울까 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못마땅해 하면서 “중국과

넓은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을 두려워 한단 말이오?”하였다. 이정이 다시 말했다.

“개소문이 비록 한 사람이지마는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만 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습

니까?”

이 기록이 사실이라 하면 당태종은 이때 일찍이 누이동생 때문에 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하였음을 후회했을 것

이다.

기원 645년 2월에 당태종이 낙양(洛陽)에 이르러 수(隋)의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으로 양제(煬帝)를 따라 살수

(薩水)의 싸움에 참가하고, 수가 망한 뒤에 벼슬하여 선주자사(宣州刺史)가 되었다가 이때 나이가 많아 퇴직한

정원도(鄭元璹)를 불러 고구려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의 운반이 곤란하고 고구려

가 성을 지키는 데 능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신은 이번 길을 매우 위태롭게 봅니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좋아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 국력이 수나라와 비교할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오.”하

였다. 그러나 만일을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李靖)에게 후방을 엄중히 지키라 명하고 마침내 출발하였다.

“요택(遼澤 : 지금의 渤錯水)에 이르니 200리 진구렁에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어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

立德)에게 명하여 나무와 돌을 운반해다가 길을 만드는데 수나라 때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당

태종이 제문(祭文)을 지어 울며 제사지내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이 거의 이 해골

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소?”하였다. 당태종은 요택을 지나자 “누가 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하느냐?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요하(遼河)를 건넌 다음에는 싸움이 순조로워서 요동 곧 오열홀(烏列忽)ㆍ백암(白巖)ㆍ개평(蓋平)ㆍ횡악(橫岳)ㆍ

은산(銀山)ㆍ후황성(後黃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다시 이적(李勣)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새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는데,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은 오골성을 쳐 함락시켰으니 바로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였고, 이적과 장손 무기(長孫無忌)는 안시성을 치자고 하였다. 수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宇文述) 등으로 하

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패한 것을 당태종도 경계하는 바였으므로 도종의

의견을 쓰지 않고, 이적의 의견을 따라 안시성을 침노하였다.

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서주 추정국에게 요동의 싸움을 위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안시성은 곧 ‘아리티’ 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 혹은 북평양(北平壤)이라 일컬었는데, 태조왕(太祖王)이 일찍이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발기(發岐)의 난에 이곳을 지나에게 빼앗겼다가 고국양왕(故國壤王)

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바다와 육지의 수십만 섬의 양식을 쌓아두었다. 공격하기 어렵고 함락시킬 수 없는 요

새로 일컬어 온 지 오래였다.

그 해 6월에 당태종이 이적 등과 함께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을 향하여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

이 함락되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하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니까 양만춘이 성 위에서 역시 통역자를 시켜

당의 군사에게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에서 나가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하였다. 당의 군사가 접근

하면 성안의 군사가 이를 쏘아 죽이되 헛쏘는 화살이 없으므로 당태종은 성을 겹겹이 엄중 포위하여 성 안을

굶주리게 하려고 했지만, 성 안에는 양식의 저장이 넉넉하고 당의 군사는 비록 가져온 양식이 많았으나 몇 달

을 지내니 차차 떨어져가고, 요동의 몇 성을 얻기는 하였으나 아무 저축이 없는 빈 성이었으며 수로로 오는 배

들은 모두 고구려의 수군에게 격파당해 양식 운반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요동은 날씨가 일찍 추워지므로 만일

가을바람에 풀이 마르면 소ㆍ말ㆍ양들을 먹일 수가 없어 굶어 죽을 것이었다. 당태종은 크게 당황하여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안시성의 동남쪽에 토정을 쌓게 하였다. 흙으로 나뭇가지를 싸서 층층이 쌓아올리고 중간에

길 다섯을 내어 왕래케 해서 10일 동안의 품과 50만의 돈을 들이고 군사 수만 명이 날마다 6,7번을 번갈아

교전하여 죽고 상하는 자가 적지 아니하였다. 토산이 이루어지자 산 위에서 포석(抛石 : 돌을 던지는 기구)과 당

거(撞車 : 냅다 질러 파괴하는 수레)를 굴려 성을 무너뜨리니 성 안에서는 무너진 곳에 목책(木柵)을 세워서 막았

으나 당할 수가 없는지라 양만춘이 결사대 100명을 뽑아 성이 무너진 곳으로 갑자기 내달아 당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토산을 빼앗아 산 위의 포석과 당거를 차지하여 이것으로 도리어 산 위의 당의 군사를 치니 당태종

이 달리 계책이 없어 군사를 철퇴시키려고 하였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ㆍ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 - 지금의 열하

(熱河) 부근으로 나가 다시 남으로 나아가 장성(長城)을 넘어 상곡(上谷) - 지금의 하간(河間)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

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渝關)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섲우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 좁은 골짜기로 몰려나와서 당의 군사를 돌격하고, 양

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당의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으며 도

망했다. 당태종은 헌우란(蓒芋灤)에 이르러 말이 수렁에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

아 거의 사로 잡히게 되었는데, 당의 용장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말을 갈아태우고, 전군

(前軍)의 선봉 유홍기(劉弘基)가 뒤를 끊고 혈전을 벌여서 당태종은 가까스로 달아났다. 성경통지(盛京通志) 해성

고적고(海城古蹟考)의 ‘당태종의 말이 빠지 곳(唐太宗陷馬處)’이란 것이 곧 그곳이니, 지금까지도 그곳 사람들에

게 “말이 수렁에 빠지고 눈에 화살을 맞아 당태종이 사로잡힐 뻔하였다.”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양만춘 등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러 허다한 당의 장사를 목베고 사로잡으니 요택에 이르러

당태종은 말을 몰아 수렁에 처넣어 다리를 삼아서 밟고 건너갔다. 10월에 임유관에 이르러서는 연개소문이

당군의 돌아갈 길을 끊고, 뒤에서는 양만춘이 몹시 급히 추격하니 당태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 천지가 아득해져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이 되어 양편 사람과 말이 서로 엎드러지고 자빠

지고 하여 크게 혼란해지니 당태종이 이 기회에 도망하여 돌아갔다.

안시성 싸움은 또한 동양 고사상(古史上)의 큰 전쟁이라, 비록 숫자상의 군사는 살수 싸움에 미치지 못하지마

는 그러나 피차의 방략이 용의주도함과 군대의 정예(精銳)함과 물자의 소모는 살수 싸움보다 더 했으며 싸움을

한 시일도 그보다 갑절이었다. 이 싸움이 곧 두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게 한 전쟁이었는데 당사(唐史)의 기록은

거의가 사리에 모순된다. 이를테면 ① 백제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는데도 당사에는 “백제가 금휴개(金髹鎧 : 검

게 옻칠한 갑옷)을 바쳐서 전군이 이것을 입고 출전하니 갑옷이 햇빛에 찬란하게 빛났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의 동맹국인 백제가 도리어 적국인 당의 군사에게 무장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② 당군의 패망은 곧 양식의

결핍에 원인이 있었는데 당의 역사에는 당태종이 백암성(白巖城) 등을 깨뜨리고 양식 10만 섬 혹은 50만 섬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운반해온 양식 이외에 얻은 양식이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③ 연개소문이

영류왕(營留王)과 수많은 호족(豪族)들을 죽이고는 연씨(淵氏)네 무리를 써서 중요한 직위에 두어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오던 벌족정치(閥族政治)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하였는데, “당태종이 안시성에 이르니 북부누살(北部

耨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ㆍ말갈(靺鞨 : 濊)의 군사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다.”고 했으니, 왕족 고씨(高氏)가 오히려 남북 두 부(部)를 근거지로 하여 살이(薩伊)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군사 수십만을 가졌다니 연개소문의 혁명 이후에 고구려의 상황이 어찌 그러하였을 것인

가? ④ 안시성은 곧 환도성(丸都城)으로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로써 해륙(海陸)의 요충이니 개소문이 혁명한

뒤에 이 땅을 다른 파에게 줄 수 없을 것인데, 당의 역사에 “안시성주(양만춘)가 재주와 용기가 있고 성이 험

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 웅거해 지켜서 항복하지 아니하므로 막리지가 그 성을 주었

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때에 고구려가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인데 어찌 하나로 단결하여 수

십만의 당군을 막았을까? 평양 공격의 계책은 수의 양제가 패해 망한 것인데, 당의 역사에 “이정(李靖)이 기

계책이 쓰이지 아니한 것을 패전의 첫째 원인으로 삼고, 당태종도 또한 이를 후회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래지 않은 양제의 일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사실에 모순되는 기록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

가? 대개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방의 모든 나라를 다 당의 속국으로 보는 주관적 자존심에 몰리어 사관(史官)들이 항상 높은 이를 위해

숨기고, 친한 이를 위해 숨기고 중국을 위해 숨기는 이른바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때문이니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국임이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첫째 조항의 망발을 하였고,

2) 요동성ㆍ개평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게 한 것이 연개소문의 예정한 전략에 빠진 것임을 숨기기 위하여 그

노획품이 많았음을 과장하다가 둘째 조항의 위증(僞證)을 하게 된 것이고,

3) 당태종이 패해 달아난 것을 승리한 것으로 뒤집어 꾸미다가 고씨(高氏)의 천하가 이미 연씨(淵氏)의 천하가

된 것을 잊고 문득 15만 대군을 가진 고연수ㆍ고혜진 두 누살이(耨薩伊)가 투항했다는 셋째 조항의 망령된 조

작이 있게 된 것이고,

4) 당태종이 수십만 대군으로 4,5달에 한낱 안시의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치를 가려 숨기기 위해

“안시성은 곧 당태종이 공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본국 고구려의 대권(大權)을 잡은 연개소문도 어찌하지

못하였다.”는 넷째 조항의 기록을 남겼고,

5) 당이 고구려에게 패한 것은 여러 가지 계책이나 사람이 모자람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기묘한 계

책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이도종(李道宗 : 江夏王)이 평양의 허를 찔러 공격하자고 하였다.”하

는 다섯째 조항의 어리석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이상은 대강을 말한 것이거니와 자세히 상고해보면 거의가 다 이러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의 역사를

좇지 않고 해상잡록ㆍ성경통지(盛京通志) 및 동삼성(東三省) 사람들의 전설 등을 자료로 하여 기록하였다.

 당태종이 화살의 독에 죽고 연개소문이 당을 침

당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눈이 빠졌음은 모든 인사들의 전설이 되고 시인의 음영(吟詠)에는 목은(牧隱) 이색

(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 올라 “이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더니만 눈이 화살에 떨어질 줄 뉘 알았으랴.(謂是囊

中一物耳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였고, 노가재(老稼齎)ㆍ김창흡(金昌翕)의 천산시(千山詩)에는 ‘천추의 대담한 양만

춘이 규염(虯髥)의 눈동자 쏘아 떨어뜨렸네(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虯髥落眸子)“라 하였으며 그 밖에도 이런 시가 많

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삼국사기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역사책에는 당시의 전황에 관해 당서(唐書)에서 뽑아 기

록하였을 뿐 이러한 말이 없다. 이는 사대주의파 사학자들이 고대 우리 나라의 외국에 대한 승리의 기록을 모

두 삭제해버린 때문이다. 이것을 지나의 역사책에 상고해보건대 구당서(舊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ㆍ신당서(新

唐書)ㆍ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세 가지에 당태종의 병에 대한 진단 기록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당태종이 내종

(內腫)으로 죽었다고 했고 또 하나는 한질(寒疾)로 또 하나는 이질로 죽었다고 하여 일대에 전 지나에 군림한

만승황제(萬乘皇帝)가 죽은 병이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도록 모호하게 기록한 것은 대게 고구려인의 독

화살에 죽은 치욕을 숨기려다가 이같은 모순된 기록을 남긴것이다. 그러나 요동에서 얻은 병이라 함은 모든

기록이 일치하니 양만춘의 화살 독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송(宋)의 태종(太宗)이 태원(太原)에

서의 화살의 상처로 인하여 그 독이 해마다 재발하다가 3년 만에 죽은 것을 송사(宋史)에 숨겼음과 같은 것이

니, (陳霆의 兩山墨談에 보임) 이 뒤 신라와 당의 동맹이 더욱 공고하였음과 당의 안녹산(安祿山)ㆍ사사명(史思明)

의 난과 번진(藩鎭)의 발호(跋扈)가 어느 것이고 당태종이 고구려의 독한 화살에 맞아 죽은 사건과 관계없는데,

이제 이를 가려 숨겨서 역사적 사실의 기인(起因)을 모르게 하였으니 춘추필법의 해독이 또한 심하다 하겠다.

연개소문이 지나에 침입한 사실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지금의 북경(北京) 조양문(朝陽門) 밖 7리 되

는 황량대(謊糧臺)를 비롯하여 산해관(山海關)까지 이르는 사이에 황량대라 일컫는 지명이 10여 군데인데, 전설

에 황량대란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ㆍ직예(直匠) 등지에 드문

드문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

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12리쯤

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의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에 “외딴 곳 성문은 활짝열

렸는데(僻地城門啓) 흰 구름이 성가퀴에 걸렸어라(雲林雉堞長), 물이 맑아지고 해 잠겨 있고(水明留晩照), 모래는

어슴푸레 별빛이어라(沙暗燭星光). 북소리 구름 밖에 퍼져나가고(疊鼓連雲起) 갓 핀 꽃들이 땅을 장식했으려니(新

花拂地粧) 문득 세상은 변하여(居然朝市變) 다시는 풍악 소리 울리지 않네(無復管絃鏘). 가시덤불 먼지 가운데(荊

棘黃塵裏) 길가엔 쑥대만 우북(蒿蓬古道傍). 먼지 속엔 비취가 묻혔는데(輕塵埋翡翠), 거친 무덤 위엔 소돌이 오

가누나(荒壠上牛羊). 당년의 일을 이제 와 무어라 하랴(無柰當年事), 소조한 가을 기러기 줄지었구나(秋聲肅鴈行)”

라고 하였는데, 이 시로 보건대 연개소문이 한 때 당의 땅에 드나들며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백성

을 이주시켜서 북소리가 구름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땅은 온통 꽃밭인데 거리가 번화하고 음악 소리 유량하며

비취와 보옥 등이 넘쳐나서 새로 점령한 땅의 풍성함을 자랑하던 것을 읊은 실록(實錄)으로 볼 수 있겠다.

