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국학(國學) 자료

발해고(渤海考) - 유득공

양해천 2018. 1. 29. 16:49

발해고-유득공.pdf


渤 海 考

渤 海 考 序

余嘗西踰鴨綠道 陽 至遼陽 其間五六百里 大抵皆大山深谷 出狼子山 始見平原無際 混混茫茫

내가 일찍이 '압록도'을 지나 '애양'에 가 '요양'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가 오육백리였다.

대개 큰산과 깊은 계곡인데 '낭자산'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으로 평평한 들판을 보니, 사이

가 없이, 넓기만 하였다.

日月飛鳥升沈于野氣之中 而回視東北 諸山環天塞地 若畵一 向所稱大山深谷 皆遼東千里之外

障也.

해마다 새가 날아 들판의 기운 가운데에 오르내려, 동북쪽을 돌아 보니, 여러 산들이 하늘

을 둘러싸고 땅의 경계가 되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이를 대산심곡이라 일컷더니, 모두

'요동'천리의 바깥인 것이다.

乃 然而歎曰 此天限也 夫遼東天下之一隅也 然而英雄帝王之興 莫盛於此 盖其地接燕齊 易

中國之勢 故渤海大氏 以區區散亡之餘 劃山外而棄之 猶足以雄視一方 抗衝天下 高麗王氏統合

三韓 終其世不敢出鴨綠一步 則山川割據得失之跡 槪可以見矣.

이에 한숨을 쉬며 노래하며 말하길, '이 하늘이 끝이구나, 요동은 천하의 한 구석인데, 그

러하여 영웅, 제왕이 일어나, 성한곳이 이곳이다. 그 땅은 '연'과 '제'에 접하고, 중국의

기세에 쉽게 바뀌니, 옛날 발해 대씨가 거처했으나, 망하여 흩어져 버렸고, 산 밖으로 나눈

것을 버려두었으나, 지금도 자취에 천하를 찌르던 웅장함을 어떤 방향에서도 볼 수 있다.

'고려왕씨'가 삼한을 통합하니, 마침내 '압록'에도 한 발도 나오지 못하니, 산천에서 할거

하고 얻고 잃음의 자취를 가히 볼수 있다.

夫婦人之見 不逾屋脊 孩提之遊 僅及門 則固不足語垣墻之外矣 士生新羅九州之內 錮其目而

廢其耳 且不知漢唐宋明興亡戰亡之事 而 於渤海之故哉

부인의 좁은 소견은 집안을 넘지 못하고, 아이의 놀이터는 문지방에 겨우 미치니, 곧 담장

바깥에는 미치치 않는 것이다. 선비가 신라의 구주안에서 태어나, 눈을 감고, 귀를 막으

니,'한당송명'이 흥하고 망하고, 전쟁하고 망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발해의 옛일에 비유한

것이다.

吾友柳君惠風 博學工詩 於掌故 旣撰二十一都詩註 以詳域內之觀 又推之爲渤海考一卷 人物

郡縣世次沿革 組縷纖悉 錯綜可喜 而其言也 歎王氏之不能復句驪舊疆也

내 친구 '유군혜풍'이 학문이 넓고, 시를 짓는데, 익숙함이 손바닥 다루는 것과 같았다. 이

미 자세히 국토를 돌아보면서 '이십일도시주'를 짓고, 또한 '발해고' 일권을 옮기니, 사람

과 물건 군현의 세차를 가죽이나 명주 비단을 모아 다 섞은 것으로 가히 기쁘다. 이말로 왕

씨가 능히 구려의 옛 강역을 회복하지 못함을 읋은 것이다.

王氏之不復舊疆 而鷄林樂浪之墟 遂貿貿焉自絶於天下矣 吾於是有以知前見之相符 而歎柳君之

才能審天下之勢 王覇之略 又豈特備一國之文獻 與胡恢馬令之書 契其長短而已哉 故序而論之

如此

왕씨의 옛 강역을 회복 못함은 계림과 낙랑의 탄신이다. 눈이 어두워져, 스스로 천하와 끊

어지게 되었다. 내가 미리 상부를 보고 알음이 있으니, 유득공의 재능이, 천하의 세력과 왕

의 다스림을 읋은 것이다. 또한 특히 한나라의 문장을 준비하여 바치니, 호회마령(??)의 책

과 더불어 그 길고짦음이 이루어지니, 고로 서로써 논함이 이와 같다.

上之九年秋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 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 曰百濟 朴昔金氏

居于東南 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是矣 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

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고려는 발해사를 이루지 않았는데, 고려가 이를 알면서도 떨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고씨

가 북쪽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에 거하여 백제라 하고, 박석김씨가 동남

에 거하여 신라라 하니.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는 것이니, 고려가 이를 이루

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에 있고, 대씨가 그 북쪽에 있으니 발

해라 한다. 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아직 이를

이루지 않았다.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

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當是時爲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 있던 곳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땅이다. 동쪽에

도 나타나고, 서쪽에도 나타나고, 북쪽에도 나타나니, 큰 귀와 같은 형상이다. 김씨가 망하

고 대씨가 망하여, 왕씨가 이를 통합하니,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에 김씨의 땅은 온전하

나, 북쪽의 대씨의 땅은 온전하지 않으니, 혹 여진족이 들어오고, 혹 거란족이 들어오니,

마땅히 이때에 고려가 꾀하여, 발해사를 급히 이루었어야 한다.

執而責諸女眞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 執

而責諸契丹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鴨綠以西可有也 竟

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鴨綠以西 不知爲誰氏之地 欲責女眞 而無其辭 欲責契丹 而無其辭 高麗

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잡힌 여진이 꾸짓어 말하길, 어찌 발해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고구려의

땅이니 장차 군대로써 거두어야 한다. 토문의 북쪽이다. 잡힌 거란이 꾸짓어 말하길, 어찌

발해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고구려의 땅이니 장차 군대로써 거두어야 한

다. 압록의 서쪽이다. 끝내 발해사를 닦지 않으니, 토문의 북쪽과 압록의 서쪽이 누구의 땅

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여진을 책하고자 하나 그 논리가 없고, 거란을 책하고자 하나 그

논리가 없다. 고려가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함에 있으니, 가히 승리할

수 있었음을 노래한 것이다.

或曰 渤海爲遼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 此有不然者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而問於世子 則其世可知也 問於

隱繼宗 則其禮可知也 問於十餘萬人 則無不可知也

혹 발해가 '요'에서 멸망하였는데, 고려가 어찌 그 역사를 닦지 않는가? 이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발해는 중국을 본받아 받드시 사관을 세웠다. 홀한성이 깨졌을 때 세자가 고

려로 십여만명과 함께 아래로 도망왔는데, 관리가 없어도 반드시 그 책은 가지고 있었다.

관리가 없으니 그 책도 없는 것이다 하여 세자에게 물으니 세자는 가히 앎이 있었고, 숨은

왕족에게 물으니 예도 역시 앎이 있고, 십여만명에게 물으니 가히 알지 못한 사람이 없었

다.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鳴呼文獻散亡 幾百年之後 雖

欲修之 不可得矣 余以內閣屬官 頗讀秘書 撰次渤海事 爲君臣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

考 不曰世家傳志 而曰考者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 甲辰閏三月二十五日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다. 오히려 발해국을 기록하여, 고려사람은 홀로 발해의 역사를 닦

지 못하게 하니 울면서 문서를 받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 백년후에 비록 이를 닦고자 하

나 가히 얻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각의 관리의 벼슬에 있으면서, 비서를 조금 읽어, 발해

의 일을 짓게 되었는데, '군', '신', '지리', '직관', '의장', '물산', '국어', '국서',

'속국'의 아홉 고이다. '세'와 '가'를 '전'과 '지'로 말하지 않고, '고'라고 말한 것은

'사'를 이루지 못함이요, 또한 스스로 사관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니, 갑진 윤삼월 이

십오일 이다.

目 錄

君考

臣考

地理考

職官考

儀章考

物産考

國書考

國語考

屬國考

引 用 書 目

舊唐書 劉煦 新唐書 宋祁

五代史 歐陽修 宋史 脫脫

遼史 脫脫 資治通鑑 司馬光

三國史金富軾 高麗史 鄭麟趾

東國通鑑 徐居正 續日本紀 管野朝臣眞道

日本逸史 通典 杜佑

通志 鄭樵 文獻通考 馬端臨

文獻備考 大明一統志

淸一統志 盛京通志

萬姓統譜 凌迪知 永順太氏族譜

輿地勝覽 全唐詩

발해(渤海)의 제황(諸皇)

1대 세조(世祖)

1년(7865-AD668)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혹은 대중상(大仲象)이다. 고구려가 당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大仲象)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동모산(東모山)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29년(7893-AD696)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營州 - 조양시)도독을 죽이고 당(唐)에 반란을 일으

켰다.

31년 이보다 앞서 이진충이 당의 북경을 함락시키는데 왕이 태자 조영을 보내 계성(계城 -天津市)를 점

령하였다.

32년 5월 왕이 승하하자,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진국열황제(辰國烈皇帝)라 하였

다.

2대 태조(太祖)

1년(7896-AD699) 이름은 조영(祚榮)이며 성은 대(大)씨로 세조의 태자이다. 당이 돌궐(突厥)과 함께 침

략하여 이진충을 죽이고 또한 이진충을 도왔다하여 거란 장수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말갈의 걸사비

우 (乞四比羽) 죽이고, 대조영(大祚榮)을 추격하니, 천문령(天門嶺)에서 말갈과 합친 대조영에게 패하고

돌아갔다. 이에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

(天統)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15(?)년(7910-AD713) 국호를 발해(渤海)로 변경하였다.

17년(7912-AD715) 돌궐국의 조양성주인 고구려왕자 고임무(高任武)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21년 봄 대안전(大安殿)에서 왕이 승하하시니, 묘호를 태조(太祖)라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 (聖武高皇

帝)라 하였다.

3대 광종(光宗)

1년(7916-AD719) 이름은 무예(武藝)로 태조의 태자이다. 연원을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오주목(烏珠牧)으로 경계를 정하니 동쪽 십리는 황수(潢水)에 임하였다.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

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8년(7923-AD726) 흑수부(黑水府)를 정벌하였다.

14년(7929-AD732)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래(登萊)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해설) 이에 당나라 왕 융기(隆基)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15년(7930-AD733) 수비장수 연충린(淵忠麟)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帶山)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

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

郡) 에 이르자,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 케하였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河西)의 니하(泥河)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

다. 해주(海州) 암연현(岩淵縣)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17년(7932-AD735)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19년 송막(松莫)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으니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여 그 둘레의

너비가 9,000리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

(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20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라 했다.

4대 세종(世宗)

1년(7935-AD738) 이름은 흠무로 광종의 태자이다.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다.

2년 태학(太學)을 세우고 천경신고(天經神誥)를 가르치며 환단고사(桓檀古史)를 강하고, 또 문사들에게

명하여 국사(國史) 25권을 편찬케 하였다.

17년(7951-AD754) 구국(舊國)으로부터 300리 되는 홀한하(忽汗河) 동편의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37(?)년(7971-AD774) 수도를 동경(東京)으로 옮기고, 연호를 보력(寶力)으로 개원하였다.

40년(7974-AD777) 2째딸 정혜공주가 죽자 돈화(敦化)의 육정산(六頂山)에 장사하였다.

45년(7979-AD782) 치청절도사(淄靑節度史)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帝)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나 왕이라 칭하고

산동 15주를 차지하였다. 납(納), 사고(師古), 사도(師道)가 이어 4대를 전하였다.

55(?)년(7989-AD785~792) 도읍을 동경성(東京城)으로 옮기고 연호를 대흥보력(大興寶力)으로 개원하

였다.

55년 4째딸 정효공주가 죽자 화룡현에 장사하였다.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世宗)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라 하였다.

5대 대원의(大元義)

1년(7991-AD794) 황제의 아들 굉림(宏臨)이 일찍 죽어 족제(族弟) 원의(元義)가 즉위하였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6대 인종(仁宗)

1년(7991-AD794) 원의가 어질지 못하자 국인이 이를 폐하고 굉림의 아들 화여(華璵)를 맞아 즉위시켰

다. 연호를 중흥(中興)이라 하고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2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인종(仁宗) 시호를 성황제(成皇帝)라 하였다.

7대 목종(穆宗)

1년(7992-AD795) 이름은 숭린(崇璘)이며 인종의 황숙(皇叔)이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하였다.

15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를 강황제(康皇帝)라 하였다.

8대 의종(毅宗)

1년(8006-AD809) 이름은 원유(元瑜)이다. 연호를 영덕(永德)이라 하였다.

4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의종(毅宗) 시호를 정황제(定皇帝)라 하였다.

9대 강종(康宗)

1년(8009-AD812) 이름은 언의(言義)이다. 연호를 주작(朱雀)이라 하였다.

6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강종(康宗) 시호를 희황제(僖皇帝)라 하였다.

10대 철종(哲宗)

1년(8014-AD817) 이름은 명충(明忠)이다. 연호를 태시(太始)라 하였다.

2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철종(哲宗) 시호를 간황제(簡皇帝)라 하였다.

11대 성종(聖宗)

1년(8015-AD818) 이름은 인수(人秀)이다.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이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

여 임진강에 이르르고, 서쪽으로 당나라를 쳐서 조선, 해북(海北;大凌河) 등을 다시 수복하였다.(해설)

이러한 공적에 의하여 발해 왕으로서 추대되니 서울을 다시 상경(上京)으로 옮기고, 연호를 건흥(建興)

이라 하였다.

15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성종(聖宗) 시호를 선황제(宣皇帝)라 하였다.

12대 장종(莊宗)

1년(8029-AD832) 이름은 이진이다. 서울을 홀한주로 옮겼다. 연호를 함화(咸和)라 하였다.

3년 당의 사신 장건장이 왔다.

2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장종(莊宗) 시호를 화황제(和皇帝)라 하였다.

13대 순종(順宗)

1년(8055-AD858) 이름은 건황(虔晃)이다. 연호를 대정(大定)이라 하였다.

15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순종(順宗) 시호를 안황제(安皇帝)라 하였다.

14대 명종(明宗)

1년(8069-AD872) 이름은 현석(玄錫)이다. 연호를 천복(天福)이라 하였다.

21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명종(明宗), 시호를 경황제(景皇帝)라 하였다.

15대 애제(哀帝)

1년(8098-AD901) 이름은 인선이다. 연호를 청태(淸泰)라 하였다.

?년 요(遼)나라가 침략하여 수도를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26년(8123-AD926) 봄 정월 야율배(耶律倍)가 동생 요골(撓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忽汗城)을 포

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大震國)은 망했다.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정안국이라 했다.

개보(開寶) 3년, 왕 열만화(烈萬華)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烏玄明)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단공(8185~8186 -

988~989)으로부터 순화(8187~8191 - 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병오 요(遼)의 태조가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장자 배(倍)를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았다. 왕은 감로(甘

露)라고 개원하고 홀한성(忽汗城)을 천복성(天福城)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

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태조가 죽자 인황왕의 동생이 왕에 오르자 인황왕은 송으로 망명하니 후에 암살을 당하였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니 동단국도 사라졌다.

君 考

震國公

震國公姓大氏 名乞乞仲像 粟末靺鞨人也 粟末靺鞨者 臣於高句麗者也 或言大氏 出自大庭氏 東

夷之有大氏自大連始也

진국공은 성은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으로 속말말갈사람이다. 속말말갈인자로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혹 말하길 대씨는 대정씨에서 나왔는데, 동이족의 대씨는 대련을 시조로 한

다고 했다.

唐高宗總章元年 高句麗滅 仲象與子祚榮 率家屬徙居營州 稱舍利 舍利者 契丹語帳官也 武后萬

歲通天二年 契丹松漠都督李盡忠 歸誠州刺史孫萬榮 叛唐陷營州 殺都督趙文 仲象懼 與靺鞨

酋乞四比羽及高句麗破部 東走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 阻奧婁河 樹壁自固 武后封仲象爲震國公

比羽爲許國公 比羽不受命 武后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 中郞將索仇 擊斬比羽 是時仲象已卒

당고종 총장 원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중상과 아들 조영이 함께, 가솔을 이끌고 영주에 거처

를 옮기었다. 사리라 칭하였는데, 사리라는 것은 거란말로 장관이라는 것이다. 무후만세통

천이년에 거란송막도독 이진충, 성주자사손만영이 돌아와 당에 반란하자 영주가 무너졌다.

