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7만년 한 민족사

5. 문명 인류와 자연인류의 분리

양해천 2018. 1. 23. 15:32
5. 문명 인류와 자연인류의 분리
가. 호모사피엔스의 분산
- 호모사피엔스의 분산기록은 박제상의 부도지에만 있다. 원본을 피난 시 북한에 두고 오고 후손이 기억을 되살린 것으로 다소 모호하기는 하나 호모사피엔스의 분산과 관련 사료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요약하면 수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들은 파미르고원과 바이칼 일대에서 지유(地乳: 땅에 떨어진 과일)를 먹고살다가 인구가 증가하자 나무에 붙은 과일을 먹기 시작하였고 지유만 먹은 이유는 삼신 일체사상으로 열매에 붙은 과일은 나무의 생명에 상처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도지 第八章: 오미의 난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34]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35]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 [36]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37]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 여기서 지유(젖)은 땅에 떨어진 과일의 즙을 말한다.

已矣오.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還到城外하야 直求復本하니 此未知有復本之時所故也라. 乃欲得乳泉하야 掘鑿城廓하니 城址破損하야 泉源이 流出四方이라. 然이나 卽化固土하야 不能飮철이라. 以故로 城內에 遂乳渴하니 諸人이 動搖하야 爭取草果하니 混濁至極하야 難保淸淨이라. 黃穹氏爲諸人之長故로 乃束身白茅하고 謝於麻故之前하야 自負五味之責하여 立誓復本之約이러라. 退而告諸族曰五味之禍反潮逆來하니 此出城諸人이 不知理道하고 徒增惑量故也라. 淸淨已破하고 大城將危하니 此將奈何오. 是時에 諸天人이 意決分居하야 欲保大城於完全하니 黃穹氏乃分給天符爲信하고 敎授採葛爲量하야 命分居四方이라. 於時에 靑穹氏率眷出東間之門하야 去雲海洲하고 白巢氏率眷出西間之門하야 去月息洲하고 黑巢氏率眷出南間之門하야 去星生洲하고 黃穹氏率眷出北間之門하야 去天山洲하니 天山洲는 大寒大險之地라. 此는 黃穹氏自進 難하야 忍苦復本之 盟誓러라.

* 서쪽: 월식주, 아리안, 기원전 3만년 스텝지역, 1만2천년 인다스강 북부, 기원전 2천년 간지스강 북부 계급제도 확립, 브라만, 산스크립트어, 인도유로어, 유럽으로 진출, 명분은 삼신교 전파, 한인조선 서쪽 연방은 이들이 개척했다
* 동쪽: 인디언, 베링해 건너 알라스카에서 남북미로, 처음에는 포경 작업(울산 암각화 기원전 7천년) 베링해 포함한다 
* 남쪽: 생성주(生星州). 별이 탄생하는 곳, 필나국(필리핀, 인도네사아 미얀마, 벵글라데시, 인도(서납아국)이다
* 북쪽: 한인조선의 출발지, 추위를 이겨낸 곳. 추웠다(부도지)

조선의 의미는 한자로 朝鮮인데 이 명사가 가지는 의미는 문명시대의 나라 이름과 대조된다. 즉, 문명시대 이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이 나라는 하늘(해와 달)에 제사 지내고 육지에서는 가축을 키우고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으며 사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적으로 사는 나라라는 상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중국의 황하 문명과 같은 집단 농사는 죄악시한다. 그 풍습이 전통화 하여 불교에서 지금도 인간들이 만든 세상을 속세(俗世)라고 하는 유래가 된다. 한단고기 삼성기 전 하권에 따르면 이 나라는 “동서 2만리, 남북5만리 12연방이고 나누어 말하면 비리(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句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혹은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余國 혹은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이국(鮮卑爾國) 혹은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이니 합하여 12국이다. 천해(天海)는 지금 북해(北海)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고 했는데 상기한 12연방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광활한 스텝 지역을 포함한다.

