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국학(國學) 자료

환단고기(桓檀古記) - 김호형

양해천 2018. 1. 29. 17:08

환단고기-김호영-신교출판사.pdf


환단고기(桓檀古記)

(계연수 필사본 영인본)

안함로, 원동중, 이암, 범장, 이맥 편찬

계연수 합본, 이기 감수

김호영 해석

신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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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序文)

고대로부터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우리의 역사책에는 고유종교, 환국, 배달

국, 단군조선국, 부여와 삼한,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와 가야, 통일신라와 대진국

(발해), 고려, 조선의 왕조사, 전쟁과 외교, 혈족과 가계의 형성, 중앙 및 지방제

도, 법률과 규범, 백성들의 생활상, 의식주의 변천, 과학기술, 학문의 발전, 문화

문명예술, 지리, 풍속 등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기존의 우리 역사학자들은 서양학자들의 구분법에 따라 우리 역사를 고대사,

중세사, 근세사, 근대사, 현대사로 구분하고 우리의 삼국시대를 고대사로, 고려를

중세사로, 조선을 근세사로, 대한제국과 일제시대를 근대사로, 해방 이후의 시대

를 현대사로 구분하였다. 여기에 최근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우리 단군조

선의 역사를 상고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과거 우리 역사에 단군조선을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

만 단군조선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실존한 역사라는 사실이 실

증되고 있다. 그리고 2010년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일본은 기존에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 또는 남선경영론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태고사, 상고사. 중고사, 고대사, 중대사, 중세사,

근세사, 근대사, 현대사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태고사에는 삼신과

상제의 역사가 포함되어야 하고, 우리의 상고사에는 환국의 역사가, 중고사에는

배달국의 역사가, 고대사에는 단군조선국(진국과 진한, 달지국과 모한(마한), 번

한(아유타국 존재), 이후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의 역사가, 중대사에는 부여와

후기 삼한, 신라(사로), 고구려, 백제, 가야(대가락), 통일신라와 대진국(발해)의

역사가, 중세사에는 고려의 역사가, 근세사에는 조선의 역사가, 근대사에는 대한

제국과 일제시대의 역사가 포함되어야 하고, 현대사에는 해방 이후의 역사가 포

함되어야 한다.

우리의 중대사에 관한 대표적인 역사책이 삼국사기이고, 중세사에 관한 것이

고려사이고, 근세사에 관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라면 우리의 태고사, 상고사, 중

고사와 고대사에 관한 대표적인 역사책이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이고, 우리의 고

대사에 관한 대표적인 역사책이 단기고사이다. 이들 책들은 기존에 전해져 내려

오던 책들을 합권하여 편찬한 것으로 후기에 일부 왜곡된 필사본들이 등장하였

으나 진본을 반복해서 학습하다보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안함로의 삼성기, 원동중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범

장의 북부여기 및 가섭원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를 합권한 책이다. 계연수는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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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에서 안함로의 삼성기는 자신의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고, 원동중의 삼

성기와 단군세기는 진사 백관묵으로 부터 받은 것이고, 북부여기는 진사 이형식

으로 부터 받은 것인데 백진사가 소장하던 것과 동일한 것이고, 태백일사는 이

기가 소장하던 것을 받은 것인데 이것을 합본하여 환단고기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이암과 이맥의 후손인 이기의 감수를 거쳐 30부를 필사

하여 광무 15년(1911)에 처음 발행하였다. 1979년에 배달의숙에서 영인출판하였

고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영인출판하였다. 1949년 오형기는 이유립에게서 환단

고기를 받아 이것을 다시 필사하여 발행하였고, 1979년 조병윤이 단단학회의 명

의로 영인출판하였다. 또 일본인 가지마 노부루가 일본어로 번역출판한 환단고

기도 있다. 따라서 계연수가 합권한 환단고기는 크게 1911년에 계연수가 발행한

환단고기와 1949년 오형기가 발행한 환단고기로 구분할 수 있다.

환단고기는 우리의 상고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책이다. 삼성기에는 환국, 배

달국, 단군조선국에 관한 내용이, 북부여기 및 가섭원 부여기에는 부여와 후기

삼한에 관한 내용이, 태백일사의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에는 환국, 배

달국, 단군조선의 삼한 중에 마한과 번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는 당시의 정신문화, 특히 종교문화에 관한 내용들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와 소도경전본훈이 대표적이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 선조들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시대로 부터 부여와 후기

삼한,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와 가야, 통일신라와 대진국(발해), 고려, 왕조조선,

대한제국으로 이어져온 신교(神敎)라는 종교를 신앙하였다. 신교는 천지인 삼계

(三界)의 일체화된 삼신(三神)과 삼신상제(三神上帝)와 국조(國祖)이신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왕검의 신령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신교의 종교시설은 산상과 웅상, 천단과 방구단과 각목단, 수혈 및 신단과 제

석단(표지석단)과 지석묘(고인돌)과 묘사, 부도와 신시의 삼신대와 소도와 삼신

궁과 신사(神祠)로 오늘날까지 전국의 산천과 강과 바다와 역사문화 유적지에

이들 유물과 유적들이 남아있다. 신교의 경전으로는 천부경과 지부경과 인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366사) 등이 있고, 계율로는 환국의 5훈, 신시의 8훈, 단군조

선의 7천범과 9서가 있고, 소도의 5상이 있고, 법률로는 단군조선의 금8조가 있

다.

신교(神敎)는 환인 환국에서 시작되어 환웅 배달국때에 체계화되었고 단군조

선국때에 계승발전 되었다. 신교(神敎)의 주재자는 왕과 전인과 선인과 종인이

이다. 고대에는 천지인 삼계의 일체화된 삼신과 삼신상제께 기원하는 일을 직업

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신교의 주재자인 이들을 각각 전인(佺人), 선인(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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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종인(倧人)이라고 하였다. 이들 삼인들은 교화(敎化), 천리(天理), 지리(地

理), 인사(人事). 점술(占術), 신도법(神道法), 간지산수(干支山水)뿐만 아니라 국

가적인 사무나 일상적인 업무에도 종사하였다.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으로 업무에 종사하고, 도를 닦고, 예언을 하는 사람을

삼랑(三郞) 또는 삼시랑(三侍郞)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이러한 낭가집단의

신도(神道)가 환웅과 신령을 모시는 성황(城隍)과 함께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리

고 경당의 학생들을 국자랑 또는 천지화랑이라고 하였다. 또 종교의 군사조직의

일부가 국가의 군사조직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단군조선의 조의, 고구

려의 조의, 신라의 화랑, 고려의 국선이 대표적이고, 그 외 가야랑, 백제랑, 조선

의 조의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왕검(桓儉)을 삼성(三聖)이라고 한다. 삼신과 삼성

사이에는 우리 환한 민족의 조상인 나반 태부와 아만 태모님, 마고 상제와 궁희

및 소희 신모님, 황궁씨와 백소씨와 청궁씨와 흑소씨, 4천인천녀, 유인씨가 존재

한다. 따라서 신교의 삼신단과 삼신궁에는 천지인 삼계의 일체화된 삼신, 삼신상

제와 삼성의 신위가 모셔지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글을 쓰는 단계는 자료수집, 자료분석, 자료의 이해와 편집, 그

리고 논술의 단계로 진행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정확한 자료의 수집, 분석, 이해

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행작업이 이루어진 이후 완전한 이해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우리는 과거 정확하지 못한 자료와 완전하지 못한

이해력으로, 또는 외래세력의 농간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

아 왔고 현재에도 이러한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외래인이 아닌

우리 스스로에 의한 역사 왜곡이 이루어져서는 아니된다.

특히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에게 부정확한 사실들을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오류는 아직 정립되지 아니한 우리의 역사, 종교, 철학, 풍속,

문화·문명·예술 등의 분야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러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교육자들은 각 분야에 가장 적합한 책 몇권 정도는 숙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우리 상고사를 배우는 좋은 역사책으로 환단고기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이 교육

자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일반인들과 학생들에게는 좋은 역사서가, 또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정책 자료가 되어 역사(歷史)와 국혼(國魂)

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13. 10. 13.

초인 김호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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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편저(編著)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내용목차(內容目次)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안함로(安含老) 찬(撰)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원동중(元董仲) 찬(撰)

단군세기(檀君世紀) 홍행촌수(紅杏村叟) 편(編)

북부여기(北夫餘紀) 상하(上下) 휴애거사(休崖居士) 편(編)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휴애거사(休崖居士) 찬(撰)

태백일사(太白逸史) 일십당주인(一十堂主人) 찬(撰)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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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凡例)

一. 고기(古記)의 인용은 일연의 유사(遺事)에서 시작하였으나 지금 그 고기를

얻어 볼 수 없으므로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합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환단고기(桓檀古記)

라고 하였다.

一. 삼성기는 두 종류가 있어 유사하나 완편은 아니다. 안함로씨가 편찬한 것

은 우리 집안에 전부터 전하여 오는 것으로 지금 그것을 삼성기전(三聖紀全) 상

편이라 하고 원동중씨가 편찬한 것은 태천(泰川)의 백진사 관묵(寬黙)씨로부터

얻은 것으로 지금 그것을 삼성기전 하편으로 하였으며 이것들을 총합하여 삼성

기전이라고 하였다.

一. 단군세기는 홍행촌수(紅杏村叟)가 엮은 것으로 곧 행촌 선생 문정공이 전

한 것인데 이 책도 역시 백진사로 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의 집은 글로써 전통

이 알려진 오래된 가문이다. 본래 장서가 많았으며 이제 두 종류의 사서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가히 조국에 만장의 광채를 비추는 것이라 어찌 많은 돈을

준 것에 비유할 것인가.

一. 북부여기 상하는 휴애거사 범장이 편찬한 것이다. 전부터 있던 단군세기

합편이다. 삭주(朔州)의 이동(梨洞) 이진사 형식(亨栻)의 집에서 얻은 것이다. 단

군세기는 백진사가 소장했던 것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데 지금 또 별

본(別本)이 있어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다. 그 책의 내용은 앞의 책과는 매우 다

른바가 있으므로 고로 다시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一. 태백일사는 일십당(一十堂) 주인(主人) 이맥씨가 편찬한 것으로 곧 해학(海

鶴) 이기(李沂) 선생이 소장한 것이다. 대개 환단(桓檀) 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경문(敎學經文)이 다 갖춰져 있어 취재의 전거가 가히 한번 보아도 일목요

연한 것이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 두 책의 전문이 그 안에 구존하니 실로

낭가(郎家)의 대학, 중용과 같다. 오호라, 환단 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신법(三一

神法)의 진리가 존재하는 바 이 책은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중흥할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손은 저절로 춤을 추고 발은 저절로 밟고 일어나 큰 소리 내어 웃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一. 환단고기는 모두 읽어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서 내가 정성껏 성실

히 근면을 다하여 필사본을 만든 것이고 또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의 출금으로

여러 곳에 기궐(剞劂)을 부탁하는바 하나는 스스로 우리 인간의 주성(主性)을 발

견하게 된 것을 크게 축하할 일이고 또 하나는 민족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된

것을 크게 축하할 일이다. 그리고 하나는 세계 인류가 마주보고 합쳐서 공존하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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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것을 크게 축하할 일이다.

신시(神市) 개천(開天) 5,808년, 즉 광무(光武) 15년 세차 신해년(1911) 5월 광

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의 유도(遺徒) 선천(宣川)의 계연수 인경(仁卿)은 묘향

산(妙香山) 단굴암(檀窟庵)에서 이 글을 쓰다.

삼성기전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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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

안함로 편찬(撰)

우리 환(桓)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 일신(一神)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존재하고 홀로 화(化)하여 신이 되어 밝음을 빛내고 우주를 비추었다. 권

능을 화하여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짧지 않게 생(生)하게 하였다. 오래토록 보시

고 항상 즐거움을 얻고 날고 노닐며 기묘함에 이르고 자연에 관련하였다. 형상

이 없이 보고 행함이 없이 이루고 말없이 행하였다. 날(日)에 동녀동남(童女童

男) 800명이 흑수백산(黑水白山)의 땅에 내려왔다. 여기에서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羣)으로서 천계(天界)에 거주하시면서 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환국(桓國)이라고 부른다. 천

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고 부르거나 또는 안파견(安巴堅)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7세(世)를 전하였는데 연대는 고려하기 불가(不可)하다.

후에 환웅씨(桓雄氏)가 계속 흥하여 천신(天神)의 조서(詔)를 받들고 백산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천평(天坪)에 파고 정지(井地)를 청

구(靑邱)에 획정하여 천부인(天符印)을 지니고 다섯 가지 일(五事)을 주관하시며

재세이화(在世理化)로 홍익인간(弘益人間)하셨다. 도읍을 신시(神市)에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고 칭하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올리고 밖의 물

건을 기피하고 삼가하고 문을 닫고 스스로 수양하고 주문을 외우고 소원을 빌었

다. 공(功)이 있어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고 괘(卦)를 그어 미래를 알고 상(象)

을 집어 신을 움직이고 명하여 수많은 신령(羣靈)과 여러 철인이 보필하게 하였

다. 웅씨(熊氏)의 딸을 맞아 왕후(后)로 삼았다. 혼가(婚嫁)의 예(禮)를 정하여 짐

승의 가죽으로써 폐백을 하고 종자를 심고 가축을 기르고 시(市)를 설치하고 구

역(九域)과 교역하고 조공(貢)을 부가(賦)하니 새와 짐승도 더불어 춤추었다. 후

에 사람들이 그를 받드니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세세(世世)토록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신시의 시기에 치우천왕(治尤天王)이 있어 청구를 회척(恢拓) 하였다. 18세(世)

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었다.

후에 신인(神人) 왕검(王儉)이 내려와 불함산(不咸山) 단목(檀木)의 터에 도달

하였다. 그는 신(神)의 덕(德)에 이르고 성인의 어짐을 겸하니 이에 능히 조서

(詔)를 이어 하늘(天)을 계승하니 극(極)을 세우게 되었다. 위탕 유열(惟烈)하여

9환(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열성 복종하여 추대하니 천제의 화신(化身)이 되어

제왕(帝)이 되었다. 이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되어 신시의 옛 규범을 복구하고

삼성기전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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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하였다.

단군은 팔짱끼고(端拱) 좌정(坐)함이 없었다. 세상의 경계를 정하고 현묘(玄妙)

하게 도(道)를 얻고 여러 무리들(羣)과 접촉하여 교화하며 생활하셨다. 팽우(彭

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간하게 하고 성조(成造)에게 명하여 궁실을 짓게 하고

고시(高矢)에 명하여 종가(種稼)를 주관하게 하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서계

(書契)를 조성하게 하고 기성(奇省)에게 명하여 의약을 시설하게 하고 나을(那

乙)에게 명하여 판적(版籍)을 관장하게 하고 희(羲)에게 명하여 괘무를 경전(典)

편찬하게 하고 치에게 명하여 병마를 육성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 하백(河

伯)의 딸을 맞아 왕후(后)로 삼아 누에치는 것을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

스림이 사표(四表)에 고루 비치었다.

병진년(丙辰) 주나라(周)의 고왕(考)때 국호를 고쳐 대부여(大夫餘)라고 하고

백악(白岳)으로부터 또 장당경(藏唐京)에 이주하였다. 팔조(八條)를 잉설(仍設)하

였고 독서와 활쏘기 연습이 일과(課)가 되게 하였고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교

(敎)가 되게 하였고 전잠(田蠶)이 노무(務)가 되게 하였다. 산과 연못을 금지하지

않았고 죄가 처자에게 미치지 않게 하였고 백성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고 협력하

여 통치를 완성하였다. 남자에게는 항상 직(職)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호구(好逑)

가 있었다. 집집마다 재물이 쌓여 산에는 도적이 없었고 들에는 굶주린 자를 볼

수 없었고 현악기 노랫소리가 구역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년(戊辰) 이래로 나라를 통치하여 47세(世)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이 2,096년이었다. 임술년 진(秦)나라 시황(始)때 신인(神人) 대해모수(大角+

羊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정미년 한나라 해제(漢惠)때 연(燕)나라의 추장 위만이 서쪽 변방 한 구석을

공략하여 거주하였다. 번한(番韓)의 준왕(準)이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바

다로 들어가 필부가 되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 지소는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

고 한수(漢水)의 남쪽에 백성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한때 군웅이 요해(寮

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경합하였다. 계유년에 이르러 한(漢)나라 무제(武)때 군

대를 이동하여 우거(右渠)를 멸하였다. 서압록(西鴨綠)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

이 창의하여 군대를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고 하였다.

을미년 한나라 소제(昭)때 부여의 옛 도읍을 점거하여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고 하였다. 이것이 곧 신라(新羅)의 옛 토양(故壤)이다. 계해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高鄒牟)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 북부여를 계승하고 더불어 단군의 옛 장

전(章)을 복원하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건원(建元)하여 다물(多勿)이

라고 하니 이가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시다.

삼성기전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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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下扁)

원동중(元董仲) 편찬(撰)

인류의 시조는 나반(那般)이다. 처음에 아만(阿曼)과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

斯它)였다. 꿈에 천신(天神)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9환족

(九桓族)은 모두가 그의 후손들이다.

오래전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백성은 부유하였으며 또 수도 많았다. 처음 환

인(桓仁)은 천산(天山)에 거주하시면서 도(道)를 얻어서 오래 오래 사셨으니 몸

에는 병이 없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베풀고 교화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병란이

없게 하였고 사람 모두가 힘써 노력하여 굶거나 추위에 떠는 사람이 없게 되었

다. 혁서환인(赫胥桓因), 고시리환인(古是利桓因), 주우양환인(朱于襄桓因), 석제

임환인(釋提壬桓因), 구을리환인(邱乙利桓因)에 전하고 지위리환인(智爲利桓因)에

이르니 혹은 단인(檀仁)이라고도 한다.

고기(古記)에서 전하기를 파내류산(波奈留山)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고도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

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이다. 총괄해서 말하기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구분해서

말하기를 즉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

川國), 일군국(一羣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

納阿國), 선비국 또는 시위국(豕韋國) 혹은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

國)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이다. 7세(世)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모두 3,301년이다. 혹은 전하기를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아직 살펴서

알지 못한다.

환국의 말에 안파견(安巴堅)이 삼위(三危) 태백(太白)을 내려다보시고 모두가

가히 홍익인간 할 수 있는 곳이므로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은가 물으셨다. 오가

(五加) 무리들이 대답하기를, “서자 환웅(桓雄)이 있어 용맹함과 함께 어짐과 지

혜를 함께 갖추었습니다.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

사오니 태백산에 보내어 이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에 천부인(天符印) 삼종(三種)을 내려주시고 인하여 조칙(勅)하여 이르기를, “그

대여 이제 인물(人物)의 업(業)이 이미 조성되어 완성되었다. 임금(君)은 그 노고

(厥勞)를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서 개천(開天)하고 입교(入敎)하고

재세이화하여 만세 자손의 홍범(洪範)이 되라.” 하셨다.

때에 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어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고 도(道)를 나누어 가기

삼성기전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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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청하므로 이에 그것을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보(財寶)를 축적하고 10간(干)

12지(支) 신장(神將)을 거느리고 공공(工共),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

와 더불어 모두 삼위산 납목동굴(拉木洞窟)에 이르러 임금(君)이 되니 그를 제견

(諸畎)이라 하고 반고가한(盤固可汗)이 되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神市)이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하였다. 풍백(風

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

(主病), 주선악(主善惡) 하였다.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이치대로

되어 가는 세상을 만들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다.

이때에 한 무리의 곰부족(熊族)과 한 무리의 호랑이부족(虎族)이 함께 이웃하

여 살았다. 일찍이 신단수에서 빌어 신계(神戒)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

이 이를 듣고, “교화할 수 있겠다.” 하셨다. 이에 주술로써 모양을 다듬고 정신

을 바꾸었다. 앞서 신이 남긴 것으로서 혼령을 정화하고 풀었는데 그것은 쑥 한

다발과 마늘 20매였다. 경계하여 가로대, “너희들이 이 풀을 먹고 100일 동안 햇

빛을 보지 않으면 능히 사람다운 형상을 얻으리라.” 하셨다. 곰과 호랑이 두 부

족(族)은 모두 이를 얻어먹고 3․7일 동안 금기하였다. 곰은 능히 배고픔과 추위

를 참고 계율을 준수하여 몸가짐(儀容)을 얻었지만 호랑이는 방만하고 능히 금

기하지 못하여 좋은 결과(善業)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두 부족의 성질이 서로

상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곰 부족의 여인들은 함께 돌아갈 사람이 없으므로

매일같이 단수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주문을 외며 원하였다. 임시로 교화하게

된 환웅이 (백성들이) 그들과 더불어 혼인하게 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장막

(帳)이 있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스스로 하늘을 열어 생민(生民)에게 베풀고 교화하였다. 천경(天

經)을 펴고 신고(神誥)를 강의하여 무리들을 크게 가르쳤다. 이 이후에 치우천왕

이 토지를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이때

에 9환은 모두 삼신(三神)을 하나의 원(源) 조상으로 하였다. 소도(蘇塗)를 주관

하고 관경을 주관하고 책화를 주관하고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여 하나로 회귀함

으로서 화백(和白)하고 더불어 지혜와 삶을 함께 닦아 전인(佺)에 머물렀다. 이

때 9환은 모두 삼한관경(三韓管境)의 천제자(天帝子)에게 통치되었는데 이에 그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밀기(密記)에서 전하기를 환국의 말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거

리였다. 환웅은 삼신으로써 교화를 베풀고 전인의 계율(佺戒)로서 업(業)을 하였

다. 무리를 모아 맹서를 시키고 권선징악의 법(勸懲善惡法)을 두었다. 이로부터

(법에 따라) 은밀히 베어서 제거할 의지가 있었다.

삼성기전 하편

- 5 -

때에 무리의 이름은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항상 점점 달라지더니 원거주자

(原住者)는 호랑이부족 무리였고 새 이주자(新移者)는 곰부족 무리였다. 호랑이

부족 무리의 성질은 탐내고 잔인한 것을 즐기고 약탈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곰

부족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고 자긍심에 쌓여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비록 같은 굴에 거주하나 오래도록 소원함이 더하였다. 서로 가대(假貸)하지 않

고 혼인(婚嫁)도 통하지 않고 일마다 다수에 따르지 않아 같이 하나의 그 길에

있지 않았다. 이에 곰 부족의 여자(女) 임금(君)은 환웅이 신덕(神德)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에 무리를 이끌고 와서 뵙고 말하기를, “원컨대 굴집 하나를 내려

주십시오.” 라고 하고 우두머리가 신계의 맹세를 하므로 환웅이 이에 그것을 허

락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웃해서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호

랑이 부족은 끝내 불가능하므로 그들은 사해(四海)로 추방하였다. 환족(桓族)의

일어남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한웅(葛古桓雄)이 있어 염제신농(炎農)씨의 나라와 더불어 강토의 경

계를 획정하였다. 또 몇 대를 전하여 자오지(慈烏支) 환웅이 있었는데 신과 같은

용맹함이 있고 관(冠)이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써 으뜸이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를 조성하고 광석을 캐서 철을 주조하고 병사를 육성하니

천하가 그것을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고 하는데 치우란

세속말로 번개비(雷雨)가 크게 산하(山河)를 만들고 다시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쇠함을 보시고 웅도루를 쫓아 안고 서쪽에서 천병

(天兵)을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 사이를 점

거하여 소유하고 헌원제후(軒候)의 도읍지까지 미치었다. 곧바로 탁록(鹿)의

들판으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서쪽으

로 보내어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당시 천하는 솥처럼 솟아 있었다. 탁()의 북쪽에는 대효가 있었고 동쪽에는

창힐(倉頡)이 있었고 서쪽에는 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병사로서 그것을 승

리하는데 전념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헌원은 치우보다 조금 늦

게 기병하여 싸움마다 불리하므로 대효에게 의존하려고 하였으나 이룰 수 없었

다. 또 창힐에게 의존하고자 하였으나 이룰 수 없었는데 두 나라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마땅히 간지(干支)의 술법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문서(符圖文)를 받았다. 당시 여러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고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말하길 여러 제후가 모두 와서 복종하여 따

랐기 때문에 치우가 최고로 횡포하여 천하에 능히 벌할 자가 없을때 헌원이 섭

정하였다. 치우는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단군세기

- 6 -

하고 동두철액으로 모래를 먹고 오구장(五丘杖)의 칼, 창, 큰활을 만들어 천하를

위협하며 흔드니 치우는 옛 천자(天子)의 이름이다고 하였다.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배달(倍達)은 한웅이 세운 천하의 이름이다. 그가 도읍한 곳을 신시(神市)이라

고 한다. 후에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겨 18세(世)를 전하고 역년은 1,565년이었

다.

1세는 환웅천황(桓雄天皇)이시다. 또는 거발환(居發桓)이라고도 하는데 재위

94년에 수명은 120세였다.

2세는 거불리(居佛理)환웅이시다. 재위 86년에 수명은 102세였다.

3세는 우야고(右耶古)환웅이시다. 재위 99년에 수명은 135세였다.

4세는 모사라(慕士羅)환웅이시다. 재위 107년에 수명은 129세였다.

5세는 태우의(太虞儀)환웅이시다. 재위 93년에 수명은 115세였다.

6세는 다의발(多儀發)환웅이시다. 재위 98년에 수명은 110세였다.

7세는 거련(居連)환웅이시다. 재위 81년에 수명은 140세였다.

8세는 안부련(安夫連)환웅이시다. 재위 73년에 수명은 94세였다.

9세는 양운(養雲)환웅이시다. 재위 96년에 수명은 139세였다.

10세는 갈고(葛古)환웅 또는 갈태(葛台)천왕 또는 독로한(瀆盧韓)이시다. 재위

100년에 수명은 125세였다.

11세는 거야발(居耶發)환웅이시다. 재위 92년에 수명은 149세였다.

12세는 주무신(州武愼)환웅이시다. 재위 105년에 123세였다.

13세는 사와라(斯瓦羅)환웅이시다. 재위 67년에 수명은 100세였다.

14세는 자오지(玆烏支)환웅이시다. 세속에서는 치우천왕이라고 한다. 도읍을

청구국으로 옮겨서 재위 109년에 수명은 151세였다.

15세는 치액특(蚩額特)환웅이시다. 재위 89년에 수명은 118세였다.

16세는 축다리(祝多利)환웅이시다. 재위 56년에 수명은 99세였다.

17세는 혁다세(赫多世)환웅이시다. 재위 72년에 수명은 97세였다.

18세는 거불단(居弗檀)환웅이시다. 또는 단웅(檀雄)이라고도 한다. 재위 48년에

수명은 82세였다.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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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檀君世紀)

이암(李嵒) 편찬(編)

단군세기 서(序)

나라를 위하는 도(道)에 사족(士)의 기개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사학(史學)보

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불명하면 사족의 기개가 부진(不振)

하고 사족의 기개가 부진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정치의 법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대개 사학의 법은 나쁜 것은 그르다 하고 좋은 것은 옳다

하고 인물을 형량하고 시대의 현상을 논하고 진단하니 만세의 표준이 되는 않는

것이 없다. 이 민족의 삶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창세(創世)의 조서(條序)

또한 가정(加訂) 증거되고 국가와 더불어 역사가 함께 존재하고 사람과 더불어

정치가 함께 움직이고 모든 것이 나의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이다.

오호라, 정치는 그릇(器)과 사람은 도(道)와 같다. 그릇이 가히 도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형체(形)와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다. 형체가 가히

혼을 잃고 유지될 수 있겠는가. 도(道)와 기(器)를 함께 닦는 것이 우리이다. 형

체과 혼을 함께 갖추어 넓히는 것 역시 우리이다. 고로 천하의 모든 일은 먼저

나를 아는 데에 있다. 그런즉 나를 알려고 한다면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대저 삼신일체(三神一體)의 도(道)는 대원일(大圓一)의 뜻에 있으니 조화

(造化)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性)이 되고 교화(敎化)의 신은 내려와 나의 명

(命)이 되고 치화(治化)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精)이 된다. 고로 유일하게 사람

이 만물 가운데 최고로 귀하고 최고로 존엄하다. 대저 성(性)이라는 것은 신(神)

의 뿌리이다. 신(神)이 성에 그 근본을 둔다고 하여 성이 바로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氣)의 불꽃이 밝아 어둡지 않는 것이 참성(眞性)이다. 그러므로 신은

기에서 분리될 수 없고 기는 신에서 분리될 수 없고 우리 몸의 신은 기와 더불

어 합쳐진 후에 우리 몸의 성(性)을 명(命)과 더불어 가히 알 수 있다. 성은 명

과 분리되지 않고 명은 성과 분리되지 않고 우리 몸의 성은 명과 더불어 합쳐진

후에 우리 몸(身)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신(神)의 성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기

(氣)의 명은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성의 영(靈)을 깨닫는 것이다. 천신

(天神)과 더불어 그 근원(源)과 그 명(命)의 현생(現生)이 같다. 산천(山川)과 더

불어 그 기(氣)와 그 정(精)의 영속함이 같다. 창생과 더불어 그 업(業)이 같다.

이에 하나를 집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이 모여서 삼(三)이 하나로 돌아

가는 것(會三歸一)이다. 고로 마음을 정해 변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참나(眞我)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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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고 신통하여 만 가지를 변화시키는 것을 일컬어 일신(一神)이라고 한다.

참나와 일신은 머무르는 궁(宮)이다. 이것을 알고 법(法)에 의거해 참 근원을 수

행한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광명은 이것을 항상 비출 것이다. 이에

천인(天人)이 서로 함께 그것에 제사하는 연유로 삼신(三神)을 지키고 계율에 맹

세하면 능히 일(一)이라는 것에 돌아오기 시작할 것이다. 고로 성명정(性命精)의

무기(無機)는 삼신일체의 상제(上帝)인 것이다. 우주만물과 더불어 혼연동체가

되고 심기신(心氣神)과 더불어 자취가 없고 장존하는 감식촉(感息觸)의 무기가

환인주조(桓因主祖)와 같다. 세계만방과 더불어 하나로 시행하여 함께 즐기고 천

지인(天地人)과 더불어 무위(無爲)하면 스스로 교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스스로 자아를 세우고 그 형체를 혁

신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무형(無形)을 혁신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이에

나를 알고 혼자만의 하나의 길(道)을 구해야 한다. 오호라, 슬프다. 대부여(夫餘)

는 대부여의 도(道)가 없어진 연후에 한(漢)나라 사람이 대부여에 침입하였다.

고려는 고려의 도가 없어진 연후에 몽고가 고려에 침입하였다. 만약 그때의 제

도가 먼저 대부여로서 대부여의 도가 있게 하였다면 그런즉 한나라 사람들은 그

한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만약에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그런즉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오호라, 슬프다. 예전에 시퍼런 무리배의 사

악한 담론(邪論)이 음으로 수많은 귀신과 더불어 밤을 누비고 다녔다. 남생(南

生)과 발기(發岐)의 역심이 서로 상응함으로써 합세하여 나라를 위하는 자를 억

누르니 도(道)와 기(器)가 죽고 형체(形)와 혼(魂)이 사라지는데 어찌 스스로만

안전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른 외인(外人)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더욱 더

심해져서 양위, 중책, 중임을 농단하나 나 같은 대신이라는 무리는 속수무책이니

어찌 그런가. 국가에 역사가 없으면 형체는 있어도 혼을 잃은 까닭이다. 일개 대

신의 능력으로는 아직 나라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에

국인과 더불어 모두 국가를 구한다면 유익하게 될 때 그 때 그 곳에서 구하는

것이고 나라를 구한 연후에야 이제 나라를 구했다고 말함으로서 가히 얻는 것이

다.

나라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나아갈 방향을 고려해 보면 국가는 역사가 있어야

형체가 있고 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시 개천 이래로 각각 그 근본(統)이

존재하니 국가는 근본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들은 근본으로 인하여 함께 하

였으니 사학이 어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즐겁게 써서 단군

세기의 서(序)로 삼는다.

상(上)의 12년 계묘년(癸卯年) 10월 3일에 흥행촌수(紅杏村叟)가 강도(江都)의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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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당(海雲堂)에서 쓰다.

단군세기(檀君世紀)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의

딸인데 신묘년(辛卯) 5월 2일 인시에 단수(檀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

의 덕이 있으므로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나이 14세 되던 갑

진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받들어 대읍(大

邑)의 국사(國史)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무진년 당요(唐堯)때에 단국(檀國)으

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의 터에 이르니 국인들이 추대하여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9환이 하나로 되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

었다.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 수명은 130세였다고 하였다.

무진 원년. 대시에 신시(神市)의 세상에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계곡

에 널리 퍼져 살며 풀로 옷을 하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 3일

에 신인 왕검이 있어 오가(五加)의 수장이 되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목의

터에 와서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께 제사하였다. 그는 신의 덕(德)에 이르고 성인

의 어짐(仁)을 겸하였다. 이에 능히 조서를 받들어 하늘(天)을 계승하니 위탕유

열하여 9환의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여 추대하니 천제(天帝)

의 화신(化身)이 되어 제왕이 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신시의 옛 법규를 회

복하고 아사달에 도읍을 세워 조선(朝鮮)이라는 연방국(邦)을 세웠다.

조서(詔)에 이르기를 하늘의 규범(天範)은 오직 하나(一)요 두 개의 그 문(厥

門)이 아니다. 너희들이 오로지 하나에 순수하게 정성을 다하면 너희 마음이 즉

하늘에 보일 것이다. 천범은 항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로지 동일하다. 자기

를 금기하고 마음을 잡는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에 미치고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교화하고 또한 천범에 합해져야 이에 만방에 작용하고 나아간다.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있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니 너희 부

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이에 능히 하늘을 공경함으로서 방국(邦國)에 미치는 것

이 바로 충성과 효도이다. 너희가 능히 이 도(道)를 체득한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짐승도 쌍이 있고 헌 가죽신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녀는 서로 화목하여 원망

하지 말며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라.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픈 것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헐뜯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해치지 말아야 가정도 국가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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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흥하게 된다.

너희들 소와 말과 원숭이를 보아라. 서로 나누지 않느냐. 너희들 서로 양보하

고 서로 약탈하지 말고 함께 지어 서로 도둑질하지 말아야 국가가 융성할 것이

다.

너희들 또 호랑이를 보아라. 사납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설을 지었

다. 너희는 난폭하게 날뛰지 말고 모진 심성(戕性)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고

항상 하늘의 규범을 준수하고 모든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는 위태로움을 보면

도와주고 약한 자를 능멸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규휼하고 낮은 자를 경멸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것을 어긴다면 영원히 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몸과 가정

이 낙후되리라.

너희가 충동적으로 벼논에 불을 놓으면 장차 심을 벼들은 사라지게 되므로

하늘과 사람이 이에 노할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냄새

는 반드시 새어나올 것이다. 너희는 바른 성품을 공경하고 지녀서 사악한 마음

을 품지 말고 나쁜 것을 감추지 말고 화나는 마음을 지니지 말고 하늘을 공경하

고 백성과 친하라. 이에 너희는 복록(福祿)이 무궁할 것이다. 너희 오가 무리들

은 이 뜻을 잘 따라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척하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

고 신지(臣智)에게는 서계(書契)를 만들게 하고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설치하

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판적(版籍)을 관장하게 하고 희(羲)에게는 괘점(卦筮)

을 편찬하게 하고 우에게는 병마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斐西岬) 하

백(河伯)의 딸로 하여금 왕후(后)로 삼고 누에치는 것을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

厖)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었다.

정사년 50년.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왕(帝)께서는 풍백

(風伯)인 팽우에게 치수(治水)를 명하여 고산대천(高山大川)에 정주하여 백성들

이 편하게 살게 하니 우수주(牛首州)에 비석이 있다.

무오년 51년. 제왕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리산(摩璃山)에 제천단(祭天檀)을 축조하게 하였는데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이것이다.

갑술년 67년. 제왕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사공(虞司空)과 더불어 도

산(塗山)에서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법(五行治水法)을 전하여 주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여 유영(幽營) 두 주가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회대(淮

垈) 지방의 여러 제후들을 정하고 분조(分朝)를 설치하여 그것을 다스리고 우순

(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 93년. 제왕께서 버들궁궐(柳厥)에 계시면서 흙 계단(土階)을 스스로 쌓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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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풀과 숲을 없애지 않았고 박달나무 우거진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놀면서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또 전답 사이에는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

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고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니 백성들은 재물이 쌓여 살림

에 보태었다. 상월(上月)에 국중대회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백성 모두가 비추

고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이로부터 황제의 교화는 9역(九域)의 멀고 먼 지방까지

미치어 덕의 교화는 점차로 위대해지고 광대해지게 되었다.

앞서 이 지역은 천하의 땅을 구획하여 삼한(三韓)을 다스렸는데 삼한은 모두

5가(家) 64족(族)이었다. 이 해 3월 15일에 제왕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서(崩)하

시므로 교외의 10리 땅에 장사하였다. 만 백성들이 마치 부모의 상(喪)인 것처럼

단기(檀旂)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敬拜)하고 항상 생각

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였다. 태자 부루(扶婁)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부루(扶婁) 재위 58년

신축년 원년. 제왕께서는 현명하시고 복이 많아서 재물을 많이 저장하시니 부

유하였다.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니 한 명의 백성도 굶주리거나 추

위에 떨지 않았다. 매년 봄, 가을 마다 나라 안을 살펴보시고는 예법에 따라 하

늘에 제사하였다. 여러 한(汗)들의 선악을 관찰하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시고 도

랑을 파서 농상(農桑)을 권장하시고 집을 짓고 학문을 일으키시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처음에 우순(虞舜)이 남국(藍國)의 옆에 유영(幽營) 두 주를 설치하므로 제왕

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고 그 임금(君)을 모두 축출한 후에 동무(東武)

와 도라(道羅) 등을 봉함으로서 그 공을 표창하였다.

신시 이래로 매당 하늘에 제사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때 덕의 찬송을 제창하

고 모두 화합하여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고 근본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신인(神

人)으로서 사방을 다 화합하는 의식을 올리니 이것이 참전인의 계(參佺戒)가 되

었다. 그 가사에서 말한다.

‘어아어아 우리들 대조신(大祖神)의 크신 은덕 배달국 우리들 모두는 백백 천

천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선심(善心)은 큰 활을 이루고 악심(惡心)은 화살의 과녁을 이루니 우

리들 백백 천천 사람 모두 큰 활의 현은 선심(善心)과 같고 곧은 화살은 일심

(一心)과 같네.

어아어아 우리들 백백 천천 사람 모두 큰 활의 한 무리가 많은 화살 과녁을

관파(貫破)하니 비탕(沸湯)이 선심(善心) 가운데 한 줄기 눈(雪) 악심(惡心)과 같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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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아어아 우리들 백백 천천 사람 모두 큰 활은 견고하고 굳세어서 마음과 같

네. 배달국은 빛나고 번영하리라. 백백 천천년 크나 큰 은덕 우리들 대조신이여,

우리들 대조신이여.’

임인년 2년. 제왕께서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을 초대하여 정치의 도(道)를 물

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었는데 사흘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달 동안을 태만하지 않았고 그 해 동안을 애통해 하였고 삼년까

지 슬퍼하였다. 이로부터 온통 세속에서는 다섯 달로 멈추었던 상을 오래 하는

것이 영광이 되었다. 이것은 천하의 큰 성스러움이 그 덕화의 유행이 마치 역마

(郵)의 속도로 전해진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두 련(二連)은 이렇듯 효(孝)로

써 소문이 났고 또한 공자(孔子)도 칭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저 효라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근본으로 사해(四海)에 두루 알려져 표준

이 되었다.

계묘년 3년. 9월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에

얹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도량형의 모든 기기는 관(官)의 것을 표준

으로 하도록 하였다. 포와 서의 시장 가격이 있는 곳이 없으나 두 백성이 서로

속이지 않으므로 어디서나 편리하였다.

경술년 10년. 4월에 구정(邱井)을 획정하여 전결(田結)로 하고 백성들이 스스

로 사리(私利)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임자년 12년. 신지(神誌)와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년 58년. 제왕께서 붕서하셨다.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

어 미친 듯 산위에서 울부짖었다. 만 백성들이 매우 통곡하였다. 후에 국인들은

집안에 땅을 골라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하니 토기에 화곡(禾穀)을 성대하게 담

아 단(壇) 위에 놓고 이것을 부루단지(扶婁檀地)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업신(業

神)으로 삼았다. 또 전인의 계율(佺戒)을 칭함으로서 모든 사람이 계율(戒)을 받

는 것을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하였는데 곧 사람과 더불어 업(業)이 갖추어져

완전해지라는 의미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가륵(嘉勒) 재위 45년

기해년 원년. 5월 제왕께서 삼랑(三朗) 을보륵(乙普勒)을 초대하여 신(神)과 왕

(王)과 종인(倧)과 전인(佺)의 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

른손에 올려놓고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다음 나아가 말씀드렸다. 말하기를,

단군세기

- 13 -

“신(神)은 능히 만물을 인출(引出)하고 그 성(性)을 각각 온전히 하므로 신의 존

재함과 현묘함을 백성들 모두는 의탁하고 믿습니다. 왕은 능히 덕과 의리로 세

상을 다스리니 각각 그 생명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왕이 존재하고 베푸는 바이

므로 백성들 모두가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종인(倧)은 국가의 존재가 선

택한 것입니다. 전인(佺)은 백성의 존재가 받드는 바입니다. 모두 7일이 다시 이

어지게 삼신(三神)께 맹세하면 세 올(三忽)은 전인(佺)이 되고 9환은 종인(倧)이

되어 그 도를 덮을 것입니다. 부모(父)가 되려고 하는 자는 곧 부모이게 하고 임

금(君)이고자 하는 자는 곧 임금이게 하고 스승(師)이고자 하는 자는 곧 스승입

니다. 아들이고자 하고 신하이고자 하고 무리이고자 하는 이들 또한 아들이게

신하이게 무리이게 합니다. 고로 신시개천의 도는 또한 신(神)으로써 교단을 설

치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니 나를 아는 것을 홀로 구하고 나를 비움으로서

만물을 존재케 하면 능히 인간세상에서 자기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천신(天神)

을 대신하여 왕은 천하의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사람이 없게 하고 만왕(萬王)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고 병을 없애고 원

망을 풀고 생명을 해치는 그 어떠한 것도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妄)됨을 고치는 것이 곧 참(眞)임을 알게 하는 것이니 3․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서 계율(戒)을 지키면 이로부터 스스로 조정에는 종인의 가르

침(倧訓)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인의 계율(佺戒)이 있어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

게 태양 안에 모이고 삼광오정(三光五精)이 응결하고 뇌(腦)의 바다가 현묘하여

스스로 광명을 얻고 함께 구제(濟)하니 이를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9환과 9환의 백성들에게 베푸니 모두 돌아와 통솔되고 하나가 되었습니

다.” 라고 하였다.

경자년 2년. 이때 풍속이 항상 같지 아니하여 방언(方言)이 서로 달랐다. 상형

표의(象形表意)의 진서(眞書)가 있었으나 10가(家)의 읍(邑)의 말이 대부분 통하

지 않고 100리의 국가의 글이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편찬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그 문자는 다음

과 같다.

단군세기

- 14 -

신축년 3년. 신지(神誌) 고결 (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년 6년.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을 약수(弱水)에 옮겨 종신동

안 구치토록 명한 뒤 그를 사면하여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祖)가 되

었다.

병오년 8년.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제왕께서 지백특(支伯特)에서 그

를 토벌하였다. 초여름 4월에 제왕께서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를 내려다보

시고 밥하는 연기가 적게 나는 곳은 조세를 감하여 차등있게 하였다.

무신년 10년.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여수기(余守

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참수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칭하여 말하

기를 소시모리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전음되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

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어 해상으로 도망하여 삼도(三島)에 웅거하면서

천왕(天王)이라고 참칭하였다.

계미년 45년. 9월에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즉위하였다.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 재위 38년

갑신년 원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봉하여 몽고리한(蒙古里汗)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몽고족은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

에 북쪽을 순시하시고 돌아서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삼신께 제사하고 신령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人蔘)이라고 불렀다. 또는 선약(仙藥)이라고 칭하였다. 그 후

로 신선불사(神仙不死)의 설(說)과 더불어 삼(蔘)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간간이 채득하여 얻은 집이 있다고 전하고 신이(神

異)가 나타나고 영(靈)이 편재한다는 많은 기이한 경험들이 말로 전해진다.