당의 역사책을 보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도망해 돌아간 뒤에 거의 해마다 달마다 고구려 침략의 군사를 일

으켜서 “아무 해 아무 달에 우진달(牛進達)을 보내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어느 성을 깨뜨렸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정명진(程名振)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 아무성을 깨뜨렸다.”하는 따위의 기록이 수없이 있지마는 이것은

당태종이 고구려 때문에 눈이 빠지고 그의 백성들의 아들들이 많이 죽거나 상하여 천신(天神) 같은 제왕의 위

엄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안팎의 웃음거리가 되겠고, 또한

만일 다시 대거해서 공격하자면 수의 양제의 꼴이 될 것이므로 이제 교활한 술책을 생각해내서 다달이 여러

장수를 시켜 고구려의 어느 곳을침략하였다. 고구려의 무슨 성을 점령하였다 하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하여

그 실상 없는 무위(武威)를 국내에 보인 것이다. 당태종이 죽을 때에 유조(遺詔)로 요동의 싸움을 그만두게 한

것은 한편으로 아들 고종(高宗)의 아버지의 원수 갚지 못하는 책임을 가볍게 하고 한편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본래 요동의 전쟁이 없었는데 이제 무슨 전쟁을 그만둔단 말

인가? 당태종의 일생은 허위뿐이니 역사가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그 기록을 상세히 구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은 무엇으로 이와같이 외정(外征)에 성공하였는가? 그 근거는 둘이었다. 발해사(渤海史)에 “대문예(大

門藝)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가 성시(盛時)에는 강병(强兵) 30만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고 했다.(大門藝曰

昔高句麗全盛之時 强兵三十萬 抗敵唐家)”하였고, 당서(唐書)에도 “고려(고구려)가 신성(新城)과 국내성의 보병ㆍ기병

4만 명을 일으켰다.(高麗 發新城ㆍ國內城步騎四萬).” “신성(新城)과 건안(建安)에는 군사가 오히려 10만 명이었다.

(新城建安之虜 猶十萬)”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가 합하여 15만 명이었다.(高麗靺鞨之衆十五萬)”이라 하였으니 이상

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규군이 30만 명이 넘었고, 그 밖의 산병(散兵)도 적지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 있

다. 고려사 최영전(崔塋傳)에 “당태종이 30만의 무리로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 명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唐太宗 以三十萬衆 侵高句麗 高句麗 發僧軍三萬 擊破之)”고 하였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재가

화상(在家和尙)……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고……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

에 나아갔다.(在家和尙……以皀帛束腰……有戰事 則自結爲一團 以赴戰場)”고 하였으며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명림

답부(明臨答夫)와 개소문은 다 조의 선인(帛衣先人)의 출신이다.(明臨答夫 蓋蘇文 此皆帛衣先人出身)”라고 하였으니

이상의 글에 의하면 승군(僧軍)이란 불교의 중으로 편성된 군사가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壇前)의 조의(皀衣)

무사요, 연개소문은 조의의 우두머리[首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수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3만의 조의

군(皀衣軍)은 연개소문의 외정(外征)을 성공시킨 첫째 근거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다.(好戰之國 莫如百齊)”고 하고, 순암(順

庵) 안정복(安鼎福)은 “세 나라(신라ㆍ백제ㆍ고구려)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三國之中

百濟最以好戰稱)”고 하였으니, 백제는 날래고 사나워서 싸움을 잘하는 나라로서 고구려와 동맹을 하였으니 그것

도 연개소문이 외정을 하게 된 근거의 하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라, 북으로 유(幽)ㆍ계(薊)ㆍ제(齊)ㆍ

노(魯) 등지를 소란하게 하였고, 남으로 오(吳)ㆍ월(越)을 침략하였다.(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北撓幽燕齊魯 南

侵吳越)”고 한 것은 연개소문이 백제와 합작한 결과를 말한 것인데 북쪽을 토평했다(北平) 남쪽을 평정했다(南

定) 하지 않고 북쪽을 소란하게 했다. 남쪽을 침략했다고 한 것은 이 글이 당을 존숭하는 최치원이 당의 어느

재상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이같이 춘추필법적 말을 쓴 것이요, 실은 이때에 유(幽)ㆍ계(薊) - 지금의 직예

성(直匠省)과 제(齊)ㆍ노(魯)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과 오(吳)ㆍ월(越)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ㆍ절강성(浙江省)이

다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백제와 관계된 사실은 다음편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자 한다.

 연개소문의 事蹟에 관한 거짓 기록

신라 때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라 하여 후에는 그를 유교의 윤리상 임금을 죽인 적신(賊臣)이라 하여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 하여 늘 박대해서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아주 없애버리기를 일삼았고,

오직 도교(道敎)의 수입과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그가 한 일이라 하지마는 실은 당서(唐書)에서 부연(敷演)

해온 거짓 기록이고 사실이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실어 그것이 거짓 기록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삼국

유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살피건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이보다 앞서 수(隋)의 양제(煬帝)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

이 싸움이 불리하여 죽게되자 맹세하기를, 기어코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는

데, 개씨(盖氏)가 조정을 독단하게 되자 성을 개씨라 하니, 곧 양명의 말이 이에 들어맞은 것이다.(두 글자를 합

쳐 盖가 되니 그가 죽어서 蓋蘇文이 되었다는 뜻) 또 살피건대 고려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수의 양제가 대업(大

業) 8년 임신(壬申)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왔다……10년 갑술(甲戌)에 황제가 퇴군하려고

좌우를 돌아보며,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조그만 나라를 치다가 이롭지 못하였으니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니, 이때 우상(右相) 양명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서 고려의 대신이 되어 기어코 나라를 멸망시켜 황

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돌아가고 그는 고려에 태어났는데 나이 15살에 총명하고 용감하였으

므로 이때의 무양왕(武陽王 : 營留王)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

(盖)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벼슬이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곧 시중(侍中)과 같은 직위였다. 개금

이 왕에게 아뢰기를 솥에는 발이 셋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어야 하는데, 신이 보건대 나라 안에

는 다만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하니, 왕애 옳게 여기고 당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였으므로 태종이 숙달(叔達)등 도사(道士) 여덟 사람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로 도관(道觀 : 도교의

寺院)을 만들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의 위에 앉혔다.……개금은 또 동북과 서남에 장성을 쌓기를 청하여 남

자는 성을 쌓고, 여자는 농사를 짓기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었는데, 보장왕(寶藏王) 때에 당태종이 친히 육군

(六軍, 곧 모든 군사)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按唐書云 先是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

曰 必爲寵臣 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期云 隋煬帝 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

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

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武陽王聞其賢 徵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敍達等道士八

人 王喜 以佛寺爲道館 尊道士 坐儒士之上……盖金又奏 築長城東北西南時男役女耕 亦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 親統以六軍來征)

양명의 후신(後身)이 개씨가 되었다는 것은 요망한 말이고, 연개소문을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

였고, 벼슬이 소문에 이르렀다.”고 한 것도 망령된 말이니 변론할 것도 없거니와 그 밖에 도교를

수입했다느니 장성 쌓기를 청했다느니 한 것도 또한 거짓 기록이다. 수의 양제는 기원 617년에 죽

고 영류왕 곧 무양왕이 노자교(老子敎 : 道敎)를 수입한 것은 당서에 분명히 당고조(唐高祖) 무덕(無德)

7년(기원 624년)으로 겨우 8살이니, 이제 “나이 15살에……신하가 되어……당에 아뢰어 청하였다.”고 함

이 무슨 말인가?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14년에 시작하였으니 16년 만에 준공하였으면 곧 보장왕 5년, 당태종

이 침략해온 이듬해에 마친 것인데 이제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고……당태종이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와 공격하였다.”고 함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영류왕은 북수남진(北守南進) 주의를 써서 당과는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고, 연개소문

은 남수북진(南守北進) 주의를 써서 백제로 신라를 견제하고 당을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니 당의 황제가 성이

이(李)요,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도 성이 이씨이기 때문에 당대(唐代)에는 노자를 그 선조라고 위증하여 극진히

높여 받들었으므로 영류왕이 당과 화친하려고 당의 조상 노자의 교와 그 교도인 도사를 맞아온 것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로는 신수두를 신봉하면서 정책으로는 당을 공략하려는 연개소문이 국교(國敎)를 버리고 적국인 당

의 조상 노자의 교인 도교를 맞아들였을 리가 있겠는가? 장성은 나가서 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지켜 방

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북쪽을 막아 지키려는 영류왕이 쌓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북쪽 공략을 주장

한 또 그 주장을 실행한 연개소문이 그같은 국력을 들여 백성의 원한을 살 방어용 장성을 쌓았을 리가 있겠는

가? 이렇게 연조가 맞지 아니하고 이치에도 맞지 아니하니 이 두 가지 사실이 다 거짓 기록임이 의심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유ㆍ불ㆍ도 세교는 솥발과 같아서 하나로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 구하였다고 한 것이 보장왕 2년의 일이니 삼국유사에 개금(盖金)의

도교 청래(請來) 운운한 것이 다만 그 연대가 틀렸을 뿐 사실은 확실히 있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마는 삼국사

기에는 이것을 고려고기(高麗古記)에서 인용하였다고 했으니, 삼국사기도 고려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이 분명하고,

고려고기에는 “개금이 무양왕 곧 영류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서 들여왔다.”고 하였으니 삼국사기의 저작자

김부식이 그 연조를 옮겨 보장왕 2년의 일로 기록하였음이 또한 분명하다. 김부식이 각종 고기와 지나사의 사

실을 마구 끌어다가 그 사기를 지었는데 가끔 연조가 모호한 일이면 그 사실의 있고 없었음을 자세히 구명하

지도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고쳐넣은 것이 허다하니,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의 수입을 청했다고 하는 것

도 한 예이다. 그러니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오고 장성 쌓기를 청했다는 두 사건은 물을 것 없는 거짓 기록

이다.

그러니깐 그 거짓 기록의 근거가 된 것은 고려고기이니, 고려고기는 어찌하여 이같은 거짓 기록을 썼는가?

고려고기는 대개 신라말의 불교승이 지은 것인데 지나 위(魏) 세조(世祖)와 당의 무종(武宗)이 도교를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불교의 절을 파괴하고 모든 불교승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당시 어느 나라의 불교승이나 다 도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한 인물이므로 신라 당시

의 사회가 연개소문을 극구 헐뜯고 욕하는 판이라 고려고기의 작자가 고기를 지을 때 당시의 “영류왕이 도교

를 수입하였다.”고 한 것과 “장성을 쌓았다.”고 한 것을 보고, 이에 그 도교를 몹시 원망하는 마음으로 당서에

부회(府會)하여 방편(方便)의 법라(法螺 : 소라고둥, 허풍떤다는 뜻)를 크게 불어대고 “도교를 믿지 말아라. 도교를

믿다가는 고구려처럼 나라가 망할 것이다. 도교를 들여와서 우리의 정신상 생명을 없애려고 하고, 장성 쌓는

역사를 일으켜서 우리의 육체상 생명을 없애려 한 자는 곧 연개소문이다.”하여 연개소문을 미워하는 사회의

심리를 이용해서 도교를 배척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연대와 사리(事理)가 맞지 아니하니 거짓 기록임이 스

스로 밝혀지는 것이다.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연개소문은 모든 명사(名詞)와 사실을 거의다 바꾸어 전한 《갓쉰동전》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거짓말뿐인가? 내가 20년 전 서울 명동(明洞)에서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란 노인을 만났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자(字)가 김해(金海)이고, 병법이 고금에 뛰어났었다. 그의 저서 김해병서(金海兵書)가 있어

송도(松都) 때(고려 때)에도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부임할 때에 한 벌씩을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병서가 아주 없어졌다.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의 이정(李靖)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고, 그 이정이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것인데 그 원본에는 연개소

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상한 문구가 많았으므로, 당(唐)ㆍ

송(宋)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이 외국인을 스승으로 하여 병법을 배워서 명장이 된 것은 실로 중국의 큰 수

치라 하여 드디어 그 병법을 없애버렸고, 지금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세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첫머리에서부터 막리지는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하였다는 연개소문을 헐뜯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선생이 이런 말을 어디에 근거하여 한 것인지 내가 당시 사학에 어두워서 자세

히 물어보지 못하였다.

요양(遼陽)ㆍ금주(金州)ㆍ복주(復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盖蘇山)에

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 있어서 해삼위(海參威 : 우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려면 바

다 가운데서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니, 후일에 혹 그 비석을 발견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변증(辨

證)하고 떨어져 나간 기록을 보충할 날이 있을까 한다.

 연개소문이 죽은 해의 誤差 10년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적은 신구 당서(新舊唐書)ㆍ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뽑아 쓴 것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에 다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당의 고종(高宗) 건봉(乾封) 원년이라고 하였

는데 건봉 원년은 보장왕 25년(기원 666년)에 해당하므로 삼국사기에도 보장왕 2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것으

로 되어있다. 그러나 만일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인 기원 666년에 죽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고구려의

동맹국 백제가 이미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도 소정방(蘇定方)에게 포위를 당했을 것이니 무엇 때문

에 당태종ㆍ이정 등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소동파(蘇東坡 : 蘇軾)ㆍ왕안석(王安石) 등이 연개소문

을 영웅으로 허락하였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개소문을 적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전에 죽었다고 가정

하였다. 이 가정을 가지고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은 지 오래였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근일에

이른바 천남생(泉男生)의 묘지(墓志)란 것이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땅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에 의하면

남생 형제의 다툼이 건봉(乾封) 원년 곧 기원 666년 이전임이 분명함을 알았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살에 막리지에 임명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였으며, 32살에

태막리지 총록군국아형원도(太寞離支總錄軍國阿衡元道)의 벼슬이 더해졌다.(二十四 任寞離支 兼授三軍大將軍 三十二

加太寞離支 總錄軍國 阿衡元道)”고 하였으며 “의봉(儀鳳) 4년 정월 19일에 병이 들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

에서 죽으니 나이 46이었다.(以儀鳳四年正月十九日 遭疾 遷於安東府之官舍 春秋四十有六)”고 하였다. 당의 고종 의

봉 4년은 기원 679년이요 기원 679년에는 남생이 46살이고, 그의 24살 때는 기원 657년이다. 기원 657년

24살 때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니 기원 654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

이 대신 하였음이 확증된것이다. 혹은 남생이 32살에 대막리지가 되던 해 기원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마는 삼국사기 본기나 연개소문전에는 다 연개소문

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고,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천남생의 묘지에는 다 연개소문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였으며, 개소문전에는 아버지 서부대인(西部大人) 대대로가 죽어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이어 받았다고 하고,

천남생의 묘지에는 증조부 자유(子遊 :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조부 태조(太祚 :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고 하여 어느 책의 막리지를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라 하였고, 또 다른 책에는 태대대

로 혹은 대대로를 막리지라 하였는데, 대로의 대(對)는 뜻이 ‘마주’이니 대개 이두문으로 대(對)는 뜻으로 읽으

면 ‘마’가 되고 막리지의 막(莫)은 음으로 읽어 ‘마’가 되며, 막리지의 리(離)와 대로의 로(盧)는 다 음으로 읽

어 ‘ㄹ’이 되어 막리나 대로는 다 ‘말’로 읽을 것이다. 고구려 말년의 관제(官制)에 ‘말치’가 장상(將相)의 임무

를 겸하여 마치 그 초대의 ‘신가’와 같았으니, ‘말치’를 이두문으로 대로(對盧) 혹은 막리지(寞離支)라고 썼다.

