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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 임승국

양해천 2018. 1. 29. 17:02

환단고기-임승국.pdf


환단고기(桓檀古記)

환단고기 해제

출처http://bluecabin.com.ne.kr/handangoki/handangoki.htm

환단고기는 이 땅이 식민지로 접어든후인 1911년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 편찬 되였다.

그 내용은 삼성기와 단군세기,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의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것

이다.

삼성기는 신라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이니,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우리민족의 시발인 한국시대의 한

인으로부터 7세 한인 까지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 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

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하권에 신시역대기가 덧붙여있다.

단군세기는 고려때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1세 단군 왕검으로 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 학자인 범장이 전한책이다.국사책에서의 고구려 건국년대는 B.C.37년으로

되어있으나,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이 보다 두갑자(120년) 내지는 세갑자(180년)가 앞선 것

으로 생각되는데,몇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가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상권·하권·가섭원부여기로 구성되는데,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때 학자인 이맥이 전한책으로,한국桓國 ,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

려에 이르기 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

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여 있는데,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다.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이 환단고기는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신앙·풍습·정치·경제·철학·교육·지리·예술 등

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있다. 그리고 조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할점을 제시하고

있다.일예를 들면 주체의식의 입장에서 볼 때, 늘 우리의 귀에 익어온 발해라는 이름도 본명

인 대진국大震國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왜냐하면 발해라함은 남이 부르던 이름일 뿐 ,사실

은 대진국임을 환단고기는 입증하고 있음이다.한가지 더 예로 들면 우리는 우리의 임금을 왕

이라 말해왔다.그 왕이라는 칭호는 제후들에게나 사용하는 것으로서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는

제후나라 백성이라고 암시 받아왔던 것이다.그러나 보라.환단고기의 어디에 왕의 칭호가 있는

가? 엄연히 고려시대까지 내내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실상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은 이미 우리 조국의 고대사가 대륙의 역사

임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렇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용의 허구를

의심할 것이다.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것이,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국사와는 너

무나 엄청난 차이를 이 환단고기는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삼국시대가 최초의 국가 형태를

갖춘 고대국가라고 간주했던 식민시대의 학설에 반해,그 이전에 이미 찬란한 한인·한웅·단군시

대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환단고기이며,또 그 역사의 주도

가 매우 주체성 있는 강국의 면모를 갖추고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필자는 이책을 번역해

가면서 평소에 주장해왔던 바 ,한반도만이 우리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과 스스로 강국임을 포

기하고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사관의 말살을 염두에 두고,그내용의 예증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

다.

그어느 책보다도 많이 읽혀져야할 이러한 책이 왜 그토록 묻혀있었던가 하는 의문은,역시 우

리의 사가들이 젖어있었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는

이책에 포함된 일부의 사서史書에서도 인습에 젖어있던 그간의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으니,

잘못된 역사관의 해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결코 이 환단고기를 근거가 불확실하다던가,신빙성이 없다던가,편찬자들의 학문적 업적이 뚜

렸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내팽개 칠 수는 없다.그러한 선입견 자체도 논리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것이다.적어도 이책에 실린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이책은 한국인에

게 중시되어야 하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들먹이며 문화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가 제대로된 상고사 하나 변변하게 전

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또는 고려사 만이 우리의 역사

책일리가 없는 것이다.우리 조상들은 분명히 숱한 역사책을 편찬했고 전해왔다.그것들을 온전

히 전하지 못했던 것은 또다른 못난 조상의 탓이라고 할수밖에 없다.이 환단고기는 그렇게 사

장되어온 일부의 사서들을 모은 책이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갖고, 그것을 자랑하며,그 얼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또 이를 통

해 민족정기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은 하등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이제 이책 이 환단고기 한권

을 읽어 마칠 때 쯤에는 우리의 참 된 역사와 전통,하나님 나라 백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맥

박이 고동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역자 후기에서의 <환단고기의

가치>로 미룬다.)

번역 및 주해자 임승국 (林承國)

환단고기 범 례

*고기古記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史》로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古記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

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 책으로 묶어 《환단고기桓檀古記》라 이

름하였다.

*《삼성기三聖紀》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安含老씨가 찬撰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 《삼성기 전 상편 三聖紀 全 上篇》이라 하고 원동중

元董仲씨가 찬撰하고 태천泰川의 백진사白進士 관묵寬默씨로부터 얻은 것을 이제 《삼성기 전

하편 三聖紀 全 下篇》으로 하여 통틀어 《삼성기 전 三聖紀 全》이라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흥행촌의 노인이 엮은 것으로 행촌杏村선생 문정공文貞公이 전한 책

이다. 이 책도 역시 백진사白進士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進士의 집은 글로써 전통이 알려졌

던 오래된 가문으로 본래 많은 책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제 두 종류의 사서史書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함은 어찌 다만 백 사람의 벗이 주는 선물에 비길 수 있을 건가? 조국에 만장

의 광채를 비춤이라 할 것이다.

*《북부여기 상ㆍ하北夫餘紀 上ㆍ下》는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찬한 것이다. 본래 《단

군세기 합편檀君世紀 合編》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었던 바 삭주朔州의 이동梨洞 이

진사李進士 형식亨拭의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백진사白進士가 간직했던

것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도 없다. 이제 또 별본別本이 있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있지만,

이는 그 내용이 앞의 책과는 매우 다른바가 있을 뿐만아니라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일십당一十堂 주인 이맥李陌이 펴낸 것으로 해학海鶴 이기李汽 선생

이 간직했던 책이다. 대저 한단桓檀 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 경문을 모두 사용한 전거가

한번 보아도 뚜렷한 것들이다. 또 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두 책의 전문이 함

께 편중編中에 있어 실로 낭가朗家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대학 중용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오호라! 한단桓檀 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심법三一心法은 참으로 이 책에 있는 바, 모름지기

태백진교太白眞敎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되지 않을 것인가? 손도 저절로 춤을 추고 발도 저

절로 춤추고 흥겨워 소리지르고 싶으니 기쁨에 미칠 지경이로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모두 해학海鶴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 근면을 다하여 옮겨

쓴 것이다. 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하나는 자아自我인간의 주성主性발견으로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민족문화의 표출

이념이 됨으로써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세계 인류의 대합對合공존으로써 크게 기뻐하는 바이

다.

신시개천神市開天 5808년,즉 광무光武15년의 신해 5월 광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의 유도遺徒

선천宣川의 계연수인경桂延壽仁卿이 묘향산 단굴암에서쓰다.

*林承國;1928년생.고려대 정치학과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취득. 경희대 영문학과교수,숭실대

영문학과교수,명지대에서 한국 고대사를 강의,한국 사학회 회장,공군 정신 연구원교수,새마을

연수원 교수를 지냄.중국25사에도 능통한 그는 동양제국의 역사를 두루 비교,검토하여 고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역사를 객관성있게 입증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출처: bigstar

삼성기 전상편 (안함로 지음)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지금

의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

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흑룡강을 말하며 중국말로는 살합연오라 러시아말로는

아므르) 백산(白山:백두산 또는 중국의太白山)의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

(監郡:중생을 돌보는 직책)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

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

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지금의 아버지로 고대에는 국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한

다.)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

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중국 산동 반도의 동래지방, 동양의

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 동이, 조선, 청구가 다우리 민족을 칭하는 말이다.)로 정했다. 천

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

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시고 올 것

을 알며 상을 잡으시고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 스러운 이들과 뭇 철인들이 보살피도록

하시더니 웅씨 (곰이라 하나 옛날의 곰이라 함은 신을 뜻하는 말이다. 풀어쓰면 "ㄱ.ㅁ"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신을 "가미"라 한다) 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

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

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14세 자오지한웅)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 나무 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 을 겸

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

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

고 서울을 아사달(백두산 또는 완달산)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

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

靈)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 에게 명하시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

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와 호적을 관리

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

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 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 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

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

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

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 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왕(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정

미(B.C.194)년 한나라 혜제때 연나라 추장이였던 위만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

다 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난하)의 남쪽으로 옮겨갔

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왕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

켜 역시 단군이라 했다.을미(B.C.86)년 한나라 소왕(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

를 제사하여 태조로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성기 전하편 (원동중 지음)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 라고하는데 꿈에 천신이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우리민족의 옛조상을 가리키는 말)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 이다. 옛날 한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한임(하느

님)께서 천산(天山:천산산맥 동쪽의 기련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오래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 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한임,

고시리한임,주우양한임,석제임한임,구을리한임에 전하고 지위리 한임에 이르더라. 한임은 혹은

단임이라고도 말한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중국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

호 또는 북해)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

서가 2만여 리니 통틀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캅차카), 일

군국, 우루국, 객현 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국(퉁구스),수밀 이국(서양의 인류학

계가 주목하는 슈메르 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이다.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는 12연방국가였다. 중국에서는 12연방 국가인 한국을 숙신이라불렀다.)이니 합하여 12국

이다. 천해는 지금 북해라 한다.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 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

다"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 (마가. 우가. 구가. 저가. 양가)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써 세

상을 바꿀 뜻이 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마침

내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

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

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

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감숙성 돈화현 삼위산은 저 유명한 돈황학의 본고장인 돈황동굴이 있는곳이다. 480

굴 정도의 굴이 있는데 그굴의 벽화에는 고구려 인의 벽화와 단군신앙 벽화가 그려져있다.)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 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

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신시개천을 한분은 단군이

아닌 한웅님 이시다.)라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생사를 주관하

며, 무릇 인간의 362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

함이 있었다. 때에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찌기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데 변하

여 신계의 한 무리(맹氓이라 함은 외래의 이주민, 외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가 되어지 이다"

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 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놓았으니 즉,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데 "너희들이 이를 먹

고 햇빛을 백일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 두무리가 모

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기(忌)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잘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며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 바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녀는 더불어 혼

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수(壇樹)의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였다. 그래서 임

시로 변화하여 한(桓)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靈籍장부) 에

실리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배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

치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 천황이 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화백이라 함은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 때

의 제도로 알고 있으나 여기 나와 있는 말로 미루어 보아 화백제도는 신라 때 새로 생겨난 법

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오래전에 있었던 법을 되살린 것이라 할수 있겠다.)을 하였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세나라가 아닌 세 임금을 뜻한다, 진辰.번番.막莫이라는 세 조선

을 통치하는 임금을 뜻한다.)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 불렀다.

<밀기 密記>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 거리였다. 한웅

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

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

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지는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찌기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추장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 "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

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 한웅(신시역대기에 의하면 제10세 한웅에 해당함.)이 나셔서 염제신농(중국의 삼황

가운데 두 번째 황제. 농사 .의약의 시조라 한다. B.C 3218 ~ 3078)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하였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 한웅(14세 한웅, 치우천왕 이라고도 함)이 나셨는데, 귀신

같은 용맹이 뛰어 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

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

에서는 치우천왕이라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

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

로 일으켰다. 또 색도(산동성 임치현 동남쪽 여수의 남쪽에 있는 성명)로 부터 병사를 진격시

켜 회대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중국삼황의 하나로"황제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

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만신을 부르고 불렀다"라고 중국사서에 기록되있으니 그

또한 동이족 임을 증명하는 말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황제 헌원을 아카드왕 사루곤을 모델

로한 거짓역사라 하며 중국 삼황의 존재를 거부했고, 자신들을 실크로드의 주역인양 하며 중

국과 한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황국사관에 꿰맞추려 하였다.)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하북성 탁

록현의 동남에 있다.)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치우가

졌다하고 북애자의 규원사화 에서는 치우의 승리라 하고있음, 그리고 삼성기에서도 치우의 승

리라 하고있음.)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 쪽으로 계곡고신(황제의 증손이니 극의

아들이다.)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

니 탁의 북쪽에 대효(아마도 요임금 즉 제요효 당을 가리키는 것 같다.)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

(문자의 조상이라 알려진 중국사의 전설적인 인물 황제의 신하로서 새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지었다 한다.)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

헌원이 치우 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

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 는 두 나라가 모두 치

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

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 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 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

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마천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쓰기위해 우리민족을

낮추어야 했고 그러한 이유로 탁록의 전투의 승자를 황제헌원 이라 했습니다, 위의 사실로 미

루어 볼 때 북애자의 규원사화의 내용이 좀더 사실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

마천이 중국적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민족의 단군이신 치우천왕을 곡해했음이 여기서

단적으로 들어 나고 있습니다.)

삼성기 신시역대기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뒤에 청

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1세를 한웅천황이라 하며 또 거발한이라 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사셨다.

2세는 거불리한웅이니 재위 86년 102세까지 사셨다.

3세는 우야고한웅이니 재위 99년 135세까지 사셨다.

4세는 모사라한웅이니 재위 107년에 129세까지 사셨다.

5세는 태우의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6세는 다의발한웅이니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7세는 거련한웅이니 재위 81년에 140세까지 사셨다.

8세는 안부련한웅이니 재위 73년에 94세까지 사셨다.

9세는 양운한웅이니 재위 96년에 139세까지 사셨다.

10세는 갈고한웅 또는 독로한이라 하니 재위 100년에 125세까지 사셨다.

11세는 거야발한웅이니 재위 92년에 149세까지 사셨다.

12세는 주무신한웅이니 재위 105년 123세까지 사셨다.

13세는 사와라한웅이니 재위 67년에 100세까지 사셨다.

14세는 자오지한웅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 까지 사셨다.

15세는 치액특한웅이니 재위 89년에 118세까지 사셨다.

16세는 축다리한웅이니 재위 56년에 99세까지 사셨다.

17세는 혁다리한웅이니 재위 72년에 97세까지 사셨다.

18게는 거불단한웅 혹은 단웅이라 하는데 재위 48년에 82세까지 사셨다.

단군세기檀君世紀 (행촌 이암 지음)

단군세기 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

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고.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쳐 질 수 없

고,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무

릇 올바른 역사 학은 나뿐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

을 이야기 하니,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이 백성이 생긴지도 오래되어 세상

이 열린 이래의 여러 가지 질서도 많이 변화하였다. 나라와 역사는 나란히 이어지며 사람과

다스림도 따로 나누워 말할수 없는 것이니. 모두가 한 개인 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고 또 소중

하게 생각해야 됨이라.

아아! 다스린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사람은 오로지 바른길을 생각해야

되나니, 사람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 어찌 바른 길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겠는가?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얼이 깃들여 있을진데 ,모습이 어찌 얼을 잃고도 모습만으로 우쭐댈수

있다고 할까? 바른길로 바로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모습과 얼을 함께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일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 있음이라.

그런데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알아야 할까?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

원일大圓一에 그 뜻 이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을 이루고,가르침의 신은 내려와

나의 삶을 이루고, 다스림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신을 이룬다.*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

이 만물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저.

*대원일;거발의 뜻. *성품.삶.정신;원문은 性.命.精으로 되어 있는바,성품,삶,정신으로 각각 해

석함.

무릇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은 신의 뿌리다.그렇지만 신이 성품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해서 성품

이 바로 신 그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기가 밝게 빛나며 어둡고 더럽지 않을 때에 비로소 참

성품이라 한다.이로서 신은 기를 떠날수 없는 것이며,기도 또한 신을 떠날수 없는 것이다.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신의 성품과 기가 잘 조화되어 합쳐진 후에 스스로의 성품이나 삶을 알

수 있는 것이리라.

성품은 삶을 떠나서 있을수 없고 삶도 성품을 떠나 있을수 없는 것이니,스스로의 성품과 삶이

잘 어울린뒤에야,이 몸이 신의 성품에 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기운넘치는 삶에서 비롯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그 성품을 깨닫게 됨은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

고,그 삶이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신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모든 목숨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 하는 것이다.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

나로 돌아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뀌지 않을 때 (참 나)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었으로든 바뀔수 있을 때

신이라고 하나니 참된나는 신이 머무르는 바른 곳이다.이 참된 근원을 알고 올바르게 수련한

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리라.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릴

때 이로부터 세 가지 신의 성품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라는 것에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 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듯 자취도 없이 오랬동안 존재하게

된다.감感.식息.촉觸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 그데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

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줄거우며,하늘,땅,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까닦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하고,그 모습을

뒤집어 바꾸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없는 것에서부터 바꾸어 나가야할 것이다.이것이 바

로 나를 알아나가는 단 하나의 길인저! 오호라 슬프다! 부여夫餘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

으니 그 뒤에는 한족漢族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고려高麗는 고려대로 길을 잃었

으니 그 뒤에는 몽고蒙古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

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인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 갔을 것이고,고려에 고려다움

이 있었다면 몽고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앙,슬프도다!얼마전에는 *잠潛이나 청淸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

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남생男生이나 *발기發岐 따위들과 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바른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져,나라 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

버린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인들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잠이나 청;오잠과 유청신(?~1326).두사람다 고려중기의 역적이다.먼저 오잠은 고려충열왕

(1236~1308)때의 간신.승지로 있을 때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연락宴樂을 좋아하므로 김원

상.석천보등과 함께 총애를 미끼로 성색聲色으로 임금을 기쁘게 하려고 삼장사三藏寺,사룡蛇

龍등의 노래를 지어 가무를 관람 시키는등 재주를 부렸다.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가 되어 항상

임금의 부자를 모함으로 이간 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해하여 원성이높았다.원충갑등 50여 명

이 원나라에서 파견된 다루가치(達魯花赤) 첩목아불화(帖木兒不花)에게 호소하니 윤만비.홍자

번 등도 들고일어나서 오잠의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그도 아무일 못하고 돌아가 버렸다. 참다

못한 김심.오감량.홍자번등은 군대를 이끌고가서 대궐을 포위하고 오잠을 내어 달라고 요청하

였으나 임금은 듣지 않앗다.이에 오감량은 임금의 거처에 들어가 오잠을 끌어내다 최숙천으로

하여금 원나라로 압송하니 원나라 황제는 그를 안서로 귀양보냈다.훗날 충선왕(1275~1314)때

에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구성군龜城君에ㅡ봉해져서 여전히 간신노릇을 하여 해독이 많았다.

유청신은 어려서 몽고어를 공부하여 후에 여러번 원나라에 내왕하는 동안 외교에 능했으므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대장군을 거쳐 동지밀직감찰이 되고 충선왕때 강정부사.충렬왕복위 후

첨의정승이 되고 고흥 부원군 에 피봉,왕의 옥대를 하사 받았다.충숙왕 즉위 후 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갔을 때 심왕 고로 하여금 고려의 왕위에 올리려는 매국적 반역의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여 귀국하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남생;고구려 보장왕 대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당나라에 망명하여 고구려 정벌의 향도가 됨으

로서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반역 행위를 한 고구려의 반역자.

*발기;고구려 8대 신대왕 백고의 아들,9대고국천왕의 동생.10대산상왕 연우의 형에 해당한다.

형 고국천왕이 후사없이 죽자 동생 연우가 우왕후와 짜고 왕위를 계승하자 반란을 일으키나

막내동생 계수에게 평정되어 자살함.계수는 북부여왕 위구대와 동일인이며 백제왕 구수이다.

또 가지마는 그를 일본의 진무덴노오의 모델이라 비정했다.따라서 발기는 이쯔세노미고도의

모델이라고 상상했다. 여기서 남생과 함께 쓰여진 것은 발기 때문에 고구려가 분열했기 때문

이다.분열뒤에 계수가 부여국으로 되돌아와 뒤에 이도국을 세우고 그것이 백제국이 된다.위지

는 장자 발기와 소자 이이모만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님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 대신을 마음데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있을 뿐,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까닦인가? 이는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한 벼슬아치의 힘으로 조금

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바로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바를 찾을때에 나라를 구하는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구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 한 것이다.

그러면 나라를 구함은 어디에 그 중요함이 있을까?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에는 역사가 있

어야만 되고 그 모습을 가지려면 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신시神市에 하늘을여니 이로부터

나라의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나라의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백성도 다

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느가? 이런까닦에 기

쁘게 단군님의 역사를 쓰기 시작 했다.해경대왕12년(1363)계묘*10월3일 홍행촌洪行村의 늙은

이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다.

*다시 앉히기도; 중조重祚라고 하였으니 한번 왕위를 떠난 임금이 다시 즉위하는 것.

*효경대왕12년 계묘;원문에서 上之12年癸卯라고 했으니 .고려31대 공민왕 12년을 뜻함

*강도;강화도를 말함

단군세기

초대단군 왕검 재위93년

고기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熊씨의 왕녀이며 신묘(b.c.2370)

년 5월2일 인시에 밝달나무(檀木)밑에서 태어났다.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14세 되던 갑진(b.c.2357)년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裨

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 하도록 하였다.무진년(b.c.2333) 제요도당帝堯陶唐때

에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

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되엇다. 이를 단군 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

이었으며 130세 까지 사셨다.

*신인;단군이 우리의 민족사 특히 정통적 민족종교의 교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바로 단군이 삼신.즉 천신,지신,인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신人神의 위치에 도달하여 "육체의

영화靈化"를 이룩한 부장을 뜻한다.

*비왕;비장裨將 소관小官 대장을 돕는 장관將官 부장副將을 뜻한다.

무진 원년(bc.2333) 바야흐러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 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

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개천 1565년 상월上月3일

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

잡았다.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

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 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

라 하였다.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

했다.

*조선;흔히 아침(조朝) 빛날(선鮮)에 견주어 아침해가 빛난다는 뜻에서 조선이라는 국호가 생

겼다 하나 , 조선이라는 국호는 한자가 생기기전에 이미 있었던 국호이니 조선이란 말은 우리

의 고대어로 무었을 뜻하였을까? 앞에서 언급 했듯이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은 숙

신(肅愼)이라 하고 "만주원류고"에서는 숙신의 옛이름은 주신珠申이라 하고 주신은 소속 관경

管境을 가리키는 만주 말이라 했다.바로 여기에 조선의 원의源義가 있는 듯하며 숙신은 곧 조

선의 고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신이 조선이 되는 것은 한 음의 차이이니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아뭏튼 우리의 역사상 조선은 가장 오래된 국호임을 새삼 알아 둘 필요가 있

다.결코 아침은 빛난다 등 한자와는 무관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하는 morning

calming korea 따위의 영문 철자도 재고할 일이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너희

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 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

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니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이런 까닦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사람의 마음도 살 필수 있으리라. 다른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 뜻에 잘 맞출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어느곳에도 잘 쓰일수 있는 것이리라.너희

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

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 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이것이 바로 충성되고 효도 함이니라.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

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

라.너희들,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워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

여 서로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앗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너희들 ,호랑

이 무리를 보아라.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 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

라.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사랑 할지니라.너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

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너희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원어로는 걸오桀?라 하였는데, 길들이지 않은 말을 뜻함.횡포하여 복종

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너희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 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 할 것이니라.너희가

아무리 두덮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나뿐것을 감추지 말 것이

며,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하라.너희는

이로서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너희 오가의 무리 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

이때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엿고,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고

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기성

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 하도록 하였으며,희羲에게는 점

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엿다.비서갑 비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

두어 아내로 삼고 누애 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

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수가 없었다.제帝께서 는

풍백風伯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 하여 백성들을 편하

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牛首州 ; 중수성中首省 삭주朔州(평안북도)라고도 하며,김사렵의 삼국유사는 춘천春川을 우

수주라 했고 옛날의 맥국貊國이라 했으나 반도사관에 입각한 망설이다.단군조선의 강역을 한

반도라고 전제한 종래의 사관이 빚은 오류일 뿐이다.우리의 역사 지명에 우수 곧 "소머리","쇠

머리"라는 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하며 그 곳을 함부로 比定비정함은 큰 잘못이다.다만 소 머

리. 쇠 머리가 주목이 되는 것은 슈메를 ,소말蘇末,수밀이국須密爾國 등의 역사 지명과 모두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다. 여기 우수주도 당연히 저 대륙의 어떤 지명이지 결

코 한반도 안의 지명이 아님을 단언 해 둔다. 앞서 말한 일본인 가지마는 우수주를 바빌론의

우르지방이라고 망언 하고 있다.가지마의 설을 따르다 보면 한국사韓國史가 곧 바빌로니아 역

사의 후기사後期史가 되고 만다.

무오 51년(b.c2283)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

*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 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갑술 67년(b.c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우司

共*과 만나게 하엿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 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

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 하였다. 또 회대淮垈지방의 제

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穴口; 지금의 강화도

*三郞城 ;경기도 강화군 길삼면에 있는 고성의 이름이 삼랑성이다. 일면 정족산성 鼎足山城 .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은 성이라 한다.참성단과 함께 단군 유적의 하나이다.

*摩璃山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이다. 마니산이나 마리산의 본 이름은 (ㅁ 밑에. 자)리 산이다.

(ㅁ 밑에. 자)리 즉 머리(수首)를 뜻 한다 .훗 날 마니산으로 개명하였으니 잘못이다.

*塹城壇 ;강화도에 제천단祭天壇이 있다.

*塗山 ; 중국 안휘성 懷遠縣을 흐르는 淮河의 동쪽 강변,일명 당도산當塗山. 일설엔 하나라

우왕이 도산씨塗山氏의 여인에게 장가든 장소라고 "오월춘추"는 적고 있다.사실은 단군의 태자

부루가 하나라 우왕과 만나 물을 다스리고 산을 다스리는법과 오행치수의 이론을 전수시켰다

는 이른바 도산의회맹 會盟으로 널리 알려진 땅이다.이 땅에 대해서는 중국쪽의 정사에도 하

나라 우왕과의 관련사실을 대서 특필하고 있으니 그때 우리 쪽의 문화가 이 회담을 통해 중국

쪽에 넘어간 것 같다.

*우사공; 사공은 관명 ,소호김천씨小昊金泉氏 대 둔 벼슬 이름인데 요堯임금의 당唐나라 때와

멀리 주周나라때도 그대로 썻다.주 때는 육경六卿의 하나로 동관冬官 대사공大司空이라 하고

대사마大司馬(군정담당)대사도大司徒(예법관장)와 함께 삼공三公에 속하다가 뒤에 대자는 떨어

지거 사공으로 역대에 쓰였다.도산회의에 나온 하나라 사공의 성씨가 우가 였는지 확인할 길

이 없으니 기록대로 우사공을 믿기로 하자.

*幽州와 營州 ; 幽營이란 유주와 영주를 뜻하는데, 유주는 요임금의 12주의 하나.이외에도 같

은 이름으로 여려곳이 있다.순舜임금때 기주冀州 동북의 땅을 갈라 유주라 하니 동북 유매의

땅이란 뜻이다.하북성의 순천順川 영평永平 및 만주 요녕성의 금주錦州 서북 일대의땅.전연前

燕이 설치한 것으로 치소治所는 용성龍城 산서성 이석현치離石縣治. 남연南燕이 설치한 것으

로 치소는 이석離石 .동성 당읍현堂邑縣의 서남.전조前趙의 유연劉淵이 설치한 것으로 치소는

이석離石. 영주는 옛 요임금 12주의 하나.순임금은 청주靑州 동북 의 땅을 갈라 영주라 하였

다. 지금의 하북성으로부터 요녕성 및 한반도에 미치는 땅이라고 종래엔 설명 하였으나 이는

큰 잘못이다, 여기 조선은 하북성의 해안에서 요녕성에 걸처서 있는 조선을 가리키는 조선이

다.예나 지금이나 조선은 현재의 한반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착각하는데서 오는 잘못이다.