무오년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패전(貝錢)을 주조하였다. 가을 8월에는 하(夏)

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하여 갔다. 10월에

조야(朝野)에서 신서(書)를 백성들에게 공개하기 위하여 돌에 별도로 기록하였

다.

경인년 7년. 살수(薩水)의 위에서 조선소(造船)를 설치하였다.

임인년 19년. 하나라 주인(主) 상(相)이 덕을 잃으므로 제왕께서 식달(息達)에

게 명하여 남(藍)․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토록 하

니 천하가 이를 듣고는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년 38년. 6월에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美+鳥加의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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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단군 구을(丘乙) 재위 16년

임술년 원년. 태백산에 단을 쌓도록 명하고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

다.

계해년 2년. 5월에 황충(蝗虫)이 크게 일어나 들에 가득하였다. 제왕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들을 둘러보시고는 이를 없애주기를 삼신께 고하니 수일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년 4년.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사용하여 월력을 만들었다.

을사년 8년. 신독인(身毒人)이 표류하여 동해가에 이르렀다.

정축년 16년.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封築)하

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제왕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여 풍류강(風流

江)을 답사하시고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이윽고 붕서하셨다. 대박산(大

博山)에 장사하였다. 우가(牛加)의 달문(達門)이 중인(衆人)들에게 피선되어 대통

을 이었다.

6세 단군 달문(達門) 재위 36년

무인년 원년.

임자년 35년. 여러 한(汗)들이 항상 봄에 모여서 구월산(九月山)에서 제사하고

신지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글(詞)에서 말하기

를, ‘아침의 빛을 가장 먼저 받는 이 땅에 삼신(三神)이 혁혁히 세상에 임하시고

환인(桓因)께서 나시어 무리들에게 먼저 덕을 심고 넓히고 또 깊이하고 여러 신

(神)과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어 조칙(詔)을 이어받게 하여 개천(開天)토록 하였

습니다. 치우(蚩尤)께서 청구에서 일어나 무(武)의 명성을 만고에 떨치시니 회대

(淮垈)의 모든 지방이 왕의 천하에 들어왔습니다. 누구도 능히 왕검(王儉)을 침

노할 수 없다는 대명을 받으니 환호성이 9환(九桓)을 진동시켰습니다. 고기에 물

처럼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풀에 바람처럼 덕으로 새롭게 교화하니 원한이 있는

자는 먼저 원한을 풀고 병이 있는 자는 먼저 병을 제거하여 한마음으로 존재하

니 어짐(仁)과 효도(孝)가 사해(四海)에 가득하였습니다. 밝게 빛나는 진한(眞韓)

진국(鎭國) 가운데 다스림의 도는 모두 새롭기만 하고 모한(慕韓)은 그것을 왼쪽

에서 보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을 당겨서 암으로 4벽을 에워쌌습니다. 성주

(聖主)께서는 저울추와 극기(極器)와 같은 신경(新京)에 행차하시었는데 극기는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는 소밀랑(蘇密浪)이요 저울추란 안덕향(安德鄕)입니

다.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평하면 덕을 신뢰하고 신의 정(神精)을 수호하고 나라

단군세기

- 16 -

가 크게 일어나 태평을 보전하고 일찍이 70국이 항복을 하여 영원히 삼한이 보

전되고 왕업(王業)이 의로워 흥할 것입니다. 일어나고 망하는 것은 물론 말로 되

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으로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한(汗)들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대저 나와 같이 이 약속을 한 사람

은 환국(桓國)의 오훈(五訓)과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로써 영구토록 준수할 표

본(案)으로 삼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의 근본이고 국가의 도이

고 먹는 것의 우선이다. 농자(農者)는 만사의 근본이고 제사자(祭者)는 오교(五

敎)의 근원이니 마땅히 국인과 더불어 함께 다스려서 만드는 것이다.” 하셨다.

먼저 중족(重簇)에게 강론(講)하시고 다음으로 죄인들을 놓아주시고 아울러 사

형과 책화(責禍)를 제외하고 국경을 지키고 화백(和白)을 공개하여 처음으로 전

하였다. 함께 화합하는 마음을 베풀고 겸손하고 낮추고 스스로 육성하니 이로서

어진 정치가 시작되었다. 때에 맹세하고 폐물을 바치는 자는 대국이 둘, 소국이

스물, 허락(墟落)이 3,624곳이었다.

계축년 3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美+鳥加의 한율(翰栗)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翰栗) 재위 54년

갑인년 원년.

정미년 54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서한(于西翰)이 즉위하였다.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혹은 오사함(鳥斯含)) 재위 8년

무신년 원년. 20분의1 세법을 정하여 널리 통용하니 있고 없는 사람이 서로

보충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기유년 2년. 이 해에 풍년이 들어 하나의 줄기(莖)에 여덟 개의 이삭이 달렸

다.

신해년 4년. 제왕께서 미복(微服)으로 잠행하여 국경의 밖으로 나가 하(夏)나

라의 정세를 시찰하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개혁하였다.

갑인년 7년. 세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대궐의 동산(苑) 안으로 날아들어 왔

는데 그 날개의 넓이가 삼척(三尺)이나 되었다.

을묘년 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아슬(阿述)이 즉위하였다.

9세 단군 아슬(阿述) 재위 35년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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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년 원년. 제왕께서 인덕이 있어 백성이 금지하는 것을 침범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똥 웅덩이가 아무리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에 버려지는 것이다.” 하시고 그 금지하는 것을 침범한 것을 논하지 않

으시고 이것을 교화하시니 덕의 맑고 큰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이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뜨니 이를 구경하는 자가 마치 긴 담과 같았다.

정사년 2년. 청해(靑海)의 욕살 우착(于捉)이 거병하여 궁궐을 침범하니 제왕

께서는 상춘(常春)으로 피해 구월산 남쪽 산기슭에 새로운 궁궐(宮)을 짓고 우지

(于支), 우속(于粟) 등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여 주살케 명한 후 3년 뒤에야 환도

하였다.

경인년 3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牛加)의 노을(魯乙)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魯乙) 재위 59년

신묘년 원년. 대유(大囿)를 만들어서 가축 이외의 짐승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임진년 2년. 친히 마을에 행차하셔서 가정(駕停) 야외의 현자들에게 많이 물으

시고 돌아왔다.

을미년 5년. 궁문 밖에 신원목(伸冤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들으시니

나라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병진년 16년. 동문 밖 10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었는데 서로 같지 아니하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났다. 천하(天河)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그림

(圖)을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그림은 윷판(柶板)과 같았다. 발해(渤海) 연안에서

금괴가 나왔는데 그 수량이 열 하고도 3석(石)이었다.

을축년 35년. 감성(監星)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기축년 59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道奚) 재위 57년

경인년 원년. 제왕께서 오가에게 명하여 열두 명산의 최고로 경치 좋은 곳을

택해 국선(國仙)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하였다. 둘레에 단수(檀樹)를 많이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으로 봉하고 여기에 제사하였는데 웅상(雄常)이라

고 하였다. 국자(國子)의 사부(師傅)인 유위자(有爲子)가 책(策)을 올리며 말하기

를, “오직 우리 신시에서만 실로 환웅 개천으로부터 무리를 받아들여 전인(佺)으

로서 설시하고 계율(戒)로서 교화하였습니다.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가르쳐

설명하니 윗사람들은 옷과 갓을 갖추고 대검을 차고 즐거움을 누리고 아래의 백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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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들은 죄를 범하지 않고 함께 야인을 다스리니 도적이 없어 스스로 안락하였습

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이 없어 스스로 수명을 누렸고 흉년이 없어 스스로 여유

를 누렸고 산에 올라 노래하고 달을 맞이하여 춤추었습니다. 먼 곳에 까지 미치

지 않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든 흥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덕의 교화가 만 백성

들에게 베풀어져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를 넘쳤습니다. 이와 같이 하시기를 청합

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니 매우 장대하고 화려하였다.

천제 환웅의 유상(遺像)을 안치하여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서는 광채가 섬섬하

여 마치 큰 태양이 있어 둥근 빛을 우주에 비추는 듯하고 단수의 아래 환화(桓

花)의 위에 앉아 마치 원심(圓心)을 품은 하나의 진실된 신과 같았고 천부인표

(天符印標)를 가진 대원일의 도기(圖旗)가 누전(樓殿)에 걸려 세워져 있었는데

이것을 거발환(居發桓)이라고 칭하였다. 3일을 계율(戒)하시고 7일을 강독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듯 하였다. 그 염표문(念標文)에서 이르기를,

‘하늘은 현묵(玄黙)으로 위대하니 그 도(道)이다. 보원(普圓)은 그것이 일(事)

이다. 진일(眞一)이다.

땅은 축장(蓄藏)으로 위대하니 그 도이다. 효원(效圓)이 그 일이다. 근일(勤

一)이다.

사람은 지능(知能)으로 위대하니 그 도이다. 택원(擇圓)이 그 일이다. 협일

(協一)이다. 고로 일신(一神)이 충(衷)에 내려 성통(性通) 광명하고 재세이화하

고 홍익인간 한다.’ 하시고 그것을 돌에 새겼다.

정사년 28년. 장소를 설치하고 방물(方物)을 모아서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헌납하여 진설한 것들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년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들을 뽑아서 모두 병사가 되게 하였다. 사

족(士) 20명을 선발하여 하나라 수도로 보내어 국훈(國訓)을 전하고 위성(威聲)

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을해년 46년. 관청을 송화강 연안에 세워 운영하니 배와 노와 기기와 물건들

이 세상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월에 산 남쪽(山南)에서 삼신께 제사하였는데 술

을 바치고 선물을 준비하여 치사(致詞)하고 초제하였다. 이날 밤 특별히 선온(宣

醞)을 내려서 국인들과 더불어 환음(環飮)하고 백희(百戱)를 관람하고 파하였다.

이윽고 누전에 올라 경(經)을 논하시고 신고(誥)를 강연하셨다. 오가를 불러 이

르기를, “지금 이후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고 옥문을 열고 거지에게 밥을

먹이고 아울러 사형을 없애도록 하라.” 하시니 내외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

다.

병술년 57년. 제왕께서 붕서하시니 만 백성들이 부모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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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3년을 근신하니 사해에는 노래 소리가 멈추었다. 우가의 아한(阿漢)이 즉위

하다.

12세 단군 아한(阿漢) 재위 52년

정해년 원년.

무자년 2년. 여름 4월에 뿔 하나 난 짐승을 송화강 북변(北邊)에서 발견하였

다. 가을 8월에 제왕께서 나라 안을 순행하시고 요하(遼河)의 좌편에 이르러 순

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우고 역대 제왕의 이름과 묘호를 새겨 전하였는데 이

것이 금석문의 최고이다. 후에 저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弁韓)땅에 수상

한 돌이 있는데 대(臺)는 무너지고 철쭉만 붉게 피고 글자는 함몰되고 이끼만

푸르다네. 비를 세운 처음 그 자리에 서서 흥망의 석양을 바라본다. 문헌은 징후

가 없으나 이것이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년 29년. 명하여 청아(菁莪)의 욕살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

고사침(高士琛), 맥성(貊城)의 욕살 돌개(突盖)를 봉하여 열국의 제후(汗)로 삼았

다.

무인년 52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의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홀달(屹達혹은 대음달(代音達)) 재위 61년

기묘년 원년.

갑오년 16년. 주현(州縣)을 정하여 직책의 구분하는 제도를 수립하였다. 관리

(官)는 권력(權)을 겸하지 않고 정치(政)는 규칙(則)을 넘지 않고 백성(民)들은

고향(鄕)을 떠나지 않으니 스스로 소사(所事)가 편안하고 현가(絃歌)가 지역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므로 그 주인(主) 걸(桀)

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제왕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9환의 군사를 이

끌고 가서 전쟁을 돕게 하므로 탕(湯)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리도록 명하였으나 걸은 조약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어 길을 막으며 금맹을

깨고자 하므로 은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걸을 정벌하였다. 몰래 신지 우량(于亮)

을 보내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하여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을 점거하여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다.

무술년 20년. 소도를 많이 세워 천지화(天地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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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글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니 이들을 이름하여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

였다. 국자랑들은 출행할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고로 그때 사람들은

천지화랑이라고 칭하였다.

무진년 50년. 5성(星)이 루(婁)에 모이고 황학(黃鶴)이 와서 동산의 소나무에

깃들어 살았다.

기묘년 61년. 제왕께서 붕서하시니 만 백성들은 밥을 먹지 않고 곡성이 끊이

지 않았다. 이에 명하여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지하고 방생을 하고

해를 넘겨 장사를 지냈다. 우가의 고불(古佛)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古佛) 재위 60년

경진년 원년.

을유년 6년.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제왕께서 친히 하늘에 비 오기를 기원

하였는데 하늘에 바친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하늘이 비록 크다 하더라도

백성이 없으면 어찌 베풀 수가 있으며 비가 비록 기름지다 하더라도 곡식이 없

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 있는 곳의 하늘은 곡식이요 하늘 있는 곳의 마음은

사람이라 하늘과 사람은 일체(一體)인데 하늘이 어찌 백성을 버릴 수 있습니까?

곧 비가 곡식을 적시게 하여 때에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하였다. 기원을 마치

자 곧 큰 비가 선채로 수 천리에 내렸다.

신유년 42년. 9월에 고목에서 싹이 나고 오색 빛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가

(子村家)에서 났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잘못 알고 봉황이라고 하였다.

을해년 56년. 사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호구를 조사하여 계산하여 보니 모두 1

억 8천만 호구(口)였다.

기묘년 60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代音혹은 후흘달(後屹達)) 재위 51년

경진년 원년. 은(殷)나라 주인(主)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하였

다. 이 해에 80분의1세 제도를 개혁하였다.

신사년 2년. 홍수가 크게 넘쳐 민가가 많이 피해를 입었다. 제왕께서 심히 불

쌍하게 여겨서 조(粟)를 창해 사수(蛇水)의 지역에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구제하셨다. 겨울 10월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두 국인(國人)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기축년 10년. 제왕께서 약수(弱水)에 서행(西幸)하여 신지 우속(禹粟)에게 명하

단군세기

- 21 -

여 금, 철,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우루인(虞婁人) 20가(家)

가 투항해 오므로 명하여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정미년 28년. 제왕께서 태백산에 올라 비를 세우고 열국의 성인(聖)과 임금

(君)과 한(汗)들의 공을 새겼다.

기미년 40년. 황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여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삼

았다.

경오년 51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의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尉那) 재위 58년

신미년 원년.

무술년 28년. 9환의 여러 한(汗)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

께 제사하고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배향하였다. 향사하고 5일 동안 백

성과 더불어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등을 밝힌 밤을 밝히고 경(經)을 창(唱)하고

뜰을 밟았다. 한쪽은 횃불을 나열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돌아가며 춤을 추고 애

환가(愛桓歌)를 제창하였다. 애환이란 즉 고대의 신의 노래의 일종이다. 선인(先

人)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고 바로 꽃이라고만 불렀다. 애한의 노래

가 있어 전하기를 ‘산유화(山有花)야, 산유화야 지난해에도 수없이 심고 올해에

도 수없이 심네. 불함산에 봄이 오니 꽃은 만홍(萬紅)이라. 천신을 섬기고 태평

을 즐긴다네.’ 라고 하였다.

무신년 5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余乙) 재위 68년

기사년 원년.

경신년 52년. 제왕께서 오가와 더불어 나라 안을 역순(歷巡)하시다가 개사성

(蓋斯城)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축가를 바치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선인(仙人)의 나라에서 즐겁게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

습니다. 제왕의 덕은 얼그러짐이 없고 제왕의 도는 치우침이 없으시니 백성들과

이웃들은 수심과 고통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책화(責禍)하고 은혜로 관경

(管境)하니 성(城)도 나라도 전쟁과 정벌을 겪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맙구나. 고맙구나. 짐의 닦은 덕이 일천하여 백성들

의 여망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구나.” 하셨다.

병자년 6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단군세기

- 22 -

18세 단군 동엄(冬奄) 재위 49년

정축년 원년.

병신년 20년.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을축년 49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구모소(緱牟蘇)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緱牟蘇) 재위 55년

병인년 원년.

기축년 24년. 남상인(南常人)이 입조(入朝)하였다.

기미년 54년.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

었다.

경신년 5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우가의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固忽) 재위 43년

신유년 원년.

신미년 11년.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년 36년. 영고탑을 수축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경자년 40년. 공공(共工)의 공흘(工忽)이 9환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년 43년. 사해가 아직 평안하지 못한데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소태(蘇

台)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 재위 52년

갑진년 원년. 은나라 주인(主) 소을(小乙)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경인년 47년. 은나라 주인 무정(武丁)이 이미 귀방(鬼方)을 이기고 다시 대군

을 이끌고 침공해 왔다.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의 나라가 우리를 위해 대패시

키므로 은이 화의를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임진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밀히 군사로 귀방을 습격하여 멸

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지역을 공략하여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는데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왕께서 이를

단군세기

- 23 -

윤허하지 않았으나 거듭하여 요청하므로 이에 허락하고 이름을 두막루(豆莫婁)

라고 하였다.

을미년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이어서 우현왕

이 되었다. 제왕께서 나라 안을 순행하며 사냥하시고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

러 부로(父老)들을 많이 모아서 하늘에 제사하고 가무(歌舞)를 하였다. 그리고

오가를 소집하고 그들과 더불어 왕위 계승을 의논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늙으

면 근면하고자 하나 권태로와 진다. 정치를 서우여(徐于餘)에게 위임하고자 한

다.” 하셨다. 이에 살수(薩水)의 땅 100리를 서우여에게 봉해주고 명하여 섭주

(攝主)로 삼고 이름하여 기수(奇首)라고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

내어 제왕께서 그것을 중지케 하였으나 제왕은 끝내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

왕은 좌우의 엽호(獵戶) 수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제왕도 부득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

(庶人)으로 하였다. 제왕은 아사달에 숨어서 마침내 생을 마쳤다. 이 해에 백이

(伯夷)와 숙제(叔齊)도 또한 고죽국(孤竹) 임금(君)의 자손으로서 나라를 도망하

여 동해가에 살면서 힘써 밭을 갈아 자급하였다.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재위 48년

병신년 원년. 제왕께서 명하여 녹산(鹿山)을 수축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가

을 9월에 친히 장당경에 행차(親幸)하여 고등왕의 묘(廟)를 세우고 제사하였다.

11월에 친히 9환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번 싸워 은나라 수도를 파괴하였다.

이어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파괴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이들을

강의 상류까지 추격하여 승첩(捷)의 하례를 받았다.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

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목축과 농업을 하게 하니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신축년 6년. 신지 육우(陸右)가 진언하기를, “아사달은 천년제업(千年帝業)의

땅으로 이미 대운이 다하였고 영고탑은 왕기(王氣)가 농후하여 백악산(白岳山)

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라고 하고 성을 쌓아 그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요청

하였으나 제왕께서 불허하며 말하기를, “새 수도가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갈 것인가.” 하셨다.

을묘년 20년. 이 때에 남국(藍國)이 자못 강성하여 고죽국의 임금(君)과 더불

어 여러 적들을 몰아내고 남으로 천도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은나라 국

경에 가까운 곳에 살았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게 하

여 빈기(邠岐)를 점거하고 그곳의 유민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

(黎)라고 칭하였다. 서융(西戎)과 더불어 은가(銀家)의 여러 제후 사이에 있는 잡

단군세기

- 24 -

처(雜處)였다.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

山)의 이남의 땅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년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군사로서 병란을 일으키므로 제왕께서

잠시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그를 따랐다.

계미년 4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아흘(阿忽)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홀(阿忽) 재위 76년

갑신년 원년. 명하여 황제의 아우인 고불가(古弗加)에게 낙랑홀(樂浪忽)을 다

스리게 하였다.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의 임금(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하

는 병사를 살피게 하였다. 은나라 지역에 6읍(邑)을 설치하였다. 은나라 사람들

이 서로 싸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므로 병력을 보내어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가

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명하여 죄수와 포로들을 석방하였

다.

을유년 2년. 남국(藍國)의 임금(君) 금달(今達)이 청구의 임금(君) 및 구려(句

麗)의 임금(君)과 더불어 주개(周愷)에서 회합하였다. 몽고리의 병력과 합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城柵)을 부수고 오지까지 깊이 들어가 회대의 땅

을 평정하였다. 포고씨(浦古氏)를 엄(淹)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방고씨(邦

古氏)를 회(淮)에 분봉하였다. 은나라 사람들은 들리는 통문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년 5년. 두 한(韓)과 오가(五加)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였다.

기해년 7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 하였다.

24세 단군 연나(延那) 재위 11년

경자년 원년. 명하여 황제의 숙부인 고불가가 섭정하게 하였다.

신축년 2년. 여러 한(汗)들은 조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하였

다.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재앙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기원하여 백성의 뜻이 하

나로 정해지게 하였다.

경술년 11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率那) 재위 88년

단군세기

- 25 -

신해년 원년.

정해년 37년.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거주하면서 인사(人事)를 사절

하였다.

정유년 47년. 제왕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면서 옛 예법을 강론하시고 이어

영신(侫臣)과 직신(直臣)의 구분법을 물으셨다.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

아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요, 위세를 두려

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옵니다. 임금은 원천이요 신하는 유천이니 원

천이 이미 탁한데 유천이 맑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한 것처럼 고로 임금이 성스

럽게 된 이후에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왕께서 “훌륭한 것 같

다.” 하셨다.

기유년 59년. 농사가 풍년이 들어 줄기 하나에 이삭이 5개나 되는 조(粟)가 있

었다.

무인년 8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鄒魯) 재위 65년

기묘년 원년. 가을 7월에 백악산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무리를 지어 와서

놀았다.

계미년 6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豆密) 재위 26년

갑신년 원년.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서 사아란산(斯阿蘭山)이 무너졌다. 이 해

에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묘년 8년. 큰 가뭄 끝에 많은 비가 쏟아져 하류의 백성들은 수확이 없으므

로 제왕께서 명하여 창고를 열어 두루 나누어 주게 하였다.

기유년 2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奚牟) 재위 28년

경술년 원년. 제왕께서 병이 있어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축원하

도록 하였더니 곧 병이 나았다.

경신년 11년.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旋風)이 크게 일고 폭우가 쏟아지니 땅

위에 어류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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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년 18년. 빙해(氷海)의 여러 한(汗)들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정축년 2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摩休) 재위 34년

무인년 원년. 주(周)나라 사람이 조공을 바쳤다.

을유년 8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병술년 9년. 남해의 조수가 3자(尺)나 물러났다.

신해년 34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奈休) 재위 35년

임자년 원년. 제왕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여 청구(靑邱)의 정사를 살핀 후에 돌

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분조(分朝)의

여러 한(汗)들을 모아 병사를 사열하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주나라 사람과 수호

(修好)하였다.

병진년 5년. 흉노(凶奴)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년 3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등올(登屼)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登屼) 재위 25년

정해년 원년.

임인년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놀았다.

신해년 2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아들 추밀(鄒密)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년 원년.

갑인년 3년. 선비산(鮮卑山)의 추장(酋長) 문고(們古)가 조공을 바쳤다.

계해년 12년. 초(楚)나라의 대부(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입조하였다. 갑자년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년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년 43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하였다.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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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 단군 감물(甘勿) 재위 24년

임오년 원년.

계미년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무자년 7년.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

히 제사하였다. 서고문(誓告文)이 있어 이르기를, “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

어 그 공이 나란하고 삼신의 덕은 삼성으로 인하여 더욱 커집니다. 허(虛)와 조

(粗)는 한 몸이요 개체(個)와 전체(全)는 하나와 같으며 지혜(智)와 삶(生)을 같

이 닦고 형체(形)와 혼(魂)을 함께 넓힙니다. 진실한 가르침은 이렇게 세워지고

믿음은 오래되면 저절로 밝아지고 이러한 세력이 상승함으로서 존귀함은 회복되

고 빛납니다. 가파른 저 백악은 만고로부터 한결같이 푸르고 열성(列聖)은 계승

되고 문(文)은 만들어지고 예악(禮樂)은 흥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규모가 이처럼

크니 도술(道術)은 연못처럼 넓습니다. 하나를 잡으면 셋이 들어와 있고 셋을 모

으면 하나로 돌아가니 하늘의 규범(天戒)을 널리 강연하시어 영세(永世)의 법이

되게 하소서.” 하셨다.

을사년 24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오루문(奧婁門)이 즉위하였다.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 재위 23년

병오년 원년.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으므로 만 백성이 기쁘고 평안하여

도리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는 아침 해가 있어 밝은 빛을 환하게 비추고 나라에는 성인이 있어 덕

의 교화를 널리 입히네. 대읍국(大邑國) 우리 배달성조(倍達聖朝) 많고 많은 사

람들이 가혹한 정치를 못 보았네. 밝고 밝은 노래 소리 오래토록 태평일세.’

을묘년 10년.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니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무진년 23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하였다.

35세 단군 사벌(沙伐) 재위 68년

기사년 원년.

갑술년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큰 홍수가 있었다.

임오년 14년. 호랑이가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년 24년. 큰 물이 나서 산이 붕괴되고 골짜기가 메워졌다.

무오년 50년. 제왕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파견하여 평해(平海) 위의

단군세기

- 28 -

웅족(熊)을 습격하였다.

갑술년 66년. 제왕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여 곧바로 연(燕)나라의 수도를 돌

파하고 제(齊)나라 병사와 함께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첩(捷)을 고

하였다.

병자년 6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하였다.

36세 단군 매륵(買勒) 재위 58년

정축년 원년.

갑진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년 32년. 서촌의 민가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년 35년. 용마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 별문자(星文)가 있었다.

갑인년 38년. 협야후(陜野侯) 배반(裵幋)을 파견하여 가서 해상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년 52년. 제왕께서 병력을 보내어 수유(須臾)의 병사와 함께 연나라를 정

벌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므로 제나라 사람들이 대

거 고죽국(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에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므로 화

해를 구걸하고는 돌아갔다.

갑술년 5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하였다.

37세 단군 마물(麻勿) 재위 56년

을해년 원년.

경오년 56년. 제왕께서 남쪽을 순행하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서하셨다.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38세 단군 다물(多勿) 재위 45년

신미년 원년.

을묘년 45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39세 단군 두홀(豆忽) 재위 36년

병진년 원년.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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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 36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40세 단군 달음(達音) 재위 18년

임진년 원년.

기유년 18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41세 단군 음차(音次) 재위 20년

경술년 원년.

기사년 20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 재위 10년

경오년 원년.

기묘년 10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물리(勿理)가 즉위하였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년 원년.

을묘년 36년.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스스로 장군을 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이끌고 서북 36군(郡)을 함락하였다. 제왕께서 병력을 파견하였

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에 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습하였다. 제왕께서는

좌우의 궁인(宮人)과 함께 묘사(廟社)의 신주(主)를 받들고 배를 띄워 해두(海

頭)로 가시더니 곧 붕서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物)이 어명

을 받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였다. 9지(九地)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고 동서압록의 18성이 모두 병사를 보내어와 원조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物) 재위 29년

병진년 원년. 3월에 큰 물이 도성을 휩쓸었다. 적들은 크게 어지러움에 빠졌

다. 구물이 병사 1만명을 이끌고 가서 적을 토벌하니 적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우화충을 참수하였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에게 추대되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하고 이어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

단군세기

- 30 -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하였다. 이후로 삼

조선은 단군을 일존(一尊)으로 받들어 모시는 임리(臨理)의 제도를 유지하였으나

화전(和戰)의 권한은 일존에게 있지만은 않았다. 7월에 명하여 해성(海城)을 개

축하여 평양(平壤)으로 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정사년 2년. 예관(禮官)이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할 것을 청하니 곧 3월

16일이었다. 제왕께서 친히 행차하여 경배하였는데 첫 번째 절에서는 세 번 고

두하고 두 번째 절에서는 여섯 번 고두하고 그리고 세 번째 절에서는 아홉 번

고두하는 예법이었다.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 번을 고두하였는데 이것을 삼

육대례(三六大禮)라고 한다.

임신년 17년. 주와 군에 감찰관을 파견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피게 하고 효

도하는 사람과 청렴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년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신정(正)을 축하하였다.

갑신년 29년.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余婁) 재위 55년

을유년 원년. 장령(長嶺)과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신축년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방의 군(郡)에 침입하므로 수장(守將) 묘장춘(苗

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년 32년. 연나라 사람이 배도(倍道)하여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

키고 운장(雲障)을 위협하였다. 번조선(番朝鮮)이 명하여 상장군 우문언(于文言)

이 이를 막게 하였다. 진(眞)과 막(莫) 두 조선(朝鮮)도 역시 병사를 보내어 도우

러 왔다. 미리 복병을 두었다가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공격하여 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정사년 33년. 연나라 사람이 패하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

어 장차 습격하려 하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부수고 그 장수를 사살하였

다.

신미년 47년. 북막(北漠)의 추장 액니차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와서 말 200필

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번조선의 소장(少將) 신불사(申不

私)가 병사 1만명을 이끌고 연나라 상곡(上谷)을 함께 공격하여 그것을 빼앗고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무인년 54년. 상곡에서의 공사(役)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공해 오더니 이때

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다시 조양(造陽)으로

서쪽 경계를 삼았다.

단군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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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년 55년.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드니 죄 없이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가 생각하여 크게 사면하고 친히 나가서 비를 빌었다. 9월에 제왕께서 붕하

시고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普乙) 재위 46년

경진년 원년. 12월에 번조선의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에서 보낸 자객의 해를

입으니 오가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무술년 19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병력으로 입궁하여 스스로 번조

선의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할 것을 청하였다. 제왕께서 이를 허락하시

고 연나라를 굳게 방비토록 하였다.

정사년 38년. 도성(都城)이 큰 불에 타버리므로 제왕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나아갔다.

계해년 44년. 북막의 추장 니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므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후한 상을 내렸다.

을축년 46년. 한개(韓介)가 수유의 병사를 이끌고 궁궐에 침범하여 스스로 왕

이 되려하므로 상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제왕께

서 환도한 후에 대사면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미약해져서 국고가

늘어나지 않았다. 제왕께서 붕서하시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므로 고열가가 단

군 물리(勿理)의 현손으로 무리들의 사랑으로 추대되고 또 공이 있으므로 마침

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 재위 58년

병인년 원년.

기묘년 14년. 단군왕검의 묘사(廟)를 백악산에 세우고 명하여 유사(有司)가 그

곳에 사시사철에 제사하게 하고 제왕께서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하였다.

기유년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였다.

계축년 48년. 10월 1일에 일식이 있었다. 이 해 겨울에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

(阿里當夫)가 군사(軍師)를 출정시켜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제왕께서

따르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며 조공하지 않았다.

임술년 57년. 4월 8일에 해모수(角+羊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 내려와서 병사

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槀離國) 사람이었다.

계해년 58년. 제왕께서는 어질고 여리고 결단력이 없으므로 명령을 내려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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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화란(禍亂)을 자주 일으키

므로 나라의 재물은 늘지 않고 백성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 갔다. 3월에 하늘

에 제사하고 그날 저녁에 오가와 더불어 의논하고 말하기를,

“옛날 우리 열성(列聖)께서는 조극수통(肇極垂統)하시어 덕을 넓고 멀리까지

심어 영세의 법이 되었으나 지금은 왕도는 쇠약하고 여러 한(汗)들이 강함을 다

투게 되었다. 오직 짐이 덕이 적고 나약하고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초대하여 위

로할(招撫) 방책이 없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다. 오직 그대 오가들이 현자를 택

하여 천거하도록 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포로들을 놓아 보

내라.” 하셨다. 이튿날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에 올랐다. 이에

오가들이 함께 국사를 6년 동안 다스렸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은밀히 수유(須臾)와 더불어 약속하고 옛 도

읍지(古都)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고 칭하였다. 4경계

내의 모든 사람들이 명령을 받들었다. 여러 장군을 봉하고 수유후(須臾侯) 기비

(箕丕)를 승격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가서 상하의 운장(雲障)을 지키도록 하였

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고 고구려 이곳은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다. 고로 고구려라고 칭하였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년부터 금상(今上) 즉위 후 12년 계묘년 까지 약 3,616년이

었다. 이해 10월 3일 홍행촌수(紅杏村叟)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

다.

북부여기 상

- 33 -

북부여기(北夫餘紀) 상(上)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편찬(撰)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년 원년 제왕(帝)께서는 타고난 자태가 영민 용맹하시고 신과 같은 빛으

로 사람을 뚫어보시므로 그를 바라보면 천왕랑(天王郞)과 같았다. 나이 23세에

하늘을 따라서 내려오시니 이때가 단군 고열가 57년,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웅

심산(熊心山)에 의거하여 일어나 난빈(蘭濱)에 궁실을 축성하고 오우관(烏羽冠)

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무리

500인과 더불어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저녁에는 하늘 궁실에 올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계해년 2년. 이해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하였다. 연호법(烟戶法)을 제정하여

오가(五加)의 병력을 둔전(屯田)에 나누어 배치하여 자급하고 준비하였으므로 우

려가 없었다.

기사년 8년. 제왕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故都)에서 오가에게 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국인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이

되었는데 이가 북부여의 시조이시다. 겨울 10월에 공공이 태모를 양육하는 법

(公養胎母法)의 법을 제정하여 사람들이 반드시 태훈(胎訓)에서 시작하도록 가르

쳤다.

임신년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

(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살해하고 크게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경진년 19년. 비(丕)가 죽자 아들 준(準)이 부왕의 봉지를 습격하여 번조선(番

朝鮮)의 왕이 되었다. 관리를 파견하여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

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이보다 먼저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介)를 파견하여 우리

서쪽 변방을 침입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니 이를 경계로 삼게 되었다.

신사년 20년. 명하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7월에 새로운 궁

궐 336칸을 지었다.

계미년 22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

良)과 함께 박랑사(博浪沙)에서 진(秦)나라 왕(王) 정(政)을 저격하였으나 잘못

맞춰 부차(副車)를 맞혔다.

임진년 31년. 진승(陣勝)이 병사를 일으키므로 진(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소란

하였다. 이에 연(燕)나라, 제(齊)나라, 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번조선으로 부속하

북부여기 상

- 34 -

였는데 그 무리가 수만 가구였다. 상하의 운장(雲障)에 나누어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그들을 감독하였다.

기해년 38년.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요동의 옛 요새(塞)를 복구하고 수리하여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는데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병오년 4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갔다.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제왕께서는 허락하지 않으

셨다. 제왕께서 병으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연유로 번조선왕 기준이

여러번 실기(失機)하므로 마침내 위만에게 박사(博士)라는 벼슬을 주어 상하 운

장을 구획하여 그를 봉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태자 모수리(慕漱離)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 재위 25년

정미년 원년. 번조선 왕 기준(箕準)은 수유(須臾)에 오래 살면서 전에 은혜를

많이 베풀어 백성들은 모두 풍요로웠는데 뒤에 떠돌아다니는 도적(流賊)에게 패

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諸加)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대(卓

大)를 받들어 함께 등정(登程)하여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대의 태어난 고향이다. 이를 중마한(中馬韓)이라고 한다. 이때에 변한(弁)과 진

한(辰)의 두 한(韓)도 역시 각각 그 무리로서 100리의 봉함을 받고 도읍을 세워

스스로 나라 이름을 정하였는데 모두 마한의 정치명령을 들어 실행하고 세세토

록 배반하지 않았다.

무신년 2년. 제왕께서 상장군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평양(平壤)에 성책(城

柵)을 설치하여 도적 위만을 방비케 하였는데 위만도 또한 억압되어 침범의 우

려를 반복하지 않았다.

기유년 3년. 해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으

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니 중부여(中夫餘) 일대는 모두 군량미(糧餉)에 따랐

다. 겨울 10월에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제정하여 경성(京)은 천왕이 친히

모두 위수(衛戍)하고 지방은 사출분진(四出分鎭)하니 마치 윷놀이로 전쟁을 보고

용그림(龍圖)으로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년 25년. 제왕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가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 재위 49년

임신년 원년. 정월에 낙랑왕(樂浪王) 최숭(催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海城)에

북부여기 상

- 35 -

납부하였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쌓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년 42년. 제왕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위만의 도적을

남려성(南閭城)에서 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년 49년. 일군국(一群國)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제

왕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가 즉위하였다.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또는 해우루(解于婁)) 재위 34년

신유년 원년. 장수를 파견하여 우거(右渠)를 토벌하다가 불리하므로 고진(高

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게 하고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

치하여 능히 우거를 방비하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고구려(高句麗) 제후로

삼았다.

계해년 3년. 우거의 도적이 대거 침략하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두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갑자년 4년. 제왕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이 지나도

록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년 6년. 제왕께서 친히 정예군 5,000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습격하여 격파

한 후에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하

였다.

정묘년 7년. 목책(木柵)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려(南閭)에 배치하

여 방비하므로 근심이 없었다.

계유년 13년. 한(漢)나라 유철(劉徹)이 평나(平那)에 침입하여 우거를 멸망시키

고 이에 4군(四郡)을 바꾸어 놓고자 강력히 군사로써 사방에서 침입하였다. 이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곳곳에 이르러 한(漢)나라 침략군

(寇)을 연파하고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함으로써 전쟁의 군대를 도와 큰 기세

에 보답하였다.

갑오년 34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와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곳에서

옮겨가시오.” 하셨다. 제왕께서 매우 걱정하시다가 이 달에 제왕께서는 근심걱정

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시고 황제(皇)의 아우인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동명왕이 병사로써 위협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군신들은 매우 걱정하였다.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진언하기를, “통하(通河)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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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 오곡을 심기 적당하므로 도읍지로 가합니

다.” 라고 하였다. 권유에 따라 왕께서 도읍을 옮겼는데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

夫餘) 혹은 동부여(東夫餘)라고 전한다.

북부여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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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北夫餘紀) 하(下)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편찬(撰)

5세 단군 고두막(高豆莫혹은 두막루(豆莫婁) 재위 22년, 재제위(帝) 27년)

계유년 원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왕께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준수하고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漢)나라 도적(寇)

들이 기승을 부리자 개연히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이에 졸본에

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혹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을해년 3년. 제왕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적이

없었다. 불과 10개월이 되지 않아서 무리들이 5,000매(每)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

다 한나라의 도적들은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거나 풍문만 들어도 무너져 달아

나 버리므로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의 서

안평(西安平)에 이르렀다. 이는 곧 옛 고리국(槀離國)의 땅이다.

갑오년 22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34년이다. 제왕께서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

川)의 한나라 도적을 쳐서 부수었다. 유민과 함께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연파하고 그 수비장수를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갖추어서 적을 막

았다.

을미년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고 여러 차례 애원하여 제위를 보

전하고자 하므로 제왕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봉하여 제후로

삼아 차릉(岔陵)으로 옮기게 하였다. 제왕께서 앞에 인도되어 북 치고 나팔 불면

서 무리 수 만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왔는데 이를 일컬어 북부여(北夫餘)라고 하

였다. 가을 8월에 한나라의 도적과 더불어 여러 차례 싸워서 서압록강의 위에서

크게 이겼다.

임인년 30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차릉에서 탄강하였다.

신유년 49년.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유명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서 장례를 지

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즉위하였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년 원년. 제왕께서 졸본천에서 즉위하고 부로(父老)들과 함께 백악산(白岳

山)에서 모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고 행사를 반포하니 참석한 내외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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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제왕께서는 태어나면서 신덕(神德)이 있어 능히 주술로

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불러 잘 구휼하였으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

角+羊慕漱)라고 불리었다. 이때에 한나라의 도적들이 요하(遼)의 왼편에 두루 미

쳐 소란하였는데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년 2년. 제왕께서 순행하시다가 영고탑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에 제왕께서 붕어하시고 고주몽이 유명에 따라 들어와 대통을 이었다. 이보

다 앞서 제왕께서는 자식이 없으므로 고주몽을 보시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딸

로서 아내(妻)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당시에 하부여(下夫餘) 사람들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하므로 어머니의 명을 받

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俠父) 등과 함께 3인이 덕으로 맺은 벗이 되

어 길을 떠나 차릉수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으므로 추격하는 병

사들이 그곳까지 압박할까 두려워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금일 도주하는데 추격하는 병사들이 곧 이르니 어찌하면

좋은가.” 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와 다리를 만들어 주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물고기와 자라는 이내 흩어졌다.

가섭원부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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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편찬(撰)

시조 해부루(解夫婁) 재위 39년

을미년 원년. 왕은 북부여에서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차릉으로 부르는 곳

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였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호랑

이, 표범, 곰, 이리 등이 많아서 사냥하기 편리하였다.

정유년 3년. 명하여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진휼(賑)을 설치하여 멀고 가까

운 유민들을 초대하여 위무케 하였다. 때에 맞춰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고 또 밭

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년 이내에 국가는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융성해졌다.

때마침 비가 차릉을 기름지게 하므로 백성들은 왕정춘(王正春)의 노래를 불렀다.

임인년 8년. 이보다 먼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놀러 나갔다가 부여의

황손인 고모수(高慕漱)의 처소에 유혹되어 강제로 압록 강변의 집안에 이르러

사통하였다. 이내 승천(升天)하여 돌아오지 않으므로 부모는 유화가 중매없이 따

른 것을 책망하여 변두리 집에 귀양살이로 거주하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支)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 한다. 왕은 이상하게 여겨 유화

와 함께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은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가 있어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를 일러 고주몽(高朱

蒙)이라고 하였다. 모습이 영리하고 장대하였는데 나이 7세에 스스로 활과 화살

을 만들었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

데 고로 이로써 이름이 되었다.

갑진년 10년.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하루는 산천(山川)에 제사올리고

대를 이을 아들이 있기를 빌었다. 그기서 말을 타고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

이 서로 함께 눈물을 흘리므로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

하기를, “이는 마침내 하늘이 내게 지금의 아들을 준 것이다.” 하시며 이에 거두

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임술년 28년. 나라 사람들은 고주몽이 국가에 이롭지 않으므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

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렀다. 이듬해에 새 나라를 열었는데 이가 고

구려의 시조이다.

계유년 39년. 왕이 몽하고 태자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다.

가섭원부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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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금와(金蛙) 재위 41년

갑술년 원년. 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정유년 24년. 유화 부인이 몽어하시자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

셔와 장례지냈다. 명하여 황태후(皇太后)의 예로서 벼슬을 주고 산릉(山陵)을 만

들고 그 옆에 묘사(廟祠)를 세웠다.

갑인년 41년. 왕이 몽어하시고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帶素) 재위 28년

을묘년 원년. 봄 정월에 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질자(質子)를 교환할 것

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烈帝)는 태자 도절(都切)로서 질자를 하였으나 도

절은 가지 않았다. 왕은 이에 화가나 겨울 10월에 병력 5만으로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으로 동사자가 많으므로 퇴각하였다.