대로지(對盧支)라 쓰지 않고 대로(對盧)라고만 쓴 것은 생략한 것이고, ‘말치’에 임명된 지 몇 해가 되면 태대

(太大)의 호를 더하여 태대대로지(太大對盧之) 혹은 태막리지(太寞離支)라 썼다.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라 쓰지 않

고 대막리지라고만 쓴 것은 역시 생략한 것이다. ‘말치’ - 대로지 혹은 태대막리지가 그 직위는 같으나 ‘신크’

- ‘태대(太大)’는 곧 공훈과 덕을 상 주는 품질(品秩)이니 삼국사기 직관(職官)에 각간(角干) 김유신의 큰 공로를

상 주어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 하여 태대(太大) 두 자를 각간 위에 더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남생이 24

살 때 곧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해, 기원 657년이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다 잡은 확증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같은 해에 연개소문이 죽은 확증이 된다. 만일 대로와 막리지가 같은 ‘말치’의 이두자라면 어찌하여 남

생의 묘지에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並任寞離

支)”고 하거나 아니면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曾祖子遊 祖太祚 父

盖金 並任太大對盧)”고 하지 않고,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

에 임명되었다.(曾祖子遊 祖太祚 並任寞離支 父盖金 並任太大對盧)”고 하여 막리지와 대대로를 구별하여 썼는가?

묘지의 윗부분에는 남생의 직책을 중리위진대형(中裡位鎭大兄)이라 태막리지(太寞離支)라 쓰고, 아랫부분에는

남생이 당에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태대형(跆大兄)이란 옛작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으니, 태대형은 중리위(中裡

位)의 진대형(鎭大兄)을 가리킨 것이거나 태막리지를 가리킨 것일 터인데 이같이 다른 글자로 썼으니 묘지에

쓰인 벼슬 이름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

아랫 구절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양야(良冶)ㆍ양궁(良弓)으로 다 병권을 잡고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

였다.(乃祖乃父 良冶良弓 並執兵靲 咸專國柄)”고 한 것이니,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다같이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한

유일한 수석 대신임을 볼 것이고, 당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는 모든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大對盧 總知國事)”

고 하였고, 동 개소문전에도 “막리지는 당의 중서령(中書令)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직위와 같다.(寞離支獪唐中書令

兵部尙書職)”고 하였으니, 더욱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장상(將相)의 직책을 겸한 유일한 대관임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 657년에 ‘신크말치’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男生)이 ‘말치’가 되어 아버지 연개소문의 직

위를 상속하였다가 9년 후에 ‘신크’의 호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일컬었음이 의심없으니, 구사(舊史)에 의거하

여 기원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함은 물론 큰 착오이거니와 묘지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해를

의거하여 기원 665년에 개소문이 죽었다고 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분명히 기원 657년

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ㆍ구당서에 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늘려 기원 666년이라 하였고, 천남생의 묘지

에 또한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쓰지 아니하였음이 다 무슨 까닭인가?”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당태

종이 눈알이 빠져 죽은 것이 곧 연개소문 때문이고, 당의 땅 일부도 연개소문에게 빼앗겼으니 춘추의 의(春秋

之義)로 말하면 당의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보수를 강구함이 옳겠는데, 이제 세월을 천

연(遷延)하여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다만 고구려의 침략만 당하고 고구려에는 한 발자국도 침입하지 못했음은

곧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리어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이 수치를 가

리기 위해 연개소문의 생전에도 당의 군사가 평양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10년이나 늘려 역사에 올린 것이니, 곧 다음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여복신(扶餘福信)이 죽은 달을 늘린

것과 같은 수단이다.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적 서류가 많지 못하여 이웃나라 이름난 이의 생사를 민

간에서는 거의 관청의 선포에 의해 서로 전할 뿐이므로 이같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에 대한 거짓 기록이 드디

어 지나 안에서는 실록(實錄)으로 유행된 것이었다.

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略評

옛날부터 역사가들은 성패(成敗) 흥망(興亡)으로 그 사람의 낫고 못함을 정하고, 또 유가(儒家)의 윤리관으로도

남의 잘잘못을 논란하는데, 연개소문은 성공하였지만 못난 아들들이 그가 끼친 업적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춘추필법을 본받는 자의 배척을 받고 흉악한 적이라 하여 헐뜯고 욕함을 당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혁명

인가 하면 반드시 역사상 진화(進化)의 의의를 가진 변하가 그것이다. 역사란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에 변하의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는 때가 없으니 또한 어느 날 어느 때에 혁명없는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역사 전부

를 혁명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겠지마는 역사가들이 특히 혁명이라는 명사를 귀중히 여겨 문화상 혹은 정치상

두드러지게 시대를 구분할 만한 진화의 의의를 가진 인위적(人爲的) 대변혁을 가리켜 혁명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런 의미로 정치사상의 혁명을 구하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의 역사에 몇이 못 될 것이다. 한양(漢陽)의 이씨

(李氏)로 송도(松都)의 왕씨(王氏)를 대신한 것이나 이조(李朝)의 이시애(李施愛)ㆍ이괄(李适) 등의 반란이 그 성패

는 다르지마는 실상은 다 정권 쟁탈의 행동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것은 내란이라 역대(易代)라 일컫는 것은 옳

지마는 혁명이라 일컬음은 옳지 않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그렇지 아니하여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

族共治制)의 정치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집중시켰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大局)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묻지 않고 한꺼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 대관을 죽이고, 침노해온 당태종

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진격하여 지나 전국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는 다만 혁명가의 기백(氣

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함이 옳겠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이를 골라 지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

식 형제에게 대권(大勸)을 맡겨 마침내 이룬 공업(功業)을 뒤엎어버렸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덕이 적은 인물이

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져서 오직 적국 사람들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환히 알아볼 수 없으니 경솔하게 그 일부를 들어 그의 전모를 논란함이 옳지 못할뿐더러

수백 년 사대(事大)의 용렬한 종이 된 역사가들이 그 좁싸만한 주관적 눈에 보인 대로 연개소문을 가혹하게 평

하여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臣事君以忠)”하는 불구(不具)의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규탄하며 “작은 자

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以小事大者 畏天)”하는 노예적 심리로 그 업적을 부인하여

시대적 대표 인물의 유체(遺體)를 거의 한 점도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대는 것은 내가 크게 원통하여 여긴는

바이다. 이제 이를 위해 대략 몇 마디의 평을 더하였다.

제12편 百濟의 强盛과 新羅의 음모

제 1장 扶餘成忠의 위대한 계략과 백제의 拓也

 부여성충의 건의

부여성충은 백제의 왕족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모(智謀)가 뛰어나서 일찍이 예(濊)의 군사가 침략해오자 고향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가 산보(山堡)에 웅거하여 지키는데 늘 기묘한 계교로 많은 적을 죽이니 예의 장수가 사

자를 보내 “그대들의 나라를 위하는 충절을 흠모하여 약간의 음식을 올리오.”하고 궤 하나를 바쳤다. 사람들

이 모두 궤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성충이 이를 굳이 못 하게 말리고서 불 속에다 넣게 하였다. 그 속에 든

것은 벌과 땡삐 따위였다. 이튿날 또 예의 장수가 궤 하나를 바쳤다. 모두 이것을 불에 넣으려 하니까 성충은

그것을 열어보게 하였다. 그 속에는 화약과 염초(焰硝) 따위가 들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적은 또 궤 하나

를 보내왔는데, 성충은 그것을 톱으로 켜게 하였다. 그러니까 피가 흘러나왔다. 칼을 품은 용사가 허리가 끊

어져 죽었다.

이때는 기원 645년 무왕(武王)은 죽고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해 있었는데 의자왕은 그 말을 듣고 성충을 불러

물었다. “내가 덕이 없어 대위(大位)를 이어 감당치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중이오. 신라가 백제와 풀 수 없

는 큰 원수가 되어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지 못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것이니 이는 더욱 내가 염려하

는 바요,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범려(范蠡)를 얻어 10년을 생취(生聚)하고 10년을 교육하여 오(吾)를 멸

망시켰으니 그대가 범려가 되어 나를 도워 구천이 되게 해주지 않겠소?” 성충이 대답하였다. “구천은 오왕 부

차(夫差)가 교만하여 월에 대한 근심을 잊었으므로 20년 동안 생취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켰지마는 이제 우리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 남으로 신라의 침략이 쉬는 날이 없어서 전쟁의 승패가 순간에 달려 있고 국가의 흥망

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으니 어찌 한가롭게 20년 생취 교육할 여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

(西部大人) 연개소문이 바야흐로 불측한 뜻을 품고 있어 오래지 않아서 내란이 있을 것이라, 한참 동안 외국에

대한 일을 경영하지 못할 것이니 아직은 우리나라가 근심할 바가 아니지마는, 신라는 본래 조그만 나라로서

진흥왕(眞興王) 이래로 문득 강한 나라가 되어 우리 나라와 원한을 맺어 근자에 와서는 더욱 심하여 내성사신

(內省私臣) 용춘(龍春)이 선대왕(백제의 武王)과 혈전을 벌이다가 죽고, 그의 아들 춘추(春秋 : 다음장 참고)가 항상

우리 나라의 틈을 엿보았으나 다만 선대왕의 영무(英武)하심이 두려워서 얼른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선대

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저네가 반드시 대왕을 전쟁에 익숙하지 못한 소년으로 업신여기고, 또한 우리 나라의 상

사(喪事 : 武王의 죽음)있음을 기회하여 오래지 않아서 침략해올 것이므로 이제 반격의 대책을 연구함이 옳을까

합니다.” 왕이 물었다. “신라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어디로 해서 오겠소?” “선대왕께서 성열성(省熱城 : 지금

의 淸風) 서쪽 가잠성(椵岑城 : 지금의 槐山) 동쪽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이를 원통해한 지 오래이므로 반드시 가

잠성을 공격해올 것입니다.”하고 성충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가잠성의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소?”하고

왕이 다시 물으니 성충은 “가잠성주 계백(階伯)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비록 신라가 전국의 군사로 포위 공

격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깨뜨리지 못할 것이라 염려할 것이 없고, 갑자기 나가서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 병가

의 상책이니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공격해오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군사를 내어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다시 “그러면 어느 곳을 치는 것이 좋겠소?”하고 물었다. 성

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들으니 대야주(大耶州 : 지금의 陜川)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김춘추의 사랑하는 딸

소랑(炤娘)의 남편이 되어 권세를 믿고 부하와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서 원한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데, 이제 우리 나라에 국상(國喪) 있다는 말을 들으면 수비가 더욱 소홀해질 것이고, 또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는 때이면 대야성이 위급해지더라도 갑자기 이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이긴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 전국이 크게 소란해질 것이니 이를 쳐 말망

시키기는 아주 쉬울 것입니다.” 왕은 “그대의 지략은 고금에 짝이 드물겠소.”하고 성충을 상좌평(上佐平)에 임

하였다.

 太耶城의 함락과 金品釋의 참사

이듬해 3월에 신라가 과연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가잠성을 치게 하니 계백이

성을 의지하여 임기응변으로 응전하여 여러 달 동안에 신라 군사가 많이 죽고 다쳤다. 7월에 의자왕이 정병 수

만 명을 뽑아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북으로 향해 나아가다가 갑자기 군사를 돌이켜 대야주로 향하여 미후

성(獼猴城)을 포위 함락시켰다. 대야주는 신라 서쪽의 요긴한 진(鎭)이요, 관할하는 성과 고을이 40여 리 되었

다. 김춘추는 공주 소랑을 사랑하여 대야주의 속현(屬縣)인 고타(古陀 : 지금의 居昌)를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어

고타소랑(古陀炤娘)이라 일컫고, 소랑의 남편 김품석으로 대야주 도독을 삼아서 그 40여 성과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품석이 음란하고 난폭하여 군사와 백성을 구휼하지 아니하고, 재물과 여색을 탐내어 가끔 부하의 아

내나 딸을 빼앗아 첩을 삼았다.

품석의 막장(幕將) 금일(黔日)이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품석에게 빼앗기고 통분하여 늘 보복하려고 하다가 백

제가 미후성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사람을 보내 내응(內應)하기를 청하였다. 의자왕이 부여윤충(扶

餘允忠 : 성충의 아우)으로 하여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성 아래 이르자 금일

이 성 안이 술렁이고 두려워서 나가 싸울 뜻이 없었다. 품석 부부가 하는 수 없이 그 막하의 서천(西川)으로

하여금 성 위에 올라가서 윤충에게 우리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성을 내주겠노라고 청

하게 하였다. 윤충이 이 말을 듣고 좌우를 돌아보며 “저희 부부를 위해 국토와 백성을 파는 놈을 어찌 살려두

겠소. 그러나 허락하지 않으면 성 안에 그대로 웅거하여 지켜 얼마 동안을 더 싸울지 모를 일이니 차라리 거

짓 허락하고 사로잡는 것이 좋겠소.”하고 “해를 두고 맹세하여 공의 부부가 살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겠소.”

하고 가만히 복병을 두고 군사를 물리니 품석이 먼저 그 부하 장사들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백

제가 복병을 내어 습격하여 죄다 죽이고 품석 부부는 금일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군사가 성 안

으로 들어갔다.