도독 조문홰를 죽이자 중상이 두려워하여,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깨진 부와 함께

동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에서 보존하였다. 오루하가 험하고, 나무의 벽이

되어 견고했다. 무후가 중상을 진국공에 봉하고 비우를 허국공에 봉하였다. 비우가 명을 받

들지 않자, 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로 비우를 베니 이때 중상도 죽었다.

高 王

高王諱祚榮 震國公子也 嘗爲高句麗將 驍勇善騎射 及震國公卒 乞四比羽敗死 祚榮遁 李楷固窮

度天門嶺 祚榮引高句麗靺鞨兵大破之 楷固僅以身免 祚榮卽幷比羽之衆 據相婁之東牟山 靺鞨

及高句麗舊人悉歸之 遂遣使交突厥 略有扶餘沃沮朝鮮弁韓海北十餘國 東窮海西契丹 南接新羅

以泥河爲界 地方五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 學習書契 俗與高句麗契丹略同 聖歷中國號震 新唐

書作振 文獻備考曰震朝 自立爲震國王 築忽汗城以居 直營州東二千里 時奚契丹皆叛唐 道路阻

絶 武后不能致討焉 中宗卽位 遣侍御史張行? 慰撫之 王亦遣子入侍 玄宗先天二年 遣郎將崔緖

冊王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 以所統爲忽汗州 領忽汗州都督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自是以後 世

朝獻唐 餘幽州節度府相聘問 屯勁兵於扶餘府 以備契丹 玄宗開元七年王薨 三月丙辰赴唐

고왕의 이름은 조영이다. 진국공의 아들로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로 날래고, 용감하며 말타

고, 궁술에 능하였다. 진국공이 죽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조영이 달아났다. 이해고가

끝까지 쫓아와 천문령을 넘자,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사를 이끌고 이를 크게 깨뜨렸다. 해

고는 겨우 몸만 살았다. 조영이 곧 비우의 무리를 아우르고 읍루의 동모산에 의거하여 일어

나자 말갈과 고구려의 옛 백성들이 모두 돌아왔다. 사신을 돌궐로 파견하여, 사귀었다. 부

여, 옥저, 조선, 변한등 바다 북쪽 십여국을 다스렸는데, 동으로 바다에 닿고, 서로는 거

란, 남으로는 신라에 접하여 니하를 경계로 삼았다. 사방 오천리이고 호수는 십여만호이고

병사는 수만으로, 책을보고 익히고 공부하였다.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한가지이다. 중국

에서 진(震)이라 하는데, 신당서에는 진(振)이고 하였다. 문헌을 갖추어 곰곰히 생각해보

니, 진(震)이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하고 홀한성을 쌓고 거하였는데,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

천리이다. 이때에 거란이 모두 당을 배반하여 도로가 끊어지고, 험하여 무후가 능히 정벌하

지 못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시어사 장행급을 파견하여 이에 위로 하였다. 왕 역시 아들

입시를 파견하였다. 현종 선천 이년 낭장 최흔을 파견하여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을 책봉하

고 홀한주로 하니, 홀한주도독이 처음 말갈이라 부르고 떠났던 곳이니, 오로지 발해라 칭하

였다. 그 후에 당에 조헌하고 유주 절도부를 찾아가 아뢰어 부여부의 날랜 병사로 거란에

대비한다 하였다. 현종 개원 칠년 왕이 죽자, 3월 병진년에 당에 알렸다.

武 王

武王諱武藝 高王子也 初封桂婁郡王 開元七年六月丁卯 唐以左監門率吳思謙攝鴻 卿 充使吊祭

冊王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王遂改元仁安 開斥土宇 因其俗不立館驛 處處置村落 以

靺鞨爲民 大村置都督 次曰制史 其下曰首領 東北諸夷皆畏而臣之 開元十年 黑水靺鞨使者入朝

唐玄宗以其地建黑水州 置長史 臨總王召群臣謀曰 黑水始假道於我 與唐通 異時請吐屯於突厥

皆先告我 與我使偕行 今請唐官不吾告 是必與唐謀 腹背攻我也 乃遣弟門藝及舅雅雅相 發兵擊

黑水 門藝諫不從 奔唐 由是貳於唐 開元二十年 遣大將張文休 率海賊越海攻登州 殺刺史韋俊

謂之雪先王之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이다. 처음 계루군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개원 칠년 유월

정유에 당이 좌감문 오사겸과 섭홍려향을 이끌고 조례하고 왕을 좌효위대장군홀한서도독발

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개원하여 인안이라 하고, 땅과 집을 개척하였다. 풍속에 관역

을 세우지 않아, 촌락에 거하였다. 말갈을 백성으로 삼고, 큰 촌은 도독을 두고, 다음은 제

사, 그 아래에 수령을 두었다.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이를 신하로 삼았

다. 개원 십년, 흑수말갈사자가 입조하였다. 당현종이 그 땅에 흑수주를 세우고 장사를 두

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의논하여 말하길, 흑수가 처음 길을 빌려 당과 통

하고, 이 때에 돌궐이 군사를 내니 모두 먼저 나에게 고하니 나와 함께하여 갔다. 이제는

당에게 청하고 나에게는 알지지 않으니 이것은 필시 당과 모반하려 하여, 앞뒤로 나를 공격

하려 함이다. 이에 동생 문예와 구아아상을 보내어 병사로 흑수를 공격하였다. 문예가 간하

여 쫓지 않으니, 당으로 달아났다. 이는 당이 두마음을 품은 것이다. 개원 이십년에 대장

장문휴를 파견하여,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을 죽이니 이

를 '설선왕의 치'라 한다.

其實恨門藝事也 玄宗大怒 命右領軍將軍葛福順 發兵討之 二十一年又遣門藝 發幽州兵擊之 又

遣內史高品何行成 太僕員外郞金思蘭 使新羅 授新羅王金興光開府儀同三司持節充寧海軍使鷄林

州大都督 諭曰 渤海外稱藩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擊其南鄙 又勅新羅名將金庾信

孫允中爲將 賜金帛 新羅王遣允中等四將 率兵會唐師來伐 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凍死過半

皆罷歸 明年新羅人金忠信 上書於唐 請奉旨歸國討渤海 玄宗許之 竟無功 而黑水之地皆服於渤

海矣 王遣使聘日本 日本使朝臣蟲麻呂來 開元二十六年 舊唐書二十五年 王薨 八月辛巳赴唐

그 문예의 일로 후회가 가득하니 현종이 크게 노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명하여 병사로

이를 쳤다. 이십일년 또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를 공격하자, 내사고푼 하해성과 태업원외랑

김사란을 파견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 김흥광을 개부의동삼사지절윤령해군사

계립주대도독을 수여하고, 밝혀 말하길, 발해의 바깥을 번한이라고 칭하는데 마음에 교활함

을 품고 잇어 이제 병사를 내어 죄를 묻고자 하니 경도 역시 병사를 내어 남쪽으로 공격하

라. 또한 조칙을 내려 신라의 이름있는 장군인 김유신의 손자 윤중을 장군으로 삼고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시라왕이 윤중등 네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병사를 모아 쳤는데, 큰 눈이

일장이나 와서 산길이 험예지고, 병사들이 얼어죽은 자가 반을 넘어, 모두 그만두고 돌아

왔다. 다음해 신라인 김충신이 당나라에 상서 하여 발해를 치러갈 때 받들기를 청하자 현종

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끝내 공이 없었다. 흑수의 땅이 모두 발해에 복속을 하게 되고,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자, 일본도 신하 충마여래를 보냈다. 개원 이십육년 구당서

에는 이십오년 왕이 죽고, 팔월 신사에 당에 알렸다.

文 王

文王諱欽茂 武王子也 改元大興 開元二十六年 唐遣內侍段守簡 冊王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

海郡王 王承詔赦境內 遣使隨守簡入朝 玄宗授王左金吾大將軍 天寶中累加特進太子詹事賓客 天

寶末 徙上京 訖玄宗之世 凡二十九朝唐 肅宗至德元載 平盧留後徐歸道 遣果毅都尉行柳城縣四

府經略判官張元澗來聘曰 今載十月當擊安祿山 王須發兵四萬來援平賊 王疑其有異留之 十二月

丙午 歸道果 劉正臣于北平 潛與祿山幽州節度使史思明 通謀擊唐 安東都護王志玄知其謀 率精

兵六千餘人 攻破柳城斬歸道 自稱平盧節度 進屯北平 四載四月 志玄遣將軍王進義來聘曰 天子

已歸西京 迎太上皇于蜀居別宮 滅賊徒 故遣下臣來告 王爲其事難信 留進義 別遣使詳問 肅宗

賜王勅書一卷 寶應元年詔以渤海爲國 進封渤海國王 授檢校太尉 代宗大曆二年至十年 或間歲或

歲內 二三遣使朝唐 十二年正月 王獻日本舞女十一人 及方物于唐 四月十二月又遣使朝唐 累加

司空太尉 德宗建中三年五月 貞元七年正月八月 十年正月 皆遣使朝唐 貞元中復徙東京 王十遣

使聘日本 日本使朝臣殿繼來 忌村全成來 陽侯史玲 來 連益麻呂來 武生鳥守來 朝臣殿繼來 大

興五十七年三月四日王薨 卽貞元十年

문왕의 이름은 흠무이고, 무왕의 아들이다.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니 개원 이십육년이다. 당

이 내사 단수간을 파견하여, 왕을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자, 왕이받들

고 용서함을 고하였다. 사신 수수간을 파견하여 알현하자, 현종이 왕을 좌슴오대장군을 수

여하였다. 천보중에 특진태자첨사빈객을 더하였다.(??) 천보말에 상경으로 천도하고 현종때

까지 이십구번이나 당에 알현하였다. 숙종 지덕 원년에 평로에 머무르다 나중에 천천히 돌

아갔다. 과의도위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을 파견하여 말하길, 올 시월에 안록산의 공

격을 당하여 왕이 마땅히 병사 사만을 보내어 적을 평정하라고 보냈는데, 왕이 여기에 머물

러 있음을 의심하여, 십이월 병오에

과짐(?) 유정신과 북평으로 돌아갔다. 녹산과, 유주절도사 사사명이 통하여 당에 모반하려

고 숨었는데, 안동도호왕 지현이 그 모반을 알고 정병 육천명을 이끌고 유성을 공격하여 깨

뜨리고 돌아가는 길을 베니 스스로 평로절도라 칭하였다. 북평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사년

사월에 지현이 장군 왕진의를 파견하여 말하길, 천자는 이미 서경으로 돌아 왔다. 임금을

맞이하여 축의 별궁에 머므르니, 적들은 모두 패주하였다. 고로 신하를 보내어 알리는 것이

다 왕이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 진의를 머물게 하였 따고 사신 양문을 파견하였다. 숙종이

칙서 한권을 하사하니, 보응 원년 조서에 발해를 나라로 삼으니 발해국왕에 봉하고, 검교태

위를 수여하였다. 대종대력 이년에서 십년까지 혹은 그사이거나 그 안쪽에 당에 이삼번 알

현하였다. 십이년 정월 왕이 일본무녀 열명을 보내니, 또 방물을 당에 받치니, 사월과 십이

월에 또 당에 알현하였다. 사공태위 벼슬을 더 하였다. 덕종 건중 삼년 오월, 정원 칠년

오월 팔월 십년 정월, 사신을 보내어 당에 알현하였다. 왕이 열번이나 일본에 사신을 파견

하니 일본도 조신전계, 기촌전성, 양후사령구, 연익마려, 무생오수, 조신전계가 왔다. 태

흥오십칠년 삼월 사일 왕이 죽었다. 즉 정원 십년이다.

廢 王

廢王諱元義 文王族弟也 文王子宏臨早卒 元義立一歲猜虐 國人弑之

폐왕의 이름은 원의로 문왕의 동생이다.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자, 원의가 섰는데, 그

해에 의심하고 사나워 나라사람들이 죽였다.

成 王

成王諱華璵 宏臨子也 國人弑元義推立王 改元中興 還上京

성왕의 이름은 화옥으로 굉림의 아들이다. 나라사람들이원의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니 연

호를 중흥이라 하고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康 王

康王諱嵩璘 文王少子也 改元正曆 貞元十一年二月乙巳 唐遣內常侍殷志贍 冊王右驍衛大將軍忽

汗州都督渤海郡王 十四年 王遣使以父王故事 理 唐加王銀靑光祿大夫檢校司空 進封國王 二十

一年 遣使朝唐 貞元中凡四朝唐 順宗加王金紫光祿大夫 憲宗元和元年十月 加王檢校太尉 十二

月 遣使朝唐 王二遣使聘日本 日本使眞人廣岳來 宿彌賀茂來 宿彌船白來 元和四年王薨 正月赴

강왕의 이름은 숭린으로 문왕의 작은 아들이다. 연호를 정력이라 하니 정원 십일년 이월 을

사이다. 당이 내상시 은지삼을 파견하여 왕을 우호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에 책봉하였

다. 십사년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부왕의 등급의 이치를 밝히니 당이 왕에게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을 더하고 국왕에 책봉하였다. 이십일년 당에 알현하고 정원중에 네 번 당에 알현

하였다. 순종이 금자광록대부를 더하고, 혜종 원화 원년 시월에 검교태위를 더하였다. 십이

월 당에 알현하고 두 번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에서 진인광악, 숙미하무, 숙미선백, 이

왔다. 원화 사년 왕이 죽자 정울에 당에 알렸다.

定 王

定王諱元瑜 康王子也 改元永德 元和四年 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五年二遣使朝唐 七年

정왕의 이름은 원유로 강왕의 아들이다. 연호를 영덕이라 하니 원화 사년이다. 당이 은청광

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에 책봉하였다. 오년, 칠년 두번 당에 알현하였다.

僖 王

僖王諱言義 定王弟也 改元朱雀 定王卒 王權知國務 元和八年正月庚子 唐遣內侍李重旻 冊王銀

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희왕의 이름은 언의로 정왕의 동생이다. 연호를 주작이라 하였다. 정왕이 죽었을 때 왕이

잘 판단하여 나라의 일에 힘써야 함을 알았다. 원화 팔년정월 경자에 당이 내시 이중민을

파견하여 왕을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簡 王

簡王諱明忠 僖王弟也 改元太始 立一歲薨

간왕의 이름은 명충으로 희왕의 동생이다. 연호를 태시라 하였는데, 선지 일년만에 죽었다.

宣 王

宣王諱仁秀 簡王從父 高王弟野勃四世孫也 改元建興 簡王薨 王權知國務 元和十三年正月乙巳

遣使告喪于唐 五月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王南征新羅 北略諸部

開大境宇 十五年閏正月 遣使朝唐 唐加王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 十二月又遣使朝唐 元和中凡十

六朝唐 穆宗長慶二年正月 四年二月皆遣使朝唐 長慶中凡四朝唐 敬宗寶曆中二朝唐 文宗太和元

年遣使朝唐 四年又遣使朝唐 是年 舊唐書五年 王薨

선왕의 이름은 인수로 간왕이 아버지와 형제가 된다. 고왕의 아들 야발의 사세손이다. 연호

를 건흥이라 하고 간왕이 죽자, 왕이 잘 판단하여 나라의 일에 힘써야 함을 알았다. 원화

십삼년 정월 을사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상당함을 알렸다. 오월 당이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

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을 책봉하였다. 왕이 남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북으로 여러 부를 다스

려 크게 지경을 넓히였다. 십오년 윤정월에 당에 알현하자 금자광록대부검교사공을 더하였

다. 십이월 또 당에 알현을 하였다. 원화중에 열여섯번 당에 알현을 하고, 목종 장경 이년

정월, 사년 이월에 당에 알현을 하였다. 장경중에 무른 네 번이다. 경종 보력중에 두 번 알

현을 하고 문종 태화 원년에 알현을 하고, 사년에 알현을 하였는데, 이해에, 구당서에는 5

년에 왕이 죽었다.

王彛震(이진왕)

宣孫王也 父新德卒 王立改元咸和 大和五年 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

王 六年遣使朝唐 七年正月二月皆遣使朝唐 訖文宗之世 凡十二朝唐 武宗會昌中四朝唐 宣宗太

中十二年王薨 二月赴唐

선왕의 손자로 아버지 신덕이 죽자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함화라 하였다. 대화오년 당이 은

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에 책복하였다. 육년 당에 알현하고 칠년 정월 이

월에 알현하고, 문종에 이르기 까지 열두번 알현하였다. 무종 회창중에 4번 알현하고 선종

태중 십이년에 왕이 죽자 이월에 당에 알렸다.