계유년 19년. 왕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년 28년. 2월에 고구려가 대거 침공해오므로 왕은 몸소 무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진흙탕을 만나 왕의 어가의 말이 수렁에 빠져 나오지 못하므로 고

구려의 상장군 괴유(怪由)가 바로 앞에서 왕을 죽였다. 그럼에도 아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때마침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므로 고

구려 열제는 군사를 감추어 밤에 탈출하여 샛길을 따라 돌아가 버렸다. 여름 4

월에 왕의 아우는 따르는 무리 수백인과 함께 달아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사냥나온 것을 보고 마침내 그를 죽여서 그 백성들을 취하고

일어나 갈사수(曷思水) 연안을 보전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니 이것이 갈

사(曷思)이다. 태조 무열제(武烈帝) 융무(隆武) 16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都頭

王)은 고구려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나라를 들어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 역년 47년만에 나라의 명이 끊어졌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하고 관직과 집

을 하사하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이에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하

였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나라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선왕께서는 시해되

고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갈사는 구석에 치우쳐 있어 안전

하지만 국가가 자립하기 불가능하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없어 이후로 나라를

다시 부흥할 가망이 없으므로 차라리 항복하여 살길을 도모하리라.” 라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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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리하여 옛도읍의 백성 만여 가구가 고구려에 투항하므로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으

므로 낙씨 성을 하사하였다.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에서 백랑곡(白

狼谷) 또 연나라 근처에 이르렀다. 문자열제(文咨烈帝) 명치(明治) 갑술년(甲戌)

에 이르러 그 나라를 꺾음으로써 고구려에 편입시키니 연나부 낙씨는 마침내 제

사하지 못하였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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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太白逸史) 목록(目錄)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제1(第一)

환국본기(桓國本紀) 제2(第二)

신시본기(神市本紀) 제3(第三)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제4(第四)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제5(第五)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제6(第六)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제7(第七)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제8(第八)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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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太白逸史)

일십당(一十堂) 주인(主人) 이맥(李陌) 편찬(編撰)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제1(弟一)

표훈천사(表訓天詞)에서 전하기를 대시(大始)에 상하사방에 일찍이 아직 암흑

은 보이지 않고 옛날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하나의 빛만이 밝았다. 상계(上

界)로부터 물러나니 삼신(三神)이 있었는데 바로 일상제(一上帝)였다.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므로 각각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하는 것이 삼신이다. 삼신

은 만물을 이끌어 내시고 전 세계의 무량한 지능을 모두 다스리신다. 그 형체를

볼 수는 없지만 최상의 상천(上天)의 장소에 앉아 계시며 천만억토에 상주하신

다. 항상 광명(光明)을 크게 발하시고 신묘함을 크게 나타내시며 길한 상서로움

을 크게 내리신다. 기(氣)를 내불어서 만물을 감싸고 열(熱)을 뿜음으로써 만물

의 종자를 번성케 하시고 신(神)을 행함으로서 세상일을 이치로 다스리신다. 아

직 기(氣) 있기 전에 물이 생겨나게 하여 태수(太水)로 하여금 북방에 상주하면

서 생명을 맡게 하고 흑(黑)을 숭상하게 하였다. 아직 기틀(機)이 있기 전에 불

이 생겨나게 하여 태화(太火)로 하여금 남방에 상주하면서 생명을 맡게 하고 적

(赤)을 숭상하게 하였다. 아직 질(質)이 있기 전에 나무가 생겨나게 하여 태목

(太木)으로 하여금 동방에 상주하면서 생명을 맡게 하고 청(靑)을 숭상하게 하였

다. 아직 형(形)이 있기 전에 금이 생겨나게 하여 태금(太金)으로 하여금 서방에

상주하면서 생명을 맡게 하고 백(白)을 숭상하게 하였다. 아직 체(體)가 있기 전

에 흙이 생겨나게 하여 태토(太土)로 하여금 중앙에 상주하면서 황(黃)을 숭상하

게 하였다. 이에 천하에 두루 존재하는 자가 오제(五帝)를 주관하고 생명을 맡으

니 이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요 지하에 두루 존재하는 자가 오령(五靈)을

주관하고 효(效)를 이루니 이가 지하여장군이다.

생각컨대 무릇 삼신은 천일(天一)이라 하고 지일(地一)이라 하고 태일(太一)이

라고 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한다.

생각컨대 무릇 오제는 흑제(黑帝)이라 하고 적제(赤帝)이라 하고 청제(靑帝)이

라 하고 백제(白帝)이라 하고 황제(黃帝)이라고 한다. 흑제는 숙살(肅殺)을 주관

하고 적제는 광열(光熱)을 주관하고 청제는 생양(生養)을 주관하고 백제는 성숙

(成熟)을 주관하고 황제는 조화(和調)를 주관한다. 생각컨대 무릇 오령은 태수이

라고 하고 태화이라 하고 태목이라 하고 태금이라 하고 태토이라고 한다. 태수

삼신오제본기 제1

- 44 -

는 영윤(榮潤)을 주관하고 태화는 용전(鎔煎)을 주관하고 태목은 영축(營築)을

주관하고 태금은 재단(裁斷)을 주관하고 태토는 가종(傢種)을 주관한다. 이에 삼

신은 곧 오제를 독려하여 각자에게 명하여 널리 그 통력을 드러내게 하고 오령

을 독려하고 계도하여 그 키우는 일을 이루어 드러나게 하였다. 해가 움직여 낮

이 되고 달이 움직여 밤이 되고 별을 살펴 측정하여 역법(曆)으로 하고 춥고 더

운 것으로 연대를 기록하였다. (고기잡이 구역(漁區)에는 배를 보내어 바다를 지

키고 농사짓는 구역(農區)에는 수레를 보내어 육지를 지키게 하였다.) 크도다.

비로소 삼신일체(三神一體) 그것이 만물(庶物)의 원리가 되고 만물의 원리 그것

이 덕이 되고 지혜가 되고 힘이 된다. 높고도 넓도다. 세상에 충만하게 가득찬

현묘함이여. 불가사의한 그것이 운행(運行)이 된다. 당연히 만물 각자는 수(數)가

있고 수는 아직 반드시 그 만물을 다하지 않는다. 만물 각자는 이치가 있고 이

치는 아직 반드시 그 만물을 다하지 않는다. 만물 각자는 힘이 있고 힘은 아직

반드시 그 만물을 다하지 않는다. 만물 각자는 무궁함이 있고 그 무궁함은 아직

반드시 그 만물을 다하지 않는다. 세상에 살면 살았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

었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장구한 생명의 근본이다. 고로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있다. 비유하면 모든 살아 있는 나무에는 뿌리

가 있고 반드시 싹이 있고 싹이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고 꽃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있고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쓰임이 있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태양이 움

직일때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明)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봄(觀)이

있고 봄이 있으면 반드시 만듦(作)이 있고 만듦이 있으면 반드시 공(功)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즉 무릇 천하 일절(一切)의 사물이 개벽(開闢)이 있었기에 존재

하고 진화(進化)가 있었기에 존재하고 순환(循環)이 있었기에 있는 것이다. 오직

원기(元氣)가 지극히 현묘한 신이다. 스스로 하나를 집으면 셋을 포함하는 것의

충실한 광휘(光輝)라는 것이 있다. 머무는 즉 존재하고 느끼는 즉 응한다. 그것

이 오며 아직 시작함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가며 아직 마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통하는데 아직 갖추어지지 않고 만가지를 이루는데 아직 있지

않다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이르기를 오직 천일신(天一神)께서 아득하게 위에 계시면

서 삼대(三大), 삼원(三圓), 삼일(三一)로서의 영부(靈符)가 되어 이것이 만만세의

만만 백성에게 크게 내리고 내린다. 일절 오직 삼신께서 심기신(心氣身)을 조화

하시는바 반드시 모름지기 서로 믿으나 아직 반드시 영겁토록 서로 지키지 못한

다. 영지의(靈智意) 삼식(三識)이 곧 영각생(靈覺生)의 삼혼(三魂)이 되고 또 그

요소에 연원함으로서 능히 형연혼(形年魂)을 성하게 한다. 일찍이 경계에 더불어

태백일사

- 45 -

감촉식(感觸息)이라는 것이 있는바 이것이 진(眞)과 망(妄)이 되어 서로 당기고

삼도(三途)가 이에 갈라진다. 고로 말하기를 참이 있으면 생하고 망령됨이 있으

면 멸한다고 하니 이에 인물(人物)이 균등하게 생겨나고 이것이 일(一)이다. 그

참됨의 근원은 성명정(性命精)으로 삼관(三關)이 되고 관(關)은 신의 정수(要會)

를 지키게 된다. 성은 명을 떠나지 아니하고 명은 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은

그 가운데 있다.

심기신(心氣身)은 삼방(三房)이 되고 방은 이루어 화함의 근원이 된다. 기는

심을 떠나지 아니하고 심은 기를 떠나지 아니하며 신은 그 가운데 있다.

감식촉(感息觸)은 삼문(三門)이 되고 문(門)은 길(途)을 가는 항상의 법(常法)

이 된다. 감은 식을 떠나지 아니하고 식은 감을 떠나지 아니하며 촉은 그 가운

데 있다.

성(性)은 진리의 원관(元關)이 되고 심(心)은 참된 신의 현방(玄房)이 되고 감

(感)은 참된 응함의 묘문(玅門)이 된다. 이치(理)를 구할때 성에서 구하면 참된

기틀(眞機)이 크게 발휘되고 신(神)의 존재를 마음에서 구하면 참된 몸이 크게

나타나고 응함(應)이 화하여 서로 감응하면 참된 업(業)이 크게 이루어진다.

경험하는 바에 시간이 있고 경계하는 바에 공간이 있으며 사람은 그 사이에

존재한다. 만물에는 허조(虛粗)의 동체(同體)라는 것이 있어 오직 일기(一氣)가

이미이고 오직 삼신(三神)이 이미이다. 마치는 것이 불가한 수(數)가 있고 피하

는 것이 불가한 이(里)가 있고 저항하는 것이 불가한 힘(力)이 있다. 혹시 선(善)

이나 선아님(不善)이 있으면 여러 영겁에 갚고 혹시 선이나 선아님이 있으면 여

러 자연에 갚고 혹시 선이나 선아님이 있으면 여러 자손에 갚는다고 하였다.

경(經)에서 전하기를 인물은 같이 세 가지 참됨을 받았으나 오로지 무리(衆)들

만이 땅에 미혹되어 삼망이 뿌리를 내리고 참됨과 망령됨이 대립하여 삼도를 이

룬다. 어버이의 도의 법(父道法)은 하늘처럼 참된 하나로 거짓이 없고 스승의 도

의 법(師道法)은 땅처럼 근면 하나로 태만함이 없고 군자의 도의 법(君道法)은

사람이 협력 하나로 어김이 없다고 하였다.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의 삼신설(三神說)에서 전하기를 상계(上界)의 주신(主

神)은 그를 이름하여 일컬어 천일(天一)이라 하고 조화를 주관하시고 절대지고

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무형으로서 형(形)이 되고 만물로 하여금 각자 그 성

(性)에 통하게 한다. 이것이 청진대(淸眞大)의 체(體)이다. 하계(下界)의 주신은

그를 이름하여 일컬어 지일(地一)이라 하고 교화를 주관하시고 지극히 선한 유

일의 법력을 가지고 계신다. 무위(無爲)로서 짓고 만물로 하여금 각자 그 명(命)

을 알게 한다. 이것이 선성대(善聖大)의 체(體)이다. 중계(中界)의 주신은 그를

이름하여 일컬어 태일(太一)이라 하고 치화를 주관하시고 최고 최상의 덕량(德

삼신오제본기 제1

- 46 -

量)을 가지고 계신다. 말없이 화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자 그 정(精)을 보정하게

한다. 이것이 미능대(美能大)의 체(體)이다. 그러므로 주체로는 곧 일상제(一上

帝)이고 각자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이 곧 삼신이다. 고로 환인씨(桓仁氏)

가 하나(一)가 변화하여 칠(七)이 되고 둘(二)이 변화하여 육(六)이 되는 운행을

계승하여 오로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주입하니 천하는 이것으로 화

하게 되었다. 신시씨(神市氏)는 천일(天一)이 물을 생겨나게 하고 지이(地二)가

불을 생겨나게 하는 위치를 계승하여 오로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통솔

하니 천하가 이것을 본받게 되었다. 왕검씨(王儉氏)는 지름길 하나가 셋을 두르

고 지름길 하나가 넷을 두르는 기틀(機)을 계승하여 오로지 왕도를 사용하여 천

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랐다고 하였다.

오제설(五帝說)에서 전하기를 북방의 사명(司命)을 일컬어 태수(太水)이라 하

고 그 제(帝)를 일컬어 흑이고 그 호를 일컬어 현묘진원(玄妙眞元)이라 하고 그

좌(佐)를 일컬어 환인(桓仁)이라고 하는데 소류천(蘇留天)에 있다. 이를 대길상

(大吉祥)이라고 한다. 동방의 사명을 일컬어 태목(太木)이라 하고 그 제를 일컬

어 청이라 하고 그 호를 일컬어 동인호생(同仁好生)이라 하고 그 좌를 일컬어

대웅(大雄)이라고 하는데 태평천(太平天)에 있다. 이를 대광명(大光明)이라고 한

다. 남방의 사명을 일컬어 태화(太火)이라 하고 그 제를 일컬어 적이라 하고 그

호를 일컬어 성광보명(盛光普明)이라 하고 그 좌는 포희(庖犧)인데 원정천(元精

天)에 있다. 이를 대안정(大安定)이라고 한다. 서방의 사명을 일컬어 태금(太金)

이라 하고 그 제를 일컬어 백이라 하고 그 호를 일컬어 청정견허(淸淨堅虛)이라

하고 그 좌를 일컬어 치우(治尤)이라고 하는데 균화천(鈞和天)에 있다. 이를 대

가리(大嘉利)라고 한다. 중방의 사명을 일컬어 태토(太土)이라 하고 그 제를 일

컬어 황이라 하고 그 호를 일컬어 중상유구(中常悠久)이라 하고 그 좌를 일컬어

왕검(王儉)이라고 하는데 안덕천(安德天)에 있다. 이를 대예락(大豫樂)이라고 한

다고 하였다.

오제(五帝)의 주(注)에서 말하기를 오방(五方)에는 각각 사명(司命)이 있는데

하늘에 있는 것을 일컬어 제(帝)이라 하고 땅에 있는 것을 일컬어 대장군(大將

軍)이라고 한다. 오방을 감독하고 살피는 것이 천하대장군이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것이 지하여장군이다. 용왕 현구(玄龜)는 선악을 주관하고 주작 적표(赤

熛)는 생명을 주관하고 청룡 영산(靈山)은 곡식을 주관하고 백호 병신(兵神)은

형벌을 주관하고 황웅 여신(女神)은 병을 주관한다고 하였다.

삼신산(三神山)은 천하의 뿌리산인 고로 삼신으로 이름한 것이다. 대저 상세

(上世) 이래로 모두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선유하면서 삼계(三界) 360만의 대주

천(大周天)을 펼쳐 화하였다고 믿는데서 유래한다. 그 본체는 생(生)하지 않고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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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滅)하지 않는 것이고 그 작용은 무궁무한하고 그 교정할 이치(檢理)는 시기가

있고 경계가 있다. 신의 지극한 징후와 지극한 현명과 신의 뜻과 같이 스스로

존재함은 끝내 지식으로서는 얻기 어렵다. 그를 맞이(迎)하며 희미하나마 볼 수

있는 것 같고 그에게 봉헌(獻)하며 숨 쉬듯이 들을 수 있는 것 같고 그를 찬송

(讚)하며 기쁜 듯이 내리는 것 같고 그에게 맹세(誓)하며 숙연하게 얻는 것이 있

는 것 같고 그를 보내며 황홀한 듯이 흡족함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만세토록

인민(人民)이 인식한 바로서 순응(順), 화합(和), 믿음(信), 기쁨(悅)의 영역에서

추앙(追仰)되는 것이다.

삼신은 혹은 삼(三)이 신(新)이 되고 신이 백(白)이 되고 신(神)이 고(高)가 되

고 고가 두(頭)가 되는 고로 역시 이를 백두산(白頭山)이라고 칭한다는 설명이

있다. 또는 전하기를 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의 전음으로 고어에서 백(白)은

해(奚)라고 일컫고 두(頭)는 마리(摩離)라고 일컫는다. 백두산의 이름 역시 이것

에서 지어진 것이다.

인류의 시조는 나반(那般)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아만과 서로 만난 그곳을 아

이사타(阿耳斯它)이라 하고 또는 사타려아(斯它麗阿)이라고도 칭한다. 하루는 꿈

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婚禮)를 올리고 맑은 물로 하늘에 고한 다음

돌아가며 마셨다. 산 남쪽(山南)의 주작이 와서 즐거워하고 물 북쪽(水北)의 신

구가 상서로움을 보이고 계곡 서쪽(谷西)의 백호가 산굽이를 지키고 시내 동쪽

(溪東)의 창룡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가운데에는 황웅이 거기서 살고 있었다. 천

해(天海),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白)은 본래 9환(九桓)에 속하고 대개 9

황(皇) 64민(民) 모두는 그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산과 하나의 물로 각각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고 수많은 여자와 수많은 남자들이 또한 서로 경계를 나누

고 그 경계를 따라서 달라지게 되었다. 국가가 별개로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창세(創世)의 조서(條序)는 뒷날 상고할 수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 뒤에 제왕

환인(桓因)께서 나타나니 나라 사람들이 사랑으로 추대하고 말하기를 안파견(安

巴堅) 또는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였다. 대개 소위 안파견이란 하늘을 계승한

아버지를 세운 것의 명칭인 것이다. 소위 거발환이란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정한 것의 호칭인 것이다. 이로부터 환인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구분하여

다스렸는데 이를 9황 64민이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삼신은 하늘을 생겨

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환인은 사람을 가르쳐 뜻을 세웠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서로 전하여 현묘한 도를 얻고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이미 천

지인 삼극(三極)과 대원일(大圓一) 그것이 만물(庶物)의 원 뜻이 되는 것인즉 천

하 9환의 예악(禮樂)이 어찌 삼신의 옛제사의 풍속에 없을 것인가. 전(傳)에서

말하기를 삼신의 뒤를 칭하여 환국(桓國)이라 하고 환국은 천제(天帝)가 거주하

삼신오제본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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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연방국(邦)이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신은 환국의 선대에 존재하였고 나

반이 죽어서 삼신이 되었다고도 하니 지아비(夫) 삼신(三神)이라는 분은 영구한

생명의 근본이다. 고로 말하기를 인물이 다 같이 삼신에게서 나왔고 삼신으로

한 근원의 조상이 된다고 하였다. 환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고 후에 칭하여 나반을 대선천(大先天)이라 하고 환인을 대중천(大中天)이라

고 하였다. 환인은 환웅, 치우와 함께 삼황(三皇)이라고 하였다. 환웅을 칭하여

대웅천(大雄天)이라고 하고 치우를 지위천(智偉天)이라고 하였다. 이는 황제중경

(皇帝中經)에서 비롯된 유래를 적은 것이다. 삼광(三光)과 오기(五氣)는 모두 시

각과 청각의 감각에 있고 세월이 날로 진화함에 따라 불을 모아 쓰게 되었고 언

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문자를 제작하게 되었다. 우승과 열패로 서로 다툼이 시

작되고 귀(耳)를 일어나게 하였다. 곰부족(熊族) 중에 단국(檀國)이 있어 가장 강

성하였다. 왕검(王儉) 역시 하늘로부터 불함산에 내려 오셨고 사람들이 함께 세

워 단군(檀君)이 되었다. 이분을 칭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한다. 태어나

면서부터 신성함(神聖)과 원만함(圓滿)을 겸하였고 9환과 삼한관경(三韓管境)을

통합하고 신시의 옛규범을 회복하여 천하를 크게 다스리니 모든 세상 사람들이

천신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로부터 보은의 예를 숭상하여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

다.

대개 9환족은 나뉘어 다섯 인종이 되는데 피부색과 얼굴 모양으로 구별을 하

였다. 모두 그 풍속이 실함(實)을 취하고 이치(理)를 탐구하였다. 일을 대책함이

그기에서 구하였는데 곧 같은 것이다. 부여에는 수해, 가뭄, 병란, 질병에 국왕에

게 책임을 물어 충성됨(忠)과 간사함(邪)과 존재함(存)과 망함(亡)을 필부와 같

이 귀속시키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다.

씨족(族)을 색(色)에 따라 구분하면 종족은 황색부류의 사람은 살색이 조금 노

랗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고 광대뼈는 두드러지고 머리는 검고 눈은 평평하고 청

흑색이다. 백색부류의 사람은 살색은 밝고 광대뼈는 두드러지고 코는 튀어나오

고 머리는 회색이다. 적색부류의 사람은 살색은 녹슨 구리색이고 코는 낮고 코

끝이 넓으며 이마는 뒤로 젖혀지고 머리는 말려 오그라져 있으며 얼굴모양은 황

색부류의 사람과 비슷하다. 남색부류의 사람은 전하기를 풍족(風族) 또는 종색종

(倧色種)이라고도 하는데 그 살색은 암갈색이고 얼굴모양은 오히려 황색부류의

사람과 같다.

삼한의 옛풍속에는 모두 10월 상일(上日)에는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원단

(圓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올렸다. 땅에 제사올리는 것을 방구(方丘)이라 하고

선조에게 제사올리는 것을 각목(角木)이라고 하였다.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은

모두 그 전해져 오는 법속(遺法)이다. 하늘에 제사올릴 때에는 한(韓)이 반드시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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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히 제사올렸는데 그 예법이 매우 성대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이날에는 멀

리는 물론 근방의 남녀들이 모두 그 생산한 것을 바치고 북치고 나팔 불며 온갖

놀이(百戱)가 갖추어졌다. 작은 무리의 여러 국가들이 모두 와서 방물과 진기한

보물을 바치니 언덕과 산처럼 빙둘러 쌓였다. 대개 백성들을 위하여 풍년 즉 소

득을 기원하였는데 이로서 삼한관경을 번성시키기 위함이었고 소도(蘇塗)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곧 구려(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었다. 이로부터 책화(責

禍)로 이웃끼리 선행하고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이루어지고

정치는 개화 평등하여 사해(四海) 안에서 식사전(飾祀典)을 숭배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기의 탄생을 축원할 때에는 삼신(三神)께 고하고 벼의 성숙을 축원할 때에

는 업(業)에게 고하였다. 산(山)은 여러 살아있는 것들의 힘이 통하는 곳이 되고

업業)은 생산작업의 신이다. 고로 또한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도 칭한다. 집터

에 발원하는 것을 토주대감(土主大監)이라 하고 가택에 발원하는 것을 성조대군

(成造大君)이라고 한다. 역시 해마다 기쁨과 복을 이루어 주는 신이다. 묘를 쓸

때 고기잡이나 사냥을 할 때 전쟁에서 진을 칠 때 출행을 할 때 모두 다 제사가

있었다. 제사 때에는 반드시 택일하고 재계를 함으로서 이로움을 이루었다.

소도(蘇塗)가 세워진 곳에는 모두 계율이 있었다. 충(忠), 효(孝), 신(信), 용

(勇), 인(仁)의 오상(五常)이 그 도(道)이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일(事)과 물건(物)을 강습하게 하였다. 대개 독서(讀

書), 습사(習射), 치마(馳馬), 예절(禮節), 가악(歌樂), 권박(拳博)에 겸하여 도술

(金+刀術)이라는 육예(六藝)의 종류였다.

여러 읍락(邑落)은 모두 스스로 삼로(三老)를 설치하였다. 삼로는 또한 삼사(三

師)라고도 하는데 현명하고 덕이 있는 자가 있고 재물을 베푸는 자가 있고 사리

를 아는 자가 있었는데 모든 삼사의 일이 이와 같았다. 또 육정(六正)이라는 것

이 있었는데 곧 현좌(賢佐), 충신(忠臣), 양장(良將), 용졸(勇卒), 명사(明師), 덕우

(德友)가 그것이다. 또 살생에도 법이 있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

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스스로 대상물과 함께 시기를 택하여 하나같이 그것을

행하되 하나라도 쓸데없이 죽이지 않도록 하였다. 자고로 부여에는 말이 있어도

타지 못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을 금하여 방생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런 뜻이다.

고로 자는 것을 죽이지 아니하고 알을 죽이지 아니하는 것은 시기를 택하는 것

이고 어린 것을 죽이지 아니하고 이로운 짐승을 죽이지 아니하는 것은 그 대상

물을 택하는 것이다. 물건을 중하게 여기는 뜻이 가히 지극하였다고 할만하다.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칭하는 말이고 남자는 화랑(花郞) 또는 천왕랑(天

王郞)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명하여 오우관(烏羽冠)을 내려 관(冠)을 더하였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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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儀) 주(注)에 이때에 큰나무를 봉하여 환웅의 신상으로 하고 거기에 절을 하

였다. 신수(神樹)를 세속에서는 웅상(雄常)이라고 하는데 상(常)은 항상 존재한다

는 뜻이다.

하백(河伯)은 천하(天河)의 사람으로 나반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바로 나반이

물(河)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은 천신이 명하여 용왕이 하백을 초대하여 용궁에

들어오게 하여 그가 사해의 여러 신을 주관하게 하였다. 천하(天河)는 또한 전하

기를 천해(天海)라고도 하는데 지금 말하는 북해(北海)이다.

천하(天河)의 주(注)에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북극에서 일어난 고로 천일이

물을 생겨나게 하였는데 이것을 칭하여 북수(北水)라고 한다. 대저 북극은 수정

자(水精子)가 거주하는 곳이다고 하였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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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본기(桓國本紀) 제2(弟二)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桓仁)이 계셨는데 하늘에서 내려와

천산(天山)에 살면서 천신(天神)께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였다. 명령을 정하여

백성들을 지도하시고 많은 사무를 두루 다스리시니 들에 있어도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었고 무리와 함께 행차하여도 원한이나 반역의 우환이 없었다.

친소(親疎)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상하의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남여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늙은이와 젊은이가 구분하여 역(役)을 담당하므로 비록 당시에

이 세상에는 법규나 호령이 없어도 스스로 화락(和樂)과 순리(循理)를 이루었다.

그들의 병을 없애고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부족함을 도와주고 그들

의 약함을 구휼하니 한 사람도 불안해 하거나 또 괴이한 자가 없었다.

그때에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감군(監郡)으로 환(桓)이라 하고 인(仁)이라 하

였는데 인이란 임(任)이란 말이다.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구제하고 광명으로 세

상을 다스리는데 그로 하여금 그기에 반드시 인(仁)으로 임하도록 하였다. 고로

5가의 무리는 서로 바꿔가면서 반드시 업적을 구함으로써 큰 무리 가운데 선출

된 고로 애증(愛憎)에 구별이 있고 각각 마음먹은 바에 따라 그것을 잘 변별하

여 스스로 택하고 그에 따라 과녁(鵠)을 구하였다. 오직 9환(九桓)에 있어서만

공익을 위해 크게 단결하여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인즉 또한 마땅히 스스로 득실

을 비교하여 한 사람도 다름이 없이 한 연후에 그것을 따르니 여러 무리도 역시

감히 그러한 것을 처리함에 독단적인 기술을 따르지 않았다. 대개 무리를 거처

하게 하는 법(法)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우환이 있고 갖추어져 있으면 우환이

없으므로 반드시 미리 대비하여 자급하고 무리를 이롭게 하고 능히 만리(萬里)

를 다스리니 같은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행해졌다. 이때에 만방의 백성들이 기

약없이 모여든 자가 수만이었다. 무리가 스스로 서로 환무(環舞)하고 이에 환인

(桓仁)을 추대함으로서 환화(桓花) 아래 적석(積石) 위에 앉게 하시고 둘러서서

절을 하니 산호성(山呼聲)이 넘치고 돌아가는 자가 시장과 같았다. 이가 인간 최

초의 머리 시조(頭祖)가 되었다고 하였다.

삼성밀기(三聖密記)에 전하기를 파내류산(波奈留山) 아래에 환인씨(桓仁氏)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고 한다. 그 땅의 넓

이는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로 통틀어서 말하면 환국(桓國)이라 하고 구

분하여 말하면 즉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

(勾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

汗國), 구모액국(勾牟額國), 매구여국(賣勾餘國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

국(斯納阿國), 선비이국(鮮卑爾國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환국본기 제2

- 52 -

수밀이국(수密爾國)이니 모두 합하여 12국이다. 천해(天海)는 지금의 북해(北海)

이다고 하였다.

밀기(密記)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개마국(盖馬國) 또는 웅심국(熊心國)은 북개

마대령(北盖馬大嶺)의 북쪽에 있고 구다국에서 2백리 거리에 있다. 구다국은 옛

날에 독로국(瀆盧國)이라 하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다. 월청국(月淸國)은 그

북쪽 5백리에 있다. 직구다국은 혹은 매구여국(賣句餘國)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오란하(五難河)에 있었고 뒤에는 독로국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金山)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이 나는 곳이다. 쑥은 다려서 복용하면 냉

(冷)을 치료하고 마늘은 구워서 먹으면 마귀(魔)를 다스린다고 하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백성들은 부유하고

또 번성하였다.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天山)에 거주하시며 도(道)를 얻어 오래

사시고 몸을 다스려 병이 없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병역(兵)이 없게 하시니 사람들 모두가 경작하는데 힘써 근면하므로 스

스로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었다. 혁서(赫胥) 환인(桓仁), 고시리(古是利)

환인(桓仁), 주우양(朱于襄) 환인(桓仁), 석제임(釋提壬) 환인(桓仁), 구을리(邱乙

利) 환인(桓仁)에 전하고, 지위리(智爲利) 환인(桓仁)에 이르렀는데 혹은 단인(檀

因)이라고도 한다. 7세(世)를 전하였고 역년은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도 한

다.

환국에는 5훈(五訓)이 있고 신시에는 5사(五事)가 있다. 소위 5훈이라는 것은

첫째 성실하고 믿고 거짓이 없을 것(誠信不僞), 둘째 공경하고 근면하고 태만하

지 않을 것(敬勤不怠), 셋째 효도하고 순종하고 어김이 없을 것(孝順不違), 넷째

청렴하고 의리있고 음란하지 않을 것(廉義不淫), 다섯째 겸손하고 화목하고 싸우

지 않을 것(謙和不鬪)이다. 소위 5사(五事)라는 것은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

(主穀)하고, 마가(馬加)는 명을 주관(主命)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主刑)

하고, 저가(猪加)는 병을 주관(主病)하고, 양가(羊加일명 계가(鷄加))는 선악을

주관(主善惡)한다고 하였다.

환국주(桓國注)에서 이르기를 환(桓)이라는 것은 전일(全一)이다. 광명(光明)이

다. 전일은 삼신(三神)의 지능이고 광명은 삼신의 실덕이니 곧 우주의 만물보다

앞선 것이다고 하였다.

조대기에서 이르기를 옛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여 태양(日)으로 신(神)을 삼고

하늘로서 조상을 삼아 만방의 백성들이 이를 믿고 서로 의심하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경배함으로서 항상의 의식(恒式)이 되었다.

태양이라는 것은 광명이 모인 곳이고 삼신이 유거(攸居)하는 곳이다. 사람은

빛을 얻어 이로서 짓고 함이 없이 스스로 화한다. 아침이 되면 제(齊)를 지내고

태백일사

- 53 -

동산(東山)에 올라 해에게 절을 하고 삶을 시작하고 저녁이 되면 제를 지내고

서천(西川)에 나아가 달에게 절을 하고 삶을 시작하였다.

이보다 먼저 환인(桓仁)이 나서 스스로 화함을 아시고 다섯가지 물건(五物)을

기르시고 다섯가지 교훈을 펼쳐 강연(敷演)하시고 다섯가지 일(五事)를 주관하여

다스리시니 오가의 무리들이 모두 부지런히 애써서 선(善)에 이르고 행함(行)을

닦아 마음의 광명을 열고 일을 길상하게 짓고 세상에 즐겁게 머물게 하였다. 환

인은 상상천(上上天)에 높이 어거하시면서 오로지 백 가지 길(百途)이 모두 스스

로 화평하기를 정성스럽게 간절히 뜻하였다. 그때에 천제(天帝)의 화신(化身)이

라고 하여 감히 배반하는 자가 없으므로 9환의 백성들은 모두 통솔되어 하나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신시본기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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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본기(神市本紀) 제3(弟三)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서 전하기를 환웅천황(桓雄天皇)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된 것과 만물이 제 각각 그 자리를 잡은 것을 보시고

이에 고시례(古矢禮)로 하여금 먹이고 기르는 업무를 전담케 하시고 이를 주곡

(主穀)이라고 하셨는데 이때에 농사의 도(道)가 잘 갖춰지지 않았고 또 불씨가

없어 걱정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깊은 산에 들어가 교목(喬木)을 보니 황량하게

떨어져 다만 골해(骨骸)만 남았고 늙은 줄기와 마른 가지들이 어지럽게 엉키었

다. 다시 서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말없이 조용히 읊조리니 홀연히 큰 바람이 숲

에 불어오고 만물이 노호(怒號)하니 늙은 줄기가 서로 마찰하여 불을 일으켜서

불빛이 번쩍 번쩍 일고 잠깐 타다가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닫고는 말하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취하는 방법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

와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문질러 같은 방법으로 화공력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이

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다시 큰 나무숲(喬林)에 이르러 배회하며 깊이 생각에 잠

겨 있는데 홀연히 표범 한 마리가 포효하며 뛰어 나오자 고시씨가 외마디 소리

로 크게 꾸짖으며 돌을 날려 맹타하였으나 잘못하여 바위의 모서리를 맞추자 번

쩍하고 불이 생겼다. 이에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서 다시 돌을 쳐서 불을 얻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얻게 되었고 쇠를 불리고 다루는 기

술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제작의 공력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환웅천황은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서계(書契)를 만들게

하였다. 대저 신지씨는 대대로 명(命)을 주관하는 직책을 관장하고 출납과 헌체

(獻替)의 업무를 전담하였으나 다만 목소리(喉舌)에만 의존하고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무리들과 수렵을 나갔다가 홀연히 놀

라서 일어나는 외로운 암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활을 당겨 재빨리 쏘려고 하

다가 그 종적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에 사방 곳곳을 수색하고 산과 들을 지

나서 두루 찾다가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향방이 명백해졌다. 이에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읊조리다가

단번에 다시 재빨리 깨달고 말하기를,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은

것 뿐이다. 오직 이와같은 것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날은 사냥을 그만두고 돌

아와 되풀이하여 생각을 넓게 헤아리고 여러 가지 형상을 관찰한지 몇일 지나지

않아서 깨닫고 문자(文字)를 비로소 완성하여 얻었는데 이것이 태고(太古) 문자

의 시작이었다. 단지 후세에는 연대가 아득히 멀어 태고문자는 사라져 없어지고

그치어 존재하지 아니한다. 역시 그 조합이 이루어졌으나 아마도 불편함이 있어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태백일사

- 55 -

또한 일찍이 남해도(南海島)의 낭하리(郎河里)의 계곡 내지 경박호(鏡珀湖), 부

오소리(夫烏蘇里)와 더불어 선춘령(先春嶺)과 그 외의 암석 사이에서 간혹 조각

을 발견하였는데 범(梵)자도 아니고 전(篆)자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능히 깨칠 수

없다고 들었다. 이것이 신지씨가 그곳에 새긴 옛문자가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다

시 한번 우리나라의 미진함과 우리 민족의 강하지 못함을 한탄하게 된다.

환웅천황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로 하여금 비록 새, 짐승, 벌레와 물고

기의 피해를 제거토록 하였으나 인민(人民)들이 여전히 동굴이나 토혈(土穴) 속

에서 살고 있어 바닥은 축축하고 외풍의 기운이 사람들을 핍박하여 병나게 하였

다. 또 가금, 짐승, 곤충과 물고기의 무리를 한 경계에서 궁색케 하고 내쫓아 점

차 스스로 물러나 피난처에 숨어버리므로 도살하여 공급하고 먹이기가 불편하였

다. 이에 우사(雨師) 왕금(王錦)으로 하여금 사람의 거주지를 지어 조성하게 하

고 주로 소, 말, 개, 돼지, 수리, 호랑이 등의 짐승을 불러들여 목축에 이용하게

하였다.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간의 혼취(婚娶)의 법을 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치우는 곧 세세토록 병마와 도적을 막는 직(職)을 관장하게 하였

다.

이로부터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뻗어나가고

최고로 성하였다. 이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등극에 이르러 구치(九治)를 조성

하여 구리(銅)와 쇠(鐵)를 캐서 쇠를 제련하여 칼, 창과 대노(大弩)를 제작하여

수렵하고 정복전쟁을 함으로써 신뢰감을 주었다. 이로써 신(神)으로 삼으니 먼

곳의 외부 종족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대궁(大弓)의 위력을 풍문으로 듣고 간

담이 서늘한지 오래였다. 고로 저들은 우리 씨족(族)을 가리켜 이(夷)이라고 하

였다. 설문(說文)에서 소위 말하는 ‘이(夷)는 큰 활을 쓰는 동방사람(東方人)이

다.’ 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에 공구(孔丘)씨가 춘추(春秋)를 지을 당시에 이르러

이(夷)라는 이름을 마침내 융(戎), 적(狄)과 더불어 추락하여 함께 비린내 나고

더러운 것의 호칭이 되었으니 서글픈 일이다.

삼성밀기(三聖密記)에서 이르기를 환국(桓國)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

이 있어 그것이 걱정이었다. 환웅께서 나라를 위하여 곧 삼신으로 교단(敎)을 설

치하셨다. 무리를 규합하고 맹세를 짓고 은밀히 싹을 잘라 제거할 뜻이 있었다.

그때에는 씨족의 호칭이 서로 같지 않고 풍속은 오히려 점차 갈라져 원래 거주

자는 호랑이(虎)부족이 되고 새로 이주한 자는 곰(熊)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호

랑이부족의 성품은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오로지 약탈만을 일삼았으며 곰부족의

성품은 어리석고 괴퍅하고 잘난체하여 조화되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비록

같은 굴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더욱 사이가 멀어져 서로 빌리거나 꾸어주지 않았

고 서로 혼인도 트지 아니하고 일마다 쉽게 승복하지 아니하여 하나의 그 길에

신시본기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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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곰부족의 여자 임금(熊女君)은 환웅이 신의 덕이 있다

는 말을 듣고 곧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가 뵙고 말하기를, “원하건대 일가를 이

룰 굴(穴) 하나를 내리시면 같은 신(神)의 계율을 지키는 백성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한웅께서 곧 이를 허락하시고 그들이 모여 살 곳을 정하여 주시고

자식을 낳게 하시고 산업을 가지게 하였다. 호랑이부족은 끝내 불가능하므로 후

에 그들을 사해(四海)로 추방하여 버렸다. 환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와 같이 시

작되었다고 하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때에 사람은 많고 물자는 모자라서 그 살아갈

길의 방책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庶子部)에 대인(大人) 환웅이라는 분이 있

어 무리들의 사정을 깊이 듣고 그때 하늘을 내려와 하나의 광명세계를 지상에

열고자 하였다. 그때에 안파견(安巴堅)이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白)을

두루 살펴보니 태백이 가히 이로써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만 하였다. 이에 환웅

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이제 인물(人物)의 업(業)이 이미 조성되어 완성된 것

같다. 그대 임금(君)은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몸소 스스

로 아래 세상(下界)에 내려가 하늘을 열고 교단(敎)을 설치하여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天神)제사를 주관하여 이로써 아버지의 권위(父權)를 세우라. 부양하고 보

살피고 평화로 귀일하여 이로써 스승의 도(師道)를 세우라. 이치대로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어 자손 만대(萬世)의 홍범(洪範)이 되게 하라.” 하셨다. 이에 천부인

(天符印) 세 개를 주며 보내어 가서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보병 3,000명을 이끌고 처음에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를 일컬어 신시(神市)이라고 하였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

(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관(主穀)하시고 명을 주관(主命)하시고 형을 주관

(主刑)하시고 병을 주관(主病)하시고 선악을 주관(主善惡)하시고 무릇 인간의

360여 업무를 주관하시어 이치대로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시니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한 곰부족과 한 호랑이부족이 같이 이웃하여 살면서 신단수(神檀樹)에

서 항상 기원하고 또 환웅께 청하여 하늘의 계율(天戒)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은 이에 신(神)의 주문(呪)으로 골(骨)을 바꾸고 신(神)을 옮기고

또 신을 강림케 함으로서 영험을 얻고 혼령을 활성화 하였는데 그것은 쑥 한 다

발과 마늘 20매였다. 이에 그들에게 계율(戒)을 주고 이르기를, “너희 무리들이

그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자유로이 참평등을 이루고 사물(物)

을 불편없이 구하고 사람들이 지향하는 형상(踐形)의 큰 인물이 되어갈 것이다.”

하셨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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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부족과 더불어 곰부족 양가(兩家) 모두 얻어서 이것을 먹고 3․7일을

금기하고 스스로 수련에 힘써 곰부족은 배고프고 춥고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이

겨내고 하늘의 계율(天戒)을 준수하고 환웅과의 약속을 지켜서 건강한 여자의

용모를 얻었다. 호랑이부족은 곧 속이고 방만하여 금기하기 불가능 하고 하늘의

계율을 위반하므로 끝내 함께 그것을 얻지 못하고 하늘의 업무(天業)를 도왔는

데 이것은 두 성씨(姓)가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자

존심이 세고 어리석고 강하여 그들과 함께 돌아갈 사람이 없는 고로 매일 신단

수 아래에서 무리지어 모여 주문을 외면서 잉태하고 장적(帳)이 있기를 원하였

다. 환웅이 곧 임시로 환(桓)이 되어 관경을 얻고 그들과 더불어 혼인케 하고 잉

태하고 자녀를 낳게 하였다. 이로부터 여자 무리와 남자 무리들은 점차 윤리(倫)

를 취하여 습득하였다. 그 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호칭되어 이르는 분이

있어 아사달(阿斯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에 도읍을 세웠다. 처음에 나라를 조

선(朝鮮)이라고 칭하였는데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경이다.

신시(神市)의 시대에 7회 동안 신께 제사올리는 역법(曆)이 있었다. 1회의 날

에는 천신께 제사를 올리고 2회의 날에는 월신께 제사를 올리고 3회의 날에는

수신에 제사를 올리고 4회의 날에는 화신께 제사를 올리고 5회의 날에는 목신께

제사를 올리고 6회의 날에는 금신께 제사를 올리고 7회의 날에는 토신께 제사를

올렸다. 대저 역법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것에서 시작된 연유로 옛날에는 계해

(癸亥)를 사용하였고 단군 구을(丘乙)이 갑자(甲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서 10

월이 상달(上月)이 되었는데 이것을 세수(歲首)라고 일컫는다. 육계(六癸)는 신시

씨로부터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癸)로서 머리를 삼은 것이니

계는 계(啓)요 해는 핵(核)으로 일출의 뿌리이다. 고로 계는 소라(蘇羅)가 되고

갑은 청차이(淸且伊)가 되고 을은 적강(赤岡)이 되고 병은 중림(仲林)이 되고 정

은 해익(海弋)이 되고 무는 중황(中黃)이 되고 기는 열호수(烈好遂)가 되고 경은

임수(林樹)가 되고 신은 강진(强振)이 되고 임은 유부지(流不地)가 된다. 해는 지

우리(支于離)가 되고 자는 효양(曉陽)이 되고 축은 가다(加多)가 되고 인은 만량

(萬良)이 되고 묘는 신특백(新特白)이 되고 진은 밀다(密多)가 되고 사는 비돈

(飛頓)이 되고 오는 융비(隆飛)가 되고 미는 순방(順方)이 되고 신은 명조(鳴條)

가 되고 유는 운두(雲頭)가 되고 술은 개복(皆福)이 된다.

신시(神市)가 비로소 내려오기 시작하던 시대에 산에는 지름길이 없고 못에는

배와 다리가 없었다. 집짐승과 날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풀과 나무가 무성히 자

라는 곳에 집짐승과 날짐승의 무리가 더불어 날고 씨족들이 만물과 더불어 함께

하였다. 집짐승과 날짐승의 무리는 가히 의탁하고 구속되어 노닐고 새와 까치의

신시본기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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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나무를 잡아당겨 볼 수 있었으며 배 고프면 먹고 목 마르면 마셨다. 필요

시에 그 피와 고기를 사용하고 옷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하는 것이 편리하여 자

유로이 존재하였으니 이것을 일컬어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은

생활이 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 생활이 안정되고 안정된 바를 알지 못하고 그

보는 것이 최적이고 최적인 바를 알지 못하고 살았다. 머금고 씹어 먹으며 기뻐

하고 배를 두드리며 놀았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

택함이 이루어져 궁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후세에 내려와서 백성들과

물건들이 넘쳐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점점 없어지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도

힘써 일하고 부지런해야 하였으니 이로부터 생계를 염려하게 되었다. 이에 농사

짓는 사람은 이앙을 다투고 고기잡는 사람은 구역을 다투니 다투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장래에 궁핍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된 이후로 활(弓)과 쇠뇌(弩)

를 만드니 새와 날짐승들은 숨어버리고 그물(網)을 치니 물고기와 새우는 모습

을 감추었다. 이에 칼(刀)과 창(戟)을 든 갑병(甲兵)이 나타나 너와 나로 서로 공

격하기에 이르고 상아(牙)를 갈아 피를 흘리고 간과 뇌로 땅을 더럽혔다. 이것

역시 하늘의 의지가 정해진 연유로 이러한 것인가. 전쟁의 불가피함을 알았다.