옛날엔 한반도의 존재 사실 자체를 중국의 필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외에도 후조後趙가 둔 것으로 하북성 천안현 遷安縣의 서쪽 , 후위後魏가 둔 것으로 만주 열

하성 熱河省 조양현朝陽縣의 치소, 양梁나라가 둔 것으로 호남성 도현道縣 , 요遼가 둔 것으

로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등이다.

*분조를 두고; 분조를 둔다함은 명당明堂을 두어 일종의 세습 통치를 인정함을 뜻한다.

*우순虞舜 ;제순유우帝舜有虞를 말한다.이른바 중국사의오제五帝의 하나이다.그가 동이족이라

고 "맹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였다. "離婁章句 下""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

사 하시고 명조에서 죽의시니 제풍.부하.명조는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 "舜生於

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단군의 제후라는 이 기사는

따라서 그다지 놀라운 기사도 아니다.

경자 93년 (b.c.2241) 단군께서 버들 궁궐에 계셨는데 흙 계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

지 않으니 단목檀木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호랑이 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

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애를 치도록 권장 하며 고기 잡기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

은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

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眈浪*에가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멀리 퍼져 나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아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

함하였다. 이 해 3월15일 단군께선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장

사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

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 속에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

이 되었다.

*탐랑; 탐라眈羅와 낙랑樂浪이라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일본과 그 외의 어떤 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물론 위에서의 낙랑도 북경지방을 가리키는 것이다.

*단군님의 기;단기檀旗라고 했으니 "기"는 깃발이며 조기弔旗를 뜻한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2240) 단제 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품 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 없었다.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 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려 왕들의 잘잘못

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 심

는 것을 권장하였다.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

이 날로 떨쳐졌다.

*기숙사를 설치하여; 원문에서의 요寮를 기숙사로 풀었다.

제순유우帝舜有虞*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

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등을 그 곳의 제

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제순유우;중국 삼황오제의 한 사람, 앞의 제순은 황제의 이름,뒤의 유우는 나라이름,유는 우

의 발음을 유도 핟기 위하여 쓰인 글자이며 나라 이름은 우국虞國이다. 동작빈의 년표에 의하

면 순은 b.c2233~2183년의 제왕이다

*남국;흔히 연나라라고 하나 구이九夷 가운데 남이藍夷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동이전에서의 남이 기사는 다음과 같다."하나라 걸왕이 포악한지라 뭇이夷들이 내침하매. 은나

라 탕왕(b.c1751~1738)이 혁명을 일으켜 이를 정벌했는데, 중정仲丁(b.c1568~1558)때에 이르

러서는 남이가 반란하였다"라는 기사가있다.그러므로 남국을 남이로 볼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으로 본다.참고로 연나라의 연대는 b.c?~222년이다.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

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參佺참전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뿐 마음 과녘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 줄

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

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마음. 어아어아, 우리

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

덕 , 한배검*이시여,한배검 이시여.

*어아가;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고대가사의 이름인 듯.

*참전의 계;고구려 제상 을파소(?203)가 지은 "참전계경"이 현존한다.

*한배검;원문에서는 대조신大祖神이라 했다.

임인2년(b.c2239), 단제께서는 少連소련 大連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 었으니 ,사흘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석 달 동안을 느

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

다. 이 때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 달로 멈추던 것을 ,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

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서 알려 무릇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소련,대련;동양고전상에는 단순히 고대인의이름으로만 적히고"예기"에서는 :少連大連善居喪 "

이라고 있을 뿐이다.즉 소련.대련은 상을 잘 치뤘다고 하여 효자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三日

不怠 三月懈朞年悲哀 三年憂東夷之子也삼일불태 삼월해기년비애 삼년우동이지자야"라고 주해

를 달았으니 우리의 조상임에 틀림없다.소련,대련은 어쨋던 중국 고전이 말하는 하늘이 낸 효

자,곧 (天從之孝천종지효)라고 효의 대표요 상징처럼 취급하는 인물이다. 효를 모든 행동의 근

본이라 하는 유교교리에서 볼 때 소련.대련의 효는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계묘(b.c2238)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 까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하였다,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하엿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

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경술10년(bc2231)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한였다. 임자12년

(bc2229)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5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 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 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

친 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렸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

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業身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

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

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푸른 옷;이 옷을 입게 한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민족은 백의 민족이라 하엿 거늘 여기 선 오

행사상에 입각하여 동쪽을 목이라 하고 나무는 푸르다 하였으므로 옷을 푸른 색으로 입게 함

인가.

*쌀되와 저울;두斗.형衡이라 했으니 도량 형기를 말한다.

*모두 통일 하도록 ; 準於官준어관이라 했으니 ,저울눈이나 자의 눈금을 관에서 통제함을 뜻

함.

*밭을 나누고;구정邱井이라 햇으니 옛날의 전리田里의 구획.구區는 16井.정은 900무畝.6척사

방六尺四方을 보步라 하고 보백步百을 무라 하더니 진나라 이후 240보를 1무라 한다.

*칠회력;책력의 일종인 것으로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책 신시본기에

참고 할 만한 자료가 있다.

*구정도;邱井구정을 구획한 도면

*전계;전佺을 (커발한)이라고 읽으니, 커발한 계명을 뜻한다

*업주가리;오늘날 민속으로도 울타리 안에 업주가리 라 하는 볏짚 무더기가 있어 제물을 바치

며 치성을 드린다.

3세 단군가륵 재위45년

기해 원년(BC 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신

(神)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

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

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

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

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

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

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

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

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

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 , 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

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

토라 하니 그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

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

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

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

라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

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 때 이후 신선 불사

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무자 5년 둥

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

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하

여 람藍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

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 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

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을

축 4년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

닷가에 도착하다.정축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환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니 곧 붕어하

시어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무진 원년(BC 2083) 임자 35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요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녁의 땅

에 삼신께서 밝히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

니라. 뭇 신들이 환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

에 우뚝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희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

는 능히 넘볼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

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

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은 나라안을 진압하고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

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

울그릇과 같으니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뒤

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

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은 일어났

다가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

고 하였다.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

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

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사는 모든 일

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

니라.'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

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

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

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

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계축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

율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갑인 원년(BC 2047)

정미 54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 하였다.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

삭이 맺혔다.

신해 4년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궁궐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고쳤다.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을묘 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슬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슬 재위 35년

병진 원년(BC 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

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

하시며 그 죄진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

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

돌아 오셨다.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신묘 원년(BC 1950)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

는 이들까지 크게 기뻐했다.

병오 16년 동문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 연안

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을 두었다. 기축 59년 단

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

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

을 올려 말하길,'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

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

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

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

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

는 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리

모든 것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글을 새겼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

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

으로써 위세를 보였다.을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

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병술 57년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

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소리

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하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

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

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

로 삼으셨다.

무인 52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홀달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기묘 원년(BC 1782)갑오 16년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

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

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나

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

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

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

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

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

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

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

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

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후 우가인 고불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BC 1721)을유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

기를 빌며 말씀하시길,'하늘이 크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수천

리에 삼대처럼 내렸다.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닭이 성의 동

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인이었다.기묘 60

년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 51년

경진 원년(BC 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

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

셔서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

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

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왕들의 공적

을 새겼다.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경오 5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

니 우가 위나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BC 1610)무술 28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

으니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

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

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지금으로치면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신 5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1552)갑신 52년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

에 이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

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찰하고, 은

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

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BC 1484)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 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BC 1435)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짓다.

경신 5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신유 원년(BC 1380)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

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

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

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

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

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

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

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

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

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

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

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

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

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

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

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

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

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

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

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

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

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

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

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BC 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

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 홍윤성이 나서서 대답했다.'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

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

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

에 임금이 성인이 된 후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 '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기유 59년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무인 8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기묘 원년(BC 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계

미 65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

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

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

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경술 원년(BC 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

셨다.

경신 11년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불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정축 28년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

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

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30년

정해 원년(BC 874)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 원년(BC 849)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BC 819)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맹세하여 올린글이 있으니,'삼성의 존귀하심은 신

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시오며 삼신의 덕은 성인에 의해 더욱 크시어라. 빈 것과 큰 것은

한 몸이라 하겠고, 하나는 또 모두와 한가지로 같음이라.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 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세를 귀

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 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 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

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

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을사 2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 원년(BC 795) 이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

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772)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

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병자

6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BC 704)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갑인 38년 협

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 원년(BC 646)

경오 56년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신미 원년(BC 590)

을묘 4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이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병진 원년(BC 545)

신묘 3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이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 원년(BC 509)

기유 1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 원년(BC 471)

기묘 1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 즉위하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BC 461)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

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

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해에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

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BC 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

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

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

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 이 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

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 2년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

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번째 절에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째 절에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째절에 아홉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번 머리를 조아

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임신 17년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

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

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

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

였으므로 우문헌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신미 47년 북막의 추장 액

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

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무인 54년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 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기묘

55년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 없이 옥에 갖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

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 원년(BC 341) 12월 번조선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무술 19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정사 38년 도성

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고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 때부터 나라

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

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

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진 원년(BC 295)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

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기유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

내어 새해인사를 올려왔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 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

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

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고 하시니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틑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 하였다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

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

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의 천조후 12년 계묘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

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 행촌 이암이 이글을 쓴 연대가 고려 31대왕 공민왕 12년 서기로1,363년이다. 그러니까 기

원전 2,333년에다 1363년을 더하면 단기로 3,696년이 된다.단군 조선은 단군기원 원년 무진

부터 계해 58년(B.C 238 ) 고열가 단제의 조선 폐관 까지 2,096년간 지속 되었다.

북부여기 (휴애거사 범장 지음)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 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 하셨다.

계해 2년(B.C.238년) 이해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지금의 호구를 조사법)을 제정

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 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기사 8년(B.C.232년)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 현자를아끼고, 태교를 생각하는법)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B.C.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요나라 부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

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제나라의 장군으로 동호 즉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다. 나중에 돌아가 조선을 침범하

여 조선이 양평에 에 성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다.)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

하더니 만번한(滿番汗:최근 중국의 연구로 북경 북쪽의 창평임이 밝혀짐.)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B.C.220)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계미 22년(B.C.219), 창해역사 여흥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한고조의 공신. 한이 진시왕에게 망

하자 그 원수를 값는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역사를 구하였다. 120근의 철퇴를 만들

어 동유중인 진시황 정을 박랑사에서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여기서 자객이 창

해역사 여흥성이다. 여흥성은 그뒤 여흥성의 거사 미수로 수배되어 몸을 숨겨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연결되어 진시황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박랑사는 하남성 박랑현의

동남에 있다.) 과 함께 진나라왕 정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임진 31년(B.C.209), 진승(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

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 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

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이다.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

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후에

번조선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

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태자 모리수가 즉위 하였다.

2세 단군 모리수 재위 35년

정미 원년(B.C.194), 번조선의 왕은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매우 풍부 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들에게 패하여 망한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

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진한의 두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로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

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중국 요녕성 해남의 평양성)에 성

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

는 침범하지 않았다.

신미 25년(B.C.17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경신 49년(B.C.121),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 하였다.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

압록(한반도의 압록이 아니라 몽고지방 을강을 뜻함.)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중국의 제후국

인 고구려후가 아니라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구려후임이 확실해졌다.)로 삼았다.

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망한 위만의 뒤를 이어 대항한자.)

의 나라가 혼란스럽자 번조선인인 최最가 우거를 살해하였다. 뒤에 성기가 반항을 하였으나

그 또한 번조선인에 의해 살해되었다.이러하여 우거가 망하자 한이 4군(이것이 중국측에서 주

장하는 한4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이사서를 믿지 않는 다하더라도 한무제의 태도에서 이 전쟁

의 결과를 추측 해볼수있다, 한무제는 전쟁에서 지자 전쟁에 참가했던 육군사령관 순체,해군

사령관 양복,무제의사신 위산과 공손수의 네사람을 모두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라는 최악

의 사형으로 발기발기 찢어 죽였다고한다. 만약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개선장군일 이 사람들을

왜 죽였겠는가, 이것의 대답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수있는 사실이다.)을 두고자 병력

을 치막시키니,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군을 연파하였다. 이러자

그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

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마침내

단제께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

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한다.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몽고 역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북만주나 동몽고의 땅

으로 비정된다.)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

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후에 요의 상경 임황부

가 되었다.)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바이칼호부근에서 몽고내부까지.)의 땅이었다.

갑오 22년(B.C.86)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 잡았으

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2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

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 압록하

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 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시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 부터 신과 같

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

불렸다. 이 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

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B.C.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힌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

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

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의 나이

가 23세 였다. 이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마리,협보(주몽의 협력자로 뒷날

일본으로 건너가 다파라국을 세웠다.)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 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

로 뒤 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

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북부여기 가섭원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B.C.86) 원년 왕은 북부여 때문에 지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산동성부근)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표범.곰.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B.C.84) 3년 국상 아란불(동부여 재상, 많은 문헌에 등장)에게 명하여 원근의 백성들을

널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

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 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

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말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

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

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

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

들을 시켜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거두어 기르니, 이름

을 금와라 하고 장성케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계유 39년(B.C.48) 왕

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2세 금와 재위 41년

갑술 원년(B.C.47)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정유 24년(B.C.24)유화 부인이

돌아 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

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갑인 41년(B.C.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 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을묘 원년 (B.C.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

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

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계유 19년(A.D.13)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

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 28년(A.D.22)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

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

유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 하였는

데 큰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

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

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길림성 부근)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

대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시니,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스스

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

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무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떼와 같은 무늬

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갑술(A.D.494)에 이

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태백일사 (일십당주인 이맥 지어 묶음)

삼신오제본기

<<표훈천사>>에서 말한다.

태시(태초)에 위 아래 사방은 일찌기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이시니라.

주체는 곧 일신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니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

지 않으시고 최상의 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

하시고 크게 신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넣어 만물을 만드시고 열을 뿜어 만물의 종자를 세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여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아직 기氣 있기 전에 먼저 물을 낳게 하여 태수로 하여금 북방에 있으며서 사

명(사람의 생명을 관장함)으로서 검은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기機 있기전에 먼저 불을 낳

게 하여 태화로 하여금 남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붉은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질質도

있기 전에 먼저 나무를 낳으시더니 태목으로 하여금 동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푸른색을 관

장케 하시고, 아직 형形이 있기에 앞서 먼저 금을 낳아 태금으로 하여금 서방에 있으면서 흰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체體도 생기기 전에 먼저 흙을 낳더니 태토로 하여금 중앙에 있으

면서 노란색을 관장케 하니라. 이에 하늘 아래 두루 있으면서 오제의 사명을 주관하는 바 이

를 천하대장군이라 한다. 지하에 두루 있으면서 오령五靈의 이룸을 주관하는 바 이를 지하여

장군이라 한다.

생각컨대 저 삼신을 천일(하늘신)이라 하고 지일(땅의신)이라 하고 태일(사람신)이라 한다. 천

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를 주관하느니라.

생각컨대 오제(중국의 삼황 오제의 오제를 말함이 아님)는 흑제.적제.청제.백제.황제를 말하나

니, 흑제는 생명이 다함을 주관하고, 적제는 빛과 열을 주관하고, 청제는 낳아 기름을 주관하

고, 백제는 성숙을 주관하며, 황제는 조화를 주관한다.또 생각컨대 5령五靈은 태수.태화.태목.

태금.태토라 하나니, 태토는 크게 윤택하게 하며, 태화는 녹이고 익히며, 태목은 지어 이루고,

태금은 재량하여 자르며, 태토는 씨뿌림을 주관한다. 이에 삼신은 곧 5제를 감독하고 명령하

사 각각 넓히고 나타내게 하고, 5령으로 하여금 기르고 이루게 하도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

고 달이 뜨면 밤이라 하며, 별의 움직임을 측량하여 춥고 더운 것과 연대를 기록케 하니라.(고

기잡이는 배띠워 바다를 지키고, 농사에는 수레를 내어 땅을 지키니라.)크도다 삼신일체의 만

물의 원리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힘이 됨이여! 높고도 넓어서 세상에 가득하며,

깊고 묘하여 불가사의하게 운행함이여!

그런데 사물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졌으나 이치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도리를 가졌으나 도리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기능을 가

졌으나 기능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무궁함이 있으나.무궁함이 아직 사

물에 다하지 못하였나니, 세상에 있으면 산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니라. 이를 산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가 있으면 반드시 싹이 있고 싹이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고, 꽃이 있으

면 반드시 열매가 있으며,열매 있으면 반드시 쓰임이 있나니라. 이를 또 태양의 움직임에 비

유컨대,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살핌이 있고, 살핌이 있으

면 반드시 행함이 있고, 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이룸이 있나니 대저 천하 일체의 물건은 개벽

을 좇음으로써 존재하고, 진화를 닮는 일 있음으로써 존재하며, 순환에 닮음 있음으로써 존재

하니라.

유원의 기와 지묘의 신은 저절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여 가득히 빛났으니 있을 곳에 있고

감응하여 대응하니라. 오되 시작된 곳이 없고 가되 끝나는 곳이 없으니 하나에 통하여 만가지

를 이루지 못함이 없음이라.

<대변경>에서 말한다.

생각컨대 천일의 신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삼대三大와 삼원三圓과 삼일三一을 가

지고 이를 영부(신부神符를 가진자)로하여 크게내리시사 만만세의 만만백성에게 내리시니 일

체는 애오라지 삼신께서 만드신 바니라. 심心 기氣 신身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서로 의지해야

할 일이로되 아직은 반드시 영원토록 서로 지키지 못하고 영靈.지智.의意 삼식(三識)은 곧 영

靈 각覺 생生의 삼혼(도교에선 태광.상령.유정의 영혼삼정을 말한다.)이 되고, 또 그 소질에 따

라 형形 년年 혼魂을 넘치게 하느니라. 일찌기 경계에 따라서 느끼고感, 숨쉬고息, 접촉함觸

이 있으니, 참됨과 망령됨은 서로 삼도(불교에서의 삼악도를 말함)를 끌어들여 갈라지고 말았

도다. 때문에 이르기를 참 있음으로써 살고 망 있음으로써 멸하느니라고 했느니라. 이에 사람

과 사물의 생겨남은 다같이 그 참된 근원을 <하나>로 하느니라. 성性 명命 정精을 삼관이라

하나니 관을 수신의 요회라 하느니라. 성은 명을 떠나지 않고 명은 성을 떠나지 않나니 정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심.기.신을 삼방三房이라 하고 성화成化의 근원이라 한다. 기는 심을 떠나지 않으며 심은 기

를 떠나지 않나니, 신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감感.식息.촉觸을 삼문三門이라 한다. 문門을 행도行途의 상법常法이라 한다. 감은 식을 떠나

지 않으며, 식은 감을 떠나지 않으며, 촉은 그가운데 있느니라.

성을 진리의 원관(현관)이라 하고, 심은 진신의 현방(허정)으로하고, 감을 진응(답장)의 묘문(열

반에 드는문) 으로 한다. 이를 탐구하고 성에 의해 진기를 크게 발하나니, 신을 분명히 하고

심을 구한다면 진신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고 진업을 크게 이룰 것이니라.

조짐에는 때가 있고 만남에는 장소가 있으나 사람은 빔과 참 사이에 있느니라. 만물은 이에

있는바, 동체인 것은 일기(만물의 원기) 뿐으로, 다만 삼신 뿐이니라. 추궁치 말아야 할 이치

가 있고 피하지 말아야 할 도리가 있으며, 거스르지 말아야 할 기능이 있나니, 혹은 선善 불

선不善이 있어 이를 영겁에 보답하고 혹은 선 불선이 있어 이를 자연에 보답하고, 혹은 선 불

선이 있어 이를 자손에 보답하느니라. 경에서 말한다.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이 뿌리를 내리고, 진

과 망이 어울려 삼도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을 모범 삼나니 참됨으로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지 않으며, 다스림

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고려팔관기>>에 삼신설이 있나니,

상계의 주신은 그 호를 천일이라 하나니, 조화를 주관하시며 절대지고의 권능을 갖고 계신다.

무형으로써 형을 삼으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성을 통하게 하시느니라. 이를 청진대淸眞大

의 체(바탕)라 한다.

하계의 주신은 그 호를 지일이라 한다. 교화를 주관하며 지선유일의 법력이 있어 하는 바 없

이 만들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명을 알게 하니, 이를 선성대善聖大의 체라 하느니라.

중계의 주신은 그 호를 태일이라 한다.치화를 주장하며 최고무상의 덕량을 가지고 말 없으면

서 교화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정을 보정하게 하니, 이를 미능대美能大의 체라 하느니

라.

한인桓仁씨는 한번 변화하여 칠이 되며, 두번 변하여 육이 되는 운을 받아 애오라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쏟으매,천하가 이에 교화된다.

신시神市씨는 천일의 생수와 지이의 생화의 자리를 계승하여 애오라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하매, 천하가 이에서 배운다.

왕검王儉씨는 지름이 둘레를 한바퀴 도는 길이인 3,14의 기를 받아 애오라지 왕의 도를 써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한다.

<<오제설 五帝設>>에서 말한다.

'북방의 사명을 태수太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흑이니 그 호를 현묘진원이라 한다. 그를 보

좌함을 한인桓仁이라 하고 소류蘇留의 하늘에 계시며, 이를 대길상大吉祥이라 한다.

동방의 사명을 태목太木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청이니 그 호를 동인호생同仁好生(살리기를

좋아한다)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대웅大雄이라 하며 태평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광명大

光明이라 한다.

남방의 사명을 태화太火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적이니 그의 호를 성광보명盛光普明이라 한

다. 그를 보좌함을 포희疱犧(포자왼쪽 두획없는자:관포字)라 하고 원정元精(하늘의 정기)의 하

늘에 있으며 이를 대안정이라 한다.

서방의 사명을 태금太金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백이니 그의 호를 청정견허淸淨堅虛라 한

다. 그를 보좌함은 치우라 하고 구화鉤和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희리大嘉利라 한다.

중방의 사명은 태토太土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황이니 그의 호를 중상유구中常悠久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왕검이라 하며 안덕安德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예락大豫樂이라 하느니라.'

<<오제>>의 주에 말한다. '오방(동.서.남.북.중)에 각기 사명이 있으니 하늘에서는 제라하고 땅

에서는 대장군이라 한다. 오방을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용왕현구는 선악을 주관하며, 주작적표는 목숨을 주관하며,

청룡령산은 곡식을 주관하며, 백호병신은 형벌을 주관하며, 황웅黃熊여신은 병을 주관한다.'

삼신산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삼신으로 이름 삼음은 대저 상세이래로 삼신이 이곳에 내

려와 노닐으시고 삼계를 널리 감화하심을 믿기 때문이라.360만의 큰 둘레의 하늘은 크체가 불

생불멸이시며 그 용이 무궁무근이나, 그의 법식과 이치는 때가 있으며 장소가 있으니 신의 지

극히 자상하고 지극히 현명하여 여의자재하심은 끝내 이를 알 수가 없다. 그를 맞이함에는 흡

사 눈에 보이는 듯이 하고, 그 바치는 일은 문득 들리는 바 있는 것 같이 하고, 그 한탄함에

는 기꺼이 하사받음이 있는 듯이 하고, 그 서약함에는 숙연하여 얻는 것이 있는 듯이 하며,

물건을 바칠 때에도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바침이니, 이렇게 만세 인민이 인식추앙하여 모두

가 다 기쁘게 믿는 것이다.

삼신산에 어떤 설에서 '삼은 신이 되고 신은 또 백으로 되며, 신은 또 백으로 되며 신은 고가

되는 고로 고는 바로 두가 된다. 때문에 또 백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

개마는 해마리의 전음이다.'라고했다. 고어에는 힌것을 해라하고 두를 마리라고 하니 백두산의

이름도 역시 이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시다라 한다. 또 사타려아라

고도 한다. 어느날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 놓고 하늘

에 알린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산남의 주작이 날아와서 즐기고, 수북의 신구가 상서를

나타내고, 곡서엔 백호가 산모퉁이를 지키고, 계동엔 창룡이 하늘로 승천하고, 가운데 황웅이

있었다. 천해 금악 삼위 태백은 본디 구한에 속한 것이며 9황의 64민은 모두 그의 후예이다.

그러나 1산1수가 각각 한나라가 되매, 사람들도 역시 서로 따라가 경계를 나누니 경계에 따라

나라를 달리하게 되었다. 나라를 달리 한지 오래되니 창세의 조서(줄기와 길)의 뒤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뒤에 한인이란 분이 나타나셔서 여러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

어 안파견이라고도 하고 거발한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

지가 되었다는 거발한이라 함은 천 지 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니라. 이로부터 한인

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이를 9황 64민이라 한다.

그윽히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사 물건을 만드시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게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도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

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지인 삼극은 있었고, 대원일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

으니 곧 천하 구한의 예악(예절과 음악)이 어찌 삼신고제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전에서 말한

다.

'삼신의 후를 일러 한국이라 하니 한국은 천제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니라.' 또 가로대

'삼신은 한국의 선대에 있었고 나반이 죽어 삼신이 되셨으니 그 삼신이라 함은 영구생명의 근

본이라.' 고 하였은, 그래서 또 말한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한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사 한국의 천제가 되었다. 뒤에 나반을 대선의 천이라 하고, 한인

을 대중의 천이라 하고 한인 한웅 치우를 삼황이라 하며, 한웅을 대웅의 천이라 하고 치우를

지위의 천이라 한다. 곧 <<황제중경>>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삼광오기三光五氣가 모두 시청감

각에 달려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불을 피우고 말을 하게 되고 글자를 만들었으니, 뛰어나고

열등하여 이기고 지는 다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웅족 가운데 단국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

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 구한의 삼한

관경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의 예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갈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부여

의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충성됨과 사악함과 살고 죽음

은 필부에게도 같이 돌아오는 법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한 증거가 된다.

