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327] 사국시대 왜(倭) 연대기 1
2012년 05월 25일 (금) 06:22:30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사국시대에 있었던 왜(倭)는 제10대 숭신왕(崇神王) 이후가 된다.
특히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근초고왕의 역사기록을 120년 앞당겨 서기200년대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역사로 만드는 날조를 일삼고 있다.
1. 제10대 숭신왕(崇神王) : 서기전97년~서기전30년(68년)
서기전50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2. 제11대 수인왕(垂仁王) : 서기전29년~서기70년(99년)
서기전5년 3월에 왜희명(倭姬命)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祠堂)을 이세(伊勢)에 세웠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이 곧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곳이다.
서기14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서기59년에 신라와 우호를 맺엇다.
3. 제12대 경행왕(景行王) : 서기71년~서기130년(60년)
서기73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서기121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서기123년에 신라와 강화하였다.
4. 제13대 성무왕(成務王) : 서기131년~서기169년(39년)
일본서기에서는 성무왕의 재위기간이 서기131년부터 서기190년까지 60년이라 기록하고 있고, 중애왕이 서기192년부터 서기200년까지 9년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신공왕후가 서기179년부터 서기247년까지 69년간 섭정을 한 것이 되며, 이에 중애왕은 서기170년부터 서기178년까지 9년 재위한 것이 되는 바, 성무왕의 69년간의 재위기간은 실제로는 서기131년부터 서기169년까지 39년이 된다.
서기158년에 신라와 수교하였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성무왕 시대라 하는 서기169년부터 서기190년까지 사이에 서기178년에 태자를 봉하였다는 사실 외에는 특이한 기록이 없다.
5. 제14대 중애왕(仲哀王) : 서기170년~서기178년(9년)
일본서기에서는 중애왕을 서기전192년부터 서기200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기170년부터 서기178년까지 9년 재위한 것이 된다.
서기173년에 섭정 왕후 신공(비미호)가 신라와 수교하였다. 세오녀는 왜로 건너가서 왜 중애왕(170~178:9년간)의 왕후가 되었으며, 중애왕이 병중에 섭정을 하니 여왕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고, 중애왕이 죽자 서기179년부터 여왕이 된 것인데, 일본서기에서는 비미호인 세오녀를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 신공왕후(神功王后:179~247:69년간)라 적고 있는 것이 된다.
6. 제15대 신공왕후(神功王后:卑彌呼) : 서기179년~서기247년(69년)
신공왕후는 비미호(卑彌呼)라고도 기록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서기201년부터 서기269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기179년부터 서기247년까지 69년 섭정한 것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신공왕후의 시대에 신공왕후가 신라(新羅)를 정벌(征伐)하였으며,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조공받았다는 식으로 하여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서기346년~서기375년)시대의 칠지도(七支刀) 역사를 포함시켜 백제의 실제역사를 약120년 앞당겨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공왕후의 업적과 관련시킨 기록들은 신공왕후의 역사를 터무니 없이 과장날조한 것에 불과하다.
서기193년에 왜(倭)에 기근이 들어 신라에 구걸하였다.
서기208년에 왜(倭)가 침입하였다. 왜왕 비미호(신공왕후) 시절에 왜가 신라를 침입한 것은 사실이 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이를 과장하여 백제 근초고왕(346~375) 시대의 역사를 120년을 앞당겨 신공왕후의 역사에까지 편입하여 백제와 신라까지 호령하였던 것으로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서기232년에 신라를 침공였다.
서기233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가 신라의 대장군 석우로에게 패하였다.
서기239년 6월에 조씨(曹氏)의 위(魏)나라에 조공하였다.
서기247년에 구노국(拘奴國)과 불화가 있어 전쟁하다 죽자 남자가 왕이 되었으나 정세가 불안하여 곧 종녀인 대여(臺與)가 13세에 여왕으로 앉혀졌다.
7. 제16대 대여왕(臺與王) : 서기248년~서기269년(22년)
일본서기에서는 대여왕이 존재하지 않고 대여왕의 재위기간이 신공왕후의 재위기간에 포함되어 있으나, 실제로 신공왕후의 종녀(宗女: 宗室의 여자)인 대여(臺與)가 서기248년에 13세에 왕으로 즉위하여 서기269년까지 다스린 것이 된다.