지금 그 근원을 탐구해 본즉 대개 한 근원의 조상(祖)이나 땅이 이미 동서로 나

뉘어져 각기 한 지방의 토경(土境)에 근거하니 아주 멀어 사람과 연기가 통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나 있음은 알되 남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연유이다. 고로 수

렵과 채벌 이외에 일찍이 위험한 언덕이 내려 앉은 일이 없었는데 수천 년이 쌓

인 이후에 이르러서 세상의 형국은 이미 변하였고 중개국(仲國)이 서쪽 땅의 보

고가 되었다. 기름진 들판 천리에 바람기운이 널리 통하였다. 우리 환족(桓族)의

일부로 그 지역에 옮겨 가는 자는 침을 흘리며 나아가니 토착민도 또한 집단으

로 모여들었다. 이에 같은 집단(黨)이면 돕고 다르면 원수가 되어 방패(干)와 창

(戈)이 서로 움직이니 이것이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환웅천왕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太虞儀) 환웅이 계셨다. 교인(敎人)들

이 반드시 묵념(黙念), 청심(淸心), 조식(調息), 보정(保精)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

이 곧 오래 오래 사는 방법이다. 아들 열 두명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다의발

(多儀發) 환웅이라 하고 막내아들(季子)은 태호(太嘷)이라고 하는데 또 복희(伏

羲)라고 불렀다. 어느날 꿈에 삼신이 영(靈)을 또 몸(身)에 내리어 만리를 통철

하게 되었다. 이에 삼신산(三神山)으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天河)에

서 괘도(掛圖)를 얻었는데 그 획이 세번 끊어지고 세번 이어져 위치를 바꾸고

이치를 묘하게 추측하고 삼극(三極)을 합치면 변화가 무궁하였다고 하였다.

밀기(密記)에서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雨師)의 직을 세습하

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경유하여 진(陳)으로 옮겨가서 수인(隧人),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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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有巢)와 더불어 함께 서토(西土)에서 이름을 세웠다. 후예들이 풍산(風山)에

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역시 성이 풍(風)이며 뒤에 나뉘어져 패(佩), 관(觀), 임

(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씨의 8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山西)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거주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임(任), 숙(宿), 수(須),

구(句), 수유(須臾) 등의 나라는 모두 한울타리이다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를 지냈고 신룡

(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었으며 신시의 계해(癸亥)를 고쳐 갑자(甲子)

로 한 해의 머리로 삼았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었고 주양(朱襄)은 옛문자

그대로 육서(六書)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山東) 어대현

(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

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소전은 소호

(少皞)와 더불어 모두 고시(高矢)씨에서 나온 자손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하여 생업을 가졌는데 점차로 언덕을 이루기에 이르고 곡(穀), 마(麻), 약

(藥), 석(石)의 기술도 또한 이미 점점 갖추게 되어 낮 동안에 시장에 나가 교역

을 하고 돌아왔다. 곧 유망(楡罔)이 정치를 함에 이르러 급속히 여러 읍(邑)을

묶어 둘로 구분하니 많은 백성들이 떠나고 흩어져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

다. 우리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 신시의 남은 열기를 이어 백성과 더불어 제도

를 새롭게 하시고 확장하였다. 능히 하늘을 열어 생(生)을 알고 땅을 열어 생을

이치대로 하고 사람을 열어 생을 숭배하였다. 여러 사물의 원리를 모두 스스로

점검, 고찰하여 덕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지혜가 옳지 않음이 없고 힘이 갖추어

지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과 더불어 호랑이부족을 나누어 다스리고 하삭

(河朔)에 의거하여 안으로는 용감히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살

폈다. 유망의 쇠퇴한 정치에 이르러 곧 병사들과 출정할 때 형제와 종친들 가운

데서 가히 장수감 81명을 뽑았다. 부령(部領)의 여러 군사가 갈로산(葛盧山)의

금을 발굴하여 검(劍), 갑옷(鎧), 창(矛), 극(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가지런히 정돈하였다. 탁록(涿鹿)을 정벌하고 구혼(九渾)에 올

라 연전하여 승첩하니 그 세력이 질풍과 같아 만 군(軍)을 두려움으로 굴복시키

니 위세가 천하에 떨치었다. 한 해 동안에 무려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정벌하

였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구치(九治)로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발

굴하여 예리한 창(戈)과 옹호의 극(戟)을 만들었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거느리고 양수(洋水)에 출진하여 공상(空桑)에 이르러 살해하였는데 공상은 지금

의 진류(陣留)로 유망이 도읍한 곳이다. 이 해 중에 열두 제후(諸侯)의 나라를

병합하니 죽어 널부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 차고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

하여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항전하게 하므

신시본기 제3

- 60 -

로 천왕(天王)이 예리한 창과 옹호의 극을 휘둘러 소호와 더불어 큰 전쟁을 하

였다. 또 큰 안개를 만들어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하

니 소호가 크게 패하여 흩어져서 공상으로 도주하였다가 유망과 함께 달아났다.

치우천왕은 이에 곧 하늘에 제사를 지내서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여 고하고 다시

금 병사를 진격시켜 탁록(涿鹿)을 포위하여 압박하고 일거에 그곳을 멸하였는데

관자(管子)가 소위 ‘천하의 임금(君)이 전쟁에 임하여 한 번 노하니 널부르진 시

체가 들판에 그득하였다.’ 라고 한 것은 이것이다.

그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괴수(魁)였다. 비로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서 감히 대

리하여 천자(天子)가 되겠다는 뜻을 가졌다. 곧 병마를 크게 일으켜 가지고 와서

싸우고자 하므로 천왕(天王)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

여 압박하고 그곳을 멸하였다. 헌원은 오히려 스스로 굴복하지 아니하고 감히

백번의 전쟁에 나오니 천왕이 9군(九軍)에게 명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나가게

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의 들판에

서 헌원과 연달아 싸웠다. 병사를 사방으로 풀어 조여들어가 참살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어 전쟁을 독려하

니 적군은 이에 마음은 두렵고 손은 떨려 연명하고자 앞다퉈 달아나 숨으므로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이에 기(冀), 연(兗), 회대(淮

垈)의 땅이 모두 점거되어 탁록에는 성을 쌓고 회대에는 집을 세우니 이에 헌원

의 족속(屬)들이 모두 신하로 칭하고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대저 당시 서토

(西土)의 사람들은 다만 활(矢)과 돌(石)의 힘만 믿고 갑옷(鎧甲)의 용도를 잘

알지 못하였다. 또 치우천황의 높고 강한 법력에 직면하니 마음은 놀라고 간담

은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번번히 패하였다. 운급(雲笈)의 헌원기(軒轅記)에서 일

컫기를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쓰니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구

리 머리(銅頭), 쇠 이마(鐵額)가 되는 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또 역시 그

낭패가 매우 심했음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음이다.

치우천왕은 군용(軍容)을 더욱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하여 10년 동안 헌원과

더불어 73회를 싸웠으나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물러설 줄을 몰

랐다. 이후에 헌원은 이미 여러 차례 전쟁에 패하고도 더욱 더 군마를 크게 일

으키고 우리 신시를 본받아서 병갑을 널리 제조하고 또 지남차(指南車)를 제작

하여 감히 100번의 전쟁에 나왔다. 천왕은 크게 진노하여 형제(兄弟)와 종당(宗

黨)들로 하여금 중요한 대전(大戰)에 힘쓰게 하고 헌원의 군사들에게 위력을 세

워 보여 감히 전의가 생기지 못하게 하고 이에 추적하여 습격하고 그들과 더불

어 크게 싸워 일진(一陣)을 전멸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이 일이 끝났다. 우리 장

태백일사

- 61 -

수 치우비(蚩尤飛)란 자가 공을 급히 다투다가 진중(陣中)에서 몰살되었는데 사

기(史記)에 일컫기를 치우를 잡아죽였다고 한 것은 대개 이를 일컫는 것이다. 천

왕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제작하여 진

(陣)을 이루고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이 마침내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예

군을 서쪽으로 나누어 파견하여 예(芮)와 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는 회

대를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하여 헌원이 동쪽으로 침략하는 길을 담당하게 하

였다. 이에 붕서(崩逝)하신지 수천 년에 이르렀어도 오히려 만장(萬丈)의 열렬히

빛남이 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감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지금 한서(漢書)의 지리

지(地理志)에 의거하면 그 능은 산동(山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

성(闕鄕城) 안에 있는데 그 높이가 7(丈)이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시대에

주민들은 유독 항상 10월이면 그를 제사지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氣)이 나

타났는데 진홍색의 비단자락과 같으므로 그것을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고 하

였다. 그의 영웅스러운 혼(魂)과 영웅스러운 백(魄)은 스스로 보통사람과 매우

판이하여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사라지지 아니함인가. 이로써 헌원은

사라지고 그런 연유로 유망도 또한 이에 따라 영원히 무너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남은 열기는 대대로 전해져 능히 떨치고 유(幽), 청(靑)을 다 차지

하고도 그 명성과 위엄이 무너지지 않았다. 헌원 이래로 저들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고 그 시대가 끝나도록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하였다. 사기(史記)

에서 일컫기를 산을 뚫어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살지를 못하였고 탁록의 강에

도읍을 정하고도 천도하고 이주하고 가고 오고 하느라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

병사로 하여금 영위(營衛)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 두려워 매우 조심하

는 뜻을 역력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서(尙書)의 여형(呂刑)에도 역시

전하기를 만약에 옛교훈(古訓)이 있다면 오직 치우만이 병란을 일으킨다고 하였

으니 저들의 놀라움과 기운을 빼앗아 그 교훈을 전하여 이로써 후세 사람들의

경계로 삼은 것 역시 이러한 것이다. 그 후 300년은 무사하였는데 다만 전욱(顓

頊)과 더불어 한번 전쟁하여 그를 쳐서 부수었을 뿐이다.

대개 신시 개천으로부터 18세(世)를 전하여 1,565년을 지내고 단군왕검(檀君王

儉)이 있어 웅씨(熊氏)의 비왕(裨王)으로 시작하여 신시를 대신하고 아홉 구역을

하나로 통합하고 삼한(三韓)을 나누어 관경(管境)으로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서 이르기를 복희는 이미 서쪽 외곽에서 봉함을 받고 직

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므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않고도 하나의 구역이 교화되어

복종하였으므로 수인(燧人)을 대신하여 마침내 역외 지역까지 호령하기에 이르

렀다. 이후에 갈고환웅(曷古桓雄)이 있어 신농의 나라와 더불어 강역의 경계(疆

신시본기 제3

- 62 -

界)를 획정하였는데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여러 세대를 전하

여 자오지 환웅(慈烏支桓雄)에 이르렀는데 그는 신과 같은 용기가 있어 관(冠)을

쓴자 중에 으뜸이었으며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치를 조성하여 광물을 캐내어 철을 주조하고 병기를 만들고 비석

박격기를 제작하니 천하가 그를 두려워하여 함께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 치

우로 삼았다. 무릇 치우란 세속에서 번개비(雷雨)를 말하는 것으로 산과 강을 크

게 만들고 다시 그것을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왕은 신농씨(神農)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웅대한 계획을 품고 여러

차례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 사이를 점거하는데 성공하니

바로 헌원이 도읍한 곳이다. 즉시 탁록의 들판으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그

를 신하로 삼은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서쪽으로 보내어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이르기를 신시씨는 전인(佺)로써 계율(戒)을 닦아 사람을

교화하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른바 전인이란 사람의 연유한 곳에 따라 스스로

완전해지고 진리를 이룸으로써 능히 성(性)에 통하는 것을 일컫는다. 청구(靑邱)

씨는 선인(仙)으로서 법(法)을 설치하여 사람을 교화하고 경계를 관리하였다. 이

른바 선인(仙)이란 사람의 연유한 곳에 따라 스스로 산(山)이 되어 (산을 낳아)

선(善)을 넓힘으로써 능히 명(命)을 아는 것이다. 조선씨(朝鮮氏)는 종인(倧)으로

서 왕(王)을 세워 사람을 교화하고 재화(禍)를 책임지게 하였다. 이른바 종인(倧)

은 사람의 연유한 곳에 따라 스스로 종(宗)이 되어 아름다움(美)을 구함으로서

능히 정(精)을 보전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고로 전인(佺)이란 비게 함(虛)으로

서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인(仙)이란 밝게 함(明)으로서 땅에 근본을 두고 종인

(倧)이란 강건하게 함(健)으로서 사람에 근본을 둔다고 하였다.

주(注)에서 이르기를 환인(桓仁)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天)은 곧 대(大)

요 일(一)이다. 환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한다. 왕은 곧 황(皇)이요 제(帝)이다.

단군은 또한 천군(天君)이라고도 한다. 제사를 주관하는 어른(長)이다. 왕검은 또

한 바로 감군(監軍)이요 관경의 어른이다. 고로 하늘로부터의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檀)이라고 하는데 소위 환은 9황(九皇)의 이름이

다. 한(韓)은 또한 곧 대(大)이다. 삼한을 풍백, 우사, 운사라고 한다. 가(加)는 곧

가(家)이다. 오가는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명(命)을 주관하

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고 저가(猪加)는 병을 주관하고 양가(羊加)는 선

악을 주관한다고 한다. 백성(民)은 64백성이 있었고 무리(徒)는 3,000무리가 있었

다. 가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파견한 것을 하늘을 엶(開天)이라고 한다. 하늘을

연다함은 고로 능히 온갖 사물(庶物)을 창조하는 것으로 이것은 비어 있음(虛)의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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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同體)인 것이다. 인간세상을 탐하여 구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을 엶(開人)이

라고 한다. 인간을 연다함은 고로 능히 인간사(人事)를 순환하는 것으로 이것은

혼(魂)의 구연(俱衍)이다. 산을 다스리고 길을 내는 것을 땅을 엶(開地)이라고 한

다. 땅을 연다함은 고로 능히 그때의 일(時務)을 개화하는 것으로 이것은 지혜

(智)의 쌍수(雙修)이다고 하였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서 이르기를 대저 백두(白頭)의 거대한 산맥은 대황(大

荒)의 가운데에 자리하여 옆으로는 1천리에 뻗쳐 있고 높이는 2백리나 솟아 있

어 웅장한 위용은 빼어나면서 완연하고 꾸불꾸불하게 널리 뻗어 배달천국(倍達

天國)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신인(神人)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

거늘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妙香山)이 단지 낭림(狼林)의 서쪽을 달리는 맥(脉)

에 이어졌다 하여 이 같이 성스러운 일을 허용하는데 참여함을 얻을 수 있을 것

인가. 세속에서 이미 묘향산으로 태백을 삼은 것은 곧 그 소견이 다만 동압록수

이남 한 모퉁이의 땅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산의 조종(祖宗)을 곤

륜(崑崙)이라고 노래하며 기쁘게 여기고 소중화(小中華)로서 스스로 달고 당연히

하였다. 그래서 공물을 바치는 사신(貢使)의 북행(北行)이 누대에 걸쳐 100년이

지나도 이를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는 곧 서책(書冊)을 덮고 길게 탄식할

일이다. 그런 연유로 지금 동방의 여러 산이 태백으로 이름하는 곳이 빈번히 많

고 세속에서는 영변(寧邊) 묘향산으로 그것을 당연시 하는 것은 실로 일연씨(一

然氏)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설에서 연유한 것이니 저들의 눈구멍은 콩과 같

고 팥과 같으니 어찌 그들과 더불어 논의하는 것이 흡족하겠는가. 지금 백두산

은 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주위는 가히 80리가 되고 압록(鴨祿), 송화(松花),

두만(豆滿)의 여러 강이 모두 여기에서 발원하니 천지(天池)라고 이른다. 곧 환

웅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은 일찍이 조그마한 웅덩이

조차도 없었고 또 환웅천왕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산이 되지 않으니 논하기에

부족한 것이다고 하였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이르기를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으

니 위(魏)에서는 이를 태황(太皇)이라고 하였다. 범과 표범과 곰과 이리가 있는

데 사람을 해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산 위에서 똥과 오줌을 누지 않았고 길을

가는 자는 모두 물건으로 담아갔다고 하였다. 대저 환웅천황께서 처음 내려와

이미 이 산에 계셨으므로 또 이 산은 신주(神州)로 왕을 부흥하는 영지(靈地)가

된즉 소도(蘇塗) 제천(祭天)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었고 예로부터

환족의 숭배와 공경도 또한 이 산에서 시작되었으니 심상이 넘길 수 없는 것이

다. 또 가금과 날짐승이 모두 신의 교화함에 젖어 편안히 이 산에 깃들고 일찍

이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고 사람 또한 감히 산 위에서 똥오줌을 누어

신시본기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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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모독하지 아니하므로 항상 만세의 공경과 보호의 표상이 되었다. 대저 우

리 환족은 모두 3,000 무리 집단의 장적(帳)을 거느린 신시에서 나왔는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비록 여러 씨족의 분별이 있었지만 실은 환단(桓檀)의 한 원류의 후

손(裔孫)에 벗어나지 아니한 것이다. 신시가 처음 내려온 공(功)을 실로 당연히

반드시 전하고 암송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선대의 왕과 선대의 백성이 일러

준 그 삼신의 옛 제사의 성지(聖地)를 일러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한 것 또한 틀

림없는 것이다. 대저 신시로부터 내려온 신의 법리(神理)와 성스러운 교화(聖化)

는 점차 퍼져나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깊어져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근본이 되었고 사람 나라(人國)와는 많이 다르게 되었다. 그 신풍(神風)과 성

속(聖俗)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어 천하 만방의 사람들이 신의 법리와 성스러운

교화를 숭모하여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배하여 동북(東北)은 신명(神明)이

있는 곳이라는 칭함이 있기에 이르렀다. 이에 급기야 그 말기 흐름의 폐단으로

점점 황탄불경(荒誕不經)에 빠져들고 갈수록 점점 더 괴이한 것이 나와서 괴탄

무계(怪誕無稽)한 설(說)들이 소위 연제(燕齊) 해상의 괴이한 방사(方士)들 사이

에서 빈번히 나돌았다. 대개 그 땅은 9환의 신시와 더불어 서로 접하여 있으므

로 사람과 물건의 교류가 특히 성하였는데 제 나름으로 소문을 듣고 놀래고 기

이해 하고 또 다시 추측하고 부연하고 짜 맞추어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로 발해(渤海)의 가운데에 있다고 운운하여 세상의 주인을

미혹하였다. 그런 연유로 당시의 사람들은 동쪽으로 해상에 이르러 한번 바라보

면 끝 닿는 물가가 없고 발해의 가운데에 또다시 바다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고로 문득 말하기를 삼신산은 또한 발해 가운데에 있다고 운운하였으나 사실인

즉 삼신산은 각각 삼도산(三島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

라는 지름길의 장소로 곧 천왕이 내려온 곳이요 방장은 사방이 일장인 누각(閣)

으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는 큰 바다가 섬을 둘러싼 섬의 모양 즉 천지

(天池)가 나오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면 삼신산이 되고 삼신은 곧 일상제(一上

帝)이다. 그런데 더욱 더 허황되고 기이한 것은 삼신의 본말을 알지도 못하고

이에 금강(金剛)을 봉래이라 하고 지이(智異)를 방장이라 하고 한라(漢拏)를 영

주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서 이르기를 그것은 발해의 가운데에 있으며 대개

일찍이 가서 본 사람이 있어 여러 선인(仙人)과 불사약(不死藥)이 모두 있고 그

곳의 물건은 가금과 날짐승 조차도 모두 희고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으로 궁궐

을 지었다고 운운 하였다고 한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르기를 삼신산에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 사슴(白鹿), 흰 꿩(白稚) 혹은 희 매(白鷹)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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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무리들이 있다고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서 전하기를 새와 짐승과 풀과 나

무가 모두 하얗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山蔘)이 많이 나

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불로초(不老草)에 비겼다. 산 사람들이 캐려고 할 때

에는 곧 반드시 먼저 목욕 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연후에야 감히 출발하였

으니 그 혼이 돌아오고 늙지 않게 한다는 것의 이름 또한 여기에서 근원한 것으

로 생각된다. 세기(世紀)에 전하기를 단군 오사구 원년에 북쪽을 순행하여 영초

(靈草)를 얻었다고 전한즉 이것이 그 증거이다.

10월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마침내 천하 만대로 이어지는 풍속이 되었다.

이는 곧 신주(神州) 특유의 성대한 제전(盛典)으로 다른 나라의 것과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比+昆比侖)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다. 옛날

의 삼신산이란 곧 태백산이고 또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상세(上世) 신시의

인문 교화가 근세에 이르러 비록 튼튼하게 행하여지지 못하였으나 천경(天經)과

신고(神誥)가 오히려 후세에 전하여져 국남국녀(國男女)와 더불어 또한 모든 사

람들이 깊이 침묵하는 가운데 숭배하고 신앙하였다.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 말하고 소아(小兒) 10세 이내의 신체와 생명, 안전함과

위험함,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준수함과 용렬함을 다 삼신께 위탁하였으니 무릇

삼신이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조화한 천일신(天一神)이다. 옛날에 사마상

여(司馬相如)가 한(漢)나라 주인 유철(劉徹)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겸양하시고 드러내지 마시고 또 삼신의 즐거워하는 모양새를 어지럽히지 마십시

오.” 라고 하였다. 위소(韋昭)의 주(注)에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의 설(說)은 일

찍이 이미 저들의 나라에 전파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 이르기를 제(齊)나라의 풍속에 8신제(八神祭)가 있는

데 8신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

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이다. 하늘(天)은 음(陰)을 좋아하는 고로 그것에

대한 제사는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 작은 산의 위에서 하는데 곧 하늘을 태백산

의 기슭에서 제사하는 유법이다. 땅(地)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는 고로 그것에

대한 제사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방구(方丘)에서 하는데 또한 역시 참성단(塹城

壇)에서 제사하는 풍속을 이은 것이다. 천주는 삼신께 제사하고 병주는 치우께

제사하고 삼신은 천지만물의 시조가 되고 치우는 만고 무신(武神) 용강(勇强)의

시조가 되어 큰 안개를 만들고 물과 불을 부리고 또 만세의 도술(道術)의 시종

(宗)이 되어 바람과 비를 부르고 만신(萬神)을 부르니 이로서 대시(大始)의 세상

에 항상 천하 병장사(戎事)의 주인이 되었다. 회대의 땅은 이미 엄(奄), 람(藍),

양(陽), 개(介), 우(隅), 래(萊), 서(徐), 회(淮)의 8족이 거주한 곳이므로 곧 팔신

의 설은 8족에서 싹터서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劉邦)은 비록 동이(夷) 계통은

신시본기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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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풍패(豊沛)에서 기병한즉 풍패의 풍속으로 치우를 제사하였다. 고로 나라

또한 풍속에 연원함으로서 치우에게 제사하며 희생의 피를 바르고 북을 치며 기

를 날렸다. 이로서 10월에 패(氵+覇) 강의 상류에 이르러 여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도읍을 세워 한왕(漢王)이 된즉 10월로서 세수(歲首)를

삼았다. 이것은 비록 진(秦)의 정월 삭일(正朔)을 이은 것이지만 역시 동황태일

(東皇太一)을 숭배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4

년 후에 진나라 영역이 이미 평정된즉 축관(祝官)에게 장안(長安)에 치우의 사당

을 세우게 명하였으니 그가 치우를 공경하는 순후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진서 천문지(晋天文志)에서 치우의 기(旗)는 혜성과 같았으며 뒤에 모양을 구

부렸다. 기가 보이는 방향의 아래에 병사가 있었다고 전한즉 곧 치우천왕이 상

천에서 별자리가 된 것이다. 통지(通志)의 씨족략(氏族略)에서 치씨(蚩氏)는 치우

의 후손이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창힐(蒼頡)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모두

치우씨의 후예(苗裔)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서 산동의 회북(淮北)으로 옮

겨 이주한 것이라고 하니 대개 치우천왕의 영준한 풍모(英風)와 웅렬함(雄烈)이

먼 지역의 깊은 곳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방사(士)들이 신이한 무만(誣謾)의 설에 현혹된 것

또한 그러하였다. 제의 위(威)왕과 연의 소(昭)왕 시절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

신산을 찾으니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사이 때의 송무기(宋無忌), 정백교(正伯

僑), 극상(克尙), 선문자고(羨門子高)는 이후의 무리로 곧 연나라 사람들이고 문

성(文成), 오리공(伍利公), 손경(孫卿), 신공(申公)의 무리들은 모두 제나라 사람

이다. 옛날에 여상(呂尙)도 역시 치우씨의 후예이다. 고로 역시 성이 강(姜)이다.

대저 치우가 강수(姜水)에 거주하면서 아들을 둔 것은 모두 강씨(姜氏)이다. 강

태공(姜太公)은 제나라를 다스리자 먼저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齊地)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또한 제나라에서 봉함을 받으니 8신의 풍속이 이 땅에서 더욱 성하였

다. 후세에 그 땅에 많은 도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신선 황제(黃), 노자

(老)와 뒤섞이고 부연하고 더욱더 그것을 윤식한즉 이 또한 강태공이 그 풍속을

조장한 것이다. 일직이 음부경(陰符經)의 주(註)를 지어 자부(紫府)와 삼황(三皇)

의 뜻을 조술한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어찌 괴이하고 들떠 허황된 설을

좋아하지 않고 편안함을 얻겠는가. 또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과 황제중경(黃帝

中經)의 책 또한 태자 부루(扶婁)에게서 나와서 우(虞)의 사공(司空)에게 그것이

전해졌다. 이후에 다시 기자(箕子)가 주왕(紂王)에게 홍범(洪範)으로 펼치게 되니

역시 바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의 설인즉 대개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 구정균전

(邱井均田)의 유법인 것이다.

밀기(密記)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죽은 자를 옮길 때 고향(鄕)을 벗어나지 아니

태백일사

- 67 -

하고 한 곳에 합장(合葬)하여 표(表)를 하니 지석(支石)이 되었다. 이후에 변하여

단(壇)이 되니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石壇)이라고 칭하였다. 산 정상에

있고 산을 파서 단을 조성한 것을 천단(天壇)이라고 하고 산 골에 있고 나무를

심고 토단(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고 하는데 지금 승려의 무리(僧徒)

들이 제석(帝釋)으로 혼동하여 단(壇)이라고 칭한즉 옛 것이 아니다. 삼신을 수

호하고 이로서 사람의 수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고 하는데 본래

는 삼신을 모시고 따르는 랑(郞)이다.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역시 삼신

수호의 관직을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서도 이르기를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

리고 재물과 이익을 주관하는 자는 업(業)이 되고 교화하고 위엄과 복록(威福)을

주관하는 자는 랑(郞)이 되고 무리를 모아 공(功)을 기원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

는 백(伯)이 된즉 옛날에 시작된 신도(神道)이다. 모두 능히 신령을 내려 예언을

하였는데 신의 법리(神理)에 누누이 적중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이란 바로 삼랑이 숙위하는 곳이다. 랑(郞)이란

바로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 대웅(大雄)

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답습하여 이렇게 칭한 것으로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전하기를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은 모두 낭

가(郞家)에 예속되었는데 이로서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혹은 전하기

를 옛적에는 인민(人民)들이 계곡에 흩어져 거처하므로 장사(葬事) 지내는 정해

진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 수혈(隧穴)에 옮겨서 안치하고 천신

과 함께 배위(配)하여 제사하고 후에 혹 평지가 있으면 그기에 장사를 지내고

둘레에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심어 그것을 식별하였다. 이러함으

로서 신시의 세대에는 능묘(陵墓)의 제도가 없었는데 후에 중고시대(中古)에 이

르러 국가가 부유하고 종족이 강성하고 산사람을 부양하는데 넉넉하게 되니 죽

은 이를 보낼 때에도 역시 제사를 사치스럽게 하고 예식도 갖추게 되었다. 묘

(墓)를 다스리는 것도 몹시 융성하여 혹은 원(圓)으로 혹은 방(方)으로 능히 그

렇게 장식을 사치스럽게 하였다. 높이와 크기, 넓이와 좁이, 경사짐과 반듯함에

도 규격이 있었다. 내벽과 외분을 고르게 다듬고 겸하여 정교하게 하였다. 고구

려 때에 이르러 능묘의 규모와 제도는 천하에 으뜸이었다.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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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제4(第四)

태백산(太白山)은 북으로 달려 홀연히 비서갑(斐西岬)의 땅의 경계에 서 있다.

물을 지고 산을 안고 있고 또 돌아서 가는 곳에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

늘에 제사하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순행하며 이곳에 머무르면

서 경작하고 사냥하여 제사올렸다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동경에 새겨서 나가고

우사는 북을 치고 환무하며 마중하고 운사는 백검(伯劍)을 섬돌에서 지켰다. 대

저 천제가 산에 나아가는 의장은 이처럼 성대하고 엄하였다. 산의 이름은 불함

(不咸)이라고 하는데 지금 또한 완달(完達)과 그 음이 비슷하다. 뒤에 웅녀의 임

금(君)이 천왕의 신임을 받은바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대감(大監)이다. 토경을 관수하고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

왕(天王)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는 공경해야 하

고 처자는 보호해야 하고 형제는 사랑해야 하고 노인과 어른은 높이 모셔야 하

고 어린이와 약한 자에게는 베풀어야 하고 서민 대중들은 믿어야 한다.” 하셨다.

또 의약과 공장(工匠)을 제작하고 짐승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측후(測候), 예절

(禮節), 문자(文字)의 법을 제정하니 온 나라가 감화하고 원근의 백성들 모두가

서로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웅씨(熊氏)의 곳(所)에서 나뉜 무리를 소전(少典)이라

고 하는데 안부련 환웅의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들어 강수(姜水)에서 병사를 감

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로 맛보고 약을 만들고 이

후에 열산(烈山)으로 이주하여 낮에는 교역하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였다.

소전의 다른 파(派)를 공손(公孫)이라고 하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

(軒丘)에 유배하였다. 헌원(軒轅)의 무리들은 모두 그의 후예들이다. 사와라 환웅

의 초기에 웅녀군의 후예를 여(黎)라고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함을

얻어 왕검이 되었다. 덕을 심고 백성을 사랑하니 토경이 점차 커져서 여러 토경

의 왕검들이 와서 방물을 바쳤는데 이로서 귀화한 자가 천여수를 헤아렸다. 이

후 460년 뒤에 신인(神人) 왕검이란 자가 있어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어 승격

하여 비왕(裨王)이 되었다. 섭정을 한지 24년만에 웅씨(熊氏)의 왕이 전쟁에서

붕하자 왕검이 마침내 그 자리를 대신하고 9환을 통일하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

검이시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소집하여 약속하여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법을 공정히 하라. 이것을 천부(天符)라고 한다. 무릇 천

부란 만세의 법전이요 지극한 존엄함이 소재하는 곳이니 가히 범할 수 없는 것

이다.” 하셨다. 마침내 삼한과 더불어 땅을 구분하여 다스렸는데 진한(辰韓)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다.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개국하여 조선(朝鮮)이라고 이

름하니 이분이 1세 단군이 되었다.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를 지내는 곳의 땅이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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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는 고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하였

다.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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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세가(馬韓世家) 상(上)

곰부족(熊)과 호랑이부족(虎)이 서로 다투는 시대에 환웅천왕께서는 아직 임금

에 임하지 않았는데 묘족(苗)과 환족(桓)은 곧 9황(九皇)의 하나였다. 옛날에 이

미 우리 환족(桓族)은 유목과 농경을 하던 곳에 있었고 신시(神市)에 개천함으로

써 토경이 다스려지니 하나가 쌓여서 음(陰)이 세워져 열(十)로 커지고 양(陽)이

작용하여 궤없이 충(衷)이 생겨났다. 봉황새가 백아강(白牙剛)에 무리지어 모여

들고 선인(仙人)이 법수교(法首橋)에 내왕하였는데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인

문(人文)이 일찍부터 이미 발달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잘 익으니 이때 자부(紫府)

선생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역법을 만들었다.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왕폐

하(天陛)께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짓게 하

시고 그곳에 살게 하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효의 무리가 모두

와서 배웠다. 이때 윷놀이를 만들어서 환역(桓易)을 강연하였는데 대개 신지 혁

덕이 기록한바 천부의 전해진 뜻이었다. 옛적에 환웅천왕께서 천하가 커서 한

사람이 그것을 능히 이치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풍백(風伯), 우사(雨

師), 운사(雲師)를 거느리시고 곡식(穀)을 주관하시고 명령(命)을 주관하시고 형

벌(刑)을 주관하시고 병(病)을 주관하시고 선악(善惡)을 주관하시고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시었다. 역법을 만들어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상존(上尊)의 전해진 법이다. 고로 삼신

으로서 종교 가르침을 세우고 곧 염표문(念標)을 지어 반포하니 그 글에 이르기

를, ‘일신이 충(衷)에 내려와 성(性)은 광명에 통하고 이치대로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소도(蘇塗)의 건립이 이르는

곳마다 가히 볼 수 있고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이 산 정상에 모두 있었다. 사

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빙둘러 모여서 촌락(墟落)을 이루고 4가구(家)가 같은

우물을 쓰고 20분의 1세를 내었다. 때마다 평화롭고 해마다 풍요로워 노적(露積)

이 언덕과 산을 이루고 만백성들이 즐겁고 편안하여 태백환무(太白還舞)의 노래

를 지어 전하였다.

이어서 치우씨가 있어 구치(九治)를 제작, 조성하여 채광하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제작하니 천하에 감히 그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가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치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아가 탁록(涿鹿)에서 크게 싸웠는데 탁록은 지금 산서(山西)의 대동부

(大同府)이다. 장차 싸우려 할때에 탁록격(涿鹿檄)을 지어 곧 81명의 종가(宗黨)

의 대인(大人)을 소집하고 먼저 치우의 형상을 반포하여 보이고 명령의 서약을

갖추어 그것을 고(言+告)하였다. 치우천왕이 말하기를, “너 헌구(軒丘)는 짐이 고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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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을 분명히 들어라. 태양의 아들이 있어 오로지 짐 한 사람이 만세를 위

하고 공공의 의로움을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씻는 맹세를 지었다. 너 헌구는 우

리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를 업신여기고 삼륜구서(三輪九誓)의 행함을 태만

히 하고 버리니 삼신이 오래토록 그 더러움을 싫어하여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게 하였다. 너는 진작에 마음을 씻어 행실을 고쳐 성(性)으로

부터 종자(子)를 구하면 너의 뇌 속에 내리어 존재할 것이다. 만약에 명령에 따

르지 않으면 천인(天人)이 모두 분노하여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가히 두렵지 않은가.” 하셨다. 이에 헌구가 곧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가 우리를

종가(宗)로 삼았다.

이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에 은둔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

터 나온 것이다. 통과하다가 웅씨의 임금(君)을 뵙자 임금이 청하기를, “나를 위

해 도를 설명해 주십시오.” 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도(道)의 큰 근원은

삼신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도는 이미 대가(對)가 없고 칭함(稱)이 없으니 대

가가 있는 것은 도가 아니요 칭함이 있는 것 또한 도가 아닌 것입니다. 도는 항

상의 도(常道)가 없으며 시기를 따르니 곧 도의 귀한 바요 칭함은 항상의 칭함

(常稱)이 없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곧 칭함의 실(實)한 바입니다. 그것은 밖

에는 큰 것이 없고 안에는 작은 것이 없으니 도는 곧 포함하지 않음이 없는 것

입니다. 하늘의 기틀(機) 있음을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보고 땅의 모양(象) 있음을

내 몸의 모양에서 보며 사물의 주재(宰) 있음을 내 기(氣)의 주재에서 보니 이에

하나를 집어서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모아서 하나로 되돌아가는 것(會

三歸一)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오는 것이란 이것이 만물의 이치(物理)이니 곧

천일(天一)은 물(水)을 낳는 도이요 성(性)이 광명에 통하는 것이란 이것이 생물

의 이치(生理)이니 곧 지이(地二)는 화(火)를 낳는 도요 재세이화(在世理化)란

이것이 마음의 이치(心理)이니 곧 인삼(人三)은 나무(木)를 낳는 도이다. 대저 대

시에 삼신이 삼계(三界)를 만들어 물로서 하늘을 형상화하고 불로서 땅을 형상

화하고 나무로서 사람을 형상화하니 무릇 나무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

로 나왔고 또한 이와같이 사람은 땅에 서서 나와 능히 하늘을 대신한다.” 라고

하였다. 웅씨의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씀이 참으로 좋다.” 라고 하였다.

단군왕검은 이미 천하를 평정하여 삼한(三韓)으로 구분하고 토경을 관장하였

다. 이에 웅백다(熊伯多)를 봉하여 마한(馬韓)으로 삼아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

니 또한 백아강(白阿岡)이라고 한다. 마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올리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람이 거울을 본즉 그 고움(姸)과 추함(醜)이 스스로 드

러나듯이 백성이 군장을 본즉 그 다스림(治)과 혼란함(亂)의 정사를 볼 수 있듯

이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상을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사를 본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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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였다. 마한이 위에 전갈(上箚)하여 말하기를, ‘성스러운 말씀입니다. 성스

러운 주인(聖主)은 능히 중의(衆議)를 따르는 고로 도가 크고 어리석은 임금(暗

君)은 독선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고로 도가 작습니다. 가히 안을 살피는데

게으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에 천왕이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

을 쌓고 마리산(摩璃山)에 천단을 설치하여 제사올렸는데 강남의 민정 8,000인을

징발하여 역(役)을 돕게 하였다. 신유년 3월에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올렸다. 웅백다가 홍서하시니 재위는 55년이었다. 아들 노덕리(盧德

利)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홍서하시고 아들 불여래(弗如來)가 즉위하였다. 이

때는 단군 부루(扶婁) 12년 임자년 가을 10월이었다. 백성들에게 칠회력(七回曆)

을 반포하도록 명하고 이듬해 봄 3월에 백성들에게 백아강에서 버드나무 심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도정(都亭)을 만들었다. 병진년에 남산에 삼일신고비(三

一神誥碑)를 새겨서 세웠다. 경신년에 벼논(稻田)을 경작하였다. 기해년에 소도

를 세워 삼윤구서의 교훈(訓)을 베푸니 치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단군 가륵 3년에 불여래가 홍서하시니 아들 두라문(杜羅門)이 즉위하였다. 을

사년(乙巳) 9월에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말하기를, ‘천하의 큰 근본이 내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다.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사물이 중일을

잃으면 형체가 곧 기울어 무너지니 군장의 마음은 오로지 위태롭게 되고 백성들

의 마음은 오로지 미약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고 균등하게 중심

을 세워서 잃지 않은 연후에 곧 하나에 정하여지는 것이다. 유중유일(惟中惟一)

의 도는 아버지는 마땅히 자애로워야 하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해야 하고 임금은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해야 하고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

야 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고 노인과 젊은이는 마땅히 차례가 있

어야 하고 벗은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몸가짐을 절제하고 검소함

을 좋아하고 학문을 닦고 직업을 연마하고 지능을 계발하고 능력을 발휘하여 널

리 서로를 이롭게 하고 자기를 완성하는데 힘쓰고 자유(自由)롭고 평등(平等)하

게 만물을 열어 하늘 아래에 스스로 임하되 국통을 존중하고 헌법(憲法)을 엄수

하여 각각 그 직을 다하고 근면을 장려하고 산업을 보호하여 그 국가에 사건이

있을 때에는 몸을 바쳐 의로움을 보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나아가 만

대(萬世) 무량(無疆)의 운자리(運祚)를 부양할 지어다. 이는 짐이 너희 국인(國

人)들과 더불어 단단히 가슴에 새겨(佩服)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일체가 결

실을 완성하는 의지를 지극히 하기를 바란다. 이는 임금의 말이다.’ 하셨다.

두라문이 홍서하시고 아들 을불리(乙弗利)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홍서하시고

아들 근우지(近于支)가 즉위하였다. 곧 단군 오사구 을유년이다. 경인년에 민정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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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인을 보내어 살수에서 배를 건조하니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한(韓)

이 명을 받들어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 삼신께 제사하는 것을 돕고 10월에

목단봉 중록(中麓)에 이궁을 세워 천왕이 순행할 때 거주할 곳으로 삼았다. 매년

3월에 마한에 명하여 군을 열병하고 밭갈고 사냥하여 16일에 기린굴(麒麟窟)에

서 하늘에 제사하고 조의(皂衣)들에게 가관(加冠)의 예를 베풀고 이에 노래하고

춤추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홍서하시고 아들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을우지가

홍서하시고 동생 궁호(弓戶)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홍서하셨는데 후사(嗣)가 없

으므로 두라문의 동생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이 명을 받들어 들어가

마한을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단군 우서한(于西翰)이 백아강에 순행하며 명하여

밭을 구획하고 땅을 주어 4가(家)가 구(區)를 만들고 구에서 1승(乘)을 내어 분

담하여 고향 주위(鄕衛)를 지키게 하였다. 단군 노을(魯乙) 임인년에 막연이 홍

서하시고 동생 아화(阿火)가 즉위하였다. 이때에 단군 도해는 단호한 의지로 개

화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는데 명하여 대성산(大聖山)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대동강(大同江)에 대교를 만들었다. 세 올(三忽)로 전인(佺)을 삼아 경당을 설치

하고 칠회제신의 의례를 정하고 삼윤구서의 교훈을 강론하시니 환도(桓道) 문명

의 성대함이 나라 밖에 까지 들리었다. 하나라 주인(主) 근(厪)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정사년에 아화가 홍서하시고 아들 사리(沙里)가 즉위하였다. 단

군 아한 을묘년에 사리가 홍서하시고 동생 아리(阿里)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

을유년에 아리가 홍서하시고 아들 갈지(曷智)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홍서하시고

단군 대음 무신년에 아들 을아(乙阿)가 즉위하였다. 을유년에 탐모라(耽牟羅) 사

람이 말 30필을 바쳤다.

을아가 홍서하시고 단군 여을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豆莫奚)가 즉위하였다. 임

신년 3월 16일에 마리산에 친행하여 참성단(塹城壇)에서 삼신께 제사올렸다. 은

(殷)나라 주인 외임(外壬)이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홍서하시고 무인년에 아들 자오수(慈烏漱)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독로(瀆盧)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홍서하시고 단군 고홀 경오년에

아들 아루(阿婁)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홍서하시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阿羅

斯)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반란을 일으켜 개성(開城)에 의거하면

서 천왕께 항명하므로 마한이 사방에서 거병하여 토벌하려고 홍석령(紅石嶺)의

경계에 이르렀을때 천왕이 고등이 좌현왕(左賢王)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것

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을미년에 천왕이 해성(海城) 욕살(褥薩) 서우여(徐于餘)에게 자리를 양위하고

자 하므로 마한이 불가함을 간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색불루가 즉위하므로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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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 군사를 정비하고 몸소 해성의 전장에 나가 싸웠으나 패하여 돌아오지 못

하였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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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세가(馬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가 할아버지의 공을 이어 중병(重兵)을 손에 넣으니 진한이 스스

로 무너지고 두 한(韓) 역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패하여 멸망하였다. 앞의

제왕(帝)께서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함으로써 양위하였다. 새

로운 제왕께서 백악산(白岳山)에 도읍할 것을 상의하니 여러 욕살이 불가함을

고집하므로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조서를 받들어 칙유하니 이에

여러 욕살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병신년 원년 정월에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시니 이곳이 백악산 아사달

이다. 3월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근자에 아사달이 사람을 시켜서 옥책과 국

보를 전함으로서 양위하였다. 앞의 제왕은 지금 비록 그 호칭을 답습하여 존중

되고 있으나 그 바다 안의 산천은 이미 이름을 되돌려 장적에 실렸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는 마땅히 국전(國典)에 있으니 남용할 수가 없다. 반드시 전거할만

한 옛일을 살피고 고증하여 정성껏 공경하는데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마

땅히 제사를 맞이함에 있어 먼저 가서 날을 잡고 재계(齋戒)하고 살피어 신역

(神域)을 청소하고 정결한 희생을 준비하여 폐백(幣)으로 사용하여 삼신께 보답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제왕께서 택일하여 7일동안 재계하고 향(香)과 축

(祝)을 여원흥에게 내려 16일에 이르러 이른 아침에 삼한 대백두산(大白頭山) 천

단에서 제사의 일을 공경히 행하게 하고 제왕께서는 친히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

사하였다.