색족은 어떤 것일까? 황족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

고 머리털이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

갈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

낸다. 땅에 제사지냄을 방구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지냄은 각목이라 하나니, 산에 웅

상의 상을 만듬은 모두 그 유법이다. 하늘에 제사지냄에 있어서 반드시 한(임금)이 몸소 제지

내니 그 예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멀리 가까이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산한 것

을 바치고는 북치고 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

치니 진기한 것들이 언덕과 산처럼 둥그렇게 쌓인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관경을 번식케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의 제천은 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로부

터 화를 당하여 함께 힘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이라 하고 벼가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이라 하였다. 산을

군생통력의 장소라하고 업을 생산작업의 신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라고도 한다. 집

터에 발원하면 터주대감이라 하고 집에 발원하면 성조대군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을

이루는 신이다. 묘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 나갈 때, 진을 칠때, 길을 떠날 때, 모두 각각 제가

있으니 제는 반드시 날짜를 골라 제를 올려야 복을 이루는 것이라.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효신용인의 오상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

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

모든 부락에서는 스스로 삼로를 모셨으니, 삼로는 또 삼사라고도 한다. 어진덕을 갖춘자가 있

고 재물을 베푸는자, 지혜를 갖춘자가 있으니, 누구나 그들에게 사사함이 이와 같다. 또 육정

이 있는바 곧 현좌 충신 양장 용졸 명사 덕우가 그들이니라. 또 살생에 법이 있으니, 위론 국

왕으로부터 밑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스스로 때와 물건을 가려서 했다. 그래서 살생

함에 있어 첫째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나니, 옛부터 부여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깃든 짐승은 죽이지 않으며 알을 품

은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 함은 그 번식할 때를 가려서 죽이지 않기 때문이라. 어린 것을 죽이

지 않고, 이로운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살림은 그 짐승의 종류를 가림이라. 물건을 중하게 여김

이 이처럼 지극했다 할 것이니라.

원화는 여랑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이라 하며 또 천와랑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는다.모자를 쓰는데에도 의식이 있다. 주해에 이르기를 '때

에 큰나무를 모시어 한웅의 신상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를 웅상이라 한

다'고 하였으니, 상은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라.

하백은 천하의 사람으로 나반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나반이 하늘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

왕에게 명하여 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의 뭇신을 주관케 하느니라.

천하는 다른 이름으로 천해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하의 주에 가로대 '천도는 북극에서 일어난다. 이를 북수라 한다.' 라고 했다. 대저 북극은

수정자가 기거하는 곳이다.

<태백일사> 한 국 본 기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적에 한인이 계셨나니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천산에 사시면서 천신에 제사지내고, 백성에겐

목숨을 정하시고, 모든 일을 두루 다스리시니 들에 사시매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어지고,

무리와 함께 행하시니 원한을 품거나 반역하는 일 또한 없어졌느니라.

친하고 멀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따로하지 않았고, 늙은이와 젊은이의 일을 구별했으니, 이세상에 법규

가 없었다 하지만 계통은 저절로 성립되고 순리대로 잘 조화 되었도다. 질병을 없게 하고 원

한을 풀며 어려운자를 도와 일으키며 약자를 구제하니, 원망하고 일부러 어긋나는 자 하나도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호를 한(桓)이라 하고 감군을 인(仁)이라 불렀다. 인이란 임(任)이란 말

이니 널리 사람을 구제하고 세상을 이치대로 밝히는 것은 이를 반드시 어질게 되도록 하기 위

함이라. 때문에 오가의 무리가 서로 바꿔가면서 대중에게서 뽑힘은 반드시 업을 구하기 때문

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구별이 있음은 각각 마음 먹는 바에 따르는 법이니, 그 마음을 잘

판단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 정곡을 선택하기 때문이라. 생각컨대 구한에 사는 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모두 함께 하나로 뭉쳤던 것도 역시 마땅히 스스로 득실을 선택하매 한 사람도 딴 의

견이 없었던 것이니, 그런 후라야 이에 따르게 됨이라. 여러 대중도 역시 감히 갑자기 한쪽으

로 편향치 않으며 오직 꾀로써 이에 대처하느니라. 대저 무리에 대처하는 법은 무비면 유환이

며 유비면 무환이니라. 반드시 예비하고 자급할 지니라. 선군은 만리를 능히 다스려 한소리에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니, 즉 여기에 이르러 만방의 백성들이 기약하지 않고서도 와서 모이

는 자 수만이더라. 무리는 저절로 환무하며 저절로 환인을 추대하여 환화가 피어난 돌무지위

에 앉으시게 하더니, 그에게 줄지어 경배하고 환호가 넘쳐 흐르니 이를 인간 최초의 우두머리

라고 한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

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또는 필나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또는 직구다

국),사납아국,선비이국(또는 시위국,통고사국이라 함.),수밀국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는 지

금의 북해라 한다.'

<<삼성 밀기>>의 주에서 말한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이라 하니 북개마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으로부터 거리가 200리이

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니라. 월지국은 그

북쪽 500리에 있고, 직구다국 혹은 매구여국은 옛 오난하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로써 냉을 치료하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써 재앙을 다스린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풍족하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

게 하시고, 사람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근면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한인, 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 구을리 한인에 전하여 지위리한인에 이르니 혹

은 단안이라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이라고도 한다.

'한국에 5훈이 있으며 신시엔 5사가 있나니 이른바 5훈이란 이른바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것, 둘째 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이른바 5사

란 우가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며,저가는 병을 주

관하며, 양가(혹은 계가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하는 것이라.' 한국의 주에서 말한다.

'한(桓)은 전일의 광명이라. 천일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 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

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산에 올라가 해가 처

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녁엔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이에 앞서 한인께서 태어나시사, 절로 다섯가지 사물을 만들고 기름을 아시고 다섯가지 가르

침을 가르치시고 다섯가지 일들을 다스리시었다. 오가의 무리는 모두 어려움을 참고 부지런하

여 잘배워 지닌 끝에 마음의 빛을 얻어 상서로운 일을 만들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었더라. 한

인께선 높고 높은 하늘에 오르사 홀로 생각하시며 차분히 온갖 일을 다스리시니 감히 따르지

않는자 없어 구한의 백성이 모두 하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백일사> 신 시 본 기

<<진역유기>>의 신시기에서 말한다.

'한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자리를 가짐을 보시더니 곧 고시

례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산에 들

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제

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

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 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 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얻는 법이로다)

라고 말하며 오래된 홰나무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

되었다. 다음날 다시 교목들의 숲에 가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갑

자기 한 마리의 줄무늬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마디 외치면

서 돌을 집어 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

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

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

하게 되었다.

한웅천왕은 또다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록 명

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찌기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는뎨 갑자

기 튀는 한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지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

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흩으러져 연결 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써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 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뿐이리라)라고 하며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

와 되풀이 하여 다시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

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아마도 역시 그 만들어 놓은 것이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찌기 듣기로 <남해도의 낭하리 계곡및 경박호의

선춘령과 저 오소리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나라가 아직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한웅천왕께서 풍백 석제라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

은 아직 동굴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스며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

이 불어와서 사람들에게는 질병을 일으켰다. 또 새 짐승 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버려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니 잡아서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 왕금영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곳을 만들게 하고 소 말 개 독수리 돼지 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 이용을 관장케 하고, 운사 육약비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게 하

고 치우는 곧 세세토록 병마도적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의 등극에 이르

러 구야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 대궁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전

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에 있는 여러 족속들은 대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 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

족을 가리켜 "이"라고 했다. "설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이는 큰 것으로부터, 활로부터 나온

글자로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 함이 이것이다. 공자의 춘추에 이르러 이의 이름을 마침내 융

적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 이를 우환으로 여겼다.한웅께서는 나라를 위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만드셔서 은밀하게 전제의 뜻을 가졌다. 그때

는 종족의 이름이 서로 달랐으니, 풍속도 차츰 달라져서 원래 살던 백성을 호랑이라 하고 새

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이라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애오라지

약탕만을 일삼았고 곰은 어리석어 사람을 따르지 않고 자부하는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구부

하였으니, 같은 굴에 살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지금까지 한번도 서로 돕지도 않고 혼사도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마다 서로 따르지도 않고 아직 한번도 뜻을 함께 한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

러 웅녀의 군은 한웅에게 신덕이 있다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

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 들이시고 아들을 낳게 하였다. 호랑이는 종내 깨우

칠 수 없는지라 이들을 사해로 쫓아 버렸다. 한족은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 되었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에 한웅이라는

대인이 있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

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 삼위 태백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은 이루어진 듯 하다. 그

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지니라.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에 가서 하늘의 뜻을

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

린이를 보살펴서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가르침의 도를 세워서 재세이화하여 자손 만대의 큰

귀감이 되도록 할지어다>하시며 마침내 천부인 세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의 나무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라 한

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

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

화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이라 한다.

때에 한 곰과 호랑이가 있었는데 이웃하여 같이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기도하며 또 한웅천왕

에게 청하기를 <원컨대 변화하여 천계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한웅은 이에 신비한 주문을 외워 환골이신 하도록 하면서 신이 내리신 물건으로써 신령스러운

삶을 얻게 하였으니, 바로 쑥 한다발과 마늘 20개라. 이에 경계할 바를 말하니,

< 너희들 이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참된 평등을 이루어 만물을 구제

하고 쉽사리 사람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시다.

곰과 호랑이 양가는 모두 이를 얻어 이를 먹고 조심하기 3.7일에 스스로 수련에 힘쓰니 곰은

굶주림과 추위 아픔 고통에 견디어 경계함에 순종하고 한웅의 약속을 지켜 건강한 모습의 여

자로 되었지만 호랑이는 태만하고 조심하여 경계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끝내 천업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고집세고 어

리석고 강정하여 저들과 더불어 혼인하는 자가 없었고, 항상 신단수 밑에 여럿이 모여 아기를

가져 낳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이에 한웅은 임시로 화하여 한이되어 장소를 구하여 그와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여자와 남자들은 차츰 윤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

신시에 칠회제신의 책력이 있었다. 첫회의 날엔 천신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에 제사

지내고, 3회날에는 수신에 제하고,4회날에는 화신에 제지내고, 5회날에는 목신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에 제지내고, 7회날에는 토신에 제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듬은 예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를 썼나니 단군구을이 처음으로 갑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

를 한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를 처음으

로 시작한다.계는 啓요 해는 핵이니,일출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를 蘇羅라하고, 갑을 청차이

라 하고, 을을 적강이라 하고 ,병을 중림이라 하고 정을 해익이라 하고, 무를 중황이라 하고,

기를 열호수라 하고, 경을 임수라 하고, 신을 강진이라 하고, 임을 유부지라 했다.해를 지우

리, 자를 효양,축을 가다,인을 만량,묘를 신특백,진을 밀다,사를 비돈,오를 융비,미를 순방,신을

명조, 유를 운두,술을 개복이라 한다.

신시가 처음 시작 되었을 때에 산에는 길도 없고 못에는 배도 다리도 없고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나무들과 풀들이 자란 곳에는 짐승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과 짐승의

무리들은 서로 어울렸고 새의 둥지에서까지 놀면서 서로 의지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셨으니 그 피와 고기를 항상 쓸수 있었다. 옷감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함에 편리한 대로 다

되었으니, 이를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백성은 살아도 일같은 것을 모르고 걸어다닌

다 해도 특별한 목적지도 필요 없었으니, 길을 가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한없이 편

안했고 사물을 보되 담담하였다. 먹을 것을 모아 놓고 기꺼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지면 쉰다. 대저 하늘의 혜택을 널리 입어 궁핍을 알지 못함이라.

뒤이어 후세에 이르러 백성들과 사물들은 날로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멀리 하게 되고, 절름

발이도 있게 되고, 몹시도 마음 쓰일 일이 생기고, 기운 없고 피로하여 허덕일 일 생기고, 빈

둥빈둥하는 이도 있게 되어 처음으로 생계를 염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밭 가는 자는 이앙을

다투게 되고 물고기 잡는 자는 바다의 구역을 가지고 다툰다. 다투지 않고 이를 얻게 되면 장

래에 궁핍을 면키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된 이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들은 도망치고 그

물을 치니 물고기 새우가 숨게 되었고 칼과 창과 병사들도 생기게 되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

격하고, 이를 갈며 피를 흘리고, 간과 뇌를 땅바닥에 뿌리게 된다.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 참

으로 이러했던가? 아아,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겠다.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

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있음

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일그러질 일 없더

니 천년의 세월을 셀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양인들이 노리는 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

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손가 이야말

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번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

하여 마음을 맑게하고 조식보정(단전호흡과 유사한 것이라 추정)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

구시(불로장생)의 술이다.아들 열둘을 두었으니 맏이를 다의발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라 하

니 또는 복희씨라고 한다. 어느 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어 만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곧

삼신산으로 가서 제천하고 괘도를 천하에서얻으시니, 그 휙은 세번 끊기고 세번 이어져 자리

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가 있고 삼극을 포함하여 변화무궁하였다.

<<밀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처 마침내 진에 옮겨

수인,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관임기포이사팽의 여덟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

의 계수에 희족의 옛 거처가 있다. 임 숙 수 구 수유의 여러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용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을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다. 주양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신농은 열산에

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와 함

께 모두 고시씨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곡은 음식,약은 옷감,약은 의약,석은 건축)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춰져서 낮에

는 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유망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백성들이 제

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배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

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

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무

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 될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은 쇠를 캐내어 도개 모

극 대궁 호시(나무로 만든 화살)를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해 동안에 아홉개의 제후의 땅을 정복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

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

들을 이끌고 양수(당산 북쪽의 안시성)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

금의 진류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

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자가 없었

다.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

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유망과 함꼐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

를 멸망시켰다. <<관자>>가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

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 헌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

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

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

의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는 모두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

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

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

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우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흠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바 10년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

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뒤에 헌원은 여러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 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신시를 본따 크게 병기와 갑옷

을 만들고 또 지남거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

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처서 헌원은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아 라는 자가 있어 불행가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

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

인 듯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

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

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은 동

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과

열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지금 <<한서>> 지리

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붉은 깃발모양의 연기)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

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사기>>에 이르되 <간을 뚫어 길을 내고 한번도 편안히 있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을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

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난>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

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 <<상서>>여형예서는 '고훈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

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를 빼았긴 탓' 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계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을 통일하고 관경으로 삼한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

조선이라고 한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서쪽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뒤에 갈고한웅이 있

었는데,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또 몇대를 지

나 자오지천왕한웅에 이르다. 자오지한웅은 귀신 같은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

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 하고 함께 떠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라 하더라.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의 땅에 웅거했다. 헌원황제가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를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

으로 보내 서쪽으로 고신씨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신시씨는 전으로써 계를 닦고 사람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 지내었다. 이른바, 전이란 사람이

스스로 완전이라 여기는 바를 쫓아 능히 그 성품에 통하고 이로써 참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

씨는 선으로써 법을 만들고 사람에게 관경을 가르친다. 선이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따라 명을

알고 이로써 선을 넓힘이다. 조선씨는 종으로서 왕을 세우며 사람들에게 가르쳐 화를 공동으

로 책임지게 하였다. 이른바 종이란 사람이 스스로 근본이라 여기는 바에 따라 능히 정신을

잘 지키고 이로써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은 허하면서도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은 밝음에 있으면서도 땅에 근본을 두며, 종은 건전하면서도 사람에 근본을 둔다.' 주에서

말한다.

'한인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을 곧 큰 것이요, 하나이다. 한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하니

왕은 곧 황이며 제이니라. 단군은 또한 천군이라 하니,제사를 주재하는 우두머리이다. 왕검은

또한 바로 감군이며 관경의 우두머리이다. 때문에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한환이라 하고 땅으로

부터의 광명을 단단이라 한다. 이른바 한은 구한을 말하는 것이다. 한한은 곧 크다는 뜻이다.

삼한은 풍백 우사 운사라 한다. 가는 곧 가이다. 오가를 말하자면, 우가는 곡식을 주관하며,마

가는 목숨을 주관하며,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며,저가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는 선악을 주관한

다고 한다. 백성은 64종족이 있었고 무리는 3,000이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려 보낸 것

을 개천이라 한다. 개천은 고로 능히 서물을 창조하는데 이것은 바로 허와 같은 것이다. 인간

세상을 구한다함을 개인이라 한다. 개인은 때문에 능히 인간 세상의 일을 순환시킨다.이는 혼

의 구연을 뜻한다. 산을 다스리고 길을 내는 것을 개지라 한다. 개지는 때문에 능히 세상의

일들을 개화한다. 이는 지혜를 함께 닦음이라.'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대저 백두의 큰 산은 대황의 가운데 자리잡았으니 세로는 1,000리에 걸치고 높이 200리를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의 진산이라 한다. 신인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다만 낭림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

으로써 능히 그와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세상의 속담에는 이미 묘향

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쪽에 치우쳐 압록강 이남의 한 구석을 차

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조종을 곤륜산이라 떠들어 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를 가지고 스

스로 달래며 만족한다.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다니 이야말

로 글을 폐하고 장탄식하는 이유어늘. 그런데 동방의 뭇산을 태백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 세속에는 영변에 있는 묘향산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일연의 <<삼국유

사>>의 설에 비롯하였음이라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구멍은 콩알이라 할 것이요, 큰

콩알과 같다 할지언저. 이제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거늘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는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란 한웅씨가 구름타고 하늘로부

터 내리신 곳이니 묘향산은 일찌기 한웅큼의 물구덩이조차 없었던즉 한웅천왕이 내려오신 땅

을 태백산이 아니라고 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위서>>의 물길전에 '나라 남쪽에 도태산이 있다'라고 했는데 위에서는 이를 태황이라고 했

다. 범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고 길을 가는 이마다 모두 물건을 가득 채워가지고 가게 되니, 이는 아마도 한웅천왕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이미 이산에 계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산을 신주흥왕

의 영지라 하니, 반드시 소도제천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고, 옛부터 한족의 숭

경도 역시 이 산에서 시작된 일이니, 단순히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짐승들도 빠짐없이

신의 교화로 목욕 하듯하여 안락하게 이산에 서식하며 일찌기 사람을 상처낸 적 없고, 사람도

감히 산위에 오르지 않고 오줌 누어 신을 모독하지도 않으며, 항상 끝없이 공경하고 보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저 우리 한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의 있다 하지만 실은 한단 한줄기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자 없으며,

신시에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

들이 그 삼신고제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대저 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의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

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

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

는 자들은 반드시 삼산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며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

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위

에 괴상한 도사얘기도 나왔다.

대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느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가 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써 세상을 미혹하는 주

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쪽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할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

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개의 섬에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으

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솟

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

라 하고, 한라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 봉선서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찌기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 및 죽지 않는 약은 고곳에 있다 하며, 그곳은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선가서>>엔 가로

대 '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사슴,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가 말하는 바

'새 짐승 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

선 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

마도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

<<세기>>에 가로대, '단군 오사구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

라 여겨진다.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줄만 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은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

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

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경신고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

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녀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에는 목

숨의 안전과 위험,우환,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

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이시다. 옛날 사마상여는 한나라의 왕 유철 무제에게 말

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 '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에서 말한다.

'제의 풍속에 8신의 제가 있다. 8신이란 천주, 지주, 병주,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시주,를

말한다. 천은 음을 좋아한다. 반드시 높은 산의 밑인 작은산 위에서 한다. 고 하늘을 태백산

기슭에서 제사지내는 유법인 것이다. 땅은 양을 좋아한다. 그래서 땅에 제사지낼 땐 반드시

못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제사지냄은 역시 곧 천을 참성단에서 제를 지내던 습성이라 할

것이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무신으로서 용강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의 도술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들을 부른다. 이로써 태시의 세계에

서부터 항상 천하전쟁의 주가 되었다.해대의 땅은 이미 엄 람 양 개 우 래 서 회의 8족이 자

리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8신설은 8족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번성하던 설이 되었다.

유방은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혼고

(희생물의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지내는행위)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 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왕이 되었던바 이로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 역시 동황태일(단군왕검)을 받들

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를 존경하기 이와

같았다.

<<진나라의 <<천문지>>는

치우기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

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 <<통지>>씨

족략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

이다. 대극성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함이 먼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연나라 제나라의 선비들이 신비하고 괴상스러운 소리에 탐닉한 지도 역시 오래 되었다. 제나

라의 위왕(B.C.356 ~ 320)과 연나라의 소왕(B.C.311 ~ 279)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을

찾았으니, 진한 때의 송무기 정백교 극상 이문자고는 초하의 무리로서 연나라 사람들이요, 문

성오리공 손경 신공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들이다.옛날 여상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때문에 역시 성은 강이다. 대저 치우는 강수에 살았다. 아들들을 모두 강씨라고 한 것이 아닐

런지?

강태공은 제나라를 통치하기에 앞서 도술을 닦고 천제못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 그리하여 역

시 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8신의 풍속이 이 땅에 더욱 번성하였다. 후세엔 그 땅에 도

술을 잘하는 자가 많이 배출되어 신선 사상과 도가의 사상을 섞어서 널리 퍼뜨리고 또 다듬었

으니, 바로 강태공이 이를 장려함이라. 일찌기 <<음부경>>의 주를 만들어 자부삼황의 뜻을 조

술하였다. 그런즉 연나라 제나라 선비들이 어찌 괴상스럽고 신비스런 말들을 즐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의 법과 <<황제중경>>이라는 책은 태자 부루로부터 나와서 우사공에

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의 홍범을 주왕에게 말했다함은 역시 <<황제중경>>과 오행

치수설인 것이니, 대저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과 균전으로부터 전해진 법일지라.

<<밀기>>에서 말한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여 지

석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 제석단이라고도 했

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며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놓은 것을 천단이라 했다. 산골짜기에 있

고 나무를 심어 토단을 만든것을 신단이라 한다. 지금 승도들이 혼동하여 제석을 단이라 부르

는 것은 곧 옛고사를 말함이 아니다. 삼신을 지키고 사람의 목슴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

랑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의 시종랑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에서 말한다.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이라 하고, 교화하고 복종하게 함

을 주관하는 자를 랑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을 이루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이라 한다.

작 옛날에 시작된 신도이니 모두가 영을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은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종

종 적중하기도 한다.지금 혈구에 삼랑성이 있는바, 성은 곧 삼랑이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던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 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

호로서 본래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

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혹은 말한다. 옛날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장

사지낼 정해놓은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

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후에 중고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

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

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 크기 넓이 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

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태백일사> 삼한 관경본기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의 땅에 우뚝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

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

라.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

고, 운사는 백검(백사람을 거느리는 지휘자의 상징)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

실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이라 하니 그 음

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

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는 공경해야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노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공장,축산,농사,측후,예절,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이라고 있었는 데 안부련 말기의 소

전은 명을 받고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환웅 아들 신농(염제 신농씨를 뜻

한다.중국 삼황 가운대 두번째 황제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한국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씨의

후예이다, 농사와 의약의 원조라고 불리운다.)은 수 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

다.

뒤에 열산(중국 호북성 수현의 북쪽에 있다.)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

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별고(고아)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

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황제 헌원을 뜻한다. 헌원은 국호이다, 중국 "사기"

에 중국 삼황오제가 이름과 나라만 다를뿐 모두 같은 성씨라 하였다, 여기서 신농의 별고라

하였으니, 신농과 황제가 동이족임을 뜻한다.)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환웅 초기의 일이

다. 웅녀의 후손으로서 '여'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

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

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대,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

누어 통치하시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사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

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태백일사> 마 한 세 가 (상)

곰무리와 범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은 구황의 하나였

다. 옛적 우리 한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을 하나로 하고 ,음은 십거를 세우고 양은 무궤를 만들고 충(衷)은 여기에서 생했다.

봉황(성스런 왕이 출현할때 나타난다는 성스런 새로서,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을 뜻한다.옛

부터 동양의 상징적 동물 가운데 봉황은 동방족인 동이족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용은 서반족

즉 중국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중국 또한 왕들중에 봉황으로 상징되는 왕들은 동이족이라

한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중국의 왕들중 거의가 용을 상징하는데 삼황오제는 봉황을

상징한다는 점이다.)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

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의 책력(칠회는 오

행<金,木,水,火,土>에 음양<月,日>을 보태 오늘날의 일주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천폐(궁전의 층계)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을 세우사 그곳

에 거하시니, 공공,헌원,창힐,대요의 무리가 모두 여기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

어 이로써 환역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 혁덕(대저 신지는 고대의 문자를 주관 하는 벼슬이름,

혁덕은 그관리의 이름)이 적은 바로 천부의 유의 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

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하고, 무릇 인

간 세상의 360여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다. 그 글에 가로대 '일신은 충에 내리

고 성은 광명으로 통하니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했다. 이때 부터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평상의 웅상(옛글에 의하면 지나족은 암컷을

뜻하고 동이족은 수컷을 뜻한다한다. 그래서 중국은 고대에 자신들의 왕을 동이족으로 하였다

한다. 하지만 중국이 이를 수치스러워하여 이것의 해석에 대한 논쟁이 아직까지 일고 있다고

한다.)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

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bc 2707- )가 있었는데 구야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

에 헌구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징벌코자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이다. 싸움이 있기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2종당의

대인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

로대 ,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

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

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

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가 묘향산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

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 '나를 위해서 도를 말하라'고 청했다.대답해 가로

'도의 대원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

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이지

요.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일라, 나타남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기틀이 있으니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볼 수가 있고, 땅에는 모양이 있으니

내 몸이 모양에서 볼 수가 있으며 , 사물에는 주관함이 있으니 내 기의 주관함에서 알 수가

있음이라.

이에 하나를 잡아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으면 하나도 돌아감인 것입니다. 일신이 내려옴

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광명에 통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가 붓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인삼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에 삼신님은 삼계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 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하니 임금께서는 '옳을시고

그 말씀이여!' 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

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이라 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가 하늘

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

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은 글을 올려 가로대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 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삼랑성을 혈구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

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 3월 천왕

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

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가 즉위하였다. 이 때가 단군부루 12년 임

자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봄 3월 처음

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을 지었다. 병진년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

겨 남산에 세우게 하다. 경신년에 도전을 일구고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의 가르침

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가륵 제 3년 불여래가 죽고 아들 두라문이 즉위했다. 을사년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대본은 우리 마음의 중일에 있나니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물

건으로 서 중일을 잃으면 물체는 곧 뒤죽박죽이 되나니 임금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뭇중생

의 마음은 오직 어두울 뿐이다.전인은 통찰하여 골고루 한 가운데에 서서 잃는 일 없게 할 지

며, 그런 후에라야 마침내 하나도 평정되나니라. 유중유일의 도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

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성스럽고, 임금된 자로서는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충성스러워야 하며, 부부된 자로서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할지며, 형제된

자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할지며, 노소는 마땅히 순서가 있어야 할지며, 친구된자는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할 지니라. 식신,공검,수학,연업,계지,발능,홍익에 서로 힘쓰며 성기,자유,개물,

평등하면 천하는 절로 맡겨도 된다.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여 나라 법을 지키고 각자가

맡은 바 직책에 힘써서 부지런히 산업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는 몸을 던져 옳

음을 따르며 힘껏 앞으로 나아간다면 만세의 무강한 나라를 이룸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

는 짐이 그대들 국인과 더불어 절절하게 행하여 바꾸는 일 없을 것이라. 성현 모두의 지극한

뜻이나니 다 받들어 공경할 것인저' 라하였다.