의자왕이 미후성에게 와서 윤충의 작위를 높여주고 말 20마리와 쌀 1천 섬을 상주었으며, 그 이하의 자앗들

에게도 차례로 상을 내려 칭찬하고 나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각 고을을 공략하게 하였다. 대야주는 원

래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땅이었으므로 그 지방의 백성들이 옛 나라를 생각하고 신라를 싫어하다가 백제의 군

사가 이르니 모두 환영하여 40여 성과 고을이 한 달 안에 죄다 백제의 차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의자왕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항복받았다고 하였는데, 뒤의 것이 사리에 가까우므로 여기서는 이를 좇았다.

대야(大耶)는 ‘하래’로 읽는 것이니 낙동강 상류를 일컫는 말인데, 김유신전에는 대야를 ‘대량(大梁)’이라고 기록

하였다. ‘야(耶)’ ‘양(梁)’등이 옛날에는 다 ‘라’ 혹은 ‘래’로 읽은 것이고, 대야를 신라 말엽에 협천(陜川)으로 고

쳐 후세에는 이것을 ‘합천’이라 읽었으니 당시에는 합(陜)의 첫소리 ‘하’와 내(川)의 뜻 ‘래’를 따라 ‘하래’로 읽

은 것이었다.

 고구려ㆍ백제 동맹의 성립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잡았다.

의자왕의 성충(成忠)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는데 고구려 전국이 두려워서 그 죄를

묻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고구려가 서국(西國 : 지나를 가리킴)과 전쟁을 한 지 여러 백 년 만에 처

음에는 여러 번 서국에게 패하다가 근세에 이르러 날로 강대해져서 요동을 차지하여 그 세력이 요서에까지 미

치고 물에서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뿐 아니라 바다에까지 드나들어 영양왕 때에는 세 번이나 백만의 수나라 군

사를 격파하여 나라의 위엄이 크게 떨쳐서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서국과 맞서려는 기염(氣焰)이 하늘을 찌

르려 하는 판인데 건무(建武 : 영류왕)가 도리어 이를 압박하고 서국과 화친하여 군사의 백성들의 노여움을 산

지가 오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여러 대의 장상(將相)으로 이름난 집안으로서 왕의 정책에 반대하고 정

당론(征唐論)을 주장하여 국민들의 마음에 호응하고, 그리하여 건무를 죽였으므로 고구려 전국이 연개소문의

죄를 묻지 아니할 뿐 아니라 바야흐로 그 공을 노래하는 것입니다.”하고 성충이 대답하였다. 왕이 다시 “고구

려와 당이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기겠소”하고 물으니, 성충은 “당은 비록 땅이 고구려보다 넓고 백성도 고구

려보다 많지마는 연개소문의 전략은 이세민(二世民 : 당의 太宗)이 따를 바가 아니니 승리는 반드시 고구려에

돌아갈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신이 왕년에 일찍이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때에

는 연개소문이 아무런 직위도 없고 다만 명문의 한 귀소년(貴少年)이었지마는 모습이 우람하고 의기가 호탕하

므로 신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함께 이야기하다가 말이 병법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신은 연개소문

의 지혜와 계략이 비상함을 알았습니다. 이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은 지 오

래지 않아 아무런 기색도 없다가 하루 아침에 대신 이하 수백 명을 죽이고, 패수(浿水)의 전쟁에 수(隋)의 군사

를 격파하여 위명을 떨친 건무왕을 쳐 이기고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으니 이는 이세민이 따를 바가 아닙니다.”

왕이 또 “그러면 고구려가 능히 당을 멸망시킬 수 있단 말이오?”하고 물으니 성충은 “그것은 단언할 수 없습

니다. 만일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더라면 오늘날에 당을 멸망시켰을지 모르지마는, 연개

소문은 겨우 오늘에 와서야 성공하였는데 이세민은 이미 20년 전에 서국을 통일하면서 나라 다스리는 규모가

정밀하여, 백성을 사랑하여 민심을 열복시킨 지 이미 오래이므로 연개소문이 설혹 싸움에 이긴다 하더라도 민

심이 갑자기 당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한 가지 이유입니다. 연개소문이

비록 고구려를 통일하였지마는 그것은 겉모양이고 그 속에는 왕실과 호족들의 남은 무리가 날로 연개소문의

뜻을 엿보고 있어 만일 연개소문이 당을 멸망시키기 전에 죽고 그 후계자가 옳은 감[人材]이 아니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당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니 두 나라의 흥망을

미리 말하기 어렵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물었다. “우리 나라가 이제 대야주는 차지하였으나 아주 그

근본을 뒤집어엎지 못하였으므로 신라는 보복할 마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고구려가 당을 멸망시키거나

당이 고구려를 멸망 시키거나 반드시 남침(南侵)해올 것이니 그때에 우리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나 당의 침략을

받고, 동으로는 신라의 반공을 받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성충이 대답하였다. “지금의 형세로 보건대

고구려가 당을 치지 않으면 당이 고구려를 쳐서 서로 대립할 것인데 이것은 연개소문이 뻔히 알고 있을 것이

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자면 반드시 남쪽 백제와 신라와는 화친하여야만 뒤돌아볼 염려가 없을 것도 연개소문

이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는 피차 원한이 깊어 고구려가 이 중 한 나라와 화친하면 다

른 한 나라와는 적국이 될 것도 연개소문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장차 두 나라 중에

서 어느 한 나라와 화친하여 당과 전쟁을 할 때에 남쪽 두 나라가 서로 견제해서 고구려를 엿보지 못하게 되

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제 백제를 위해 계책을 세운다면 빨리 고구려와 화친하여 백제는 신라를, 고구려는 당

을 맡아 싸우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신라는 백제의 적이 못 되니 틈을 타서 이로움을 따라 나아가면 모든

편의가 고구려보다 백제에 있습니다.” 왕이 그의 말이 옳다고 하고 성충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성충이 고구려에 가서 이해를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동맹의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성충이 의심이 나서 탐지해보니 신라의 사신 김춘추

(金春秋 : 뒤의 태종 무열왕)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

었다.

그래서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공이 당과 싸우지 않으면 모르지만 만일 당과 싸우고자 한다면 백

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오. 왜냐하면 서국이 고구려를 칠 때에 번번이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였으

니 수나라가 그 분명한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파 연합하면 당은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노할

뿐 아니라 배로 군사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와서 백제의 쌀을 먹어가며 남에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니, 그러

면 고구려가 남과 북 양면으로 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위험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라는 동해안에 나라가 있어

서 당의 군사 운반의 편리하기가 백제만 못할뿐더러 신라는 일찍이 백제와 화약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竹嶺) 밖 고현(高峴) 안의 10군을 함부로 점령하였음은 공이 잘 아는 바이니, 신라가 오늘

에 고구려와 동맹한다 하더라도 내일에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으리라 어떻게 보증하겠습니

까?”하였다. 연개소문이 이 글을 보고는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밖 욱리하(郁里河) 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

였다. 이리하여 성충은 마침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 안시성 싸움 때의 成忠의 건의

기원 644년에 신라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죽령을 넘어 성열(省熱)ㆍ동대(同大) 등 여러 성을 공격하므로 백제

의 의자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응전할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성충이 “신라가 여러 번 패한 끝에 스스로 보전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제 갑자기 침략을 시도하니 이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김춘추가 딸 고타랑(古陀娘) 잃은 복수를 하기 위해 여러 번 가만히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서 구원병을 청하

였따고 합니다. 당의 임금 이세민이 해동(海東) 침략할 뜻을 품은 지 오래였으므로 반드시 신라와도 고구려ㆍ

백제 두 나라에 대한 음모를 꾸몄을 것인데 헤아리건대 아마 당은 고구려를 치는 동시에 수군으로 백제의 서

쪽에 침입하고, 신라는 백제를 쳐서 고구려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대군으로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하

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성열ㆍ동대 등의 성을 차지하기 전에는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시키지 못

할 것이고, 당이 요동을 차지하기 전에는 수로로 양식 운반하기에 급급하여 백제에 침입할 병선이 없을 것이

니, 이제 백제로서 계책을 세운다면 당분간 성열 등의 성을 신라에게 내맡기고 군사를 단속하여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당과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격렬한 전투를 벌여 서로 손을 뺏기가 어렵게 될 것인데 신라는 백제를

염려하여 군사를 많이 내지 못할 것이니마는 당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고구려에 침입할 것이니 백제는 그

틈을 타서 배로 정병 수만 명을 운반하여 당의 강남(江南)을 친다면 이를 점령하기가 아주 용이할 것이고, 강

남을 점령한 뒤에는 그 물력(物力)과 민중으로 나아가 공략한다면 서국의 북쪽은 비록 고구려의 차지가 되더라

도 남쪽은 다 백제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가 비록 백제를 아무리 원망하더라도 하잘것없는 조그

만 나라가 어찌 하겠습니까? 오직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때에는 백제가 신라를 쳐 멸망시킬

수도 있고 그대로 존속시킬 수도 있어서 아무런 말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자왕이 그의 말을 좇

아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변경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듬해에 과연 당이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에

침입하였는데 안시성을 포위하고 싸웠으나 몇 달 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한편 신라는 13만 대군을 내어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그 후방을 교란시키려고 하므로, 의자왕은 계백(階伯)에게 명하여 신라의 후방을 습

격하여 성열 등 일곱성을 회복하고 윤충을 보내 부사달(夫斯達 : 지금의 松都) 등 10여 성을 점령하고, 수군으

로 당의 강남을 습격하여 월주(越州 : 지금의 紹興)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척지(拓地)를 경영하다가 임자

(任子)의 참소로 성충이 마침내 왕의 박대함을 당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제 2장 金春秋의 외교와 金庾信의 음모

 김춘추의 복수운동

김춘추는 신라 내성(內省) 김용춘(金龍春), 곧 백제의 무왕(武王)과 동서전쟁(同婿戰爭)을 한 사람의 아들이다.

김용춘이 죽으니 김춘추가 그 직위를 이어받아 신라의 정치를 도맡아 처리하였고 백제 무왕과 혈전을 벌였다.

무왕이 죽은 뒤에 의자왕이 성충의 계교를 써서 대야주를 쳐 김품석(金品釋 : 김춘추의 사위) 부부를 죽이고 그

관내(管內)의 40여 성을 빼앗으니, 김춘추는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나 통분하였던지 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을

사람이나 개가 지나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붉게 상기한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기둥을

치며 “사나이가 어찌 보복을 못하랴?”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신라는 나라가 적고 백성이 적으니 무엇으로 백제에 보복을 하랴? 오직 외국의 원조를 빌 수밖에 없

다는 것이 김춘추가 궁리궁리 끝에 결론지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갔다. 고구려는 수

나라의 백만 대군을 격파한 여위(餘威)를 가진 유일한 강대국이요,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유일한 거인이니 연

개소문만 사귀면 백제에 대해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 하여 신라, 고구려 두 나라 동맹의 이로움을 들어 연개

소문과 거의 동맹이 이루어지게 된 판에, 백제의 사신 상좌평(上佐平) 성충이 이것을 알고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어 연개소문은 마침내 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욱리하(郁里河) 일대의 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김춘추가

이에 가만히 종자로 하여금 고구려왕의 총신 선도해(先道解)에게 선물을 주고 살려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연개

소문의 세상인 판에 총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래도 선도해는 선물을 탐내어 그것을 받고 “내가 공을 살

려줄 수는 없으나 공이 살아 돌아갈 방법을 가르쳐주리다.”하고 당시 고구려에 유행하던 거북과 토끼 이야기

[龜兎談]란 책을 주었다. 김춘추가 그 책을 읽어보니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토끼가 거북의 꾐에 빠져서 등에 업혀 용왕국(龍王國)으로 벼슬을 하려고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벼슬을 주려

고 한 것이 아니라 용왕이 병이 들어 토끼의 간이 병에 약이라 하여 거북을 보내서 저를 괴어온 것이었다.

토끼가 얼른 꾀를 내어 용왕에게 “신은 달의 정기의 아들이라 달을 보고 잉태하였으므로 선보름에 달이 찰

때에는 간을 내놓고 후보름을 달이 기울 때에는 간을 다시 넣어두는데, 신이 대왕의 나라에 들오올 때에 마

침 선보름이라 간을 내놓았었으므로 지금은 신의 간이 신의 뱃속에 있지 않고 금강산 속의 어느 나무 밑에

감추어두었습니다. 신을 다시 내보내주시면 그 간을 가져오겠습니다.”하고 속여 마침내 다시 거북의 등에 업

혀 나와서 물에 닿자 “사람이나 짐승이나 간을 내었다 넣었다 하는 일이 어디 있더냐? 아나 옛다, 간 받아

라.”하고 깡충깡충 뛰어 달아났다.

김춘추는 선도해의 뜻을 알고 고구려 왕에게 거짓 글을 올려 욱리하 일대의 땅을 고구려에 바치겠노라고 하

였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김춘추와 약속을 맺고 그를 석방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김춘추는 국경에 이르자 고

구려의 사자를 돌아보며 “땅이 무슨 땅이란 말이냐? 어제의 맹약은 죽음을 벗어나려는 거짓말이었다.”하고

토끼처럼 뛰어 돌아왔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실패하고 돌아오니 이에 신라가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사이에 고립된 한낱 약소국

이 되어 부득이 새로이 해서(海西)의 당에 동맹을 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바다를 거너 당에 들어가

서 당태종을 보고 신라의 위급한 형편을 말하고 힘 닿는데까지 자기를 낮추고 많은 예물로 구원병을 청하는

데, 당나라 조정의 임금과 신하의 뜻을 맞추기 위해 아들 법(法敏 : 뒤의 문무왕)과 인문(仁問) 등을 당에 인질

로 두고, 본국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의복과 관을 쓰고, 진흥왕 이래로 일컬어오던 본국의 제왕과 연호

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쓰기로 하였따. 또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晉書)와 그가 보태고 깎고 한 사기(史記)ㆍ한

서(漢書)ㆍ삼국지(三國志) 등에 있는 조선을 업신여기고 모욕한 말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본국에 유포시켜 사대

주의의 병균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 김유신의 등용

김춘추가 한창 복수운동에 분주한 판에 그를 보좌하는 한 명물이 있었으니 곧 김유신이었다. 당시에 연개소

문을 고구려의 대표 인물이라하고 부여성충을 백제의 대표 인물이라 한다면 김유신은 곧 신라의 대표 인물이

라 할 것이다. 고구려ㆍ백제가 망한 뒤에 신라의 역사가들이 그 두 나라 인물의 전기적(傳記的) 자료를 말살해

버리고 오직 김유신만을 찬양하였으므로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 한 사람의 전기가 을지문덕 이하 수십 명의

전기보다도 양이 훨씬 많고, 부여성충 같은 이는 열전에 끼이지도 못하였다. 그러니까 김유신전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이 많음을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그 사리에 맞는 것만을 추려보기로 한다.