그 백두산 서고문에서 말하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절하고 머

리를 조아리옵니다. 스스로 천제의 아들로서 수양하여 나로부터 백성에게 미치

면 반드시 스스로 하늘에 제사함으로써 공경할 것입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아 넓은 은혜와 큰 덕으로 이미 삼한 5만리의 토경과 더불어 함께

누리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고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

상제의 단(壇)에 극진히 제사를 올리오니 신께서는 그 밝음을 사람과 만물에게

남김없이 비추어 주옵소서. 청결히 재계하고 정성으로 공양하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고 묵묵히 도와 주옵소서. 반드시 새로운 제왕의 건극(建極)을 아름답게

꾸미시어 세세토록 삼한 천만년의 무량(無疆)한 다스림(祚業)을 보전하게 하시고

해마다 곡식은 풍요롭게 여물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은성하게 하옵소서. 우

리 성제의 나를 비우고 만물을 있게 하는 지극한 염원을 흠뻑 비춰주옵소서.”

하였다.

5월에 제도를 개혁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이란

관경을 이름이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리는 땅인데 곧 옛날의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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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이다. 정치는 천왕에서 연유하여 삼한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명령을 따랐

다. 명하여 여원흥을 마한으로 삼고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고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기를 단군

관경(檀君管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진한사(眞韓史)가 단군조선이라고 칭하

는 것이다.

원흥(元興)이 이미 대명(大命)을 받들어 대동강을 든든히 지켰는데 또한 왕검

성(王儉城)이라고 칭하였다. 천왕도 또한 매년 중춘(仲春)에 반드시 마한을 순행

하면서 머물러서 백성과 정사에 힘쓰니 이때에 문서를 보내어 많이 거둬들이는

폐단이 마침내 없어졌다. 이보다 먼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오직 짐 한 사람

의 공양을 위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며 거두어들이는 것은 곧 정치가 없는

것과 같다. 정치가 없고서야 임금이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엄명으로 이를

폐지하였다.

무자년에 마한이 명을 받들어 도읍에 들어와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것이 불가

하다고 간하니 그것을 따랐다. 원흥이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아실(阿實)이

즉위하였다. 아실이 홍서하시고 동생 아도가 즉위하였다. 기묘년에 은나라가 멸

망하였다. 3년 후인 신사년에 아들 서여(胥餘)가 태행산(太行山) 서북의 땅에 피

하여 살므로 막조선이 그것을 듣고 여러 주군(州郡)을 순행하며 살펴 병사들을

사열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홍서하시고 경술년에 아들 아화지(阿火只)가 즉위하였다. 아화지가 홍

서하시고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阿斯智)가 즉위하였다. 아사지가 홍서하시고 단

군 마휴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홍서하시고

아들 소이(所伊)가 즉위하였다. 소이가 홍하고 정해년에 아들 사우(斯虞)가 즉위

하였다. 무자년에 주나라 주인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어 정월을 축하하였다.

사우가 홍서하시고 갑진년에 아들 궁홀(弓忽)이 즉위하였다. 갑인년에 명하여

협야후(陜野侯)가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토벌하여 왜인(倭人)

의 반란을 평정하게 하였다. 궁홀이 홍서하시고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다. 동기가

홍서하시고 단군 다물 계유년에 아들 다도(多都)가 즉위하였다. 다도가 홍서하시

고 임진년에 아들 사라(斯羅)가 즉위하였다. 사라가 홍서하시고 아들 가섭라(迦

葉羅)가 즉위하였다. 가섭라가 홍서하시고 갑인년에 아들 가리(加利)가 즉위하였

다. 을묘년에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수만 명이 반란하였다. 관병이 싸울 때 마

다 불리하여 적이 마침내 도성을 압박하여 심히 위급하므로 가리도 출전하여 쏟

아지는 화살에 맞아 홍서하셨다.

병진년에 상장군(上將) 구물(丘勿)이 마침내 엽호 두목 우화충(宇和沖)을 참하

고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보다 앞서 가리의 손자 전내(典奈)가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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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로부터 국정이 더욱 쇠하였다.

전내가 홍서하시고 아들 진을례(進乙禮)가 즉위하였다. 진을례가 홍서하시고

을묘년에 아들 맹남(孟男)이 즉위하였다. 무술년에 수유인(須臾人) 기후(箕詡)의

군사가 번한에 들어와서 점거하고 스스로 번조선(番朝鮮) 왕이라고 칭하였다. 연

(燕)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우리와 더불어 정벌하자고 하였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에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제위(位)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니 진조선

(眞朝鮮)이 오가(五加)와 더불어 정사를 쫒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끝이 났

다.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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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涿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를 평정하고

산을 헤치고 길을 내니 땅의 넓이가 만리에 이르렀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와

더불어 나란히 세습하였는데 요(堯)의 덕망이 갈수록 쇠하여지자 너도나도 몰려

들어 땅을 다투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

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어 주둔하게 하고 당요를 함께 정벌할 것

을 약속하니 요가 곧 힘이 꺽여 우순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나라를 물

려주었다. 이에 순의 부자, 형제가 다시 한집으로 돌아오니 대저 나라를 위하는

도는 효도와 우애를 우선으로 삼는다. 9년 동안의 홍수피해가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는 고로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우순과 더불어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회맹하였다. 순은 사공(司空)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

의 오행치수의 법을 전수받아 공을 이루었다. 이때에 감우(虞)를 낭야성(琅耶城)

에 설치하여 구려(九黎) 분정(分政)의 회의를 결정하니 즉 그 글에 이르기를, ‘동

쪽으로 순행하며 차례대로 바라보고 동쪽 임금(東后)을 외궁에서 뵙는다.’ 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므로 5년(五歲)에

순행하여 낭야에 이르는 것이 한번이요 순(舜)은 제후(諸侯)이므로 진한에 입조

하여 뵙는 것(朝覲)이 네 번이다. 이에 단군왕검이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와

용력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번한으로 삼고 험독(險瀆)에 정부를 세우니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칭한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용기와 지혜

로 세상에 그 이름이 소문이 났다. 단군이 곧 불러보시고 범상치 않게 여기시고

배수하여 바로 번한(番韓)으로 삼고 겸하여 감우의 정사를 맡겼다. 경자년에 요

중(遼中)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통도(桶

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

산(碣山), 여성(黎城)이 이것이다.

두남이 홍서하시고 아들 낭야(琅邪)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년 3월에 가한성

(可汗城)을 개축하여 뜻하지 않는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그 이름이 낭야성

으로 번한이 쌓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가 명을 받들어 도산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낭야에서 보름

동안 머물면서 민정을 청문하였다. 우순 또한 4악(岳)을 이끌고 와서 치수의 여

러가지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이 태자의 명령을 받들어 경내에 경당(扃堂)을

크게 일으키고 겸하여 태산(泰山)에서 삼신께 제사올리니 이로부터 삼신의 옛풍

속이 회사(淮泗) 사이에서 크게 행하여졌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이치를 주관하고 곧 회맹하여 번한으로 하여금 우사공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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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말하기를,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다. 그대의 임금(后)이 나를 청하

여 물과 토지를 다스리는 것을 배워 백성을 건져 구제하고자 하므로 삼신상제께

서 가서 돕는 것을 기뻐하므로 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천왕땅의 전문

(篆文)으로 된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능히

험한 곳을 지나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흉한 일을 만나도 해를 입지 아니할 것이

다. 또 신침(神針) 한 다발이 있으니 능히 물의 깊고 낮음을 잴 수가 있어 쓰면

변화가 무궁할 것이다. 또 황구종보(皇矩倧寶)가 있으니 무릇 험한 곳의 물을 진

압하여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이 3보(寶)를 너에게 주니 천제의 아들의 큰 가르

침을 어기지 아니하면 가히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사공이 삼육구배를 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의 명령을 힘써 행하

고 우리 우순의 크게 여는 정치를 보좌함으로서 삼신께서 지극한 기쁨에 이르도

록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 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

으니 대개 오행치수의 요결이다. 태자가 구려(九黎)를 도산에서 회맹하시고 우순

에게 명하여 곧 우가 바친 사례(事例)에 보답하였는데 지금의 소위 말하는 우공

(禹貢)이 이것이다.

낭야가 홍서하시고 계묘년에 아들 물길(勿吉)이 홍서하시고 갑오년에 아들 애

친(愛親)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홍서하시고 아들 도무(道茂)가 즉위하였다. 도무

가 홍서하시고 계해년에 아들 호갑(虎甲)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천왕이 송양

(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서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파견하여 상(喪)을 치르

고 병사를 나누어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호갑이 홍서하시고 단군 달문 기축년

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하나라 주인 소강(少康)이 사신을

파견하여 새해를 축하하였다.

오라가 홍서하시고 병술년에 아들 이조(伊朝)가 즉위하였다. 이조가 홍서하시

고 단군 아술 병인년에 동생 거세(居世)가 즉위하였다. 거세가 홍서하시고 신사

년에 아들 자오사(慈烏斯)가 즉위하였다. 자오사가 홍서하시고 을미년에 아들 산

신(散新)이 즉위하였다. 산신이 홍서하시고 무자년에 아들 계전(季佺)이 즉위하

였다. 경신년에 명을 받들어 탕지산(湯池山)에 삼신단(三神壇)을 설치하고 관가

(官家)를 옮겼는데 탕지는 옛 안덕향(安德鄕)이다. 홍서하시고 정사년에 아들 백

전(伯佺)이 즉위하였다. 백전이 홍서하시고 을미년에 중제(仲弟) 중전(仲佺)이 즉

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묘년에 아들 소전(少佺)이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출(蚩雲出)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정벌하였다. 을미년에 묵태

(墨胎)를 파견하여 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소전이 홍서하시고 갑술년에 아들

사엄(沙奄)이 즉위하였다. 사엄이 홍서하시고 아우 서한(棲韓)이 즉위하였다. 홍

서하시고 정축년에 아들 물가(勿駕)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막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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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莫眞)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진단(震丹)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은나라 주인(主) 태무(太戊)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 홍하고 계유년에 아들

감정(甘丁)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아들 소밀(蘇密)이 즉위하였다. 계사년 3년

에 은나라가 조공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토벌하니 그 주인 하단갑(河

亶甲)이 곧 사죄하였다.

소밀이 홍서하시고 아들 사두막(沙豆莫)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계부(季父)

갑비(甲飛)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烏立婁)가 즉위하였

다. 홍서하시고 아들 서시(徐市)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신년에 아들 안시

(安市)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축년에 아들 해모라(奚牟羅)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단군 소태 5년에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보내어 번한에 보하였다.

대개 고등은 매번 그의 지모가 출중함을 탄핵하여 제왕께서 권하여 보내어 파견

하였다. 이때에 은나라 주인 무정(武丁)이 사방에서 병사를 일으키려고 하자 고

등이 그것을 듣고 마침내 상장군 서여(西余)와 더불어 그곳을 함께 파괴하고 색

도(索度)에 까지 추격하여 쫒아가 군사들이 불태우고 약탈하고 돌아왔다. 서여는

북막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탕지산(湯池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자객을 보내어

소정(小丁)을 살해하고 아울러 병갑(兵甲)을 싣고 갔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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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한세가(番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 초기에 삼한이 아우러고 국가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니

은나라 주인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와서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먼저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니 서우여가 좌원(坐原)으로 몰래 돌아가 엽

호 수천 명과 모의하여 병사를 일으켰다. 개천령(蓋天령)이 듣고 즉시 가서 토벌

하다가 진영(陣)에서 패하여 몰사하니 제왕께서 친히 삼군(三軍)을 이끌고 가서

그를 토벌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고 비왕에 봉할 것을 약

속하고 다시 깨우치니 들음으로 이에 이르러 명하여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았다.

4년 기해년에 진조선(眞朝鮮)이 천왕의 칙문(敕文)을 전하여 말하기를, ‘너희 삼

한은 위로는 천신을 받들고 많은 이들을 가까이 하라.’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예와 의리, 농사짓기와 누에치기, 베짜기, 활과 화살 만들기, 글 읽기와 쓰기로

백성을 교화하고 백성을 위하여 금팔조(禁八條)를 제정하였다.

남을 죽인 자는 즉시 죽여서 갚고 남을 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고 도둑질

한 자는 남자는 몰수하여 그 집의 사내종(奴)으로 삼고 여자는 그 집의 계집종

(婢)으로 삼고 소도를 훼손한 자는 금고(禁錮)하고 예와 의리를 잃은 자는 군에

서 복역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역에 징발하고 사음(邪淫)을 한 자는

태형을 하고 사기를 행한 자는 훈방하나 스스로 속죄하고자 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하여 공민이 되어도 풍속이 오히려 그것을 수치로 여겨 가족을 이루려고 하여

도 짝을 찾을 곳이 없었다. 이로서 백성들은 마침내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으

니 문호(門戶)를 잠그는 일이 없었고 부인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그 논밭과 들판과 도읍(都邑)을 열고 변두(籩豆)로 마시고 먹으니 어짐과 양보의

이루어짐이 있었다.

신축년에 은나라 주인 무정이 번한에 부탁하여 글을 올리고 천왕께 방물을 바

쳤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홍서하시고 정유년에 아락(阿洛)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축년에 솔귀(率歸)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갑자년에 임나(任那)가 즉위하였

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詔)를 받들어 동쪽 교외에 천단(天壇)을 축조하고 삼

신께 제사하니 무리들이 둘러서서 춤을 추고 북을 치고 노래하며 말하기를, “정

성으로 천단을 축조하고 삼신주님(三神主) 그분의 영원함을 축하하세. 황제의 운

수의 영원함을 축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민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

다.” 라고 하였다.

임나가 홍서하시고 병신년에 동생 노단(魯丹)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침

입하므로 노일소(路日邵)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고 평정하였다. 홍서하시고 기

삼한관경본기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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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에 아들 마밀(馬密)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모불(牟弗)이

즉위하였다. 을해년에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모불이 홍서하시고 정해년에 아들 을나(乙那)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주인 하(瑕)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을나가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마유휴(摩維庥)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사년에 동생 등나(登那)가 즉위하였

다. 이극회(李克會)가 소련(少蓮)과 대련(大蓮)의 묘(廟)를 세우고 3년상을 정하

여 행할 것을 계청하니 이를 따랐다. 홍서하시고 무술년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

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廟)

에 제사하는 것을 도왔다. 묘(廟)는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에 있다. 해수

가 홍서하시고 기미년에 아들 물한(勿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묘년에 아

들 오문루(奧門婁)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묘년에 아들 누사(婁沙)가 즉위

하였다. 무인년에 천조(天朝)에 들어가 알현하고 태자 등올(登屼), 소자 등리(登

里)와 더불어 한가로이 별궁에 거주하다가 태자 형제에게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말하기를,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

상 가는 털 같은 일로써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마소서. 말도 오히려 같은 구

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또한 한 줄을 짓나니 내실에서 비록 기쁘고 즐거우나 사

소한 말일랑 삼가서 듣지를 마소서.” 라고 하였다.

누사가 홍서하시고 을미년에 아들 이벌(伊伐)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漢

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천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삼한에 명하여 다같이 칙서를 시행하게 하였다. 기미년에 상장군 고력(高力)을

파견하여 회군(淮軍)과 더불어 주나라를 패퇴시켰다. 이벌이 홍서하시고 신유년

에 아들 아륵(阿勒)이 즉위하였다. 병인년에 주나라 이공(二公)이 사신을 파견하

여 방물을 바쳤다. 아륵이 홍서하시고 을축년에 아들 마휴(麻休) 혹은 마목(麻

沐)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진년에 아들 다두(多斗)가 즉위하였다. 홍서하

시고 기축년에 아들 내이(奈伊)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미년에 아들 차음

(次音)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사년에 아들 불리(不理)가 즉위하였다. 홍서

하시고 을사년에 아들 여을(餘乙)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갑술년에 엄루(奄

婁)가 즉위하였다. 무인년에 흉노(匈奴)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뵙기

를 구하고 신하라고 칭하며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홍서하시고 아들

감위(甘尉)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신년에 아들 술리(述理)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오년에 아들 아갑(阿甲)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이 사신 고유

(高維)를 파견하여 먼저 환웅, 치우, 단군왕검 삼조상(三祖)의 상(像)을 반포(頒)

하고 관가에 봉하도록 하였다.

아갑이 홍서하시고 계유년에 고태(固台)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정해년에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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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소태이(蘇台爾)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을사년에 아들 마건(馬乾)이 즉

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진년에 천한(天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인년에

아들 노물(老勿)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도을(道乙)이 즉위하

였다. 계미년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가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

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는데 이(耳)의 아버지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

이며 그 선조는 풍(風)나라 사람인데 후에 서쪽으로 관문을 나가 내몽고를 경유

하고 옮기어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도을이 홍서하시

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述休)가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경오년에 아들 사량(沙

良)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무자년에 아들 지한(地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

시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人韓)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사년에 아들 서울

(西蔚)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병오년에 아들 가색(哥索)이 즉위하였다. 홍서

하시고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는데 일명 산한(山韓)이다. 이 해에 자객

의 해를 입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하였다. 임오년에 연나라가 배

도(倍道)하여 쳐들어와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고 또 험독에 들어오므로 수유인

(須臾人) 기후(箕詡)가 자제 오천명을 이끌고 와서 싸움을 도우므로 이에 군세가

점차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한, 번한 두 한(韓)의 병사와 더불어 협공하여 이

를 대파하고 또 일부의 군대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 장차 싸

우려고 하였더니 연나라가 두려워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곧 공자(公子)로 인

질을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홍서하시고 자손(嗣)이 없으므로 이에 기후가 명령을 받들어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에 연나라도

왕을 칭하고 장차 침입해 오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기후 또한 명을

받들어 정식으로 이름하여 조선왕(朝鮮王)이 되고 번한성에 거주하기 시작하면

서 뜻하지 않는 일에 대비하였다.

기후가 홍서하시고 병오년에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신미

년에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명하여 주군(州郡)이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에 번한이 친히 교외에

서 경작하고 을유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기석이 홍서하

시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箕潤)이 즉위하였다. 홍서하시고 기사년에 아들 기비

(箕丕)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기비는 종실(宗室)의 해모수와 더불어 은밀히 제위

를 교체하기로 약속하고 힘써 돕고 명을 보좌하니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쥐게 한 자는 오로지 기비 바로 그 사람이다. 기비가 홍서하시고 경진년에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하였다. 정미년에 떠돌이 도적(流賊) 위만(衛滿)에게 유인되어

패배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소도경전본훈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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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제5(第五)

신시(神市) 세상에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있었는데 대효(大皞)와 동문에

서 수학하고 도가 이미 통하였다. 바야흐로 방저(方渚)와 풍산(風山) 사이를 유

람하며 자못 명성과 영화를 얻었다. 아사달 제천(祭天)을 참관함에 이르러 의례

(禮)가 끝나고 곧 노래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일(大一)의 그 극함(極)

은 양기(良氣)를 일컫는 말이다. 없는 듯 있는 듯 혼연하고 빈 듯 갖춘 듯 묘하

다. 삼일(三一)은 그 체(體)요 일삼(一三)은 그 용(用)이다. 혼연하고 묘한 것은

하나의 고리로 그 체와 용은 갈라짐이 없다. 커다란 허공(虛空)에 빛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형상이요 커다란 기운이 오래 있으니 이것이 신의 화함이다. 참된

명(命)이 있는 곳이 근원이요 모든 법이 이것에서 생겨난다. 일월의 자식(子)은

천신의 충(衷)이다. 비춤(照)으로 선(線)으로 원(圓)이 밝히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리니 만 가지가 그 무리에 있게 된다. 고로 원(圓)이란 것은 일(一)이요 무극

(無極)이고 방(方)이란 것은 이(二)요 반극(反極)이며 각(角)이란 것은 삼(三)이

요 태극(太極)이다.’ 라고 하였다. 무릇 홍익인간이란 천제(天帝)의 있는 곳에서

환웅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 일신(一神)이 충(衷)에 내리고 성(性)이 광명(光明)

에 통하고 이치대로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고(在世理化)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

라(弘益人間)는 것은 신시(神市)의 있는 곳에서 단군조선에게 전한 것이다. 환역

(桓易)은 우사(雨師)의 관리에게서 나왔다. 때에 복희(伏羲)가 우사가 되어 이로

서 여섯 가축을 길렀다. 이에 신용(神龍)이 해를 쫒아 해가 12번 변색(變色)하는

것을 보고 이에 환역을 만들었다. 환은 곧 희(羲)와 더불어 같은 뜻이고 역은 곧

옛날 용(龍)의 본래 글자이다.

자부(紫府)선생은 발귀리의 후예이다. 나면서부터 신명(神明)하고 도를 얻어

비승(飛昇)하였다. 일찍이 해와 달이 도는 것을 측정하고 이어서 오행의 수리(數

理)를 추고(推考)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짓게 되었는데 이것이 칠성력

(七星曆)의 시작이 되었다. 후에 창기소(蒼其蘇)가 또 그 법을 다시 강연하여 이

로서 오행치수법을 밝혔는데 이것 또한 신시 황부(黃部)의 중경(中經)에서 나온

것이다. 우(虞)나라 사람 사우(似禹)가 회계산에 이르러 조선(朝鮮)에서 가르침을

받고 자허(紫虛)선인에게 부탁하여 창수사자(蒼水使者) 부루(扶婁)를 뵙기를 구

하고 황제중경(黃帝中經)을 받으니 곧 신시 황부(黃部)의 중경이다. 우(禹)가 이

를 얻어 사용함으로서 치수에 공을 세웠다.

환역은 체(體)는 원이고 용(用)은 방으로 상(象)이 없음에 연유하여 이로서 실

(實)을 아니 이것이 천리(天理)이다. 희역은 체는 방이고 용은 원으로 상이 있음

에 연유하여 이로서 변화를 아니 이것이 천체(天體)이다. 지금의 역(易)은 서로

태백일사

- 85 -

가 체(體)이고 서로가 용(用)으로 스스로 원이 되어 원이고 스스로 방이 되어 방

이고 스스로 각이 되어 각이니 이것이 천명(天命)이다. 그리므로 천(天)의 근원

은 스스로 하나의 커다란 허무공(虛無空)이 되는데 자기가 어찌 체(體)가 있다고

할 것인가. 천(天)은 스스로 본(本)이 되고 체가 없으며 28수(宿)가 곧 임시로 체

가 된다. 대개 천하의 만물은 부르는 이름이 있으므로 모두 수(數)가 있고 수가

있으므로 모두 역(力)이 있다. 이미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란 즉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다름이 있음이요 또 역(力)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란 즉 유형(有形)

과 무형(無形)의 구별이 있음이다. 고로 천하의 만물(物)은 그로써 그것이 있다

고 말한즉 모두 그것이 있고 그로써 그것이 없다고 말한즉 모두 그것이 없다.

천부경(天符經)은 천제 환국에서 구전된 글이다. 환웅 대성존(大聖尊)께서 하

늘에서 내려오신 후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 그것

을 기록하게 하였다. 최고운(孤雲) 치원(致遠)이 또한 일찍이 신지 전고비(篆古

碑)를 보고 다시 복원하여 서첩(帖)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전한 것이다. 그러나

본조에 이르러 유학의 글에만 뜻을 두고 조의(皂衣)와 더불어 서로 듣지 아니하

고 살아 남고자 하는 놈들이니 그 또한 한스러운 것이다. 그런고로 특별히 표시

(表)하여 그것을 드러내어 이로서 후세에 보인다.

천부경(天符經) (81자)

일신이 처음 시작하였는데 일신을 시작하게 하는 것은 없다. (일신이) 세 극을

나누었는데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一始無始一折三極無盡本)

하늘의 첫번째 신이신 성의 환인천신은 하나이고 땅의 첫번째 신이신 명의 천

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둘이고 사람의 첫번째 신이신 정의 천지태일과 나반태

부와 아만태모는 셋이다. 일신이 쌓여서 음이 세워져 십으로 커지고 양이 작용

하여 궤없이 삼신(조화의 천일신, 교화의 지일신, 치화의 인일신)으로 화한다.(天

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匱化三)

하늘의 두번째 신이신 삼관의 성명정의 삼신은 셋이고 땅의 두번째 신이신 삼

방의 심기신의 삼신은 셋이고 사람의 두번째 신이신 삼문의 감식촉의 삼신은 셋

이다. 천지인 삼계의 성명정에 삼방인 심기신과 삼문인 감식촉을 합하면 영성의

마고 상제와 산천의 궁희 및 소희 신모가 생겨난다. 영성, 산천과 풍운뢰우가 돌

고 천하대장군이 다스리는 오제(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와 지하여장군이

다스리는 오령(태수, 태화, 태목, 태금, 태토)과 북두칠성과 칠성(해, 달, 수성, 화

성, 목성, 금성, 지구)이 순환하여 이루어졌다.(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

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

일신의 신묘한 흐름으로 만물이 되어 가고 만물이 되어오니 작용은 변화하여

도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소도경전본훈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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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심은 태양에서 비롯되어 높고 밝으며 사람은 천지 가운데 일신이다.(本心本

太陽昻明人中天地一)

일신은 끝나도 일신을 끝나게 하는 것은 없다.(一終無終一)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헌원(軒轅)에게 주어서 그것을 사용하여

마음을 씻고 의(義)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삼청궁(三淸宮)에서

살았다. 궁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의 양지에 있다. 헌원 제후가 친히

치우를 조현하려고 가는 길에 빛나는 이름(名華)이 있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經文)은 신시의 녹도로서 그것을 기록하였는데 3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推演)하고 주석을 더하여 별도로 신선음부(神仙陰府)의 설

(說)이 되었다. 주(周)나라와 진나라(秦) 이래로 도가(道家) 사람들의 흐름에 의

탁한 바가 되어 간혹 단복(丹服)을 연마하고 먹는 일이 있었는데 허다한 방술의

설이 분분히 잡다하게 나와 미혹하는 일이 많았다. 서복(徐福)이 한(韓)에 이르

러 마침내 역시 회사(淮泗)의 출신으로 본디 진나라에 반항의 뜻이 있으므로 이

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 선(仙)을 구한다고 말하고 도망하여 돌아오지 아니하

였다고 한다. 일본(日本)의 기이(紀伊)에 서시(徐市)라는 제목 이름의 각(刻)이

있다. 이국(伊國)의 신궁(新宮)에 서시의 묘사(廟祠)가 있다. 서복을 칭하여 서시

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시(市)는 복(福)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본래 신시(神市) 개천의 시대에 나와서 그것이 글이 되

었다. 대개 집일함삼(執一含三)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의리로서 본령(本領)으로

삼고 5장으로 구분하여 천신조화의 원천과 세계와 인물의 화함을 상세하게 논하

고 있다. 그 1장은 허공(虛空)이라고 한다. 일신(一)이 무(無)에서 시작하는 것은

일신이 끝나는 무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고 끝나는 것과 같다. 밖은 허하고 안은

공하니 그 가운데 항상(常)이 있다. 그 2장은 일신(一神)이라고 한다. 공(空)은

가고 색(色)은 오니 주재(主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삼신은 대제(大

帝)가 되고 실제로 공덕(功)이 있다. 그 3장은 천궁(天宮)이라고 한다. 참된 자아

(眞我)가 거주하는 곳으로 만 가지 선(善)이 스스로 족하고 영원히 쾌락이 있다.

그 4장은 세계(世界)이라고 한다. 별들이 무리를 이루어 해에 속하고 수많은 무

리들이 이루어지니 큰 덕이 여기서 생겨난다. 그 5장은 인물(人物)이라고 한다.

함께 삼신으로부터 나와서 일신의 참됨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큰 나(大我)가 된

다. 세상에서 간혹 삼일신고로서 도가(道家) 초청(醮靑)의 글(詞)로 삼은 것은 즉

심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 환국은 환웅천황(桓雄)으로부터 하늘을 열어 천신제사

를 주관하고 삼일신고를 조술하여 산(山)과 물(河)를 널리 개척하고 인민들을 교

화하였다.

오호라. 신시천황의 호칭을 세움이 지금 이미 상신상제(三神上帝)에 버금가 무

태백일사

- 87 -

량의 큰 복을 열고 곰부족(熊)과 호랑이부족(虎)을 초대하여 위무함으로써 사해

(四海)를 편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천신(天神)을 위하여 널리 이롭게 하는 대의

를 내걸고 아래로는 인간세상을 위하여 고할 곳 없는 원한을 풀어주었다. 이에

사람들은 스스로 천신을 따르고 세상에는 속임과 망령됨이 없어 행함이 없이 스

스로 다스려지고 말함이 없이 스스로 화해졌다.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시하고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죽음을 던져

위급함을 구해내고 이미 옷과 음식을 고르게 하였다. 또 권력과 이익을 공평하

게 하고 같이 삼신(三神)께 돌아가 기쁨을 나누고 소원을 서약하였다. 화백(和

白)이 공적인 것이 되고 책화(責禍)가 믿음을 보전하고 힘을 모아 일을 쉽게 하

고 업(業)을 나누어 서로 보조하였다. 남녀 모두 맡은 직업이 있고 늙은이와 젊

은이가 같이 복리를 나누고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서로 소송(訟)을 다투는 일이

없고 국가가 국가와 더불어 서로 침탈하는 일이 없으니 이를 일컬어 신시(神市)

태평(太平)의 세상이라고 한다.

삼일신고(三一神誥) (총366자)

제1장 허공(虛空) (36자)

제왕(帝)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오가(五加) 무리들아.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

(天)이 아니고 검고 검은 것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모양과 본질이 없고 시작

과 끝이 없고 상하와 사방이 없다. 없고 없고 비고 비어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帝曰爾五加衆蒼蒼非天玄玄非天天無形質無端倪無上下四方

虛虛空空無不在無不容)

제2장 일신(一神) (51자)

신은 위가 없는 첫 번째 자리(一位)에 존재하시며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이

있어 하늘(天)을 생성하고 수(數)없고 세계(世界)없이 주재하시며 사소한 티끌도

빠짐이 없이 총총히 만물을 창조하시니 밝고 밝고 신령하고 신령하여 감히 이름

을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소리와 기운으로 극진히 원하고 빌면 스스로 친히 볼

수 있고 본성(性)을 종자에서 구하면 그대의 뇌속에 내려와 존재하시느니라.(神

在無上一位有大德大慧大力生天主無數無世界造生+生生+生物纖塵無漏昭昭靈靈不

敢名量聲氣願禱絶親見自性求子降在爾腦)

제3장 천궁(天宮) (40자)

천신의 나라에 천궁이 있어 만 가지 선(善)으로 계단을 삼고 만 가지 덕(德)으

로 문을 삼으니 일신이 거주하는 곳이다. 수많은 신령과 여러 철인들이 지키고

모시고 있어 크게 길상(吉祥)하고 크게 광명(光明)한 곳이다. 오직 성품이 통하

여 공을 이룬자만이 일찍이 영원히 쾌락(快樂)을 얻을 것이다.(天神國有天宮階萬

善門萬德一神攸居群靈諸哲護侍大吉祥大光明處惟性通功完者朝永得快樂)

소도경전본훈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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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세계(世界) (72자)

너희들은 무성히 널려 있는 별무리(星辰)를 보아라. 수가 다함이 없고 크고 작

고 밝고 어둡고 괴롭고 즐거운 것이 동일하지 않다.

일신이 수많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신이 해의 세상의 사자에게 칙령을 내려 7

백 세계를 거느리게 하시었다. 너희들 땅(地)은 대일(大一)에서 부터 가운데 세

계로 구르고 불(火)이 진동하여 바다(海)를 키우고 육지(陸)를 변화하여 이에 형

상을 보이게 이루었다. 신이 싼 것(包)의 밑까지 기운(氣)을 불어 주시고 태양의

빛과 열을 쪼여주시니 나는 것을 펼쳐 화하여 노닐게 하시고 식물을 재배하여

번식하게 하셨다.(爾觀森列星辰數無盡大小明暗苦樂不同一神造群世界神勅日世界

使者轄七百世界爾地自大一丸世界中火震盪海幻陸遷乃成見象神呵氣包底煦日色熱行

者+羽化遊栽物繁殖)

제5장 인물(人物) (167자)

인물이 같이 세 가지 참됨(眞)을 받았으나 오로지 무리들만이 땅을 미혹하여

세 가지 망령됨(妄)이 뿌리를 내리고 참됨과 망령됨이 대립하여 세 길(途)을 짓

느니라.

이르기를 성명정(性命精)이다. 사람(人)은 이것이 완전하지만 만물(物)은 이것

이 불완전하다. 참된 성품은 선하여 악한 것이 없어 상철과 통하고 참된 명은

맑아 흐린 것이 없어 중철이 알고 참된 정신은 후하여 박한 것이 없어 하철이

보전하니 참된 일신으로 돌아간다.

이르기를 심기신(心氣身)이다. 마음은 성품에 따른 것이니 선과 악이 있어 선

하면 복이 되고 악하면 화가 된다. 기운은 명에 따른 것이니 청과 탁이 있어 맑

으면 오래 살고 탁하면 일찍 죽는다. 몸은 정신에 따른 것이니 후하고 박한 것

이 있어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하다.

이르기를 감식촉(感息觸)이다. 열여덟 경지를 이루어 도는데 감성에는 기쁨,

두려움, 슬픔, 노여움, 탐냄, 싫어함이 있고 느낌에는 향내 나고, 구리고, 차고,

덥고, 건조하고, 습함이 있고 감촉에는 소리, 색깔, 냄새, 맛, 음란, 저속함이 있

다. 무리들은 선하고 악하고 맑고 흐리고 후하고 박한 것이 서로 섞여서 임의로

달리는 경사진 길을 쫒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게

되지만 철인은 감성을 그치고 느낌을 조절하고 감촉을 금하여 한 가지 의지로

화하여 망령된 것을 고쳐서 곧 참됨으로 나아가면 큰 신의 동력을(大神機) 발휘

하게 되니 성품이 통하고 공덕이 완전해 지는 것이다.(人物同受三眞惟衆迷地三

妄着根曰眞妄對作三途性曰性命精人全之物偏之眞性善無惡上哲通眞命淸無濁中哲

知眞精厚無薄下哲保返眞一神曰心氣身心依性有善惡善福惡禍氣依命有淸濁淸壽濁

殀身依精有厚薄厚貴薄賤曰感息觸轉成十八境感喜懼哀怒貪厭息芬爛寒熱震濕觸聲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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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臭味淫抵衆善惡淸濁厚薄相雜從境途任走墮生長肖病歿苦哲止感調息禁觸一意化行

改妄卽眞發大神機性通功完是)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 달문(達門)왕때의 사람 신지 발리(發理)가 지은 것

이다. 본래 삼신의 옛 제사의 서원문(誓願文)이다. 무릇 상고 제천의 의의는 요

컨대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빌고 신께 축원하여 나라를 흥하게 하는데 있다. 오늘

날 호사자(好事子)들은 신지비사를 가지고 도참성점(圖讖星占)과 상통한다고 하

고 수를 추리하여 부연하여 그것은 진단구변도(震檀九變圖)이라 하고 또 감결예

언(鑑訣豫言)의 시초라고 하니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그 글에 이르기를 저울대

는 부소량(扶蘇樑)이란 이것은 진한의 옛 도읍지를 일컫는 것으로 또한 즉 단군

조선이 도읍한 곳인 아사달이 이곳이니 또한 즉 지금의 송화강 합이빈(哈爾濱)

이다. 그 글에 이르기를 추라는 것은 오덕지(五德地)이란 이것은 번한의 옛도읍

지를 일컫는 것으로 지금의 개평부 동북 칠십리에 있는 탕지보(湯池堡)이다. 그

글에 이르기를 극기(極器)는 백아강이란 이것은 마한의 옛 도읍지를 일컫는 것

으로 지금의 대동강으로 곧 마한의 웅백다가 하늘에 제사한 마한산(馬韓山)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삼한 지세로써 여러 형석(衡石)에 비유해 본즉 부소량은 나

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저울추라는 것과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극

기와 같아서 삼자 중에 하나가 빠지면 그기에 물건을 달 수 없듯이 나라는 백성

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삼신 옛제사의 서원(誓願)은 오로지 삼한이 국경을

관리하고 민중을 충분히 기쁘게 하는데 그 뜻이 있다. 신지비사가 전하는 바도

역시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즉 나라를 위하는 일념과 아울러 충의를 장려

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고 기원하여 복을 받는다면 신은 반드시 충(衷)에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다. 행사(行事)가 부르지 않고 실행

(實行)이 구하지 않고 사실을 바르게 하면 이러한즉 부르는 곳과 구하는 곳이란

것이 어찌 공(功)을 이루도록 따를 것인가.

우리나라 문자는 예로부터 있었는데 지금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

벽에 신시의 옛 각자가 있다. 부여인 왕문(王文)의 글쓰는 법은 부적과 유사하고

전자와 비슷하다.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 부루의 오행(五行)은 모두 환단

의 시대에 나온 것이고 은학(殷學)과 한문(漢文)은 대개 왕문의 남겨진 법(遺範)

이다. 유기(留記)에 이르기를 신획(神劃)이 일찍이 태백산 푸른 바위벽에 존재하

였는데 그 모양은 ㄱ과 같으며 세상에서는 신지선인(神誌仙人)이 전한 것이라고

칭한다. 혹자는 이것으로 문자를 만든 시초로 삼기도 하는즉 그 획은 직(直)은

一이고 곡(曲)은 二의 형이다. 그 뜻은 관제(管制)의 모습도 있고 그 모양과 그

소리는 또 계획된 뜻에서 나온 듯한 것이다. 고로 신인(神人)의 덕과 사랑으로서

사람과 세상을 구하고 이에 준하여 진교(眞敎)를 행하면 반드시 인사(人事)가 모

소도경전본훈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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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르게 된다.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직위에 있고 늙은이와 젊은이가 공

정하게 부양되고 장성한 사람은 의로움을 따르고 많이 가진 사람은 부지런히 힘

쓰고 간음자와 사기꾼은 소송을 그치고 창(干)과 방패(戈)는 모사(謀)를 마치니

이치대로 되어가는 것의 한 길이다.

대변설(大辯說)의 주(註)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옛 각자가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한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삼신께 제사를 올

렸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시에는 옛 것을 전할 때 구설(口舌)에만 의지하였

으나 오랜 후에 곧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또 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

으니 대개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속이 존중하고 믿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 것

이 없다. 일기(一氣)로 부터 삼기(三氣)로 쪼개진 것이 곧 극(極)이고 극은 곧 무

(無)다. 무릇 하늘의 근원(天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虛)가 되고 공(空)이 되

니 안과 밖을 아울러 그렇게 된 것이다. 천궁(天宮)은 곧 광명이 모이고 만물이

화하여 나오는 곳이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虛)를 체(體)로 하고 이에 그

것을 주재(主宰)한다. 고로 이르기를 일기가 곧 하늘(天)이요 곧 공(空)이다. 그

러한 연유로 부터 스스로 중일(中一)의 신이 있어 능히 삼(三)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신이다. 일기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창조하고 교화하고 치화하는 삼화(三化)의 신이 된다. 신은 곧 기이며 기는 곧

허이며 허는 곧 일(一)이다. 고로 땅에는 삼한이 있으니 진한(辰), 변한(弁), 마한

(馬) 세 수도의 한(韓)이다. 한(韓)은 곧 황(皇)이고 황은 곧 대(大)이고 대는 곧

일(一)이다. 고로 사람에게는 세가지 참됨(三眞)이 있으니 성명정(性命精) 세 가

지로 받은 참됨이다. 진(眞)은 곧 충(衷)이고 충은 곧 업(業)이고 업은 곧 속(續)

이고 속은 곧 일(一)이다. 그런 연유로 일에서 시작하고 일에서 끝나는 것은 그

참됨을 회복하는 것이고 곧 일과 곧 삼은 선(善)에 마주 합하는 것이고 작은 알

갱이(微粒)가 알갱이를 쌓아 일(一)로 돌아가는 미(美)이다. 이에 성의 선(善)한

바이고 이에 명의 맑은(淸) 바이고 이에 정의 후(厚)한 바이니 다시 되풀이 하여

어찌하여 유(有)이라 이르고 무(無)이라 이르는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참됨(眞)은 물들지 않고 그 물드는 것은 망(妄)이다. 선(善)은 그치지 않고 그 그

치는 것은 악(惡)이다. 맑음(淸)은 흩어지지 않고 그 흩어지는 것은 탁함(濁)이

다. 후함(厚)은 줄어들지 않고 그 줄어드는 것은 박함(薄)이다. 이러한바 하나를

집어 셋을 포함하는 것이란 그 기가 하나이고 그 신이 셋인 것이고 이러한바 셋

을 모아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란 이것 역시 신이 셋이 되고 기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무릇 살아있는 것들의 본체는 일기(一氣)이고 일기란 것은 안에는 삼신

(三神)이 있다. 지혜(智)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고 삼신이란 것의 밖에는 일기

가 감싸고 있다. 그 밖에 존재하는 것들도 일이고 그 내용들도 일이고 그 통제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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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일이니 역시 모두 머금고 모아서 갈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문자의 근원이

되고 머금고 모으고 집고 돌아가는 것의 뜻이 있다.

신시(神市)에는 산목(算木)이 있고 치우때에는 투전목(鬪佃目)이 있고 부여에

는 서산(書算)이 있다. 그 말하는 산목은 다음이다.

그 말하는 전목은 다음이다.

단군세기에 단군 가륵(喜勒) 2년에 삼랑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지었는

데 이를 가림다(加臨多)이라고 칭하였다. 그 문자는 다음이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 옥진총담(玉塵叢談)에 전하기를 발해국(渤海國)에서

당나라에 보낸 글이 있는데 조정에 그것을 푸는 자가 없었는데 이태백이 능히

풀어서 그기에 대답하였다. 삼국사기에 전하기를 헌강왕(憲康王) 12년 봄에 북진

(北鎭)에서 알리기를 적국인(狄國人)이 진(鎭)에 들어와서 편목(片木)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는데 마침내 가져다 바쳤다. 그 나무에는 15자가 씌어져 있었

는데 전하기를 보로국(寶露國)이 흑수국인(黑水國人)과 더불어 신라국과 화통(和

通)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또 고려 광종(光宗)때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

이름이 났는데 처음에 피란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렀다. 월씨(越氏)에 호사자(好

事者)가 있어 동국한송정곡(東國寒松亭曲)을 거문고 밑바닥에 새겨가지고 파도

를 거슬러 띄워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귀를 해독하지 못하였는데 때마

침 장유를 만나 절을 하고 그 글귀를 물으니 장유가 즉석에서 한시로 이를 풀어

말하였다. ‘달밝은 한송정의 밤, 물결 잔잔한 경포의 가을, 슬피울며 오고 또 가

며 소식을 전하는 한 마리의 모랫벌 갈매기가 있네.’ 대저 거문고의 바닥에 새겨

소도경전본훈 제5

- 92 -

진 문자는 옛날 가림다(加臨多)의 종류였을 것이다.

원동중(元董仲) 삼성기(三聖記) 주(注)에 전하기를 진한(辰), 부여(餘), 왜국(倭)

은 혹은 횡서하고 혹은 결승(結繩)하고 혹은 계목(契木)하고 오직 고구려(高麗)

만이 영법(潁法)을 모사하였다. 생각건대 틀림없이 환단의 위의 시대에 반드시

문자의 모각(模刻)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비석에 새긴 천

부경을 얻어 다시금 서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는데 바로 낭하리의 바

위조각과 더불어 이 모두 그 실증의 증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시에는 녹서

(鹿書)가 있고 자부선생에는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에는 화서(花書)와 투전문속

(鬪佃文束)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는 용서(龍書)가

있고 단군에는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러한 자서(字書)들이 백산, 흑수, 청구, 구

려의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부여인 왕문(王文)이 처음으로 전자를 번거롭게

여겨 직접 그 획을 생략하여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적었다. 진(秦)나라때 정

막(程邈)이 사신을 봉행하여 숙신(肅愼)에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

水)에서 얻었다. 또 그 획을 따랐으나 조금 변형한 것의 모양이 지금의 팔분체

(八分)이다. 진(晋)나라때 왕차중(王次仲)이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그 문자의 근원을 찾다보면 모두 신시의 유법이며 지

금의 한자(漢字) 역시 그 지류를 이은 것이 분명하다.