王虔晃(건황)

彛震弟也 太中十二年二月癸未 唐詔襲王

이진의 동생이으로 태중 십이년 이월 계미에 당에 알리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王玄錫(현석)

虔晃子也 懿宗咸通中 三遣使朝唐

견황의 아들로 의종 함통중에 세 번 당에 알현하였다.

王 (인선)

史失系 梁太祖朱全忠開平元年 王遣王子朝梁 獻方物 二年三年及乾和二年 又遣使朝梁 後唐莊

宗同光二年 遣王子朝唐 又遣王侄 明宗天成元年 遣使朝唐 進兒口女口 渤海自唐世數 遣諸生詣

京師太學 習識古今制度 稱爲海東盛國 及至朱梁後唐三十年間 貢士登科者十數人 學士彬彬焉

遼太祖耶律阿保機神冊二年 王遣使聘遼 四年遼修遼陽故城 掠渤海戶實之 天贊三年 王遣兵攻遼

殺遼州刺史張秀實 掠其民而歸 四年十二月乙亥 遼主詔其國中曰 所謂二事 一事已畢 惟渤海世

未雪 豈宜安住 遂擧兵來寇 皇后及太子培大元帥堯骨從 閏十二月壬辰 遼主祠木葉山 壬寅以

靑牛白馬祭天地 己酉次撤葛山射鬼箭 丁巳次高嶺 是夜遼兵圍扶餘府 天顯元年正月己未 白氣貫

日 庚申扶餘城陷 守將死之 遼又別攻東平府破之 丙寅老相兵敗 是夜遼太子培 大元帥堯骨 南部

宰相蘇 北院夷 菫斜涅赤 南院夷 菫迭里等 圍忽汗城 己巳王請降 庚午遼主駐軍忽汗城南 辛

未王素服藁索牽羊 率臣僚三百餘人出降 遼主禮以遣之 丙子遼主使其近侍康末?等十三人 入請

罪馬前 遼主以兵衛王及王族以出 二月丙午遼改渤海國爲東丹 忽汗城爲天福 封其太子倍爲人皇

王以主之 乙酉 遼主以王及王族歸 築城于臨潢之西 使王居之 賜王名曰烏魯古 王后名曰阿里只

烏魯古阿里只者 遼主及皇后受王降時 所乘二馬名也 因以其馬賜王及后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양나라 태조 조전충 개평 원년에 왕이 왕자를 보내어 양에 알현

을 하고 방물을 받쳤다. 이년 삼년에서 건화 이년에 또 양에 알현을 하고 후당 장종 동광

이년에 왕자를 보내어 당에 알현하고 또 왕질을 보내었다. 명종 천성 원년 당에 알현하고,

나아가(??).

발해가 당의 세수를 받고, 학문이 뛰어난 여러 스승들을 보내어 고금의 여러 제도를 익히

니, 칭하여 해동성국이라 하였다. 주양에서 후당 삼십년 사이에 등과에 오른 선비들이 십수

명이고, 학사들은 뛰어났다.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신책 이년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요를

찾아가고, 사년 요가 요양의 옛성을 수리하고 발해의 호실을 노략질 하였다. 천찬 삼년에

왕이 병사로 요를 공격하고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 백성을 노략질 하고 돌아왔다.

사년 십이월 을해에 요나라 주인이 그 나라가운데에서 고하길, 두 가지 일이 있으니, 하나

는 이미 했다. 발해를 꾀함에 아직 깨끗치가 않아 마땅히 편히 정주 할 수가 없어, 병사를

일으켜 황후의 태자 배와 대원사 요골로 나아가 도둑을 쳤다. 윤 십이월 임진에 요주가 목

엽산에 제사 지내고 임인에 푸른 소와 흰 말로 천지에 제사 지냈다. 기유에는 철갈산 사귀

전에 정사에는 고령에 제사 지내고 그밤에 요나라 병사가 부여부를 포위하였다. 천현 원년

정월 기미에 흰 기운이 해를 꽤 뚫었다. 경신 부여성이 함락되고, 지키던 장수가 죽었다.

요는 또 따로 동평부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 병인 노상병이 무너지고, 이 밤에 요태자 배와

대원사 요골, 남부재상 소, 북원이리근 사열적, 남원이리근 질리 등과 홀한성을 포위하였

다. 기사 왕이 항복하길 청하였다. 경오 요주의 군사가 홀한성 남쪽에 머물렀다. 신미 왕이

흰옷을 입고 짚으로 세끼를 꼬아 양을 끌고, 신하와 벼슬아치 삼백여명을 이끌고 항복하였

다. 요주가 예로 이를 보내 주었다. 병자 요주가 근시 강말달 등 십사명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요주가 병사로 왕과 왕족을 지키어 내 보냈다. 이월 병오 요가 발해국을 동단으

로 고치고 홀한성을 천복이라 하였다. 그 태자 배를 인황왕에 봉하고, 주인으로 하였다. 을

유 요주가 왕과 왕족이 돌아오자 임황의 서쪽에 성을 쌓고 왕이 거하게 하고 왕이름을 하사

하니 오노고라 하고, 왕후의 이름을 아리지라 하였다. 오노고와 아리지라는 것은 요주와 황

후가 왕이 항복할 때 받았던 타고 있던 두 마리의 말이름이다. 그리하여 말로 왕과 후의 이

름을 하사한 것이다.

興遼王(흥요왕)

名延琳 高王七代孫也 仕遼爲東京舍利軍詳穩 初東遼之地 自神丹中附 遼末有 沽鹽麴之法 關

市之征亦寬弛 及馮延休韓紹勳等 相繼爲戶部使 以燕山平地之法繩之 民不堪命 燕又仍歲大饑

副使王嘉獻計造船 使其民傷海事者 漕粟以賑燕 水路艱險多覆沒 雖言不信鞭楚榜掠 民怨思亂

遼聖宗大平九年八月丁丑 延琳殺紹勳及嘉 以快其衆 復殺四捷軍都指揮使蕭頗得 囚留守駙馬都

尉蕭孝先 國號興遼擧位號 改元天慶 高麗史曰天興 選智勇之士置左右 於是諸部響應 南北女眞

皆附 而高麗與遼絶 先是延琳與副留守王道平謀擧事 又召黃翩於黃龍府 道平夜踰城 走與黃翩俱

上變 遼主徵諸道兵攻之 渤海太保夏行美渤海人也 時主兵戌保州 延琳馳書 使圖統帥耶律蒲古

行美以實告蒲古 殺渤海兵八百人 而斷其東路 黃龍保州旣皆不附 國舅詳穩蕭匹敵 又率兵斷西路

延琳遂分兵攻瀋州 節度副使張傑聲言欲降 故不急攻 知其詐而已有備 攻之不克而還 遼兵大集

十月遼以南京留守燕王蕭孝穆爲都統 蕭匹敵爲副 部署六部大王蕭蒲奴爲都監 與戰蒲水中 遼兵

匹敵蒲奴張左右翼擊之 延琳兵潰 又戰于手山敗走 入城固守 孝穆築重城起樓櫓 內外不相通

城中撤屋以 蒲奴先據高麗女眞要衝 故無救兵 十年八月丙午 延琳將楊詳世 密送款於遼 夜開

門納遼師 延琳被執 是時諸部豪傑吼山等兵蜂起 尋皆敗滅 獨南海城守堅守經年始降

이름은 연림으로 고왕의 칠대손이다. 요에서 동경사리군상온 벼슬을 하였는데, 처음 동요의

땅이다. 스스로 신단중부 하였다. 요말에 각고염국의 법이 있었는데, 관시를 정벌하고 또한

너그러이 대하였다. 풍연휴와 한소훈등을 호부사로 삼아, 연산 평지에서 이를 다스리니, 백

성들이 그 명을 견디지 못하였다. 연이 그해에 크게 굶주리니 부사왕 가가 계책을 내어 배

를 만들어, 그 백성이 바다에서 일하게 하여 쌀을 실어 날아 연을 구제하였다. 뱃길이 험하

여 많이 가라앉았는데,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심히 매질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어지러왔

다. 요 성종 태평 구년 팔월 정축 연림이 소훈과 가를 죽이니 그 무리를 기뻐하였다. 다시

사첩군도지휘사 소파득을 죽이고, 유수부마도위 소효선을 죽이니, 나라를 흥여라 하고 제위

에 올라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고려사에는 천흥이라고 하였다. 지혜롭고 용맹한 선비를

가려 좌우에 두고, 여러 부의 소리에 응하니 남북 여진의 모든 부와 고려와 요를 끊었다.

먼저 연림이 부유수 왕도평과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또한 황룡부 소황편과 도평이 밤

에 성을 넘어, 황편과 함께 임금이 되니(?)요주가 여러 병사로 공격해 왔다. 발해태보 하행

미는 발해 사람으로 이때에 병사로 주를 지키고, 연림에서 함께 한다는 글을 올렸다. 도통

사 야율포고가가 행미가 포고에서 알리자 발해병사 팔백명을 죽이고 그 동쪽길을 끊었다.

황룡보주의 모두 따르지 않아, 국구상흔 소필적이 또한 평사로 서쪽길을 끊었다. 연림이 병

사를 나누어 심주를 공격하자, 절도부사 장걸성언이 항복하고자 하니 급히 공격을 하지 않

았는데,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을때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길수

없어 돌아 왔다. 요의 병사들이 크게 모이자, 시월 요가 남경유수연왕 소효문을 도통으로

삼고 소필적을 부로 삼고, 부서육부대왕 소포노를 도감으로 삼아, 포수중에서 전투를 벌이

니 요병사들이 필적과 포노가 좌우의 날개로써 벌려서 공격하니 연림의 병사는 무너졌다.

또 우수산에서 전투하여 패하니 달아나,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었다. 효목이 성을 쌓고, 망

루를 세워, 안팎에 서로 통하게 하지 못하게 하니 성안에서느느 집을 부셔 불을 땠다. 포노

가 먼저 고려와 여진의 병사로 쳤으나 살아남은 병사가 없었다. 십년 팔월 병오 연림의 장

수 양상세가 비밀히 요에게 밀사를 보내어 밤에 문을 열어 놓으니 들어dkh서 연림을 잡았

다. 이때 여러부의 호걸 후산등이 병사를 일으켰지만 모두 패하여 멸하고 홀로 남해성수견

이 지키다가 이해 초에 항복하였다.

烏舍城浮 府琰府王(오사성부투부염부왕)

史失名 宋太宗太平興國六年 賜王詔曰 朕簒紹丕基 奄有四海 普天之下罔有率殺 太原封域 國

之保障 頃因竊據 遂相承襲 倚遼爲援 歷世逋誅 朕前歲親提銳旅 盡護諸將 拔 門之孤壘 斷凶

奴之右臂 眷言吊伐 以蘇黔黎 蠢玆北戎 非理 怨 輒肆 食 犯我封界 日昨出師逆擊 斬獲甚衆

今欲鼓行深入 席卷長驅 焚其龍庭 大殲醜類 素聞爾國密邇寇 迫於呑幷 力不能制 因而服屬

困於率割 當靈旗破賊之際 是隣邦雪憤之日 所宜盡出族帳 佐予兵鋒 俟其剪滅 沛然封賞 幽 土

宇 復歸中朝 朔漠之外 悉以相與 乃協乃 朕不食言 是時宋欲大擧伐遼 故有是詔

역사에는 잃어버린 이름이다. 송태종태평흥국 육년 왕을 하사하며 고하며 말하길 짐이 큰

터전을 뺏앗는데 도움을 주니 사해를 덥는다. 널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있어 태원지역에

봉하니, 나라를 지킴에 있어, 요사이 도둑이 일어나, 서로 계승하니, 요에 의지해 취하게

되었다.(??) 짐이 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을 보호하고자, 보문의 고루를 빼앗고,

흉노의 우비를 죽이고, 소검려를 쳤다. 북융이 점점 일어나니, 그 원망함을 다스리지 못하

여 방자함이 극에 달아 나의 영토를 범하게 되니, 일찍이 나아가 공격하여 많은 무리를 죽

이고, 사로 잡았다. 이제 깊이 나아가고자 하니, 쇠뇌를 배치하고 말을 몰아 그 임금의 수

도를 불태우고 나쁜 무리를 다 죽였다. 당신의 나라가 도둑들과 매우 가깝다는 소릴 듣고,

궁색하여, 함께 어울리니, 힘으로 능히 제도할 수가 없어 속하게 된 것이다. 분한을 나누

어, 그 영기로 대적하여 적을 깨뜨릴때가 이웃나라의 분풀이 할 때이니 마땅히 모든 족장이

나아가, 내 병사를 도와 무리지어, 그를 베고, 멸하여야 한다. 감동하여 유주와 계주의 땅

과 집을 상으로 줄 것이다. 돌아와 알현을 하면, 삭막(고비사막)의 바깥은 모두 서로 한 무

리가 되어, 당신은 잠에서 깨고, 화합할 것이다. 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이때에 송은

크게 일어나 요를 치고하 하니, 고도 이렇게 고함이 있다.

按忽汗城之破 在遼太祖天顯元年 後唐明宗天成元年 人謂是時渤海已亡 然而遼史稱太祖有君

人之德 以其不滅渤海族帳也 聖宗統和十四年 蕭韓家奴奏曰 渤海高麗女眞 合從連衡 二十一年

渤海來貢 開泰中 南部宰相大康乂言 蒲蘆毛朶界多渤海人 乞取之 詔從之 領兵至大石河馳準城

掠數百戶而歸 又親征渤海黃皮室軍 五代史云 訖周世宗顯德 渤海使常來 宋史宋琪傳 琪論邊事

曰 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 文獻通考云 阿保機 攻扶餘城下之

爲東丹府 阿保機死 命其弟 率兵攻扶餘城 不克而還 天成四年 長興二年三年四年 淸泰二年

三年 俱遣使貢方物 宋太宗淳化二年冬 以渤海不通朝貢 詔女眞攻之 胡三省云 渤海更五代至於

宋 耶律數數加兵不能服也 以此觀之 渤海未嘗亡也 其浮 府琰府王 雖不言姓名 見太宗詔 可知

其爲大氏之裔也 然渤海之亡在何時 未可考

홀한성이 깨어지니, 요태조 천현 원년이요, 후당 명종천성원년이다. 사람들이 이때에 발해

가 멸망했다고 하니, 요사에서 칭하길 태도가 왕으로의 덕이 있으나, 발해의 족장마저 멸망

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성종 통화 십사년 소한가노가 아뢰길, 발해고려여진이 합하

여 계속 이어져 있다. 이십일년 합래가 공물을 받쳤다. 개태중에 남부재상 대강예가 말하길

포로모내의 경계에 발해인이 많아 이를 취하고 알린다. 열병이 대석하의 추준성에 이르러

수백호를 빼앗아 돌아왔다. 또 친히 발해의 황피실 군을 정벌하였다. 오대사에 말하길, 세

종 현덕에 이르기까지 두루 발해의 사신이 항상 왔다. 송사 송기전에는 기가 변방의 일을

말하길 발해의 군사와 땅으로 어떤 장수가 있는데 비록 거란과 함께 일한다지만 주인을 죽

이고 나라를 깨뜨린 원망을 품고 있고 있다. 문헌통고에는 아보기가 부여성을 공격하여 아

래에 두고 동단부라 하였는데 아보기가 죽자 인선이 그 동생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부

여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천성 사년 장흥 이년 삼년 사년 청태 이년

삼년에 함께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송태종순화이년 겨울에 발해가 조공을 하지 않

자 여진에게 고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호삼성에 이르길, 발해가 오대를 이어 송에 이

르러 야율수수가 병사를 더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킬수 없어 이렇게 보는 것이다. 발해는 하

직 망하지 않았다. 그 부투부염부왕이 비록 성과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나, 태종이 보고 고

하길 가히 그가 대씨의 후손임을 알겠다. 그렇다면 발해가 멸망한때가 언제인지 가히 알수

가 없겠다.