김유신은 신가라 국왕 구해(仇亥)의 증손이다. 다섯 가라국이 거의 다 신라와 싸우다가 망하였으나 신가라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나라를 들어 귀부해왔고, 신라처럼 골품(骨品)을 다투는 나라이므로 왕은 구해에게 감사

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준귀족(準貴族)으로 대우하였다. 구해는 또 장병대원(將兵大員)이 되어 구천(狗川) 싸움

에서 백제왕을 쳐 죽인 전공도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귀골(貴骨)들이 김무력(金武力 : 仇亥)을 외래(外來)의 김

씨라 하여 세 성의 김씨와 구별하여 세성들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김무력의 아들 서현(舒

玄)이 일찍이 출유(出遊)하다가 세 성의 김씨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 몹시 아름다움을 보고 정을

금치 못하고 추파로 뜻을 통하여 야합해서 유신을 배었다. 숙흘종이 이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만명을 가두니

만명이 도망하여 금물내(今勿內 - 지금의 진천(鎭川))의 서현이 있는 곳으로 가서 부부의 예를 이루고 유신을 낳

았는데 아버지 서현은 일찍 죽고 어머니 만명이 유신을 길렀다.

유신이 처음에는 방탕하여 행동을 조심하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울며 타이르는 말을 듣고 감격하고 깨달아서

학업에 힘썼다. 나이 17살에 화랑(花郞)의 무리가 되어 중악산(中岳山)ㆍ인박산(咽薄山) 등에 들어가서 나라를

구하려는 기도를 올리고 검술을 익혀 차차 이름이났다. 그러나 유신이 가라국의 김씨이기 때문에 여간한 연

줄이 없이는 중요하게 쓰이지 못할 줄을 알고, 당시의 총신인 내성사신(內省私臣) 김용춘의 아들 춘추와 사귀

어 훗날 현달(顯達)할 발판을 만들려고 하였다. 하루를 자기 집 부근에게 두 사람이 제기를 차다가 유신이 일

부러 춘추의 옷을 차 단추를 떨어뜨리고, 춘추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막내누이를 불러 단추를 달

게 하였다. 누이 문희(文姬)가 엷은 화장에 산뜻한 옷차림으로 바늘과 실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 아름다움이

춘추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춘추는 유신의 매부가 되었다.

용춘이 죽고 춘추가 정권을 잡으나 유신은 그 장재(將材)로 뿐 아니라 춘추의 도움이 있어 마침내 신라의 각

군주(軍主)가 되고, 춘추가 왕이 되자 소뿔한(舒弗翰 : 벼슬 이름으로 將相을 겸함)의 직위를 얻어 신라의 병마(兵

馬)를 한손에 쥐었다.

 김유신의 戰功의 많은 거짓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성의 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전을 가려 숨기고 조그만 승리를 과장한 것이 기록이다.

진덕대왕(眞德大王) 원년(기원 647년)에 백제 군사가 무산(茂山)ㆍ감물(甘勿)ㆍ동잠(桐岑) 세 성을 공격하므로 유

신이 보병과 기병 1만으로 항거하였는데 고전을 하여 힘을 다했다. 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격발시키겠는가?”하였다. 비녕자는 두 번 절하여 응

낙하고 적에게 돌진하는데, 그의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이 그 뒤를 따라 세 사람 모두 힘을 다해 싸

우다가 죽었다. 신라의 삼군(三軍)이 감동하여 앞을 다투어 진격해서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3천여 명을 목베

었다.

유신이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慶山) 군주가 되어……대량주(大梁州 : 곧 大耶州)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니 왕

이 “적은 군사로 큰 군사를 대적함이 위태롭지 아니하오?”하니 유신이 “……지금 우리들은 한마음이 되었으

니 백제를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하여 왕이 출병을 허락하였다. 유신이 고을의 군사를 조련하여 대량주 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항거해 싸우므로 유신은 거짓 패하여 옥문곡(玉門谷)으로 들어가니 백제 군사가 가벼이

여겨 크게 몰려왔다. 유신은 복병을 내어 앞뒤로 쳐서 크게 깨뜨려 백제의 장군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천여

명을 베었다. 그리고 사자를 백제의 장군에게 보내서 “우리 군주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희 옥중에

있으니……네가 죽인 두 사람의 뼈를 보내면 나는 살아 있는 여덟 사람을 돌려주겠다.”라고 하니, 백제가 품

석 부부의 유골을 돌려보내므로 유신은 사람을 돌아가게 하고 이긴 기세를 타 백제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 악

성(嶽城) 등 12성을 빼앗고서 1만 명을 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유신은 이찬(伊湌)의 작위를 받

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總管)이 되었으며, 진례(進禮) 등 9성을 도륙하여 9천여 명을 베고 6백여 명을 사

로잡았다.

2년(기원 648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유신ㆍ죽지(竹旨)ㆍ진춘

(陳春)ㆍ천존(天存) 등 장군에게 명하여 삼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백제군을 치게 하였는데, 서로지고 이기고

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리지 아니하여 시체가 들에 널리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었다. 유신 등이 도살성(道薩

城) 아래에 주둔하여 말과 군사를 쉬게 해가지고 다시 공격하려고 하는데 마침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유신

의 군막 위를 지나갔다. 군사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하니 유신이 말했다. “오늘 백제의 정탐이 올 것이니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라.”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수비를 견고히 하여 움직이지 말아라. 내일 구원병 오는

것을 기다려 싸울 것이다.”하였다. 백제의 정탐이 돌아가 은상에게 이 말을 고하여 은상은 구원병이 오는 줄

알고 의심하며 두려워했다. 유신 등이 일시에 내달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달솔(達率)ㆍ정중(正仲)

과 군사 1백 명을 포로로 하고, 좌평 은상ㆍ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980명을 베고, 말 1만 마리와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고 그 밖에 기계도 수없이 노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놓아주었다. 본기의 기록도 이와 비슷한데 악성(嶽城)은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진례(進禮)는 용담(龍潭)ㆍ진안(鎭安) 사이의 진잉을(進仍乙 : 고구려의 본 이름인데 신라에서 진례라 하였음)이므로

악성도 그 부근일 것이니, 이것은 전라도의 동북지방이 신라의 위협을 받은 것이고, 석토(石吐)는 연혁을 알

수 없으나 도살성이 곧 청안(淸安)의 옛 이름이므로 석토도 그 부근일 것이니, 이것은 충청도의 동북지방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신이 이처럼 늘 승리를 거두었다면 백제의 국토가 몹시 쇠퇴했을 것인데

당서(唐書)에는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의 구원을 청한 말에 “큰 성과 요긴한 진(鎭)이 다 백제가 차지한 바

가 되어 국토가 날로 줄어들었습니다……다만 옛 땅도 도로 찾는다면 강화를 청하겠습니다.(大城重鎭並爲百濟

所並 疆宇日蹙……但得古地 即請交和)”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태종대왕이 백제를 정벌하고자 당에 군사를

청하였는데 일찍이 혼자 앉아 있으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太宗大王 欲伐百濟 請兵於唐 嘗獨坐 憂形於

色)”고 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성충(成忠)ㆍ윤충(允忠)ㆍ계백(階伯)ㆍ의직(義直) 등 어진 재상과 이름난 장수가

수두룩하고, 사졸들은 숱한 싸움을 겪어서 도저히 신라의 적이 아니었으니, 김유신이 몇 번 변변찮은 작은

싸움에서는 이겼었는지 모르지마는 기록과 같은 공이 혁혁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 김유신 특유의 음모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유신의 전공이 거의 거짓 기록이라면 김유신은 무엇으로 그렇게 일컬어졌는가? 김

유신은 지혜와 용기있는데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요, 그 평생의 큰 공이 싸움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사람이다. 그 실례를 하나 들겠다. 신라 부산현(夫山縣 : 지금 송도 부근) 현령(縣

令) 조미곤(租未坤)이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 좌평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었는데,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임

자를 섬겨 자유로이 밖에 드나들게 되자 가만히 도망해서 신라에 돌아와 백제 국내의 사정을 고하였다. 유신

이 말했다. “임자는 백제 왕이 사랑하는 대신이라니 내 뜻을 알려 신라에 이용되게 하면 그대의 공이 누구보

다도 클 것인데, 그대가 능히 위험을 무릅쓰고 내 말대로 하겠소?” 조미곤이 말했다.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이에 조미곤은 유신의 밀령을 받고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 이 나라의 풍속을 모른다는 것은 안 될 일이기에 미처 아뢰지 못하고 나가 다니다가 돌아왔습니다.”라

고 하니, 임자는 이 말을 곧이듣고 의심하지 않았다. 조미곤이 틈을 타 임자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실은 고

향을 생각하여 신라에 갔다 왔고 먼젓발 말은 한때 꾸민 말이었습니다. 신라에 가서 김유신을 만나보았는데

유신의 말이 백제와 신라가 서로 원수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아니하니,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인데 그러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지금의 부귀를 잃고 남의 포로가 될 것이니 원컨대 우리 두 사람

이 미리 약속하여 신라가 망하면 유신이 공에 의지해 백제에서 다시 벼슬을 하고 백제가 망하면 공이 유신에

게 의지해 신라에서 다시 벼슬을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망하든지 우리 두 사람은

여전히 부귀를 보전할 것이 아니겠소하는 자기의 뜻을 말씀드려보라고 하였습니다.” 임자가 잠자코 아무 말

이 없자 조미곤은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났다.

며칠 뒤에 임자가 조미곤을 불러 전일에 한 말을 물으므로 조미곤이 다시 유신의 말을 되풀이하고 이어 “나

라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은 것인데, 만일 이 꽃이 진 뒤에 저 꽃이 핀다면 이 꽃에서 놀던 나비가

저 꽃으로 옮겨가 사시를 항상 봄처럼 놀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어찌 구태여 꽃을 위해 절개를 지켜 부귀를

버리고 몸을 망치겠습니까?”하였다. 임자는 원래 부귀에 얼이 빠진 추악한 사나이였으므로 이 말을 달게 여

겨 조미곤을 보내 유신의 말에 찬성하였다. 유신이 다시 임자에게 “한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지 못하면 부

뷔가 무슨 뜻이 있겠소? 들으니 백제에는 성충이 왕의 총애를 받아 모든 것이 다 그의 뜻대로만 되고, 공은

겨우 그 아래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하고 백방으로 꾀어 부여성

충을 참소하게 하고, 마침내는 요망한 계집 금화(錦花)를 임자에게 천거하여 백제 왕궁에 들여보내게 해서 부

여성충 이하 어진 신하들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서 백제로써 백제를 망치게 하였다.

제 3장 扶餘成忠의 자살

 錦花와 任子의 讃訴

임자는 김유신이 보낸 무당 금화를 미래의 화복과 국가 운명의 길고 짧음을 미리 아는 선녀라 일컬어 의자

왕에게 천거하였다. 왕이 이에 혹해서 금화에게 백제 앞날의 길흉을 물었다. 금화는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신의 말을 전한다고 “백제가 만일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아니하면 눈앞에 나라가 망하는 화가 미칠 것이요, 죽

이면 천년만년 영원히 국운이 계속되리라.”하였다. 왕이 말했다. “충신을 쓰면 나라가 흥하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함은 고금을 통한 이치인데 이제 충신 형제를 죽여야 백제의 국운이 영원할 것이라고 함은 무슨 말

이냐?” 금화가 말했다. “그 이름은 충신이지마는 실은 충신이 아니기 때문이니다.” “충신 형제란 누구란 말이

냐?”하고 왕이 물으니 금화는 “첩은 다만 신의 비밀한 명령을 전할 뿐이고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

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왕은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가 다 이름에 충(忠) 자가 있어 그들을 의심하

기 시작하였다.

임자는 왕의 성충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음을 알고 그를 참소하여 내쫓으려고 하였다. 왕이 마침 임자와 한

가로이 술을 마시게 되자 임자에게 물었다. “성충은 어떠한 사람이오?” 임자가 “성충은 재주와 계략이 또래

중에서 뛰어나 전쟁의 승패를 미리 획책하면 백에 한 번도 실수하는 일이 없고, 남의 뜻을 잘 짐작하며 말솜

씨가 있어 이웃나라에 사신 가면 임금을 욕되게 하지 아니합니다.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입니다. 그러나 그

러한 기재가 있는 만큼 그를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이 들으니 성충이 고구려에 사신 갔을 때에 개소

문과 친밀해서 개소문더러,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성충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천하에

얻지 못할 것이 있겠소?’하여 엄연히 백제의 개소문을 자처하고, 개소문은 성충에게 ‘나나 공이 아직 대권(大

權)을 잡지 못하였음이 한이오.’하며 성충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성충이 이같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나라의 권세있는 신하의 정의가 매우 가깝고, 또 그의 아우에 윤충 같은 명장이 있으니, 신은 대

왕께서 만세(萬歲)하신 후에는 백제는 대왕 자손의 백제가 아니오 성충의 백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하고 대

답하였다.

이에 왕은 윤충을 파면하여 소환하고 성충을 소홀히 대접하였다. 이때 윤충은 바야흐로 월주(越州)에서 장사

를 훈련하여 당의 강남(江南)을 온통 집어삼키려고 하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참소를 만나 파면돼서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월주는 당에게 함락되었다. 그래서 윤충은 울분하여 죽었다.

 成忠의 자살과 그 무리의 축출

윤충이 죽고 성충도 물리쳐지니 금화는 더욱 기탄없이 의자왕에게 권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왕흥사(王興寺)와

태자궁(太子宮)을 지어 나라의 재정이 마르게 하고, 백제 산천의 지덕(地德)이 험악하니 쇠로 진압해야 한다고

각처 명산에 쇠기둥 또는 쇠못을 박고 강과 바다에 쇠그릇을 던져넣어 나라 안의 철이 동이 나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금화를 원망하여 ‘불가살’이라 일컬었다. ‘불가살’은 백제 신화(神話)의 ‘쇠 먹는 신’이 이름이다.

이에 성충이 상소하여 임자와 금화의 죄를 통렬히 논란하였으나 왕의 좌우가 다 임자와 금화의 심복이었으므

로 다투어 성충을 참소하기를 “성충이 대왕의 총애를 잃은 뒤로 늘 울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늘날

이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성충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를 고마미지(古馬彌

知 : 지금의 長興)로 귀양보내고, 서부은솔(西部恩率) 복신(福信)을 파면하여 가두니 이들은 다 성충의 무리였다.

