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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30] 대진국(大震國) 연대기 1

양해천 2018. 1. 23. 13:04
[홍익인간 330] 대진국(大震國) 연대기 1
2012년 05월 28일 (월) 06:54:01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1. 제1대 세조(世祖)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서기668년~서기699년) : 대중상(大仲象)] 

서기668년 9월 21일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자, 고구려의 장군 대중상(大仲象)은 서압록하(西鴨綠河)를 지키다가 변고를 듣고서,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사람 8,000명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東麰山)에 이르러 웅거하였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城)들이 귀속해 왔다. 다만 고토를 회복함을 임무로 삼았다. 

여기 평양성은 단군조선 시대 마한의 수도였던 백아강(白牙岡)으로서, 고구려 제20대 장수홍제호태열제 때인 서기427년에 옮겼던 고구려의 남경(南京)이 되는 대동강의 평양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동경(東京)은 졸본, 북경(상경)은 상춘(눌현), 중경(中京)은 국내성의 제1,2,3 환도성, 남경은 평양이 되는 것이다. 서경은 서기244년 위나라 관구검에게 제2환도성을 함락당한 때 수도를 옮겼던 평양이 아닌가 하는데, 이때의 평양은 봉황성(鳳凰城) 또는 해성(海城)으로 추정되긴 하나, 다만, 남경이 되는 평양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대중상의 후고구려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자마자 시작되었으므로, 결국 후고구려를 이은 대진국의 역사는 서기668년부터 서기926년까지 259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서압록하는 지금의 요하(遼河)를 가리킨다. 고구려 말기 당시에 동압록은 지금의 압록강이며, 서압록은 지금의 요동반도의 서쪽에 흐르는 큰 강인 요하였다. 요하라는 강이 요동반도에 생긴 것은 서기980년경 거란의 요(遼)나라가, 그 이전의 요하가 되는 난하의 최상류 유역에 있던 임황(臨潢:서안평)에서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여기서 개원(開原)은 지금의 심양(瀋陽) 지역으로서 단군조선의 개사원(蓋斯原)이며 단군조선 말기의 수도였던 장당경(藏唐京)이 있던 곳이다. 심양의 남쪽에 해성(海城)이 있으며 장당경을 수도로 하던 시대에 이궁(離宮:별궁)을 두어 평양(平壤)이라 불렀다. 

동모산은 백두산의 북쪽에 위치하며, 대진국(大震國) 시대의 상경(上京:북경) 용천부(龍泉府)와 중경(中京) 현덕부(賢德府) 사이에 위치하며 현덕부에 속한 것이 된다. 

서기699년, 중광(重光) 32년 5월에 임금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진국열황제(震國烈皇帝)라 하였다. 

2. 제2대 태조(太祖)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서기699년~서기719년) : 대조영(大祚榮)] 

서기699년 5월에 태자 대조영은 영주(營州)의 계성(薊城)에서 무리를 이끌고 동모산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홀한성(忽汗城)을 축조하여 이곳에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만을 모집하여 위세가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이 당시 영주(營州)의 계성(薊城)은 고하(沽河) 동쪽에 있는 지금의 계성(薊城)이 되는데, 유주(幽州)에 속하는 북경(北京)이 계성이던 때가 있었다. 서기전226년에 전국시대 연(燕)나라가 진(秦)나라에 쫓기어 요동으로 달아났을 때 수도가 곧 북경(北京)으로서 계성(薊城)이 된다. 서기전226년 이전의 연나라 수도 계성은 북경의 서남쪽인 탁수(涿水) 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홀한성(忽汗城)은 상경(上京) 용천부가 된다. 대진국 시대에 동서남북중에 5경이 있었는데,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 북경(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이다. 