나. 백인의 형성(아리안의 이동) 
1) 1차 이동: 기원 전 6만년-1.2만년 스텝지역
이 기간에 시베리아의 광활한 스텝 지역은 삼성기 전 하권의 기록대로 한인조선(하느님조선)의 12연방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 이유는 춥고 대부분 지역이 말의 이동과 목축은 가능하나 출만 무성한 지역이므로 과일과 채소가 부족하여 인구의 증가 속도가 느리고 샤먼에 의한 보호 외에는 자급자족의 자연에서의 수렵과 채취 생활이 오랜 동안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 북방계 유목민들은 알타이산과 천산(단군산)일대에서 땅만 파면 나오는 쇠(철을 포함한 모든 금속)와 익숙해 졌고 4대강 유역에서의 청동기 시대 도래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철기 무기와 이동 수단을 갖게 되어 어려울 때마다 남쪽으로 내려와 중국과 인도, 페르시아, 유럽 등 온난한 지역을 침략하였다. 특이한 것은 유목민 저희들끼리는 침략을 피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리안의 인도 침략, 수메르의 메소포타미아 침략, 앗틸라와 터키의 서진의 동기를 보여준다. 아리안(Aryan)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기원 전 3-4만 년 전에는 인도 북쪽 스텝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고조선의 기원이 기원전 6만 7천년 전이므로 대략 3-4만 년 동안은 한인 조선에서 살았고 부도지의 기록처럼 조선에서 나갔으리라 판단된다. 그 근거는 “아리안”이라는 이름이 하느님 족이라는 뜻이고 이들에 의해 영국의 스톤헨지가 기원전 약 2만 년 전에 천문 관측을 위해 세워졌으리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한인조선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분리해 나간 족속으로 보인다. 이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기원전 12.000년경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당시에 그들은 시베리아의 남북과 투르케스탄(Turkestan) 등지에 살고 있다가 기원전 17천-18천 년 전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13세기경에는 인도 대륙으로 침입한 것으로 보인다. 유목 생활이기 때문에 목초 지를 따라 끝없는 방랑을 거듭했던 것인데, 그 진로는 주로 서부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일대를 관통했던 것이다.
2) 2차 이동
아리안은 오늘날 서양인의 혼혈 선조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서 슬라브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지배한 서양인의 선조가 바로 이 아리안이었는데 이들은 15만 년 전부터 유럽에 정착한 토착한 네안데르탈인과 서진하여 인도에 정착한 인도 조선인의 혼혈로 일반적으로 아리안 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아리안이 서양인의 선조라는 가설을 정형화시킨 이는 비교 종교학자였던 막스 뮐러(Max Muller)였다. 그는 고대 인도의 언어였던 산스크리트(Sanskrit)가 영어의 어원임을 입증하였다. 종래 그리스(Greek), 라틴 등의 어원에 대한 연원을 밝힌 셈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의 최고신인 천신은 드야우스(Dyaus)라고 한다. 그리스의 제일신인 제우스(Jeus)와 동의어이다. 즉, 그들은 동일한 민족이었으나, 신에 대한 견해의 차이 등으로 말미암아 둘로 나뉘게 되었다. 그 일파는 중동,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일파는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대륙으로 침입해 온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리안은 피부가 희고 코가 높으며, 키가 큰 골격이다.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인과의 혼혈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전형적 인도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현재 쓰고 있는 영어라는 문자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산스크리트적 영향을 들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제 산스크리트가 영어의 어원이라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고 산스크리트 어와 한국어는 지금까지도 약 20여만 개의 어휘가 같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들은 처음에는 펀자브(Punjab) 지역에 정착하다가 서서히 그 활동 무대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긴다.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지 정착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도의 원주민들은 여러 부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드라비다 인(Dravidian) 등 몇몇 종족만이 확인될 따름이다. 침략자 아리안들은 원주민과 격렬한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하였다. 그 까닭은, 첫째,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능하다는 점, 둘째, 문명 발달 단계에 있어서 원주민들이 청동기 문명 단계에 머무른 데 반해, 그들은 이미 철기 문명에 접어들었다는 점, 셋째, 월등한 체력 조건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에서 이긴 정복 민족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들은 원주민을 노예화시킨다. 또,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선별적 우월 의식을 강하게 내보였다. 그 우월 의식의 사회화가 바로 카스트(caste) 제도이다.
1. 브라만(Brahman) : 승려, 사제(司祭)족, 어원에서 한국어의 남성의 상징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 크샤트리야(Kshatriya) : 귀족, 지배 계급
3. 바이샤(Vaisya) : 평민
4. 수드라(Sudra) : 노예 계급(원주민)