서기249년 왜인(倭人)이 신라의 장수 석우로(昔于老)를 죽였다. 이에 금관가야에서 구원병을 보내어 왜인(倭人) 200명을 참수하였다.
서기269년에 서기179년부터 시작된 2대에 걸친 여왕의 시대가 끝나고, 서기270년에 다시 남자인 응신(應神)이 왕이 되었던 것이다.
8. 제17대 응신왕(應神王) : 서기270년~서기310년(41년)
서기287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서기292년에 신라를 침공하였다.
서기294년에 신라를 침입하였다.
서기295년에 신라가 왜를 정벌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서기312년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9. 제18대 인덕왕(仁德王) : 서기313년~서기399년(87년)
서기344년에 신라가 왜(倭)와 통혼을 거절하였다.
서기345년에 신라가 왜(倭)에 글을 보내어 국교를 단절하였다.
서기346년에 신라를 침입하였다.
서기364년에 신라를 침입하였다.
서기391년 신묘년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므로 패하였다.
이 사실은 광개토황비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문의 문장에서 생략된 주어로서의 주체는 고구려이므로, 바다를 건너 격파하였다는 주체는 곧 고구려가 되는 것이다.
서기393년에 신라를 침입하였다.
서기396년 (丙申年)에 고구려 광개토황이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국의 군대를 토벌하여 일팔성(당팔성?) 등 58개성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이 사실은 광개토황비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397년에 백제가 왜(倭)에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지(琠支)를 볼모로 보냈다.
서기399년에 왜(倭)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황에게 맹서한 서약을 위배하여 왜(倭)와 화통하니, 광개토황이 남쪽의 평양성으로 순행할 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간청하자 군사를 내게 윤허하였다.
10. 제19대 이중왕(履中王: 贊) : 서기400년~서기405년(6년)
서기400년에 고구려 광개토호태황이 왜, 백제, 가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하였다. 즉, 광개토황이 교서(敎書)로 보기(步騎)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게 하니, 남거성(南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까지 왜인들이 그 안에 넘쳤는데, 고구려의 관병이 이르자 왜적들이 물러가고, 고구려 관병(官兵)들이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은 즉시 항복하였으며, 안라인 수병은 신라성을 빼앗고 도성(都城)에는 왜인들이 넘쳤으나, 왜인들이 성을 무너뜨린 채 고구려의 공격을 크게 당하여 괴멸되어 남김이 없게 되니, 왜는 항복하거나 죽은 자가 10중 8~9였으며, 모두 신복하였다. 안라인 수병이 훼기탄(喙己呑)과 탁순(卓淳)의 모든 적들과 거병을 모의하니, 고구려의 관병이 먼저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취하고 좌군(左軍)은 담로도(淡路島)를 거쳐 단마(但馬)에 이르고, 우군(右軍)은 난파(難波)를 거쳐 무장(武藏)에 이르렀으며, 광개토황은 곧바로 축사(竺斯)를 건너니, 모두 스스로 무너지고 나뉘어져 고구려의 군국(郡國)이 되었다.
이 사실은 광개토황비의 비문에 기록된 것인데, 고구려가 지금의 일본 땅인 구주(큐슈)와 본주(혼슈)를 정복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안라인 수병은 축사가 있는 지금의 구주에서 고구려에게 정복되었으며, 담로도는 본주와 사국(시코쿠) 사이에 있는 섬이고, 단마와 난파 및 무장은 본주에 있는 지명이다.
서기402년에 신라가 왜와 통교하였다. 신라는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인질로 잡혔다.
서기403년에 왜의 사신이 백제에 갔다.
서기404년 갑진년에 왜가 고구려 대방의 경계를 침입하여 변민을 불사르고 약탈하고, 석성(石城)의 도련(島連)으로부터 배들로 바다를 덮듯이 이르자, 고구려 광개토황이 평양의 군사를 보내어 왕당의 군사와 서로 만나게 하여 공격하니, 격파당하고 무수히 참살 되었다. 이 사실도 광개토황비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405년에 신라를 침입하였다. 백제가 한학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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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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