단군조선 시대에도 진한에 이궁(離宮)을 합하면 모두 5경이 되는데, 북(北)의 아사달(阿斯達), 중(中)의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常春 九月山), 서(西)의 장당경(藏唐京), 동(東)의 영고탑(寧古塔), 남(南)의 해성(海城)이다. 또 번한에도 5경이 있었으니, 동서남북중으로 각 험독(險瀆), 한성(汗城), 낭야성(琅耶城:가한성), 탕지(湯池:구안덕향,안시성), 개평(蓋平:안덕향)이다. 

북경을 상경(上京)이라 하는 것은 동서남북의 방향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가 북쪽이기 때문이다. 중앙은 신(神)을 모시는 자리로서 백두산(백두산, 太白山)을 포함한 중경 현덕부가 된다. 

특히 대진국의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는 본래 남옥저(南沃沮)의 옛 땅이며 해성현(海城縣)이라 하는 바, 한반도 동해안에 있는 함흥이라고 추정된다. 

또, 서경(西京) 압록부는 서안평(西安平)으로서 거란(遼)의 상경(上京)이던 난하 최상류 유역에 소재한 황수(潢水)를 바라보는 임황(臨潢)이며, 지금의 요하가 원래 서압록하이고, 이 서압록하의 최상류 지역이 난하 상류 지역이며, 소요수(小遼水)의 동쪽에 있어 원래의 요동이 되는 땅인 것이다. 

대조영은 말갈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거란 장수 이진영(李盡榮)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당나라 장군 이해고(李楷固)의 군사를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천문령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있던 곳의 동쪽에 있으며 상춘(常春,장춘)에서 요동반도에 걸치는 고개로 보기도 하는데, 난하 동쪽에 있는 장령(長嶺) 부근의 고개로도 보인다. 

대조영은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6,000리가 개척되었다. 

대진(大震)이란 대씨(大氏)의 진국(震國)이란 뜻도 지니면서, 특히 진(震)은 단군조선의 진한(眞韓)의 진과 같은 소리로서 왕중의 왕의 나라를 가리키는 바, 대진(大震)은 곧 큰 황제의 나라라는 뜻이 된다. 배달나라 시대에 태호복희의 나라가 진(震)이었다. 천통(天統)이란 하늘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의미이다. 

서기714년, 천통16년 10월에 태조 성무고황제께서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읽어 찬(讚)하고, 자완대부(紫緩大夫) 선조성(宣詔省) 좌평장사(左平章事) 겸 문적원(文籍院)의 감(監)이던 임아상(任雅相)이 명을 받들어 삼일신고주해(三一神誥注解)를 지었다. 

여기 삼일신고는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것이다. 삼일신고는 서기전2333년 조선 개국시에 단군왕검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치실 때, 고시씨(高矢氏)가 동해(東海)에서 캐어온 청석(靑石)에다 신지씨(神誌氏)가 글을 새긴 청석본(靑石本)과, 서기전1120년경 은왕족 기자가 조선에 망명한 후 사사(士師)이던 왕수긍(王受兢)에게 부탁하여 은문(殷文:소위 갑골문)으로 단목판(檀木板)에 새기게 한 단목본(檀木本)이 있었는데, 후대에 청석본은 부여가 소장하였고, 단목본은 서기전323년에 시작된 기씨(箕氏) 번조선(番朝鮮)을 이어 서기전194년에 시작된 위씨조선(衛氏朝鮮)이 소장하였으나, 모두 병란(兵亂)에 잃었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 때 삼일신고를 한자(漢字)로 번역한 것을, 대진국 시대인 서기714년에 대조영 성무고황제가 찬문(撰文)을 짓고 문적원(文籍院) 감(監) 임아상이 주해(註解)를 달았다. 

문적원은 한림원(翰林院)에 해당하는데, 외교문서 등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이 된다. 

서기715년 3월 3일에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 위 삼일신고의 서문(序文)을 썼다. 반안군왕 대야발은 성무고황제 대조영의 아우이며, 돌궐(突厥)을 13년간 답사하는 등 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과, 한씨(桓氏)의 번조선(番朝鮮)인 소위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역사를 엮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지었다. 

서기719년, 천통21년 봄에 임금께서 대안전(大安殿)에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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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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