臣 考(신 고)

大門藝(대문예) 大壹夏(대일하) 馬文軌(마문궤) 蔥勿雅(총물아)

門藝武王弟也 武王使門藝擊黑水靺鞨 門藝嘗質於唐智利害 謂王曰 黑水請吏而我擊之 是背唐也

唐大國 兵萬倍我 與之産怨我且亡 昔高句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可謂雄强 唐兵一臨 掃地

盡矣 今我衆比高句麗三之一 王將違之不可 王不從强遣之 兵至黑水境 又以固謙 王怒遣從兄壹

夏代將 召門藝將殺之 門藝懼 棄其衆 路奔唐 玄宗拜爲右驍衛將軍 王遣馬文軌蔥勿雅 上書極

言門藝罪狀 請殺之 唐處門藝安西 好報曰 門藝窮來歸我 誼不可殺 已投之嶺南矣 幷留文軌物雅

別遣鴻 少卿李道邃源復諭旨 王知之 上書言大國示人以信 豈有欺?之理 今聞門藝不向嶺南 伏

請依前殺却 玄宗怒道邃復 不能督察官屬 致有漏泄 左除道邃曹州刺史 復同州刺史 暫遣門藝詣

嶺南以報之 王望門藝不已 密遣使入東都募客 刺門藝於天津橋南 門藝格之得不死 玄宗勅河南

捕刺客悉殺之

문예는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문예에게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문예는 일찍이

본질적으로 당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아, 왕에게 고하여 말하길, 흑수의 벼슬아치를 청하

여 내가 이를 공격하는 것은 당에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대국으로 병사가 우리의 만배이

고, 이것이 원망을 사 우리가 망할까 두렵습니다. 옛날 고구려가 성할 때, 삼십만으로 당의

적에게 항거하였는데, 가히 강한 당병 한무리가 땅에서 쓸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무리

는 고구려의 3분의 1이니 왕께서 장차 떠나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했다. 왕이 강하게

쫓지 않고, 파견하여 병사가 흑수의 지경에 이르러, 굳걷히 수비하였다. 왕이 노하여 형 일

하를 보내어 이를 대신하게 하고, 문예를 불러들여 줄일려고 하니, 문예가 두려워 하여 무

리를 버리고, 당으로 도망하였다. 현종이 우효위장군으로 삼자, 왕이 마문궤와 총물아를 보

내어, 상서하여 문예를 죄상을 말하여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당은 문예를 안서에 거하게 하

였다. 호보가 말하길, 문예가 궁하여 우리에게 돌아왔으니 죽이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이고,

이미 영남으로 떠났습니다. 문궤와 물아가 머뭇거리자, 홍려소경 이도수원과 복유지를 보내

었다. 왕이 이를 알고, 대국에 상서하여 사람을 봄에 믿음으로 하니 어찌 속임이 있겠습니

까?, 이제 문예가 영남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고 들으니, 엎드려 청하건데 앞서 죽임을 물릅

니다. 현종이 도수와 복에게 노하여, 능히 벼슬을 살피지 못하여 좌제도수조주자사 복동주

자사가 비밀이 누설하니 문예를 보내어 영남에 이르러 이를 알렸다. 왕이 문예를 버리지 않

음을 바라여, 비밀히 동도모객을 보내어 문예를 천진교남쪽에서 찌르니 문예가 대적하여 죽

지 않고, 현종이 하남에 칙서를 내려 자객을 모두 잡아 이를 죽였다.

大野勃(대야발) 大宏臨(대굉림) 大新德(대신덕)

野勃高王弟也 宏臨文王世子也 新德宣王世子也

야발은 고왕의 아우이고 굉림은 문왕의 세자이고 신덕은 선왕의 세자이다.

任雅相(임아상) 張文休(장문휴)

雅相武王舅也 文休武王大將也

아상은 무왕의 장인이고 문휴는 무왕의 대장군이다.

大常淸(대상천) 大貞翰(대정한) 大淸允(대청윤)

貞元七年正月 文王使常淸朝 唐授衛尉卿同正 還國 貞翰淸允 皆文王時王子也 貞翰貞元七年八

月朝唐 請備宿衛 淸允貞元十年正月朝唐 唐授右衛將軍同正 其下三十餘人拜官有差

정원칠년정월 문왕은 상천을 사령으로 알현하고 당이 위서경동정을 하사하고, 환국하였다.

정한과 청윤은 모두 문왕때의 왕자로 정한은 정원칠년팔월 당에 알현하여 비숙위를 청하였

고, 청윤은 정원십년 정월 당에 알현하니 당이 우위장군동정을 수여하고, 그 아래 삼십여명

에게도 차이를 두어 하사하였다.

大能信(대능신) 茹富仇(여부구)

能信康王姪也 富仇官虞侯婁番長都督 貞元十四年 康王遣使朝唐 是年十一月 唐授能信左驍衛中

郞將 授富仇右武衛將軍 放還國

능신은 경왕의 조카이다. 부구는 관우후누번장도독으로 정원 십사년 강왕이 사신으로 당에

알현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이해 십일월 당이 능신에게 좌효위중랑장을 수여하고 부구에게

우무위장군을 수여하였다. 환국하였다.

大叡(대예)

長慶四年二月 宣王遣叡等五人朝唐 請備宿衛

장경 사년 이월 선왕의 예등 오명을 당에 파견하고, 비숙위를 청하였다.

大明俊(대명준) 高寶英(고보영) 大先晟(대선성)

明俊彛震時王子也 大和六年 王遣明俊等朝唐 寶英官同中書右平章事 大和七年正月 王遣朝唐

謝冊命 因遣學生三人 請赴上都學問 先遣學生三人 事業稍成請歸本國 唐許之 先晟亦彛震時王

子也 是年二月 王遣先晟等六人朝唐 唐詩人溫庭筠送渤海王子歸本國詩曰 疆理雖重海 車書本一

家 盛勳歸舊國 佳句在中華 定界分秋漲 開帆到曙霞 九門風月好 回首是天涯

명준은 이진때의 왕자이다. 대화육년 옹이 명준등을 당에 파견하였다. 보영은 관동중서우평

장사이다. 대화칠년정월 왕이 당에 파견하여, 책명을 구하며 학생세명을 보내어, 상도에서

나아가 배울수 있도록 청하여 먼저 학생 세명을 보내었다. 일이 점점 이루어지자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당이 이를 허락하였다. 선성은 역시 이진때의 왕자이고 이해 이월 왕이

선성등 육명을 당에 파견하니 당시인 온정균이 발해왕자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시를 보내니

말하길, 지경을 다스림이 중하여 수레에 책을 싣고 본래의 집 옛 나라로 돌아가나, 아름다

운 글귀 중화에 있다. 반드시 번성하리니 돗을 달아 새벽인데 이미 멀어져지네, 바람에 달

은 좋아 머릴 돌리니 하늘의 끝이네.

高元固(고원고)

元固訪唐進士徐寅於 中 爲道本國人 以金書寅斬蛇劒御溝水人生幾何三賦 列爲屛障 寅喜而贈

詩 稱爲渤海賓貢高元固先輩 其詩曰 折桂何年下月中 山來問我雕蟲 宜銷金翠書屛上 誰把

過日東 剡子昔時遭孔聖 由余往代諷秦宮 嗟嗟大國金門土 幾箇人能振素風 其曰先輩曰折桂

已成進士之稱也 徐寅中乾寧進士 時依王審 知元固當 詩人

고원은 당으로 가 민중에서 진사서인 벼슬을 하였는데 본래 본국인이다. (??) 인희가 시를

보내었는데, 발해빈공 고원고 선배라 칭하였다. 그 시에 몇해전에 달의 가운데에서 계수나

무를 꺽었네. 민산에서 와서 내가 독수리임을 물었는데 마땅히 황금새를 녹여 병풍위에 새

기니 천한사람의 손을 잡고 해의 동쪽을 지나 섬자는 옛날에 공자를 만났다. 나와 인연이

있어 풍진궁에 나아가니, 아~ 대국의 금문토라. 기개인이 능히 흰 바람을 떨치었다. 그 말

에 선배가 계수나무를 꺽었다고 했는데, 이미 진사라 칭했다는 것으로 서인중건령진사이다.

때를 보아 왕을 보필하는 것으로 원고는 인선의 시에 대답함을 알았다.

大元兼(대원겸)

侄也 官學堂親衛 後唐同光二年 王遣朝唐 試國子監丞

인선이 어리석어 관학당친위를 하고 후에 당 동광이년에 왕이 당에 사신으로 보내니 국자감

승 시험을 보았다.

高仁義 德周 舍那婁 高齋德( 고인의 덕주 사나루 고재덕)

仁義官寧遠將軍郎將 德周游將軍果毅都尉 舍那婁別將 齋德首領 武王時同使日本 着蝦夷境 仁

義以下十六人被殺害 齋德與八人走出羽國僅免 致國書 與其使朝臣蟲麻呂俱來 獻綵帛一十疋綾

一十疋 二十疋 絲一百鉤綿一百屯

인의는 영원장군랑장이고 덕주는 부장군과의도위이고 사나루는 별장, 재덕은 수령이다. 무

왕때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착하이 지역에서 인선과 아래 십육명이 살해를 당하였

는데, 재덕과 팔명은 출우국으로 도망하여 겨우 살았다. 국서를 받치고 사신 충마여구와 함

께 돌아 왔다. 비단 열필과 비단(무늬가 있는)열필 시 이십필 실 일백구 면 일백둔을 받쳤

다.

胥婁德 已珍蒙 已閼棄蒙( 서루덕 이진몽 이알기몽)

婁德官若忽州都督忠武大將軍 珍蒙雲麾將軍 棄蒙首領 文王時同使日本 婁德船覆 與棄蒙等四十

人俱死 倭皇御太極殿 觀珍蒙射 又御中宮 使珍蒙奏本國樂聽之 附獻美濃 三十疋絹十疋絲一百

五十鉤 調綿二百屯 初日本人朝臣廣成等朝唐回 從蘇州入海 漂着 崙國 多被殺執 廣成與八人

僅免復歸唐 從登州入海 到渤海界 王令隨婁德等歸國

누덕은 약홀주도독충무대장군이고 진몽은 운휘장군이고 기몽은 수령이다. 문왕대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다. 누덕은 배가 뒤집히어 기몽등 사십여명이 함께 죽었다. 왜황이 태득전에서

진몽의 궁술을 보았고, 또 중궁에서 진몽이 본국의 음악을 아뢰었다. 미농시 30필, 명주 열

필, 실 백오십구, 조면 이백둔을 받쳤다. 처음 일본인 신하 광성등이 당에 알현하고 돌아오

다 소주에서 바다에 들어갔는데 떠돌다 곤륜국에 들어가 많이 죽고 잡히었다. 광성과 팔명

이 겨우 살아 당으로 돌아갔다. 등주에서 바다로 들어갔는데 발해의 지역에 이르르니, 왕이

누덕등과 함께 돌아가게 했다.

慕施蒙(모시몽)

官輔國大將軍 文王時 率七十五人使日本 以王旨問十餘年無使之故 倭皇答書援高句麗舊記 責國

書違例

관직은 보국대장군으로 문왕때에 칠십오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서 왕이 십여년동안 사신없

음을 물으니, 왜황이 답서에 고구려라 기록하니, 국서에 예가 없다 책하였다.

楊承慶 楊泰師 馮方禮(양승경 양태사 풍방례)

承慶官輔國將軍 泰師歸德將軍 方禮判官 文王時同使日本 初日本使朝臣田受等 來問大唐消息

歸言於倭皇曰 天寶十四載歲次乙未十一月九日 御史大夫兼范陽節度使安祿山 擧兵作亂 自稱大

燕聖武皇帝 改范陽爲靈武郡 其宅爲潛龍宮 年號聖武 留其子安卿緖 知范陽郡事 自將精騎二十

餘萬南下 直入洛陽 署置百官 天子遣安西節度使哥舒翰 將三十萬衆 守潼津關 使大將封常淸 將

十五萬衆 別圍洛陽 天寶十五載 祿山遣將軍孫孝哲等 率二萬騎攻潼津關 哥舒翰壞潼津岸墜黃河

絶其通路而歸 孝哲鑿山開路引兵入至新 六月六日天子游于劒南 七月甲子 皇太子璵 卽皇帝位

于靈武都督府 改元至德矣 言安東都護王志玄 聘渤海 天子賜渤海勅勅書事 倭皇下令于太宰府

曰 安祿山者是狂胡狡竪也 違天起逆 事必不利 疑其不能西 必還掠海東 大貳吉備朝臣眞備 俱是

碩學 委以重任 宜知此狀 預設奇謀 縱使不來 儲備無悔 其所謀上策及應備 事 一一俱錄報來

至是承慶等至日本 倭皇授承慶正三位 泰師從三位 方禮從五位 下賜錄事以下十九人 仍使忌村全

成 隨承慶來 欲自渤海迎其入唐大使朝臣河淸 獻絹三十疋美濃 三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錦四疋

兩面二疋 羅四疋白羅十疋綵百三十疋白錦一百帖

승경은 보국장군이고 태사는 귀덕장군 방례는 판관이다. 문왕때에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

다. 처음 일본사신 전수등이 와서 당이 쇠하고 있음을 물으니 돌아가는 길에 왜왕에 말하

길, 천보 십사년에서 다음 을미 십일월 9일에까지 어사대부 와 범양절도사인 안록산이 병사

로 난을 일으켜서

스스로 대연성무황제라 칭하고 범양을 영무군으로 고치고, 집을 잠용궁으로 삼고 년호를 성

무라 하니, 그 아들 안경서가 버양군의 일을 알고 스스로 기병 이십여만으로 남하하여 직접

낙양에 들어와 관청과 신하를 두니 천자가 안서절도사 가서한에게 삼십만을 주어 파견하여

동진관을 지키게 하고 대장을 상청에 봉하고 십오만으로 낙양을 따로 지키게 하였다. 천보

십오년에 녹산이 장군 손효철등으로 이만기병으로 동진관을 공격하니 가서한이 동진의 언덕

에서 패하고 황하가 떨어졌다. 그 통로가 끊어져 돌아오니 효철이 산을 뚫어 길을 내어 병

사가 등어와 신풍에 이르니 유월육일 천자가 검남으로 달아났다. 칠월 갑자 황태자 여가 영

무도독부에서 황제자리에 올라 연호를 지덕이라 하였다. 안동도호 왕지현이 발해를 찾아와

말하길 천자가 발해에 칙서를 보내었다. 왕황제 하령 태행부가 말하길, 안녹산이 지금 미치

고 교활하다.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일어나니 일은 반드시 불리하다. 의심하건데 능히 서쪽이

아니면 반드시 바다 건너 동쪽을 노략질 할 것이다. 대이길비와 사신 진비가 함께 석학이니

중임을 맡긴다. 마땅히 이 상태를 알아 미리 기이한 계략을 만들어, 오지 않도록 준비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 상책을 꾀하고 여러 가지 일을 준비하여 응하도록 하게 했다. 함께

기록함을 알이러 오니 이에 승경등이 일본에 이르러 왜황제가 승경에게 정삼위를 주고 태사

에게 종삼위 방례에게 종 오위, 그리고 아래 십구명에게 녹사를 하사하였다. 이에 사신 기

촌전성이 승겸을 따라 와서 발해로 해서 당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신하 하청이 명주 삼십필

과 미농사 삼실필 사 이백구, 면 삼백둔, 비단 사필, 양면 두필, 힐라 네필, 백라 열필, 채

백삼십필, 백금 일백점을 받쳤다.

高南甲 高興福 李能本 安貴寶(고남갑 고흥복 이능본 안귀보)

南甲官輔國大將軍兼將軍玄 州刺史兼押衛官開國公 興福副使 能本判官 貴寶解臂 文王時同使

日本 以中臺牒報曰 迎藤原河淸使總九十九人 大唐祿山思明 前後作亂 內外騷荒 恐被害殘 只遣

頭首高元度等十一人 往迎河淸 卽差此使同爲發遣 南甲等與其使陽侯史玲 俱來 獻 三十疋美

濃 三十疋絲一百鉤 綿三百屯 能本後爲王新福副 再使日本

남감의 관직은 보국대장군과 장군현토주자사 압위관개국공을 겸하고 있다. 흥복은 부사이고

능본은 판관, 귀보는 해비이다. 문왕때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중대첩보가 말하길 등

원하청이 99명을 거느리고 와서 맞이하였는데 당의 녹산을 생각하니 앞뒤가 어지럽고 내외

가 거칠어 해를 당할까 두려워 단지 두수 고원도등 열한명만 보냈다. 하청이 가서 맞이하니

독 함께 보낼것입니다. 남갑등이 양후사와 령구구와 오니 시 삼실필, 미농포 삼심필 사 일

백구 면 삼백둔을 받칩니다. 능본이 후에 왕신복이 다음으로 다시 일본에 갔다.