이들 가운데 브라만과 크샤트리야 이외에는 거의 인격적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철저한 계급 사회를 확립시켰다. 특히, 수드라의 경우에는 팔고 사거나 죽여도 죄가 안 되는 등의 사회 통념을 만들어 간다. 이것은 마누(Manu) 법전에 명기된 이래 전통적 관습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악습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 카스트가 주로 피부 색갈(Varna)로 구분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혼혈이 되면서부터 각자의 직업에 따른 분류가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카스트는 세습화되었으며, 서로 다른 계층끼리의 통혼(通婚) 같은 것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브라만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으로서, 신에게 제사 드리는 의식을 담당하는 사제(司祭)의 그룹이었다. 이것은 제정 일치를 이상으로 삼던 고조선에서부터 내려온 고대 사회에 있어서의 공통된 관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의 세계를 상정하고, 인간의 길흉 화복을 그 신의 권능에 의지하려는 습속은 아리안의 기본적 발상이었고 고조선에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신을 찬양하고 경건히 예배드리는 법식을 집대성한 성전이 바로 리그 베다(Rig Veda)이다. 원래 베다나 우파니샤드 등 고대 인도의 철학 서적들은 슈루티(Sruti)라고 한다. 하늘의 계시에 의해서 편집된 천계(天啓) 경전이라는 뜻이다. 좁은 의미로는 리그 베다를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아란야카(Aranyaka)를 포함한 모든 성전을 가리킨다. 베다에는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 아타르바 베다 등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리그 베다이다. 나머지 베다들은 주로 제사 의례의 법식 등을 형식화시킨 내용이다. 리그 베다에는 도합 1028송(頌)의 찬가가 수록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11송은 명백히 후대에 추가된 내용이라고 본다. 리그 베다는 신의 찬가뿐 아니라 인간성의 자유, 세계의 근원과 천지 창조 등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망라한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다. 리그 베다의 신들은 대부분 자연계에 절대적 힘을 상징하며, 따라서 명백히 다신교(多神敎)적이다. 신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절대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경건하게 예배,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리그 베다 자체는 종교적 색채가 강하지만, 동시에 아리안 등의 당시 사회 생활을 알려 주는 귀중한 언급들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우선, 아리안은 가족 단위로 갠지스 강 유역에 군거(群居)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처음에는 갠지스 강 북쪽 유역에서 살았으나, 서서히 중허리 부분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당시의 주요한 부(富)의 척도는 양과 소 등 가축이었다. 또, 소에 대한 숭배의 관념들이 생겨난다. 성우(聖牛)에 대한 신앙은 나중에 힌두교의 확립과 함께 인도의 대표적 신앙이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매우 실질적인 이유에서 소에 대한 숭배 관념이 싹트게 된다. 즉, 아열대성 기후의 인도에서 소 1마리는 10명의 인간의 목숨을 유지시켜 준다. 젖을 짜서 우유를 만들고, 또 치즈, 요구르트 등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가죽은 집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이미 그 당시에 사냥을 위하여 개를 훈련시킬 줄 알았으며,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하였다. 가족 제도는 철저히 가부장(家父長)적이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신성불가침의 상징이었다. 이 당시 이집트 등에서 유행했던 부녀의 결혼, 남매의 결혼 등 근친 상간은 엄격히 규제되고 있었다. 다만, 한 아내를 형제들이 공유하는 유목 사회적 특성은 있었던 듯하다. 이들은 인도에서 원래 언어인 고조선 어와 토속어를 섞어 인도 유로어 형성하였고 아울러 산스크립트 글자를 조성하였으며 브라만 위주 계급사회 만들었다. 결과적을 아리안은 삼신교, 즉 샤먼교을 선교하러 갔다가 그 지역을 침략하게 되는 현재 유대인들이 교역을 통해 서양을 점령하고 게르만의 서세 동점을 하게 되는 등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고 이 때문에 이 지역에 불교와 힌두교 생성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3) 3차 이동
아리안이 주축이 된 서구 유럽 사회에는 지금도 밀레니엄 신드럼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 밀레니엄 신드럼은 “유럽인들이 죄를 지으면 매 천년마다 동방의 제사장국가에서 징계를 하러 온다”는 전설로 그 실례를 들면 “기원 전2세기부터 기원 후 7세기까지 게르만의 대 이동의 원인이 된 앗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침입”과 “기원 후 10세기의 징기스칸의 유럽 침입을 그 예로 들고 있이 프레스드 존이라는 이름은 영어의 Preist Jhon's에서 나온 말로 朝鮮, 즉 조선이라는 발음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6.25 당시 미군의 남한 참전은 옛 조선인이 조선을 돕는 옛 조선의 조물주 하느님의 뜻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원 전 6세기에 인도 북부에서 발생한 불교는 힌두교가 브라만을 답습한 것과 달리 아리안의 혹독한 계급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종교로서 속세에서의 도피 수단인 마음을 비우는 것 외에는 모든 내용이 삼신 사상과 같다는 점이다.

* 페르시아와 중동 인들은 이름 그대로 중앙아시아 인도 아시아 피가 더 섞이고 알라신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하다, 이들은 유대인의 팔레스틴 강점이 단합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인본주의의 극치 국인 당나라 고선지의 침략 때문에 결속하려고 대부분 회교도 국이 되었다.