삼일신고 구본은 장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서

제1장은 허공(虛空), 제2장은 일신(一神), 제3장은 천궁(天宮), 제4장은 세계(世

界), 제5장은 인물(人物)이라고 하였다. 대저 허공은 하늘의 본질이 되고 일신은

하늘의 주재가 되고 천궁은 하늘의 조화를 준비하는 곳이 된다. 세계는 만세 인

물의 시(市)가 된다. 인물은 우주의 삼계의 원훈이 된다. 대저 태백진교(太白眞

敎)는 천부(天符)에 근원하여 지전(地轉)에 합하고 인사에 새기는 것이다. 이로

서 정사를 폄에 있어서는 화백(和白)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서는 책화(責禍)보다 나은 것이 없다. 재세이화의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여 거짓

없음은 지전에서 취하고 게으름 없음은 인정에 합하여 어그러짐이 없으니 곧 천

하의 공론(公論)이 어찌 한 사람이라도 다름이 있을 것인가. 신고(神誥)의 5대

지결(旨訣)도 역시 천부(天符)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신고의 구경(究竟) 역시도

천부 중일(中一)의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로소 문자의 근원이 얼마나 오

래이고 문자의 뜻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았다.

세상에 전하기를 목은 이색(李穡), 휴애 범세동(范世東) 모두 천부경 주해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지금의 시속(時俗)은 비록 한 자의 글이

라도 정주(程朱)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곧 뭇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박힐 정

도로 유생들의 필봉이 사방에서 사나우니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

태백일사

- 93 -

나 어찌 그 내용을 쉽게 논할 수 있겠는가.

신시의 악(樂)은 공수(貢壽)이라 이르고 혹은 공수(供授)이라 전하고 또 두열

(頭列)이라고 이른다. 뭇사람이 열을 지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며 삼신을 크

게 기쁘게 하였는데 국가의 복(國祚)이 길이 번창하고 민심이 윤택하고 기쁘기

를 대언(代言)하였다. 백호통소의(白虎通疎義)에 이르기를 조리(朝離)이라 하고

통전(通典) 악지(樂志)에 이르기를 주리(侏離)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이르기

를 도솔이라고 하였다. 대개 기쁘고 건강하기를 신께 기원하고 족함을 알고 이

치에 따른다는 뜻이 있다. 단군 부루때 어아(於阿)의 악(樂)이 있었다. 대개 신시

의 옛 풍습에서 삼신을 제사하며 맞이하는 노래인데 곧 그기에서 대조신(大祖

神)이라 이르고 삼신으로 칭하며 하늘의 주재자로 삼았다. 고로 태양으로 모양

과 형체로 삼고 빛과 열로 공과 능함으로 삼고 나서 발전하는 것으로 정과 의지

로 삼고 화복보응(禍福報應)으로 정의로 삼았다. 이로부터 풍속에서는 참전인(參

佺)에게 계율(戒)이 있고 조의(皂衣)에게 법률(律)이 있음을 숭상하였다. 의관을

갖추는 자는 반드시 궁시(弓矢)를 차고 활을 잘 쏘는 자가 반드시 높은 직위를

얻었다. 선심(善心)이 수행의 근본이 되고 과녁은 가상의 악의 괴수가 되었다.

제사는 반드시 삼가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알게 하였다. 일심으로 단결하고 스스

로 마땅히 많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안으로 수양하고 밖으로 겸손하였다. 모

두 일할 때를 안즉 배달국(倍達國)의 광영이 만년 백만년 높이 쌓인 바의 큰 은

덕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옛것에 하늘에 제사할 때 무천(舞天)의 악(樂)이 있었는데 요사(遼史) 예지(禮

志)에 이른바 요천(繞天)이 이것이다. 무릇 제사라는 것은 반드시 선조가 살아있

을 때의 모양을 본떠서 항상 살아있을 때의 정성(誠)과 같이 극진히 하고자 함

이다. 신주(主)를 세우고 상을 진설하여 올려 바치는 것은 곧 친견하는 의식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먼 것을 쫒아 근본에 보답하는 것은 곧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계속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남기고자 함이다.

대변경(大辯經)에 전하기를 단군 구물(丘勿)이 국호를 고쳐 대부여(大夫餘)이

라 하고 도읍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지금의 개원(開原)이며 역시 평양이

라고 칭한다. 삼조선의 명칭은 단군 색불루(索弗婁)에서 시작하였으나 미비하였

고 이에 이르러 완비되었다. 삼한은 분조(分朝)를 두어 영토를 관리한다는 뜻이

고 삼조선은 분권(分權)을 두어 영토를 관리하는 제도이다. 이보다 앞서 대교(大

敎)에 단서(端)가 많아 사람들이 능히 그것을 행할 수가 없었다. 연(燕)나라 침

입 이래로 전쟁의 화(禍)는 거듭되어 닥치고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또 치화

(治化)를 잃어 국력은 갈수록 쇠하여졌다. 어느날 제왕께서 천제의 꿈으로 가르

침을 얻은 연유로 정치를 새로이 크게 고치고자 명하여 천제의 묘(廟) 정원에

소도경전본훈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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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를 세워 북을 달고 삼칠일(三七)을 기한으로 치아의 순서에 따라 서로

마시며 부지런히 힘써 책(冊)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9서(九誓)가 되고 모임때

마다 9가지 맹서로서 글을 하였다.

초배(初拜)를 하고 무리에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집에서 효(孝)에 힘

쓰라. 집에는 부모와 처자가 있는즉 성심으로 정성을 다하고 공경하여 이로서

우애(友愛)를 다져라.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어 하나의 근본에 보답하여라. 공경

스럽게 손님을 맞이하여 이로써 고향과 이웃을 선하게 하고 자제의 교육에 힘써

이로서 영재(英才)를 육성하여라. 이 모두가 인륜 교화의 큰 덕목이니라. 이같이

효도하고 자애롭고 예를 따르는 것을 감히 수행하지 않을 것인가.” 하시니 무리

들이 일제히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하지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

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재배(再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형제와 우애에 힘쓰라. 형제란 것

은 부모에서 나뉘어진 바이니 형이 좋아하는 것인즉 동생이 좋아하는 것이고 동

생이 좋아하지 않는 것인즉 형도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만물이 와 닿는 것의

좋아함과 좋아하지 않음은 다른 사람과 내가 서로 같은 것이니 내 몸으로부터

만물로 미쳐가고 가까운 것으로부터 먼 것으로 미쳐가야 한다. 이와같이 이러한

도(道)가 고향(鄕)과 국가(國)로 옮아간즉 고향과 국가는 가히 흥하고 천하(天

下)로 옮아간즉 천하는 가히 감화할 것이다. 이러한 우애(友), 화목(睦), 어짐

(仁), 용서(恕)를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하지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삼배(三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승과 벗을 믿는데 힘쓰라. 스승

과 벗이란 것은 도법(道法)이 서는 곳이다. 덕과 의를 서로 닦고 잘못을 서로 깨

우쳐 학문을 수립하고 사업을 성취하는 것은 모두 스승과 벗의 힘이니라. 이러

한 믿음(信), 진실(實), 성실(誠), 근면(勤)을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가.” 하시니 무

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하지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버리겠

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배(四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나라에 충성하기에 힘쓰라. 나

라라는 것은 선대의 왕께서 세우신 곳이고 지금의 백성들이 먹고 사는 곳이다.

국정을 새롭게 고치고 국부를 증진하고 국토를 수호하고 국권을 넓힘으로써 국

가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이로써 역사를 빛나게 하는 것 모두가 국가의 미래이

니라. 이러한 충성(忠), 의로움(義), 기상(氣), 절개(節)를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

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하지 않는 자가 있

으면 쫓아 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오배(五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무리들 혹은 아래의 천한 사람(卑

태백일사

- 95 -

下)들에게 겸손하기에 힘쓰라. 무리들이란 모두 천제의 백성이고 우리와 더불어

세 가지 참됨(三眞)을 같이 받은 자로 주체성(主性)의 근본이 되는 곳이고 국력

을 이어갈 곳이다. 위에서 불손하게 하면 아래에서 떠나가고 오른쪽이 불손하면

왼쪽이 이탈하게 되고 앞쪽이 불손하면 뒤쪽이 물러나고 아래쪽이 불손하면 위

쪽에서 미워하고 왼쪽이 불손하면 오른쪽이 떨어지게 되고 뒤쪽이 불손하면 앞

쪽이 멀어지게 된다. 지금 겸손하고 양보하고 서로 존중하여 무리를 합하고 힘

을 뭉치면 외부의 업신여김이 가히 그칠 것이며 내부의 다스림이 능히 닦여질

것이다. 이러한 겸손(遜), 양보(讓), 공경(恭), 삼가함(謹)을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

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그렇게 하지않는 자

가 있으면 쫓아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육배(六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정사(政事)를 밝게 아는데 힘쓰

라. 정사란 것은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풍백은 정책을 세

우고 우사는 정치를 시행하고 운사는 형을 행하는 각각의 직권이 있으니 서로

침범하여 넘어서지 못한다. 지금 지식과 견문을 높이고 언로를 널리 수렴하고

기예를 연마하고 경험을 일으켜 쌓아 나가면 국가의 정무(國務)는 가히 균등하

게 될 것이며 백성들의 일은 가히 신장될 것이다. 이러한 밝음(明), 지혜(知), 통

달(達), 견문(見)을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

여 이르기를, “만약에 그렇게 하지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버리겠습니다.” 라고 하

였다.

칠배(七拜)하고 명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전장(戰陣)에서 용맹하는데 힘

쓰라. 전장이란 것은 존망이 결정되는 곳이다. 나라가 망하면 임금과 아버지는

꺾이어 목우(木偶)가 되고 주인이 서지 못하면 아내와 아들은 몰락하여 남의 노

예가 되는 것이다. 일에 대응하거나 물건에 접하는 것 모두 막론하고 우리의 도

가 아닌 것이 없고 세상에 전하는 가르침을 갚는 것 또한 막론하고 우리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 나라없이 살고 주인없이 편히 사는 것이 어찌 나라있어 죽고

주인있어 삶을 마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명확히 나를 비워 희

생하는 풍속이 있으니 규제가 정비되어 진행되고 선한 무리들이 스스로 다스리

니 상과 더불어 벌이 반드시 모름지기 바르고 공평하게 할 것이다. 남과 더불어

나 또한 신의로서 서로 구제하고 많은 사람을 윤리로 바르게 육성하면 능히 천

만인을 복되게 할 것이니라. 이러한 용기(勇), 부담(膽), 무(武), 의기(俠)를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그

렇게 하지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팔배(八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몸가짐을 청렴하게 하는데 힘쓰

라.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은 절로 어두워지고 능히 청렴하면 신명이 절로 통한

소도경전본훈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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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사로운 이익을 치우치게 즐기면 반드시 습병을 앓고 홀로 선하다고 스스

로 자긍하면 반드시 부패하고 예의없이 스스로 족하면 자신도 해를 입고 남을

해하고 그러한 원인의 순환(因循)이 서로 쌓이면 잠기고 빠져들어 구할 수가 없

도다. 이러한 청렴(廉), 정직(直), 깨끗함(潔), 맑음(淸)을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

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그렇게 하지않는 자

가 있으면 쫓아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구배(九拜)하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직업에 있어서 의로움에 힘쓰

라. 사람이 직분을 갖고 업을 맡으면 반드시 책임이 있다. 한치의 불의라도 있고

스스로 지극함을 멀리하거나 잃게 되면 반드시 업신여김과 조롱이 있어서 뜯기

어 무너져버릴 것이다. 만약에 정의로움이 있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것을 그

들이 믿으면 누가 능멸, 모욕하고 침탈할 것인가. 의리라는 것은 무리들의 힘이

일어나는 곳이고 바른 기가 피어나는 곳이다. 그것을 거두어 이로서 구규(九竅)

에 간직하고 그것을 넓혀서 이로서 천지에 채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正

義)와 공리(公理)를 감히 수행하지 않겠는가.” 하시니 무리들이 소리내어 대답하

여 이르기를, “만약에 그렇게 하지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버리겠습니다.” 라고 하

였다.

이로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후하고 공개된 전쟁에서 용감하고 공동의 이익에

근면하고 공공의 일에 민첩하고 공덕에 밝으며 선업(善業)을 권하고 과실을 규

제하는 것을 숭상하였다. 저절로 예의, 의로움, 자애, 사랑의 풍속이 이루어져 함

께 삼신(三神)께 귀의하고 명(命)에 귀의하는 교화를 함께 하였다.

단군세기에서 이르기를 엄지손가락을 교차하고 바른손을 올려 삼육대례(三六

大禮)를 행하였다. 엄지손가락을 교차한다는 것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점(點)의

자(子)로 하고 왼쪽 엄지손가락을 점의 해(亥)로 하여 오른손을 더하여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꿇어앉기(跪)를 할때는 반드시 먼저 읍

(揖)을 하고 절(拜)를 할때는 반드시 먼저 읍을 하고서 꿇어앉았는데 이는 예법

의 상식이었다. 읍(揖)이란 말하자면 모은다는 것으로 마음을 모아 손을 맞잡고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기란 순응하는 것으로 순응하는 기운이 무릎에서 합하

여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절(拜)이란 바치는 것으로 몸을 바쳐 머리를 조아려서

선조께 보답하는 것이다. 바치는 것은 다른 말로 드러내는 것이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拜手)이라 이르고 머리가 땅에 닿는 것을 고두(叩頭)이라고 이르

니 고두란 곧 이마가 닿도록 조아리는 것이다.

참전계경(參佺戒經)은 세상에 전하기를 을파소(乙巴素) 선생이 전하였다고 한

다. 선생은 일찍이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하늘에 축원하고 천서(天書)를 얻었

는데 이것이 참전계경이 되었다. 대시에 철인이 위에 있어 인간의 360여 일을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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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하였다. 그 강령에 8조가 있는데 이르기를 성(誠), 신(信), 애(愛), 제(濟), 화

(禍), 복(福), 보(報), 응(應)이라고 한다. 성이란 충이 일어나는 곳이고 혈성이 지

켜지는 곳이니 6체(體)와 47용(用)이 있다. 신이란 천리가 반드시 합해지고 인사

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으로 5단(團)과 35부(部)가 있다. 애란 자비로운 마음의

자연이고 어진 성품의 본질로 6범(範)과 43위(圍)가 있다. 제란 덕이 선을 겸비

함이고 도의 신뢰가 미치는 것으로 4규(規)와 32모(模)가 있다. 화란 악이 부르

는 곳으로 6조(條)와 42목(目)이 있다. 복이란 선함이 남긴 경사로 6문(門)과 45

호(戶)가 있다. 보란 천신이 악인에게는 화로서 보답하고 선인에게는 복으로 보

답하는 것으로 6계(階)와 30급(級)이 있다. 응이란 악은 악의 갚음을 받고 선은

선의 갚음을 받는 것으로 6과(果)와 39형(形)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

으나 오르내리며 두루 보호하시니 자신을 아는 자는 창성하고 이것을 구한즉 실

해지니 일신(一)이 참전인(參佺)으로 모든 사람에게 계율을 준 것이다.

을파소가 덧붙여서 이르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에 8훈(訓)으로 날줄로 하고 5

사(事)를 씨줄로 하여 교화가 크게 행하여지고 널리 이롭게 만물을 다스리니 참

전인의 이룬바가 아닌 것이 없다. 지금 사람들도 이 전인의 계율(佺戒)로 인하여

유익함을 더하여 자기 몸을 닦으면 즉 그것이 편안하게 백성들의 공을 모으는데

어찌 어려움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고구려국본기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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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제6(弟六)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角+羊慕漱)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도

역시 그 땅이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르기를 해모수는 하늘을 따라 내려와 일찍

이 웅심산(熊心山)에 거주하다가 부여의 옛도읍지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들

에게 추대된바 마침내 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칭하니 이가 부여의 시조로 일컬어

진다.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시종

하는 자들이 백여명이었다. 아침이면 정사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랐다. 명령

하는바 없어도 관경이 저절로 교화되어 산에는 도적이 없고 곡식이 들판에 가득

하고 나라에는 큰일이 없고 백성 또한 근심이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내려

와 존재한 것은 임술년 4월 8일이었는데 곧 진(秦)나라 왕(王) 정(政)의 8년이었

다.

고리(槀離) 군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侯) 불리지

(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인데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로로 봉함을 받았다. 불

리지는 일찍이 서압록강을 지나다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기뻐서

그에 장가들어 고주몽(高朱蒙)을 낳았는데 때인즉 곧 임인년 5월 5일로서 바로

한(漢)나라 주인(主) 불릉(弗陵) 원봉(元鳳) 2년이었다. 불리지가 몽어하시니 유

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는데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성장하

여 사방으로 유람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관가(官家)

에 선택되어 목마(牧馬)가 되고 오래지 않아 관가에서 꺼리는바 되어 오이(烏

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더불어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그때에

부여왕에게는 후사(嗣)가 없어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로 들어와 대통을 이으

니 이가 고구려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평락(平樂) 21년 갑오년 10월에 북옥저(北

沃沮)를 정벌하여 그곳을 멸하였다.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卒本)으로부터 눌견

(訥見)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눌견은 지금의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21년에 또 눌견으로부터 다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또한 황성(皇城)이라고 하였다. 내부에 환도산(丸都山)이 있어 산 위에 성을 쌓

아 놓고 일이 있을 때 곧 그곳에 거주하였다.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 20년에 제

왕께서 낙랑국(樂浪國)을 습격하여 그곳을 멸하니 동압록(東鴨綠) 이남이 우리에

게 속하게 되었지만 홀로 해성(海城) 이남 근해의 여러 성들은 포함시키지 못하

였다. 산상제(山上帝) 원년에 아우 계수(罽須)를 보내어 공손탁(公孫度)을 공격하

여 부수고 현토(玄菟)와 낙랑(樂浪)을 토벌하여 그곳을 멸하니 요동이 모두 평정

되었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고주몽 성제께서 조서에 이르기를, ‘천신께서

만인을 하나의 모습으로 만들어 세 가지 참됨(三眞)을 고르게 부여하니 이에 사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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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 그것이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

들이 북부여로부터 나와서 천제(天帝)의 아들이 되었음에랴. 철인(哲人)은 비움

(虛)과 고요함(靜)과 계율(戒律)로 사악한 기운을 영원히 끊어버려 그 마음이 편

안하고 태평하니 스스로 무리들과 더불어 인사(人事)의 일마다 옳음을 얻는도다.

군사를 사용하는 것은 이로써 침략과 정벌을 완화하는 바이고 형벌을 행하는 것

은 이로써 죄와 악이 없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고로 비움의 극에서 고요함이 생

기고 고요함의 극에서 지식이 충만해지고 지식의 극에서 덕이 융성해진다. 고로

비움으로써 가르침을 듣고 고요함으로써 남의 처지를 헤아리고 지식으로써 만물

을 다스리고 덕으로써 사람을 구제하리라. 이것이 곧 신시(神市)가 만물을 개화

하여 교화한 것이니 천신과 성을 통하게 되고 중생과 법을 세우게 되고 선왕의

공업을 온전히 하게 되어 천하 만대가 지혜와 삶을 이루고 그것을 함께 닦아 교

화를 이루게 되리라.’ 하였다.

을파소(乙巴素)는 국상(國相)이 되어 젊고 영준(英俊)한 이들을 선발하여 선인

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관장하는 자를 참전인(參佺)이라 이르고 무

리들 가운데서 선발하여 계율(戒)을 지키도록 하고 신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

게 되었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이라 이르고 겸하여 법률(律)을 따

르도록 하여 공중을 위해 앞장서게 되었다. 일찍이 무리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로 말미암아 지혜가 열려 날마다 지극한 다스림으로

나아간즉 이러한바 환(亙)으로서 만대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었다. 고로 참전

인에는 계율(戒)이 있고 신의 말씀을 들어 이로써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寒盟)은

법률이 있어 신을 대신하여 공을 행하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마음을 정립하고

힘을 길러 이로써 훗날의 공(功)에 대비하였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

德)이 이르기를, ‘도(道)로써 천신을 섬기고 덕(德)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을 수

있어야 천하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고 성명정

(性命精)을 나누어 얻고 스스로 광명이 밝게 존재하여 움직이지 않는 연유로 때

에 맞게 느낌(感)이 발함으로서 도가 곧 통한다. 이것이 곧 3물(物)인 덕혜력(德

慧力)을 몸소 실행하고 3가(家)인 심기신(心氣神)을 화하여 이루고 3도(途)인 감

식촉(感息觸)을 기쁘게 채우는 바이다. 요약하면 날마다 생각의 목표(念標)를 구

하여 재세이화하고 고요히 비탈길을 닦아 홍익인간 하는데 있다.’ 라고 하였다.

환국에서 이르기는 5훈(訓), 신시에서 이르기는 5사(事), 조선에는 이르기는 5행

(行) 6정(政), 부여에서 이르기는 9서(誓), 삼한에서 통용되는 풍속에서는 또한 5

계(戒)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효(孝), 충(忠), 신(信), 용(勇), 인(仁)이다. 모두 백

성을 교화함으로서 바르고 고르게 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 뜻이 존재한 것이다.

책성(柵城)에 태조 무열제(武烈帝)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

고구려국본기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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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훈적비(廣開土境大勳蹟碑)가 있고 안주(安州)의 청천강 언덕 위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理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고 평양의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東川帝)의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삭주의 거문산(巨門山) 서쪽 기

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九峯山)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동천제 또한 단군이라 칭하고 매년 한맹(寒盟)때 마다 평

양에서 삼신께 제사올리고 추앙하였는데 지금의 기림굴(箕林窟)은 바로 그 제사

올린 장소이다. 크게 맞이하는 제전(祭典)을 수혈(隧穴)에서 행하기 시작하였는

데 구제궁(九梯宮)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모두 가리키기

가능한 지점이다. 또 삼륜구덕(三輪九德)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는데 조의

선인이 모두 그렇게 선발된 것이며 나라 사람들(國人)이 의식을 거행하는 자를

자랑스럽게 여기는바 되었다. 그러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영예를 베풀고 그와

더불어 왕의 사자와 대등하게 되었겠는가.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은 융성한 공과 성스러운 덕이 여러 왕들 중

에서 탁월하여 사해(四海) 내의 모든 사람들이 열제(烈帝)이라고 칭하였다. 나이

18세에 광명전(光明殿)에서 등극하니 의례로 천악(天樂)을 베풀고 전장에 나갈때

마다 군사들(士卒)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아가(於阿歌)로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행할 때 마리산(摩利山)에 이르러 참성단(塹城壇)에 올라

친히 삼신께 제사를 올렸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한번은 스스로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倭人)을 쳐서 부수었는데 왜

인에는 백제가 개입되어 있었다. 백제는 먼저 왜와 몰래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이어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게 하였다. 제왕(帝)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공

격하여 웅진(熊津), 임천(林川), 와산(蛙山), 괴구(槐口), 복사매(伏斯買), 우술산

(雨述山), 진을례(進乙禮), 노사지(奴斯只) 등의 성을 빼앗고 다음 길에 속리산에

서 이른 아침때에 하늘에 제사올리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바로 백제(百濟), 신라

(新羅), 가락(駕洛)의 여러 나라 모두가 들어와 조공하여 끊이지 않고 거란(契

丹), 평량(平涼)이 모두가 평정되어 굴복하고 임나(任那), 이(伊), 왜(倭)의 족속

들이 모두 신하라고 칭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해동의 강성함이 이때에 최고로

달하였다. 이보다 먼저 협보가 남한(南韓)으로 달아나 마한(馬韓) 산중에 거주하

니 따라 나와 거주하는 자들이 수백여 집(家)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해마다 큰

흉년이 들자 떠돌아 다니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협보는 장차 변혁이 있

을 것으로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가지고 배로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갔다.

해포(海浦)를 따라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렀는데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쪽 연안이었다. 수개월 머물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는데 이가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임나(任那)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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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병합되어 연정(聯政)으로 다스려졌는데 3나라는 바다에 있고 7나라는 육지에

있었다. 처음에 변진(弁辰)의 구야국(狗邪國) 사람들이 먼저 집단으로 모여 살았

는데 이것이 구야한국이 되었고 다파라는 하나로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고 칭

하였는데 홀본(忽本)으로부터 나왔으며 고구려와 더불어 일찍이 이미 화친을 맺

은 고로 항상 열제가 제어하는 바가 되었다. 다라국은 안라국(安羅國)과 더불어

같은 이웃이고 같은 성(姓)이며 옛날에 웅습성(熊襲城)에 있었는데 지금의 구주

(九州) 웅본성(熊本城)이 이것이다.

왜(倭)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고 배로 구천리를

건너가면 나패(那覇)에 이르고 또 천리를 건너가면 근도(根島)에 이르는데 근도

는 또한 저도(柢島)라고도 한다. 이때에 구(狗)의 노비들이 여왕(女王)과 더불어

서로 다투어 통행의 검색이 매우 엄하여 그기서 구야한(狗邪韓)으로 가려는 자

들은 대개 진도(津島), 가라산(加羅山), 지가도(志加島)를 경유하여 비로소 말로

호자(末盧戶資)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그 동쪽 경계는 바로 곧 구야한국

(狗邪韓國)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神市中經)의 소장처이고 사공(司

空) 우(禹)가 3달 동안 재계하고 얻어 내어 치수에 공을 세운 고로 우가 돌을

갈아 산의 높은 곳에 부루(扶婁)의 공을 새겼다고 전한즉 오(吳)와 월(越)은 본

래 구려(九黎)의 옛 읍(邑)이고 산월(山越)과 좌월(佐越)은 모두 그 후예들이 나

뉘어 옮겨온 땅이다. 항상 왜와 더불어 왕래하면서 무역판매로 이익을 보는 자

들이 점점 많아졌다. 진나라때 서불(徐市)이 동야(東冶) 해상으로부터 바로 나패

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경유하여 뇌호내해(瀨戶內海) 연안에서 시작하여 기이

(紀伊)에 도달하였다. 이세(伊勢)에는 옛날에 서복(徐福)의 묘와 사당이 있었는데

혹자는 이르기를 단주(亶州)가 서복이 살던 곳이라고 전한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는 기원을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어짐과

의로움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널리 강토와 집을 개척하였다. 웅진강(熊津江) 이북

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니 북연(北燕), 실위(室韋) 여러 나라들이 모두 서족(叙族)

에 들어왔고 또 신라 매금(寐錦)과 더불어 백제 어하라(於瑕羅)가 남평양에 모여

바치는 공물과 수비하는 병사의 수를 약정하였다.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는 기원을 명치(明治)로 고쳤다. 11년에 제(齊), 노

(魯), 오(吳), 월(越)의 땅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니 이때에 이르러 국토가 점점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주

몽의 풍모를 닮았는데 기원을 대덕(大德)으로 고치고 나라를 밝게 다스리고 교

화하였다. 대덕 18년 병신년에 제왕께서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碣

石山), 배찰산(拜察山)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

고구려국본기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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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크게 부수니 유림진(楡林鎭) 이동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의 산서

부근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때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나라는 부유하

고 백성들은 융성하였다. 수나라 주인(主) 양광(楊廣)은 본래 선비(鮮卑)의 후손

인데 남북의 지역을 통합하고 그 여세로 우리 고구려를 업신여겨서 소로(小虜)

이라 하고 상국(上國)을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대군을 자주 일으켰으나 우리는

이미 대비를 하고 있어서 일찍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弘武) 25년에

광이 또 다시 동쪽을 침입하므로 먼저 장병들을 보내어 비사성(卑奢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관병이 전쟁에 불리하였다. 장차 평양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제왕께서 듣고 지원병을 계획할 의도로 곡사정(斛斯政)을 파견하기로 하였

다. 마침 조의 일인(一仁)이라는 자가 자원하여 따르기를 청하므로 함께 갔다.

양광에게 표문(表)을 바치니 광이 배안에서 표문을 들고 절반을 읽지 못하였을

때 갑자기 작은 쇠뇌(小弩)를 꺼내어 그의 가슴을 맞히니 광이 놀라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그를 업도록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기

고 물러나며 명하여 회원진(懷遠鎭)에서 철병하도록 하였다. 광이 좌우측근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소국을 치려다가 불리하니 이것이 만

대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하니 양명 등이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대답이 없

었다. 후세사람들이 이 일을 이르기를,

‘지는 너희 미련둥이 한가(漢家)의 애들아, 요동을 향하여 개죽음의 노래를 부

르지 마라. 문무를 갖춘 우리 선조 환웅(桓雄)이라 부르고 면면이 이어져온 환족

혈통(亙血)의 장자로 영웅호걸이 많다네. 주몽 태조, 광개토왕의 위엄이 사해(四

海)를 진동하여 공을 더할 수가 없도다. 유유(紐由), 일인(一仁), 양만춘(楊萬春)

이 침략자들을 겁주어 저절로 무너져 쓰러졌다. 세계 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

되었고 외부의 오랑캐를 쳐서 물리치고 평화를 보전하였네. 유철(劉徹), 양광(楊

廣), 이세민(李世民)은 멀리서 보거나 소문만 들어도 망아지 달아나듯 패하여 도

망하였네. 영락(永樂)때의 기공비는 1천 척(尺)이고 만가지 깃발은 일색(一色)이

고 태백산은 더 높아라.’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의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천신(天神)의 꿈을 꾸고 크게 깨달았다. 매년 3월 16일이 되면 말을

타고 마리산(摩利山)으로 가서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이 되

면 백두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렸는데 제천(祭天)은 곧 신시의 옛풍속이다.

홍무(弘武) 23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와서 공격하였다.

문덕이 능히 기묘한 계책으로 병사를 보내어 빼앗고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 마침내 그들을 크게 부수었다. 수나라 군사 수군과 육군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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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함께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遼東城:지금의 昌黎)으로 돌아간 자는 겨우 이천

칠백명 정도였다. 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걸하였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제왕(帝) 또한 그들을 추격하라고 엄히 명하였다. 문덕이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승기를 타고 바로 달려 한 갈래는 현토도(玄菟道)로부터 태원(太原)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도(樂浪道)로부터 유주(幽州)에 이르러 그 주현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다스리고 그 유민들을 불러서 그들을 안정시켰다. 이에 건안(建安), 건창(建昌),

백암(白岩), 창려(昌黎)의 여러 진(鎭)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昌平), 탁성

(涿城), 신창(新昌), 통도(桶道)의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孤怒), 평

곡(平谷), 조양(造陽), 누성(樓城), 사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和

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하였는데

모두 예전대로 관리를 두었다. 이에 이르러 강한 병사가 백만이 되고 국경의 영

토가 더욱 넓어졌다. 양광은 임신년의 침략자로 출사(出師)를 성대하게 하였는데

전대에는 없는 것이었다. 우리 조의(皂衣) 이십만으로 그의 군대를 멸하여 없앴

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닌 것이다.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시대의 세력을 창출한 한 분의 성스러운 호걸이다. 문충공(文忠公) 조

준(趙浚)은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더불어 백상루(百祥樓)에 함께 올라 시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살수 출렁 출렁 출렁거려 창공을 푸르게 하는데 수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고

기 밥이 되었네. 지금까지 어부와 나무꾼의 말에 남아 전해지니 나그네의 비웃

음거리를 채우는데 지나지 않네.’

구사(舊史)에 이르기를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 홍무(弘武) 9년에

제왕께서 서부 대인 연태조(淵太祚)를 파견하여 가서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

관 위충(韋沖)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百濟)가 병력으로써 제(濟),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민호(民戶)를 조

사하여 장적(籍)을 만들었다. 왕의 작위를 분봉하여 험색(險塞)에 주둔하여 지키

도록 하고 군역과 조세는 모두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明治) 연간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고 부진하여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에 돌아

오므로 성읍을 획정하고 문무의 관리를 배치하였다. 이내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

키고 남과 북에서 사변이 있어 소요가 사방에서 일어나 피해가 생활하는 백성들

에게 까지 미치므로 제왕께서 거동하여 몹시 노하여 하늘의 토벌을 받들어 행하

니 사해 안에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주인 양견(陽堅)

이 화가 되는 마음을 은밀히 감추고 감히 복수할 군사를 출동시키고 비밀리에

위충(韋沖)을 파견하여 총관(總管)이라고 이름하며 관가를 무너뜨려 부수고 읍락

을 불태우고 약탈하자 곧 장병들을 보내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

고구려국본기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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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東)이 평정되어 복종하니 해성이 편안해졌다. 이 해에 견(堅)이 또 양량(楊

諒), 왕세적(王世績) 등 삼십만명을 파견하여 와서 더불어 싸우는데 겨우 정주

(定州)를 출발하여 요택(遼澤)에 이르지도 못한 채 곧바로 물난리를 만나 군량의

이동이 막히고 여역(癘疫)이 극성하였다. 주라구(周羅緱)가 군사로써 등주(登州)

를 점거하고 전함 수 백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에서 배를 띄워 평양(平壤)으로

나아가려다 우리 군사에게 발각된바 후군으로 항전하며 나아가다가 갑자기 큰

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거나 수몰되었다. 이때에 백제가 수(隋)나라에 군사의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다가 우리의 밀지를 받고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좌장군

고성(高成)이 비밀리에 수나라와 친해 두려는 마음을 가지고 은밀히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여러번 군사를 보내달라고 청하

여 백제를 공격하여 부수는데 공이 있었다. 막리지(莫離支) 홀로 힘써 중론을 물

리치고 남쪽을 지키고 북쪽을 정벌하는 정책(南守北伐策)을 강력히 고집하여 여

러번 이해를 따져 따르게 하였는데 고성이 즉위하자마자 앞의 제왕께서 남겨놓

은 법을 모두 폐기하였다. 당(唐)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나라

사람(國人)들이 도덕경(道德經) 강의를 듣도록 하고 또 무리 수 십만명을 동원하

여 장성을 쌓았는데 부여현(夫餘縣)에서 남해부(南海府)에 이르기 까지 천여리였

다. 이때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道敎)의 강습을 파하기를 청하고 또 장성쌓

는 노역의 중지로서의 이해를 몹시 따지니 제왕께서 매우 불쾌하게 여겨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노역의 감독을 명하고 은밀히 여러 대인과 더불어 의

논하여 그를 죽여 없애려 하였다. 소문이 먼저 들어 알고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 몸이 죽으면 나라가 온전하게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일이 급하구나.

때를 놓칠 수가 없다.” 라고 하고 부병(部兵)을 전부 모아서 장차 무인(武)을 사

열하는 군사처럼 하고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하니

그것을 보려고 모두 함께 임하였다. 모두 도착하자 소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문 앞에 호랑이와 이리가 있는데 구원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죽

이려 하느냐.” 라고 하며 마침내 그들을 제거하였다. 제왕께서 변을 듣고 미복

차림으로 몰래 도망하여 송양(松壤)에 이르고 조서를 내려 나라사람들을 초대하

고 모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으므로 스스로 부끄러워 땀을 억제하지

못하여 드디어 저절로 숨이 끊겨 붕어하셨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연씨(淵

氏)이고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이라 하고 할아

버지는 자유(子遊)이라 하고 증조할아버지는 광(廣)이라고 하는데 모두 막리지

(莫離支)가 되었다. 홍무(弘武) 14년 5월 10일에 태어났고 나이 9살에 조의선인

(皂衣仙人)에 선발되었다. 모습(儀表)이 영웅처럼 위대하고 의지와 기상이 호걸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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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뛰어나며 항상 병사무리와 더불어 섶을 깔고 자고 손수 바가지로 마시며

무리속에서는 자기의 온 힘을 다하고 혼란 속에서도 징후를 파악해 내었다. 상

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나누어서 지급하고 정성과 믿음으로 주위를 보호하며 마

음을 미루어 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었다. 땅을 씨줄(緯)로 하고 하늘을 날줄

(經)로 하는 재주에 까지 이르러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한 사람도 딴 마음을

품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법을 집행함에는 엄하고 명백하고 귀한 자든 천한 자

든 동일하게 다스리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한 사람도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

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놀라는 마음이 없고 당나라의 사신과

더불어 술 권하며 말을 나눌 때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스스로 민족을

음해하면 소인이 되고 능히 당나라 사람을 대적하면 영웅이 된다고 하였다. 기

쁜 일에는 아무리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고 노여운 일에는 권력있고 귀한

사람들도 모두 두려워하였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쾌걸(快傑)이었다. 스스로 말하

기를 물속에서 났다고 하여 능히 하루 종일을 물속에서 헤엄쳐도 더욱 건강해지

고 피로해 하지 않으니 무리들이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리고 늘어서서 절하며

말하기를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몸으로 화하였다고 하였다. 소문이 이

미 고성제(高成帝)를 추방함과 더불어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高臧)을 맞아들

였는데 이분이 보장제(寶臧帝)가 되었다. 소문이 이미 뜻을 얻어 만법(萬法)이

공공을 위하는 도를 행하니 자기를 완성하여 자유로워지고 만물을 열어 평등해

지는 것이었다. 세 올(三忽)이 전인(佺)이 되고 조의에게는 법율(律)이 있고 국방

에 전력을 다하여 당나라를 방비하니 심히 강성하였다. 이보다 먼저 백제 상좌

평과 더불어 함께 존립하자는 의리를 맺고 또한 신라 사신 김춘추(金春秋)를 청

하여 사저에 머물게 하고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몹시도 하늘의 뜻을 거스

르니 금수(禽獸)에 가깝소. 청하건대 나와 그대와 사사로운 원수를 잠시 잊고 이

제부터 삼국부터 서족(敍族)까지 힘을 합해 곧바로 장안(長安)을 도륙내면 당나

라의 괴수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바로 옛영

토 그대로 연정(聯政)하여 인과 의로 함께 다스리고 서로 침입하지 않기로 약속

하여 영구히 준수할 계획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소.” 이렇게 재삼 권하였으나 김

춘추는 끝내 듣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개화(開化) 4년에 당나라 주인 이세민(李世民)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컬어 말하

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諸夏)의 땅이었는데 수씨(隋氏)가 네 번 출사하였으나

얻기가 불가능하였다. 내가 지금 출병함은 제하의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

다.” 라고 하였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李世勣), 정명진(程名

振) 등 수십만명을 거느리고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 수렁이 2백여리나

있어서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을 채찍

고구려국본기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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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하며 급히 달려가 공격하였으나 이미 전쟁에 참여한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군

차(張君叉)가 크게 패하였다. 이도종(李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세민이

스스로 장수 수백기를 거느리고 세적과 함께 모여 백암성(白岩城) 서남쪽을 공

격하니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거짓으로 파견하여 항복을 청하고는 실제로는 틈

을 타서 반격을 하려고 하였다. 세민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

山)에서 군사들을 내보내어 성을 공격하였지만 북부 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

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관병에 말갈병 십오만을 통솔하여 이끌고 바로

앞에 이르렀다. 잇달아 안시에 보루(堡壘)를 만들고 높은 산의 험지에 웅거하며

성안의 곡식을 먹고 군사들을 종용하여 그의 군마를 약탈하니 당나라 놈들이 감

히 침범하지 못하고 돌아가려 하였으나 진흙 수렁에 막혀 앉아서 그대로 패하였

다. 연수는 바로 앞까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안시에서 사십리쯤 나아가게

되었다. 사람을 보내어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에게 물었는데 그는 나이도 많

고 일에 익숙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정의가 말하기를, “세민은 안으로는 많은 영

웅을 제거하고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들었으니 역시 범상하지는 않소. 지금 모

든 당나라의 군사를 거점으로 침범해 오니 그 예봉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될

것이오. 우리를 위한 계책이란 만약에 병사를 주둔시켜 싸우지 않고 여러날 동

안 오래 기다렸다가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어 그들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리는

것이오. 식량 보급로가 이미 없어지면 싸움을 하고자 하나 잘 할 수가 없고 돌

아 가려하여도 길이 없으니 가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연수는

그의 계획에 따라 적이 쳐들어 오면 막고 적이 후퇴하면 공격을 멈추고 또 기습

병들을 보내어 식량 보급로를 불태우고 빼앗아 버렸다. 세민이 백가지 계책으로

그를 유혹하고 뇌물을 주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 속으로는 배반하여 수

차례 몰래 보내어 기습하고 함정에 빠뜨려 찢어 죽이니 적의 사상자들이 몹시도

많았다.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오래 기다리는 작전을 펴더

니 어느날 밤 돌변하여 급습하고 번개같이 공격하였다. 세민의 군대가 포위되어

압박되니 비로소 두려운 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세민이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물로 위로하며 연수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강

한 신하가 그 위에 있는 임금(君)을 시해한 연유로 와서 죄를 묻는 것이오. 교전

에 이르러 귀하의 국경에 들어왔으나 군량미가 공급되지 않는 고로 간헐적으로

몇 곳을 불태우고 약탈한 적이 있을 뿐이오. 귀국이 예를 갖추어 너그럽게 우리

의 교섭을 받아준다면 즉시 반드시 복구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연수가 말하기

를, “알겠소. 귀국의 병사를 삼십리 뒤로 물러나게 한다면 내가 장차 우리 제왕

(帝)을 만나 보겠소. 그러나 막리지는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고 군법이 스

스로 존재하므로 여러 말이 필요 없소. 그대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태백일사

- 107 -

죽이고 음탕하게 형제의 어머니를 받아들였으므로 이 또한 죄를 물을 수 있소.”