성충은 옥중에서 다시 유언의 상소를 올려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느니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살피건대, 오래지 않아 전화(戰禍)가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

를 씀에는 지세를 택하여 위쪽에 처해서 적에 대응해야만 만전(萬全)합니다. 만일 적병이 침입하거든 육로로는

탄현(炭峴)에서 막고, 수로로는 백강(白江)에서 막아 험한 곳에 웅거해 싸워야 합니다.”하고는 음식을 끊어 28

일 만에 죽으니 곧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죽기 한 해 전이었다.

탄현은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여산(礪山) 탄현(炭峴)이라 하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扶餘) 백강(白江)이라고 하

지마는 백제가 망할 때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고 당의 군사가 백강을 지난 뒤에 계백(階伯)이 황산(黃山 : 지금

의 連山 부근)에서 싸우고, 의직(義直)이 부여 앞장에서 싸웠으나 탄현은 지금 보은(報恩)의 탄현이고, 백강은 지

금 서천(舒川) 백마강(白馬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 흥수(興首)의 이른바 기벌포(伎伐浦)이다.(다음 장 참조)

제 4장 신라ㆍ당 두 나라 군사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의 집합

 신라와 당의 연합군 침입

기원 654년 진덕여대왕(眞德女大王)이 돌아가고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이른바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이다. 태종의 아버지 용춘(龍春) 때부터 이미 왕의 실권은 그가 가지고 있었지마는 다만 동서인 백제 무

왕(武王)과의 왕위 다툼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자 왕의 명의는 첫 번에는 선덕(仙德), 다음에는 진덕(眞德), 곧

출가하여 여승이 된 두 여인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두 나라의 갈라진 상처가 다시 아물 수 없게 깊

어졌으므로 태종은 왕의 명의까지도 차지한 것이었다.

태종이 왕이 되자 더욱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보복을 서두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백제의 침노가 심하므

로 태자 법민(法敏)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이때 태종이 죽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여러 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다 실패하였으므로, 이에 먼저 신라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쳐 없앤 다음에 다시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허락하였다.

 階伯과 義直의 전사

기원 660년 3월에 신라 왕자 인문(仁問)이 당의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

느리고 내주(箂州)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德勿島 : 지금 南陽의 德勿島)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이 금돌성

(今突城 : 지금의 陰城)에 진을 치고, 태자 법민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과 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尊)등으로 하

여금 병선 1백 척으로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신라 당 두 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나뉘어 신라 군사는

육지로 쫓고, 당의 군사는 물로 쫓아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所夫里)에서 집합합시다.”하므로, 법민ㆍ유

신 등이 다시 금돌성으로부터 돌아와 김품일(金品一)ㆍ김흠순(金欽純)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

느리고 백제로 향하였다. 그제야 의자왕은 깊은 밤의 연회를 파하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싸우고 지킬 방법을

의논하는데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 군사가 물에 익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반드시 피곤할 것

이니 뭍에 내리자마자 돌격하면 깨뜨리기 쉬울 것이고, 당의 군사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이 나서 싸우

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하였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의 군사는 멀리 와서 빨리 싸우는 것이 이로울 것이

므로 뭍에 내릴 때에는 장수와 군사들이 다 용감하게 싸울 것이니 험한 곳을 막아 지켜서 저네가 양식이 떨어

지고 군사가 해이해진 뒤에 싸우는 것이 옳고, 신라는 일찍이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여 우리를 두려워

하고 있으니 먼저 신라 군사를 쳐 깨뜨리고 다시 형편을 보아 당의 군사를 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여 의

론이 분분하였다. 의자왕이 전에는 평시나 전시나 물론하고 용단(勇斷)을 잘 내렸는데, 이때에 와서는 요망한

무당과 여러 소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의외로 흐리멍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홀연히 지모(智謀)로 이름있던

좌평,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古馬彌地 : 지금의 長興)에 귀양간 부여흥수(扶餘興首)를 생각하

고 사자를 보내서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 흥수는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는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것이니, 수륙의 정예를 뽑아서 당의 군사는 기벌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 두 적이 양식이 떨어지

고 군사가 피로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걸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니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서 “흥수가 오래 귀

양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항상 보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충이

남긴 상소의 찌꺼기를 주워서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의 군사는 기벌

포를 지나 들어오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게 한 다음에 힘써 공격하면 독 안에 든 자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면 두 적을 다 분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험한 데를 막고 적병과 대치하여 시일을

허비해서 군사의 용기를 줄게 합니까?”하였다. 왕은 그의 말이 옳다하여 다시 궁녀들로 하여금 술을 올리고 노

래를 부르게 하여 전쟁이 눈앞에 있음을 잊었다.

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ㆍ김품일(金品日) 등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黃登也郡 : 지

금의 論山ㆍ連山사이)에 이르니 의자왕이 장군 부여계백을 보내 신라 군사를 막게 했다. 계백은 출전에 임하여

“탄현의 천험(天險)을 지키지 않고 5천의 군사로 10배나 되는 적을 막으려 하니 내일의 일을 내가 알겠다.”탄

식하고 처자를 불러 “남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하고 칼을 빼어다 죽이고 군중에 나아가 군

사들을 모아놓고 “고구려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5천의 무리로 당의 군사 70만을 깨뜨렸으니, 우

리 5천의 군사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할 것인데 어찌 신라의 5만 군사를 두려워하겠는가?”하고는 군사를 몰

아 달려가 황등야군에 이르러 험한 곳에 웅거해서 세 진영에 나뉘에 사우니 김유신 등이 네 번 공격하였다가

네 번 다 패하여 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김유신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고 당의 군사와 약속한 7월 10일이

되어 다급해서 품일과 흠순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당의 군사가 홀로

싸우다가 패하면 신라의 수십 년 공들인 일이 헛일로 돌아갈 것이고, 당의 군사가 이기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하였다 하더라도 신라가 당의 업신여김에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품일과 흠순이 “오늘

열 갑절의 많은 군사로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 사람은 다시 낯을 들지 못할 것이오. 먼저 내 아들을 죽

여 남의 자제들을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을 벌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하고 흠순은 그의 아들 반굴(盤屈)

을, 품일은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1만의 화랑으

로 수천의 백제 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화랑은 망하고 또 신라도 망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화랑의 두목이

되어 화랑을 망치고 말겠느냐?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할 것인데, 위

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만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 너희

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하였다. 반굴이 “네.”하고 그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으로 돌격해 다 전사하였다.

관창은 나이 겨우 16살로 화랑 중에서도 가장 어린 소년이었는데, 반굴의 뒤를 이어 혼자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몇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혔다. 계백이 소년의 용감함을 사랑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갸륵하다.”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오늘 적진에 들어

가 적장을 베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하고, 물을 움켜 마셔 목마름을 풀고는 다시 말에 채찍질하

여 창을 들고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었다. 계백이 그를 쳐죽여 머리를 말꼬리에 매달아서 돌려보냈다. 품일

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기뻐서 뛰며 “내 아들의 면목이 산 사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

다.”라고 외치니 신라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용기가 났다. 이에 유신이 다시 총공격의 명령을 내려 수만 명

이 일제히 돌진하였다. 계백이 친히 북을 쳐 응전하매 두 나라 군사가 참으로 용감하였지마는 수효가 너무도

모자라니 어찌하랴. 한갓 성스럽고 깨끗한 희생으로 전장에서 쓰러져 백제 역사의 끝장을 장식하였다. 신라

군사는 개가를 부르며 백제의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당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백강(白江) 어귀 기벌포에 이르러 끝없는 진펄에 행군할 수가 없어서 풀과

나무를 베어다가 깔고 간신히 들어오는데, 백제의 왕은 임자의 말대로 독 안에서 자라를 잡으려고 그곳을 지

키지 않고, 수군은 백강(白江 : 지금의 白馬江)을 지키고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당의 군사는 이

미 진펄을 지났으므로 용기가 갑절하여 백제의 수군을 깨뜨리고 언덕으로 올라왔다. 의직은 군사를 호령하여

견적을 하다가 죽었다. 의직은 지략이 계백만은 못하지마는 용감하기는 비등하여 한때 당나라 군사들의 담을

서늘케 하였으므로 신라 사람이 의직의 죽은 곳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하였으니,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

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소정방이 백강에 이르자 비바

람이 크게 일어서 행군할 수가 없으므로 무당에게 물으니 강의 용이 백제를 수호하는 것이라 하므로 소정방이

흰 말을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잡았으므로, 강은 백마(白馬)라 이름하고 그곳을 조룡대라 한 것이다.”라고 하

였으나 백마강이란 이름이 이미 소정방이 오기 전에 있었으므로 성충의 유언한 상소에도 백강 어귀를 말하였

다.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고, 일본사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 일컬었는데 촌(村)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의 별역(別譯)이다. 그 이야기 자체가 허황할 뿐 아니라 또한 역사와도 모순되는 해상잡록에 보인 바와

같이 의직의 죽은 곳이라고 한 것이 옳을 것이다.

 義慈王이 잡히고 백제의 두 서울이 함락됨

김유신 등이 계백의 군사를 격파하고 기 이튿날인 11일에 백마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이 약속 기일이 지났다

고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목베려고 하였다. 유신은 당이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려는 것이 분하여

눈에서 불이 떨어지는 듯 어느덧 칼을 빼어들고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내버려두고 당과 싸우자고 외

치니, 당의 장수 중에 이것을 탐지한 자가 있어 소정방에게 말하여 마침내 김문영을 풀어주고 두 나라 군사가

합세하여 ‘솝울’(所夫里)을 공격하였다.

의자왕은 태자 외에 적자가 몇 있고 서자가 40여 명이 있어 왕이 평일에 그들에게 다 좌평(佐平)의 직함을

주어 나라의 큰일에 다 참모하고 심지어 실권도 행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략 세 파로 나뉘어졌다. 태자

효(孝) 등은 북경(北京) 곰나루성[熊津城]으로 가서 웅거하여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하였고, 둘째아들 태(泰)

는 솝울을 지켜 부자(父子)ㆍ군신(君臣)이 힘써 싸우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하였으며, 왕자 융(隆) 등은

고기와 술과 폐백을 적군에게 올려 물러가기를 빌자고 하였다. 사오십 명의 적자 서자들이 왕의 앞에서 제각

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떠들어대니 왕이 어느 의견을 좇아야 할지 몰라서 왕자의 말을 다 허락하여 융에

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태에게는 싸워 지킬 권한을 맡기고, 자기는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로 도망

하였다. 융이 소정방에게 글을 보내 퇴군하기를 요청하고 고기와 술을 보냈다가 다 거절당하니 둘째아들 태가

대왕의 자리에 올라 군사와 백성들을 동독하여 방어전을 펴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대왕과 태자께서

생존해 계신데 삼촌이 어찌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가? 만일 일이 평정되면 삼촌을 쫓던 자는 다 역적의 죄로

죽을 것이다.”하고 좌우를 거느리고 성에서 달아나니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고 군인들도 싸울 뜻이 없었다.

융은 또 화의를 성립시키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겨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니 신라와 당의 군사가 성 안으

로 올라갔다. 왕후와 왕의 희첩(姬妾)과 태자의 비빈(妃嬪)들은 모두 적병에게 욕보지 않으려고 대왕포(大王浦)

로 달아나 바위 위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 낙화암(落花巖)이란 바위 이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그 곧은 절개

를 전한다. 다른 여러 아들들은 혹은 자살하고 혹은 달아났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는데 수성대장(守城大將)이 곧 임자(任子)의 무리라 왕을 잡아 항복하

려고 하였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孝)와 소자 연(演)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의 진영으로 묶여갔다. 당의 장수 소정방은 거의 죽게 된 의자왕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

제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하고 장난거리를 삼고,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왕자 융을 마구 굴리며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부부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하고 앙갚음을 하였다.

신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치사하기 위하여 금돌성(今突城)에서 솝울로 달려갔다. 소정방은 일찍이 당의 고종으

로부터 백제를 토벌하면 기회를 보아 신라를 쳐 빼앗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었으므로 신라의 틈을 엿보고 있는

참이었다. 김유신이 이것을 알고 태종에게 아뢰어 어전회의를 열어 대항책을 강구하는데 김다미(金多美)가 말

했다. “우리 군사로 하여금 백제의 옷을 입고 당의 군영을 치면 당의 군사가 나와 싸우면서 우리 군영에 구원

을 청할 것이니 그때 불의에 습격하면 당의 군사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백제 전역을 수복

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 당에 항거하며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를 길러 때를 기다렸다가 동병

(動兵)하면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태종이 말했다. “이미 당의 은혜를 입어 적국을 토멸하였는데 또 당을 치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

김유신은 “개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무는 법입니다. 이제 당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의 꼬리를 밟을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를 깨려고 하니 어찌 그 은혜를 생각하겠습니까?”하고 당을 치기를 굳이 권하였으나 태

종은 끝내 듣지 아니하고 군중에 명하여 엄중히 대비만 하게 할 뿐이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경계함을 알고 음모를 중지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함창(咸昌 : 尙州) 당교(唐橋)에서

당의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는 설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실이 없는 말이라고 변명하였다.

백제는 수없이 전쟁을 한 나라이므로 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고 의리에 용감하나 유교를 수입한 이래로

는 일반 사회가 명분이라는 굴레에 목을 매여 성충과 흥수가 비록 외적을 평정할 만한 재주와 지략을 가졌으

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같이 폭군을 죽일 만한 기백이 없었고, 계백과 의직이 비록 자기 몬과 집안을 희생하

는 충렬(忠烈)을 가졌으나 연개소문과 같이 내부를 숙청할 수완이 없어서 마침내 망령된 의자왕을 처지하지 못

하여 임자 등 소인의 무리들로 하여금 수십년 동안 정치상의 중심을 잡고, 평시에는 나라의 재물을 자기네의

몸의 향락에 써서 탕진하고 난시에는 나라를 들어 적국에 투항하게 하였다. 중경(中京)과 상경(上京)이 다 왕자

의 투항으로 망하고, 그 밖에 삼경(三京)과 각 고을들도 또한 모두 반항없이 적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인민의 ‘다물(多勿)’ 운동(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은 의외로 격렬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나라를 판 뒤에 분

기하여 맨손으로 적병과 싸워 망국의 마지막길 역사를 혈우(血雨)로 끝맺었다.