두라문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위지가 즉위하였다. 이

때가 단군 오사구의 을유년이다. 경인년에 정정 30인 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에서 건조케 하

였다.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한은 명령을 받고 상춘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하도록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

에 제천하고 조의를 하사하여 가관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회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가 즉위하였

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의 동생인 두라시의 증손 막연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단군 우서한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구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제의 임인년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가 바햐흐로 개

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다리를 대동

강에 세웠다. 삼홀로 전을 삼아 경당을 설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의 훈을 강

론하게 하니, 환도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나라의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

산물을 바쳤다. 정사년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의 을묘년에 사리가

죽으니 동생 아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의 을유년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가 즉위하였

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의 무신년에 갈지의 아들 을아가 즉위하였다. 기유년에 탐모라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의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가 즉위하였다. 임신년 3월16일 몸소 마리산

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

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독로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흘제의 경오년에 아

들 아루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이 모

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

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황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

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

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bc 1285 년)

마한세가 (하)

단군 색불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

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해 버렸다. 전제는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새임금이 백악산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

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과 개천령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에서 죽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

렸다.

'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

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

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의 대백두산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

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에 이르기를 '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

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바드시 제천하고 공경

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

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

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읍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

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 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

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

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 라고 하였

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몸

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저이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

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하고 서우여

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의 관경이라 한

다. 이것이 곧 진국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

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의 폐

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 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

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

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아실이 즉위하였

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 가 즉위했다. 기묘년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아

들 서여가 거처를 태행산맥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에 아들 아화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가 즉위했

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의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사우가 즉위했다. 무자년에 주나라왕 의

구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 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에 아들 궁흘이 즉위하더니 갑인년

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

다. 궁흘이 죽으니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의 계유년에 아들 다도 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에 아들 사라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가 즉위했

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에 융안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

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에 상장구물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

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에 아들 맹남이 즉위하였다.

무술년에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진

시황)정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태백일사> 번 한 세 가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垈)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

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

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

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

스럽게 효도를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

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虞)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

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에 두어서 이로써 구

여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東巡)하여 망제를 지

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

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

근(朝覲)하기를 네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를 험독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

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

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에 열두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

백제,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가 즉위하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

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

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 순임금 때 제후들을 통솔하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

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垈)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

대,

'나는 북극 수정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

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에 아들 물길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에 아들 애친이 죽위

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에 아들 호갑이 즉위하

였다. 정축년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예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의 기축년에 아들 오라가 즉

위했다. 갑신년에 하나라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에 아들 이조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의 병인년에 동생 거

세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

들 산신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에 아들 계전이 즉위했다. 경인년, 명을 받아 삼신

의 당 단을 탕지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 아들 백전이 즉위했고, 박전이 죽은 뒤 을미년에 중제 중전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에 아들 소전이 즉위했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

엄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에 아들 물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에 아들 막진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가 찾아와 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

정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둑으니 계부 갑비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가 즉위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 5년

우사으 조정으르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왕 무정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

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

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 (하)

단군 색불루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왕 무정은 사신

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

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

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

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

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

해 버리고는 그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

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로 속

죄하려 하면 공툐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

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에 아락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에 솔귀가 즉위하

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에 임나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

(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내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

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에 동생 노단이 즉위하였다. 북박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에 아들 마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모불이 즉위했다. 을해년에 감성을 두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을나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에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에 동생 등나가 즉위했다. 이극

희가 말씀올려서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다. 등

나가 죽으니 무술년에 아들 해수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

서 삼성묘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의 주가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에 아들

오문루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과 작은 아들인 등리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

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細言)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淮軍)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을축년에 아들 마휴가 즉

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에 아들 다두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춘년에 아들 나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에 아들 차음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불리가 즉

위했고, 그도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여을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에 엄루가 즉위했다.

무인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

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술리

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에 아들 아갑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나누어 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

였다.

아갑이 죽고 계유년에 고태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마건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에 천한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진년

에 아들 노물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도을이 즉위했다. 계미년에 노나라

사람 공구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에게 예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이요, 이름은 건

이니 그의 선조는 풍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 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겼다. 도을이 죽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에 아들 사양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서울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

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

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을 공

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음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

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

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

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이 해에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

번한이 교회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

이 죽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 172)에 아들 기비가 즉위하

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

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 146)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태백일사> 소 도 경 전 본 훈

신시 때에 선인 발귀리가 있었는데 대호와 동문으로 학문을 배우고 도를 이미 통하여 바야흐

로 저와 산사이에서 노닐으니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아사달에서 제천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대일 그 극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 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은 그체는 일이요, 그 용은 삼이라.

혼묘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와 용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의 형상이고

대기의 오래도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의 화로서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은 일이 되어 무극이고

방은 이가 되어 반극이며

각은 삼이 되어 태극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은 광명에 통하고

제세이화, 홍익인간함은 이를 신시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한역은 우사의 관리로부터 나왔다. 때에 복희는 우사가 되어 여섯 가축을 기르게 하였으며 또

신용이 해를 붸아가는 것을 살펴 하루에 열두번 색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에 한역을 만들었

다. 한은 곧 희와 같은 뜻이고 역은 옛날 용자의 본 글자다.

한역의 체는 원이며 용(쓰임)은 방이다. 모양 없음으로부터 실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

치다. 희역의 체는 방이며 용은 원이자. 모양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이

다. 지금의 역은 서로 체이면서 용이니, 스스로 원이면서 원하고, 스스로 방이면서 방, 스스로

각이면서 각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허무의 공일 뿐이니 어찌 체가 있다 하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본래 체가 없으면서 스물 여덟

가지의 별자리를 체로 한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이름을 갖고 이름 있는 것은 곧 모두

수를 가진다. 수가 있으면 곧 모두 힘을 가진다. 이미 수가 있다고 말함은 곧 유한과 무한의

틀리는 바 있음이고, 또 힘이 있다고 함은 곧 유형과 무형의 구별이 있음이니, 고로 천하의

사물은 말이 있으면 모두 있는 것이고, 말이 없으면 곧 없는 것이다.

천 부 경

천부경은 천제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 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

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고운 최치원은 역시 일찌기 신지의 전문을

옛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거늘 본조에 이르러 뜻을 애오라지 유가의 글에 두더니 다시 조의와 더불어 의논하여 보

존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라! 때문에 특히 표하여 이에 내어 뒤에 오

는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천부경(81자)

일의 시작은 무에서 시작하니 일이라 삼극으로 석해도 본은 무진이니라.

천일은 일이요. 지일은 이요, 인일은 삼이라 일에서 적하여 십으로 거해도 화함에는 궤함이

없느니라.

천에도 이삼이 있고, 지에도 이삼이 있고. 인에도 이삼이 있나니, 대의 삼에 삼극이 합쳐서 육

이 되니 일이삼

을 합하면 칠팔구가 생긴다. 운의 삼은 사로써 성환하고 오와 칠은 일로써 묘연하여 만왕하고

만래해서 용

변해도 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천부경 팔십일자

일시무시일석삼극무진본

천일일지일이인일삼일적십게무괴화삼

천이삼지이삼인이삼대삼합육생칠팔구운삼사성환오칠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

일종무종일

天符經 八十一字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궤化三

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

일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삼황내문경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에 돌아오게 한 것이

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

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것이다. 경문은 신시의 녹서로

기록되어 세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하고 주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주나라 진나라 이래로 도가의 무리들에 의지하는 바가 되어 민간에 연단복식하는 자가 생기고

허다한 방술의 설이 어지럽게 마구 나와서 의혹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서복에 이르러 한나라

는 망했지만 역시 희사의 출신이기에 평소 진나라를 배반할 뜻이 있었으니, 이에 바다로 들어

가 신선을 찾는다고 말로는 하고 도망쳐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의 기이에 서불이라는 제명의

각자가 있다. 이국의 신궁에는 서불의 묘지요 사당이 있다. 서복은 일명 서불이니 불은 복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삼 일 신 고

<삼일신고>는 본디 신시개천의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하나를 잡아 셋

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5장으로 나뉘어져 천신 조화

의 근원과 세상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이다. 그 일에는 [허공은 일로 함께 시

작되지만 같지않고, 일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끝을 같이 함이 없다. 밖은 허하고 안은 공한

가운데 항상함이 있다.]라고 하였고, 그 이에서는 [일신은 헛것은 가고 실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듯하나 삼신이 대제로서 실로 공이 있음이라]하였으며, 그 삼에서는 [천궁은 진

아의 거처하는 곳이라. 만 가지 착함을 스스로 갖추어 영원토록 쾌락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 사에서는, [세계의 뭇별은 해에 속해 있으니 모든 백성들과 큰 인물들이 여기에서 태어난

다] 라고 하였다. 그 오에서는, [사람 물건은 같이 삼신에게서 나와 하나의 참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대아라 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은 <삼일신고>를 가지고 도가의 제사지낼 때 올

리는 말씀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한국은 한웅으로부터 개천하여 천

신에게 제사지내고 신고를 조술하였으며, 산하를 널리 개척하였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오호라, 신시는 천황께서 세우신 이름으로 이제 이미 삼신상제께서 열으신 끝없는 큰 은혜를

받아 웅호를 잘 다스려서 이로써 세상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천신을 위해, 홍익의 뜻을 높이

하고, 아래로는 세상사람을 위해 무고의 원을 푸나니 이에 사람은 절로 하늘에 순종하여, 세

상엔 거짓과 망령됨이 사라지니, 하는 바 없이도 절로 다스려지고 말 없어도 절로 교화되었

다.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여 서로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서로 굴복함을 귀하게 여겼으며

목숨을 던져 남의 위급을 구제하였다. 이미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고루 나누어졌지만 또 권리

를 평등하게 하였다. 함께 삼신에게 돌아가 의지하여 서로 기쁘게 맹세하고 원을 세웠다. 화

백으로 의견을 모으고, 서로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믿음을 지켰으며, 힘을 모아 일을 쉽게 하

였고 직업을 나누어 서로 도왔으니 남녀가 모두 그 직분이 있었고 늙은 이와 어린 아이도 똑

같이 복과 이익을 누렸다.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어 재판하는 일도 없었으며 나라들끼리 서로

침입하여 빼앗는 일도 없었으니 이를 일러 신시태평지세라고 한다.

삼일신고(총366자)

제1장 虛空허공(36자)

帝曰 爾五加衆아 蒼蒼非天이며 玄玄非天이라

天은 無形質하고 無端倪하며 無上下四方하며

虛虛空空하고 無不在하고 無不用하나니라

제왈 이오가중아 창창비천이며 현현비천이라

천은 무형질하고 무단예하며 무상하사방하며

허허공공하고 무부재하고 무불용하나니라

제 가로대, [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만 것이 하늘인 것은 아

니다. 하늘은 얼굴과 바탕이 없으며 첫끝과 맞끝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

하며 속은 텅 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一神일신(51자)

神在無上一位하사 有大德大慧大力하여 生天하고

主無數世界하고 造신신物하되 纖塵無漏에

昭昭靈靈하고 不敢名量이라.

聲氣願禱면 絶親見이니 自性求子하라 降在爾腦니라.

신재무상일위하사 유대덕대혜대력하여 생천하고

주무수세계하고 조신신물하되 섬진무루에

소소령령하고 불감명량이라.

성기원도면 절친견이니 자성구자하라 강재이뇌니라.

신은 위 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 없는

세계?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털끗 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

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

으로부터 씨를 찾으라. 너의 머리 끝에 내려 계시나니라.

제3장 天宮천궁(40자)

天神國에는 有天宮이니 階萬善하고 門萬德이라

一神攸居하니 郡靈諸哲이 護侍하며 大吉祥의

大光明處라 惟性通功完者라야 朝하여 永得快樂하리라

천신국에는 유천궁이니 계만선하고 문만덕이라

일신유거하니 군령제철이 호시하며 대길상의

대광명처라 유성통공완자라야 조하여 영득쾌락하리라

천은 신국이라, 천궁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 일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과 선관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 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訓(훈) 世界(72자)

爾 觀森列星辰하라 數無盡에 大小明暗苦樂 不同 이니라

一神造群世界하시고 神勅日世界使者하사

轄 七百世界 하시니 爾地自大나 一丸世界니라

中火震탕하니 海幻陸遷하고 乃成見象하니라

神呵氣包低하시고 후日色熱하시니 行저化游裁物이 繁殖하니라.

이 관삼렬성진하라 수무진에 대소명암고락 부동 이니라

일신조군세계하시고 신칙일세계사자하사

할 칠백세계 하시니 이지자대나 일환세계니라

중화진탕하니 해환육천하고 내성견상하니라

신가기포저하시고 후일색열하시니 행저화유재물이 번식하니라.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이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

거움이 서로 갖지 않으니라. 일신께서 묻 세 계를 만드시고 또 일 세계의 사자를 시켜 700세

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 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울리

어서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되었고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느니라. 일신께서 김을 불어 싸

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을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 하니라.

제5장 人物(167자)

人物이 同受三眞하니 曰性命精이니라

人은 全之하고 物은 偏之니라

眞性은 無善惡하니 上哲이 通하고

眞命은 無淸濁하니 中哲이 知하고

眞精은 無厚薄하니 下哲이 保하나니

返眞하면 一神이니라

惟衆은 迷地에서 三妄이 着根하니 曰心氣身이니라

心은 依性하여 有善惡하니 善福惡禍하고

氣는 依命하여 有淸濁하니 淸壽濁하며

身은 依精하여 有厚薄하니 厚貴薄賤하느니라

眞妄이 對作三途하니 曰感息觸이니라

轉成十八境하니

感에는 喜懼哀怒貪厭이요

息에는 芬란寒熱震濕이요 (물러 터질 란)

觸에는 聲色臭味淫抵이니라

衆은 善惡淸濁厚薄을 相雜하여

從境到任走하야 墮 生長消病歿苦하며

哲은 止感하고 調息하고 禁觸하여

一意化行하고 反忘卽眞하여 發大神機하나니

性通功完이 是니라

인물이 동수삼진하니 왈성명정이니라

인은 전지하고 물은 편지니라

진성은 무선악하니 상철이 통하고

진명은 무청탁하니 중철이 지하고

진정은 무후박하니 하철이 보하나니

반진하면 일신이니라

유중은 미지에서 삼망이 착근하니 왈심기신이니라

심은 의성하여 유선악하니 선복악화하고

기는 의명하여 유청탁하니 청수탁하며

신은 의정하여 유후박하니 후귀박천하느니라

진망이 대작삼도하니 왈감식촉이니라

전성십팔경하니

감에는 희구애노탐염이요

식에는 분란한열진습이요

촉에는 성색취미음저이니라

중은 선악청탁후박을 상잡하여

종경도임주하야 타 생장소병몰고하며

철은 지감하고 조식하고 금촉하여

일의화행하고 반망즉진하여 발대신기하나니

성통공완이 시니라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이 뿌리를 내렸

고 진과 망이 서로 삼도를 지었다.

가로대 성품과 목숨과 정기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이 통하고, 참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

고, 참정기는 두려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대 심과 기와 신이라. 심이 성에 의지하여 선악을 이루나니 선은 복이 되고 악은 화가 된

다. 기가 명에 의지하여 청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가고 탁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심이

정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을 이루니라.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다.

가로대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라. 굴러 열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쁨 두려움 슬픔

성냄 탐함 싫음이요, 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번개 습기요, 부딪침에는 소리 빛 냄새

맛 음탕 다침이니라.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

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

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

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신지비사

<신지비사>는 단군 달문때의 사람 신지 발리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 제천의 참 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으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 <신지비사>를 가지고 도참성점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를 추리하

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진단구변도>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로 예언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말하기를 [저울대는 부고량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하늬 옛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 [또 저울의 추는 오덕

지]라 함은 번한의 옛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

의 대동강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이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

러가지 형석에 비교해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

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

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여 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아울러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여

보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행하게 할 것이다. 진

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행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

것이 바로 추궁함과 아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조각이 있다. 부

여사람 왕문이 쓴바의 법류부의전과 자부선생의 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옴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유기에 [신획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 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

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곧그 획은 직일과 곡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의 모양도 있

다. 그 형과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데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고로 신인

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담된 가?딤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에 있고 노유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에 복종한

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의 한 길이다.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

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

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

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는 곧 극이다. 극은 즉 무다. 저 하

늘의 근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

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 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를 체

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는 즉 천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의 신이 있어 능히 삼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 지일 태일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죽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이 있

다. 성명 정의 삼수의 진이라 한다. 진은 즉 충이고, 충은 곧 업이고, 업은 곧 속이며, 속은

즉 일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

다. 곧 일은 즉 삼이라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합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

로 되돌아 오는 미이다. 곧 성의 선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의 청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의

후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 물듦을 망이라 하고 선을 불식이라 한다. 그 식을 악이라 하고

청을 불산이라 한다.

산을 탁이라 한다. 후를 불축이라 한다. 축을 박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 이

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하

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

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

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 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시엔 신목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이 있었다. 그 산목이라하는

것은 1234567890 이다.

또 전목은 1234567890 이다. 단군 갸륵제 2년 삼랑 을보록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

다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

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 <삼국사기>엔 [헌강왕 12년의

봄 북진으로부터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

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과 흑수국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통하고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는 접반사로서 저명한 사람

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에 이르었다. 월씨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워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

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

석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마리 바다 갈매기여!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 [왜 진 여국은 혹은 휭서하고 혹은 결승하고 혹은 계목한다.]고 있

다.

애오라미 고려만이 영법을 모사했으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이 있

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찌기 신지의 옛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를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세상엔 전하기를 [신시에는 녹서가 있고 자부에겐 우서가 있고 치우에게는 화서가 있어, 투전

문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겐 용서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

들은 널리 백산 청구 구려등에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휙을 없애고 새로 부예를 만들어 사용했

다.

진나라때 정막은 속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를 한수에서 얻었고, 또 그 휙을 계승하

여 조금 바꾼형으로 고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이다.

진나라의 왕차중은 또 해서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

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

백하다.

<삼일신고>의 구본에는 분장이 없고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서 1장에 허공,2장에 일

신, 3장에 천궁, 4장에 세계, 5장에 인물이라 했다.

저 허공을 하늘의 질량이라 하고, 일신을 하늘의 주재라 하고, 천궁을 하늘의 조화를 갖춘 곳

이라 하고, 세계를 만세라 하였다.

인물은 곳 시(市)이다. 인물은 우주의 삼계의 원훈이다. 대저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하여 지

전에 합치고 또 사람의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정사를 일으킴에 있어 화백

보다 앞섬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책화보다 선한 것이 없다. 재세이화의 도는 모두 천부

에 준하여 거짓이 없고, 지전을 취하여 게으름이 없고, 인정에 합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천

하의 공론이 어찌하여 한 사람인들 아니라 할 자 있으리요? 신고의 5대지결도 역시 천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신고도 역시 천부 가운데 하나의 이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자의

근원이 오래됨을 알았다. 글자의 의미는 크고도 크도다.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휴애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 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

은 볼 수 없다. 지금의 풍속은 한자라 할지라도 정주에 합하지 않으면 뭇화살의 집중적인 비

난을 받을 정도로 유가의 예봉은 바햐흐로 번득인다.

저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가 있으리요?

신시의 음악을 공수(貢壽)라 하거나 공수(供授)라 하기도 하고 또 두열이라고도 한다.

무리를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

<백호통소의>에서는 조리라 했고 <통전악지>에서는 주리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도솔이라 했

다.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를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있음이라.

단군 부루 때 어아의 악이 있었으니, 대저 신시의 옛풍습으로 , 삼신을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즉 가로대, 대조신을 삼신이라 부르고 하늘의 주재자라고 하였다.

고로 태양으로써 의상을 삼고, 광열로써 공능으로 삼고, 화복보응으로써 정의로 삼는다. 이때

부터 풍속은 참전으로 계를 가졌다, 예복에도 법칙이 있었으니 의관한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

을 차고, 잘 쏘는 자는 반드시 높은 자리를 얻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짐을 수업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가상의 악귀의 우드머리로 삼았다.

제사는 반드시 조심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알게하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스스로 여러 목숨 가

진 것들을 가까이하여 교화하였다.

안으로는 닦고 겉으론 겸손하여 모든 것이 때에 알맞아 배달국의 영광은 백백천천년이 되게

쌓여서 높아질 것이니, 이 커다란 은덕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을 손가?

옛날에는 무천의 악이 있었다. <요사>예지에 말하는 바의 요천과 같은 것은 이것을 말한다.

이제사는 반드시 먼져 생을 상징시켜 평상시 살아있을 때 처럼 정성을 드리려고 한다. 신주를

세우고 상을 차리고 공물을 올리는 것은 곧 친견을 표하려 하는 의식이다.

멀리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근본에 보답함은 곧 금생을 거듭하여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하고

자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코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개원이며 역시

평양이라고도 한다. 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삼조선이란 분경관경제도

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큰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였으니 사람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연나

라의 침입이래 전화가 여러차례 있어 왔다. 해를 거듭하여도 일은 잘 풀리지 않으니 치화를

잃고 국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어느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으셨다. 이에 다

스림을 크게 바꾸려고 했다. 천제의 묘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어 달도록 하고 3,7

을 기한으로 하여 연령순으로 서로 마시면서 권화하여 성책하였다. 이를 구서의 모임이라 하

고 항상 구서의 글을 사용했다.

단군 구서

한번 절한 뒤에 무리에게 말한다.

"너희들 집에서는 효함에 게으름 없을지며,집에 부모처자 있거든 곧 성심성경하여 밀어줌에

우애로써 할지니라. 제사를 성심껏 받들어 이로써 하나의 근본에 보답할지며, 손님을 경접하

여 이로써 이웃과 사이 좋도록 힘쓸지며, 자제를 가르침에 게으름 없이하여 영재를 기르면 이

것이 모두 인륜 교화의 큼이라. 이것이 효도하고 자애롭고 순종하고 예의 바름이느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이에 무리는 일제히 소리로 응해 가로대

"그리하오리다. 못하겠다 하는 자는 이를 추방하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두번째 절하고 서약하여 말한다.

"너희들 형제엔 우애 있기를 힘쓰라. 형제는 부모가 갈라진 것이요, 형이 좋아하는 것이면 동

생이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생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형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

다. 물래(物來)의 좋아함 좋아하지 않음은 다른 사람도 나도 서로 같나니라. 몸으로부터 물건

에 이르고 친함으로부터 서먹한 사이에 이르기까지라. 이러한 길을 가지고 이를 조국에 미치

게 하면 조국은 흥융할 것이며, 이를 천하에 미치게 하면 곧 천하는 교화될 것이니라. 이것이

우애와 화목과 어진 것과 용서함이아. 이를 감히 수업하지 않겠다 하겠는가?" 무리는 소리로

응하여,

"그리하오리다. 아니라 하는 자는 내어 붸으리이다." 라고 하다.

세번째 절하고 서약하였다.

"너희들 스승과 벗에 믿음 있기를 힘쓰라. 스승과 벗을 도와 법이 서는 곳이라. 덕과 의는 서

로 연마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라. 학문의 세움과 사업의 성취는 모두 스승과 벗의 힘이라.

이것이 믿음과 진실함과 성실함과 근면함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무리들 소리 맞춰,

"예 거부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하였다.

네번째 절하여 맹세한다.

"너희들 나라에 충성하기를 힘쓰라. 나라는 선왕께서 세우신 것이라. 지금 백성들이 먹고 사는

곳이라. 국정을 쇄신하고 나라의 부를 늘리고 국토를 수호하고 국권을 회창하고 국세를 굳혀

역사를 빛나게 함은 모두 나라의 책임이라. 이것이 충과 의와 기개와 절개이니 이를 감히 연

마할 수 없다 하겠는가?"

이에 무리는 소리 맞춰,

"지당한 말씀입니다. 아니라 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하다.

다섯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묻사람에게 겸손하기를 힘쓰라. 만인은 모두 천제의 백성이라. 나와 같이 모두 세 가

지 참됨을 받아 주성의 바탕을 이룬 바이며 나라힘의 원천이 되는 바라. 위가 겸손치 않으면

밑이 떨어져 나갈 것이요, 바른쪽이 겸손치 않으면 왼쪽은 이탈하고 앞이 겸손치 않으면 뒤는

후퇴할지며, 아래가 겸손치 않으면 위는 싫어하고, 왼쪽이 겸손치 않으면 바른쪽은 떨어지고,

뒤가 겸손치 않으면 앞은 서먹해지리라. 이제 겸손하여 양보하고 서로 존경하면 군중이 화합

하여 힘이 뭉쳐져서 외부로부터의 모욕 따위는 없어지고 안으로는 다스림을 이루리라.이것이

겸손과 겸양과 공경과 삼가는 것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으리오?" 하니 무리는 소리내어,

"옳소이다. 아니라는 자는 붸아내리이다" 하다.

여섯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정사를 밝게 아는 일에 힘쓰라. 정사는 난리를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일이라. 풍백은 약

속을 세우고, 우사는 이를 정무로 시행하고, 운사는 형을 행하여 각각 직권이 있어 서로 침범

치 못할 것이다. 지금 지혜와 보는 눈은 고매하고 언로는 널리 열렸으며 기예를 잘 연마하였

고 경험을 쌓아나가면, 즉 나라일은 균등히 될지며 백성들의 일은 열리리라. 이것이 밝음과

지혜와 통달과 살핌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하니 무리는 소리내어 가로대,

"옳습니다. 거부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고 하였다.

일곱번째 절하여 맹세하여 말하길,

"너희들, 싸움터에서는 용맹할 것을 힘쓰라. 싸움터는 존망이 결정되는 곳이라. 나라 있지 않

으면 임금도 아비도 떨어져서 나무 우상처럼 되리니, 주인이 서지 않으면 처자는 몰락하여 노

예가 되느니라. 사람의 일이나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의 길이 아님이 없고, 세상에 전하

는 가르침도 역시 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도다. 나라 없으며 살고 주인 없으면서 존재함이 차

라리 나라 있을 때 죽고 주인이 있을 때 죽고 끝나는 것과 같겠는가? 이제 확연하게 자기를

비워 희생시키는 풍속있으니, 정숙하게 규제하여 잘 스스로 무리를 다스리고 상과 벌은 반드

시 바르고 공평하게 할 것이다. 남과 내가 역시 믿음으로 서로 돕는다면 많은 사람들을 양육

하고 능히 천만의 사람을 복되게 하리라. 이를 용기와 담력과 힘과 의협이라 하느니, 이를 감

히 수행치 않겠다 하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

"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 라고 하였다.