楊方慶(양방경)

文王時 以賀正使朝唐 日本迎河淸使高元度隨往

문왕때 하례하기 위해 당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 하청을 맞이하여 고원도를 따라 갔다.

王新福 楊懷珍 達能信(왕신복 양회진 달능신)

新福官紫綬大夫行政堂左允開國男 懷珍判官 能信品官著緋 文王時率二十三人 同使日本 新福爲

倭皇言唐事曰 李家太上少帝幷崩 廣平王攝政 年穀不登 人民相食 史家朝議稱聖武皇帝 性有仁

恕 人物多附 兵鋒甚强 無敢當者 鄧州襄陽已屬史家 李家獨有蘇州 朝參之路固未易通 是行也李

能本爲副

신복은 자수대부로 신정당좌윤개국남이다. 회진는 판관이고 능신은 품관저비이다. 문왕때

이십삼명을 거느리고 일본에 함께 갔다. 신복이 왜황에게 당의 일을 말하길 이씨집안의 태

상과 소제가 함께 죽어 광평왕이 섭정을 하고 있다. 이해 곡식이 익지 않아 백성이 서로 잡

아는다. 사가들이 조정에서 의논하길 성무황제라 칭하니 성품이 인자하고 서하며 인물들이

몰려들고 병사들은 강하니 당할자가 없다 등주 양양이 이미 속하니 이가는 홀로 소주에 있

다. 알현하는 길이 힘들어 쉽게 통하지 않으니 이능본를 부로 하여 갔다.

壹萬福 慕昌拜(일만복 모창배)

萬福官靑綬大夫 昌拜副使 文王時率三百二十五人 駕船七十隻 同史日本 着出羽國 倭皇以國書

違例 幷信物不受 萬福再拜據地而泣曰 君者彼此一也 臣等貴國 必當有罪 遂改修國書 代王申謝

倭皇授萬福從三位 與王書曰 今者來書頓改文道 日下不註官品姓名 書尾虛陳天孫僭號 且高氏之

世 兵亂無休 爲假朝威 彼稱兄弟 今王曾無事故而稱甥 於禮失矣 後歲之使不可更然 獻美濃 三

十疋絹三十疋絲一百鉤調綿二百屯 昌拜卒於日本 萬福與其使武生鳥守俱來 遭風漂着能登國 客

主僅免 日本遣渤海船名能登 以禱于船神有驗 授其船從五位下賜錦冠 其冠錦表 裏 紫組纓

만복은 청수대부고 창배는 부사이다. 문왕때 325명을 거느리고 70척의 배를 타고 함께 일본

으로 갔다. 출우국에 도착하였는데, 왜황의 국서가 예에 벗어났다고 하여 신물을 받지 않았

다. 만복이 다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울며 말하길 임금이라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하나입니

다. 신등은 귀국에 반드시 죄가 있으니, 국서를 고치겠습니다. 왕을 대신하여 사죄합니다.

왜황이 만복에게 종삼위를 내리고 왕의 서에 말하길 이자가 서를 가지고 와서 글을 고쳤다.

이제부터는 관품성명을 주하지 말라. 서의 끝에 천손임을 참람되게 늘어 놓지 말라. 또 고

씨의 세상에는 병란이 끝이지 않았는데 거짓으로 알현하여 협박하였는데, 이를 형제라 칭하

니 이제 왕이 옛일로 생질이라 칭하지 말아라. 이는 예에 어긋나는 것이다. 후세의 사신부

터는 가히 고치지 말아라. 미농시 삼십필과 명주 삼십필 사 일백구 조면 이백둔을 받친다.

창배가 일본에서 죽었다. 만복이 그 사신 무생조수오 함께 왔는데, 바람을 만나 떠돌다 능

등국에 도착하여 겨우 손님으로 주인에게 의탁하였다. 일본이 보낸 발해의 배 이름이 능등

이었다. 배의 신에게 효염이 있어 빌었는데 배에 오위의 벼슬을 하사하고 금관을 주었다.

그 관은 겉은 금이고 속은 시이고 자주색 끈이로 되어 있다.

烏須弗(오수불)

文王時使日本 着能登國 國司問故 受拂以書報曰 渤海日本久未好隣 往來朝聘如兄如弟 近年日

本內雄等住渤海國 學問音聲 却返本國 今經十年 未報安否 由是差大使壹萬福等 遣向日本國 擬

於朝參 稍經四年未返本國 更差大使烏須弗等四十人 面奉詔旨 更無餘事 所附進物及來書 在

船內 大政官以表函違例不受 又曰渤海使取此道而來 前有禁斷 自今以後宜依舊例 從筑紫道來

문왕때의 일본 사신이다. 능히 나라의 높은 벼슬에 오르니, 국사가 옛일을 물었다. 수불이

書로써 대답하여 말하길, 발해와 일본은 오래 되었지만 좋은 이웃국가는 아니다. 오고가고

알현하고 찾아감이 형과 같고, 아우와 같아 근년에는 일본 내웅등이 발해국에 거주하면서

음악을 배우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십년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하여 이로 말이암아 차대사

일만복등을 일본국에 파견하여, 알현하라고 했는데, 사년동안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아, 다

시 차대사 오수불등 사십명으로 받들어 고하여, 다시 남은 일이 없어 나아가는 무리에게 서

를 붙여 배안에 함께 있으니, 대정관의 상자로써, 받지 않으면 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한 말하길 발해의 사신이 이길을 취하여 오니 전에는 끊어짐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옛 법

에 의지함이 마땅하니, 축자도(?)를 쫓아 나아갑니다.

史都蒙 高祿思 高鬱琳 高淑源 史道仙 高珪宣(사도몽 고록사 고울림 고숙원 사도선 고규선)

都蒙官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 祿思大判官 鬱琳少判官 淑源判官 導線大錄事 珪宣少錄事 文

王時率一百八十七人 同使日本 赴王妃喪 兼賀倭皇卽位 遭風漂沒 僅存四十六人 淑源及少錄事

一人亦死 日本人問烏須弗歸時 大政官處分 渤海使宜依舊例向太宰府 不得取此路而來 今違約束

其事如何 都蒙等對曰 實承此旨 故都蒙等發自 邑南府吐號浦 西指對馬島竹實之律 疑卽津 而

海中遭風 着此禁境 失約之罪更無所避 日本又欲以十六人別留海岸 都蒙曰 此猶割一身而分背

失四體而蒲伏 日本乃聽同入 倭皇御重閣 觀騎射 都蒙與焉 與其使朝臣殿繼俱來 獻絹五十疋絲

二百鉤綿三百屯 都蒙請加附 又獻黃金小一百兩水銀大一百兩 金漆一缶漆一缶海石榴油一缶 水

精念珠四貫 檳櫛扇十枚 賻王后絹二十疋 二百疋綿二百屯

도몽은 대부사빈소령개국남의 벼슬이고, 록사는 대판관이고, 울림은 소판관, 숙원은 판관,

도선은 대록사, 규선은 소록사이다. 문왕때에 백팔십칠명을 거느리고 함께 일본의 사신으로

가서 왕비의 죽음을 알리고, 겸하여 왜황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풍랑을 만나 침몰하여 겨우

사십육명만 살아남았는데, 숙원과 소록사 한명도 역시 죽었다. 일본사람이 묻기를 오수불이

돌아갈 때 대정관에 나누어어 발해의 사신이 옛법대로 태제부를 향하여 이길로 오지 않으니

이제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일을 어찌된 것입니까? 도몽등이 대답하여 말하길, 받들겠

습니다. 고로 도몽등이 폐읍 남부 토호포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대마도 죽실율(율이 진일

까 의심한다.)로 가다가 바다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나, 이 금지된 지역에 오니, 약속을 어

긴 죄는 피할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또한 열여섯 사람을 나누어 해안에 머물게 하고자

하니, 도몽이 말하길, 이것은 마치 몸을 나누고, 등을 쪼개고 사지를 잃어버려 업드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이 이 말을 듣고 함께 들어오게 하니 왜황이 문설주에 기대어 말탄 궁

병을 보았다. 도몽이 그 알현하는 신하 전계와 함께 나아가 명주 오십필, 실 이백구, 면 삼

백둔을 받쳤다. 도몽이 더있음을 고하고, 또한 황금작은거 일백량, 수은 큰 것 일백량, 금

칠(옻) 일부, 칠 일부, 해석류유 일부, 수정염주 네관, 빈즐선 십매, 왕후의 부의에 명주

이십필, 시 이백필, 면 이백둔을 받쳤다.

張仙壽(장선수)

官獻可大夫司賓少令 文王時使日本 以王旨言朝臣殿繼等失路 漂着遠夷之境 船破 爲造船二 領

歸 倭皇內射 先壽與焉

관직은 대부사빈소령이고, 문왕때의 일본 사신이다. 왕지언과 조신전계등과 길을 읺고 먼

오랑캐의 지경에 다았다. 배가 깨져 배 두척을 만들어 돌아왔다. 왜황의 궁에 선수가 함께

했다.

高伴粥 高說昌(고반죽 고설창)

伴粥押領 說昌通使 文王時同使日本 以國書違例不受 又責不由筑紫道 利官人爭坐說昌之上

大政官爲異其班位 伴粥船破 日本給船九隻以歸

반죽은 압령이고, 설창은 통사이다. 문왕대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국서로써 받아들

이지 않음은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하고, 또한 축자도를 따르지 않음을 꾸짓었다. 철리관의

사람들이 다투자 설창을 위에 올리고, 대정관을 달리 하여 그 위치를 나누었다. 반죽의 배

가 깨지가 일본이 배 구척을 보태어 돌아왔다.

呂定琳(여정림)

官庭諫大夫工部郎中 康王時率六十人使日本 漂着夷地志理波村被掠 人多散亡 出羽國言狀 倭皇

置越後國供給 定琳置在堂學問日本僧永忠書於倭皇 倭皇附答書

벼슬은 대부공부랑중이다. 강왕때에 일본사신으로 육십명을 거느렸다. 표류하다 오랑캐땅에

이르러 지리파촌을 지나다 사람들이 많이 흩어지고, 망하였다. 출우국말에 왜황이 월을 두

고 후국에 도움을 주었는데 정림이 집에 있어 일본의 중 영충이 왜황의 글로 학문을 물었

다. 왜황이 답서를 썼다.

大昌泰(문창태)

官慰 疑卽衛 軍大將軍左熊衛都將上柱國開國子 康王時使日本 倭皇御太極殿引見 爲 四拜爲二

拜不拍手 又構綵殿以享之 渤海使舶 多着能登國 倭修飾其停宿之處

관직은 위군(慰는 곧 衛로 의심된다.)으로 대장군좌웅위도장상주국개국자이다. 강왕때의 일

본 사신으로 왜황이 태극전으로 불러서 보았다. 네 번절하는 것을 덜어 두 번 절하고 박수

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구채전에서 이에 제사지냈다. 발해의 상선이 능등국에 많이 오니

왜국에서 그 머무는 곳을 정하여 꾸미었다.

高南容 高多佛 此下七人不知何王時(고남창, 고다불, 이하 일곱명은 어느 왕때인가를

알지 못한다.)

南容再使日本 其國或宴於鴻 館 或宴於朝集院 與其使宿彌東人俱來 東人以國書不據 棄之而去

多不以酋領隨 南容脫留越前國 倭置之越中國給食 使習語生等學渤海語

남창은 두 번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그 나라는 홍려관에서 연회를 하거나, 혹은 조집원에

서 연회를 하였다. 그 사신 숙니동인과 함께 돌아왔다. 동인이 국서를 가지지 않고 이를 버

려, 잃어버리자 다불이 수행하여 갔다. 남창이 월전국에 머무르자, 왜국에서 월중국에 식량

을 더하여, 두니 사신이 말을 익히고 아이를 낳아고, 발해말을 익혔다.

王孝廉 高景秀 高莫善 王昇基(왕효렴 고경수 고막선 왕승기)

孝廉大使 景秀副使 莫善昇基判官 同使日本 倭皇授孝廉從三位 景秀正四位下 莫善昇基正五位

下 又賜錄事以下祿 唐越州人周光翰言升則等 自日本隨使者來

효렴은 대사이고 경수는 부사, 막선과 승기 판관으로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왜황이

효렴을 종삼위를 하사하고, 경수를 정사위, 막선과 승기를 정오위를 하사하였다. 또한 녹상

에게 녹봉을 하사하였다. 당의 월주인 주광한과 언승칙등이 일본의 사신을 따라 왔다.

王文矩(왕문구)

使日本 倭皇於 樂殿 宴五位以上 文矩爲擊毬 倭皇賜綿二百屯

일본의 사신이다. 왜황이 풍락전에서 연회를 하고 오위를 내렸다.(?) 문구가 격구를 하자

왜황이 면 이백둔을 내렸다.

衛鈞(위균)

官 州刺史 遼天顯元年正月 忽汗城破 七月鈞城守 遼大元帥堯骨帥師來攻 乙丑城陷

관직은 철주자사이다. 요 천현원년 정월, 홀한성이 깨지고, 칠월 균이 성을 지켰다. 요대원

수 요골수사가 공격하여 을축에 성이 함락되었다.

大素賢(대소현)

官司徒 忽汗城破 素賢降遼 遼拜爲東丹國次相 太宗會同三年 東京宰相耶律羽之 言其貪墨見黜

관직은 사도이다. 홀한성이 깨지자 소현이 요에 항복하였다. 요의 배가 동단국 차상에 삼았

다. 태종회동삼년 동경의 재상 야율우가 그 탐함을 말하니, 묵형을 받고, 쫓겨났다.

高模翰(고모한)

一名松 有 力善騎射 好讀兵 忽汗城破 避地高麗 高麗王妻以女 因罪亡歸遼 屢立戰功 官至中

臺省左相 封 郡開國公 遼史自有傳

일명 송이다. 힘이 있고, 기사에 능하고, 병사를 잘 다루었다. 홀한성이 깨지자 고려땅으로

도망하여 고려왕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죄를 용서받아 요로 돌아가 전공을 세워 중대성좌상

의 관직에 오르고 철군개국공을 봉함을 받았다고 요사에서 전한다.

諸臣史失名者(인선의 여러 신하로 역사에서 이름을 잃어버린자,)

遼天顯元年正月庚申 扶餘城陷 守將死之

遼天顯元年正月丙寅 王使老相統兵三萬禦遼 遼先鋒 隱安端 北部宰相蕭阿古只將萬騎至 老相

戰敗降于遼 遼拜爲東丹國右大相

遼天顯元年二月庚寅 安邊 署南海定理四府節度使 皆降于遼

遼天顯元年三月 安邊 署定理三府復城守 遼 穩安端帥師來攻 丁丑三府皆敗 壬午安邊將二人

死之

遼天顯元年五月 南海定理二府復城守 遼大元帥堯骨帥師來攻 六月丁酉 二府皆敗

長嶺府 自忽汗城始破時 城守不下 遼天顯元年三月戊午 遼夷 畢康黙記左僕射韓延徽 帥師來攻

至七月辛巳遼主 述律后決軍國事 八月辛卯城陷

忽汗城破後 已降郡縣復城守 諸部蜂起 遼阿古只與康黙記討之 有遊騎七千自鴨綠府來 勢張甚

阿古只一戰克之 斬二千餘級 進軍破回跋城

요천현원년정월 경신 부여성이 함락되자 지키던 장수를 죽였다.

요천현원년정월 병인 왕이 노상에게 병사 삼만으로 요에 맞서게 하였다. 요의 선봉은 척은

안단으로, 북부재상 소아고지가 장차 기병만명으로 이르러 노상이 전투에 패하여 요에 항

복하였다. 요의 배가 동단국 우대상에 삼았다.

요천현원년 이월 경인 안변, 막힐, 남해, 정리 사부의 절도사가 모두 요에 항복하였다.

요천현원년 삼월 안변 막힐 정리의 삼부가 다시 성을 지키니, 요의 척은안단수사가 공격해

왔다. 정축 삼부가 모두 패하고, 임오 안변장수 두명을 죽였다.

요천현원년 오월 남해, 정리 이두가 성을 지키자 요의 대원사 요골사사가 공격하여 유월 정

유에 두부가 모두 패하였다.