만일 그들이 유교의 명분설(名分設)에 속지 않고 혁명의 기분을 가졌더라면 어찌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망치

도록 내버려두었으랴?

이제 다음 장에 백제의 다물운동(多勿運動)에 대하여 그 대강을 말하려 한다.

제 5장 백제 義兵의 봉기

 義慈王이 잡힌 뒤 각지의 의병

‘솝울’이 이미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잡혀 가니 고관과 귀인들은 거의 다 임자ㆍ충상(忠常) 등 나라를 팔

아먹은 무리들이므로 모두 유수(留守)하던 성과 고을을 들어 적에게 항복하였지마는 성충의 무리로 몰려 벼슬

에서 물러난 옛 신하들과 초야의 의사들이 망국의 화를 구원하고자 각지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같이 열렬

한 다물운동의 의사들은 신라 역사가들이 이를 패잔한 도둑이라 배척하여 그 사적을 지워버려서 그들의 이름

조차 묻혀버렸으니 얼마나 가석한 일인가?

이에 신라본기ㆍ김유신전ㆍ해상잡록ㆍ당서ㆍ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책을 참조하여 보면 당시 백제의 의병이

일어난 지방은 대략 세 군데인데 하나는 백제 남부의 동북 - 지금의 전라도 동북인 금산(錦山) 내지 진안(鎭

安) 등지요, 또 하나는 백제 서부의 서쪽 절반 - 지금의 충청도 서쪽 절반의 대흥(大興)ㆍ홍주(洪州 : 지금의 洪

城) 내지 임천(林川) 등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백제의 중부 -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燕岐) 등지이다. 이제 세 파

의 전말을 대강 말하려 백제 말년의 혈전사(血戰史)의 일부를 보이려 한다.

 中ㆍ南 두 지방 의병의 패망과 西部 의병의 堅守

서부 의병대장 부여복신(扶餘福信)은 무왕(武王)의 조카인데, 일찍이 고구려와 당에 사신 가서 외교계의 인재

로 이름났고, 서부은솔(西部恩率)이 되어 임존성(任存城)을 견고히 수리하고 성 안 창고에 양식을 비축해두는 외

에, 통주(筩柱)를 세워 그 속에 쌀가루를 감추어두어 훗날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는데, 마침내 임자의 참소를

만나 벼슬을 내놓으니 군사와 백성들이 다 목놓아 울어서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의 군사가 중경 솝울과 상경 곰나루를 함락시켜 왕이 잡혀가니 성 안의 군사들이 현재의 은솔을 내쫓고 복

신을 추대하여 은솔을 삼아서 항전하였는데, 전좌평 자진(自進 : 당서에는 道琛)은 주류성(周留城 : 김유신전의 豆

率城이니 지금 燕岐의 元師山?)을 전좌평 정무(正武)는 두시이(豆尸伊 : 지금의 茂朱 남쪽이니 신라의 伊山縣)를 습격

해서 웅거하여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를 다물(多勿)하려고 복신에게 사람을 보내서 힘을 합하기를 청하였다.

복신은 “이제 적의 대군이 우리의 두 서울과 각 요지를 빼앗아 웅거하고 우리의 물자와 기계들을 모두 몰수하

였는데, 우리가 초야에서 흩어진 군사와 양민을 소집하여 대나무 창과 몽둥이로 저네 화살과 칼을 가진 자를

나아가 공격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패할 것이니 우리 의병이 패망하면 백제의 운명은 끝장이오. 당이 10여 만

의 많은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왔으니 그 양식은 신라의 공급과 우리 국민에게서 약탈한 것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데, 신라는 여러 해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서 능히 오래도록 양식을 공급하지 못할 것이고, 민간의

약탈로는 많은 군사의 양식을 보충할 수 없을뿐더러 더욱 우리 백성들의 반감이 쌓여서 의병의 수를 증가시킬

뿐인데, 당의 군사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며칠이 안 가서 반드시 1,2만의 수비병을 두고 대부분은 철회하여

돌아갈 것이오. 우리가 이제 다만 험하고 요긴한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돌아간 뒤에 때를 타서 저네의

수비병을 격파하고 조종(祖宗)의 구업(舊業)을 회복해야 할 것인데 이제 싸워서 요행의 승리를 바라서야 되겠

소.”하였으나 정무 등이 듣지 않고 곰나루성 동남쪽의 진현성(眞峴城)을 쳐서 잡힌 의자왕 이하 대신들과 장졸

들을 빼앗으려다가 실패하고 정무는 두시성으로, 자진은 주류성으로 달아나 웅거하여 지켰다.

오래지 않아 당이 곰나루를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라 일컫고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은 당의 군사 1만 명으

로 신라 왕자 인태(人泰)는 신라 군사 7천 명으로 함께 지키게 하고 그 밖의 각 중요한 성에다가 다 두 나라

의 군사 얼마씩을 배치하였다. 각지의 의병들은 신라 태종이 토평할 책임을 맡고, 당의 소정방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9월 3일에 돌아갔다. 이에 자진이 복신과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성을 치자고 하니 복신이 말했다.

“우리 군사가 패망한 이제 한 번 큰 승리가 없으면 인심을 진작시킬 수 없는데, 곰나루성은 지세가 험하여 공

격해 떨어뜨리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차라리 정예한 군사를 뽑아 신라 군사의 돌아가는 길을 끊는 것이 좋겠

소.”하였으나 자진은 듣지 않고 곧 군사를 지휘하여 성의 동남쪽 진현성과 왕흥사의 영책(嶺柵)을 깨뜨려 많은

물자와 기계를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면에 네댓 군데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으니 일시에

의병과 형세가 크게 떨쳐서 남부의 20여 성이 다 호응하였으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ㆍ각간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여례성(黎禮城 : 지금의 茂朱 南界)을 공격하므로 진무(眞武)가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고,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 군사에게 습격당해 1천5백 명이 죽고, 왕흥사 영책의 의병도 7백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신라군사

가 임존성을 쳤는데, 복신의 방어가 면밀하여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뒤따르지 못하므로 11월 1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 扶餘福信의 연전연승

이듬해 2월에 부여복신이 강서(江西)의 흩어진 군사를 모아 강을 건너가서 진현성을 회복하니 당의 장수 웅

진도독 유인원이 정병 1천을 보냈다. 복신이 중로에서 불의에 습격하여 1천 명을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하니 유인원이 연방 신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여 신라 태종이 이찬(伊湌) 품일(品日)로 대당장군

(大幢將軍) 잡찬(雜簒) 문충(文忠)으로 상주장군(上州將軍)을, 아찬(阿湌) 의복(義服)으로 하주장군(下州將軍)을, 무훌

(武欻)ㆍ욱천(旭川) 등으로 남천주대감(南川州大監)을, 문품(文品)으로 서당장군(誓幢將軍)을, 의광(義光)으로 낭당

장군(郎幢將軍)을 삼아서 가 구원하게 하니 3월 5일에 그 선봉대가 두량윤성(豆良尹城 : 지금의 定山)에 이르러

진지를 살펴 보았다.

복신이 대오(隊伍)가 정연하지 못함을 보고 갑자기 나가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그 군계(軍械)를 빼앗아서몽둥이

에 대신하고 성으로 들어와 지켰다.

신라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를 36일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자만 많이 내고 돌아가

는지라 복신이 사방의 의병을 지휘하여 좌충우돌 수많은 장수와 군사를 베고 물자와 기계를 모두 빼앗고, 다

시 진격하여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구원병으로 보낸 김흠순(金欽純)의 군사와 싸워 크게 깨뜨리

니 흠순 등이 홀몸으로 달아나 신라의 군사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복신은 왕자 풍(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곰나루성을 포위하여 신라에서 양식 운반해오는 길을 끊으니,

복신의 명성이 천하에 떨쳐 백제의 여러 성과 고을이 모두 호응해서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복신

에게 귀부하였으며, 고구려의 남생(男生)은 구원병을 보내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쳐 멀리 복신을 응원하고, 일

본은 화살 10만 개를 바쳐 복신을 도왔다.

제 6장 고구려의 唐軍 격퇴와 백제 의병의 全盛

 연개소문 死後 고구려의 內政

고구려 말년의 역사는 전사(前史)가 모두 당서(唐書)의 거짓 기록을 가져다 수록하여 ①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연장시켰고, ② 연개소문이 요수(遼水) 서쪽에서 획득한 땅을 줄여 붙이고, ③ 연개소문의 생전과 사후의 고구

려와 당에 대한 관계 사실을 위조하여서 고구려의 멸망한 진상을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기원 657년에 죽었음은 제11편에서 말한 바이거니와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뒤를 이은 자도 그의 아들 남생(男生)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9살 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帛衣先人)의

한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선임으로 낭관(郎官)이 되어 중리대형(中裡大兄)ㆍ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의 요직

을 역임하고 24살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임하였다.”고 하였으니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그 직위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는 역사책의 기록이 분명하

지 않으나, 신ㆍ구당서의 고려전이나 정명진전(程名振傳)에는 당의 고종 영휘(永徽) 6년에 “정명진ㆍ소정방 등

이 고구려를 쳐 5월에 요수를 건너가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여 1천여명을 죽이고 사로잡

았다.”고 하였고,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는 당의 고종 현경(顯慶) 2년에 “유인궤가 정명진을 부장(副將)으

로 삼아 고구려를 귀단수에서 격파하여 3천 명을 베었다.”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에게 패

하여 돌아갈 때에 화살에 맞은 눈의 상처가 덧나서 죽었으니 그의 친아들인 고종과 그의 신하인 이적(李勣)ㆍ

소정방(蘇定方) 등의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으랴마는 마침내 여러 해 동안 군사를 한 명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연개소문의 위명을 두려워한 때문일 것인데, 이제 갑자기 귀단수의 싸움이 있음은 그럴

만한 기회를 엿본 것일 것이다. 그 기회가 무엇인가하면 현경 2년은 곧 기원 657년 연개소문이 죽은 해이니

연개소문이 죽은 기회를 탄 것이다.

그러면 신ㆍ구당서의 고려전과 정명진전에는 어찌하여 귀단수 싸움을 영휘 6년 곧 서기 655년, 연개소문이

죽기 3년 전의 일로 기록하였는가?

이는 대개 당시이 싸움의 동기가 당이 연개소문의 죽은 기회를 타려고 한 것인데, 이제 당의 사관이 연개소문

의 죽은 해를 연장해놓고 보니 그 싸움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네가 그 싸움의 동기 곧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師出有名)”는 구실을 만들고자 하여 신라 태종의 원년 곧 신라 사

자의 구원 요청이 있은 해이므로 지나간 해를 각 전기에 그대로 거짓 기록하여 싣고, 오직 유인궤전에만은 우

연히 검열을 잘못하여 싸움의 연조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당이 고구려에 처음으로 침입한 싸움이다. 그 승패의 상황은 전해지

지 않았으나 대개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산해관(山海關) 서쪽 땅 곧 당의 옛 땅을 당이 도로 차지하고 다시

나아가 여러 번 요수 동쪽을 침노하다가 패해 물러나서 그들은 당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이

기지 못할 줄을 알고 신라와 연합하여 양쪽에서 협공할 것을 애타게 바랐었다. 그런데 이때에 백제와 고구려

는 또한 함께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고 신라의 북쪽 경계에 자주 군사를 내어 공격하므로 신라 태조이 새로

즉위하자 그 태자 법민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고, 아울러 백제의 어진 신하 성충(成忠)이 이미 죽고 의

자왕이 교만하고 횡포하여 겉으로는 비록 강성한 듯하나 내용은 텅 비어 있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함께 공격

하면 이를 멸망시키기 쉬움을 설명하였다. 당의 임금과 신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13만 대

군을 내어 신라와 협력해서 백제를 토멸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사실은 이미 앞자에서 대강 말하였거니와 배제가 망할 때에 고구려의 남생이 백제에 대하여 구

원병을 내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의 군사가 이미 도아가고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

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의 군사를 내어 곰나루ㆍ솝울 등지로 나아가서 복신ㆍ자진 등과 연합하여 싸웠더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났을 것이요, 백제가 다시 일어나면 넉넉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의 군사에 대한 양식의 공급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고, 신라의 양식이 아니고는 고구려에 연개소문ㆍ양만춘 같은 영걸이 없더라도 당이 능히

평양까지 침입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침입하였다 하더라도 수(隋)의 양제(煬帝)처럼 패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의 멸망을 구원했어야 할 것인데 신라와 당 두 나라의

군사가 이미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야 소수의 군사를 보내어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積城)을 함락시키고는 돌아

가버렸고, 부여복신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 전군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겨우 수천명을 내어 북한산성의 남녀

합해서 겨우 2천7백여 명의 신라인이 있는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났으며 그 밖에는 백

제를 구원하는 움직임이 없었으니, 남생은 훗날 나라 망신 죄를 짓기 전에 나라를 그르친 죄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용렬한 사나이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은 연개소문은 또한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으랴?

 平壤의 唐軍과 熊津의 신라군의 패전

기원 662년 당이 임아상(任雅相)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소정방(蘇定方)ㆍ설인귀(薛仁貴)ㆍ방효태(龐孝泰) 등 여러

장수를 보내서 하남(河南)ㆍ하북(河北)ㆍ회남(淮南) 등 67주(州)의 군사를 징발하여 35길로 나누어 평양에 침입

하게 하고, 낭장(郎將) 유덕민(劉德敏)을 함자도(含資道) 총관(總管)에 임명하여 신라로 들어가서 신라 군사와 협

력하여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는 동시에 신라의 양식을 평양으로 운반해 보내개 하였다. 신라는 이때

태종(김춘추)의 상사(喪事)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왕 중종 문무왕(中宗 文武王 : 法敏)이 김유신ㆍ김인문ㆍ김양

도(金良圖) 등 아홉 장수로 하여금 전국의 군사를 총 동원하는 동시에 대거(大車) 20량을 만들어 쌀 4천 섬, 벼

2만 2천여 섬을 실어다 평양에 있는 당의 군사에게 보내려고 했다. 이때 백제의 의병이 태산(兌山 : 錦山)에 웅

거하여 복신과 호응하고 있었는데 당의 웅진도독 유인궤가 급히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내 고하기를 “만일 태산

의 백제 군사를 그대로 두어 세력이 공고해지면 양식 운반하는 길이 끊어져서 주둔해 있는 1만 7천의 두 나

라 군사가 다 굶어죽어 웅진이 다시 백제의 것이 되어 백제가 다시 회복될 것이요, 백제가 회복되면 더욱 고

구려를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니 먼저 태산성을 쳐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그래서 문무왕은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9월 15일에 태산성 아래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타이르고 부귀로 꾀이니 의병이 큰소리로 “성은

비록 작지마는 장졸이 다 의에 용감하여 싸우다가 죽은 백제의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여 산 신라 사람이 되

지 않겠다.”하고 외치고는 대항해 싸워 여드레 만에 성 안의 군사 수천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었다. 신

라 군사는 나아가 우술성(雨述城 : 지금의 懷德)을 포위하였다.