라고 하고 이것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에 사방에 감찰을 보내어 수비를 더욱 든

든히 하였다. 산을 의지하여 스스로 견고히 하고 빈틈을 타서 기습을 하니 세민

의 백가지 계책이 쓸모가 없었다. 요동출병의 불리함을 뼈저리게 한탄하였으나

이미 후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르기를, ‘6군(六軍)이 고구려에 위태롭게 올라탄 바

가 되어 장수들이 부진하였다. 척후병이 영공(英公)의 휘하에 있는 흑기(黑旗)가

포위당한 것을 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 하였다. 비록 끝내 스스로 탈출하였

으나 위급함과 두려움이 그와 같았다. 신구당서(唐書)와 사마공(司馬公)의 통감

(痛鑑)에는 언급한 것이 없으니 어찌 나라를 위하여 치욕스러운 것을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여 아뢰기를, “건안(建安)은 남쪽에 있고 안시(安市)는

북쪽에 있으니 우리의 군량을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조기에 잃었

습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서 건안을 공격하다가 만약에 고구려가 그 수송로를

끊으면 우리의 형세가 반드시 어려워질 것입니다. 안시를 먼저 공격하여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해 가서 건안을 취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하

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旗)과 덮개(蓋)를 바라보다가 매번 성에 올

라 북을 치며 조롱하고 세민을 공이로 치며 꾸짖고 그의 죄를 낱낱이 헤아려 무

리들에게 고하였다. 세민의 노기가 극에 달하게 되어 성을 함락하게 되는 날에

남녀를 모조리 그곳에 묻어버리겠다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더욱 더 견고하게 수비하니 그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에 장량

(張亮)의 군사들이 사비성(沙卑城)에 있어 그들을 부르고자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하였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쳤다. 장량이 장차 군사를 이동하여 오골성(烏骨

城)을 습격하였다가 도리어 고구려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李道宗)도

또한 험지를 만나 부진하니 이에 당나라 놈의 여러 장수들의 의논이 서로 엇갈

리게 되었다. 세적은 홀로, “고구려가 안시를 구원하느라 국력이 기울게 되었을

테니 안시를 버리고 바로 평양을 두드리는 것보다 못하다.” 라고 하였다. 장손무

기(長孫無忌)는 “천자(天子)가 친히 정벌하게 되면 여러 장수들이 서로 다르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건안(建安)과 신성(新

城)의 적의 무리 수십만과 고연수가 거느리는바 말갈 또한 수십만입니다. 국내

성의 군사들이 만약에 또 오골성으로 되돌아 오게 되면 낙랑(樂浪)으로의 여러

길의 험지를 막을 것입니다. 저들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지는 것이 이와같은즉

압박포위를 서두르면 우리는 적을 구경만 할 것이니 후회를 막을 길이 없을 것

입니다. 안시를 먼저 공격하고 그 다음에 건안을 취한 연후에 계속 그 여세를

고구려국본기 제6

- 108 -

몰아서 진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주 완전한 계획입니다.” 라고 하

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그 소문을 듣고 깊

은 밤을 틈타 수백명의 정예부대로 성에 밧줄을 매달아서 아래로 내려 보내니

적진이 서로 짓밟아서 사상자들이 아주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으로 하여금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토산(土山)을 쌓게 하자 관병이 성이 허물어진 곳을 따라 나가

공격하여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참호를 파고 그곳을 지키니 군세가 더욱 더 떨

치게 되었다. 당나라 놈들의 여러 진영에서는 거의 전의를 상실하였고 부복애

(傅伏愛)가 전쟁에 패하여 참수되었다고 전해지니 도종 이하 모두가 맨발로 달

려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난파(灤坡)를 순행

하여 정황을 상세히 묻고 총공격의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연수 등

이 말갈과 더불어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에 올라 전쟁을 감독하니 사기가 더욱

고양되어 1당 100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세민이 분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

여 감히 결전에 나섰다. 양만춘이 이에 소리치며 활을 당기고 세민이 진영을 나

왔다. 화살이 반쯤 공중에 뜨더니 마침내 적중된바 왼쪽 눈에 박혔다. 이세민이

궁지에 빠져 몸둘 곳이 없으므로 샛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

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삼았다. 요택은 진흙 수렁이어서

군사와 말이 다니기 어려웠다. 무기에게 명하여 1만명을 이끌고 풀을 깍아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교량을 삼았는데 세민도 스스로 말채찍에 섶을

묶어 사역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浦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면

서 여러 군사들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사나운 바람과 눈으로 점점이 젖

은 사졸(士卒)들의 사망자가 많았다.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대비하는 그때에 막

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하여 그들을 매우 빠르게 추격하였다. 추정국(鄒定國)

은 적봉(赤峰)으로부터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장 신성으로 향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었다. 당나라 놈들이 갑옷과 병기를 수없이 버리고 역수(易水)

를 건너는 방향으로 도주할 때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통도성(桶道城)을 고

쳐 쌓게 하니 지금의 고려진(高麗鎭)이다. 또 여러 군사들을 나누어 파견하고 한

부대는 요동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지금의 창려이다. 한 부대는 세민의 뒤를 뒤

쫓게 하고 한 부대는 상곡(上谷)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

에 세민(世民)이 궁지에 몰려 몸둘바를 모르다가 곧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구걸

하였다. 막리지(莫離支)는 정국(定國), 만춘(萬春) 등 수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

대하게 의장(儀仗)을 펼치고 북치고 피리불며 앞에 인도되어 장안(長安)에 입성

하여 세민(世民)과 더불어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좌(江左)의 땅을

모두 우리에게 귀속하도록 약조하였다.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밖

태백일사

- 109 -

으로는 경쟁하면서도 함께 존립하였다. 요서땅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는데 이르

기를 요서(遼西)와 진평(晋平)이다.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첫째는 산음(山陰), 둘째는 산월(山越), 셋째는 좌월(左越)이라고 하였다. 문자제

왕(文咨帝) 명치(明治)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군현을 고쳐

정하여 이르기를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성(吳城),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

주(泉州)라고 하였다. 12년에 신라의 백성들을 천주로 옮겨서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하지 않으므로 병사들을 보내어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의 군

(郡)을 취하고 백제의 군을 폐지하였다.

왕개보(王介甫)가 말하기를,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는데 과

연 그러하였다. 막리지가 살았을 때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였

으나 막리지가 죽자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인

걸인 것이다. 막리지는 임종할 때 남생(男生)과 남건(男建)을 돌아보고 일컬어

이르기를, “너희 형제는 물처럼 서로를 사랑하여라. 화살대를 묶어 놓으면 강하

지만 화살대를 나누어 놓으면 꺾여진다. 반드시 이 말을 잊지 말거라.” 라고 하

였다. 장차 유언의 말이 천하의 인접국가의 사람들에게 웃음을 낳았으니 때는

개화(開化) 16년 10월 7일이었다. 묘(墓)는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있다.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육십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開平府)

동북쪽 칠십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湯池堡)이다. 고려성은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십이리에 있는데 모두 태조 무열제(武烈帝)께서 쌓은 것이다. 당나라 번

한(樊漢)의 고려성 회고시 한 수가 세상에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

를,

‘벽지에 성문이 열려있고 구름 걸린 숲속에 꿩이 담처럼 길게 뻗어 있네. 밝은

물에 저녁빛이 머물고 어두운 모래에 별빛이 빛난다. 모으는 북소리는 구름따라

일어나고 새로 핀 꽃은 흙을 털고 단장하네. 그러한 아침에 시장은 변하는데 다

시 들을 수 없는 관현(管絃)의 소리여. 가시 누런 먼지 속이요 쑥대 우거진 옛

길가로다. 가벼운 먼지는 비취를 묻어 버렸고 황량한 언덕에 소와 양이 오르네.

어찌 할 수 없는 그 해의 일이여. 가을 소리 전하는 기러기 행렬이여.’ 라고 하

였다. 내 비록 글에 대한 지식은 없으나 그 운을 따라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요서에는 아직도 옛 성터가 남아 있으니 반드시 이름있는 나라의 운과 복이

길었음을 생각하라. 연산(燕山+田)은 험준한데 전쟁의 색채 숱하고 요하는 출렁

출렁거리고 하늘의 빛과 한 가지구나. 바람부니 숲속은 계곡처럼 춤추는 모양을

보이고 선금(仙禽)이 높은 나무에서 울며 단장을 하려 하네. 관문의 창과 깃발은

하루 저녁에 변하고 물건 파는 소리 울리고 요령소리 처량하게 들린다. 연(燕)과

양(凉)이 원래 모두 우리 소유였으니 관병이 있어 오래토록 진(鎭)의 마방에서

고구려국본기 제6

- 110 -

말에게 물을 먹였네. 영웅은 나지 않고 그때 일은 지났으나 양을 몰아내듯 도적

을 몰아낼 날은 다시는 없을런가. 이제 우리가 옛 일을 슬퍼하는 한없는 뜻을

핵랑(核郞)들의 만리길에 노자로 삼고자 하노라.’

조대기에 이르기를 태조 융무(隆武) 3년에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서 한(漢)

나라를 방비하였는데 10성은 하나는 안시이니 개평부(開平府)의 동북쪽 칠십리

에 있고 둘은 석성(石城)이니 건안의 서쪽 오십리에 있고 셋은 건안(建安)이니

안시 남쪽 칠십리에 있고 넷은 건흥(建興)이니 난하(灤河)의 서쪽에 있고 다섯은

요동이니 창려(昌黎)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은 풍성(豊城)이니 안시의 서북

쪽 백리에 있고 일곱은 한성(韓城)이니 풍성의 남쪽 이백리에 있고 여덟은 옥전

보(玉田堡)이니 옛 요동국으로 한성의 서남쪽 육십리에 있고 아홉은 택성(澤城)

이니 요택의 서남쪽 오십리에 있고 열은 요택이니 황하의 북쪽류 왼쪽 연안에

있다. 5년 봄 정월에 또 백암성(白岩城)과 통도성(桶道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삼한비기에 이르기를 구지(舊志)에 전하기를 요서에 창료현(昌遼縣)이 있는데

당나라 때에 요주(遼州)로 고쳤다. 남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그 아래가 바

로 백암성인데 역시 당나라 때 소위 말하는 암주(岩州)가 바로 이곳이다. 건안성

은 당산(唐山)의 경내에 있고 그 서남을 개평(開平)이라 하고 다른 말로 개평(蓋

平)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때에 역시 개주(蓋州)이라고 칭한 곳이 이곳이다고 하

였다. 자치통감에 이르기를 현토군은 유성(柳城)과 노룡(盧龍)의 사이에 있다고

하고 한서(漢書)에는 마수산(馬首山)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는데 당나라 때에 토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연타발(延佗渤)은 졸본 사람인데 남북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잘 다스

려 부자가 되고 거금을 축적하기에 이르러 음으로 주몽을 도와 그가 터전을 창

업하고 도읍을 세울때에 공이 아주 많았다. 후에 무리를 거느리고 구려하(九黎

河)로 옮겨가서 고기와 소금을 팔아 이익을 보더니 고주몽 성제(聖帝)께서 북옥

저(北沃沮)를 정벌하자 곡식 5천석을 납부하였고 도읍을 눌현(訥見)으로 옮기자

먼저 자원하여 납부하였다. 유민과 도망자를 불러 위로하고 왕의 일에 힘쓰니

이러한 공으로 좌원(坐原)에 봉함을 받고 나이 80에 돌아가시니 때는 평락(平樂)

13년 병신년 봄 3월이었다.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여 이르기를 만약에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

면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

에게 불리할 것을 우려하였다. 경인년 3월에 사람을 통하여 패대(浿帶)의 땅이

비옥하여 만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무리들이 남쪽으로 달아나 진한(辰)과 번한

(番) 사이의 바다 가까운 벽지에 이르러 그기서 거주하였다. 10년만에 밭을 사고

농장을 두어 부자가 되고 거금을 쌓으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부속하는

태백일사

- 111 -

자들이 많았다. 남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쪽 해안은 큰 바다였는데 천리의

반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사람을 보내어 주몽 제왕께 글을 올려 국가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니 제왕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고 책봉하여 소서

노라 부르고 어하라(於瑕羅)로 삼았다. 곧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몽어하시고 태

자 비류(沸流)가 즉위하니 사방의 관경이 부속하지 않았다. 이에 마려(馬黎) 등

이 온조(溫祚)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마한(馬韓)이 쇠하여 존립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서 도읍을 정할 수 있는 때입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가 말하여 승낙하고 곧 배를 편성하여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마한에 도달

하여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이르니 사방의 들판은 텅 비어 거주하는 사람이 없

었다. 한참만에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

보는데 마려, 오간(烏干) 등 10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로지 이 하남(河南)의 땅만

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택지가 열려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막혀 있으니 이처럼 하늘같은 가파름과

지리적인 이로움을 갖춘 곳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이다.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고 다시 땅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는 10

신하들의 의논에 따라 마침내 하남(河南)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그대

로 백제(百濟)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백제에서 왔기 때문에 이름을 정한 것이다.

후에 비류가 몽어하시니 그 신민(臣民)들이 그 땅을 가지고 부속하였다.

사로(斯盧)의 시조왕(始王)은 선도산(仙桃山)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에 부여

(夫餘) 제실(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어 남편없이 잉태하자 사람들이 의심하

는 바가 되었다.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고 또 배를 타고 남쪽으

로 내려와 진한의 내을촌(柰乙村)에 도달하여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蘇伐都

利)라는 사람이 있어 이 소문을 듣고 가서 거두어 집에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높이 성숙하고 빨리 성장하여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六部)

가 함께 받들어 거서간(居西干)으로 삼고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고 칭하였는데 또한 사로라고도 한다. 임나(任那)라는 것

은 본래 대마도(對馬島)의 서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다스

리는 곳이 있어 국미성(國尾城)이라고 한다. 동쪽과 서쪽은 각각 마을(墟落)이

있어 혹은 조공하고 혹은 배반하였는데 후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에게

통제되게 된 고로 이로부터 임나는 곧 대마 전부를 지칭하였다. 예로부터 구주

(仇州)와 대마(對馬)는 곧 삼한(三韓)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이고 본래 왜인(倭

人)들이 대대로 거주하는 땅은 아니었다. 임나는 또한 나뉘어서 삼가라(三加羅)

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라는 것은 머리 고을(首邑)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삼한(三汗)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 동안 화해하지 않았는데 좌호가라(佐護加

고구려국본기 제6

- 112 -

羅)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雞知加羅)

는 백제에 속하였다는 것은 이것이다. 영락 10년에 3가라가 모두 우리에게 귀속

되었는데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倭)가 모두 임나가 통합되어 10나라

로 나뉘어 통치되니 연정(聯政)되었다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고구려에

직접 통할되어 열제(烈帝)의 명령하는 바 없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사에서 서역(西域)으로 전해지나 이제 여러 옛기록(古

記)를 고찰한즉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暹羅)라고 전한다. 그런즉 아유타 사람들

은 혹시 대식국(大寔)의 침략으로 쫓긴바 되어 이곳에 도착하여 사는 것인가. 이

명(李茗)의 유기(留記)에 전하기를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있어 바다로 아유타에

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구하여 돌아왔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따라 오고가면

서 날이 갈수록 더욱 교제가 밀접하여졌다. 그러나 그들의 풍속이 나약하고 군

대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주 타인의 통제를 받는 바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乙密臺)가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을밀선

인(乙密仙人)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을밀은 안장제(安臧帝)때에 조의(皂衣)로 선

발되어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소(乙素)의 후손이다. 집에 있으면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고 읊으며 낭도들을 받아들여 수련하고 의

리와 용기로 공공에 이바지하였는데 1세대 조의로 그 낭도가 삼천이었다. 가는

곳마다 구름같이 모여들어 일제히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를 노래하였는데 이렇

게 함으로써 그 나를 버려 의를 온전하게 하는 기풍을 고취토록 한 것이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앞서 간 것은 법(法)이 되고 뒤에 올 것은 위(上)가 되고 법이 되네. 고로 살

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위가 되네. 고로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도다.

사람은 하늘과 땅 가운데에 일(一)이 되고 마음은 몸 즉 본체와 더불어 일(一)

이 되네. 고로 그 허함(虛)과 그 조함(粗)이 동일한 즉 본체이네. 고로 오직 신

(神)과 오직 만물(物)은 둘이 아니도다.

참됨이 만가지 선(善)의 극치를 이루고 신께서 일(一) 가운데의 극치의 주인이

네. 고로 세 참됨이 일(一)로 돌아가고 일(一)이 중심이네. 고로 일신(一神)은 즉

삼신(三神)이 도다.

하늘 위 하늘 아래에 오로지 내가 스스로 존재하고 그것을 매우 정성스럽게

하여 나라를 부흥하고 스스로 존재하네. 고로 무위(無爲)의 일을 정하여 나라를

부흥하네. 고로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였도다.

참된 명(命)이 크게 생겨나 성(性)이 광명(光明)에 통하고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간 즉 충성하네. 고로 무리들이 선하고 효도와 충성을 봉행(奉行)하지 않음이

없네. 고로 여러 악을 일절 짓지 않도다.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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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백성의 의로운 바는 곧 나라(國)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가 없어

지면 우리가 어찌 나라를 소중히 여기며 살겠는가. 고로 백성들에게는 만물이

있어 우리 생을 복되게 하네. 고로 나라에는 혼(魂)이 있어 큰 덕이 되도다.

혼에는 생(生)이 있고 자각(覺)이 있고 영(靈)이 있어 일신(一神)께서 유거(攸

居)하시는 곳이 천궁(天宮)으로 삼혼(三魂)이네. 고로 지혜(知)와 삶(生)은 일신

을 함께 닦음으로써 가능하네. 고로 형체(形)와 혼(魂) 또한 함께 번성함을 얻도

다.

우리 자손으로 하여금 선이 나라가 되게 하고 태백교(太白敎)의 가르침이 내

가 우리 자손의 스승이 되는 바이네. 고로 통솔함에 바르지 않음이 없고 내가

스승인 바이네. 고로 가르침에 새롭지 않음이 없도다.

을밀선인은 일찍이 대(臺)에 있으면서 오로지 하늘에 제사하고 수련하는 것을

업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이란 참전인(參佺)을 계율(戒)로 삼고 이름을

탈없이 하고 서로 영화롭게 하여 나를 비움으로써 만물을 존재케 하고 나를 버

려 의를 완전히 하여 국인(國人)들의 법풍이 되는 것이다. 천추(千秋)를 우러러

족히 감흥을 일으킴으로써 또한 인존(人尊)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금수강산의 제일의 명승이다.

대진국본기 제7

- 114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제7(第七)

조대기에 이르기를 개화(開化) 27년 9월 21일에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니 이

때 진국(振國)의 장군 대중상(大仲象)이 서압록강(西鴨綠河)을 수비하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험지로 달아났다. 개원(開原)을 지나는 길에 소문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팔천명이었다. 곧 함께 돌아가서 동쪽으로 동모산

(東麰山)에 도달하여 웅거하고 진벽을 견고히 하여 스스로를 보전하였다.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이라 칭하고 건국기원을 중광(重光)이라 하고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여러 성에서 부속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오직 옛땅을 회

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세조이라 하고 시호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이라고 하였다. 태자 조영(祚榮)이

부고를 전하는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의 계성(薊城)으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당도한즉 제왕(帝)에 즉위하였다. 홀한성(忽汗城)을 쌓고 도읍을 옮기고 군사 십

만명을 모집하니 위력과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에 정책을 정하고 관제를

세우고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으로 삼고 복수하기를 스스로 맹세하였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거란의 장수 이진영(李盡榮)이 손을 잡고 군

사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부수었

다.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군현(郡縣)을 지키고 유민과 도망자들을 불

러 위로하였다. 주변을 보호하여 정착시키니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고 여러가

지 법망을 새롭게 고쳤다. 나라이름을 정하여 대진(大震)으로 하고 연호를 천통

(天統)이라 하고 고구려가 가진 옛영토를 근거로 6천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천통

21년 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태조(太祖)이라 하고 시호(諡

號)는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이라고 하였다. 태자 무예(武藝)가 즉위하여 기원

을 고쳐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더불어 오주목(烏珠牧) 동쪽 십리

에 경계를 정하니 황수(潢水)에 이르렀다. 이 해에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

(黑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신하이라 칭하고 공물을 납부하였다. 또 대장군 장

문휴(張文休)를 파견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주(登)와 내주(萊)를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당나라 주인 융기(隆基)가 노하여 군사를 파견하

여 와서 토벌하였으나 불리하였다. 다음 해에 수비 장군 연충린(淵忠麟)이 말갈

과 더불어 당나라 놈들을 요서의 대산(大山)의 양지(陽)에서 크게 부수었다. 당

나라가 은밀히 신라와 더불어 약정을 하고 동남의 여러 군(郡)을 갑자기 습격하

여 천정군(泉井郡)에 도달하니 제왕께서 조칙으로 보병과 기병 2만명을 보내어

공격하여 그곳을 부수었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군 중에 얼어서

죽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요하(河) 서쪽의 니하(泥河)에 이르러

태백일사

- 115 -

경계를 삼았는데 지금의 강릉(江陵) 북쪽 니천(泥川)이다. 해주(海州) 암연현(岩

淵縣)은 신라와 동쪽 경계인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瓮津)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매년 때마다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임진강 이북의 여러 성들이 모두 우리에게

귀속되었다. 또 다음 해에 당나라가 신라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와서 침입

하였다가 공없이 끝내고 돌아갔다.

인안(仁案) 16년에 구다(句茶), 개마(蓋馬),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로써 그들

나라들이 와서 항복하니 받아들여서 성읍으로 삼았다. 다음 해에 송막(松漠)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에 6성을 쌓음으로서 마침내 5경(京), 60주(州), 1군(郡), 38

현(縣)이 갖추어져 넓이의 폭(圓幅)이 9천여리였으니 가히 강성하였다고 전할 만

하다. 이 해에 당나라, 왜, 신라가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 공물을 바치니

천하가 칭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발해사람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이때에 임금과 백성들이 평화롭고 즐겁고 역

사를 논하여 의로움을 좋아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고 사해가 편안하였다. 대진

(大震) 육덕(六德)의 노래가 있어 이를 미화하였다. 이듬해 3월에 안민현(安民縣)

에 감로(甘露)가 내렸는데 예관이 아뢰어 축하 의례를 청하니 이에 따랐다. 이달

16일에 서압록강 상류에서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께 제사를 올렸는데 서압

록은 고리(槀離) 옛나라의 땅이다. 19년에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光

宗)이라 하고 시호를 무황제(武皇帝)이라고 하였다. 태자 흠무(欽茂)가 즉위하여

기원을 고쳐 대흥(大興)이라고 하였다. 동경 용원부(龍原府)로부터 도읍을 상경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다음해에 태학(太學)을 세워 천경(天經)과 신고(神誥)

로 교육하고 환단(桓檀)의 옛역사로 강론하였다. 또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하였는데 문(文)을 다스려 예약을 부흥하고 무(武)를 떨쳐 여러 오

랑캐를 복종시켰다. 태백(太白)의 현묘한 도는 백성들에게 미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화함이 만방에 퍼지게 되었다.

대흥 45년에 치청(淄靑)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

에 항거하니 제왕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전쟁을 도왔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으

로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22년에 군사(師) 무리들이 마침내 군사(軍師) 이희

일(李希逸)을 축출하고 정기를 세웠는데 사망하자 아들 납(納)이 아버지의 무리

를 통솔하였다. 56년에 납이 사망하니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곧 사망하니 그 집 사람들이 상(喪)을 치르지 않고 몰래 비밀리에 사도(師道)를

맞이하도록 하여 그를 받들었다.

대흥 51년에 제왕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하고 시호를 광성문

황제(光聖文皇帝)이라고 하였다. 국인들이 그의 친족동생(族弟) 원의(元義)를 세

웠더니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리기가 불가능하였다. 갑술년에 국인들이

대진국본기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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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폐하고 선제왕의 손자인 화흥(華興)을 맞아들여 즉위케 하였는데 기원을

고쳐서 중흥(中興)이라고 하였다. 다음해에 붕어하시니 묘호를 인종(仁宗)이라

하고 시호를 성황제(成皇帝)이라고 하였다. 황제의 숙부(皇叔)인 숭린(崇璘)이 즉

위하였는데 이가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이다.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원

유(元兪),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언의(言義),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명

충(明忠)을 거쳐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인수(仁秀)에 이르렀다. 하늘의 자질

이 있고 영웅처럼 밝고 덕과 기가 신과 같고 문무를 겸하여 곧 태조의 풍모가

있었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니물(泥物),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

淵) 등 7주(州)를 설치하고 북쪽으로는 염해(鹽海), 나산(羅珊), 갈사(曷思), 조나

(藻那), 석혁(錫赫)을 경략하고 남북 우루(虞婁)에 까지 이르러 여러 부(部)를 설

치하였다. 장백(長白)의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강(鴨江)의 남쪽을 안원

(安遠)이라 하고 목단(牧丹)의 동쪽을 철리(鐵利)이라 하고 흑수(黑水)의 위쪽을

회원(懷遠)이라 하고 난하(灤河)의 동쪽을 장령(長嶺)이라 하고 장령의 동쪽을

동평(東平)이라고 한다. 우루는 북쪽 대개마의 남북에 있는데 땅의 넓이가 9천리

였다. 국경과 거처가 널리 개척되고 문의 다스림이 일어나 흡족하고 위로는 국

가 수도로 부터 아래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문을 배웠다. 구서(九誓)와

오계(五戒)를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여 익히고 봄, 가을에 공적을 고려하고 무리

들의 의논으로 공물을 진상하였다. 개인들은 이미 힘을 축적하고 가정들은 모두

사용에 대비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세력이 부강해지고 안팎이 편안하고 기쁘

니 저절로 도둑의 도적질과 간사한 모의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 왜, 신라 및 거

란이 두려워서 복종해 마지않고 천하의 만방이 모두 성인(聖人)이 정치를 부흥

하는 해동성국이라고 흠모하여 이를 칭송하였다. 5대(五代)를 지나고 야율(耶律)

이 비록 번번히 수차례 침공하였으나 끝내 정복하기 불가능하였다. 후에 장종

(莊宗) 화황제(和皇帝) 이진(彛震), 순종(順宗) 안황제(安皇帝) 건황(虔晃), 명종

(明宗) 경황제(景皇帝) 현석(鉉錫)을 거쳐 애제(哀帝) 인선(諲譔)에 이르러 거란

에게 멸망하게 되었으니 세조(世祖)로 부터 15대(世)를 전하여 모두 259년이다.

목종(穆宗)은 기원을 고쳐 정력(正曆)이라 하고 의종(毅宗)은 기원을 고쳐 영덕

(永德)이라 하고 강종(康宗)은 기원을 고쳐 주작(朱雀)이라 하고 철종(哲宗)은

기원을 고쳐 태시(太始)이라 하고 성종(聖宗)은 기원을 고쳐 건흥(建興)이라 하

고 장종(莊宗)은 기원을 고쳐 함화(咸和)이라 하고 순종(順宗)은 기원을 고쳐 대

정(大定)이라 하고 명종(明宗)은 기원을 고쳐 천복(天福)이라 하고 애제(哀帝)는

기원을 고쳐 청태(淸泰)이라고 하였다.

대진국의 남경 남해부(南海府)는 본래 남옥저(南沃沮)의 옛나라였는데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 이것이다. 서경 압록부는 본래 고리의 옛나라였는데 지금의 임

태백일사

- 117 -

황(臨潢)이고 지금의 서요하(西遼河)이다. 즉 옛날의 서압록강이다. 고로 구지(舊

志)에 안민현은 동쪽에 있고 그 서쪽은 임황현이라고 하는데 임황은 뒤에 요나

라의 상경 임황부가 되었다. 바로 옛날의 서안평(西安平)이다.

정주(正州)는 의려국(依廬國)이 도읍한 곳인데 선비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한

바 되어 핍박을 우려하여 스스로 결단하려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내 혼이 아직

꺼지지 않았는데 어디로 간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아들 부라(扶

羅)에게 은밀히 부탁하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니 따르

는 사람들이 수천이었다. 마침내 건너가서 왜인(倭人)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

다. 스스로 삼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한다고 함으로써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축하의례를 올리게 하였다. 혹은 전하기를 의려왕(依廬王)이 선비에게 패한바 도

주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이 도주하여 북옥저를 지

키다가 다음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였다. 이후로 부터 모용외(慕容廆)가

또 다시 침입하여 나라 사람들을 약탈하므로 의라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

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日本)은 옛날에 이국(伊國)에 있었고 또한 이세(伊勢)라고도 하는데 왜

(倭)와 더불어 같은 이웃이었다. 이도국(伊都國)은 축자(筑紫)에 있는데 또한 바

로 일향국(日向國)이다. 이로부터 그 동쪽은 왜에 속하고 그 남동은 안라(安羅)

에 속하는데 안라는 본래 홀본사람(忽本人)이다.

북쪽에는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안라는 뒤에 임나에 편입되었는데 고구려와

일찍부터 이미 화친을 정하였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은 대우국(大隅國)이라고

하는데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남만

(南蠻) 침미(忱彌), 완하(日+完夏) 비자발(比自㶱)의 무리들을 도륙하고 모두 조

공하였는데 남만은 구려(九黎)의 유민들의 후손(遺種)이고 산월(山月)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발은 변진(弁辰)의 비사벌(比斯伐) 사람들이 모여 산 마을이다. 완

하는 고구려에 속한 노비들이다. 이때에 왜인들은 산과 섬에 나뉘어 웅거하였는

데 각각 100국에 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

본래 구야국(狗邪國) 사람들이 다스린 곳이다. 바다에서 상업을 하는 선박들은

모두 종도(種島)에 모여서 교역하였다.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가

모두 교통하였다. 처음에 하나의 바다 천여리를 건너서 대마국(對馬國)에 이르니

사방이 4백여리나 되었다. 또 하나의 바다를 천여리를 건너서 일기국(一歧國)에

이르니 사방이 3백리나 되었다. 본래 사이기국(斯爾岐國)인데 자다(子多)의 여러

섬들이 모두 조공하였다. 또 하나의 바다를 천여리 건너서 말로국(末盧國)에 이

르니 본래 읍루(邑婁)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동남쪽의 육지 5백리를 가

서 이도국(伊島國)에 이르니 곧 반여언(盤余彦)의 옛읍(古邑)이다. 신당서(新唐

대진국본기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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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한 자들인데 성은 대

(大)씨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유민무리와

더불어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보전하고 오루

하(奧婁河)를 방어하였다. 중상이 사망하고 태자 조영(祚榮)이 패잔병과 부상병

을 이끌고 퇴각하여 곧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고 황량하고 먼 곳에 기대어 이내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震國)의 왕이라 이름하고 부여(夫餘), 옥저(沃沮), 변한

(弁韓), 해북(海北)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사씨(史氏)가 이르기를 걸걸중상이 패망한 유민으로 험지로 도주하여 스스로

보전하였는데 태왕(太王)이 빈(邠)으로 간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고왕(高王) 조영

이 창업의 자질로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터전을 여니 구천(句踐)이 월(越)나라를

부흥한 것과 비슷하다. 대개 관원이 이미 정해지면 곧 문덕(文德)으로 다스리고

제도를 고치고 관작(官爵)을 정하고 군현을 배열하여 큰 나라와 적수가 되었다.

방역이 5천리에 이르고 국운(國祚)이 3백년에 이르니 당시에 사방에서 장차 이

를 넘어설 나라가 없으니 역시 강성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현종(顯宗) 원문대왕(元文大王) 20년이었다. 거란의 동경(東京)장군 대연

림(大延琳)은 태조 고황제(高皇帝)의 7세손이었다. 유수(留守)의 부마 소효원(蕭

孝元)과 남양(南陽) 공주를 가두고 호부사(戶部使) 한소훈(韓紹勳) 등을 살해하

고 즉위하여 흥요(興遼)이라 이르고 기원을 천경(天慶)으로 고쳤다. 고길덕(高吉

德)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구하였다.

요동 유수(留守) 소보선(蕭保先)이 정치를 혹독하고 모질게 하였다. 고려 예종

(睿宗) 문효대왕(文孝大王) 11년 정월 초하루에 동경의 비장(裨將) 발해사람 고

영창(高永昌)이 수십명과 더불어 술기운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담장을 넘어

부위(部衛)로 들어가 관청에 올라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급히 전하여 외부 군

대의 변란에 대비해 주기를 청하여 보선이 나오자 무리들이 그를 살해하였다.

임시유수(假留守) 대공정(大公鼎)과 부유수(副留守) 고청신(高淸臣)이 싸워서 이

기는 것이 불가능하여 서문을 탈취하여 나가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창은 스스로

대발해국(大渤海國) 황제이라 칭하고 기원을 융기(隆基)이라 고치고 요동 50여주

(州)를 점거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의 종족으로 요(遼)에 패한

바 되어 그 추장장수(酋帥)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를 보전하고

나라를 세우고 기원을 고쳐서 스스로 정안국(定安國)이라고 이름하였다.

개보(開寶) 3년에 그 왕 열만화(烈萬華)가 입조하여 공물을 납부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表)을 붙여 공물을 바쳤다. 태종때에 그 왕 오현명(烏玄明)이 다

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 옛

태백일사

- 119 -

토양의 발해 유민무리(遺黎)로서 이 모퉁이를 보전하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태종

이 회답한 조서(勅)의 대략에 이르기를, ‘경은 오래 마한(馬韓)의 땅에 있어 큰

물결의 겉에 놓이게 되었다.’고 운운하였다. 단공(端拱)과 순화(淳化) 연간에 다

시 여진에 부탁하여 표문을 바치더니 그 후로는 당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진국 애제 청태 26년 봄 정월에 야율배(耶律倍)가 아우 요골(堯骨)과 더불어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자 애제가 나가 항복함으로서 나라가

망하였다.

2월 병오년(丙午)에 요나라의 태조가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큰 아들 배(倍)

를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그를 왕으로 하였다. 기원을 감로(甘露)로 정하고

홀한성을 고쳐 천복(天福)으로 하고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여 12줄의 면류관(旒

冕)을 썼는데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다. 이에 대진국의 옛제도를 사용하여 숙일

랄(叔迭刺)을 좌대상(左大相)으로 삼고 대진의 원로 재상(이름 잃음)을 우대상

(右大相)으로 삼고 대진의 사도(司徒)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으로 삼

고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右次相)으로 삼았다. 나라 안의 목베어 죽일 사

람 이하는 사면하고 한 해의 공물(歲貢)은 포(布) 10만단과 말 천필로 약정하였

다.

감로 27년 겨울 12월 경진년에 요가 동경의 중대성(中臺省)을 파하여 동단국

이 없어졌다.

고려국본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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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제8(第八)

태조(太祖) 신성대왕(神聖大王) 천수(天授) 2년에 도읍을 송악(松岳)의 양지에

정하고 26년에 임금께서 훈요(訓要)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생각컨대

우리 동방(東方)이 옛적에 당나라풍(唐風)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

제를 따랐는데 나라가 다르고 풍토가 다르면 사람의 성품도 제각기 다르게 마련

이니 구차하게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태봉국왕(泰封國王) 궁예(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으로 본래 보덕왕(報德

王) 안승(安勝)의 먼 후예였는데 그의 아버지 강(剛)이 점술가의 말을 따라 어머

니의 성을 따서 궁씨(弓氏)로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모잠(牟岑) 대형이 피폐한 백성

들을 규합하여 안승을 받들어 후고구려왕으로 삼아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

왕이 거처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정하였는데 뒤에 고쳐서 보덕왕(報

德王)으로 삼았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고 보덕왕을 불러 소판(蕭判)으로 삼

으니 그의 친족의 아들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면서 모반하여 왕이라고 칭

하였다. 그가 주살되자 남은 무리들이 관리를 살해하고 보덕성(報德城)에 웅거하

여 또 반란을 일으키니 신라가 평정하여 그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으

로 이주시켰다.

대진국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천복(天福) 9년 5월 5일에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붕 위에 소광이 생겨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로 뻗쳤다. 신라의

일관(日官)이 그것을 바라보고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이 말을

듣고 왕이 이를 꺼려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헐고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그 어머

니가 진귀한 보물을 뇌물로 주고 끌어안고 도망하여 숨어살게 하여 달라고 청하

여 고생스럽게 힘써 양육하였다. 나이 10여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善

宗)이라고 이름하였다. 장성하여서도 마음대로 놀고 이러한 고로 승려의 계율(僧

律)에 구애되지 않고 털털하고 담력과 기운이 있었다. 어느날 바리때를 가지고

재(齋)를 올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상아점대(牙籤)를 물고 있다가 바리때 안에 떨

어뜨렸다. 이를 보니 왕(王)자가 있으므로 비밀로 하여 말하지 않고 자뭇 스스로

뿌듯해 하였다.

이전 안승 때부터 왕실의 일에 노고가 있었으나 신라가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 토지와 백성들을 거두어 모조리 빼앗고는 다만 왕의 누이로 아내(妻)를 삼도

록 할뿐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대대로 원한이 쌓인 고로 기세좋게 변을 일으

켰으나 여러번 패하였다. 궁예에 이르러 국가가 쇠하고 어지러운 것을 보고 기

회를 타서 무리를 모아 조종(祖宗)의 옛영토를 회복하고 대대로 쌓인 원수를 씻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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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하였다. 이에 죽주(竹州)의 도적 기훤(箕萱)에게 의탁하니 훤이 거만하게

업신여기며 예우하지 않았다. 궁예는 근심에 쌓여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몰래

훤의 가까운 부하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벗이되고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였다. 길이 그를 잘 대우하고 그에게 일을 맡겨 군사

100기(騎)를 나누어 동쪽으로 주군을 공략하게 하여 모두 항복하게 하였다. 또

아슬나(阿瑟那)를 공격하여 무리가 600에 이르니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병사

들과 더불어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하고 주고 뺏는 것을 사사로이 하지 않으

니 무리들이 마음속으로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천복 27년에 태수 왕륭(王隆)이 송악군(松岳郡)을 바쳐 궁예에게 귀속되며 그

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에 조선(朝鮮), 숙신(肅愼), 변한(卞韓)의

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나의 장

자인 건(建)을 그 주인(主)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이때에 이훤(李

萱)이 무진주(武珍州)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이에 무리들에게 소리 내어 말하기

를, “우리 원삼국의 시작은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는 뒤에 일어났으며 변

한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나라를 열어 대대로 전한지 600년이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공격하여 그를 멸하였으니 지금 내 비록 부덕하나 의자왕의

분을 풀고자 한다.” 라고 하며 마침내 완산(完山)에 도읍하고 왕이라 칭하고 나

라이름을 후백제(後百濟)이라고 하였다.

궁예도 또한 다음해에 왕이라 칭하고 일컬어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

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으니 이는 가히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반드시 고구

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 라고 하며 나라를 세워 이름하여 후고구려(後高句

麗)이라 하고 건국기원을 무태(武泰)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남행하여 흥주사(興

州寺)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전왕(前王)의 화상을 보고 검을 빼어 이를 쳤다.

궁예는 신라를 병합하여 삼키려는 뜻을 가지고 도읍을 멸한다고 부르짖으며 신

라로부터 귀부하는 자들을 모두 모아 그들을 죽였다. 이로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고 머리에 금책(金幘)을 쓰고 또 스스로 불경(經) 20권

을 저술하여 간혹 정좌하여 강설하였다. 승려 석총(釋聰)이 일컬어 말하기를,

“모두 사설과 괴담으로 가르침으로는 불가하다.” 라고 하니 궁예가 노하여 철추

로 그를 쳐서 죽였다. 천수(天授) 원년 무인년 여름 6월에 왕건(王建)이 홍유(洪

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여러 장군들에게 추대된

바 날이 밝을 무렵 곡식더미 위에 앉아서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들에게 명하

여 달리면서 또 “왕공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라고 외쳐 말하게 하였다.

몹시 바삐 달려와 도달한 사람들의 무리가 먼저 궁문(宮門)에 이르고 소란하게

북을 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또한 만여명이었는데 마침내 포정전(布政殿)에서

고려국본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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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하고 건국기원을 천수(天授)이라고 하였다. 이에 태봉왕(泰封王) 궁예는 정

변을 듣고 미복으로 궐문을 탈출하여 도망가다가 곧 부양(斧讓)의 백성들에게

수색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거란의 성종(聖宗)은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파견하여 침입하여 봉산(逢山)을

부수고 우리의 선봉을 잡아갔다. 성종(成宗) 문의대왕(文懿大王)이 여러 신하들

을 모아 의논하니 혹은 항복을 구걸해야 한다고 말하고 혹은 영토를 할양하여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중군(中軍) 서희(徐熙)가 홀로 말하기를, “지

금 그들의 세력이 크게 강성한 것을 보고 두려워서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여

그들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터

이니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졸라 만족하지 않으면 모두 줄 수 있겠습니까. 더

구나 지금 영토를 할양하면 참으로 만고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타고 도성(都城)으로 귀환하여 신 등으로 하여금 한번 그들과 더불어 싸우게 한

후에 이를 논의하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나아가 서로 접견하는 예절을 물으니 손녕(遜寧)이 말하기를,

“나는 대국 조정의 귀인(貴人)이니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해야 한다.” 라고 하였

다. 희가 말하기를, “양국의 대신(大臣)으로 어찌 이와같이 할 수 있겠는가.” 라

고 하였다. 손녕이 희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

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입하여 이를 잠식하였다. 또

우리와 더불어 영토가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건너가 송(宋)나라를

섬기는 고로 오늘날의 출사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영토를 할양하여 바치고 조

정의 사신 파견(朝聘)에 힘쓴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것을 이은 고로 고려이라고

이름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약에 영토의 경계를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東京)이 모두 우리 경계에 있거늘 어찌하여 그것을 침입하여 잠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영토를 돌려준다면

감히 사신의 파견에 힘쓰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말을 하는 기운이 강개

하니 손녕이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군사를 파하기로 결정하고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환송하였다.

도원수(都元帥) 윤관(尹瓘)이 여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비를 선춘령(先春嶺)

에 세워 경계로 삼고 아들 언이(彦頤)를 파견하여 표문(表)을 봉행하여 축하하였

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김경용(金景庸),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의(任

懿),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위(李偉) 등이 선정전(宣政殿)에 들어와 마주하였는데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임언(林彦) 등이 망령되게 명분없이 군사를 위법하

게 일으켜 군사를 패하게 하여 나라를 해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극히 논하였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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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간관(諫官) 김연(金緣), 이재(李載) 등도 역시 서로 연이어 이들을 탄핵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주인이 토지를 가짐은 본래 백성을 양육하려 함인데 지금은

성을 차지하려고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

같지 않습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생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상(上)이 말하여,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을 때 사신을 보내서 거란에 알렸는데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곧 우리의 옛영토이고 그 거주민들도 또한 우리에게 편입된 백성들이다. 근래에

계속 변방을 침입하여 그치지 않는 고로 수복하여 그 성을 쌓은 것이다고 하였

습니다. 표의 글이 이러하므로 궁한리 추장(酋長)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

이므로 거란이 우리로서 망언하게 한다하여 이로써 더욱 땅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동으로 여진을 방비하고 북으로 거란을 방비하게 되면 신은 9성

이 삼한(三韓)의 복이 되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간의대부(諫議

大夫) 김인존(金仁存)도 역시 옛땅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상(上)이 선유(宣諭)하여 말하기를, “두 원수(元帥)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황

제의 유지를 받들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본받은 것이오. 몸으로 창끝과 화살촉

을 무릅쓰고 적의 보루에 깊이 들어가 참수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아 온 포로가

헤아리기 불가하고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서 국가의 치욕을 씻

었으니 그 공이 가히 많다고 일컬을 것이오. 그러나 여진은 사람의 얼굴에 짐승

의 마음(人面獸心)을 가져 다시 뒤집는 것이 일상이고 그 남아있는 무리들이 의

탁할 곳이 없는 고로 추장이 항서를 바쳐 화친을 청하면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

로써 편안함으로 삼으니 짐 또한 참지 못하는 것이오. 그런데 담당자가 법을 고

수하여 자못 탄핵을 논하여 그 직책을 박탈하려 하나 짐은 끝내 이를 허물로 삼

지 않으니 이는 맹명(孟明)이 제(濟)를 수복함과 같은 바램이오.” 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문효대왕(文孝大王) 4년 가을에 9성을 철폐하여 여진의 옛땅을 돌

려주었다. 이보다 먼저 여진이 사신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을 입조시켜 아

뢰어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

종은 대방(大邦)으로부터 나와 자손들에 이르렀으므로 당연히 귀부(歸附)하는 것

이 가합니다. 지금의 태사 오아속(烏雅束) 또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았습니

다. 갑오년 간에 이르러 궁한촌(弓漢村) 사람들이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었으나 본래 태사가 지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조(國朝)에서 죄를 알려

그를 토벌하고 다시 수교를 허락하는 고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

습니다. 지난해에 크게 거병하여 우리의 노약자와 어린이를 죽이고 9성을 축조,

설치하여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가 살 곳을 없게 하니 태사가 우리를 보내

어 와서 땅을 돌려주기를 청합니다.” 운운 하였다. 또 재상(宰), 추밀원(樞), 대

고려국본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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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 성(省), 지제고(知製誥), 시신(侍臣), 도병마 판관(都兵馬判官)과 문무 3품

이상을 모아서 다시 9성의 반환의 가부를 논하니 모두가 가하다고 말하였다. 구

사(舊史)에 전하기를 두 장군이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까지 고려의 경계로

삼는다고 말하였다. 선춘령은 두만강(豆滿江) 7백리밖 송화강(松花江) 근처의 땅

에 있다고 전한다.

광주목사(廣州牧使) 윤언이(尹彦頤)는 스스로 표문(表)을 풀어 전하기를, ‘새벽

이 되어 중군(中軍)이 아뢰어 말한바 ‘언이가 정지상(鄭知常)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한 당(黨)을 결성하여 크고 작은 일을 열매와 뿌리와 같이 의논하였습니다.