장령부는 홀한성이 처음 깨졌을 때 성을 지키어, 함락되지 않았는데 요천현원년삼월 술오에

요의 이리필 강묵기, 좌복사 한연휘장수가 공격하였다. 칠월 신사에 이르러, 요의 주인이

죽자 술율후가 군국사를 이었다. 팔월 신묘에 성이 함락되었다.

홀한성이 깨진 후에 이미 항복한 군형들이 성을 지키자 여러 부들이 일어났다. 요의 아고지

가 강목기와 함께 이를 토벌하였다. 유가 기병 칠쳔으로 압록부에 와서 그 세가 성하였는

데, 아고지가 한번의 전투로 이를 이기고 이천여급을 베니, 나아가던 군사들이 깨어져 발성

으로 되돌아 갔다.

申德(신덕)

官將軍 高麗太祖八年九月丙申 與其屬五百人 奔高麗 是歲遼攻渤海 明年忽汗城破

관직은 장군으로 고려태조팔년구얼 병신에 오백명과 고려에 도망왔다. 이해에 요가 발해를

공격하였고, 다음해에 홀한성이 깨졌다.

大和鈞 大均老 大元鈞 大福謨 大審理(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대심리)

和鈞 均老 官禮部卿 元均官司政 福謨官工部卿 審理官左右衛將軍 高麗太祖八年九月庚子 率民

一百戶奔麗

화균, 균노의 관직은 예부경이고, 원균은 사정, 복모는 공부경 심리는 좌우위장군으로 고려

대조팔년구월 경자에 백성 일백호를 거느리고 고려로 도망왔다.

冒豆干 朴漁(모두간 박어)

冒豆干官左首衛小將 漁官檢校開國男 高麗太祖八年十二月戊子 率民百戶奔高麗

도두간은 좌수위소장이고 어는 검교개국남이다. 고려태조팔년 십이월 술자에 백성 백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도망왔다.

吳興 僧載雄(오흥 승재웅)

興官工部卿 高麗太祖十年三月甲寅 與其屬五千人奔高麗 載雄亦與其徒六十人 隨興奔高麗

흥은 공부경이고 고려태조십년 삼월 갑인에 그 무리 오천명과 함께 고려에 도망왔고, 재웅

도 역시 무리 육십명과 함께 흥을 따라 고려에 도망왔다.

金神(금신)

高麗太祖十日年三月戊申 率六千戶奔高麗

고려태조십일년 삼월 술신에 육천호를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大儒範(대유범)

高麗太祖十一年七月辛亥 率民奔高麗

고려태조 십일년 칠월 신해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隱繼宗(은계종)

高麗太祖十一年九月丁酉 與其屬奔高麗 太祖引見於天德殿 繼宗等三拜 人謂失禮 太相含弘曰

失土人三拜 古之禮也

고려태조십일년 구월 정유 그 무리와 함께 고려에 도망왔다. 태조가 천덕전에서 이끌어 보

시니, 계종등이 삼배를 하자 사람이 예를 잃어버렸다고 일컷자, 태상 함홍이 말하길, 나라

를 잃어버린 사람이 삼배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예입니다. 하였다.

洪見(홍견)

高麗太祖十二年六月庚申 以船二十 載人物奔高麗

고려태조 십이년 유월 경신 배 이십소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에 도망왔다.

大光顯(대광현)

光顯子道秀 顯宗時爲大將 後孫金就 高宗時爲大將 伐蒙古有功 封永順君 遂爲永順太氏 其以大

爲太 未知在何時

광현의 아들은 도수이다. 현종때의 대장이고 후손은 금취로, 고종때의 대장이다. 몽고를

친 공이 있어 영순군에 봉함을 받아 영순태씨를 이루었다. 대를 태로 한 것을 이때인줄 어

찌 알겠는가?

世子也 高麗太祖十七年七月 率衆數萬奔高麗 太祖賜姓名王繼 附之宗籍 特授元甫守白州

以奉其祀 賜僚佐爵軍士田宅有差 其後遼遣使 遣高麗太祖駱駝五十匹 太祖以契丹與渤海嘗連和

忽生疑貳 不顧舊盟 一朝殄滅 此爲無道之甚 不足遠結爲隣 絶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繁駱

駝萬夫橋下 皆餓死

인선의 세자로 고려 태조 십칠년 칠월 무리 수만을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태조가 성명을

주어 왕계라 하니, 종적에 붙이었다. 특별히 원보수백주를 하사하니 이에 받들어 제사지냈

다. 요좌작군사와 밭과 집을 차이를 두어 하사하였다. 그 후에 요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낙타오십필을 보냈다. 태조가 거란고 발해는 일찍이 연결되어 화합하였는데, 갑자

기 두마음으로 의심하여 옛맹세를 돌아보지 않아 하루아침에 멸하게 되었다. 이것은 무도함

이 성한 것이니, 멀이 있는 이웃나라로 족하지 않으니, 그 사귐을 끊는다. 그 사신 삼십명

을 해도로 보내니 낙타가 만부교 아래에서 번성하다가 모두 굶어 죽었다.

陳林(진림)

高麗太祖十七年十二月 與其其屬一百六十人奔高麗

고려 태조 십칠년 십이월 무리 일백육십명과 고려에 도망왔다.

朴昇(박승)

高麗太祖二十一年 率三千餘戶奔高麗

고려태조이십일년 삽천여호를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崔烏斯 文獻通考曰 烏斯羅(최오사 문헌통고에는 오사라라고 한다.)

周世宗顯德初 烏斯與其屬三十人歸周 蓋其酋豪也

주나라 세종현덕초에 오사가 무리 삼십명과 주에 돌아왔는데, 그 두목이 호걸스러웠다.

大鸞河 李勛(대난하 이훈)

宋太祖太平興國四年 平晉陽 移兵幽州 鸞河率小校李勛等十六人 部族三百騎投降 太宗以爲渤海

都指揮使 九年春 太宗宴大明殿 召鸞河慰撫久之 謂殿前都校劉延翰曰 鸞河渤海豪帥 束身歸我

嘉其忠順 夫夷落之俗 以馳聘爲樂 俟高秋戒侯 當與駿馬數十疋 令出郊遊獵 以遂其性 因以緡錢

十萬 酒賜之

송태조태평흥국 사년 평진양이 병사를 유주로 옮길 때 난하가 소교 이훈등 십육명과 부족

삼백기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태종이 발해도지휘사로 삼았다. 구년 봄 태종이 대명전에서

잔치를 베풀며 난하를 불러 오랫동안 위로 하였다. 대전 앞에서 일도교유연한이 말하길, 난

하는 발해의 호걸 장수로 몸이 묶이어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충성스런 마음이 아름답

습니다. 오랑캐의 풍속에 말을 달리며 즐기니, 고추계후를 내리어, 마땅히 준마 십여필을

내리고, 성밖에서 사냥하여 그 성품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돈 십만과 술을 내려주십시오.

했다.

地理考(지리고)

五 京(오경)

上京 龍泉府(상경 용천부)

中京 顯德府(중경 현덕부)

東京 龍原府(동경 용원부)

南京 南海府(남경 남해부)

西京 鴨綠府(서경 압록부)

十 五 府(십오부)

龍泉府 肅愼古地

용천부 숙신고지이다.

顯德府 肅愼古地在龍泉府南

현덕부 숙신고지로 용천부의 남쪽이다.

龍原府 濊貊古地亦曰柵城府爲日本道

용원부 예맥의 고지로 또한 말하길 책성부로 일본가는 길이다.

南海府 沃沮古地爲新羅道

남해부 옥저고지로 신라가는 길이다.

鴨綠府 高句麗古地爲朝貢道

압록부 고구려의 고지로 조공가는 길이다.

長嶺府 高句麗古地爲營州道

장령부 고구려의 고지로 영주가는 길에 있다.

扶餘府 扶餘古地爲契丹府

부여부 부여고지로 거란부이다.

署府 扶餘古地

막힐부 부여고지이다.

定理府 相婁古地

정리부 읍루고지이다.

安邊府 相婁古地

안변부 읍루고지이다.

率賓府 率賓古地

솔빈부 솔빈고지이다.

東平府 拂涅古地

동평부 불열고지이다.

利府 利古地

철리부 철리고지이다.

懷遠府 越喜古地

회원부 월희고지이다.

安遠府 越喜古地

안원부 월희 고지이다.

六十二州(육십이주)

龍泉府三州(용천부 3주)

龍州 湖州 渤州(용주, 호주, 발주)

顯德府六州(현덕부 6주)

盧州 顯州 州 湯州 榮州 興州(노주 현주 철주 탕주 영주 흥주)

龍原府四州(용원부 4주)

慶州 鹽州 穆州 賀州(경주 염주 목주 하주)

南海府三州(남해부 3주)

沃州 晴州 椒州(옥주 청주 초주)

鴨綠府四州(압록부 4주)

神州 桓州 州 正州(신주 환주 풍주 정주)

長嶺府二州(장령부 2주)

瑕州 河州(하주 하주)

夫餘府二州(부여부 2주)

扶州 仙州(부주 선주)

署府二州(막힐부 2주)

州 高州(막주 고주)

定理府二州(정리부 2주)

定州 瀋州(정주 심주)

安邊府二州(안변부 2주)

安州 州(아주 심주)

率賓府三州(솔빈부 3주)

華州 蓋州 建州(화주 개주 건주)

東平府五州(동평부 5주)

伊州 蒙州 州 黑州 比州(이주 몽주 타주 흑주 차주)

利府六州(철리부 6주)

廣州 汾州 蒲州 海州 義州 歸州(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懷遠府九州(회원부 9주)

達州 越州 懷州 紀州 富州 美州 福州 邪州 芝州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

安遠府四州(안원부 4주)

寧州 州 慕州 常州(영주 미주 모주 상주)

三獨奏州(삼독주주)

州 銅州 涑州(영주 동주 속주)

右見新唐書稱六十二州 而只列六十州 淸一統志有郭州 而今不載 知唐書之有遺也 其五京之制

上京龍泉府者 今之寧古塔也 中京顯德府者 今之吉林也 東京龍原府者 今之鳳凰城也 南京南海

府者 今之海城縣也 西京鴨 府者 今未可考 而當在鴨綠江近處 然則以龍原爲東京 以鴨綠爲西

京者可疑 豈鳳凰城以西 復有一鴨綠江 如遼陽之浿水歟 置朝貢道於鴨綠者 以海路通唐也 考諸

日本逸史 鄧州襄陽爲朝 之路良然 南海府之爲新羅道 亦以海路通新羅也 文獻通考及淸一統志

以鴨綠爲朝鮮道 是時無朝鮮 當從新唐書

신당서를 보면 62주를 칭하는데 단지 60주만 보였다. 청일총지에는 곽주가 있으나, 여기에

는 실지 않으니 당서는 그 빠진 것을 알고 있다. 오경의 제도가 있으니 상경용천부로 지금

의 영고탑이고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길림이고 동경용원부는 지금의 봉황성이며, 남경남해부

는 지금의 해성현이고, 서경압록부는 지금 알지 못하는데 마땅히 압록강근처일 것이다. 그

러한즉 용경을 동경으로 삼으니 압록이 서경임이 의심스러워 어찌 봉황성의 서쪽인가? 다시

압록강을 요양의 패수로 하면 고공도를 압록에 두어 해로로 당과 통한 것이다. 일본일사를

고찰해 보면, 등주 양양을 조삼하는 길로 함이 마땅하고 남해부를 신라도로 하니, 역시 해

로로 신라와 통한 것이다. 문헌통고와 청일통지에 압록은 조선도이다 하니, 이때는 조선이

없으니, 마땅히 신당서를 따른다.

顯德府 本朝鮮之地 卽平壤城 周武王以封箕子 漢末爲公孫度所據 晉時陷於高句麗 唐置安東都

護 爲大氏所有 中宗時賜名忽汗州

현덕부는 본래 조선의 땅으로 곧 평양성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봉하고, 한 말에 공손도가

일어난 곳이고, 진때에 고구려에 떨어지고, 당이 안동도호를 두고 대씨가 이를 둔 것이다.

중종때에 이름을 홀한주라 명하였다.

龍原府 東南濱海 高句麗慶州疊石爲城 周圍二十里 唐薛仁貴伐高句麗 擒善射於石城 卽此

용원부는 동남이 바다에 임하니, 고구려 경주 첩석이 성으로 하고, 주위가 이십리이다. 당

의 설인귀가 고구려를 치니 활을 쏘기에 적당한 석성으로 이것인 것이다.

鴨綠府 高句麗故國城 高三丈 廣輪二十里

압록부는 고구려의 옛성으로 높이가 삼장이고, 둘레가 이십리이다.

東平府 唐李世勣征高句麗拔遼城 程明振蘇正方 大破高句麗兵於新城 皆此地 有遼河羊腸河錐子

河蛇山狼山黑山巾子山

동평부는 당의 이세적이 고구려르 정벌하여 요성을 빼앗은 정명진소정방(??)이다. 고구려병

사를 신성에서 크게 격파하니 모두 이 땅이다. 요하와 양양하 추자하 사산 낭산 흑산, 건자

산이 있다.

州 漢安市縣 高句麗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卽此

철주는 한의 안시현으로 고구려 안시성이다. 당 태종이 공격하여 얻지 못하니, 설인귀가 백

의등선한 곳으로 이곳이다.

湯州 漢襄平縣

탕주는 한의 양평현이다.

興州 漢海平縣

흥주는 한의 해평현이다.

慶州 太保山黑河之地

경주 태보산과 흑하의땅이다.

桓州 高句麗中都城 創立宮闕 謂之新國 王釗爲慕容 所敗 宮室焚蕩 卽此

환주는 고구려 중도성으로 궁궐이 서니 신국이라 하였다. 왕 쇠가 모용황에게 깨진 곳이고,

궁실은 모두 불타니 이곳이다.

蓋州 後改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騈列最爲衝會 卽高句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勣 攻破之是也

개주는 후에 개진주로 진한때 얻은 이름이다. 우물과 읍락이 나란히 늘어서 있어 가장 공격

하고 모이기 좋은 곳이니 즉 고구려의 개모성으로 탕태종 이세적이 공격하고 깨뜨렸다.

涑州 有涑沫江 卽曰涑沫水 涑沫 靺鞨所據

속주는 속말강이 있으니 즉 속말수로 속말은 말갈이 일어난 곳이다.

顯德府郡一 杉盧 或稱縣隸盧州

현덕부 1군 삼노로 혹 노주에 속해 있다 한다.

龍原府郡三 龍河 或稱縣隸鹽州 會農 或稱縣隸穆州 吉理 或稱縣隸賀州

용원부 3군 용하는 치주에 속하고, 회농은 목주에, 길리는 하주에 속한다.

鴨綠府郡二 盤安 隸 州 沸流 隸正州 沸流王古地 有沸流水 爲公孫康小

압록부 2군 반안은 풍주에 비류는 정주에 속하는데 비류왕의 고지고 비류수가 있으니 공손

강이 아울렀다.

利府郡一 利 隸州未詳 漢襄平地 高句麗當山縣

철리부 1군 철리는 상세하지 못하나 한의 양평땅이라 하니 고구려 당산현이다.

府州未詳郡三 安定 銅山 高句麗東山縣 在龍泉府南 漢侯城縣 北多山險 安寧 藁離國古地

부와주가 상세하지 않은 3군 정안 동산은 고구려 동산현이고 용천부 남쪽에 있다. 한의 후

성현이고 북쪽은 산이 험하다. 안녕은 고리국의 옛땅이다.

龍泉府縣五 富利 長平 幷隸龍州 貢珍 隸渤州 肅愼 佐慕 幷隸州未詳

용천부 5현 부리 장평은 용주에 속하고 공진은 발주에 속하고 숙신 좌모는 상세치 않다.