여덟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너희들 행동함에 있어서는 청렴하기를 힘쓰라.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은 절로 어둡고 능히 청

렴하면 신명이 저절로 트이리라.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욕심을 내면 반드시 중풍을 앓을지

며, 스스로 만족하면 스스로 해를 입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쌓이

면 구제 받지 못하는 곳에 ?遁지리라. 이것이 겸손함과 곧음과 깨끗함과 맑음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하니 무리들 소리내어 가로대,

"수행하오리이다. 거부하는 자는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홉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너희들 직업에 있어선 의로움에 힘쓰라! 사람이 직업을 갖고 일을 행하면 반드시 책임이 있

나니, 조금이라도 불의가 있거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물리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업신여겨 학

대받고 무너져버릴 것이며, 만약 정의롭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다 믿도록 하리니, 누가 있어

능멸하고 모욕하고 침탈하리오? 의는 단체의 힘이 샘솟는 곳으로서 바른 기운이 일어나는 곳

이라. 이를 잘 갈무리하면 한몸에 간직할 수 있지만, 이를 확대하면 천지에 가득채운다. 이것

이 바름과 옳음과 공평함과 도리이니 이를 감히 수행치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외치기를,

"옳소이다, 거부하는 자는 이를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공동의 이익에 힘

쓰며,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공덕에는 밝았다. 선업은 권하고 과실은 바로잡고 스스로 예의있

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단군세기>>에서 말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 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을 한 후 꿇어앉았

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 읍은 이를 가리켜 취(聚)라 한다. 마음을 모아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순(順)이다. 기를 순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배(俳)는 헌

(獻)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은 또 현(現)이라고도 한

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라한다. 고두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참전계경

<<참전계경>>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찌기 백운산

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를 얻으니 이를 <<참전계경>>이라 했다. '대시에 철인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사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가 있나니 성誠 신信 애愛 제濟 화禍

복福 보報 응應이라 한다.성은 충심이 발하는 것으로서 진실에서 나오는 정성을 관장하는 곳

이라, 6체와 47용이 있고, 신은 천리의 필합으로서 인사의 필성이라, 5단 35부가 있다. 애는

자심慈心의 자연으로 인성人性의 본질이다. 6범梵과 43위圍가 있다. 제는 덕의 겸선으로서 도

가 잘 미치는 것이라,4규規 32모模가 있다.화는 악이 부르는 것이다. 6조條 42목目이 있다.

복은 선의 여경(여경)이다. 6문門 45호戶가 있다. 보는 천신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 선인에 보하는 데 있어서는 복으로 한다. 6계階와 30급及이 있다. 응이

란 악은 악보를 받고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 6과果 39형形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

으나 척강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는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

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서람이 계를 받음이라.'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신시이화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을 삼고 5사를 위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하였

으니, 참전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보냐?'

<태백일사> 고 구 려 국 본기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

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서울

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여

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

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

었다. 단군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

년이다. ]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

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 협보와 함

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BC 27)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

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

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

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

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

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

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

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을파소(고구려 산상왕 때의 재상)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요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

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

을 위하여 몸을 바친다. 일찌기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

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된다. 때문에 참전액계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

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는 이로써 천신을 섬기고 덕은 이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는 이런 말이 천하에 있음

을 안다. 삼신일체의 기를 받아 이를 나누어서 성명정을 얻으니 광명을 마음대로 하고 양연하

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는 이에 통한다. 체가 삼물인 덕혜력을 행

하고 삼가인 심기신이 되며 즐겨 삼도인 감식촉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

이화하고 조용히 경도를 닦아 홍익인간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한국은 5훈을, 신시는 5사를, 조선은 5행6정을, 부여는 구서를 말한다.삼한의 통속도 역시 5

계가 있어 효충신용인이라 한다. 모두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올바름과 공명함을 가지고 무리

를 정리함에 뜻이 있다.'

<<조대기>>에 가로대 '동천제도 역시 단군이라 한다. 한맹의 절기가 될 때마다 삼신을 평양에

서 제사하여 맞이한다. 지금의 기림굴은 즉 그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했다. 크게 맞이하는

의식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졌다. 구제궁에 조천석이 있었으니 길을가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택되었으니 국인

이 그 선출됨을 긍지로 여기는 바였다.그렇지 않다면 영광으로써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

겠는가?'

광개토경호태왕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안에서는 모두 열제(광개토대왕)라

고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지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

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

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슬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아침 제천하고 돌아왔다. 때에 곧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나

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가였는데 몇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

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

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

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

을 세워 이를 통치케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

이 한때 모여 산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

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치를 받았다. 다라

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여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 구주의 웅본성(구

마모또 시로)이 그것이다.

왜는 회계군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에 이르른다. 또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

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 하는자는 쯔시마,가라산,지가도로부

터 비로소 말로호자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

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 사공 우가 재계하기 사흘만에야 겨우 치수

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고 한다.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며 산월 과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옮겨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

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에 이르렀다. 이세에

옛날 서복의 무덤이 있었다. 어떤이는 말한다. '단주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장수홍제호

태열제는 건흥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

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 시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

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

다.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 제노오월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

덕으로 개원 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

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왕 양광은 본

래 선비의 유종족인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

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케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햐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

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

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광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하여 작은 배

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

여 가로대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

음거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

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대,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찌기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

달았다. 3월 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왔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

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

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적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대파하였

다. 수나라 군사는 수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오늘의 창려성)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도 또한 엄명

하여 이를 추격케하였다.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밀어붙여 한쪽은 현도로

부터 태원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에 쳐들어가 이를 다

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

했다. 무두 옛처럿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

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푸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산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정부이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수원호태열제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위충을 잡

아 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연간

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

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미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

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 왕세적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고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척을 징집시켜 동

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

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

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

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

여 노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

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

은 청하여 도교를 강하는 것과 장성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

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

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

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대신을 초청하

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

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 고을로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

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 웅위하고 의기

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

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

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

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

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

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 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았

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

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

에 머무르 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

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

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였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

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

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

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

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횡무진으로 풀어 놓

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

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

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

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

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

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 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

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

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

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

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필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나의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

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

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갈)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을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

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 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북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 하겠

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

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

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안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

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 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

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

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

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

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

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

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

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

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

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

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

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

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

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

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

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

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춰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

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

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

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

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

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

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

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

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

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

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자는 조공하고 어떤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

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

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

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

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듯 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이명의 <<유기>>는 말한다. '옛날 백제의 장사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벌어 돌아왔다. 그 곳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을 따라와 내왕했던바, 날로 교제하여 친

밀해졌다. 그렇지만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통제되고 제약을

받게 되었다.'

※주: 태백일사 저자의 생각에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다이가 아니라 버마의 아유타였을 것이라'

하는 내용이다. 지리적으로 인도보다 가까우므로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파사석탑이

인도 아요다이의 특산인 돌인 것이 판명되고 태양문장등 많은 수로왕의 유적과 북인도 옛 아

유타국의 유적에 유사점이 입증되어 저자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 바, 세상에선 말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뽑히어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

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

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는 풍속을 고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으

니. 그 노래에서 말한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위라는 것은 그래서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지

사람 가운데 하늘도 땅도 하나일 뿐이고

마음은 신과 더불어 근본에 닿나니

하나이기 때문에 빈 것도 찬 것도 같은 것이며

근본에 닿기 때문에 신이라 함이나 사물이라 함이 둘이 아닐 뿐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은 참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 때문에 세가지 참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 때문에 일신은 곧 셋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공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혼의 생을 낳고 각을 낳고 영을 낳음이여

일신의 그윽한 거처는 천궁이 되네

삼혼은 그래서 지혜와 지혜와 생을 함께 닦을 수 있고

일신은 그래서 모습과 혼을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 착하게 나라를 이룸이여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다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을밀선인은 일찌기 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

련법은 참전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나를 비워 사물이 있게하고

몸을 버려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의 사표가 됨이니,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

이다. 역시 사람들의 존경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 했

으며, 바로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태백일사> 대 진 국 본기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

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

게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

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다.

태자 조영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

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

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땅은 6,000리가 개척 되었다.

천통 21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라 하다. 태자 무

예가 즉위하다. 개원하여 인안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십리

에서 황수를 굽어 본다. 이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

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

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

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 케하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

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

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

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주: 임승국님의 주해에 따르면 <요사 권 38 지리지>에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옛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으로 120리 지점에 해주가 있다.' 만약 옹진을 암

연이라 한다면 평양은 어디 있어야 하고 해주가 어디 있어야 하느냐?'라고 하며 이는 한반도

의 지명일 수 없다'고 하였다.

요사의 해주는- 단군세기나 북부여기 가섭원부여기에 나오는 해두가 아닐까? 또는 오늘날 연

해주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 것은 아닐지?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

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

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한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

어하시니 묘호를 광종이라 하고 시호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

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기다. 이듬해엔 태학을 세우고 천

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주: 1949년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

비가 출토 되었다. 그 비문 2행은 '대흥'으로 시작된다. 대흥을 연호로 적는 유일한 기록이 태

백일사.

대흥 45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웁게 하더라.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22(?),년 장수들은 군

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고를 모셨다.

대흥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라하다. 국인은 그의 족제 원

의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

제의 손자 화흥을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붕어하시니 묘호를

인종 시호를 성황제라 하였다. 황숙인 승린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 강황제라 한다. 의종 정황

제 원유, 강종 희황제 언희, 철종 간황제 명충을 지나 선황제 인수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론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북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이라 하고 모란의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 영

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론 국도로부터 밑으론 주현에 이르기 까지 모

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사람이 의논

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

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어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

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왜,신라,거란 할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

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이로써 성인흥취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오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

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인 청태에 이

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히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

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오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

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

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젼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

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

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

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

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

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

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

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

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아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

의 옛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

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여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 하였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

를 이끌고 도망쳐 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얻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

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이 월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

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제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 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이다. 유수부마 소

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윤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

이라고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수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

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을 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

며 대비를 해야 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저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유수 대

공정과 부유수 고정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 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

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장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

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

전하는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의 땅을 남김없이 모두

남김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988-989)으로부터 순화

(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가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

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왕황으로 삼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를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노상(이

름은 확실치 않음)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

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이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천필을 할

것을 약속케 했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

<태백일사> 고 려 국 본기

태조 신성대왕의 천수 2년 서울을 송악의 남쪽으로 정하다. 25년 어제훈요를 발표했다. 그 대

략을 보면 이렇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 예악이 빠짐없이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

다. 방을 달리하고 땅을 달리하는 사람은 성품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고 적어도 반드시 같

을 순 없는 것 아닐까?'

태봉국의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이라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의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임성 사암 모잠 대형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후고구려왕으로 삼고 원

조를 신라에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두었다가 뒤에 개명하여 보덕왕

이라 했다. 신문왕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을 삼고 그의 족자 대문을 금마저에 살

게하였는데 모반하여 왕을 칭했기 때문에 주살되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

에 근거하다가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신라의 평정을 받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대진국 명종 경황제의 천복 9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옥상에는 흰빛이 비

추이고 긴 무지개의 끝은 하늘에 다은듯 보였다. 신라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 않아 나라에 이

롭지 못한일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이를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로 뇌물을 쓴 후에 애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 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 10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했다. 장년이 되

자 방일하여 원래부터 계율에 따르지 않으머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어느 때 바루를 들고

재를 모시러 가는데 까치가 부적 하나를 물어서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이 를 펴본즉 왕이라

는 글자가 있는지라,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고생이 많았거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그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 하나를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대를 물려서 원망을 갖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번번히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

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곧 궁예는 죽주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훤

이 업신여겨 이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

래 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어 북원의 적, 양길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맞겼다. 병력 100기를 나누어 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라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힘들고 쉬운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천복 27년 태수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왕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나의 장자 건

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상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에 따랐다. 때에 견훤은 병을 무진주에서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즉 마한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

켰다. 이제 나는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려고 한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야.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 라고 했다. 국호를 후 고구려라 하고 건원하여 무태라 하였다. 남

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화상이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쳤다. 궁예는 마음 속으로 신라를 합치고자 그 서울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치며 신라로부

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 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

책을 썼다. 또 경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였는데 승 석총은 말하기를 '모

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천수 원년 무인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의 제장에게 추대되어 새벽에 곡식

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거를 들었

다'하고 외치게 하니,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먼저 궁문에 이르니 북치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여 명이라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했다. 여기에서 태봉왕

궁예는 변을 듣고 평복을 한채 문을 나서 도망하다가, 얼마 못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니 봉산을 격파하여 우리의 선봉을 몰아 부쳤다. 성

종 문의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이는 항복을, 어떤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

는데, 중군의 서희만이 홀로 말한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

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돌려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 상견의 예를 청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 하니 서희는,

'양국의 대인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손녕이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

이다.' 라고 하니 서희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

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여진을 쫓아 우리 옛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

지 않을손가' 하니 말 솜씨가 강개한지라 손녕은 강변함이 쓸모 없음을 알고, 병을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송별했다.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고 격파하여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보

내 표를 올리고 축하하게 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은

선정전에 들어가 이에 대하여 극론했다.

'윤관과 오연총과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켜 군을 파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

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과 이재등 역시 계속하여 탄핵하기를,

'임금이 토지를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을 다투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말썽이 생길 것이옵니다.' 라고했다. 제 가로대 '무슨 말썽인가' 하시니 김연이 아뢰기

를 '국가에서 처음 9성을 쌓았습니다. 거란에 표징을 고함에,<여진의 궁한리는 곧 우리의 옛

땅이다. 그 백성도 역시 우리의 편맹이다. 근래 변두리를 노략질 함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수

복하여 그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사가 그렇다면 궁한리의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받

은 자일 것이니 거란은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망언을 하며 우리를 책양할 것입니다. 만약 동

쪽을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을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삼한의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

하옵니다. ' 라고 했다. 간의 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제는 선유하여 가로대 '양원수는 여진을 정벌하여 선제의 유지를 받은바라, 짐이 몸소 말하는

것을 행하여 몸은 활과 창을 무릅쓰고 깊숙이 적진에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자가 이루 다

셀수 없으며 100리의 땅을 열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갚았다면 그 공은 크다고 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 저 남은 무리들이 있지만

의지할 곳은 없다. 고로 추장이 항복해 오며 평화를 청해오매, 군신이 모두 좋다고 하므로 짐

도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 유사가 법에 따라 여러차례 탄핵을 논하는바 있어서 갑자기

그 직을 빼앗으려 한다. 짐은 종내 이를 허물로 여기진 않는다. 바라건대 속히 다시 복직하게

되기를 비노라'고 하였다.

예종 문효대왕4년 가을 7월, 9성에서 철수하여 여진의 옛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태사 영가는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

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 태사

의 지위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

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재상 추밀원 대성 지재고 시신 병마판관 및 문무의 3품이상을 만나 다시 9성

을 돌려 주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가'띰다'고 했다. 옛사서에선 말한다.

'두 장군은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이라고 했다. 선춘령은 두만강으

로부터 700리 밖 송화강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광주목 윤언이는 자해표에서 말한다. '중군 금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셨

을 때에는 건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하도록 하였으

니, 대저 대금국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타서 제 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

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

다. 신은 재삼 거듭하여 읽고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건원칭제를 청한 근본

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했어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

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 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찌기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강한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텐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

라고 하는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둘 곳조차 없어질

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

으로 정벌의 전장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로써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

<<금사>>에 말하기를 '세종은 대정 15년(1175)9월,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등을 파견

하여 표문을 올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가지고 내부코자 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

았다'고 있다.

<<고려사>>에 말하기를 '예종 11년(1115) 3월 을미에 상은 요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

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보내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은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

의 내원 포주 두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하게 되었는데,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

려 했다.상은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초유하니 야율령은 왕의 어지가 없다 하여 사

양했다. 교여는 달려와 이를 주상했다. <추밀원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춰 이를 보내고자 한다>

고 하였다. 재신과 간관은 말하기를 <저가 왕의 어지를 요구하지만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고

로 이를 말리도록 요청한다>고 하니, 상은 곧 사신을 보내 금나라에 가서 청하기를 포주는 본

래 우리의 옛 땅이다. 바라건대 요나라를 이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하니, 금나라 왕이 사

자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땅 내원성을 직접 취하라>고 하였다.

후암 이존비(-1287)는 고려 경효왕 때의 인물이다. 한 때 서연에 있으면서 자주부강론을 상주

하였다. '우리나라는 한단조선 북부여 고구려 때부터 모두 부강자주해 왔다. 또 원을 세우며

칭제하는 일은 우리태조 때에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사대의 논은 정해져서 국시가

되고, 군신상하가 굴욕을 감수하고 스스로 혁신할 기도를 하지 않음은 하늘이 두려운 바라.

나라를 보전함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어찌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는가?

바햐흐로 왜와 원한을 사려 하다가 원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무었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칭제하는 일이 시기를 핑계로 기피하는 바 된다면 참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니, 자강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채택되지 않는다 할지라

도 듣는자 이를 그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뒤에 또 왜에 대비한 5사를 말했는

첫째, 호구를 잘 파악하여 병사로 삼을 것.

둘째, 군대와 농사일을 하나로 하여 수륙 공히 나라를 지킬 것.

세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조하는 일.

네째, 수군을 확장하며 겸하여 육전도 익혀둘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

등을 말했다. 일찌기 회당상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쓰임이 있는데

누가 있어 쓴 오얏이 씨까지 많다고 싫다고 하는가?

맏아들은 천자가 되어 조정에 남지만

둘째부터는 새로 법왕의 가문을 이룬다네.

충성을 바침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남은 그게 바로 출세가 아니련가.

돌아보며 웃는 늙은이 상념에 빠지면

때로 꿈속에 들어 하늘 끝까지 아득해라.

상께서 일찌기 연경에 계실 때에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손에 연꽃을 한

개 쥐어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막상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하였다. 며칠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하여 죽으려 하는지라, 상께서 여인의 죽음을 염

려하여 다시 연나라로 가려하니, 존비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여인을 찾아보았다. 연나라 여

인은 울며 시를 바쳐 가로대,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잘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 님과 같아라. 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수레를 멈출것 없다오.

이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임금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했다. 뒤에도 임금은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는지라 존비는 상주하여 '신은 그 때에 임금님의 봉환을 서두르기 위해 어쩔 수 없

이 권사를 했사오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뺏고 유배시켰다. 문의 태자와 조신이 반복하여 유배를 풀 것을 장계한 고로 임금은

다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가 채 미치기 전에

존비는 숨졌다. 부음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상을 치룸

에 말하였다. '이존비의 정직은 방가의 사직이다. 어찌하여 요절함이 이 같을까?'라고 하였다.

곧 장사를 왕명으로 왕례를 써 행하고 마침내 형강의 변두리에, 그 산을 에워싼 4리로써 그를

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을 왕묘라 하고 리를 산사라 한다.

행촌 이시중 암(1297-1364)은 일찌기 권신은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만류를 청하

여 행성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의 략에 이르기를 '하늘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

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국계를 서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말라. 하물며 우리 나라는 한단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

어, 절로 분봉하는 제후와 근본이 서로 갖지 않다. 지금 일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있기는 하

나 이미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있어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게 곧 신시개천으로

부터 이를 삼한관경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아래 만세에 만들게 된 연고이다.

우리 천수 태조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세상을 평

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었다. 때로 강한 이웃이 생겨 틈을 타 횡포를 일삼았으

니,유영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 군신이 낮밤으로 떨치고 나서

서 도모하고 자주부강의 계책을 감히 세우고 있는 이유인데, 잠청과 같은 간사한 무리가 있어

기량을 자랑하며 남몰래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비록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째서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제 그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포도에서 나온 바요 국민이 아닌자의 공언일 뿐,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고 하였다.

행촌시중은 저서가 세가지 있으니 <단군세기>는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바 현저하고, <태백

진훈>은 도학심법을 소개한 것이요, <농상집요>는 경제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 목은선생 이

색은 이에 서문을 붙여 가로대 '대저 의식에 말미암아 족하게 되는 것, 재물을 쫓아서 풍부해

지는 것, 자식 후손들이 의지하여 두루 갖춰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문을 가르고 비슷한 것을

모아 자세하게 나누어 밝히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할지니 실로 이치를 살리는 좋은 책이라'라

고 하였다.

행촌선생이 일찌 천보산에 노닐 때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이에 이명 범장처럼 신서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의 진결

이라. 그 통달박고의 학문은 탁연하다고 칭찬할 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

은 대저 성을 엉기게 하여 지혜를 만들고, 명을 엉기어 덕을 이루고, 정을 엉기어 힘을 이루

게 한다.그래서 우주에 있으며 삼신은 오래도록 존재한다. 저 사람과 사물에 있어 삼진이 멸

하지 않음은 마땅히 천하만세의 대정신과 혼연히 그 체를 같이하고 생화하여 무궁한 때문이라

'고 했다.선생은 가로대 '도는 하늘에 있을 땐 삼신이요, 도는 사람에 있을 때 삼진이라고 한

다. 그 본을 말한다면 곧 일이 된다. 유일을 도로하고 불이를 법이라 한다. 클지로다. 한웅은

우두머리로서 서물에 나오셔서 길을 천원에 얻으시고 가르침을 태백에 세웠도다. 신시개천은

뜻을 처음으로 크게 세상에 밝혔노라. 지금 우리들 곧 글로 도를 구하고 참전하야 계를 받는

다. 나의 가르침을 높이는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또 듣는 일은 백가지라 하나 만나기 어

렵고, 나이들어 어느덧 백발이 발치에 이르렀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어라'고 했다.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도의 흥행촌으로 퇴거하시고, 스스로를 흥행촌의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마

침내 행촌삼서를 쓰시어 집에 간직하셨다.

현효왕의 뒤 5년 행촌 이암은 명을 받들어 참성단에서 제천하시고 백문보에게 말씀하시기를 '

덕을 믿고 신을 수호함은 첫째로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기르고 나라를 지킴은 공이며 발

원이다. 곧 신은 사람에 의존하고 사람은 신에 의존해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나라

는 영원토록 안강을 얻으리라. 제천의 성은 보본으로 필경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서

그것을 구해 봐야 갑자기 사라질 거품과 같은 것을'이라 했다.

정지상은 하동사람이다. 일찌기 그의 누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입시

하여 수종함에 공이 있었으므로, 왕이 즉위하게 되자 즉시 뽑히어 감찰 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일찌기 전라도의 안염사가 되어 암지에 가서는 세도가

를 만나보더니 별안간 그를 사로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온 도가 다 가슴

이 써늘했다.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사람이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1332-1370)의 총애를 받

았는데 그의 형 서신주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었다. 세력을 믿고 위복을 갖

춰 국인이 그를 꺼렸다. 불화는 향사로서 본국에 이르러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멋대로 하였으

니, 존무사나 안림사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게 거칠게 굴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했는데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

접사 홍원철은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고 불화

는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를 없신여긴다'고 했다.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니 지상은 성을 내며

크게 주의 관리를 속여 외쳐 말하길, '국가 이미 기씨를 주살 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이 사신을 제어하기 쉽다. 너

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치서의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 하느냐?' 했다. 읍리들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주었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 원철등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가두고는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뺏아

서울로 달려 돌아왔는데, 공주를 지나면서 응여를 체포하고 철퇴로써 이를 치니 며칠만에 죽

어 버렸다. 지상은 달려와서 왕께 고했다. 왕은 경악하여 순군을 내리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및 읍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을 보내 내온을 주고 불화를 위로하

며 그 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케 하였다. 왕은 뭇 기씨

를 주살 하고는 지상을 석방하여 순굿제공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를 거쳐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대개 큰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지상의

과부로 담양에 살다가 왜인은 해를 입어 죽으니 아들이 박위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했다.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말을 시키기를 '진짜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고 하니 몽고인은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공격하는데 아주 급하게 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했다. 판관 이희적은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했다.

경순왕12년(1351)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 이강은 명을 받고 참성단에 제지내고 나무판에 글

을 새겨 시를 읊었다.

봄바람에 풍경은 풍선 인냥 화사 롭고

명을 받고 오는 길은 멀기도 해라.

날쌘 말에 채찍을 더해 아침에 궁궐을 떠났는데

배 띄운 저녁엔 하얀 갈매기 파도만 쫓네.

창공은 푸른빛에 비취빛 산 색갈 묻어나고

골짜기엔 가득 기운이 차서 풀잎 절로 꽃피우지.

묻노라 봉래산은 어디라 할꼬

사람들은 이 땅을 선가라 한다네.

마음 고요하고 몸이 한가로우면 뼈는 절로 신선이 되려 하는데

사람세상 여러 가지 일은 참으로 정신없지

부평초 가득한 신비의 자리 중흥한 뒤에나

돌 쌓은 제단은 옛날로 돌아갈까.

이미 순으로 천리 땅을 바라보는데

어찌 몸이 구중 하늘에 있음을 의심할까.

이 길은 짝도 없는 길이지만 있는 것만 같아

모름지기 서울의 일년과도 같아라.

강능 왕 우의 5년((1391)3월 신미,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대제학 권근

(1352-1409)이 서고문을 지어 바치니 그글에 가로대, '초헌에, 비다위에 산은 높고 멀리 뜬세

상의 번요를 끊었노라. 단은 가운데는 하늘에 가까와 선어의 강림을 맞을 지며, 조촐한 공물

을 지열하니 명신은 있느나 싶네. 재배에, 신이 들으심은 미혹하지 않으사 사람의 소원을 들

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삿됨이 없어 땅을 다 덮으시니, 이를 예로써 섬기면 마침내 트일지

니. 그윽히 생각하니 마리산은 단군이 제사하신 곳. 성조로 부터 백성들을 위해 극을 세우시

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우셨네. 후왕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셨지만, 역

시 여기를 의지하사 근본에 보답하시었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이를 지켜 끊이지 않았도다.

그래서 짐은 작은 자식으로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다. 하늘이시어, 어찌 왜구의 개

같은 도둑 떼에 의해서 우리 백성을 어란 으로 하시겠는가? 먼 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하더라

도(하늘은)아직도 우리의 표문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들으시노라. 하물며 저 읍민들이 오랑캐

에 침략되는 것을 옳다고 참고 계시겠는가? 어째서 이름 떨칠 효험이 없을까보냐? 그럴 리

없다. 덕의 좋음이 없음이로다. 참말로 남을 책하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를 책하는 데 있나니.

그렇지만 사람이 만일 그 업에 주저 않지 않는다면 신이 마상 돌려주려고 해도 줄곳이 없을

지며, 이에 구전의 준법을 쫓아 감히 당시의 우환을 고하노라. 진실은 관관 하며 보감은 명명

이라. 하늘이시여, 명을 밝히시 옵고 크게 사직의 반석을 이루도록 빛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

다.

천수기원 439년은 경효왕 5년(1357)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예 기철 권겸 노이 등이 모반하

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물리치게 하였다.

