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32] 대진국(大震國) 연대기 3

양해천 2018. 1. 23. 13:06

[홍익인간 332] 대진국(大震國) 연대기 3

2012년 05월 29일 (화) 09:35:11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4. 제4대 세종(世宗)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서기737년~서기793년) 

서기737년에 태자 대흠무(大欽武)가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로부터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로 옮겼다. 상경(上京)은 동서남북 중에서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서기738년에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가르치며, 한단고사(桓檀古史)를 강론하고, 또 문사(文士)에 명하여 국사(國史) 125권을 편찬하게 하니,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武)의 위세는 모든 이(夷)를 복종시켰다. 태백현묘(太白玄妙)의 도(道)는 백성을 흡족하게 하고, 홍익인간의 교화는 만방에 미쳤다. 

태학은 국립대학에 해당하며, 천부경, 삼일신고 등과 한국 및 배달나라의 역사를 가르침으로써, 대진국은 곧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국, 배달, 조선, 북부여, 고구려의 정신적 정통성은 물론 영토적 정통성을 이은 나라인 것이다. 즉, 대진국은 천부삼인,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로서 신라의 북국인 바, 당연히 우리 한국의 역사인 것이다. 

서기739년 3월 15일 삼일신고봉장기를 짓고, 대조영 성무고황제가 고구려에서 전해온 삼일신고를 읽고서 찬(讚)한 글들을 태백산(백두산) 보본단(報本壇) 석실(石室)로 옮겨 봉장(奉藏)하였다.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 
고조선기(古朝鮮記)를 삼가 뵈니 가로되, 366갑자(甲子)에 임금께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니시고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공(雷公)을 거느려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로 내리시어, 산하(山河)를 개척하고 인간과 만물을 낳고 기르시다. 갑자가 두 번 돌아 무진년(戊辰年) 10월 3일에 어철궁(御喆宮)에서 신고(神誥)를 처음 가르치실 때, 팽우(彭虞)는 3,000의 무리를 이끌고 고개 숙여 받잡고, 고시(高矢)는 동해(東海) 물가에서 청석(靑石)을 캐오고, 신지(神誌)는 그 돌에 새겨 전하였다. 
후조선기(後朝鮮記)에 기자(箕子)가 일토산(一土山) 사람인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하여 은문(殷文)으로 신고를 단목판(檀木板)에 써도록 하여 읽었으니, 이러한 즉 신고는 원래 석본(石本)과 단본(檀本)의 두 본이 있어 세상에 전하였다. 석본은 부여(扶餘)의 국고(國庫)에 보관되고, 단본은 곧 위씨(衛氏)가 가진 바 되었으나, 모두 병란 중에 잃었다. 
이 본(本)은 고구려가 번역하여 전한 것인데, 우리 고고(高考, 대조영 태조 성무고황제)께서 읽으시고 찬(贊)한 것이다. 소자(小子, 문황제)가 신고를 받은 이래로 항상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였고, 또 석단(石檀)의 두 본이 세파에 탕진된 바를 느끼어, 이에 영보각(靈寶閣)의 어찬진본(御贊珍本)을 받들어 태백산(太白山) 보본단(報本壇)의 식실(石室) 안으로 옮겨서 보관하노니, 불후의 자료로 삼을 따름이다. 대흥(大興) 3년 3월 15일 숨김(藏). 
(謹按 古朝鮮記 曰 三百六十六甲子 帝握 天符三印 將 雲師雨師風伯雷公 降于 太白山檀木下 開拓山河 生育人物 至 再週甲子之 戊辰歲上月三日 御喆宮誕訓 神誥時 彭虞率 三千團部衆 俯首受之 高矢採 靑石於東海濱 神誌劃 其石而傳之 後朝鮮記 箕子聘 一土山人 王受兢 以殷文 書神誥于 檀木板而 讀之然則 神誥原有 石檀二本 而世傳 石本藏於 餘國庫 檀本則爲 衛氏之有 竝失於兵燹 此本乃 高句麗之 所譯傳而 我高考之 讀而贊之者也 小子自 受誥以來 恒恐失墮 又感石檀 二本之爲 世波所盪 玆奉 靈寶閣 御贊珍本 移藏于 太白山 報本壇 石室中 以爲 不朽之資云爾 大興三年三月十五日 藏) 