顯德府縣二十六(현덕부 26현)

山陽 漢陽 白巖 霜巖 古 離郡地 漢屬險瀆縣 幷隸盧州 永 隸顯州 神仙傳仙人白仲理 能

煉神丹 點黃金以救百姓 卽此地 漢遼隊縣 位城 河瑞 蒼山 龍珍 幷隸 州 靈巖 常 白

石 均谷 嘉利 幷隸湯州 盛吉 蒜山 山 幷隸興州 長寧 金德 或稱常樂 漢浿水縣高句麗

縣 鷄山 漢居就縣 昔丁令威家此 去家千年化鶴來歸 集於華表柱 以 畵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塚累累 花山 漢望平縣 紫蒙 漢鏤芳縣 拂涅國置東平

府於此 崇山 水 綠城 奉集 幷隸州未詳

산양 한양 백암 상암은 옛날 비리군의 땅으로 한의 험독현에 속했다. 아울러 노주에 속한

다. 영풍은 현주에 속하고 신선전에 선인 백중리가 능히 신단을 제련하여 황금으로 백성을

구하니 곧 이땅이다. 한의 요대현이다. 위성 하서 창산 용진은 철주이다. 영암 상풍 백석

균곡 가리는 탕주이다. 성길 산산 철산은 흥주이다. 장령 금덕(혹 상락)은 한의 패수현과

고구려현이다. 계산은 한의 거취현이다. 옛날 정령위가가 이것이다. 집을 떠나 천년 뒤 학

이 돌아와 모이면 기둥에 꽃이 핀다 주화표에 이르길 새가 있네 새가 정령위에 있네 집떠나

천년 이제 돌아와 성곽에 비록 사람이 없어니 어찌 선총에 겹겹이 배우랴(??) 화산은 한의

망평현이다. 자몽은 한의 누방현이다. 불열국 동평부가 이 곳이다. 숭산 위수 녹성 봉집은

상세치 않다.

龍原府縣十五(용원부 15현)

龍原 永安 烏山 壁谷 熊山 薛仁貴征高句麗 與其將溫沙문 戰熊山卽此 白陽 幷隸慶州 海

陽 接海 格川 幷隸鹽州 水 順化 美縣 幷隸穆州 洪賀 送誠 石山 幷隸賀州

용원 영안 오산 벽곡 능산은 설인귀가 고구려를 정벌하고, 그 장수 온사문과 전투한 웅산이

이곳이다. 백양은 경주에 속하고 해양 안해 낙천은 치주에 속한다. 수기 순화 미현은 목주

에 속하고 홍하 송성 석산은 하주에 속한다.

南海府縣十六(남해부 16현)

天晴 神陽 蓮池 狼山 仙巖 幷隸晴州 椒山 貂嶺 泉 尖山 巖淵 幷隸椒州 東界新羅

西北故平壤城 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沃沮 鷲嶺 龍山 濱海 昇平 靈泉 幷隸州未詳

천청 신양 연지 낭산 신암은 청주에 속하고, 초산 초령 시천 첨산 암연은 초주에 속한다.

동쪽의 경계는 신라고 서북은 옛날 평양성이고 동북은 해주에 이르는데 120리 이다. 옥저

취령 용산 빈해 승평 영천은 상세치 않다.

鴨綠府縣十(압록부 10현)

桓都 神鄕 浿水 幷隸桓州 神鹿 神化 劒門 安 渤恪 鈒壤 石 幷隸州未詳

환도 신향 패수은 환주에 속하고 신록 신화 검문 안풍 발각 습양 협석은 상세치 않다.

夫餘府縣十一(부여부 11현)

布多 扶餘 顯義 鵲川 强師 新安 漁谷 永寧 水 扶羅 永平 幷隸州未詳

포다 부여 현의 작천 강사 신안 어곡 영녕 풍수 부라 영평은 상세치 않다.

懷遠府縣九(회원부 9현)

富壽 優富 幷隸富州 山河 黑川 麓川 幷隸美州 越喜 懷福 豹山 乳水 幷隸州未詳

부수 우부는 부주에 속하고, 산하 흑천 녹천은 미주에 속하고 월희 회복 표산 유수는 상

세치 않다.

安遠府縣二(안원부 2현)

慕化 崇平 幷隸慕州

모화 숭평은 모주에 속한다.

府州未詳縣九(부주가 상세치 않은 9현)

長泰 永 熊山 靈峯 麓郡 麓波 雲川 安夷 萬安

장태 풍영 웅산 령봉 녹군 녹피 운천 안이 만안

右見遼史 太祖東幷渤海 得城邑之居百有三云 而郡縣名可考者 今爲百十三 可疑

五京十五府六十二州 多在今吉林烏喇寧古塔及朝鮮界 其遼東古地 雖入渤海 建置無聞 地理志賈

耽所記可考 遼時東京州縣多襲其名號 非復古地 遼史謂皆渤海之舊 其實未盡然也

요사를 보면 태조 동쪽 발해를 아울르고 성읍을 얻으니 103개에 이르렀다. 군현의 이름이

가히 고찰해 보니 이제 113개에 이르고 가히 의심스럽다.

龍泉府 漢三國晉時 相婁國地 後魏齊周時 勿吉國地 隋時靺鞨國地 唐時入渤海爲龍泉府 金時上

京會寧府地 元時合蘭府水達達等路 明時建州毛隣衛等地 今寧古塔

용천부는 한나라 삼국 진때에 읍루국의 땅이다. 후에 위제조때 물길국땅이고 수때에는 말갈

국땅이고 당나라때에 발해가 들어와 용천부라 하였다. 금때에는 상경회령부 땅이고 원 나라

때에는 합란부 수달달등로이고 명때에는 건주 모린위등의 땅이다. 이제는 영고탑이다.

顯德府 今在吉林烏喇城東南 地理志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 至泊 口 得

渤海之境 又溯流五百里 至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

州爲寶中王所都 按顯州卽顯德府 唐先天二年 賜名忽汗州是也 遼史謂卽平壤城 又以遼所置東京

之顯州 爲本顯德府地 皆誤也

현덕부는 이제는 길림 오나성 동남쪽이다. 지리지에 압록강 어귀에서 배로 백여일을 가니

이에 작은 배로 소류 동북 30리로 박작구에 이르러, 발해의 지경에 이른다. 또한 소류 오백

리에 구도현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도이다. 또한 동북 소류 이백리에 신주에 이르르고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러 조중왕때의 도읍이다. 현주는 곧 현덕부로 당의 선천

이년 혼한주명을 받은 것이 이것이다. 요사에 곧 평양성이라 하고 또한 요에서 동경의 현주

를 두니 본래 현덕부 땅으로 모두 잘못이다.

龍原府 漢時玄 郡地 晉時屬平州 隋時高句麗慶州地 唐時屬安東都護府 入渤海爲龍原府 遼時

開州鎭國軍 金時石城縣 元時屬東寧路鳳凰城 金鳳凰城

용원부는 한때에 현토군의 땅이다 진때에 평주에 속하고 수때에 고구려 경주의 땅이고 당나

라때에 안동도호부에 속하여 발해에 들어 용원부로 하였다. 요 때에 개주지국군이고 금때에

석성현이고 원나라때에는 동녕로 봉황성에 속하고 금때에는 봉황성이었다.

南海府 漢時玄 郡地 後屬樂浪都尉 東漢時封沃沮 三國時平州地 晉以後高句麗沙卑城 唐置蓋

州 入渤海爲南海府 遼時海州南海軍 金時澄州南海郡 元時省入遼陽路 明時海州衛 今海城縣也

남해부는 한나라때에는 현토국군의 땅이다. 후에 낙랑도위에 속하고 동한때에는 옥저에 봉

함을 주었고 삼국때에 평주띵에 속하고 진나라때에 후로는 고구려 사비성에 속하였다. 당에

서 개주르 두었고 발해에 들어와 남해부라 하고 요때에 해주남해군이고 금때에는 등주 남해

군 원때에는 성입요양로이고 명때에는 해주위이니 이제 해성현이다.

夫餘府 漢時扶餘國地 唐置黑水都督府 入渤海爲扶餘府 又爲龍泉府 遼隸東京 金時會寧府陞上

上京 元時開元路 明時三萬衛 今開元縣

부여부는 한나라때에 부여국땅이다 당이 흑수도독부를 두고 발해에 들어와 부여부라 하니

또한 용천부라고 하였다. 요때에는 동경에 속하고 금때에는 회령부승상상경이고, 원때에는

개원로 명때에는 삼만위니 이제는 개원현이다.

瀋州 漢時相婁扶餘沃沮朝鮮等地 三國晉時平州地 後魏時營州地 齊周時高句麗地 隋時營州地

唐時入渤海爲瀋陽 屬定理府 遼時瀋州昭德軍 金時瀋州顯德軍 元時瀋陽路 明時瀋陽中衛 今奉

天府 通志云 有奧婁河 註曰奧婁卽相婁

심주는 한때에 읍루,부여,옥저,조선등의 땅이다. 삼국진때에는 평주땅이고 후위때에는 영주

땅이고 제 주때에는 고구려땅이다. 수때에는 영주땅이고 당때에는 발해에 들어와 심양이 되

니, 정리부에 속하였다. 요때에는 심주소덕군이고 금때에는 심주 현덕군이고 원때에는 심양

로이고 명때에는 심양중위니 이제는 봉천부로 통지에 말하길 오루하가있으니 주석하길 오루

는 곧 읍루이다.

蓋州 漢時西盖馬縣 三國時平州地 晉以後高句麗地 唐時高句麗盖牟城 太宗取其地置盖州 入渤

海仍置盖州 後改辰州 遼時辰州奉國軍 金時盖州奉國軍 元時盖州 明時盖州衛 今革平縣

개주는 한때에 서개마현이다. 삼국때에 평주땅이고 진때 후로는 고구려땅이다. 당때에는 고

구려 개모성이고 태종이 이 땅을 취하여 개주룰 두니 발해에 들어와 개주를 두고 후에 개진

주라 하니 요때에 진주봉국군, 금때에는 개주봉국군 원때엔느 개주 명때에는 개주위 이니

이제는 혁평현이다.

富州 漢時相婁國地 隋時越喜國地 唐時入渤海爲富州 屬懷遠府 遼時銀州富國軍 金時新興縣 元

時省 明時 嶺衛 今 嶺縣

부주는 한때에 읍루국땅이다. 수때에는 월희국 땅으로 당때에는 발해에 들어와 부주를 두니

회원부에 속하고 요때에는 은주부국군 금때에는 신흥현 원때에는 성 명때에는 철령위니 이

제는 철령현이다.

杉盧郡 漢時玄 郡地 晉以後高句麗地 唐時置金州 入渤海爲杉盧郡 遼時化成縣 金時蘇州安復

郡 元時屬盖州路 明時金州衛 今寧海縣

삼노군은 한때에 현토군의 땅이고 진때 후로는 고구려땅으로 당때에는 금주를 두니 발해에

들어 삼노군이라 하였다. 요때에 화성현이고 금때에는 소조안복군 원때에는 개주로에 속하

고 명때에는 금주위 이니 이제는 령해현이다.

忽汗河 今名虎爾哈河 源出吉林烏喇界 東北流經古會寧城北 又九十餘里 繞寧古塔城南 復折而

北流七百餘里 入混同江 唐時謂之忽汗河 大氏置忽汗州 新唐志云 渤海王城臨忽汗海 金時名金

水 俗謂金爲按出 亦稱按出虎水 是爲金源 明一統志忽兒海河 北流入松花江 是也

홀한하는 지금의 이름이 호이합하로 근원은 길림 오나경계에서 나오는 동북으로 흘러 옛날

회령성북쪽으로 90여리이다. 영고탑성남을 돌아 들어와 북으로 700여리를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간다. 당나라때에는 홀한하라 하고 대씨가 홀한주를 두니 신당지에 발해왕성이 홀한해

에 임해있다. 금나라때에는 금수라 하는데 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칭하여 호수라 하니

이것은 금에서 기원하니 명일통지에 홀아해하라 하니 북으로 흘러 송화강에 들어가니 이것

이다.

上京城 在今寧古塔城西南 唐書曰 天寶末大武藝 徙上京 直舊國三百里忽汗河之東 賈耽曰 自安

東都護府東北 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之長嶺府千五百里 至渤海王城 以此考之 當在寧古塔西南

境 與上京相近 明一統志 今滅遼 設都於渤海上京 是也

상경성은 지금 영고탑성 서남에 있다 당서에 말하길 천보말에 대무예에 상경으로 천도하니

옛나라에서 곧바로 300리로 홀한하의 동쪽이다. 고탐이 말하길 안동도호부 동북쪽으로 옛날

개모신성이다 또한 발해의 장령부 천오백리로 발해왕성에 이르르는데 이것을 생각해 보니

마땅히 령고탑 서남방에 있다. 상경은 서로 가까우니 명일통지에 이제 요에 멸망하여 도에

발해상경을 만드니 이것이다.

平壤 漢樂浪郡 後爲高句麗王所都 亦曰長安城 一名王儉城 唐平高句麗 置安東都護府於此 後沒

於渤海 在今朝鮮界內

평양은 한나라때에 낙랑이고 후에 고구려왕의 수도로 장안성이니 일명 왕검성이다. 당이 고

구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이곳에 두니 후에 발해가 멸망하니 지금 조선의 경계내에 있

다.

郭州 唐置郭州 渤海因之 後屬於遼 載記遼以鴨綠江北與高麗 高麗築興 通龍龜郭六城 今在朝

鮮界內

곽주는 당이 곽주를 두고 발해에서 인하니 후에 요에 속하였다. 요에 기록되길 압록강 북쪽

고려이다. 고려가 흥,철, 통 용 귀 육성을 쌓으니 이제 조선의 경계내에 있다.

慕州城 本渤海安遠府 在 州西二百里 州卽鴨綠府 在今朝鮮界內

모주성은 본래 발해안원부로 녹주서쪽 이백리로 녹주는 압록부니 지금 조선의 경계내에 있

다.

右見淸一統志 得渤海之地於我國境內者三 曰平壤曰郭州曰慕州 而謂郭州在鴨綠之北 慕州在

鴨綠之西 則亦可疑也 按新羅統合後 東北以泉井郡爲界 今德源郡也 西北以唐岳縣爲界 今中和

府也 自中和以東祥原遂安谷山 以抵于德源 皆其邊塞也 以外咸鏡平安二道之地 皆爲渤海有矣

及新羅之衰 弓裔始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黔及甑城赤衣黃衣賊明貴等皆降 是時渤海與契丹 未

及交兵 而已失其南鄙於弓裔也 及契丹破渤海 所經理者只鴨綠以北 故鴨綠以南渤海郡縣沿革 遼

史闕焉 無以考也 唐書云 渤海南接新羅 以泥河爲界 文獻備考曰 泥河當在德源界內者 非也 以

遼史考之浿水一名泥河 生 芋草 故亦稱 芋 水 此指遼東京之水也 遼東京者 卽今遼陽縣也

遼史以東京 謂卽渤海中京顯德府 本箕子所封平壤城也 淸一統志辨定甚詳 盖遼史以東京爲平壤

故又載浿水焉 其所謂一名泥河之浿水 乃我國平壤之浿水 今大同江也 新羅渤海分界處 正在大同

一帶耳

청일통지를 보건데 발해의 땅을 얻어 나의 나라에 3개가 있는데 평양 곽주 모주이다. 곽주

는 압록의 북쪽이고 모주는 압록의 서쪽이니 조금 의심스럽다. 신라가 통합한 후에 동북이

천장군과 경계하니 지금의 덕원군이다. 서북은 당악현과 경계이니 지금의 중화부이다. 중화

는 동으로 상원과 안곡산에 이르르니, 덕원과 만나, 이것은 모두 변방으로 함경과 평안 이

도의 땅 밖이다. 모두 발해에 있다. 신라가 약해지고, 궁예가 처음 패강 서쪽 열셋을 진압

하니 평양성주 현, 증성주 적의, 황의 적명귀 등이 모두 항복하니 이때에 발해가 거란과 함

께 병사를 일으겼으나 그 남쪽을 궁예에게 이미 잃었다. 거란이 발해를 깨뜨리니 경계가 단

지 압록의 북쪽이니, 옛날 압록의 남쪽 발해의 군현이 따랐다. 요의 궁궐이니 생각해볼 필

요도 없다. 당서에 말하길 발해남쪽은 신라와 접했는데 니하가 경계이다. 문헌비고에는 니

하는 마땅히 덕원의 경계내에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요사고에 패수가 일명 니하라 하니,

한우초가 난다. 역시 한우를 낙수라 칭하니 이것은 요의 동경의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

의 동경은 지금의 요양현이니 요사의 동경은 곧 발해의 중경 현덕부로 본래 기자의 평양성

을 봉함받은 곳이다. 청일통지에 변별하여 상세히 정하니 요사의 동경은 평양으로 고로 패

수이다 소위 나하가 패하인 것이니 우리나라의 평양의 패수이다 이제는 대동강인 것이니 신

라 발해를 나누는 경계로 대동은 귀모양의 띠인 것이 옳다.