이 우술성은 복신이 신라 군량 운반의 길을 끊기 위하여 장수를 보내서 지키게 한 것인데 수십 일을 마주 버

티다 성 안의 달솔(達率) 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가 적과 내응하여 성 안의 의병 1천명이 다 전사하

고 성이 또한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웅진의 양식 운반하는 길이 열렸으나 평양의 당의 군사가 고구려 군사에게 크게 패해 패강도총관

(浿江道總管) 임아상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고, 옥저도총관(沃沮道總管) 방효태는 그 아들 13명과 함께 사수

(蛇水 : 지금의 普通江)에서 패전하여 군사가 전멸하고, 소정방 등의 군사는 한시성(韓始城 : 지금 평양 부근의 西

施村)에 웅거하여 있다가 양식이 떨어져 신라의 공급을 애타게 기다리며 연방 사자를 보내므로 신라의 김유신

이 군사를 두 군단으로 나누어 한 군단은 김유신이 인솔하여 평양으로 양식을 운반하고 한 군단은 김흠순이

인솔하여 웅진으로 양식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서는 모든 장수들이 다 두려워서 건너

가려 하지 않았다. 김유신이 “고구려가 망하지 않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나고 신라는 위태롭게 될것이니 우리

가 어찌 위험을 꺼리겠소.”하고 사잇길로 하여 강을 건너는데 고구려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보아 험한 산을 타

수십 일 만에 평양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양식을 전해주었다. 소정방의 군사가 배불리 먹고는 패전한 끝에 다

시 나아갈 수 없다 하여 바다를 따라 달아나 돌아갔다. 신라 군사는 머물러 싸우고자 하되 수효가 고구려 군

사에 대적할 수 없고 달아나 돌아가자 하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할 것이라 형세가 매우 난처하였다. 이에 유신

은 영을 내려 깃대를 그대로 꽂아두고 소와 말의 꼬리에는 북과 북채를 달아매어 서로 쳐서 소리가 나게하고,

장졸들만 가만히 빠져나와 돌아오는 날씨가 춥고 굶주려 사상자가 많이 나고 또 칠중하에 이르러서는 고구려

군에게 추격을 당하다가 요행히 벗어났다. 동시에 웅진에 양식을 나르던 신라 군사들은 돌아가는 길에 큰 눈

을 만난데다가 백제군사에게 포위되어 살아 돌아간 자가 백에 하나도 못 되었다. 부여복신이 다시 곰나루성에

이르러 성 부근 사면에다가 목책을 세워서 신라와 당의 군사의 교통을 차단하니 백제 전국이 다 호응하여 신

라ㆍ당 두 나라에서 임명한 새 관리들을 죽이고 백제의 관리를 내어 모두 부여복신의 지휘 아래 속하니 이때

는 백제의 다물운동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만하였다.

제 7장 扶餘福信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

 自進의 처형됨

부여복신이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킬 때에 어떤 사람이 복신에게 말했다. “남의 제재를 받으면 큰일을 실패하

기 쉽습니다. 공은 무왕의 조카요 명망이 안팎에 떨치니 스스로 서서 왕이 되어 전국의 군사를 지휘하시는 것

이 옳습니다.”

그러나 복신은 “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私)를 백성에게 보이는 것이니 의가 아니오.”하고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맞아 왕을 삼고, 또 자진(自進)이 의병을 앞장서 주창한 공이 있고, 일찍이 좌평의 벼슬을 지낸 대신

이라 하여 영군대장군(領軍大將軍)이 되게 하고, 복신 자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 되어 강서(江西)의 군사를 전

관(專管)하였는데 복신이 신라ㆍ당 두 나라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곰나루성을 포위 공격하니 당의 장수 유

인궤가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하고, 또 소정방 등이 평양에서 패하여 달아나니 저들이 크게 낭패하여 당의 고종

은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웅진의 외로운 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전군이 곧 바닷길로 돌아오라고 하여 유인궤

등이 도망하여 돌아가려고 하였다.

복신이 이것을 알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당군의 돌아가는 길일 공격해서 유인궤를 사로잡으려 했는데, 자진은

본래부터 항상 복신의 재주와 명망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다가 이 일을 듣고는 더욱 복신이 큰 공을 이룰

까 하여 드디어 유인궤에게 복신의 계책을 밀고하고, 또 인궤에게 “당의 황제가 만일 백제가 한 나라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백제가 길일 당의 은혜를 감사하여 당을 높이 섬길 것이요, 복신 등을 잡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여 인궤는 도망해 돌아갈 생각을 중지하고 자진과 서로 연락이 잦았다. 그러다가 복신의 부장 사수원

(沙首原)이 그 밀모의 증거를 잡아 복신에게 알리니 복신이 크게 노하여 연회를 베푼다고 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이게 하여 그 자리에서 자진을 잡아 그 죄를 선포하고 풍왕에게 고하여 처형하려고 하였다.

왕은 자진이 비록 죄가 있으나 대신이니 극형에 처함이 옳지 않다고 형을 감해주려고 하였으나, 복신은 나라

를 배반한 자는 살려둘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자진을 참형에 처하였다.

 扶餘福信의 피살

풍왕은 복신에게 옹립되어 왕이 되었으나 항상 병권이 여러 장수들의 손에 있음을 의심하고 꺼리어 왔는데

복신이 자진을 처형하여 전국의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가니 왕의 좌우가 복신을 참소하여 “복신이 전횡(專橫)하

여 제멋대로 대신을 죽이니 그의 안중에 어찌 대왕이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복신을 죽이지 아니하시면

복신이 장차 대왕을 해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왕은 복신을 죽이기로 비밀히 모의하고, 그 해 2월에 복신

이 마침 병이 나 굴방에서 치료하고 있는 기회를 타서 왕이 문병한다 핑계하고 좌우의 신임하는 신하들을 거

느리고 가서 갑자기 달려들어 복신을 결박하고 왕명으로 좌평 이하 각 대신을 불러 복신의 손바닥을 뚫어 가

죽끈으로 꿰고 죄를 논하는데, 풍왕도 복신이 죽으면 적병을 막을 사람이 없을 줄은 환히 아는 터이라 마음속

으로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복신의 죄가 죽이는 것이 옳으냐?”하고 물었다. 달솔 득집(得執)이 “이런 악

독한 반역자는 죽여도 죄가 남습니다.”라고 하였다. 복신이 득집을 향해 침을 뱉고 “이 개 같은 놈아…….”하

고 마침내 회자수의 칼에 목이 떨어지니 백제 백성들이 복신의 죽음을 듣고 모두 눈물을 뿌렸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용삭(龍朔) 2년(기원 662년) 7월에 유인궤……유인원 등이 유수(留守)하던 진(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신의 남은 무리를 웅진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여 그 지라성(支羅城)ㆍ윤성(尹城)과 대산(大山)ㆍ사정

(沙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다……이때 복신이 병권을 도맡아서 부여풍(扶餘豊)과 서로 차차 시기하다가 복신

이 병이라 일컫고 굴방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습격해서 죽이려고 하였는데, 풍이 이것을 알고

신임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엄습해 죽였다.(龍朔 二年 七月 仁軌ㆍ仁願等 率留鎭之兵 大破福信餘衆於

熊津之東 拔其支羅城及尹城ㆍ大山ㆍ沙井等柵……時 福信旣專其兵權 與扶餘豊 漸相猜貳 福信稱病 臥於窟室 將候扶餘豊問疾

謀襲殺之 扶餘豊覺而率其親信 掩殺福信)”고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천지(天智) 2년(기원 663년) 6월에 백

제왕 풍장(豊璋)이 복신의 모반할 마음을 의심하여 가죽끈으로 손바닥을 꿰어 결박하고……달솔 득집이 이런

악독한 반역자는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목베어 소금에 절였다. 8월 갑오(甲午)에 신라는 바로 침입

하여 유주(柔州) 취하기를 도모하였다.(天智 二年 六月 百濟王豊璋 嫌福信有謀反心 以革穿掌而縛……達率得執曰 此惡逆

人 不合放拾 斬而醢首 八月 甲午 新羅 謀直入國 先取柔州)”고 하여 두 책의 연조와 사실이 서로 다르다. 복신이 죽

은 해는 신라 본기에 의하면 일본서기와 맞을 뿐 아니라 그 사실로 말하더라도 복신이 이미 대군을 장악하였

으니 병권이 없는 풍왕을 죽이려면 당장에 죽일 수도 있겠는데 어찌 굴실에 누워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죽

이려고 하였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첫째 의심스러운 점이요, 신라나당이 복신에게 여러 번 패하여 1만 7천의

외로운 군사로 위태로운 성을 겨우 지키고 있었는데 어찌 아무런 형세의 변동이 없이 갑자기 나와 싸워서 지

라성(支羅城) 곧 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燕岐)과 윤성(尹城 : 지금의 定山), 대산(大山 : 지금의 韓山), 사정(沙井 : 지

금의 溫陽) 등 각지를 평정하였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둘째 의심스러운 점이요, 의병이 여러 번 승전하여 백제

전역이 거의 회복되었으므로 풍왕이 복신을 죽여 군권(君權)을 확장하려고 한 것일 것이니 어찌 각 처의 성책

이 거의 다 함락된 뒤에 장차 망하려는 권리를 찾으려고 복신을 해쳤을 것인가? 이것이 당서의 셋째 의심스

러운 점이다. 그러므로 당서를 버리고 일본서기를 쫓는 동시에 해상잡록의 전설을 취하여 백제 최후의 위인의

사적의 모자람을 보충한다.

 福信이 죽은 뒤 豊王이 망함

유인궤가 곰나루성에서 포위되었으나 신라와 당이 다 복신을 두려워하여 나아가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복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당의 고종은 장군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2만 7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의자왕의 아

들로서 당에 포로가 되어 있던 왕자 융(隆)을 백제왕이라 일컬어 데리고 가게 하여 바닷길로 와서 덕물포(德勿

浦)에 상륙하여 비밀히 사자를 보내 “풍왕은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아서 자기를 옹립하고 또 큰 공이 있는 부

여복신을 죽였거니 하물며 다른 장수들이야 오죽하리오. 당은 원래 백제의 땅을 가지려 함이 아니오 오직 백

제가 고구려와 한편 되는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친 것이거니와 이제 융은 백제 선왕의 사랑하는 아

들로서 능히 대세를 알고 또 황제(당)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으로 호위하여 귀국하

게 하였으니, 백제의 총명한 장수와 군사들은 나의 말을 믿고 융을 왕으로 받들면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이 고

국을 회복하고 편안히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마는 만일 대군에게 완강히 항거하다가는 나도 공들을 용서

하지 않을 것이오. 공들은 잔인한 풍을 임금으로 받들었다가 패하면 대군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요, 승리하면

풍의 시기를 받아 복신처럼 참혹하게 죽을 것이니 이 어찌 지혜로운 자의 취할 일이리오?”하는 조서를 전하

여 풍왕의 여러 장수들을 꾀었다.

남부달솔(南部達率)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진현성주(眞峴城主) 사타상여(沙吒相如)가 풍이 복신을 죽인 것을 원망

하다가 마침내 그 관내 2백여 성을 들어 융에게 투항하고 흑치상지는 다시 서부달솔 지수신(遲受信)에게 글을

보내서 풍왕이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시킬 영주(英主)가 아님을 말하고, 이어 같이 항복하여 함께 일을 하자고

권하였다. 지수신은 “우리들이 상좌평(上佐平 : 복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하다가 불행

히도 중도에 간신에게 모해당했으니 이 어찌 우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니겠소마는 상좌평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래 당적(唐賊)을 내쫓으려 함이었는데 어찌 상좌평의 죽음을 아파하여 그 복수를 위해 당에 투항을 한단 말이

오? 그것은 상좌평을 배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곧 백제를 배반하는 것이니 상좌평의 영혼이 있다면 그 마음아

픔이 손바닥 꿰뚫리던 혹독한 형벌의 아픔보다 더할 것이오. 나는 공이 번연히 후회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

오.”하였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대답을 주지 않고 8월에 신라ㆍ당 두 나라 군사의 앞잡이가 되어 부하 5만 명

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가 두 나라로 나뉘어 지수신이 관할하는 서부는 풍왕에게 속하여

서백제(西百濟)가 되고, 흑치상지가 관할하는 남부는 융에게 속하여 남백제(南百濟)가 되었다. 서백제는 당을 대

적하여 싸우는데 남백제는 당의 노예가 되어 그 지휘를 받아 서백제를 치니 아, 백제중흥의 대업을 이같이 창

피하게 만든 자는 곧 부여풍 -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니, 부여풍은 곧 중흥하는 백제를 멸망시킨

첫째가는 죄인이다. 풍이 비록 죄인이지마는 풍이 약하다고 하여 백제를 배반하고 당의 노예가 된 흑치상지도

곧 백제를 멸망시킨 둘째가는 죄인이다. 전사(前史)에는 오직 당서의 포폄(褒貶)에 따라 흑치상지를 몹시 찬미

하였으니 이 어찌 어리석은 아이의 붓장난이 아니냐?

풍이 복신을 죽이고는 적병을 막을 만한 방략을 없으므로 곧 고구려와 왜(倭)에 사자를 보내서 구원병을 청

하였는데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염려하여 군사를 내지 못하였고 왜는 병선 4백 척을 보내서 원조하였다. 왜병

은 백마강 가운데 있고 서백제의 군사는 강 언덕에 진을 쳐 남백제ㆍ신라ㆍ당 세 나라의 군사와 대적하는데,

신라의 병선이 강의 상류로부터 왜의 병선을 무찔러 불질러서 죄다 태워버리니 왜병으 패하여 무너져서 다 물

에 빠져 죽고 언덕 위 서백제의 군사는 남백제와 당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이에 세 나라의 군사가 총집결하여

주류성을 치니 풍은 드디어 달아나고 장수와 군사들은 다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