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40] 고려(高麗) 연대기 2

양해천 2018. 1. 23. 13:12

[홍익인간 340] 고려(高麗) 연대기 2

2012년 06월 04일 (월) 06:53:46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4. 제4대 광종(光宗:서기949년~서기975년) 

서기949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하였다. 

또, 연호를 준풍(峻豊)이라고 하였다.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라 하였다. 개경은 송악이며 서경은 평양이다. 

서기951년에 후주의 세력이 커지자 후주의 연호를 쓰게 하였다. 
사신으로 온 후주 사람 쌍기를 귀화시켜 벼슬을 주었다. 

서기956년에 쌍기의 건의로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였다. 

서기958년에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서기960년에 관복을 제정하였다.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을 역모로 귀양보내고, 정종의 아들인 홍화군과 경춘원군도 역모로 처형시켰다. 

광종이 신하들에게 금술잔을 하사하자 서필이 간언하였다. 

광종이 후주에서 온 학자들에게 주려고 신하들의 집을 빼앗으니, 서필이 간하여 중지케 하였다. 

서필이 죽자 광종이 몹시 슬퍼하였다. 

후주가 망하고 송나라가 크게 일어나자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종은 법회를 자주 열었으며, 배고픈 백성들을 위하여 길거리에 무료급식소를 만들었다. 

서기975년에 51세로 붕하였다. 광종은 서기925년생이 된다. 

5. 제5대 경종(景宗:서기976년~서기981년) 

광종의 태자 주가 즉위하였다. 

경종은 광종 때의 감옥을 헐고 신하들이 서로 참소한 글을 불태우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호족 출신의 왕선이 집정(재상)에 임명되어, 복수법을 만들어 태조 왕건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원녕태자를 죽이고 과거를 통해 관리로 등용된 자들이 희생당하였다. 이에 경종은 왕선을 귀양보냈다. 

집정제를 좌우집정제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서기976년에 토지를 국유로 하여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는 전시과를 시행하였다. 

점을 치고 꿈 해몽을 잘하는 최지몽을 내의령에 임명하였다. 이에 왕승 등이 역모로 처형되었다. 

서기981년에 경종이 27세로 붕하였다. 


6. 제6대 성종(成宗) 문의대왕(文懿大王:서기981년~서기997년) 

개령군 치가 22세로 즉위하였다. 

서기982년에 최승로가 시무28조를 올렸다. 
1. 불교를 억제하며, 승려들의 행패를 막하야 한다. 
2.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3. 중국의 제도를 무조건 따르지 말아야 한다. 
4. 궁중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 
5. 신분의 차별을 엄격히 하고 유교를 일으켜야 한다. 등 

서기983년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다. 3성 6부 7시를 실시하였다. 

서기987년에 노비환천법을 실시하였다. 

서기990년에 서경에 수서원을 설치하였다. 

서기991년에 중추원을 설치하였다. 

서기992년에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거란의 제1차 침입> 
서기993년에 12목에 상평창을 설치하였다. 5월과 8월에 여진이 고려에 거란이 침입할 것이니 대비하라 전하였으나, 고려는 대비하지 않았다. 10월에 요(遼, 거란)가 제1차 침입을 하였다. 

이때 거란의 왕도 성종(聖宗)이며 소손녕(蕭遜寧)에게 80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략하여, 봉산(蓬山)을 격파하고 고려의 선봉을 몰아부쳤다. 이때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으로 출동하였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서희가 성종에게 화친하라 청하였다. 

고려의 성종은 거란과 화친하기 위하여 이몽전을 소손녕에게 보냈다. 이에 소손녕은 고려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항복하라 서신을 보냈다. 

이에 고려의 성종 문의대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이떤 이는 항복을 하자 하고, 어떤 이는 땅을 잘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였는데, 중군(中軍)의 서희(徐熙)만이 홀로 말하였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西京) 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御駕)를 돌려 도성(都城)으로 돌아가시고 신(臣)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이지백이 서희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소손녕은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대도수와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하였다. 

성종은 다시 장영을 소손녕에게 보냈으나, 소손녕이 중요인물을 보내라 하여, 이에 서희가 나섰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상견(相見)의 예를 청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大朝)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 

하였고, 이에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이에 소손녕이 다시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東京)이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진을 쫓아 우리 옛 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지 않을 것인가!” 

하니, 이에 소손녕은 강변함이 쓸모없음을 알고서 거란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를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서희를 위로한 뒤,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고 서희를 송별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거란은 고구려의 영토를 가지고 있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내세운 것이 되는데, 이에 대하여 고려의 서희가 고려가 국호에서부터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고, 그래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고려의 도읍지(西京)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하므로 거란의 동경(東京)이 오히려 고려의 땅이라고 설파하니, 이에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인정한 꼴이 되어 군사를 물렸던 것이 된다. 

서기994년에 서희는 성종의 명으로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6성을 쌓았다. 

서기995년에 10도제를 실시하였다. 

서기996년에 건원중보를 주조하였다. 

서기997년에 성종이 38세로 붕하였다. 이에 경종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송이 18세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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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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