職官考(직관고)

文 職(문직)

宣詔省 左相 左平章事 侍中 左常侍 諫議 中臺省 右相 右平章事 內史 詔誥舍人 政臺省

內閣相 居左右相上 左司政 右司政 比僕射居左右平章事之下 左允 右允 比二丞

선조성에는 좌상과 좌평장사, 시중, 좌상시가 있어 의논하여 간하고, 중대성에는 우상, 우

평장사, 내사가 있어 궁궐의 일을 고하며, 정대성에는 내각상이 있어 좌우상위에 거하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있어 복사에 비교되는데 좌우평장사의 아래이다. 좌윤과 우윤이 있는데

승상과 같은 것이다.

忠部 卿 居司政下

충부의 경은 사정의 아래에 있다

仁部 卿

인부 경

義部 卿 忠仁義部謂之左六司

의부 경 충부, 인부 의부를 일컬어 좌육사라 한다.

爵倉 郎中 員外

작창 낭중 원외

膳部 郎中 員外 幷左史之支司

선부 낭중 원외 좌사의 지사를 아우른다.

智部 卿(지부 경)

禮部 卿(예부 경)

信部 卿 智禮信部謂之右六司

신부 경 지예신부를 일컬어 우육사라 한다.

戒部 郎中 員外

형부 낭중 원외

水部 郎中 員外 幷右司之支司

수부 낭중 원외 우사의 지사를 아우른다.

中正臺 大中正 比御史大夫居司政下 小正

중정대는 대중정이 있는데 어사대부와 비교되는데 사정의 아래이다. 소정이 있다.

殿中寺 大令( 전중사 대령)

宗屬寺 大令(종려사 대령)

文籍院 監 少監 令(문적원 감 소감 령)

大常寺 卿(대상사 경)

司賓寺 卿(사보사 경)

大農寺 卿(대농사 경)

儀章考(의장고)

三秩以上 紫衣牙笏金魚

3질 이상은 자주색 옷에 상아 홀(허리에 끼우거나 들고 다니는 조그만 판 같은 것), 금 어

(허리에 차는 장식품)를 한다.

五秩以上 緋衣牙笏銀魚

5질 이상은 붉은 옷에 상아 홀, 은 어를 한다.

六秩以上 淺緋衣木笏

6질 이상은 엷은 붉은 옷에 나무 홀을 한다.

八秩 綠衣木笏

8질 이상은 녹색 옷에 나무 홀을 한다.

遼天顯四年 太宗幸遼陽 使人皇王 備乘輿羽衛以迎 乾享五年 聖宗巡東京 留守具儀衛迎車駕 盖

故渤海儀衛云

요 천현 사년 태종이 요양으로 가 인황왕을 시켜 깃털달린 수레를 같추어 호위하여 맞이하

고, 건순 오년 성종이 동경으로 가 예를 갖추어 호위하며 수레를 맞이하는 것은 모두 옛날

발해의 예의인 것이다.

按宋史 太祖問趙普 拜禮何以男子 以婦人不 普問禮官不能對 王溥孫貽孫以練達稱曰 自

唐太后朝 婦人始拜而不 大和中幽州從事張建章 著渤海國記 備言其事 普大稱之 意其書多載

渤海儀文 而東國不傳 唐藝文志 張建章渤海國記三卷

송사에 태조가 조보에게 물었다. 절하는 예에 남자는 어찌 궤와 같이 하는데 부인은 그러지

아니한가? 보가 물음에 예관을 능히 알지 못하니, 왕보손이 손자에게 남긴 연달에 말하길

(??) 당태후때에 부인도 절하기 시작했는데 궤가 아니었다. 대화중에 유주종사 장건장이 발

해국기를 썼는데 그 말과 일에서 이를 칭하길 그 책에는 발해의 예의가 문장이 많이 실려

있는데, 동국에 전하지 않는다. 당 예문지에 장건장발해국기 삼권이 있다.

物産考(물산고)

太白山 南海昆布 柵城鼓 扶餘鹿 署豕 率賓馬 顯州布 沃州綿 龍州紬 位城 盧城稻 湄

湖 九都李 樂游梨 富州銀

태백산에는 호랑이(?), 남해에는 곤포, 책성에는 북, 부여에는 사슴, 막힐에는 돼지, 솔빈

에는 말, 현주에는 포, 옥주에는 면, 용주에는 명주, 위성에는 쇠, 노성에는 쌀, 미타호에

는 붕어, 구도에는 오얏, 낙유에는 배, 부주에는 은이 난다.

國語考(국어고)

王曰可毒夫 曰聖王 曰基下 命曰敎 王之父老王 母曰太妃 妻曰貴妃 長子曰父王 諸子曰王子 官

品曰迭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하고, 명을 교, 왕의 아버지를 노왕, 어머니를 태비, 처를 귀비,

장자를 부왕, 여러 아들을 왕자, 관품을 질이라 하였다.

國書考(국서고)

武王與日本國聖武天皇書

무왕이 일본국 성무천왕에게 보내는 서

武王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猷 但增頃仰 伏惟大王 天朝受命 日本開基 奕葉重光 本支百

世 武藝 當列國 濫總諸藩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但以天涯路阻 海漢悠悠 音耗未通 吉

凶絶聞 親仁結援 庶犀前經 通使聘隣 始乎今日 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 游將軍果毅都尉德周

別將舍那婁二十四人 狀 幷附貂皮三百張奉送 土宜雖賤 用表獻芹之誠 皮幣非珍 環 掩口之

主理有限 披膳未期 時嗣音徵 永敦隣好

무왕이 씁니다. 산과 강이 다르고, 국토가 같지 않으니, 바람소리를 들어 이끌려 부질없는

우러름만 더하니 업드려 대왕을 생각합니다. 하늘의 명의 받들어 일본의 터전을 열으니, 번

창하고, 빛이 무겁게 날로 번창합니다. 무예가 분에 넘치어 나라를 다스리고, 여러 변방을

다스려, 다시 고려의 옛땅에 거하니, 부여의 풍속이 있습니다. 단지 하늘의 끝이라 길이 험

하고, 바다의 넓음을 걱정하니, 소리가 통하지 않고, 길흉의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자애로

맺고, 화합하여 사신을 통하여 이웃에 찾아가니 오늘에야 시작되었습니다. 삼가 영원장군랑

장 고인의와 유장군과의도위 덕주, 별장사나루 이십사명을 보내어, 담비가죽 삼백장을 받들

어 잘 싸서 보내니, 땅이 비록 천하나, 정성으로 바치는 것이니, 가죽과 비단이 패물이 아

니어 부끄럽지만 책망하지 마시옵서서. 다스림에 한계가 있으니, 아직 기약함이 없어 후세

에도 영원히 돈독한 이웃이면 좋겠습니다.

文王與日本國聖武天皇書

문왕이 일본국 성무선황에 보내는 서

欽茂啓 山河杳絶 國土 遠 仰望風猷 惟增傾仰 伏惟天皇聖殿 至德遐暢 奕葉重光 澤流萬姓 欽

茂 係朝業 濫總如始 義洽淸深 每修隣好 今彼國使朝臣廣業等 風潮失便 漂落投此 每加優賞

欲待來春放廻 使等貪前苦請乃年歸去 祈辭至重 隣義非輕 因備行資 卽爲發遣 仍差若忽州都督

胥要德等 充使領廣業等 今送彼國 幷附大蟲皮 皮各七張 貂皮六張 人蔘三十斤 蜜三斛 進上至

彼 請檢領

흠무가 씁니다. 산하가 아득하고 국토도 멀어, 바람을 우러르니, 우러름만 더욱 더해갑니

다. 업드려 천황의 성전을 생각하니, 덕이 멀리에 이르고 날도 번창하니, 많은 백성들을 윤

택하게 합니다. 흠무가 분에 넘치어 조업을 잇고, 처음처럼 나라를 다스리니 의롭고 탐욕함

이 없어 윤택하여 늘 좋은 이웃입니다. 이제 저(?) 나라 사신 광업등이 풍랑과 조수로 소식

을 잃고, 이곳에 표류하니 넉넉히 상을 더하여 오는 봄에 돌려보내고자 하니 이에 앞서 알

리는 것이니 올해내에 돌아갈 것입니다. 신에게 비는 것은 무겁고 이웃의 의는 가볍지 않으

니 인하여 갈 재물을 준비하여 곧 보내는 것이니, 거듭 홀주도독 서요덕등과 충사령 광업등

이 어긋나 이제야 저나라에 보내니 대충피와 곰가죽 각 칠장 담비가죽 육장 인사 삼십근 꿀

삼휘를 함께 저나라에 진상합니다. 봉하여 알립니다.

康王與日本國桓武天皇書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 보내는 서

哀緖已具別啓 伏惟天皇陛下 動止萬福 寢膳勝常 崇璘 視息苟延 奄及喪制 官僚感義 奪志抑情

起續洪基 統先烈 朝維依舊 封域如初 顧自思惟 實荷殊眷 而滄溟括地 浪浪湧天 奉膳無由 徒

增傾仰 謹差庭諫大夫工部郞中呂定琳等 濟海起居 兼修舊好 其少土物 具在別狀 荒迷不次

上天降禍 祖大行大王 以大興五十七年三月四日薨背 善隣之義 必聞吉凶 限以滄溟 所以緩告 崇

璘無狀招禍 不自滅亡 不孝罪苦 酷罰罪苦 謹狀力奉啓 荒迷不次 孤孫大崇璘頓首

이별의 슬픔을 갖추고 씁니다. 천왕폐하를 업드려 생각하니, 만복이 움직이고 멈추고, 먹고

자는데 항상 승리하십시오. 숭린이 진실로 잠깐 보아, 갑자기 상을 당하니, 여러 관료들이

의로써 뜻을 빼앗고, 정을 억눌러, 대를 이어서 터전에서 일어나, 선열의 혈통으로 옛것에

의지하는바로 알현하는 강역을 봉함에 처음과 같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생각하건데, 특별

한 은혜가 가득차고, 바다와 땅을 감독하고 낭낭함이 하늘을 끊게 합니다. 찬을 받들메 말

이암이 없고, 무리가 늘어 미음이 기울었다. 삼가 조정의 대부공부랑중 여정림등이 바다를

건너 거쳐하여 겸하여 길을 닦아 옛부터 좋아했는데 그 작은 토산물과 따로 문서를 가졌는

데 헤매어 잇지 못하였다. (??)

崇璘啓 差使奔波 貴申情禮 佇承殊眷 瞻望徒勞 天皇頓降敦私 之使命 佳問盈耳 珍奇溢目 俯

仰自欣 伏增慰悅 其定琳等 不料邊虞 被陷賊場 俯垂恤存 生還本國 奉惟大造 去留同賴 崇璘

猥以冥德 幸屬時來 官承先爵 土統舊封 制命策書 冬中錫及 金印紫緩 遼外光耀 思欲修禮勝邦

結交貴國 歲時朝覲 위帆相望 而去木 材 土之難長 小船泛海 不波則危 或引海不謹 遭罹利害

雖慕盛化 如艱阻何 長尋舊好 幸許來往 則送使雖不過二年 以玆爲限 式作永規 其隔年多少

任廳被裁 裁定之使 望於來秋許以往期 則德隣常在 事與望則異 足表不依 其所寄絹二十疋 二

十疋絲二百鉤綿二百屯 依數領足 今廣岳等使事略畢 情求 時便欲差人 送使奉諭新命之恩 使等

辭以未奉本朝之旨 故致淹滯隨意依心 謹因回次 奉附土物 具在別狀 自知鄙薄 不勝羞愧

숭린이 씁니다.

崇璘啓 使賀萬 卽賀茂也 等至 所 之書及信物 絹 各三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 依數領足 慰悅

實深 雖復巨海漫天 滄浪浴日 路無倪限 望斷雲霞 而巽氣送帆 指期舊浦 軋涯斥候 無闕 糧 豈

非彼此契齊 暗符人道 南北義感 特犀天心者哉 崇璘 有舊封 纘承先業 遠蒙善獎 聿修如常 天

皇遙降德音 重 使命 恩從懷抱 慰諭慇勤 復俯記片書 眷依前請 不遺信物 許以年期 書疏之

間 喜免瑕類 庇 之顧識異他時 而一葦難航 奉知實諭 六年爲限 憚其遲 請更 嘉圖 幷廻通

鑑 從其期限 傍合素懷 然則向風之趣 自不倦於寡情 慕化之勤 可尋 於高氏 又書中所許 雖不

限多少 聊依使者之情 省給行人之數 謹差衛軍大將軍左熊衛都將上柱國開國子大昌泰

充使送國 兼封附信物如別狀 土無奇異 自知差惡

嵩璘啓 使船白等至 枉辱休問 兼信物 絹各三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 缺 數領足 懷愧實深 嘉

厚情 伏知稠疊 前年附啓 請許裁量往還 去歲承書 遂以半紀爲限 崇璘情勤馳係 求縮程期 天皇

捨己從人 便依所請 筐 攸行 雖無珍奇 特見允依 荷欣何極 比者天書降漁 當作海 制使 朝 嘉

命優加 寵章總萃 班霑燮理 列等端揆 惟念寡菲 殊蒙庇 其使昌泰等 무專封 將命非能 而承

優容 倍增嘉慰 而今秋暉將暮 序惟?風 遠客思歸指勞望日 崇 時節 無滯回航 旣許隨心 正宜

相送 未及馹限 不敢同行 謹自廻使 奉附輕 具如別狀

屬國考(속국고)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宋太祖開寶三年 其王烈萬華 因女眞使上表獻 太宗

太平興國六年 又因女眞使上表云 定安國王臣烏玄明言 伏遇聖主 洽天地之恩 撫夷貊之俗 臣玄

明誠喜誠 頓首頓首 臣本以高句麗舊壤 渤海遺黎 保據方隅 涉歷星紀 仰覆露鴻鈞之德 被侵漬

無外之澤 各得其所 以遂本性 而頃歲契丹恃其强暴 入寇境上 攻破城砦 略人民 臣祖考 守節不

降 與衆避地 僅存生聚 以 于今 而又扶餘府 昨背契丹幷歸本國 災禍將至 無大於此 所宜受天

朝之密書 率勝兵而助討 必欲報敵不敢違命 臣玄明 誠懇誠願頓首頓首 元興六年十月日 定安國

王臣玄明 表上聖皇帝前 太宗優詔答之 是時宋欲討契丹故也 端拱二年 其王子因女眞使 獻馬雕

羽鳴鏑 淳化二年 其王子太元 因女眞使上表 其後不至 高麗顯宗九年 定安國人骨須來奔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로 거란에게 깨졌는데, 그 서쪽을 지키어 송태조 개보 삼년에 그

왕 열만화가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리고 가죽옷을 받쳤다. 태종 태평흥국 육년 또

여진의 사신에게 표를 올려 말하길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말합니다. 성스런군주께 업드리니

천지의 은혜로 윤택하고 이맥의 풍속을 어루만지시니, 신 현명은 진실로 기뻐하며 머릴 조

아립니다. 신은 본래는 고구려의 옛땅으로 발해의 남은 무리로 한 구석에 의거하여 보존하

고 있습니다. 세월을 보냄에 태평성대을 우러르나, 침략함을 당하여 밖은 윤택하지 못합니

다. 각각 그 본성대로 있는 곳을 얻는 것이데 요즘 거란이 그 강폭함으로 폐하의 지경을 도

둑질 하고 성채를 공격하여 깨뜨려 백성을 사로잡습니다. 신이 조상대를 생각하니 절도를지

키어 항복하지 말하하여 무리와 함께 이땅에 피하여 겨우 모여 살고 있음이 이와 같습니다.

또한 부여부에서 앞서 거란이 배반하여 본국을 아우르니 재화가 장차 이에 이르니 큰 것이

아닌데도 이와 같습니다. 이에 마땅히 천조의 밀서를 받으니, 승병을 거느리고 토벌함을 도

우니, 반드니 복수를 하고 명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신 현명 정성으로 원하며 머릴 조아

립니다. 원흥육년 시월에 정안국왕 신현명이 표를 성황제앞에 올리니 태종이 조서로 이에

답하니, 이제 송이 거란을 치고자 한다. 단공 이년 그 왕의 아들이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말과 독수리 깃털, 우는 화살을 받쳤다. 순화 이년 그 왕자 태원이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린후에는 오지 않았다. 고려 현종 9년 정안국사람 골수가 달아나 왔다.

渤海考 終

발해고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