임자년에 서경으로 거동하셨을 때 기원을 세우고 이름을 칭할 것을 청하였습니

다. 또 국학생(國學生)들을 말로 부추겨서 지난 사건들을 아뢰게 하였사온대 대

개 대금국(大金)을 충동질하여 일을 저지르고 그 틈을 타서 자의적으로 처치하

고 붕당 밖의 사람들과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된

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두번 세번 읽은 연후에 마음을

겨우 안정시켰습니다. 이 기원을 정하자는 청은 본래 왕을 높이자는 정성으로

우리 본조에서도 존재한 바로 태조(太祖)와 광종(光宗)의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아울러 지난 역사를 살피건대 비록 신라와 발해가 그것을 정해 사용했어도 대국

이 일찍이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였고 소국이 감히 그 실을 논한 적이 없으니 어

찌 이 성대에 반하여 참람하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 일을 논

의한 죄로 이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록 죽음을 각오한 당을 결성하여 대금

국을 충동질하여 노하게 하였다는 말이니 그 말은 비록 심히 거창하나 본말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정하여 강한 적이 우리 강토를 쳐들어온다면

무릇 이를 막아낼 겨를도 없거늘 편안히 순간을 틈타서 일을 꾸밀 수 있겠습니

까. 그 가리키는 붕당자(朋黨者)이라는 것이 누구이며 그 처치하려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무리들이 만약에 화합하지 못하고 싸워서 패하면 또 몸을 담을 곳

이 없으니 어찌 자의적으로 이와같이 모의하겠습니까. 성상을 신뢰하고 있고 중

신들을 알고 있어 신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질임을 생각하면서도 서경 정벌

의 역무에 따라나서 몸을 잊고 이 나라를 방위하고자 하였으므로 이러한 의기와

분수는 당연한 것입니다. 일을 이루는 것은 모두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

부지런히 힘쓰는 것의 길을 멈추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금사(金史)에 이르기를 세종(世宗) 대정(大定) 15년 9월에 고려의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서언(徐彦) 등을 파견하여 표문(表)을 올리고 자비령(慈悲嶺)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바치고 부속하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예종 11년 3월 을미년 초하루에 상(上)이 요(遼)의 내원(來

遠)과 포주(抱州)의 두 성이 여진의 침공을 받은바 성중에 식량이 떨어졌다는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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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듣고 도병마 녹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을 파견하여 쌀 천석을 보내었

는데 내원(來遠)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년에 금나라 장

수 철갈(撒喝)이 요(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 두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

시키니 그 통군 야율령(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주하려 하였다. 상이 추밀

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한교여(韓皦如)를 파견하여 초대하여 타일러 보려 하였

으나 녕(寧)이 왕의 교지(王旨)가 없다고 사절하였다. 교여가 말을 달려와서 아

뢰니 상이 추밀원에 명하여 서식(箚子)을 갖추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재신(宰臣)

과 간관(諫官)이 아뢰어 말하기를, “저들이 왕의 교지를 요구하고 있어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그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라고 하였다. 상이

곧 사신을 파견하여 금나라에 같이 청하여 말하기를, ‘포주(抱州)는 본래 우리의

옛영토이니 원하건대 이를 위해 요를 좀 봐달라.’ 라고 하니 금나라 주인이 사자

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당신들이 그 일은 스스로 그곳을 차지하라.” 라고 하였

다.

후암(厚庵) 이존비(李尊庇)는 고려 경효왕(景孝王) 때의 인물이다. 일찍이 서연

(書筵)에 있으면서 자주부강의 정책(自主富强策)을 논하였는데 이에 아뢰어 말하

기를, ‘본국이 환단조선(桓檀朝鮮)으로 부터 북부여, 고구려 이래로 모두 강하여

스스로 주인(主)이었고 또 건국기원을 정하고 황제로 칭한 일은 우리 태조의 초

년에 이르고 또한 일찍이 이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곧 사대의 의논(論)

이 국시(國是)로 정해져 군신상하가 굴욕을 달게 여기고 스스로 그것을 새롭게

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바 하늘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고 하니 어찌 천하 후대의 웃음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또 왜(倭)와 더불어 원한을

맺고 있으니 만일에 원나라 왕실(元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어느 곳을 믿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황제를 지칭하는 일은 지금 시대에는 꺼리는 바가 되어

갑자기 회복하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대책은 강구하지 않

기가 불가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록 상소(奏)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말

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도 이를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다. 후에 또 왜에 대비하

는 다섯가지 일을 개진하였다. 첫째로 이르기를 호구(戶口)를 상세히 갖추어 모

든 백성을 병사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로 이르기를 병역과 농사를 함께

일으켜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키도록 한다. 셋째로 이르기를 군량을 쌓아두고

전함을 수리하고 건조하도록 한다. 넷째로 이르기를 수군을 확장하여 육군의 조

종도 겸하여 익히도록 한다. 다섯째로 이르기를 모든 지리를 상세히 살펴두고

사람의 화합을 확보하도록 한다. 일찍이 회당(晦堂) 상인(上人)에게 보낸 시(詩)

가 있어 이르기를,

‘만물이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끝내에는 쓰이게 마련이니 신(苦) 오얏나

고려국본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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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李)에 과일이 많이 달렸다고 누가 탓하리오. 맏아들은 오래토록 천자(天子)가

계시는 곳을 찾아들었고 둘째아들은 새로이 법왕가(法王家)에 부탁하였노라. 충

성을 견고히 하는 이것이 신하의 본분이나 애착을 끊고 그것이 속세를 떠나간들

어떠하랴. 돌아보며 웃음짓는 늙은이 아직도 미련이 남아 때로는 혼의 꿈(魂夢)

이 있으나 하늘 끝에 아득하구나.’ 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연경(燕京)에 계시면서 연꽃녀에게 혹하였다. 작별에 임하여 손수

연꽃 한송이를 주면서 말하기를, “상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이 꽃을 보시고 만약

에 시들면 이 목숨이 장차 다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꽃을 보니

꽃이 파리해져 가는지라 상이 연꽃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燕)으로 가려

하니 존비가 가서 알아보고 돌아오겠다고 청하였다. 연꽃녀가 울면서 시를 바쳐

이르기를, ‘상께서 연꽃향을 주었어요. 처음에는 고요하고 나긋하고 붉은 것이었

지요. 꽃송이 옮긴지 몇일인지 물어봅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파리해져 갔으면

합니다.’ 라고 하였다. 존비는 상께서 이 시를 보면 돌아갈 생각이 더 커질까 두

려워 연꽃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치면서 이르기를, ‘이 어리석은 사내야, 이

어리석은 사내야, 길에 머무르지 마세요. 길에 머무르지 마세요. 이 몸은 연잎

위의 구슬처럼 편해서 저쪽으로 거처를 옮기면 이쪽도 둥글어집니다.’ 라고 하였

다. 상(上)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나라로 돌아왔다. 뒤에도 상이

연꽃녀를 잊지 못하고 원망하자 존비가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그 때에 받들어

돌아오시게 하는데 급급하여 부득이 거짓으로 베꼈으니 업드려 기망의 벌을 청

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노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문의(文義)로 귀양보내자

태자와 조정의 신하들이 반복하여 그를 풀어주기를 계청하고 상도 또한 후회하

고 뉘우쳐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하였으나 사자(使者)가 이르기도 전에 존비는

숨을 거두었다. 부음(訃音)을 듣고 상이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였으며 태자

가 문상(喪)에 임하여 말하기를, “이존비는 정직하여 국가의 사직(司直)이었는데

어찌하여 이와같이 요절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명하여 장사에 왕례(王禮)를

사용하도록 하고 마침내 형강(荊江)의 위쪽으로 그곳 산의 4리(四里)를 둘러 봉

하였는데 오늘날까지 그 동(洞)을 왕묘(王墓)이라 하고 그 리(里)를 산사(山四)

이라고 한다.

시중 행촌 이암(杏村李侍中嵒)은 일찍이 권신배(權臣輩)들이 국호를 폐하고 행

성(行省)을 세우기를 청하는 논의를 상소로 저지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이

르기를, ‘천하의 사람들이 제 각각 그 나라로써 나라를 삼고 제 각각 그 풍속으

로써 풍속을 삼으니 국가의 경계는 파괴하는 것이 불가하고 민속도 또한 뒤섞는

것이 불가합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이래로 부터 모두 천제의 아들

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스스로 나누어 봉(封)한 여러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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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侯)와는 원래 서로 같지 않습니다. 지금 비록 잠시 남의 멍에 아래에 있으

나 이미 혼(魂), 정기(精), 피(血), 살(肉)은 한 근원의 조상으로부터 얻은 것입니

다. 이것이 곧 신시(神市)의 하늘 열림과 삼한(三韓)관경이 천하 만대의 사람들

에게 크게 이름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천수(天授) 태조께서 창업의 자

질을 갖추어 고구려 다물(多勿)의 나라 세움의 여풍을 계승하여 세상의 안을 평

정하여 국가의 명성이 크게 떨치었습니다. 그 사이에 강한 이웃이 날아올라 사

나워져 유영(幽營) 이동이 아직까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 차에 임

금(君)과 신하(臣)는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부강의 정책을 도모해야 합니다. 감

히 시퍼런(潛淸) 무리들이 간특하게 제멋대로 음모를 꾸미니 우리나라가 비록

소국이나 국호를 폐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고 주인의 세력이 비록 약하나 위호

(位號)를 어찌 낮출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거동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들의

배반에서 나온 것으로 나라 사람들의 공적인 언론(公言)이 아닙니다. 마땅히 도

당(都堂)에 청하여 그 죄를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행촌 시중에

게는 저서(著書) 3종류가 있는데 그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어 원시국가의 체

통(體統)을 밝혀 놓았고 또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어 환단시대에 서로 전한 도

학심법(道學心法)을 이어서 서술하고 있다. 농상집요(農桑集要)는 곧 세상을 경

영하는 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文靖公) 목은 이색(李牧隱穡)이 그 서문에서 이

르기를 ‘무릇 의식(衣食)을 만족하게 하는바 재화(財)를 풍부하게 하는바 종자

(種)를 심고 얼자(蘖)를 키워 주변을 정비하는 바를 부문별로 모아 자세히 분석

하고 촛불처럼 밝히지 아니한 바가 없으니 실생활을 다스리는 살아있는 우량서

(良書)이로다.’ 라고 하였다.

행촌선생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유람갔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

었는데 소전(素佺)이라는 한 거사(居士)가 있어 숨겨진 옛 서책들을 많이 소장하

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더불어 함께 신서(神書)를 구하였는데

모두 옛적 환단(桓檀)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짜 비결(眞訣)이었다. 그는 옛

학문에 통달하여 해박하고 탁월하였다고 가히 칭찬할만 하고 그의 참전수계(參

佺修戒)의 법은 대개 성(性)을 뭉쳐서 지혜를 짓고 명(命)을 뭉쳐서 덕(德)을 짓

고 정(精)을 뭉쳐서 힘을 지었다. 그것은 우주에 존재하여 삼신(三神)이 늘 존재

하고 그것은 인물에 존재하여 세 참됨(三眞)이 멸하지 않는 것으로 마땅히 천하

만대의 대정신(大情神)과 더불어 혼연히 그 체(體)를 같이하여 나서 다함이 없다

는 것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도(道)는 하늘에 있고 이것이 삼신(三神)이 되고

도는 사람에게 있고 이것이 세 참됨(三眞)이 되니 그 근본을 말한즉 일(一)이 될

뿐이다. 오직 일(唯一) 이것이 도(道)가 되고 둘이 아닌 것(不二) 이것이 법(法)

이 된다. 위대하도다. 환웅(桓雄)이여. 먼저 무리와 만물(庶物)이 나오고 도를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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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天源)에서 얻고 교(敎)를 태백(太白)에 세워 신시 개천의 대의가 비로소 세상

에 크게 밝혀졌도다. 이제 우리들이 글(文)에 연유하여 도를 구하고 참전인(參

佺)이 계율(戒)을 받아 우리교(吾敎)를 존경해 보았으나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또 수많은 방도를 들었으나 노장(老將)을 이내 모으기 어려우니 가히 한스럽도

다.” 라고 하였다. 선생은 시중(侍中)에 이르러 사임하고 물러나 강도(江都)의 홍

행촌(紅杏村)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호를 홍행촌수(紅行村叟)이라 하고 마침내 행

촌 3서(杏村三書)를 저술하여 집에 소장하였다.

경효왕(敬孝王) 이후 5년 3월에 행촌 이암이 왕명으로 참성단(塹城壇)에서 하

늘에 제사올릴 때 백문보(白文寶)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덕(德)을 입고 신(神)을

수호하는 제일은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길러서 나라를 보위하는 공(功)은 발

원(發願)함에 달려있다. 이에 신은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도 또한 신을 의지하여

백성이고 나라이고 영원히 편안함과 강녕함을 얻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올리는

정성(誠)은 근본에 보답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되어 그것이 인간세상을 구하니

감히 가벼이 여길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였다.

정지상(鄭之祥)은 하동사람인데 그의 누이로 인하여 원나라에 자주 왕래하였

다. 경효왕(敬孝王) 당시에 들어와 모시고 수시로 따르는 일에 노고가 있어 왕이

즉위하자마자 즉시 선발되어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이르렀고 일을 처리함에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 안염사(按廉使)가 되어 임지에 부임하고 세

도가를 만나서 수차례 볼기를 쳐서 여러 군에 조리돌려 보여 전 도민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는 본국사람으로 원나라에 있으면서 순제

(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고 아우 응

려(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세력에 의지하여 위세와 복록을 누리니

국인들이 그를 두려워 하였다. 불화가 향(香)을 내리려 본국에 이르러 가는 곳마

다 많은 존무사(存撫)나 안렴사(按廉)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들을 모욕하고 꾸

짖으니 위반하고 거스르지 않음이 없었다. 전주(全州)에 이르자 지상이 맞아들여

공손히 모셨으나 불화는 대접에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伴接使) 홍원철

(洪元哲)이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으나 지상이 들어주지 않자 원철이 불

화를 충동하여 노하게 하여 말하기를, “지상이 천자의 사자(天使)를 업신여긴

다.” 라고 하니 불화가 그를 옭아서 결박하였다. 지상이 분노하여 주(州)의 관리

(吏)에게 재빨리 크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국가가 이미 여러 기씨(奇氏)들을 주

살하고 다시는 원나라에 사대하지 않으며 재상(宰相) 김경직(金敬直)에게 명하여

원수(元帥)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따위 사자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너희 주(州)가 강

등되어 작은 현(縣)이 되는 것을 보겠느냐.” 라고 하였다. 읍의 관리들이 왁자지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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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하게 들어와 결박을 풀고 탈출을 도와주자 지상이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불화

와 원철 등을 잡아서 그들을 가두었다.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金牌)를 빼앗아

말을 달려 경성(京)으로 돌아오다가 공주(公州)를 통과하면서 응려(應呂)를 잡아

서 철추로 그를 치니 수일 만에 사망하였다. 지상이 와서 왕께 아뢰니 왕이 매

우 놀라 순군(巡軍)에 가두고 행성원외(行省員外) 정휘(鄭暉)에게 명하여 전주목

사 최영기(崔英起)와 읍의 관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車浦溫)을 파견하여 쌀

로 빚은 술을 가져가서 불화를 위로하고 그의 금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파견하여 와서 지상을 추국하였다. 왕이 여러 기씨

를 주살하고 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고 다시 호부시랑(戶部

侍郞), 어상중승(御使中丞)을 거쳐 관직이 판사(判事)에 이르러 돌아가셨는데 성

격이 엄하여 무릇 죽을 죄인을 죽일때에는 반드시 그를 파견하였다. 지상의 아

내(妻)는 담양(潭陽)에서 홀어미로 살다가 왜인(倭)에게 살해되고 아들은 박위

(朴葳)를 따라서 대마도(對馬島)를 타격하였다.

문대(文大)는 고종(高宗) 안효대왕(安孝大王) 18년에 낭장(郎將)으로서 서창현

(瑞昌縣)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포로가 되었다. 몽고병이 철산성(鐵山城) 아래에

이르러 문대에게 명하여 주(州)의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다. 빨리 나와

서 항복하는 것이 좋다.” 라고 소리쳐 알리게 하니 문대가 곧 외쳐 말하기를,

“가짜 몽고병이다. 항복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였다. 몽고인이 그를 참수하려

하다가 다시 시켜 외치게 하였으나 이전과 같이 되풀이하니 마침내 그를 참수하

였다. 몽고병이 성을 매우 급하게 공격하니 성안에 양식이 떨어져 지켜낼 수가

없었다. 장차 함락되려하자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모아 창고안에 들여보낸 뒤 그기에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인솔하고 스

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경효왕 12년 계묘년 3월에 밀직사 이강(李岡)이 명을 받들어 참성단에 제사올

리고 곧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바람불고 경치좋은 봄날에 만물은 풍성하고 해마다 꽃이 피네. 왕명을 받들고

먼 거리의 길을 와서 유람하네. 아침에 역마를 달려 제문(辭)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궁궐(鳳闕)을 하직하고 저녁에 배를 노저어 파도치는 흰 갈매기를 쫓네. 푸

른 창공 가운데 산은 색을 띄워 비취색이고 골짜기에 서기가 가득하고 싱싱한

화초는 스스로 꽃을 피우네. 봉래산(蓬萊)이 어느 곳인가 빌어 물으니 사람들은

이 땅이 곧 선인의 집(仙家)이라고 말하네.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로워 골이 선인(仙)이 되려 하였더니 사람의 일을

멀리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해지는구나. 마름 올리는 신비한 자리(秘席)는 중흥

이후이고 돌로 쌓은 영험한 단(靈壇)은 태고 이전이라. 이미 눈은 천리땅에 도달

고려국본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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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듯하니 이에 몸은 구중천(九重天)에 있는듯 하네. 이번 행차에 짝은 없으나

의탁함은 같으니 꼭 환도하던 첫해 같기만 하구나.’ 라고 하였다.

강릉왕(江陵王) 우(禑) 5년 신미년 3월에 명으로 사자를 보내어 참성단에서 극

진히 제사를 올렸다. 대제학 권근(權近)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첫번째 술잔을 올림(初獻). 바다 위에 산이 높아 인간세상의 번거로움과 근심

스러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이로다. 단의 중앙은 하늘에 가까워 가히 신선(仙)

이 말을 몰아 강림하심을 맞이하는 듯 하도다. 소박한 제수를 이렇게 진설하오

니 밝은 신(明神)께서 계시는 듯 합니다.

두 번째 술잔을 올림(二獻). 신은 미혹하지 아니하고 들으시사 이렇게 인간을

감싸주신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살피고 땅 아래에 내리어 비추어 주신다. 섬

김을 예로서 하니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게 되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리산(摩利山)은 단군께서 제사올린 곳이다. 성조(聖祖)로

부터 백성들을 위하여 극함(極)을 세우시고 옛것을 이어 실체를 전하도록 하였

다. 후왕(後王)에 이르러 북방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고 또한 여기에 의지

하여 근본을 보전하시었다. 고로 우리 조정이 이를 지켜 무너지지 않았고 짐(朕)

소자가 이를 계승하여 경건함을 더합니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부의 도적무리(外

寇)의 개들이 훔쳐서 우리 백성을 익은 물고기처럼 만드실 수 있습니까. 비록

먼 강역의 업신여김을 받았고 높이 받들고 나아가 표문(表)을 듣고 하물며 궁궐

과 읍성이 저들에게 침략당했는데 어찌 그렇게 참고 보기만 하십니까. 그 밝은

위엄의 증험이 없고 이 덕에 어긋나 좋은 일이 없는 것은 실로 허물을 다른데서

찾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에 그들의

업(業)에 안정되지 않으면 신께서 장차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에 옛전범(舊

典)을 준수하여 감히 당시의 환란을 고하고 낮추어 고요히 정성을 다하니 보배

로운 거울(寶鑑)을 밝게 밝혀주십시오. 바다에 명하여 파도를 거두게 하시고 배

에 올라 그 닻이 나아가는 이들을 크게 향유케 하소서. 하늘이시여, 거듭 명하여

사직의 안정된 반석에 빛이 내리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천수(天授) 기원 439년 경효왕 5년 이해 여름 4월 정유년에 기철(奇轍), 권겸

(權謙), 노책 등이 반역을 꾀하다 숨거나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

공으로 삼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때에 원나라 왕실

(元室)이 극히 쇠하여 피폐하게 되고 오나라 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이 강소(江

蘇)에서 일어나니 사태가 몹시 소란하였다. 최영(崔瑩) 등이 고우(高郵)로 부터

돌아오자 상(上)께서 비로소 영(瑩) 등의 의논에 따라 드디어 서북(西北)을 되찾

을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 이어서 인당(印璫), 최영 등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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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격하여 그곳을 부수고 또 류

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파견하여 쌍성(雙城) 등의 땅

을 수복하였다.

10년 겨울 10월에 홍건적(紅頭賊)의 반성(潘誠), 사유(沙劉), 주원장(朱元璋) 등

10만여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도둑질하고 11년에 도적들이 안주

(安州)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李蔭)과 조천주(趙天柱)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12월에 상께서 복주(福州)에 이르러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았

는데 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하였다. 파천(播遷)한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

하고 분하게 여겨 홍건적을 소탕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

로 삼으니 상 역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누차에 걸쳐 빨리 애통(哀痛)한

뜻을 담은 조칙을 내려 이로써 민심을 위무하시고 여러 도에 사자를 파견하여

이로서 징병을 독려하시라는 청을 올렸다. 상께서 마침내 조칙을 내리니 수문하

시중(守門下侍中) 이암이 전하며 말하기를, “천하가 안정되면 재상(相)에게 마음

이 쏠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장수(將)에게 마음이 쏠리는 법이다. 나는 문신으

로 약하여 군사를 움직일 수 없으니 그대가 그 일에 힘쓰길 바라오.” 라고 하였

다. 세운(世運)이 도당(都堂)에 이르러 분한 어조로 소리 높여 류숙(柳淑)에게 말

하기를, “군사 징집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장군이 가는데 암이 세운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강한 도둑떼들이 갑자기 들이

닥쳐 황성(皇城)에 이르도록 지키는 승기를 놓쳐 어가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

거리이자 삼한의 치욕이 되었으니 공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주창하고 의장과

무기를 가지고 군사들에게 가시오. 사직의 재차 안녕과 왕업의 중흥이 이 한번

의 거사에 달려있소.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

아오기를 바라겠소.” 라고 하였다. 힘써 달래어 그를 파견하고 매일같이 여러 장

수들을 독려하고 대의를 주창하고 모의를 도출하여 계책을 주니 안우(安祐), 이

순(李珣:개명 희열, 이암의 종질), 한방신(韓方信) 등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를

쫒아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년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千戶) 이두란(李豆蘭), 첩목아(帖木兒)가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파견하여 100호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윤 3월

을미년에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의 평장사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

이 요양이 본래 고구려 땅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 부속하고자 사람을 파견하여

와서 청하거늘 이때에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나라일이 몹시 어지러웠다.

그런 연유로 상께서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여 명(明)나라에 가서 촉(蜀)의 평

정을 축하하였다.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살해하니 조정과 민간

이 소란한 연유로 곳곳에서 사건들을 말하려는 자가 매우 적었다. 이러한 고로

고려국본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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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회보하지 못하니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

성(海城), 요양(遼陽) 등의 땅을 가지고 명나라에 부속하고 말았다. 오호라. 당시

퍼런 담론(淸論)의 무리들이 이 일에 맴돌기만 한 까닭으로 스스로 좋은 기회를

놓쳐 마침내 옛강토를 수복하지 못하였으니 지사(志士)의 한이 이에서 깊어지는

구나.

강릉왕(江陵王)이 선황제(先帝)의 명으로 즉위하니 이때에 요동의 도사(都司)

가 승차(承差)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이르러 방문(榜)을 널여 말

하기를, ‘철령(鐵嶺)의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開元)에 속하니 그 관할의

군인(軍人), 한인(漢人), 여진(女眞), 달달(達達), 고려(高麗)는 이에 요동에 속한

다.’ 라고 운운 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전쟁을

독려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병사(兵)와 말(馬)을 크게 징발하고 이

로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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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太白逸史) 발(跋)

세차 갑자년에 내가 괴산(槐山)으로 귀양을 가니 처지로는 마땅히 근신해야

하지만 자못 무료하였다. 이에 집에 소장한 것을 받아보고 상자(篋)를 여니 그기

에는 가히 역사를 전하는 자에게 근거가 될 것이 있었다. 그기에 평소에 여러

옛날 노인(古老)들로 부터 들은 것과 같이 함께 기록을 발췌하였으나 책을 만들

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 16년 경진년에 내가 찬수관(撰修官)으로써 자못 내각(內

閣)의 비서(秘書)들을 구하여 그것을 읽고 이에 앞서의 원고(前稿)를 다듬어서

그것을 다시 편찬하여 이름을 태백일사(太白逸史)이라고 하였다. 이러저런 연유

로 감히 세상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고 이를 비밀리에 소장하여 집 밖의 사

람들에게 내놓지 않게 되었다.

일십당(一十堂) 주인(主)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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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종(終)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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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록

지부경(地符經)

인부경(人符經)

참전계경(參佺戒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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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경(地符經)

십이 끝나고 십을 끝내는 것이 있다. 구를 정화하여 하나로 품으니 하나의 구

가 하얗게 넓어져 십을 움직이고 일신을 낳으니 나뉘어져 삼신으로 화한다.(十

終有終十靜九抱一一九白宏動十生一析化三)

세 천일은 오행을 꿰매고 일곱 지일은 사방을 꿰매고 여덟 인일은 육각을 꿰

매고 아홉 신구는 구성을 짊어진다.(三天一貫五七地一貫四八人一貫六九神龜

負九)

오극도는 일곱 지일과 여덟 인일의 근본이 되고 무리로 화하여 세 천일과 여

덟 인일로 나아간다.(五極圖本七八化衆行三八)

건곤을 배합하여 바르게 하고 구성과 육원과 육방과 육각을 이어서 통하게 하

면 크게 천으로 화한다.(政乾坤配合通約九六六六大化十)

십의 이치는 삼십 육궁과 십삼 월국의 기틀을 세우고 신인 백 팔십인이 십천

의 길로 나아가면 큰 신의 기틀이 쇠하여 다한다.(十理機三十六宮十三月國神人

百八十十行道大神機漏盡)

하나의 구가 넓어짐으로 인하여 십으로 화하고 십이 시작하고 십을 시작하는

것이 있다.(一九宏因化十十始有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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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경(人符經)

천지는 바른 사람 가운데의 큰 근본이다.(天地大本中正人) 천십지일, 지구천이,

천팔지삼, 지칠천사, 천육지오의 천지는 십의 태일에 합한다.(天十地一地九天二

天八地三地七天四天六地五天地合十一) 천지는 선천의 나반에 합하고 지천은

후천의 아만에 합한다.(天地合德人地天合道人)

천십지삼, 지구천사, 천팔지오, 지칠천육의 인지천은 십의 삼신(천지태일, 나만

과 아만)이 된다.(天十地三地九天四天八地五地七天六人地天十三) 천십지오,

지구천육, 천팔지칠의 십의 건인 하늘과 오의 곤인 땅은 십의 오신(나반과 아만,

마고와 궁희 및 소희)이 된다.(天十地五地九天六天八地七十乾天五坤地十五)

진정한 주조인 삼극의 삼신(천일, 지일, 태일)은 육에서 만나 이의 도가의 참

된 영으로 돌아온다.(眞主三極三神會六歸二道家眞靈) 크게 진귀한 성명정은 하

늘과 땅의 성명정과 하늘과 땅의 심기신과 감식촉에서 정해진다.(大寶性命精三

三六六定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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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參佺戒經)

강령(綱領)

태시에 철인(哲人)이 위에 계시사 인간 360여사를 주관하시니 그 강령에 8조

가 있었다. 이르기를 성(誠), 신(信), 애(愛), 제(濟), 화(禍), 복(福), 보(報), 응(應)

이니 이것을 참전계(參佺戒)라고 한다.

정성(誠)이란 참된 마음(衷心)에서 나오는 것이고 타고난 본성(血性)으로 지키

는 것이다. 6체(體) 41용(用)이 있다. 믿음(信)이란 천리(天理)와 반드시 합하고

인사(人事)가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다. 5단(團)과 5부(部)가 있다. 사랑(愛)이란

자비스러운 마음(慈心)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어진 성품(仁性)의 본바탕이다.

6범(範)과 43위(圍)가 있다. 구제(濟)란 덕(德)이 선(善)을 겸하는 것이고 도(道)

가 쌓여 파급되어 가는 것이다. 4규(規)와 32모(摸)가 있다.

재화(禍)란 악(惡)을 불러 오는 것이다. 6조(條)와 42목(目)이 있다. 복(福)이란

선(善)으로 얻어진 경사이다. 6문(門)과 45호(戶)가 있다. 보답(報)이란 천신(天

神)이 악한 사람(惡人)에게는 재화로 갚고, 선한 사람(善人)은 복으로 갚는 것이

다. 6계(階)와 30급(及)이 있다. 응함(應)이란 악(惡)은 악으로 보답을 받고, 선

(善)은 선으로 보답을 받는 것이다. 6과(果)와 36형(形)이 있다.

제1조 성(誠: 정성)

제1체 경신(敬神: 신을 공경함)

9용 존봉(尊奉: 높이 받듦), 숭덕(崇德: 덕을 높임), 도화(導化: 이끌어 냄), 창

도(彰道: 도를 밝힘), 극례(克禮: 극진한 제례), 숙정(肅靜: 엄숙하고 고요함), 정

실(淨室: 깨끗한 집), 택제(擇齊: 제사를 택함), 회향(懷香: 향을 마음에 둠)

제2체 정심(正心: 바른 마음)

9용 의식(意植: 뜻을 심음), 입신(立身: 몸을 세움), 불혹(不惑: 혹하지 않음),

일엄(溢嚴: 넘치도록 엄격함), 허령(虛靈: 허공과 신령), 치지(致知: 이르러 앎),

폐물(閉物: 사물을 닫음), 척정(斥情: 인정을 물리침), 묵안(黙安: 묵묵하고 편안

함)

제3체 불망(不忘: 잊지 않음)

6용 자임(自任: 스스로 맡음), 자기(自記: 스스로 적음), 첩응(貼膺: 가슴에 접

어 둠), 재목(在目: 눈에 있음), 뇌허(雷虛: 번개가 허공에 침), 신취(神聚: 신이

모임)

제4체 불식(不息: 쉬지 않음)

7용 면강(勉强: 힘써 강해 짐), 원전(圓轉: 원이 굴러 감), 체산(休算: 셈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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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실시(失始: 시작을 잃음), 진산(塵山: 티끌 산), 방운(放運: 운을 놓음), 만타

(慢他: 다른 것에 게을러 짐)

제5체 지감(至感: 감응에 이름)

9용 순천(順天: 하느님에 순응함), 응천(應天: 하느님에 감응함), 청천(聽天: 하

느님의 말씀을 들음), 낙천(樂天: 하느님을 즐겁게 함), 대천(待天: 하느님을 기대

함), 대천(戴天: 하느님을 모심), 도천(禱天: 하느님께 축원함), 시천(恃天: 하느님

을 믿음), 강천(講天: 하느님을 익힘)

제6체 대효(大孝: 극진한 효도)

7용 안충(安衷: 진심으로 편안하게 함), 쇄우(鎖憂: 근심을 막음), 순지(順志:

뜻을 따름), 양체(養體: 몸을 봉양함), 양구(養口: 구미에 맞게 대접함), 신명(迅

命: 빠르게 명을 행함), 망형(忘形: 모양새를 잊음)

제2조 신(信: 믿음)

제1단 의(義: 의로움)

9부 정직(正直: 바르고 정직함), 공렴(公廉: 공적으로 청렴함), 석절(惜節: 절개

를 중시함), 불이(不貳: 둘이 아님), 무친(無親: 고정 관념을 없앰), 사기(捨己: 자

기를 버림), 허광(虛誑: 속임을 비움), 불우(不尤: 탓하지 않음), 체담(替擔: 대신

맡음)

제2단 약(約: 약속)

10부 천실(賤實: 사실대로 행함), 지중(知中: 알아서 알맞게 함), 속단(續斷: 끊

어짐을 이음), 배망(俳忙: 바쁨을 물리침), 중시(重視: 거듭 살펴 봄), 천패(天敗:

하느님이 깨뜨림), 재아(在我: 나에게 있음), 촌적(忖適: 마땅함을 헤아림), 하회

(何悔: 뉘우침을 물음), 찰합(拶合: 마주쳐서 합의 함)

제3단 충(忠: 충성)

6부 패정(佩政: 정치에 마음을 둠), 담중(擔重: 중책을 맡음), 영명(榮命: 명을

영광스럽게 함), 안민(安民: 백성을 편안하게 함), 망가(忘家: 집을 잊음), 무신(無

身: 몸을 생각하지 않음)

제4단 열(烈: 열녀)

6부 빈우(賓遇: 귀빈으로 맞이함), 육친(育親: 부모를 봉양함), 사고(嗣孤: 아비

없음을 잊게 함), 고정(固貞: 굳은 정절), 닐구(昵仇: 배필을 가까이 함), 멸신(滅

身: 헌신함)

제5단 순(循: 순환)

4부 사시(四時: 봄, 여름, 가을, 겨울), 일월(日月: 양력과 음력), 덕망(德望: 덕

행과 인망), 무극(無極: 건극 없음)

제3조 애(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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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범 서(恕: 용서)

6위 유아(幼我: 나를 사랑함), 사시(似是: 옳은 듯이 함), 기오(旣誤: 잘못이 지

남), 장실(將失: 장차 실수함), 심적(心蹟: 마음의 행적), 유정(由情: 정에 따름)

제2범 용(容: 용납)

7위 고연(固然: 본래 그러함), 정외(情外: 정 외의 것), 면고(免故: 변고를 면

함), 전매(全昧: 완전히 무릅 씀), 반정(半程: 절반의 길), 안념(安念: 편안한 생

각), 완급(緩急: 느린 것과 급한 것)

제3범 시(施: 베품)

8위 원희(原喜: 원래 기쁨), 인간(認懇: 알고 정성껏 함), 긍발(矜發: 공경함이

나 불쌍함이 나옴), 공반(公頒: 공식적으로 반포함), 편허(偏許: 치우침을 나아

감), 균린(均憐: 골고루 어여삐 여김), 후박(厚薄: 후함과 박함), 부혼(付混: 붙여

서 덩어리 지음)

제4범 육(育: 가르쳐 기름)

8위 도업(導業: 업으로 인도함), 보산(保産: 산업을 가짐), 장근(獎勤: 부지런함

을 장려함), 경타(警墮: 떨어짐을 경계함), 정로(定老: 노인을 정함), 배유(倍幼:

어린이는 배가함), 권섬(權贍: 관이 도움), 관학(灌涸: 마른데 물을 댐)

제5범 교(敎: 가르침)

8위 고부(顧賦: 부여한 대로 돌아 감), 양성(養性: 성품을 기름), 수신(修身: 몸

수련), 주륜(湊倫: 윤리에 합함), 불기(不棄: 버리지 않음), 물택(勿澤: 가리지 않

음), 달면(達勉: 부지런히 도달함), 역수(力收: 힘써 거둠)

제6범 대(待: 기다림)

6위 미형(未形: 나타나지 않음), 생아(生芽: 싹이 남), 관수(寬遂: 너그럽게 나

아감), 온양(穩養: 온화하게 기름), 극종(克終: 마침을 극복함), 전탁(傳托: 이음과

밀침)

제4조 제(濟: 구제)

제1규 시(時: 때)

7모 농재(農災: 농사의 재앙), 양괴(凉怪: 서늘하고 괴이함), 열염(熱染: 더위

옮음), 동표(凍莩: 얼어 굶어 죽음), 무시(無時: 때 없이 함), 왕시(往時: 때가 지

나감), 장지(將至: 장차 이름)

제2규 지(地: 땅)

8모 무유(撫柔: 손 봐서 부드럽게 함), 해강(解剛: 굳음을 품), 비감(肥甘: 살찌

고 감미로움), 조습(操濕: 메마르고 습함) 이물(移物: 식물을 옮김), 역종(易種:

종자를 바꿈), 척벽(拓闢: 버려둔 땅을 개척함), 수산(水山: 물과 산)

제3규 서(序: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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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모 선원(先遠: 먼데를 먼저 함), 수빈(首濱: 제한 된 것을 앞에 둠), 경중(輕

重: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중과(衆寡: 무리를 모음), 합동(合同: 합쳐서 함께

함), 노약(老弱: 늙은이와 약한 이), 장건(壯健: 건강한 장사)

제4규 지(智: 지혜)

9모 설비(設備: 설치하고 비치함), 금벽(禁癖: 버릇을 금함), 요검(要儉: 검소함

을 요함), 정식(精食: 정갈한 음식), 윤자(潤資: 윤택한 물자), 개속(改俗: 속된 것

을 고침), 입본(立本: 근본을 세움), 수식(收殖: 거두어 붙임), 조기(造器: 그릇을

만듦), 예제(預劑: 미리 약 지음)

제5조 화(禍: 재앙)

제1조 기(欺: 속임)

10목 익심(匿心: 마음을 숨김), 만천(慢天: 하느님을 만만히 여김), 신독(信獨:

혼자 믿음), 멸친(蔑親: 친족을 버림), 구운(驅殞: 몰아서 죽임), 척경(踢傾: 차서

넘어뜨림), 가장(假章: 거짓으로 꾸밈), 무종(無終: 마침이 없음), 호은(怙恩: 은혜

를 지님), 시총(恃寵: 총애를 믿음)

제2조 탈(奪: 빼앗음)

6목 멸산(滅産: 산업을 없앰), 역사(易祀: 제사를 바꿈), 노금(擄金: 돈을 겁취

함), 모권(謨權: 권리를 꾀함), 투권(偸券: 문권을 도적질함), 취인(取人: 남의 것

을 절취함)

제3조 음(淫: 음란)

6목 황사(荒邪: 거칠고 사특함), 장주(狀本: 근본의 모양), 장자(藏子: 자식을

숨김), 유태(流胎: 태아를 보냄), 강륵(强勒: 강제로 억압함), 절종(絶鍾: 씨를 끊

음)

제4조 상(傷: 해침)

7목 흉기(凶器: 사나운 도구), 짐독(鴆毒: 독한 독), 간계(奸計: 간사한 꾀), 최

잔(摧殘: 꺾어서 해함), 필도(必圖: 필사적인 꾀함), 위사(委唆: 맡겨서 사주함),

흉모(兇謀: 흉칙한 모의)

제5조 음(陰: 몰래함)

8목 흑전(黑箭: 검은 화살), 귀염(鬼焰: 귀염 불), 투현(妬賢: 어진 이를 투기

함), 질능(嫉能: 능한 이를 시기함), 간륜(間倫: 인륜을 이간함), 투질(投質: 문서

질), 송절(送絶: 보내고 끊음), 비산(誹言+山: 흉보고 꾸짖음)

제6조 역(逆: 거스름)

5목 설신(褻神: 신을 만만히 함), 독례(瀆禮: 제례를 모독함), 패리(敗理: 도리

를 무너뜨림), 범상(犯上: 위를 침범함), 역후(逆言+后: 거스름을 분개하지 않음)

제6조 복(福: 복)

- 142 -

제1문 인(仁: 어짐)

7호 애인(愛人: 사람을 사랑함), 호물(護物: 물건을 지킴), 체측(替惻: 대신 아

파함), 희구(喜救: 기쁘게 구제함), 불교(不驕: 교만하지 않음), 자겸(自謙: 스스로

겸손함), 양열(讓劣: 못난 것에 겸양함)

제2문 선(善: 착함)

9호 강개(慷慨: 강개함), 불구(不苟: 빠뜨리지 않음), 원혐(遠嫌: 혐오를 멀리

함), 명백(明白: 명백히 함), 계물(繼物: 물건을 이음), 존물(存物: 물건을 보존함),

공아(空我: 나를 비움), 양능(揚能: 능함을 떨침), 은건(隱愆: 허물을 숨김)

제3문 순(順: 정도를 벗어나지 않음)

6호 안정(安定: 안정됨), 정묵(靜黙: 고요하고 묵묵함), 예모(禮貌: 예의 있는

행동), 주공(主恭: 주인에게 공손함), 지념(持念: 생각을 지님), 지분(知分: 분수를

앎)

제4문 화(和: 온화함)

8호 수덕(修德: 덕을 닦음), 준계(遵戒: 계율을 지킴), 온지(溫至: 따뜻함에 이

름), 물의(勿疑: 의심하지 않음), 성사(省事: 일을 살핌), 진노(鎭怒: 화를 진정함),

자취(自就: 스스로 이룸), 불모(不謀: 모의하지 않음)

제5문 관(寬: 너그러움)

8호 홍량(弘量: 넓은 도량), 불린(不吝: 인색하지 않음), 위비(慰悲: 슬픔을 위

로함), 보궁(保窮: 궁함을 도움), 용부(勇赴: 용감함에 다다름), 정선(正旋: 바르게

돌이킴), 능인(能忍: 능히 참음), 장가(臧呵: 꾸지람을 덮어 줌)

제6문 엄(嚴: 위엄)

7호 병사(屛邪: 간사함을 물리침), 특절(特節: 뛰어난 절개), 명찰(明察: 밝은

고찰), 강유(剛柔: 강함과 부드러움), 색장(色莊: 색이 단아함), 능훈(能訓: 능히

가르침), 급거(急祛: 급히 물리침)

제7조 보(報: 보답)

제1계 적(積: 쌓음)

6급 세구(世久: 오랜 세대), 무단(無斷: 끊김이 없음), 익증(益增: 거듭 더함),

정원(庭授: 가정을 지원함), 천심(天心: 타고난 마음), 자연(自然: 저절로 그러함)

제2계 중(重: 중함)

6급 유조(有早: 먼저 함이 있음), 공실(恐失: 잃을까 걱정함), 면려(勉勵: 힘써

다잡음), 주수(株守: 뿌리를 지킴), 척방(斥謗: 비방을 물리침), 광포(廣佈: 널리

폄)

제3계 창(刱: 시작함)

6급 유구(有久: 오래 있음), 유린(有隣: 이웃이 있음), 기연(其然: 그것이 되어

- 143 -

감), 자수(自修: 스스로 닦음), 불권(不捲: 강권하지 않음), 욕급(欲及: 욕심이 미

침)

제4계 영(盈: 가득함)

4급 습범(襲犯: 더하여 범함), 연속(連續: 연속함), 유가(有加: 가중함), 전악(傳

惡: 나쁜 것을 옮김)

제5계 대(大: 큼)

4급 감상(戡尙: 죽이는 것을 숭상함), 무탄(無憚: 두려움이 없음), 취준(驟畯:

농부를 몰아 부침), 외선(外善: 겉으로 선함)

제6계 소(小: 작음)

4급 배성(背性: 성씨를 등짐), 단연(斷連: 연속성을 끊음), 불개(不改: 고치지

않음), 권린(勸隣: 이웃을 권함)

제8조 응(應: 응함)

제1과 적(積: 쌓음)

8형 극존(極尊: 지위가 매우 높음), 거유(巨有: 아주 많이 가짐), 상수(上壽: 오

래 삶), 제손(諸孫: 여러 자손), 강녕(康寧: 건강하고 안녕함), 선안(仙安: 신선처

럼 편안함), 세습(世襲: 대대로 물려줌), 혈사(血祀: 희생으로 제사함)

제2과 중(重: 중함)

7형 복중(福重: 복이 중함), 옥백(玉帛: 옥과 비단), 절화(節化: 절개), 현예(賢

裔: 현명한 자손), 건왕(健旺: 건강하고 왕성함), 길경(吉慶: 길한 경사), 세장(世

章: 대대로 빛남)

제3과 담(淡: 욕심 없이 편안함)

5형 응복(應福: 복에 응함), 유고(裕庫: 넉넉한 창고), 무액(無厄: 재액이 없음),

이수(移隨: 옮기고 따름), 천권(天捲: 하느님이 힘씀)

제4과 영(盈: 가득함)

5형 뇌진(雷震: 우뢰와 지진), 귀갈(鬼喝: 귀신 성내는 소리), 멸가(滅家: 집안

이 멸망함), 절사(絶祀: 제사가 끊어짐), 실시(失屍: 시신을 잃음)

제5과 대(大: 큼)

8형 인병(刃兵: 칼 가진 병사), 수화(水火: 물과 물), 도적(盜賊: 도적), 수해(獸

害: 짐승의 해함), 형역(形役: 형편의 어려움), 천라(天羅: 하늘의 그물), 지강(地

網: 땅의 벼리), 급신(及身: 몸에 미침)

제6과 소(小: 작음)

6형 빈궁(貧窮: 가난하고 궁함), 질병(疾病: 병이 남), 패망(敗亡: 패해서 망함),

미실(靡室: 집이 없음), 도개(道丐: 길에서 빌어 먹음), 급자(及子: 자식에 미침)

- 144 -

저작권(Copyright)

제목 : 환단고기(桓檀古記)

저자 : 안함로, 원동중, 이암, 범장, 이맥 편찬, 계연수 합본, 이기 감수

해석 : 김호영(대학강사 역임, 대한역사문화문명연구소 소장)

작성전송일 : 2010. 8. 15.(2011. 5. 15. 2012. 3. 30. 2013. 10. 13. 일부 수정)

연락처 : drkimhy@naver.com

출판사 : 신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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