위 삼일신고봉장기의 내용에서 보듯이, 이처럼 대진국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정신역사적 정통성과 영토적 정통성을 함께, 고구려의 대를 이어 계승한 나라가 된다. 참고로, 역사상 소위 고대중국이라는 나라에는 한배달조선에서 전수되어 온 천부경(天符經)이나 삼일신고(三一神誥)나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전해진 바 없으며, 단지 산동지역의 동이(東夷) 출신인 강태공(姜太公)이 지부경(地符經)을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태공은 천부경(天符經) 공부를 하였던 것으로 된다. 

서기781년 치청(淄靑) 절도사(節度使)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군(唐軍)에 항거하니, 문황제(文皇帝)가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으로 평로(平盧) 출생이다. 서기802년에 장수들이 군사 이희일(李希逸)을 내쫓고 이정기를 즉위시켰으며, 곧 이정기가 죽자 이정기의 아들인 이납(李納)이 대를 이었고, 서기836년에 이납이 죽고 그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이었으며, 이사고가 죽었을 때 초상을 밝히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이사도(李師道)를 맞아 대를 잇게 하였다. 

서기786년 수도를 동경(東京) 용원부로 옮겼다. 

서기793년, 대흥(大興) 57년에 임금께서 붕하시니,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하고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라 하였다. 

5. 제5대 원의(元義:폐황제(廢皇帝):서기793년~서기794년] 

서기793년에 나라 사람들이 문황제의 종실 아우인 원의(元義)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에 1년만인 서기794년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폐하고 문황제의 손자인 화흥(華興)을 맞아 즉위시켰다. 

6. 제6대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서기794년~서기795년) 

서기794년에 제4대 문황제의 손자인 대화흥(大華興)이 즉위하여 연호를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수도를 상경(上京) 용천부로 삼았다. 

서기795년, 중흥(中興) 2년에 임금께서 붕하시니 묘호를 인종(仁宗)이라 하고 시호를 성황제(成皇帝)라 하였다. 

7. 제7대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서기795년~서기809년) 

서기795년에 제6대 성황제의 숙부인 대숭린(大崇璘)이 즉위하여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하였다. 

서기802년 치청(淄靑)의 장수들이 군사(軍師) 이희일(李希逸)을 쫓고 이정기(李正己)를 즉위시켰으나 죽고, 아들 납(納)이 다스렸다. 

서기809년, 정력(正曆) 15년에 임금께서 붕하시니 묘호를 목종(穆宗)이라 하고 시호를 강황제(康皇帝)라 하였다. 

8. 제8대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서기809년~서기813년) 

서기809년에 대원유(大元兪)가 즉위하여 연호를 영덕(永德)이라 하였다. 

서기813년, 영덕(永德) 5년에 임금께서 붕하시니 묘호를 의종(毅宗)이라 하고 시호를 정황제(定皇帝)라 하였다. 

9. 제9대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서기813년~서기818년) 

서기813년에 대언의(大言義)가 즉위하여 연호를 주작(朱雀)이라 하였다. 

서기818년, 주작(朱雀) 6년에 임금께서 붕하시니 묘호를 강종(康宗)이라 하고 시호를 희황제(僖皇帝)라 하였다. 

10. 제10대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서기818년~서기820년) 

서기818년에 대명충(大明忠)이 즉위하여 연호를 태시(太始)라 하였다. 

서기820년, 태시(太始) 3년에 임금께서 붕하시니 묘호를 철종(哲宗)이라 하고 시호를 간황제(簡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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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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