4) 백인종의 형성: 유럽 네안데르탈인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백인이 된 것은 수 만 년 간 기온은 따뜻하지만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어두운 지역에 거주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발원하여 먹을 것이 많은 밝은 곳을 찾아 즉 해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바다가 막혀 북쪽으로 올라와 중동에서 갈라져 가온이 따뜻한 지중해 지역에 머물게 된 좀 게으른 네안데르탈인임이 1992년에 작성된 인류 미토콘드리아 이브 유전자 이동도를 통해 증명되었다.(서울대 의대 이홍규박사 작성) 
유럽이 오랜 기간 어두운 극 지역에 가까웠던 사실은 유고슬라비아 천문학자인 밀란코비치의 이른바 약 24만6천 년의 주기의 지구 세차 운동으로 인한 북극점의 이동(25.1도)이 유럽지역의 중심부인 폴랜드 인근이었을 가정이 함께 작용한다. 
암흑 속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였다고 가정해 보라 남녀 성별, 이웃인지 아닌지 모르고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환경에서, 마치 보는 것과 같은 언어의 표현 등이 필요하고 본능적인 행동의 순서대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어에 인칭대명사가 나오고 수동태가 나왔으며 격이나오고 현재 진행, 완료, 과거 완료 등 복잡한 시제가 나왔고 중국어처럼 우리말의 순서와는 다른 도치어(倒置語)가 나왔다. 백인 거주지역에는 수로, 볍씨등 대규모 농사흔적이 없으며 유적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그리스의 돌 조각상 등 모두 돌로 만든 것뿐이며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프랑스의 쇼베 동굴을 비롯하여 특히 프랑스 남부 베제르 계곡의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에 위치한 베제르 계곡의 크로마뇽 동굴에는 선사유적지에 인육을 먹는 그림이 유럽 유적의 특징이다. 유럽인들에게는 동방의 가족이라는 말 대신 사회라는 개념만 있는데 이는 그들의 생존 환경이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식량 원과 피난처가 있는 곳이 아니고 계속 목축을 하던가 해안 지대의 경우 계속 식량 원을 찾아 이동을 해야 하고 짝짓기가 더 다급한 암흑 속의 생존 상황이었고 특정지역을 정하여 사회라는 테두리와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동양인들에게 성생활은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몇 만 년 전 유럽인들은 암흑 속에서 먹을 것은 상대 방 인간 종족들을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짝짓기는 인간의 최우선 가치가 되었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수치스럽기보다는 당당하며 시급한 것이 된다 부모라는 가족제도의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짝짓기의 시작인 키스는 일상이 되고 사랑이라는 말은 바로 짝짓기를 의미한다. 또 백인은 어두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도 그렇게 발전하였다. 언어도 실담어(고조선어)와 달리 본능을 따라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순서대로 나열하는 도치어를 쓰게 되었고 눈으로 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확인해야 했으므로 수동태, 격, 시제 등이 생겨났다. 청각이 발달했으므로 음악에 예민해졌고 발달되었으며 수메르인들도 유대인들도 이에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유럽인들의 대 자연관은 성경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서구 문명은 자연을 극복하고 이용하는데 진력해 왔다. 그러다가 인간에게는 편리하지만 결국 자연을 해치게 되어 인간이 해를 입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백인들의 자연보호는 그들의 통제아래의 자연보호이다. 예를 들면 고래의 경우 고래는 일본과 노르웨이 국민의 전통적인 식량 공급원이고 이들 국가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고래의 개체 수를 조정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포획을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백인들은 앞으로 모든 고래들은 자신들의 그린피스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 중국인의 이동(기원전 3-4만년)
단군조선 이전 중국인과 한국인은 한 핏줄이다.
중국의 시조라고 그들이 주장하는 삼황오제는 신농(神農), 복희(伏羲), 여와(女 )를 삼황(三皇)이고, 황제(黃帝), 전욱(栓頊), 제곡(帝?), 요(堯), 순(舜)을 오제(五帝)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 중 신농씨는 농사 신으로 상징적인 인물이나 중국의 농경지리와 도구를 만든 14대 환웅인 치우(蚩尤)라는 설이 유력하고 복희는 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이고 여와는 그의 부인이다. 황제는 치우와 사촌간이고 그 이하는 모두 황제의 자손들이다 그래서 단군 조선 이전에는 중국의 지배층과 한국인이 모두 같은 핏줄로서 환웅조선의 후예들인 것이다. 
이들은 마고 조선과 환인 조선을 지나 소위 배달국이라고 하는 환웅조선 시절(기원전 4천년) 인구가 많아지자 조선의 제사권을 배격하고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자신들이 하느님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남하한 조선인 우두머리를 가진 집단들이다.

* 배달의 의미: 배달은 벼에 역사 하시는 알, 즉 농사를 잘 짓게 해주시는 하느님이라는 말로서 볏알이 변하여 배달이라는 발음이 된 것이며 빛의 산이라느니 하는 설은 있지만 언어의 역사를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그래서 같은 어휘의 한문은 없으며 중국인은 이를 신농씨라고 만들어 불렀다. 반면에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도 잘 해석하지 못한체 살고 있다.

고조선은 기원 전 4천년부터는 단군 조선과 막조선 (고구려), 진조선(신라), 번조선(백제) 삼조선을 거쳐 왔는데 이를 한 반도로 국한시키는 것은 일본사관이고 비과학적이다. 1945년 해방이후 일부 세대가 그렇게 알고 있으나 그렇게 되면 조상등의 이상인 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예수복음 선교를 할 수가 없다 일본의 피를 선두로 중구국, 아랍인, 남북미가 우리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는 2002년 11월2일 발간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를 통해 고구려 신라, 백제 당시 천문 관측지점 역추적을 통해 분명히 진시왕 이전까지 고조선의 위치가 중국 전지역이었음을 증거하고 있고 다음 사진이 이를 증명한다. 반면 중국인의 시조는 기원전 2.600년 경 14대 환웅 자오지 천왕, 일명 치우(蚩尤)의 사촌으로 형제간 중원의 탁록에서 주도권 싸움을 벌인 인물이다. 
* 탁록지전[ 鹿之戰 , Battle of Zhuolu] 
원시시대 웅씨(熊氏) 황제(黃帝) 헌원 부락(농경)과 신농씨(神農氏) 염제(炎帝: 치우)의 자연 부락의 두 연합부족과 치우(蚩尤)의 동이(東夷) 구려족(九黎族)간의 대규모의 전투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에 기록된 염제와 황제간의 반천지전(阪泉之戰)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의 전쟁. 약 4만5천 년 전 씨족 사회 시기에 중국 중서부의 관중평원, 산시(山西) 서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황제 족과 염제 족은 서로 융합되어가며 황하(?河) 지역을 향해 지금의 화베이 평원 서부에까지 세력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익(冀), 노(?), 예(豫) 경계 지역에 있던 치우(蚩尤)의 구려족(九黎族)은 동에서 서쪽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어 양대 부락은 목축과 수렵 및 농경이 동시에 가능했던 지역인 탁록(?鹿)의 벌판 즉 지금의 타이항산(太行山, 태항산)과 타이산(泰山, 태산) 사이의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도달하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치우족은 병기제작에 있어 앞선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병기도 정밀하고 견고하였다. 또한 민첩하고 용맹하며 싸움을 잘하는 부족으로 화북지구로 진출한 후 먼저 염제부족과 충돌하게 되었다. 치우족은 거인 과부부족(寡父部族)과 및 삼묘(三苗)의 일부와 연합하여 염제족이 거주하던 구우(九隅) 즉 구주(九州)를 점령하였고 이에 염제는 지금의 허베이 일대로 물러나야만 하였다. 이후 염제는 황제와 중원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상고시대 최초의 전쟁으로 3차에 걸친 격렬한 전투인 반천지전(阪泉之戰)을 벌였으나 염제가 패배하고 황제에게 복속되었다. 이후 염황(炎皇) 연맹은 부단히 확장을 거듭하였고 많은 부락들이 귀순하게 되며 서북으로 진격하던 치우족과 탁록( 鹿) 지역에서 부딪히게 되었다. 당시 치우족은 소속 81개 씨족(일설에는 72개 씨족이라는 설도 있다.)을 거느려 많은 군사력과 양호한 무기 등의 조건으로 황제족을 공격했으며 황제족은 웅(熊), 비(雨), 랑(狼), 표(豹) 등을 믿는 씨족을 거느리고 치우를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황제는 지남차(指南車)를 이용하여 치우를 격파하며 마침내 중기(中冀) 벌판[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州]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며 전쟁의 승리로 이끌었다. 탁록지전( 鹿之戰)의 결과 화하족(?夏族)의 세력이 확대되어 중원의 기초가 되었으며 나아가 각 씨족 부락의 융합을 촉진시키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부족의 수령인 황제(黃(帝)가 화하족(華(夏族)의 공동 조상이 되었다. 치우의 무덤은 지금의 산동성 수장현에 강릉이라는 이름으로 있고 조선족은 동반도(한반도)로 피나 오면서 강릉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와서 강원도 강릉에서는 지금도 오월 오일치우의 생일을 단오절로 기리고 있다.

