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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29] 대진(大震)-신라(新羅) 남북국 시대 역사 개관

양해천 2018. 1. 23. 13:04

[홍익인간 329] 대진(大震)-신라(新羅) 남북국 시대 역사 개관

2012년 05월 26일 (토) 13:58:02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서기668년에 고구려 보장제(寶藏帝)가 나당(羅唐)연합군의 평양성 침략으로 항복을 하자, 고구려의 장군이던 대중상이 후고구려라 칭하며 동모산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의 부흥을 꾀하였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였으나 당나라가 신라 땅까지 욕심을 내고 있는 속셈을 알아차리고 ,서기676년에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함께 당군을 모두 몰아내고서 서기702년까지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한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시키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나라가 애초에 협약한 땅을 넘어서서 고구려 땅은 물론 백제 땅까지 욕심을 내므로, 이에 신라가 당나라와의 국교단절을 감행한 것이 된다. 

신라는 고구려 땅을 거의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삼한일통이 아니었고, 북쪽에는 곧바로 고구려의 계승국인 대진국이 건국되어 우리 역사상 제1차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1. 대진국(大震國) 역사 개관 

가. 건국 

대진국은 서기668년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인 대중상(大仲象)이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한 데서 시작된다. 

서기668년 9월 21일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자, 고구려의 장군 대중상(大仲象)은 서압록하(西鴨綠河)를 지키다가 변고를 듣고서, 무리를 이끌고 동모산(東麰山)에 이르러 웅거하여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였다. 대중상의 시호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世祖)이다. 

서기699년 5월에 태자 대조영이 즉위하여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홀한성(忽汗城)을 축조하여 이곳에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만을 모집하여 위세가 크게 떨치었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6,000리가 개척되었으며,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대진국의 실질적인 건국 시조는 대중상이며, 대조영은 태자로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진으로 칭하였던 것이 된다. 

나. 과정 

대조영 고황제는 서기714년에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찬(讚)하고, 자완대부(紫緩大夫) 선조성(宣詔省) 좌평장사(左平章事) 겸 문적원(文籍院)의 감(監)이던 임아상(任雅相)이 명을 받들어 삼일신고주해(三一神誥注解)를 지었으며, 서기715년에는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 서문(序文)을 썼다. 

고황제의 아우인 대야발은 돌궐(突厥)을 13년간 답사하는 등 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과, 한씨(桓氏)의 번조선(番朝鮮)인 소위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역사를 엮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지었다. 

서기719년에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켰는데,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의 서쪽과 북쪽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또, 대장 장문휴(張文休)가 산동지역의 등주(登州)와 동래(東萊)를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서기720년에 수비장수 연충린(淵忠麟)이 요서(遼西)의 대산(帶山)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이후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동남(東南)의 여러 군(郡)과 읍(邑)을 급습하였으나, 제2대 무황제(武皇帝)가 군사를 보내어 이를 격파하였으며, 이어 추격하여 하서(河西)의 이하(泥河)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였는 바, 지금의 강릉(江陵)의 북이하(北泥河)이다. 해주(海州) 암연현(岩淵縣)은 동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瓮津)이다. 이리하여 신라와는 지금의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 강릉에 걸치는 지역을 국경으로 삼은 것이 된다. 

서기735년에 송막(松漠) 12성과 요서(遼西) 6성을 축조하고,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원폭 9,000리의 영토를 가진 성대한 나라가 되었다. 이때 대진국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었다. 송막은 요서의 동쪽으로서 요동지역이 된다. 즉, 지금의 난하 서쪽에 요서 6성이 있었던 것이 되고, 난하의 동쪽에 송막 12성이 있었던 것이 된다. 지금의 발해, 발해만은 대진국 시대에 대진국이 그 유역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겨진 것이 된다. 