때에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 장사성은 강소 에서 기병 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하

였다. 최영 등은 이 때 고우로 부터 돌아왔다. 상께서는 처음 최영 등과 의논 하시사 서북지

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 최영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 사 압록강 이서의 8첩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

성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10년 겨울 10월, 홍두적 번성 사유 주원장 등 10만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략해왔

다. 11년 적은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름과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12월 상께서는

복주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이래

낮밤으로 울분하며 우려하며 홍두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

였으니 상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종종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시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여 사신을 각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상께서는 마침내 조서

를 내리시니 수문 하시중 이암은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

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서 군에 몸담지는 못한다. 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

라!' 라고 했다. 세운은 도당을 뵙고 분언 양성하여 유숙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 라고 했다. 막 떠나려는데 이암이 세

운에게 말하였다.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르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하

라.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일거에 달려있으니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

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

라고 했다. 이렇게 격려하여 이를 내보내고 매일 제장을 독려케 하였다. 의를 부르짖으며 모

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의 종질 순과 한방신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

하여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 첩목아는 백호 보개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

왔다. 윤3월 기미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

에서 우리 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

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함을 축하하

도록 하였다. 김의는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일을 말하

려는 자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명나라에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등은 마

침내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청론을 떠드는 자

들의 무기력함이여, 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고는 마침내 옛 강토를 회수하지 못 하였구나. 뜻

있는 이의 원한 이처럼 깊은 것을!

강능왕이 선제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 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등 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대,'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 한안 여진

달달 고려는 곧 요동에 속한다'운운하니 조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

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았다

환단고기/규원사화 삼신관련 어구

환단고기(임승국) 규원사화(김성구)역

▷ 사람(人)과 물건(物)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

라.

▷ 삼신은 곧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泰一)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神)은 즉 기(氣)이고 기는 곧 허(虛)이며, 허

는 즉 일(一)이다.

▷ 기(氣)는 심(心)을 떠나지 않으며 심은 기를 떠나지 않나니, 신(身)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 감(感)은 식(息)을 떠나지 않으며, 식은 감을 떠나지 않으며, 촉(觸)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 신(神)을 분명히 하고 심(心)을 구한다면 진신(眞身)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

고 진업(眞業)을 크게 이룰 것이니라

▷ 철인(哲人)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三妄)이 뿌리

를 내리고, 진과 망이 어울려 삼도(三途)를 이룬다.

▷ 진(眞)은 <물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 물듦을 망(忘)이라 하고 선(善)을 불식(不息)이라

한다. 그 식(息)을 악(惡)이라 하고 청(淸)을 불산(不散)이라 한다. 산(散)을 탁(濁)이라 한다.

후(厚)를 불축(不縮)이라 한다. 축(縮)을 박(薄)이라 한다.

▷ 참 성품(性)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이 통하고, 참 목숨(命)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고, 참 정기(精)는 두려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

신이 될지니라.

▷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一氣)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智)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 일(一)에서 시작하여 일(一)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眞)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다.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性)

을 이루고, 가르침의 신은 내려와 나의 삶(命)을 이루고, 다스림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신(精)

을 이룬다.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저.

무릇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은 신의 뿌리다. 그렇지만 신이 성품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해서 성

품이 바로 신 그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가 밝게 빛나며 어둡고 더럽지 않을때 비로소 참

성품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은 기를 떠날수 없는 것이며, 기도 또한 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이

다. 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신의 성품과 기가 잘 조화되어 합쳐진 후에 스스로 성품이나 삶

을 알 수 있는 것이리라.

성품은 삶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삶도 성품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의 성품과

삶이 잘 어울린 뒤에야, 이몸이 신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기운 넘치는 삶에서 비롯

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품을 깨닫게 됨은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고, 그 삶이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신이 끝없이 이

어진다는 것은 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하는 것이다. 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뀌지 않을때 <참 나>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을 때

신이라고 하나니 참된 나는 신이 머무르는 바른 곳이다. 이 참된 근원을 알고 올바르게 수련

한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리라. 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

렸을 때 이로부터 세가지 신의 성품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라는 것에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어울리고, 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도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 식 촉 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桓因) 그대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즐거우며,하늘 땅 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

는 것이라. (단군세기 서)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듯이 있어 백성들

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

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

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

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

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

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

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단군세기)

임자 35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요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녁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 (단군세기)

'대시에 위 아래 사방은 일찌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

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시라. 주체는 곧 일

신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

상의 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하시고 크게 신

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 만물을 만드시고 열을 뿜어 만물

의 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여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아직 기氣있기 전에 먼저 물을

낳게 하여 태수태수로 하여금 북방에 있으며서 사명으로서 검은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기

機있기전에 먼저 불을 낳게 하여 태화로 하여금 남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붉은 색을 관장

케 하시고, 아직 질질도 있기 전에 먼저 나무를 낳으시더니 태목으로 하여금 동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푸른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형이 있기에 앞서 먼저 금을 낳아 태금으로 하여금

서방에 있으면서 흰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체도 생기기 전에 먼저 흙을 낳더니 대토로 하

여금 중앙에 있으면서 노란색을 관장케 하니라. 이에 하늘 아래 두루 있으면서 오제의 사명을

주관하는 바 이를 천하대장군이라 한다. 지하에 두루 있으면서 오령의 이룸을 주관하는 바 이

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생각컨대 저 삼산을 천일이라 하고 지일이라 하고 태일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

일은 교화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를 주관하느니라.

생각컨대 5제는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를 말하나니, 흑제는 생명이 다함을 주관하고, 적제

는 빛과 열을 주관하고, 청제는 낳아 기름을 주관하고, 백제는 성숙을 주관하며, 황제는 조화

를 주관한다.또 생각컨대 5령은 태수 태화 태목 태금 태토라 하나니, 태토는 크게 윤택하게

하며, 태화는 녹이고 익히며, 태목은 지어 이루고, 태금은 재량하여 자르며, 태토는 씨뿌림을

주관한다.

이에 삼신은 곧 5제를 감독하고 명령하사 각각 넓히고 나타내게 하고, 5령으로 하여금 기르고

이루게 하도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고 달이 뜨면 밤이라 하며, 별의 움직임을 측량하여 춥고

더운 것과 연대를 기록케 하니라.(고기잡이는 배띄워 바다를 지키고, 농사에는 수레를 내어 땅

을 지키니라.)코다 삼신일체의 만물의 원리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 힘이 됨이여!

높고도 넓어서 세상에 가득하며, 깊고 묘하여 불가사의하게 운행함이여!

그런데 사물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가졌으나 이치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

두 사물의 도리를 가졌으나 도리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기능을

가졌으나 기능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무궁함이 있으나. 무궁함아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 하였나니, 세상에 있으며 산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

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

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니라. 이를

산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가 있으면 반느시 싹이 있고 싹이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고, 꽃이 있

으며 반드시 열매가 있으며,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쓰임이 있나니라. 이를 또 태양의 움직임

에 비유컨대,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살핌이 있고, 살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있고, 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이룸이 있나니 대저 천하 일체의 물건은

개벽을 좇음으로써 존재하고, 진화를 닮는 일 있음으로써 존재하며, 순환에 닮음 있음으로써

존재하니라.

유원의 기와 지묘의 신은 저절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여 가득히 빛났으니 있을 곳에 있고

감응하여 대응하니라. 오되 시작된 곳이 없고 가되 끝나는 곳이 없으니 하나에 통하여 만가지

를 이루지 못함이 없음이라. (삼신오제본기제1)

'생각컨대 천일의 신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삼대와 삼원과 삼일을 가지고 이를 영

부하여 크게 내리시사 만만세의 만만백성에게 내리시니 일체는 애오라지 삼신께서 만드신 바

니라. 심 기 신(心氣身)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서로 의지해야 할 일이로되 아직은 반드시 영원

토록 서로 지키지 못하고 영 지 의(靈智意) 삼식(三識)은 곧 영 각 생(靈覺生)의 삼혼(三魂)이

되고, 또 그 소질에 따라 형 년 혼(形年魂)을 넘치게 하느니라. 일찌기 경계에 따라서 느끼고,

숨쉬고, 접촉함이 있으니, 참됨과 망령됨은 서로 삼도(三途)를 끌어들여 갈라지고 말았도다.

때문에 이르기를 참 있음으로써 살고 망 있음으로써 멸하느니라고 했느니라. 이에 사람과 사

물의 생겨남은 다같이 그 참된 근원을 <하나>로 하느니라. 성 명 정(性命精)을 삼관(三觀)이라

하나니 관을 수신(修身)의 요회(要會)라 하느니라. 성은 명을 떠나지 않고 명은 성을 떠나지

않나니 정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심 기 신을 삼방(三房)이라 하고 성화(成化)의 근원(根源)이라 한다. 기는 심을 떠나지 않으며

심은 기를 떠나지 않나니, 신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감 식 촉을 삼문(三門)이라 한다. 문을 행도(行道)의 상법(常法)이라 한다. 감은 식을 떠나지

않으며, 식은 감을 떠나지 않으며, 촉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성을 진리의 원관(元觀)이라 하고, 심은 진신(眞身)의 현방(玄房으)로 하고, 감을 진응(眞應)의

묘문(妙門)으로 한다. 이를 탐구하고 성에 의해 진기(眞機)를 크게 발하나니, 신을 분명히 하

고 심을 구한다면 진신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고 진업(眞業)을 크게 이룰 것이

니라. (삼신오제본기제1)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리고, 진과 망이 어울려 삼도(三途)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을 모범 삼나니 참됨으로

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

지 않으며, 다스림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삼신오제본기제1)

삼신산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삼신으로 이름 삼음은 대저 상세이래로 삼신이 이곳에 내

려와 노닐으시고 삼계를 널리 감화하심을 믿기 때문이라.360만의 큰 둘레의 하늘은 크체가 불

생불멸이시며 그 용이 무궁무근이나, 그의 법식과 이치는 때가 있으며 장소가 있으니 신의 지

극히 자상하고 지극히 현명하여 여의자재하심은 끝내 이를 알 수가 없다. 그를 맞이함에는 흡

사 눈에 보이는 듯이 하고, 그 바치는 일은 문득 들리는 바 있는 것 같이 하고, 그 한탄함에

는 기꺼이 하사받음이 있는 듯이 하고, 그 서약함에는 숙연하여 얻는 것이 있는 듯이 하며,

물건을 바칠 때에도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바침이니, 이렇게 만세 인민이 인식추앙하여 모두

가 다 기쁘게 믿는 것이다.

삼신산에 어떤 설에서 '삼은 신이 되고 신은 또 백으로 되며, 신은 또 백으로 되며 신은 고가

되는 고로 고는 바로 두가 된다. 때문에 또 백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

개마는 해마리의 전음이다.'라고했다. 고어에는 힌것을 해라하고 두를 마리라고 하니 백두산의

이름도 역시 이예서 생긴 것이다. (삼신오제본기제1)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시다라 한다. 또 사타려아라

고도 한다. 어느날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 놓고 하늘

에 알린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 (삼신오제본기제1)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삼신오

제본기제1)

하나의 기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는 곧 극이다. 극은 즉 무다. 저 하늘의 근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 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를 체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는 즉 천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의 신이 있어 능히 삼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 지일 태일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죽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이 있다. 성명 정의 삼수의 진이라 한다. 진은 즉

충이고, 충은 곧 업이고, 업은 곧 속이며, 속은 즉 일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

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은 즉 삼이라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합하

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로 되돌아 오는 미이다. 곧 성의 선이라 하는 것

이고 곧 명의 청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의 후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

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 물듦을 망이라 하고

선을 불식이라 한다. 그 식을 악이라 하고 청을 불산이라 한다. 산을 탁이라 한다. 후를 불축

이라 한다. 축을 박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하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

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

고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

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삼신오제본

기제1)

'한(桓)은 전일(全一)의 광명(光明)이라. 전일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한국본기제2)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 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

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산에 올라가 해가 처

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셕엔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이에 앞서 한인꼐서 때어나시사, 절로 다섯가지 사물을 만들고 기름을 아시고 다섯가지 가르

침을 가르치시고 다섯가지 일들을 다스리시었다. (신시본기제3)

대저 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은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

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

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

는 자들은 반드시 삼산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며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

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위

에 괴상한 도사얘기도 나왔다. 뎌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느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가 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

함으로써 세사을 미혹하는 주요 원은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쪼으로 바다

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할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

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개의 섬예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

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으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를 에워싸고 있

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솓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을 봉래산

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신시본

기제3)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

경신고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여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

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예는 묵숨의 안전과 위험,우환,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부 삼신

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이시다. (신시본기제3)

제5장 인물(167자)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三眞)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三忘)이

뿌리를 내렸고 진과 망이 서로 삼도(三途)를 지었다.

가로대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이 통하고, 참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

고, 참정기는 두려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대 심과 기와 신(心氣身)이라. 심이 성에 의지하여 선악을 이루나니 선은 복이 되고 악은

화가 된다. 기가 명에 의지하여 청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가고 탁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심이 정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을 이루니라.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다.

가로대 느낌(感)과 숨쉼(識)과 부딪침(촉)이라. 굴러 열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쁨 두

려움 슬픔 성냄 탐함 싫음이요, 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번개 습기요, 부딪침에는 소리

빛 냄새 맛 음탕 다침이니라.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

서 가닥길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

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소도경전본훈제

5)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 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규원사화

단군기)

발해 때는 보본단(報本壇)이 있었고, 고려 때는 성제사(聖帝祠)가 있었으며, 요나라에는 목엽

산(木葉山)의 삼신묘(三神廟)가 있었고, 금나라에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의 사당이 있었다.

우리 세종께서는 단군묘(檀君廟)를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 '조선시조

단군지묘(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규원사화 단군기)

대저 신시씨의 일을 들은 사람은 현실에 맞지 않고 괴이함에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

은 알지 못한다. 세속은 그 연유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한나라의 서적에 의지하여 이르

기를 「선교(仙敎)는 황노(黃老)의 한 부류이다」라고 하니, 신인으로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우

리 신시씨의 세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규원사화 단군기)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

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

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

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

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

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

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

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이다.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

(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

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

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 (규원사화 단군기)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

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

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

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감히 하지 않았으니, 만

대에 걸쳐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지표가 되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

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인(桓因)·환웅(桓雄)·

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 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

니, 곧 옛 백성들이 그러한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규원사화 단군기)

대저 신시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

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

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

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

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서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

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신선전》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

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

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

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

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

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

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 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

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규원사화 단군기)

생각건대 옛 기록에 전하는 '구변진단(九변震檀)'이란 얘기는 반드시 이러한 것에 연유함이 있

을 것이나 '불로진단(不老震檀)'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전해들은 사람의 착오일 것이다.

그러한 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 속의 삼신산'을 말하는 것 역

시 똑 같이 꿈속을 노닐며 그 주인을 속이고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

에 「원하건대 삼신산의 불로초를 얻어, 윗채에 계신 백발의 어버이에게 바치고자 한다」는 글

귀가 있으니, 아마도 노인을 봉양하는 자가 젊음을 찾아 드리고자 하는 전형적인 글인 것 같

은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할 뿐이다. 어찌하여 백두산에 가서 단제(檀

帝)의 영정에 절을 하고 만수를 기원하지 않는 것인가? (규원사화 단군기)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높이 여겼

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게 하였으니,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

(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

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규원사화 단군기)

또한《신이경(神異經)》을 보았더니 「곤륜산의 서쪽에 큰 뱀이 있어 산을 휘어 감고 있는데 그

길이가 3만리이다」 하였다. 길이가 3만리나 되는 큰 뱀이 곤륜의 서쪽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

으면 서역의 뭇 나라들이 응당 그 비늘조각 아래에서 짐승을 길렀을 터인데, 세상에 어찌 그

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이상한 말을 짓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모르

는 것을 빌미로 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나라 땅의 기괴한 선비들도 단지 동방의 삼신 예기

에 빙자하여 공연히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트려 인심을 선동하고 이로서 듣는 자들을 미혹케

하였다. (규원사화 단군기)

이제 삼신제석(三神帝釋)을 숭배하는 풍조가 자못 성하여,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윗 벽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 주머니에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아 걸어 두며 이름하여 '

삼신낭(三神囊)' 혹은 '제석낭(帝釋囊)'이라 한다. 매년 10월 새로운 곡식이 날 때면 주부는 반

드시 손을 정결히 하고 새로 마련한 시루에 떡을 쪄서 그 신에게 정성을 올리며 큰 복을 바란

다. 이것은 단조(檀朝)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겨진 풍속인데, 속된 백성들은 다투어 무당과 박

수를 받들면서 혹은 길흉화복과 장수하고 단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무당과 박수에게

의탁하며 말과 행동을 그것에 따르니, 이는 곧 옛 풍속의 끄트머리로 흐르는 폐단이다. 그러

니 어찌 연나라와 제나라 선비를 향하여 그들이 괴상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규원사화 단군기)

날아다니는 반딧불에도 빛이 있고, 썩은 나무에서도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감나무 배나무는

가지에 접을 붙이면 능히 과실이 무성해 지고, 오리나 닭 등은 알을 품어 능히 새끼를 낳아

기른다. 이것은 몸의 바탕 외에 따로 응결된 힘이 있어서 그러한가? 그러한 사물과 사물들의

응결된 힘이 서로 교접하여 능히 생명을 낳게 되는 것인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정령(精靈)이 있어서 일관되게 흐르고 두루 감싸안으며 그 몸의 바탕을 밀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겠는가? 한나라 사람의 말에는 반고(盤古)와 삼황(三皇)1)이 세상을 처음으

로 연 창시자라 하는데, 이것이 진실인가? 동방 사람의 말에는 삼신(三神)이 세상을 처음으로

가른 창조자라 하는 데, 이것이 진실인가? 내가 감히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

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한 큰 정령(精靈)이 있어서, 이 세상을 잡아 유지

하고 이 세상을 주재하여 펼치며 능히 밀어 움직여서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리다. (규원사화 만설)

1.【三皇】중국 전설상의 세 임금.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

한국사의 인식과 한단고기

<목 차>

한국사의 현주소

*한국인의 자아상실증

*국사와 고고학

한국고대사의 대상강역

*반도사관과 우리의 국경(간도는 우리땅)

*역사강역이 반도가 아니다

*일만년의 역사 대국

한단고기의 가치

천민심훈의 정수

한국사의 현주소

한국인의 자아상실증

한국사는 일인칭 주격<나>를 잃어버린 머리 없는 역사이다. 남들이 들으면 우스갯소리 같은

사실인데,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까지도 夷를<오랑캐 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나는 되놈

이요」라고 하는 꼴이다.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보아도 우리나라 역사는 바로 대륙에 채이고 섬나라에 짓밟힌 꼴과 다

를 바가 없으니,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운 사람들이 패배주의적이고 비관적인 국가관·민족관에

빠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스러울 것이다.

사학계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삼국사기의 말보다 일본인이나 미국인의 말에 더 신빙성을 부여

해야 되는 것일까 ? 바로<나>를 잃어버린 역사이기에, 삼국사기의 기록에「- - - - - 」라고

있다는 말 보다 일본학자 00가, 예일대학의 무슨 무슨박사가 이렇게 저렇게 주장했다는 말이

휠씬 믿음성 있게 들리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나라의 장래에까지도 심각한 병폐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들 인데, 여기에도

치유의 방법은 있을 것이다. 옳고 바른<역사><국사>의 인식이 곧 그것을 치유한다. 국사교육

의 위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국사교육의 허상이란 이제껏 한국의 자아상실증 즉, 일인

층 주격의 상실증만을 초래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의 현실을 보면 과거 사대주의 시대

의 껍데기와 일제시대의 식민지사학을 벗어나지 못한 구태의연함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 정

치· 경제 · 과학 문화 등 온갖 분야가 8·15 광복과 독립의 혜택을 받았건만, 사학만은 아직 광

복 이전의 옛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한 광복 이전의 상황이 계속되어, 일제시대의 학설과 사론

史倫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이론이라면 몰라도 한국사의 이론이나 사론

같은 것이 광복의 전후를 관통하여 두루 통설로 횡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황국사관皇國史觀에 시녀 구실을 했고, 한국민족 말살을 겨냥해서 정치 성향을

띠고 날조된 사학의 이론이 어째서 자연과학의 공리公理나 지동설·만유인력설 마냥 광복과 관

계 없이 통설로 적용될 수 있을까 ?

우리나라의 사학을 두고 어떤 이는 말한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떠받들던 전근대의 사대주의

사관을<중독中毒>이라 표현하고, 일본의 황국사관을<왜독倭毒>이라 표현하고, 광복 후 서양학

의 영향으로 이룩된 사학을<양독 洋毒>이라 하여, 한국사의 구조식을 중독+왜독+양독의<삼독

三毒>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식민사학의 이른바 조선사는 바로 중독+왜독이라는 복합

증상이지 결코<왜독>이라는 단순 현상은 아닌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게 볼 적에 현대의<양

독>이야 말로 전근대의 사학과 일본 식민사학을 복합한 현대의 괴물사학으로서,<양독 = 중독+

왜독+양독>의 집대성이라고 극언할 수도 있을 터이니, 과연 그 주장처럼 한국사의 구조식은

바로 삼독이라 할만도 하다

국사와 고고학

엄밀히 말해서 한국사의 현실은 그 지정학적 현실이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조국을 떠나거나 잃고 세계를 방랑하는 미국이나 소련 안의 히브리민족 (곧 유태민족)에

게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현장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미국이나 소련 땅의 출토물이 히브리

역사의 실증 자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본토나 중동지방이 아니고선 이스라엘의

고고학은 지정학적인 한계성 때문에 성립될 수 없음은 굳이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터이

다.

한국 고고학의 현실이 꼭 이와 같다. 한반도의 절반 곧 반도半島라는 제약된 지정학적 조건

밑에서는 고고학이 설 자리가 없다. 가끔 지상에 오르내리는 고구려의 광개토경호태열제의 훈

적비 비문에 관한 논쟁도 현재로선 현장이 없는, 허공의, 관념적 논쟁이 되거나 고작해야 비

문 해석상의 논쟁에 시종할 뿐, 제대로 고고학다운 연구나 논쟁이 되질 못한다.<현장이 없는>

고고학의 비애라 할 것이다.

한편 우리의 상고사는<중국 대륙+몽고 대륙+만주 대륙+시베리아 대륙+한반도+일본열도>에서

전개된 역사이지 결코 한반도만의 역사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한반도의 남쪽 반

도에만 학문적 연구와 고고학적 현장이 열려 있을 뿐이라는 엄청난 제약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이러한 제약이 거의 없었던 광복 전의 일제시대에는 반대로 이를 연구할 학문적 주권이

또한 없었다. 때문에 현재 한국 고고학계가 하늘처럼 믿고 있는 학문적 자료 고고학적 자료들

은 모두 지난날의 왜인들의 손에 의하여 이룩된 업적들 뿐일 수밖에 심지어 고고학의 지표地

表나 연표年表마저도 일본 사람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순수한 우리 학계의 힘만

으로는 성립되질 않는다.

더군다나<이런 왜색 자료들이 과연 정확한 것인가 ? >하는 문제는 별도로 생각키로 한다 해

도, 현재 돈이라면 oo 도 팔아치울지 모르는 골동품 업계에서 저 낙랑 유물 와당 자기들이 어

떤 푸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보면 한심하기 더할 바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패전 후 또다시 경

제대국으로 등장하여 값나가는 것이면 쓰레기라도 거둬가는 일본의 관광객들에 의해 한때는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 )의 이른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 때문에 서울 인사동의 말(馬 )그림이

어처구니 없는 고가로 팔리더니, 낙랑시대의 와당이나 도자기들은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가질

않는 푸대접을 받았다.

일본 식민사학이 날조한 낙랑 · 현도 · 진번 · 임둔의 이른바<한사군>의 범죄가 산산조각이

나서, 국사 시험지에 어김없이 오르내리며 어린 학생들의 뇌리에 처 박히게 했던 소위 한사군

설이 이젠 원자폭탄의 낙진마냥 떨어지고 있는 것은 웃지 못할 현실이다. 그렇지만 「낙랑태수

지장 樂浪太守之章」이라는 글이 들어간 낙랑봉니樂浪封尼라는 진흙덩이가 저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요즘 돈으로 아 파트 열 개나 될 높은 보상금으로 매입되던 시대가 있었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낙랑와당이라고 해서 전가傳家의 보물로 알고, 모서리 한곳 떨어져

나간 곳 없는 완전한 와당을 광복 뒤에도 국보급 이상으로 아끼던 어느 골동품 애호가가 이를

처분코자 70 년대에 인사동에 들고 나왔으나, 낙랑 유물은 값이 형성되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한낱 진흙덩이로 취급되었다. 이에 한 업자의 충고로 작고한 모 박물관장

을 찾아가 감정을 의뢰하니,「낙랑 유물의 황금기는 지났다」고 하는 푸념 한마디로 감정조차

거부하는지라, 전래의 가보라 믿어 온 낙랑와당을 땅에 내어던져 가루로 만드는 서글픈 촌극

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한국 고고학이 일본의 고고학 자료를 믿을 것인가 불신할 것인가의

기준이 될 만한 일화이다. 한국 고고학의 현장이 없다는 이 소박한 공식을 믿을 일이지 결코

다른 구실을 찾을 수가 없다. 고고학의 현장을 찾기 위해서도 한국은 발전해야 한다. 한반도

는 결코 고고학의 대상 강역이 아닌 셈이다.

일만 년의 기나긴 역사 중 극히 일부분의 출토품 밖에 나올 수 없는 반도 안의 고고학의 현장

을 고고학도들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강연차 충북의 어느 대학엘 간 적이 있다. 나의 상고사

강의가 끝난 다음 그 지방 대학박물관장이라 칭하는 모교수의 대접을 받으며 박물관의 진열실

에서 돌덩이 하나를 기증받았다. 이 돌덩이가 단군 이전 수천년의 역사를 웅변하는데 임교수

(필자 )의 노력이 아깝다고 동정(? )한다. 나는 농지거리로,

「이 돌 어느 구석에 한웅천황의 신시개천의 역사가 적혔으며 천부경의 경문이라도 적혔는가 ?

」고했더니

「아니 ! 그런 것은 비석이고, 이 돌은 거금 만년 전의 인간들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

지요」라고한다.

「당신은 이 돌 덩어리를 보고서야 겨우 그걸 믿는가 ? 난 보질 않고도 믿는데 고고학과 학생

들은 골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이라고 대꾸했다. 사실 이 대학교수에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고학의 역할과 학문의 기

능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한서》 지리지에는 산동반도에<백지百支래왕지묘來王之墓>라고 하는 고적이 있다고 했다.