헌원은 탁록 전투 이후 중국 내의 모든 조선의 흔적을 지우고 농경 문화를 적용시키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원래 조선에서 전래된 상형 문자인 한자(漢字)를 개조하고 확대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이 제사 지네는 사제인 왕(王)을 주(主)인 아래 두는 것이었다. 헌원은 무력으로 땅을 점령하면 군인들이나 자신의 측근에게 그 땅을 나누어주고 자기들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의 시작이었다. 반면에 제사장 시대에는 땅의 주인은 조물주 하느님이고 인간은 그저 자연이 주는 대로 먹고사는 것이었다. 헌원은 이렇게 힘으로 뺏은 땅에서 곡식을 거두기 위해 지역 사람들을 지배 하에 두는 소위 주종(主從) 관계를 만들었다. 반면에 치우의 전통을 계승한 동이족의 나라 조선에서는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주종 관계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처 마찬 가지였고 헌원 이후 중국의 역사는 땅 뺏는 영토전쟁과 권력투쟁 및 복수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간 중국이 7여회 왕조가 바퀴는 동안 우리는 단 7회가 바뀌었다. 헌원은 창힐을 시켜 고조선의 제사장을 상징하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십자가 표시 王(왕)자 위에 점(点) 하나를 찍고 주(主)자를 만들고 땅 주인이 제사장 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였고 왕에다 점을 뺀 칸을 간干()자를 만들었다. 화하족들이 한 가장 심한 한문의 변개의 경우는 바로 조선의 이름을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 표식을 만들어 자신들의 나라 이름으로 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한(漢)은 조선의 큰이라는 발음과 나중의 韓에서 가져갔고, 秦(진)晉(진)모두 辰韓(진한)에서, 明(명)은 朝(조)에서 각각 따갔으며 우리의 큰-->칸. 그러나 못 가져간 것이 있으니 조정, 조공의 유래인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의 이름이다. 이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해와 달 하늘에 제사 지내고 물고기와 가축을 기르며 자연스럽게 사는 제사장 나라를 의미한다. 이조(李朝)가 잘못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단 하나 잘 한 것이 있다면 국호에 조선을 붙인 것이다. 신라 때부터 한 반도는 점차 인간 신을 섬기고 인본 농경 문화에 물들어갔으며 가장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왕조는 이씨 조선이었다.

* 창힐[蒼?]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최초로 문자를 창제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태어날 때부터 성덕(聖德)이 있었는데, 자라서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창안하여 그 때까지 새끼의 매듭으로 기호를 만들어 문자 대신 쓰던 것을 문자로 고쳤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이고, 창힐도 실재의 인물은 아니나 새끼의 매듭을 이용한 데서 문자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는 전설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이 전설은 한(漢)나라 때 이미 전해져 있었고, 창힐이란 이름이 붙은 서적명이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남아 있다. [출처] 창힐 | 두산백과