서기738년에 제3대 문황제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가르치며, 한단고사(桓檀古史)를 강론하고, 또 문사(文士)에 명하여 국사(國史) 125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739년 3월 15일에 제3대 문황제가 서기714년에 대조영 고황제가 찬하였던 삼일신고를 태백산(백두산) 보본단(報本壇) 석실(石室)로 옮겨 봉장(奉藏)하였다. 

서기781년에 고구려 출신으로서 치청(淄靑) 절도사(節度使)이던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군(唐軍)에 항거하니,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서기820년경에는 제10대 선황제(宣皇帝)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의 7주를 두었다. 대체적으로 이때 신라와의 국경은 서해안 쪽의 옹진에 있는 해주(海州)의 이남으로 하여 동쪽으로 철원의 남쪽 지역을 거쳐 동해안의 강원도 강릉 부근에 이르는 지역이 된다. 서기720년경의 국경선과 유사한데, 아마도 서기820년 이전에 신라가 북상하였던 것이고, 서기820년경에 대진국이 다시 신라를 정벌한 것이 된다. 

서기907년경에 거란이 크게 일어나 위협하자 신라와 힘을 합쳐 거란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신라가 거절하였다. 

다. 수도 

대진국은 수도를 다섯군데 즉 5경(京)을 두었는데, 상경(上京) 용천부, 동경(東京) 용원부, 서경(西京) 압록부, 중경(中京) 현덕부, 남경(南京) 남해부이다. 주로 상경, 동경, 중경을 수도로 삼았다. 이 5경제도는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오덕지(五德地)의 5경(京) 제도를 본딴 것이 된다. 

동경은 혼춘(琿春) 자리이고, 중경은 화룡이며, 남경은 함경도의 함흥이고, 상경은 동모산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북경(北京)이 된다. 서경은 서안평(西安平)으로서 거란(遼)의 초기 수도이던 임황(臨潢)이며 황수(潢水) 유역이자 소요수(小遼水)이던 청수하(淸水河) 상류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난하의 최상류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된다. 

서기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곧바로 대중상(大仲象)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世祖)가 동모산(東麰山)을 수도로 삼았다. 동모산은 중경이 있는 현덕부에 위치한다. 

서기699년에 대조영 고황제(高皇帝)가 홀한성(忽汗城:상경 용천부)을 수도로 삼았다. 

이후 수도를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로 옮겼다. 

서기737년에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로부터 다시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로 옮겼고, 서기742년에 중경 현덕부로 옮겼으며, 서기755년에 상경 용천부로 옮겼고, 서기786년 동경(東京) 용원부로 옮겼으며, 서기794년에 제6대 성황제(成皇帝)가 수도를 상경(上京) 용천부로 다시 옮겼다. 이로써 대진국은 수도를 동모산으로부터 7번 이상 천도한 것이 된다. 

라. 역년 

서기925년 겨울 12월에 거란(遼)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였다. 

서기926년, 청태(淸泰) 26년 봄 정월에 거란(契丹)의 야율배(耶律倍)는 아우 요골(堯骨)과 선봉이 되어 대진국 군사 3만명을 격파하고, 밤에 홀한성(忽汗城:상경 용천부)을 포위하자, 임금(哀帝)께서 성 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의 역사가 끝났다. 

이로써 대진국의 역사는 서기668년부터 서기926년까지 폐위된 원의(元義)까지 합하면 16대 259년이다. 

이후 대진국의 역사는 거란의 요(堯)와 고려(高麗)의 역사로 이어지는데, 그러나 거란에 대하여는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면서 끝까지 항거하였던 것이고, 여진의 금(金)나라가 발해와 여진은 같은 집안이라 하여 진정시키고 역사를 이었던 것이 된다. 


2. 신라 후기 역사 개관 

제30대 문무왕(661~681)은 서기676년 당군을 몰아내었다. 초기 국토가 북경(北京)에서 동쪽으로 이어졌다. 이에 서기676년부터 서기702년까지 당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신라는 서기685년에 땅을 나누어 9주 5소경, 9서당 10정을 설치하였다. 