단재 신채호의 추측으론<백제 동성왕東城王의 무덤>이라고 했다. 산동반도에 가서 이 무덤을

조사하여 그 사실 여부를 밝혀야 한다. 단재의 추측이 맞는지, 혹은 중국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의 뼈인가를 밝혀야 한다. 바로 그것이 고고학의 사명이요, 또 고고학의 본분이다. 고고학

의 사명은 거기에서 끝난다. 동성왕의 무덤이 사실이라면 그가 그곳에 묻히게 된 동기나 배경

및 역사는 역사학이 규명할 일이다.

또 양자강 남쪽 건강시(지금의 남경 )교외에는 공주의 무령왕능보다 규모는 크면서 양식은 같

은 무덤이 300 여 개가 있다 한다. 한국 고고학 학자는 그것을 개발 하여 정체를 밝혀야 한

다. 과연 종래의 주장처럼 이들 무덤이 양梁나라의 무덤들인가, 아니면 백제의 무덤들인가를

밝혀야 한다. 백제인들이 양자강 남쪽에 무덤을 남겼으리라는 추정은《북사北史》의 「백제百濟

〔---〕거강據江 좌우左右〔---〕」라는 글로써 가능하다. 이를 설명할 학자는 사학자이며, 고고

학자가 물론 아니다. 고고학은 그 역할이 사학자의 주장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방계과학

이다.

고고학은 그 학문의 출발점이<사학의 방계 과학> 이라는 제약 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데 오늘 한국의 사학과 고고학은 그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고고학이 자기 본분을 잊고 사학

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일본 고고학의 때묻은 자료들을 빌미로 해서

현장 있는 학문이 아니라 관념적 고고학이라는 엉뚱한 방법론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교양국

사>라는 인쇄물이 있어 내용을 훌어 보니 국사가 아니라 안압지의 출토품, 조선조 증기의 건

축 양식 등 고고학 일색의 책이었다. KBS 라는 국영방송국이 편집자다. 국사와 고고학의 역

할을 이렇게 몰라도 되는 것인가 ? 공연히 짜증이 난다. 교양고고학이라면 몰라도 교양국사라

는 표절은 곤란하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의 구조식은<삼독+고고학의 횡포>라는 해독으로 요약

되는 것이다.

한국 고대사의 대상 강역

반도사관과 우리의 국경(간도는 우리땅)

한국의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청일간의 국경협정일 뿐이고 일본 식

민지시대의 경계선일 뿐이다. 청나라와 한국 곧 한청 양국의 국경선은 1712 년 5 월 15 일

백두산에 세워진 정계비대로 압록강→토문강→송화강→흑룡강의 국경선이 있으니, 「 3,000 리

금수강산, 3,000 리 반도」라는 말조차 우리의 국토관을 흐리게 하는 낱말일 뿐이다. 반도라는

말, 한반도라는 말 자체가 왜색짙은 오염된 낱말이다.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라는 가사는 왜독에 물든 단어일 뿐이다. 우리의 국가관이나 국사관, 생활 습속에 이르기까지

왜색에 물들지 않은 바가 거의 없으니 어찌할것인가 ? 불구대천의 원수가 따로 없다. 심지어

<압록강→두만강>이라는 국경선까지, 3,000 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예찬의 말까지, 그리고

헌법 전문의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한다」는 말 까지도 왜색의 용어인 것이니 오호

라 ! 왜색이 물들지 않은 공간은 그 어느 하늘 아래였던가 ?

생각하면 기막힌 현실이 하나 둘이 아니다. 흔히 반도사관이라 하면, 역사학적인 각도에서 우

리의 역사 강역이 결코 반도만이 아니고, 아시아 대륙의 광역이 한국의 역사 강역이라는 주장

의 반대론에서 받아들인다. 일본 식민사학이 고의로 단군 이래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에 국한

시키려는 음모를 꼬집어 반도사관이라고 규탄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국경선이 두만강↔압록강이 아니고 송화강↔흑룡강이라는 지리

적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물게 되었다. 즉 두만강↔압록강의 국경선까지도 일본의 식민

정책과 유관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좀체로 드문 것이다.

국경협정을 제삼국의 간여로 체결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1712년 숙종38년 5월15일에 청나

라 태조가 보낸 청나라의 오라(현재의 길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과 우리의 접반사 박권

朴權, 군관 이의복李義復,통역관김응헌金應憲(헌자왼쪽에삼수변있음) 등이 백두산 꼭대기의 압

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에서 백두산 꼭대기 동남쪽 4km 해발 2,200 m 되는 지점에 양국의

대표가 합의하여 세운 정계비가 한중 양국의 최초이자 최후의 국경 협정인 것이다. 정계비에

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烏喇總管 穆克登

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錄

大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勤石爲記

淸 原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

筆帖式蘇雨昌通官二哥

朝 朝鮮軍官李義復 趙壹相

差使官許桀(걸자왼쪽에 나무목변木 있음) 朴道常

鮮 通官金興憲(헌자왼쪽에 삼수변 있음)金慶門

비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위에 이 비석을 세운다고 했다. 두만강이니

석을수石乙水 따위 이름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일본은 남의 국경을 제멋대로 압록강→

석을수→두만강으로 정했으니 이런 파렴치한 만행이 어디있는가? 기막히게도 이렇게 국경선을

정해주는 반대급부로 남만주 철도의 부설권을 따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철도 부설권은

이미 노일전쟁 때 1904년 포츠모드Portsmouth 조약에서 승인된 것이다. 그것은 교환 조건으

로 등장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우리의 북방 강역인 두만강 북쪽의 땅이 잘

려 나갔다. 그이후 약 80년간 압록강→두만강이 우리의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한 장의 지도를 소개 하겠다. 이지도는 1,924년 파리에서 발행한《한국의 천주교》

라는 책에 실린 지도인데, 이는 로마 카톨릭의 한국선교교구를 표시한 지도이다. 한국 교구를

세 개로 나누어 대구교구와 경성교구 ,그리고 원산교구로 했는데, 원산교구는 함경남북도+간

도+길림성+흑룡강성 일부로 잡고 있어서 과연 백두산정계비 대로 토문강→송화강→흑룡강을

국경선으로 인정하고 있다. 필자가 이에 분명히 선언코자 함은 다름아니라「한국의 영역은 지

금도 결코 반도 특히 3,000리 반도만인 것은 아니다」라는 현실 인식이다.

물론 우리의 역사 강역을 반도라고 생각하는 모순도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이지만 현재도 우리

는 결코 반도인이 아니다 하는 자아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 자기선언인가 ? 일본 정부는 마침

내 1965 년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행한 간도협정은 이를 무효로 한다」고 양심선언까지 했다.

슬프다 ! 두만강 북쪽의 우리 강역은 현재 주인 없는 공간으로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음이여.

현재 그 땅은 중공 당국도<조선민족자치구>라는 엉거주춤한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다스리고

있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후방기지 마냥 방치된 이 땅에는 현재 한국문화가 파도치고 있는

땅이다. 인구의 비례는 중국과 한국이 6:4 라 하나 문화는 거의 한국문화 일색이다. 어느 산

골이나 두메에도 한글 간판과 한국 말의 한국문화가 파도치고 있다. 그들의 조국인 대한민국

이 그 실정을 모르고 있다면 이는 그들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북

한의 방송이나 언론에 편향하는 비율보다 대한민국의 KBS, 국제방송을 즐겨 듣는 인구가 훨

씬 많다고 하며,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과 원색적인 욕설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고 한다.

우리는 또다시 동포를 저버리는 정치적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둘도 많다><하나도

많다> 하는 인구정책의 구호를 떠들기 전에 국토의 배가운동을 외면치 말라. 그 땅을 수복할

때 한국은 인구 2 억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둘도 많다>< 하나도 많다>의 구호는 그때 가

서 재고해 보기로 하자. 한정된 좁은 공간에 인구가 늘면 인구의 폭발을 두려워 하고 인구정

책을 산아제한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정치의 기술이나 철학도 아니다. 많으면 줄이고 적으면

늘여야 한다는 발상은 한낱 산술적 계산일 뿐이다. 많으면 수용할 공간을 확대해 보자는 발상

은 왜 못하는가 ?

역사강역이 반도가아니다.

현실의 국토가 반도가 아니다라는 인식보다 역사 강역이 반도가 아니다라는 인식은 더욱 값지

고 중요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조에서「都平壞令西京始稱朝鮮」 이라 하여 단군의 도읍

지가 반도의 평양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반도 사관의 빌미를 준 것이 우리의 전근대

사서요, 이런 기록들이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는 그 115 권 조선열전을 시작하는 주에서

朝鮮有潮水 · 列(왼쪽에 삼수변있음)水 · 汕水 三水 合爲列水 疑樂浪 朝蘇 取名於此也

라고 했다. 곧<조선> 이라는 이름은 조수潮水 선수汕水라는 물 때문에 생긴 이름이 라는 뜻

이다. 과연 중국의 하북성에는 조수도 있고 선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점에 대해서 중국사

는 거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수 · 선수가 조선이라는 국호에서 생겼을 터이지 조선이라

는 국호가 조수 선수라는 물에서 생겼을리는 없는 것이다. 아뭏든 조선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

국 대륙 하북성 쪽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또 종래에는 사기에 나오는 열수列水를 한반도의 대동강이라고 해석해 왔으나 이는 잘못이다.

이홍직李弘植의 국사대사전은 열수를 「고조선 때 대동강을 열수라 했다. 한나라 양복楊僕이

수군 7, 000 을 거느리고 이 강으로 들어와 왕검성을 공격했다」고 해설하였으니 식민사학을

만든 왜놈보다 이를 더욱 부추기는 한국 학자가 더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학자나

중국 사서도 열수를 이렇게 해설치 않았는데 한국의 사학 대가라는 사람이 이토록 망발을 하

고 있다.

또 상흠桑欽의《수경 水經》에서「패수는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 물이라」고 하 북성의 물을

설명하였는데,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 는 「수경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고 아마도東入于海

의 東은 西자의 잘못일 것이다」 라고 했으니, 그의 패수는 대동강 또는 청천강으로서 분명히

西入于海하는 강이므로, 자기의 반도사관이 무너질까 염려하여 중국의 원전原典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원전의 기록도 고칠 수 있는 학자라면 애초에 고전이나 원전의 필요성도 없는

학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홍직·이병도 두 분에게 한마디 알려주고 싶은 말은, 중국사는 중국의

역사와 중국땅의 산과물을 적은 책이지 결코 이웃나라의 역사·지리를 설명코자 적은 책이 아

니라 는 사실을 기억해 두라는 것이다. 한국사를 적는 학자라면 바다 건너 미국의 역사 지리

를 이러쿵 저러쿵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상식이 아닌가 ? 더우기 상흠은 「장강이북長江以

北 장성이남長城以南 사이의 불에 대해서 적는다」고 밝혔으니, 곧 《 수경》이라는 책은 양자강

이북, 만리장성 이남 사이에 있는 강물에 대한 글인 것이다. 따라서 패수라는 물도 그사이에

있는 물이지 엉뚱하게 한반도의 대동강을 패수라는 이름으로 거론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저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나《수경》의 상흠은 바다건너에 한반도가 있었다는 지리 지식도 없었던

것이다.하물며 한반도의 대동강을 설명했겠는가 ? 상흠의 패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浿水出樂浪郡 樓方縣 東方過於臨溟縣 東入于海

(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 나와 동쪽으로 임명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중국 쪽의 물은 대개가 아니, 모두가 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왜 그런가하면 서쪽엔 바다

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병도씨는 중국 대륙의 물을 기록하다가 한반도의 대동강 물을 기

록했으므로 습관적으로 「동입우해」라고 실수해서 적었을 것이라고 엉뚱한 푸념을 했다. 저 이

홍직의《국사대사전》도 대동강을 열수라 해설하고는 한무제가 보낸 수군 제독 양복이 열수를

거슬러 왕검성을 치러 왔다고 역시 영뚱한 해설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백이伯夷숙제叔齊의 나라 고죽국孤竹國은 오늘날 하북성에 있었던 나라로

중국인의 시인 묵객들도, 백이 숙제가 의절했다고 하는 수양산을 배경으로 갖가지 시문을 남

기고 있는데, 이홍직의 국사사전은 이 고죽국을 황해도의 옛 이름이라 하는가 하면, 수양산을

황해도에 있었던 산 이름이라고 밑도 끝도 없는 글을 싣고 있다. 한편 천하의 충신 대효라 하

는 백이 숙제는 중국 고전이 「동이지인 東夷之 人 」 이라 해설했는데, 이를 사전에 소개하지

도 않고 그의 나라 고죽국과 수양산 만을 황해도다 해주다 했으니, 백이 숙제가 동이족이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거슬렸던가 ?

또 고약한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 뿐이 아니다.<송서>라는 항목을 국사사전에서 찾아 보니 백

제사의 개략을 다 설명하고 맨 뒤에「백제의 요서진출설遼西進出說은 잘못이다」라고 쓸데없는

사족을 늘어 놓았다. 중국 25 사가 한결같이「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 令北平柳城之間 自治

百濟郡」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도 하등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요서진출설은 잘못이다」라

는 망언을 어찌할 수 있는지? 25 사의 권위를 이길 수 있는 학자나 학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가? 설령 자기의 비위에 안 맞거나 자기의 학설과

어긋난다 해도 백제가 중국의 서울인 북경을 중심으로 요서군을 설치하고 하남성 유성에는 진

평군을 설치하여, 황하의 남북을 백제군이라 하고 이를 자치했다는 기록이 어째서 비위에 맞

지 않는다고「틀렸다」하는가 ?

한국 사학의 비극적인 측면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지난날 일본 사학자 요시다 도오고(吉田

東伍 )같은 황국사관의 신봉자도 백제가 오윌지방(오늘의 양자강 남쪽)에 진출 했다는 25 사

의 기록을 주목한다」는 말로 시인하고 있는데, 이병도는 심지어 갈석산이라는 만리장성의 시

발점이 되는 산이 황해도 수안遂安에 있고, 만리장성이 해주海州 까지 와있다는 것처럼 말하

고 있다.《통전通典》에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秦築長城 東載遼水 起於此山 (《사기》하본기 《통전》고구려 )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쌓은만리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이 산에서 일어났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고 만리장성의 시발점이 산해관의 동쪽 갈석산이라

고 하는 이 기록이 자기의 한사군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터무니 없는 설」 이라고

비판하면서「아마도 수안에 요동산遼東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정에 장성의 흔적 같은 것이

있어 이런 와전이 생긴 듯하다」고 했으니, 이병도씨는 중국 사가들이 황해도 땅을 현미경으로

살피고 있는 듯 착각하고 있는 것같다.

다시금 강조해 두거니와 한국 상고사의 대상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다. 이홍직이 말하는 대로

한무제의 양복이 거슬러 올라간 물은 한반도의 대동강이란 물이 아니요, 하북성의 열수나 패

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선 수군의 습격을 받아 패전하여 배는 가라앉아 버렸고 상륙하여 「

?山中十餘 日 」(산속에 십여일 동안 도망 다니다 )의 치욕을 치렀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는 전쟁이 끝난 뒤 한무제의 상을 받은 게 아니라 사형이라는 극형을 당하고, 시체는 찢겨 장

안의 사대문에 걸리는 기시棄市에 처해 졌던 것이다. 육군사령관순체도같은 기시를당했다. 한

사군전쟁의 주역이요, 개선장군이어야 할 육해 양군의 사령관들이 모두 처형되었으니, 저들은

개선장군이 아니요,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 때웠던 것이다. 한나라가 패전했다면 이는 조선

이 이겼다는 말이다. 패전한 한나라가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설치했겠는가 ? 실로 한사군 전

쟁의 승리자는 조선족이었으니, 위만조선도 망하고 위만 정권의 통치를 받던 조선족 원주민의

승리 였다.

또 조선이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았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우거 정권 곧 위만조선이 조

선족의 구데타로 무너진 뒤 그곳에 설치된 4 군은 옛 위만조선의 땅을 한나라 사람이 다스리

는 사군이 아니라 조선 사람 참· 최 · 음· 협이라는네사람의 평주 · 해청 · 추저 · 날양이라는

4 군, 곧 조선 4 군이었다. 그 위치를 《사기》는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사기는「遂定朝鮮爲 四郡」(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四군이 되었다) 라고 하

며 평주 · 해청 · 추저 · 날양의 사군을 소개 했고, 이 사군의 행정 통치 책임자들을 조선족인

최 · 음 · 참 · 협의 네 사람 이라고 했다. 또 그 4 군의 위치를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

라 했다. 어디를 보아도 낙랑 · 현도 · 임둔 · 진번의 한사군 이름은 없고 한반도라는 지명도

안 나온다.

도대체 지금까지 한사군을 떠들던 일본 식민사학자나 그 신봉자들은 무슨 도깨비에흘렸기에

원문에도없는 한사군의 이름을 들먹였단말인가 ? 게다가 자기 이론에 맞지 않는다고 25 사가

틀렸다는 망발을 하는 사학자까지 있으니 기막힌 일이다. 이것이 한국사학의 현주소인 것이

다.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그땅이 네 개로 갈려서 평주· 추저 · 혜청 · 날양이라는 조선 4 군이 되

고 그 땅이 발해 연안 ~ 산동반도라는 명문이 있다면, 고조선 곧 위만조선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고 중국 하북성 ~ 산동반도였음이 분명해졌다고 보겠다.또 본서에서도 왕검성을 하북성의

창려昌黎라고 했으며 《명일통지明 一統志、》에도「朝鮮城在永平 府境內」라고 했으니, 「조선성

이 영평부 곧 북평(북경 )경내에 있다 } 는 이 기록도 잘못이라 할 것인가 ? 현재의 중국 지

도에도 조선성(혹은 고려영이라고도 했음 )이 북평 북쪽에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반도사관의 넋두리나 미련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현존하는 지도에도 창려나 고려영 · 조

선성이 있거늘 이를 평양이라 우길 수는 없는 것이다. 사마천은 바로 한 무제의 신하요, 한사

군전쟁때 그 전쟁의 자초지종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그가 적은 글이 《사기》115 권의 한사

군전쟁 기록인 《조선열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일차 사료인 원전에 반대할 학자는

있을 수 없다. 이른바 《무릉서武陵書》라는 책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적은책이라는데 그는 한

사군전쟁 이전 10 년에 죽은 자 이다. 그가 한사군의 위치를 장안 長安으로부터 5,000~6,000

리 떨어져 있다고 적었다고 중국의 주해자들이 말하는데, 이를 믿고 요사이에도 「무릉서에 따

르면」「무릉 서의 이수里數에 따르면」을 앞세우며 한사군을 반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학자들이

많다. 실로 웃기는 이야기다. 사마상여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거나 도깨비였던가 ?

자기가 죽은 지 10 년 만에·한사군전쟁이 일어나고, 사군이 설치되고, 그 위치는 한 반도의

어디 어디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단 말인가 ?

다시금 말하거니와 이 모든 모순과 논리 부재가 반도사관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일

뿐, 우리의 고대사는 결코 한반도가 그 대상 강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고조선이나 단

군조선 고대사가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사서삼경이나 25 사 등에<조선>의

기사는 없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황해 바다 건너에 한반도가 있었다는 지리 지식도 없

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심지어 만리 장성 북쪽의 만주 대륙의 지리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물의

역사를 적은 《수경》의 상흠도 만주의 물을 취급하지 않았으며, 장성 이남의 물의 경로만을 다

뤘던 것이다. 수경에<요하>가 나오지만그것도 만주의 요하가 아니고 장성 이남의 물인 요하인

것이다. 만주의 요하는 요나라 (917~1,125)가 건국한 뒤에 요의 국호를 따서 요하라 고 했을

뿐, 그전에는 구려하 · 아려하 · 양하로 불리웠다. 요하라는 강 이름이 생긴 이후 요하의 동쪽

이라는 뜻에서, 또 요하 서쪽이라는 뜻에서 요서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이를 종래엔 잘못

알고 요동 ~ 요서를 만주 요하의 동쪽 ~ 서쪽으로만 알고 있으니, 이러한 인식도 식자의 가슴

을 아프게 하는 사항의 하나이다.

<근대사 ~ 현대>의 안경을 끼고 고대사를 관조하는 나쁜 습관을 버려야한다. 반도사관의 피해

만큼이나 큰 또 하나의 잘못이 바로 만주 요동의 관념이다. 확실히 현재 요하 · 요동반도는

남만주에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저 상고사의 요동 혹은 요서가 이곳이었다고 생각함은 잘

못이다. 고구려 건국 당시엔 현재의 요하를 구려하라 불렀고 고구려 이전에는 아리하 또는 압

록수라고 볼렸으니, 이러한 물이 고구려 멸망 뒤에는<구려하→요하>라는 변천 개명의 길을 걷

고, 그 요하의 동쪽을<요동>그요하의 서쪽을<요서>라부르는새로운지명 호칭이 생겼던 것이다.

이는 자연히<고구려→발해→요>라는 국명의 릴레이에 따르는 지명 · 수명의 릴레이에 불과 한

것이다. 오늘날 문교부의 국사 편찬 당국자들도 현재의 요동 · 요서 · 요하의 관 념만을 고집

하는듯하니 실로안타깝다. 사실 최초의 요하·요동·요수는 산서성에 있었으니, 지금의 지도에도

산서성 남단에<요>라는지명이 있어 저 옛날의 요동·요수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예가 필요할 것도 없겠다. 현재의 국토도 결코<삼천리반도>가아니며<한반도>

라는 말이 한국 강역의 대명사가 아님은 앞에서 말한 바티칸의 1924 년도의 지도까지도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까 !

일 만년의 역사 대국

단군은 결코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될 수 없다. 단군은 단군조선(흙은 고조선 )의 시조일 뿐이다

우리의 국사는 세계에 유일하게<하느님 나라>로부터 출발된 국사를 가진 나라이다. 곧 《삼국

유사》<고기古記 > 가 말하는 「석유한국 昔有桓國」 이 그것을 입증한다. 사족이지만 여기서

桓의 발음은<한>이라 읽어야 한다는 점을 특기코자 한다 결코<환>이 아님을 밝힘과 동시에

광명족光明族이란뜻에서 환(광명 )이라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으며, 차라리 우리

민족사의 종심을 흐르는 종교 의식이 제천祭天 임을 감안해서 한桓 은 곧<하늘> 의 준말이므

로<한>으로 읽음이 정곡이요, 정통이라고 특별히 강조하는 바이다.

대종교에서 개천 4425 년에 펴낸 《역해신리대전》 신위에 의하면 「신자는 한임桓因 과 한웅桓

雄과 한검桓檢 이시니」라 있고, 그 주에 「桓의 음은 한이요 因의 음은 임이라. 고어에 천왈한

天曰桓이니」라고 했다. 곧 桓은 한으로 因은 임으로 곧<한임>이라 읽을지며, 합하여 한임은

천부天父이다」라고 해설하였다.

선리대전이 桓을 한으로 읽으라는 주해를 단 이유는 하늘을 한이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분명히 한은 하늘과 유관한 이름이며, 결코 밝음,광명을 뜻하는 환으로 읽어선 안될

일이다. 시중엔 벌써 《환단고기》라는 번역판도 나와 있음 을 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책명

임을 밝혀둔다. 항차 하느님이라는 우리의 고유신칭神稱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혼용

되는 현실을 앞에 놓고 하느님, 곧 천부를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하는 우리의 민족적 긍지를

높이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하늘+님> 의 합성어로 된 순수한 우리의

신칭이다. 따라서 석유한국昔有桓國의 한국은 곧<하느님 나라>이다. 단군이 민족사의 시조가

아니라 함은 하느님 나라 곧 한국의 3,301 년과 한웅의 신시조선 1,565년, 합 4,866 년의 역

사가 흐른 다음에 하느님의 피를 받고 감님(지신)의 몸을 입으신 지신地신이신 단군이 태어나

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년(서기 1986 년 )은

한기桓紀 9,183 년 (4319+1565+3301-2)이요

개천開天 5,883 년 (4319+1,565-1)이요

단기檀紀 4,319 년 (1986 + 2333)이다.

이 책 《한단고기》는 단군 이전의 역사를 서술한 기록으로 값진 것이다. 한국3,301 년과 신시

개천 1,565 년, 합계 4,865 년의 기록이 민족사에서 외면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단군을 교

주로 모시는 대종교는 금년 1,986 을 4,443이라고 한다. 즉 단기 4319 년에 124 년을 가산시

켜 개천 원년으로 하고 있다. 124 년이라고 하는 숫자는 한웅 18 세1,565년을 대신한 근거없

는 숫자이다 말파자면 한웅 125 년 에 단군이 즉위하였다고 신시개천을 겨우 124 년이라 보

는 것이다. 가장 한국사를 지키고 수호해야 할 대종교가 앞장 서서 한웅 연대를 삭감하고 있

다.

한웅 18 세 임금 가운데 124 년간 재위한 분은 없다. 어느 한웅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수수께끼의 124 년의 근거는 저 《신단실기》의 저자 김교헌에 의한다고 하는데 틀린 연대이면

대종교는 당연히 정정해야지 어째서 이 개천 기원을 틀리게 사용하는지 알 수 없다. 단군에

대한 오류가 아니면 한국사가 어찌 되건 상관없단 뜻인가 ? 매우 불쾌하다. 분명히 말하노니

금년 1,986 년은 개천 5,883 년 (4319+1,565-1)인 것을 명심하라. 실로 우리 민족은 9,182

년의 역사 대국으로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는 국가이다.

한단고기의 가치

단군이전 4,865 년간의<한국→한웅>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많은 이견에 봉착함은 사실

이다. 우선, 이런 이견들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단군이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도 많은 마찰과 방해가 있거늘 그 이전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도

리어 단군 역사 연구에도 나쁜 영향이나 역작용을 자초시키는 결과를 몰고 온다는 것이다. 둘

째, 단군조선 (= 고조선) 의 전거가 고작 삼국유사의 「위서운魏書云 ---」이 말하는 「乃往二千

載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朝鮮與高同時」의 24 자가 전부이나, 이 기록은 중국 25 사의

하나인 《위서》에 있는 기록이라는 뜻에서 중요시 되지만, 《한단고기》,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의 기록에 아무리 한임 한웅의 기사가 풍부하다해도《위서》와같은 정사

正史의 기록이 아니므로 사료로서 객관적 신빙성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선의의 충고요, 주장이지만 문제의 한 측면만을 지적하는 견해라고 생각하는 바

다. 한단고기 ·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에 결격 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유

만이라면 이들 사서를 배척할 이유로는 충분치 않다고 본다.