* 이씨 조선 
- 이조의 이성계는 원래 선비족의 족장 
- 선비족은 구리(九夷)중 하나로 만리장성 인근에 살던 화하 족(황하 농경 민족: 제비 토템)과 몽골(조선족)의 혼혈 민족 
- 고려가 대륙과 한 반도를 영유 시 한반도에는 김씨, 박씨 등 신라 계 사람들이 대부분(80만 정도) 
- 고려 황실이 사천성 청도에서 발원하여 후 일 허난성(하남성)개봉(카이펑)으로 이동하였다가 징기스칸 발호 시 몽골 군에 쫒겨 한반도로 피난하였는데 이들 황실은 강화도에서 29년을 지낸 후(창후리 상륙->내가지->고려산->고려성)몽고에 딸을 시집보내고 개성을 얻어 정착하면서 한반도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고200여 년을 버티다가 징기스칸 다섯째 아들 웃치킨가의 부장이며 혼혈족 선비 족의 수장인 이성계에게 멸망 
- 선비(鮮卑)라는 단어의 유래는 과거 조선(朝鮮)의 노비(奴婢)로서 조선(바이칼->요하)의 변방(만리장성 인근)에 살던 조선족, 화하족의 혼혈족으로 한자로는 鮮婢이다 
- 화하 족들이 말하는 구이(구리: 고씨의 구리: 고구리: 고구려는) 돌궐(돌로 성을 만드는 이족(夷族):조선의 외곽 무사 집단), 글안(조선 대궐 안의 호위 집단), 여진(고려 시대 고려의 진 속에 살던 고려 옹호 세력들), 말갈(물길: 물길 즉 바닷길로 조선에 들어온 사람들: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인들), 예맥(禮脈: 조선의 예의 맥을 잇는 족속들), 일본(왜: 남쪽 변방이나 해가 뜨는 곳으로 버려진 작은 민족), 읍루(邑褸 : 조선의 성읍에 거주하던 민족), 숙신(주신, 조선: 조선의 제사장 집단), 선비(조선의 노비)등이고 시대에 따라 부여, 중화, 조선, 동예 등의 이름도 있다. 
- 20만의 선비 족은 한반도에 들어오지 마자 태종 이방원의 주도로 주원장의 홍무예제(洪武禮制:유교 예법)를 통치 이념을 받아들이고 한반도를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 이들은 저들만이 벼슬을 하기 위해 양반제도를 만들고 양반양성기관을 지방에 두었는데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 사학 집단을 우리는 그들의 부족이름인 선비(鮮卑)라고 부른다. 이들은 평생 군역에서 제외되었다. 
- 이씨들이 우리 민족에게 지은 죄악 
1. 세종이 한 민족의 언어가 중국과 다른 언어임을 인정 한글을 만들고 이순신장군이 같은 동이족인 일본의 침략을 막았으나 
2. 반면에 중국 농경민족의 인본주의 예법인 주원장의 홍무예제를 조선 농경국가의 법율로 받아드렸고 조선민족의 전래 언어의 반을 중국어인 한문으로 바꾸었으며 반상제도로 토착민의 진출을 막고 선비(자신들의 부족의 이름)제도를 통해 유교를 정착시키려 했고 갖은 방법으로 지역민을 수탈했으며 특히 전주에 본을 두고 호남을 수탈하여 지금의 호남 민심을 만들었다 
- 일본인들은 조선의 가장 큰 단점을 양반 제도라고 하였다. 
- 주원장의 비호를 받은 선비족 이씨(李氏)들로 부터 신라 김씨가 국권을 도로 찾는데 무려 400년이 걸렸다(이조 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 신라는 단군의 유산(삼신과 제사)을 지키려고 반도로 피난하고 당과 타협했지만 이조는 권력을 지키려고 명에 복종하였다 
- 일본의 침략은 신라의 건국 세력(주로 박씨)들이 선비로부터 한반도를 찾기 위한 명분(필자의 홈피 www.armymission.org에서 펌)
* 사진은 “이성계는 몽골 군벌이었다”라는 논문을 작성한 광운대 윤은숙교수