이후 북쪽의 대진국과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였다가 서기720년경부터는 황해도의 옹진에서 철원을 거쳐 강원도의 강릉을 있는 지역을 국경으로 하였던 것이 된다. 

설총이 서기700년경에 이두를 집대성하고, 화왕계를 지었으며, 서기727년에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을 지었고, 서기740년경에 김대문이 계림잡전,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악본 등을 지었다. 

서기750년에 석가탑 다라니경이 완성되었고, 서기751년에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립하였다. 

제망매가, 도솔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관음가 등의 향가가 서기757년경에 지어졌는데. 서기888년에 김위홍과 대구화상이 왕명으로 향가집 삼대목을 완성하였다. 

서기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는데 김균정과 아들 김우징 등이 이를 평정하였다. 

또 서기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기828년에 장보고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였는데, 서기846년 봄에 장보고가 난을 일으켰다가, 염장이 문성왕의 명을 받아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를 속여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살해하였으며, 서기851년에 청해진을 폐지하였다. 

이렇게 신라말기에 이르러 민란이 일어나고 반란이 일어났으며, 서기891년에는 궁예가 약 30세의 나이로 도적 기훤을 찾아갔다가 북원의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견훤은 서기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서기894년에 궁예가 명주(강릉)를 점령하고, 서기895년에는 강원도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송악의 대호족인 왕륭과 왕건 부자는 궁예의 부하가 되어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로, 왕건을 부하 장수로 삼았다. 이에 서기899년에 궁예는 신라의 북부지역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서기901년에 궁예가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때 궁예는 약40세였다. 서기904년에 궁예가 청주의 민가 1천여호를 철원성으로 옮기게 하고 수도를 철원으로 정하였으며,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이라 하였고, 남쪽으로 사벌주(상주)와 북쪽으로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서기911년에 궁예가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正開)라 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혼란기에 서기911년경 박문현(朴文鉉:810~?) 선생이 효공왕의 왕위 계승에 분쟁이 있으므로 100세의 고령으로 국중에 발언하여, 신라가 나라를 세운 이유를 단군조선의 제도를 계승함에 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서기918년 6월에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로 즉위하고, 궁예의 왕궁으로 쳐들어갔는데, 이때 궁예는 변장을 하고 왕궁을 빠져 나갔다가, 분노한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이에 왕건이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서기926년 1월에 대진국(大震國)이 거란(契丹, 遼)에 망하였는데, 북쪽에서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자 기꺼이 받아 들였다. 

서기927년에 경애왕이 경주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견훤의 군사가 들이닥쳐 경애왕이 도망하였다가 붙잡혀 견훤의 명으로 자결하였으며,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즉위시켰다. 

서기927년에 고려가 후백제를 치자 신라는 군사를 보내어 도왔는데, 공산(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의 장수를 잃고 간신히 도망하였다. 

서기931년 봄에 고려 왕건이 기병 50여명을 이끌고 경기 땅에 이르자 경순왕이 영접하였으며, 수십일간을 머물다 경순왕의 사촌동생 유렴을 볼모로 데려갔다. 

서기934년에 신라의 30여개성이 고려에 항복하였고, 후백제 견훤왕은 맏이 신검을 제쳐두고 넷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 신검(神劍)이 막내인 금강(金剛)을 죽였는데, 이해에 견훤왕이 고려에 투항하였고 태조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로 삼았다. 

서기935년에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려 하자, 이에 태자는 홀로 항복을 반대하고, 궁을 떠나 개골산에서 평생 삼베옷을 입고 살아 마의태자라 불렸는데, 결국 경순왕이 왕건 태조를 찾아가 항복하였고, 이에 태조 왕건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어 사위로 삼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내렸다. 

이리하여 신라는 서기전57년부터 서기935년까지 56대 992년이다. 서기전57년부터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가 당군을 완전히 몰아낸 서기676년까지를 전기, 서기676년부터 서기935년까지를 후기로 나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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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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