원래 중국 정사가 이들 사서의 이름을 들먹거릴 이유나 당위성은 없는 것이니까, 25 사에 실

린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25 사에 없는 기록만을 집대성한 책이라면 경계를 요한다 하

겠으나, 그렇지도 않은데 기왕에 알려지지 않은 사서라고해서 특히 우리의 조상이 쓴 글이라

고 해서 외면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명분상 승복할 수 없다.그렇다고해서 25사나 삼국사기· 삼

국유사등이 우리의 상고사를 전부 언급하는 서적도 아닌 바에야 국내 사서라는 이유로 이를

경시해야 한다는 다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없지 않다. 또 종래의 사서들이 천편일률

적으로 단군 이후의 역사만을 강조하는데 비해 한단고기는 단군 이전의 역사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조선조의 세조 · 예종 · 성종 등이 8 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전래의 희귀서들을 거두어 들이라

는 구서령求書令을 내렸는데 그 서목들을 보니 《한단고기》의 안함로 · 원동중이 쓴 《삼성기》

와 《규원사화》의 인용 문헌인 《조대기朝代記》 등이 들어 있음을 보고 새삼 놀랬다· 이 수집

목록에 실린 서목의 숫자만 해도 20 여종에 이르러 성종실록의 간행 연대인 1,499 년에만도,

지금으로부터 500 년 전인데, 이토록 많은 사서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기운古記云 …」에는 어떤 아마추어의 눈으로 봐도 한국시대 · 신시개천시대. 단군시대의 3

단계 기사로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한국+신시>의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고단군 기사는 제일

간략하게 압축되어있다.그런데 일반은 반대로 이기사를 오직 단군 신화의 기록 즉, 곰의 기사

로만 해석하고 있으니 안타깝다.이미 우리 정사에 보이는 한국+신시의 기사는 전혀 외면하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단고기》는 단군 전사의 값진 기록으로서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첫째, 반도사관에 찌든 현대 사학에 올바른 역사 강역을 제시해 주었다.

吾桓 建國 最古 有一神 在斯白力之天 (<삼성기 전> 상편의 시작 부분에서 )

( 우리 한의 나라 세움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한 분의 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었나니……)

여기 사백력은 곧 시베리아이며 필자에게 놀라움을 준 가장 큰 충격의 이름이기도 하다. 솔직

히 고백컨대 사백력이 시베리아인 줄은 미처 볼랐고 또 시베리아가 한국의 역사 강역으로 등

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대륙사관에 철저하여 반도사관을

나무라는 입장의 역사관을 갖고 있는 필자에게 있어서 이는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로 한국 12 연방에 보이는 수밀이의 놀라움이다. 물론 수밀이는 슈메르 Sumer 를 뜻한

다. 현대의 중국 사서에는 소말蘇末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현재 인류의 과학문명이 인정하

는 가장 오래된 민족, 최고最古의 문화를 이룬 슈메르 민족이라 하며, 저 이스라엘의 히브리

민족보다 앞선 문명족으로 서양학계에 소개되어 있다. 이른바<슈메르 문제> 라는 연구 과제로

고대사 학자에게 소개되는 신비한 민중이 슈메르인데, 그 슈메르조차 한국 12 연방의 하나라

는 사실이다. 또 동양 고전이나 25 사에선 우리를 구이 九夷 라고 하여 동이의 갈래를 9 지

파支派로 보는데, 여기서는 12 연방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째,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한국桓國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 제기이다. 여와는

태호복희의 누이다. 그녀는 흙을 빚어 7 일 만에 사람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었다고 하였다.

<여와>라는 이름마저<여호와>와 거의 일치한다.

女와者練土造像而注之塊七日而成焉

( 여와는 흙을 빚어 사람의 형상을 만듣고 이에 혼을 불어 넣어 이레 만에 사람 을 만들었다.

)

성경의 근거 문헌이 동방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짙게 한다. 네째, 건원칭제

建元稱帝의 새로운 명칭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례로<태백일사>의 고구려 본기

에 실린 제왕 명칭과 연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한자는 본문에서 참고하길 바람 ) ( 연대는 기존의 한국사에서 통용된 것임 )

제 황 명

기존의 왕명

연호

연 대

고주몽 성제

1대 동명왕

다물

B.C 37~19

태조 무열제

6대 태조왕

융무

A.D 53~146

광개토 경호태열제

19대 광개토왕

영락

A.D 391~412

장수 홍제호태열제

20대 장수왕

건흥

A.D 412~491

문자호 태열제

21대 문자왕

명치

A.D 491~510

평강상 호태열제

25대 평원왕

대덕

A.D 559~590

영양 무원호태열제

26대 영양왕

홍무

A.D 590~618

보장제

28대 보장왕

개화

A.D 642~668

한단고기에 나오는 고구려 ~ 고려 왕조의 제황 칭호나 연호만 보아도 우리나라는 적어도 삼국

시대나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 건원칭제를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김부식 이

후의 역대 사가들이 사대사상에 입각하여 우리의 역사를 모두 제후국의 역사로 변조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른바 일본의 나라현 이시까미 신사에 봉안된 칠지도七枝刀의 명문에 보이는

「泰和四年」운운의 기록도 일본인들은 동진의 태화 (366~371)4 년(369 년 )으로 해석하거니와,

백제의 고이왕 (234~ 286)17 년 (250 년) 신공여왕의 야마다이국을 쳐부수고 그 땅에 종친들

을 파견하여 부여씨의 왜국을 건설하고 그 발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이 칼을 하사한 것이니,

칼의 명문 속의 태화 4 년은 백제 고이왕의 연호로서 AD237 년을 뜻한다. 칠지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O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O七枝刀

O벽百兵宜供供侯王OOOO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O世O 生聖晋 故爲倭王 O造 傳 O O 世」

( 태화 4 년 (A D 237) O월 16 일 병오 백련검 칠지도를 만들다. 마땅히 모든 제후 · 왕과

각군에 공급하여 비치케 할지어다. 선세 이래 이런 칼은 없었으며 백제 O세 O께서 성진을 낳

으시매 왜왕(지)을 위하여 이 칼을 만드노니 후세에 영세토록 전할지어다.)

백제가 제후국에 하사한 칼에 중국 진나라의 연호를 썼으리라 생각함은 망발이다. 당시 백제

고이왕의 연호가 태화였다. 태화의 연호를 삼국사기 등에서 찾지 못하자 엉뚱하게 동진의 연

호 태화를 골라 내는 궁상을 보라. 오늘 우리나라의 사학은 일본의 이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

이고 있다. 실로 가관이 아닌가 ? 태백일사에 나오는 고구려의 연호틀이 언제인가는 파사현정

破 邪顯正의 절대적 역할을 할 때가 있으리라 본다. 가령 융무 · 건흥 · 명치의 명문이 들어

있는 출토품이 나온 다는 것을 가상해 보라. 융무를 명나라의 융무 (1,645 년 )라고 하며, 건

흥을 성한의 건흥 (304~305 년 )이라 하고, 명치를 일본의 명치유신시대라고 망발하는 자 없

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 백제가 왕후장상을 거느린 건원칭제의 나라이기에 왜왕에게

칠지도까지 하사했거늘, 고이왕이 동진의 태화 연호를 차용해서 썼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

적어도 신라 무열왕의 태화 (647~650)라는 연호로 비정해 보는 자기 주창이라도 있어야 마땅

치 않을까 ?

식민사학의 거두인 두계 이병도 박사도 이 칠지도의 「태화 4 년」만은 백제 연호일 것라고 했

다. 그래서 3 세기 중엽의 백제가 많은 제후를 거느린 일대 제국이었다는 사실에 승복했다.

생각하면 기막히는 일이다. 스스로를 과장하는 정도가 지나쳐서 지탄을 받는 일은 있어도 자

학이나 자폄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말은 좀 체로 상상키조차 어려운 현상인 것이다.《한단고기》

에 다행히 고구려 고려조의 건원칭제 사실을 숨김없이 기술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기왕에 신라 백제의 건원칭제 진상도 밝혔더라면, 그래서 저 칠지도의 태화 4 년의

수수께끼도 풀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아뭏든《한단고기》의이런 기술 태도는 삼국사기 이래의 사대 사서 때문에 생겨난 천고의 한을

풀어 주는한가닥 청량제 구실을하는것이다.

천민 심훈의 정수

이스라엘은 자칭 선민選民이라 한다. 우리는 천민天民이다. 천민이란 말은 공연한 수사학적

찬사가 아니라 실제로 하늘 백성이란 뜻이다. 《한단고기》는 천민인 우리가 마음에 새겨 들어

야 할 교훈으로 가득 찬 명실상부한 천민심서天民心書이거나 천민심훈天民心訓이라 함이 옳

을 것이다.

《한단고기》의 번역은 한문 실력의 우열로 성패가 좌우될 그런 고전이 아니다.과연 이 천민의

심훈을 어느 정도 소화·이해하느냐가 한문 실력의 우열에 앞서 가늠되어야 할 문제이다. 실례

로 81 자의 천부경을 해석하는데 한문 실력의 우열 따위는 결코 문제 밖의 일이며, 동양철학

이나 역학易學, 주역周易 및 수리數理 지식이 결정적 요소가 된다. 따라서 천부경의 소중함을

목마르게 강조하는 학인은 쉽게 볼 수 있으나, 천부경을 시원스레 풀어 해설하는 천하의 명인

名人은 아직 구경하질 못했다.

민족의 3 대 경전의 하나라고 추켜세우는 《천부경, 민족의 뿌리》라는 단행본을 쓴 C 씨의 글

을 보아도 천부경이 뿌리가 될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물론 나의 천박한 지

식 때문일 것이라는 자책을 앞세워 성급하게 내린 결론일지 모른다. 81 자를 어떤 주술적인

글귀라고 정의하기 전에는 도출될 수 없 는 결론이라고 본다. 물론 주술적인 주문을 학문의

영역에서 논한다 하여 그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신념이 천박한 오판인지 몰라

도, 학문의 상도常道에서 떠난 연구 업적은 여기서 굳이 해명할 계제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

다.

천민의 논리는 엄연히 그것과 궤를 달리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 상술한 대로 천민은 결코

꾸민 말도 아니며,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다. 우리 역사의 전개 과정이 곧 천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위의 81 자의 천부경 해설에는 이를<민족의 뿌리>라고까지 승화시킬

실력이나 자신이 없었음을 고백해 둔다.

그것에 관심 있는 독자는 C 씨의《천부경, 민족의 뿌리》나 S 씨의《한민족의 뿌리 사상》등 전

문 서적을 별도로 참고하기 바란다.

민족의 3 대 경전을<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이라고 누가 정의했는지 모르나 이들 전문

서적들을 탐독함이 좋을 것이다. 필자는 한단고기에 있는 고대사와 삼일신고 및 천부경 참전

계경의 기사가 아직 난해하고 충분히 이해되진 못했으나 우리 천민들의 좌우명으로서 마음에

새겨둘 가르침이 된다는 결론으로 여기 천민심훈의 글을 쓰는 것이다.

흔히 위대한 종교는 방대한 교리와 복잡한 신학 체계가 구성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팔만대장

경이나 신 · 구약 성경이나 366 사事 따위 경전의 금기사항이 불교 · 기독교 · 민족종교의 정

수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데에 종교의 참된 존재 양식

이 있다. 불교 경전의 엄청난 바다속에 숨겨진 불교의 정수를 찾아 헤매는 것이 불교라는 종

교라면 애초에 종교인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기독교 · 도교 · 민족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리는 종교에 없어선 안되겠지만 필요악적 존재인 것이다.

이제 천민의 단순논리를 설명한다. 즉 《예기禮記 》<왕제편>에 말한 천민은 인민人民을 가리

킨 말이요, 《맹자孟》<진심장>에 말한 천민은 이윤伊尹강태공姜太公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가

리킨 수사학적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천민天民은 천신(하느님)의 피를 받은 천신의

자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리가 이 이상 더 단순할 순 없다. 황소의 자식은 송아지이고 황소

나 송아지는 다 소이다. 사람의 자식은 사람이요 소의 자식은 소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

식은 하느님이다.<한임→한웅→단군>의 흐름은 조부자祖父子의 흐름이요, 하느님의 피의 흐름

이다.<단군→우리>의 흐름 역시 하느님의 피의 흐름이다. 따라서 한임이 하느님의 표기라면

한임의 피, 곧 천신의 피는 나에게도 유전되어, 우리가 곧 천민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피를 유전 받은 우리가 또한 하느님 백성인 천민이라면 하느님 마냥 우리도

초자연적이고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볼능無所不能한 존재인가 ? 현실은 그렇지 않고 지극히

자연적이고 시간 ·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지극히 무력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 만일

우리도 하느님처럼 초자연적이고 무소불능 무소부재하다면 우리가 천민이라는 믿음도 더욱 클

것이요, 사실 민족종교라는 종교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한 이

유가 무엇일까 ? 이를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해 본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의<고기운>의 기

록을 보면,

「昔有桓國 庶子桓雄〔- - -〕熊女者 願有? 雄乃假化而婚之 ?生子 ?曰檀君王儉」 이라는 기록

이 있다. 여기 한국은 하느님의 나라이고, 한웅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하느님이시고, 웅녀는 하

느님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으신 어머니이다. 결국 단군은 지신이신 웅녀의 몸을 빌어 하느님

의 피를 이어 태어난 지신신종地身神種의 하느님이다. 육신으로 태어난 하느님이기 때문에 육

욕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무소불능 · 무소부재 · 초자연의 신격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하고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인간(단군)의 제약성은 바로 도성인신道成

人身 육체의 영화靈化 또는 영화 육체 肉體· 육체의 완성을 목표로 우리가 종교생활 수도생활

을 해야 할 참된 이유인 것이요, 민족종교의 존재 이유 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누구에

게나 신아(신인 나 )와 육아(육신의 나 )의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에 민족종교의 기능은

육아를 억제하고 그 안에 내재하는 신아를 최대한으로 현현시키는 일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종교적 경지를 영화육체 · 육체의 완성이라는 말로 불러 왔다. 실로 아름답고 경이로

운 낱말이다. 영으로 화한 육체! 육체의 영화란 육계와 영계의 통일을 뜻하는 아주 차원 높은

경지를 말한다. 하느님의 피를 이어 받아 하느님이 된 우리들 천민들도 이러한 육체의 영화를

경험하는 구도자의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천민의 권능을 발휘치 못할 것이다.

여름철 나무 가지에 매달려 시원한 소리를 들려주는 매미는 유충으로부터 성충 까지 장장

7~8 년간의 생애를 살아 간다. 유충 기간이 무려 6~7 년간인데 땅속에 공도空道를 만들고 살

다가 7 년 만에 하늘을 날고 시원한 소리를 내는 매미로 변신 한다. 매미의 피를 받았다고 다

매미가 되지 못하고 7 년간의 유충생활의 여하가 매미가 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

한 시련기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피를 받아 태어난 것은 사실이나 하느님의 권능을 다 할 수

있으려면 영화육체의 완성이라는 선仙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매미의 성충이 될 적에 유충은 껍질을 벗는다. 이를 탈피각脫皮殼이라 한다. 이 껍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매미의 생애는 지옥과 천당에 견줄만한 변화와 현격한 세계의 차이가 전개된다.

그리이스의 호머는 「매미는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며, 몸안에 흐르는 피도 없

으니 바로 신神인가 하노라」고 찬양했다. 중국에서는 이슬만 마시고 물질을 먹지 않는 매미를

청고한 선비에 비유한다. 이런 매미도 7 년간의 유충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하고,

매미가 되는 특별한 고행이 앞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풍탱이 똥벌레 때 기억 못

한다」는 속담도 있다. 똥벌레에서 풍뎅이 되는 과정도 매미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단군의 탄생에 있어 가장 엄청난 오해가 있으니 이른바 웅녀를 암콤이라는 짐승으로

해석하는 곰처럼 미련한 해석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단군의 기사가 쓰여지던 때는 한글이라

는 표현 수단이 없을 때다. 때문에 웅녀라는 한자를 뜻글자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곰녀라는

소리글자로 읽어야 하는데,곰이라는 말은 우리의 고대어에서 천신의 대對가 되는 지신地神을

뜻하는 말이었다. 곰이라는 발음을 표기할 방법을 찾던 고대인이 곰 웅熊자를 발견하여 사용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고대 이두 표기이다. 비슷한 예는 고전에 아주 많다. 삼국 사기에

「異斯今 一曰苔宗」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어에서 이끼(苔)를 이사異斯 또 는 잇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대문시장 부근의 지명을 赤峴· 붉고개라 했는데 배오개의 어

원이 붉고개· 赤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배달민족의 배달이 밝달에서 온 말

인데, 밝달의 발음을 표기하는 이두법으로 박달나무 檀을 썼으니, 단군이란 말이 바로<밝달의

임금>(달은 땅의 옛말,밝달은 밝은땅을 뜻한다.)을 말하는 것이다. 배달민족의 배달이란 발음

을 檀(박달나무)으로 표 기했던 고대의 이두법을 잊어서는 안된다.

<밝→배>의 변화 실례는 白川온천을 배천온천이라 하고, 밝고개(赤峴)가 배오개(동대문시장을

배오개시장이라 하는데 赤峴에서 비롯된 말이다 )로 발음되는 데서<밝→배>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토록 한자의 뜻을 취하여 발음으로 사용한 예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흔하고 많았다.

상술한 대로 배달이란 말도 옛날엔 檀으로 표기했는데 조선조 말 기에는 이를 배달임검이라

쓰기 시작했으니, 檀→倍達의 변화야말로 우리 이두의 변천사이다. 한편 지신을 곰이라 발음

했으리라는 방증도 허다하다. 우리 민족에 의해 개척되다시피 했던 일본 민족이기 때문에 저

들은 신을 아직도<가미>라 발음하고 있으며, 아이누 말로도 신이 가뮈로 발음된다. 배달왕검

의 검이나<영검(신령)하다>의 겁이나, 검줄(神索 )의 검이나 제단 앞에 까는 흙을 검토라 읽으

며 神土라 적는 이유는 아직도 神을 검이라 읽는 발음이 우리 말에 남아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정도의 연구도 거치지 않고 웅녀를 암콤이라고 해석하는 곰처럼 미련스런 학

자가 어디 있겠는가 ?

마침 후한의 채옹 (133~192)은 그의《독단獨斷》에서 한국의 고전을 읽어 본 듯한 기록을 하였

다. 곧 천자라는 말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는데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천자(하늘의 아들 )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天子之? 始於東夷 父天母地 故曰天子

채옹이야말로 고기古記 의 기록을 읽은 듯하다. 한桓과 곰은 천지天地의 대칭이요, 웅녀는 바

로 남녀의 대칭을 이룬다. 실로 우리에겐 삼신신앙이 있다. 천신 · 지신 · 인신人身에 관한 신

앙이다. 따라서 곰소동은 이제 한국 사학에서 종식되어야 마땅하다. 곰타령의 밑바닥에 자신

을 비하 자학하는 패배주의적 조국관이 짙게 깔려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천신(=하느님)· 지신(= 곰님)보다도 더 중요하고 값진 인식은 인신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으

로도 단군의 위치가 크게 반영되는 이유도 바로 그가 곧 인신이요, 우리 모두가 또 그의 후손

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내가 신이다>하는 자각 때문에, 종래의 종교 신앙생활에

서는 참람하고 건방지고 언어도단이라고 여겼던 신앙인 것이다. 내가 곧 하느님이라니 별 망

칙스런 말도 다 듣는다고,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라도 듣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

를 이끌고 온 민족 신앙의 역사가 인신의 역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민족종교의

신앙에 대한 외경심을 더욱 돈독히 할 뿐이다.

한편 우리의 민족종교를 일부에서 선교 仙敎라 명명하는 경위를 밝히려 한다. 또 대종교에서

저들의 종교 의식을 단儀式이라 적고<선의식>이라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코자 한다. 자고

로 우리의 삼신에 대한 고유 신칭이 있었다. 한· 곰 · 선이 그것이다. 한은 하느님 · 천신이요,

곰은 지신이요, 선은 인신에 대한 고 유 신칭이다. 그런데<선>은 바로 단군에 해당하는 신칭

인데, 단군을 단군이라 부르는 것은 이론상 잘못된 것 같다. 곧<선군>이라거나<선님>으로 부

름이 마땅하다. 여기서 한가지 똑똑히 알아야 될 중요한 사항은 檀에 대해<단>의 발음만 있

는 것이아니라<선>의 발음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곧<시전절時戰切>의 반절음 표시가 각

종 옥편에 있으니, 시전절은<ㅅ+언>으로 읽어<선>으로 읽히는 것이 다. 우리가 지신이신 곰님

을 잊고 살았던 것파 꼭 마찬가지로 인신의 호칭인<선> 역시 잊고 살았던 것이다.

한편 單 ·? ·?· 端·團·?·壇등도 모두<선>이라고 읽힌다.그런데우리 선인들은 이<선>을 한자를

빌어 仙 · 禪 · 先으로 적었으니, 전기한 선교 仙敎도 그러한 맥락에서 발견된다. 대종교의<선

의식>도 그런 경로를 거쳐 생긴 말임에 틀림없다.

인류사상 최초의 선님이신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저들의 종교의식을 선의식이라 부름은

당연하다 하겠다. 다만 왜 이렇게 부르게 되었는지 그 경위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

제일 것이다. 단군의 참이름이 선군임도 모르고 있는 대종교의 민족신앙의 계보에 대한 무지

가 문제인 것이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것 처럼 신시개천시대를 아무 근거조차 없는 124 년으

로 잡아<단기+124= 개천기원>이라고 한 역사의식이 더욱 문제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 저 수운선생의 유명한 인내천사상을 꼬집는 여러가지 논설을 펴고 있는 논문을 접한 적

이 있다.<사람이 곧 신>이라면 종교 행위(꿇어 업드려 절하는것)도 불필요하지 않은가, 자기를

숭배한다는 것을 종교라고 할 수 없다는 등의 억설을 내 세우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피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다. 물론 누구나 다 하느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매미의 피를 받았

으면 당연히 모두 매미일 것이 나, 7 년간의 유충생활을 거쳐 그 시련을 이긴 매미만이 매미

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이 되려면 육아를 이기는 자기 수련이 있어야 신아인 하느

님으로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 종교의 정수이다. 하느님으로의 가능성은 모두 갖고 태어나지

만, 그 어려운 구도자의 관문을 뚫고 성선成仙·영화육체를 완성하는 한국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한국사에서 우리의 민종종교와 유관한 이름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단군세기 13 세 흘달제 20 년조에 보이는 천지화랑으로부터 신라의 화랑 및 고려조 충렬왕

때의 선랑 · 국선의 기사, 고려의 팔관행사 등은 직접 한국 종교의 맥락이다. 또 마한의 소도,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구려의 한맹 등은 한국종교의 뿌리라 볼 수 있다. 다음의 두 기

사는 화랑 기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사 이니, 꼭 유의함이 펼요하다. 즉 《단군세

기》와 《고려사》의 합주이다.

무술 20 년 (BC 1,763)에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들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 이라고 볼렀다.(단군세기의 13 세단군

흘달조)

민적은 자가 악전樂全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생김새가 비범했다. 외조부 유천우가 보고 기특히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이모부인 고상(옛 재상 )

김군이 그 말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고려국의 풍습에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 글

을 익혔는데, 얼굴과 머리털이 아름 다우면 승려와 신도들이 모두 다 이를 받들어 선랑이라

불렀으며, 모인 무리가 흑 1,000 도 100 도 되었다. 이런 풍속은 저 신라로부터 일어난 것이

다. 민적이 나이 열 살에 송사에 나아가 배웠는데 성품이 뛰어나서 글을 받으면 곧 그 뜻을

깨우쳤다. 눈썹이그림 같고 자태가 뛰어나게 우아하여 보는 자는 모두 사랑하였다.충렬왕

(127j~1305)이 이 말을 듣고 궁중에 불러 보고 국선으로 지목했다.

화랑은 선랑 · 국선의 이름이다. 이 두 사료만으로도 무려 3000 여 년 (B C 1,763 +A D

1,305 )역사동안 끊임없이 전개된 멋을 알 수 있다. 말하자변 3,000 년 역사의 한가운 데를

꿰뚫은 정신이다.

한국사는 바로 그 민족종교인 선교의 역사이다. 이 종교가 기성종교와 다르다고 트집잡을 것

이 아니라 도리어 기성종교가 선교와 다름을 깨닫고 주체성을 회복하여 한국 종교를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 곧 서구 문화가 판을 치는 현실속에서 삼국시대 이전을 무속종교시대, 삼

국시대 ~ 통일신라 ~ 고려 때까지를 불교시대, 조선왕조시대를 유교국가시대, 그리고 지금을

준기독교 문화국이라고 멋대로 정의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방자한 말씨같다.

기독교 아니면 모두 무속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저들의 견해대로라면 한국은 외래종교의 쓰

레기통이다.

그러나 9,182 년이라는 근 만년의 역사를 달려온 역사 대국에 제나름의 민족종교가 없이 외

래종교의 쓰레기통이 될 수 있는가 ? 한국사는 색깔도 성격도 없는 역사라고보는가 ? 결코

그럴 수 없다고본다. 도리어 외래종교가 한국 역사와 문화·종교 속에 들어와 용광로처럼 용해

되어 새로운 종교로 둔갑했던 것이다. 잡다한 외래 종교를 용해·융합시키는 과정에서 우리의

민족종교도 많은 변질과 변화를 초래하였을 터이다. 그래서 선교 즉선敎라는 명칭도 仙敎→道

敎로 바뀌는 횡액을 겪기도 했던 것이다. 최치원이 지적하는 대로「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에는 도교적 요소도 있고, 유교적 요소도 있고, 불교적 요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의<난랑비 서문>은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며, 그 길은 유교와 도교

와 불교의 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천하불후의 금석같은 말을 비문으로 남겼다. 옳다 !

나는 하느님 나라로부터 시작된 겨레의 역사를 간직한 민족은 우리뿐이라 단언하며,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뭉개버리고 단군만을 메마르게 찾는 이 나라의

비뜰어진 역사관을 비웃는다.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이란 말도 잘못된 것이다. 단군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이 가

이홍익인간可 以 弘益人間이라 선포하셨거늘, 어느 단군예찬론자가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

대는가 ? 개천의 주인공은 한웅이다. 개천절 날 단군을 기념하면서 한웅은 들먹이지 않는 오

늘의 비뚤어진 국경일 행사도 문제이다. 기독교가 아니면 모두 미신이요 무속이며 야만인의

종교신앙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독선! 언제 이 땅의 옳은 정통이 바로 자리를 굳힐까 ?

단군 전사前史 에 혹하여 《한단고기》의 국역을 시도해 본 필자로서는 한국종교의 심오한 교리

에는 아직 유치원생이라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강호제현의 질타를 앉아 기다리기

로 한다 하느님의 나라로 시작된 우리 역사의 지향목표는 또다시 이 땅에 우리가 건설하는 하

느님의 나라이다. 주기도문의 한귀절이 말 하듯,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사이다. 9,183 년의 무서운 조국사 앞에 합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