이들은 농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농자(農者) 천하(天下)지 대본(大本)이라 하였고 중국은 진시왕 이후 인간이 스스로 인본주의 하나님이 되어 전술한 조선의 王(왕)자 위에 사람 얼굴을 올려 놓고 皇帝(황제)= 天子(천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이어받은 고조선 호모사피엔스의 유산은 삼신사상, 고향과 가족 애 등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수메르 인의 이동
기원 전 4-5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일단의 부족이 나타나 우리가 말하는 소위 유프라데스 티그리스강 농경문명을 만들었다. 그들은 비옥한 두 강의 유역을 개발하여 농토로 만들고 수로를 만들어 비옥한 토지를 일구어 많은 곡식을 생산하였으며 지역마다 10여 개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여러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에리두 문화가 우루크 문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엔메카르와 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들은 도시별로 아람어, 수메르어, 아카드어, 엘람어, 후르리어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신들은 기원전 18세기경 그들의 점토판에 의하면 2천여 신이 있었고 그것도 계급이 있었으며 대표적인 신은 엔릴(대기의 신, 닌 후르상(모신), 엔키(지혜신), 닌나(달신), 닌 안나(달의 신) 닌 아누(하느님) 등이고 여기서 닌은 님으로 보이며 기원전 18세기 아카드족의 사르곤의 후예 함무라비왕 때의 최고신은 마르둑(바벨론 수호신, 말뚝신, 멜기세덱)이었다. 같은 지역의 갈데아 우르에서는 멜기세덱과 닌 아누가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스스로를 수콜로티(한국어의 수골 씨)라고 불렀는데 2013년 현재 시리아 라스샤무라에 있는 그들의 점토판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은 “수메르의 왕이고 왕 중 왕인데 성이 김씨”라고했다. 여기서 숫골 씨라는 의미 한웅 조선의 무사집단을 뜻하고 이들은 한인조선이 남성 우위와 여성 우위를 두고 재사 권 경쟁을 할 때 남성 우위를 주장하며 남쪽과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떨어져 나가 수메르와 스키타이, 헌원, 신라 내물왕 김씨들로 나중에 서양의 킹(King)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 수메르인과 고조선인(한국인)비교해보면 외형은 
① 형질적으로 머리털이 검고, 
② 곧으며, 
③ 서구인에 비해 체구가 작고, 
④ 후두부가 편평하며, 
⑤ 문화적으로 소호금천씨가 발명한 태음력을 사용하고, 
⑥ 한국어와 유사한 교착어를 사용하며, 
⑦ 순장을 강요하고, 
⑧ 회도(灰陶)를 사용하는 점을 들어, 
문정창은 이 요소들을 , 수메르인의 한국인적 8대 요소라고 부른다. 
- 언어는 
수메르인과 고조선(한국)인은 같은 교착어를 사용하였고
- 종교는 
고조선의 천산과 알타이산은 산이 많아 산 꼭데기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메소포타미아는 평지므로 운데 "지구라트"라는 제천 단을 만들게 되었고 이것이 항상 도시국가간 불화의 원인이 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심성 속에는 하느님이 있었고 그들언어로 아누님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전쟁에서 이기는 도시의 신을 다른 도시들도 섬기도록 강요되었는데 마지막 승리신의 이름이 마르둑(우리말로 말 둑 : 말을 고정시키는 못, 땅에 무엇을 고정시키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만든 큰 침)이었다. 현대 의학자들이 1.990년대에 헬리코 파이로린 박테리아 치료를 위해 발견한 유전자를 통한 인류의 이동도에서 이들이 모두 한국인과 이들이 같은 핏줄임이 확인되었고 슈메르도 천신(天神)을 탕구리 단군(檀君)이라 고 불렀음음이 확인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림토 문자가 출토되기도 했고 조선의 12궁도와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을 비롯 흑해/홍해에는 황해의 오행(5行)흔적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단고기의 12환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라는 이름이다. 이 외에도 한국과 수메르의 관습과 사상이 같은 것이 무려 33가지나 일치한다. 이들은 하느님(아누님)의 이름을 마르둑(후에 멜기세덱)보다 덜 거룩하게 불렀고 이동을 하지 않고 말뚝 박는 것을 농경을 위해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옵고”라는 기도문을 가르쳤다.

마) 에집트 문명

에집트 문명은 전형적인 인본주의 문명으로 페르시아와 교류하여 생긴 아프리카 네안데르탈인들의 문명이다. 
아람 인은 기원전 2.600년경부터 에볼라 왕국의 언어인 아람 어가 유프라데스 강과 나일강을 잇는 지역의 무역과 상업 용어가 된 이후 이 지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한편 지중해의 최초 문명인 그리스 로마 문명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생성되었는데 이들은 그 이전부터 바다 위주 생활로 남성 힘이라야만 살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증거로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소 결론
현대 문명의 기원인 4대 문명은 모두 고조선의 분파인 유라시아 북쪽 스텝 지역에서 발원한 아리안과 중국인, 수메르 인들이 만든 산물로 이들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자연 적 채취와 수렵 생활을 버리고 집단적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신은 인간이 즉 하느님이라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고 수메르도 아브라함도, 성경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들의 유일신은 자연의 하느님께 대항하겠다는 뜻이 결집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풀지 못하는 인간의 모든 것 즉 호모사피엔스의 의식, 인식, 느낌, 반응 등 사고체계와 생리적 체질, 성격, 특징 등 그 모든 것을 알려면 지금까지의 연구를 기초로 진실하게 모든 학문이 다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삶의 진실한 가치에 알고 대처하려면 이들 DNA 중 6-7만 년 간 생겼던 일을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과 함께 멸망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또는 하나님을 버리고 아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부터 호모사피엔스의 시초인 고조선인 현재의 한국인인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느님으로 인간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파악할 수가 있고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백인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잘 이해해야 성경을 바로 읽을 수 있는데 그들을 백인이 되도록 만든 어둠 속에서의 수만 년의 생활과 그 생활로 인한 유전자의 변형이 가장 튼 고려 사항이다. 위도가 높은 지중해 지역은 아시아에 비해 햇볕이 없어(반대로 동방은 해를 따라 왔으므로 밝았다: 규원 사화 창세기 참조) 과일이 자라지 않아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육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생존을 위해 인간끼리 싸우고 심지어 인육을 먹어야 사는 상황에 처했던 기간 있었던 것 같다. 기원 전 3만 5천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 동굴과 프랑스의 쇼베 동굴, 그리고 프랑스 남부 베제르 계곡의 크로마뇽 동굴 벽화 등이 이를 증거 한다.

규원사화 [揆園史話] 
조선시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책이다. 고조선 47대 단군의 재위기간과 치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저자 북애노인, 1675년
조선 숙종 2년(1675년) 3월 상순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역사책이다. 고조선을 세운 왕검(王儉)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대 단군(檀君)의 재위기간과 치적 등을 기록하였다.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하여 1946년 5월 25일 귀중본 629번, 고서 2105-1번으로 등록하였다. 책 크기는 가로 16.5㎝, 세로 24.7㎝이다. 1972년 11월 3일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등 고서심의위원 3명이 심의를 하여 숙종 때 쓰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병도(李丙燾), 조인성(趙仁成), 송찬식(宋贊植) 등의 실증사학자들은 제작연도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살았던 효종~숙종 시대에는 책에 표현된 천주(天主)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책이 처음 선보인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천도교도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북애노인은 자신이 과거에 떨어진 선비로서 전국을 방랑하던 중 어떤 산골에서 발견한 《진역유기 震域游記》를 바탕으로 이 책을 지었다고 설명하였다. 고려시대 말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쓴 《진역유기》는 발해의 역사책 《조대기 朝代記》를 참조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본문의 내용은 역대 단군의 재위기간과 치적 외에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주체의식이 부족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또 청나라와 연합하여 옛 땅을 되찾자는 연청북벌론(聯淸北伐論)에 대한 주장 등도 담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이 규원사화에 의하면 “태초에 땅에는 햇볕만 내려 쬐고 있었다.”고 함으로써 창세기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정직하다.

* 베제르 계곡의 동굴 벽화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황소, 야생마, 사슴이 함께 이동하는 그림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에 위치한 베제르 계곡은 선사 시대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의 두개골이 발견된 레제지 마을부터 뛰어난 동굴 벽화가 발견된 라스코 동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조각인로셀의 비너스가 발견된 로셀 마을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수많은 선사 유물이 발견된 보물 창고이다. 베제르 계곡을 따라 발견된 동굴 유적만도 25곳에 이르고 크고 작은 유적지는 자그마치 147곳에 달해 전 세계 선사 유적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유적지가 구석기 시대의 피렌체로 불리는 라스코 동굴이다. 라스코 동굴에서는 기원전 1만 50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벽화가 발견되었다. 또 주변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동굴에서도 선사 시대의 벽화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베제르 계곡은 아주 먼 옛날 지구에 살았던 인류와 지금은 사라져 버린 동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유적지이다.
특기할 것은 원래 알타미라, 쇼베, 베제르 계곡 등에 그려진 이 그림들에는 모두 식인그림과 인신 공양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이 유럽인들의 조상이 고 식인종들이었다는 점이 알려지자 백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산과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1990-2천년 어간에 서둘러 지우고 모든 서책과 언론 그리고 검색 싸이트에서도 이를 지웠다.

성경과 관련 유럽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은 주로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흑암에서 오래 살아 성경 창세기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창 1:2)라고 했고 해안에서 인간의 힘으로 고기를 잡아 막고 살아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있었으며”(창 1:2) 빛이 없어 빛을 창세의 시작으로 보았다.(창 1:3-5) 또 유럽인들의 사람의 피를 좋아하는 것과 인신 공양을 최고의 제사로 삼는 전통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번제(창 22장)와 신명기의 번제 전통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성찬식에까지 이른다. 창세기의 창조 순서에서 유대인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쉬도록 한 자연의 하느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여섯째 날 안식일을 정한 것은 자신들이 자연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서 밤낮 쉴 새 없이 장사를 하면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성경에 대한 수메르 인들의 영향은 아브라함과 유대민족에게서 주로 찾을 수 있는데 아람인들이 수메르의 한가지로 기원전 26세기 ri경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에볼라라고 하는 도시국가를 만들어 동서 교역을 시작한 에벨을 그들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300여년 이상 동서교역을 담당했으며 그 이후 에볼라 어인 아람어가 동서의 상용어가 되어왔다. 이 에볼라에서 섬긴 다신의 이름을 총칭하여 여호와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이를 유일신으로 바꾸어 불렀다. 유대인들의 재물 중시 사상은 에볼라에서 유래되었고(이브라함, 이삭, 야곱, 역대 왕들, 레위인들) 창세기의 신들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기,( 창 1:26-28), 남성우위(창 2:7-8, 21-22), 여성 비하(창 3장). 수메르식 농경 우위(창 4장 가인과 아벨), 남자의 계보(창 5장), 하느님의 농경문명에 대한 저주(창6-9장)등은 모두 수메르의 영향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고조선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창조 순서는 음양오행을 인간 중심으로 바꾼 것이고 제사장들은 기우제를 지냈으며 조선의 정결 의식(백의민족)과 희생제사를 제외한 다른 제사도 모두 조선에서 수메르를 거쳐 가져간 것이었다. 제사장 중심의 국가체제는 근본적으로 고조선에서 시작된 것이다. 수메르와 백인들의 인본주의와 조상들의 하늘 제사의식을 혼합한 것이 유대교이다. 창조순서 일주일과 안식일은 양오행을 인간 중심으로 바꾼 것이고 제사장들은 기우제를 지냈으며 조선의 정결 의식(백의민족)과 희생제사를 제외한 다른 제사도 모두 조선에서 수메르를 거쳐 가져간 것이었다. 제사장 중심의 국가체제는 근본적으로 고조선에서 시작된 것이다. 수메르와 백인들의 인본주의와 조상들의 하늘 제사의식을 혼합한 것이 유대교이다.


* 스텝 민족(고조선의 가지)의 남하 지역


자료출처 : http://armymission.org/amov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