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52] 고려(高麗) 연대기 14

양해천 2018. 1. 23. 13:22

[홍익인간 352] 고려(高麗) 연대기 14

2012년 06월 16일 (토) 08:23:26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홍건적 제1차 침입> 
서기1359년에 홍건적(홍두적)의 난이 일어났다(1359~1361). 홍건적이 요동을 정벌하고 송나라를 세우자 이에 원나라가 총공격을 하였고, 이때 홍건적은 세 갈래로 나누어 도망하였는데, 모거경이 이끄는 4만명의 홍건적이 고려로 침입하였던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온 홍건적이 철주, 서경 등지를 함락시키자, 공민왕은 2만여 군사를 동원하여 홍건적을 압록강 너머로 축출하였다. 

<홍건적 제2차 침입> 
서기1361년, 경효왕 10년 겨울 10월에, 홍두적(紅頭賊)인 번성(藩誠), 사유(沙劉), 주원장(朱元璋) 등 10만의 무리가 2차 침입을 하여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침략해 왔다. 개경을 함락시키고 궁궐을 완전히 불태웠다. 이때 홍건적을 소탕하는 데 이성계의 활약이 컸다. 

서기1362년 홍두적은 안주(安州)를 습격하니 상장군(上將軍) 이음(李蔭)과 조천주(趙天柱)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겨울 12월에 임금께서는 복주(福州:안동)에 이르러 정세운(鄭世雲)으로 총병관(總兵官)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播遷) 이래 낮밤으로 울분하며 우려하여 홍두적을 소탕하여 경성(京城)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임금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정세운은 종종 임금께 고하여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고 사신을 각 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임금께서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李嵒)이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 군에 몸 담지는 못한다. 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라!”하였다. 

이에 정세운은 도당(都堂)을 뵙고 분개하는 말로 소리를 높여 유숙(柳淑)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라고 하였다. 이때 막 떠나려는 정세운에게 이암 선생이 말하기를,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르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하라.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이 일거에 달려 있으니,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암 선생은 이렇게 격려하여 정세운을 보내고 매일 제장(諸將)을 독려하게 하였다. 의(義)를 부르짖으며 모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 선생의 종질 순(珣:希泌)과 한방신(韓方信)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서기1362년에 최영이 20만 군사로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축출하였다.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불타 흥왕사에 머물렀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나라와 연합할 필요를 느끼어 반원정택을 포기하고 관제도 원나라의 체제로 돌렸다. 

서기1263년에 공민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김용이 반란을 일으켜 흥왕사를 습격하였는데, 내시 이강달이 공민왕을 업고 대비전으로 달려가 밀실에 숨게 하였고 내시 안도치가 공민왕 대신 누워 있다가 대신 죽었다. 나중에 김용은 공민왕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이때 개경의 최영과 오인택이 반란소식을 듣고 흥왕사로 떠나려다 서둘러 개경에 돌아온 김용의 말을 듣고 뒤따라갔는데, 김용이 흥왕사를 지키고 있던 자신들의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에 김용이 1등공신이 되었으나, 반란군의 잔당에 의하여 사실이 드러나 김용은 밀양으로 유배되었다가 경주로 옮겨져 죽음을 당하였다. 

서기1363년, 경효대왕(敬孝大王) 12년 계묘년(癸卯年) 10월 3일에 홍행촌의 늙은이 이암 선생께서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서기1366년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다. 

서기1366년에 공민왕은 신임하던 신돈에게 나라일을 맡기자,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와 노비 개혁을 하였다. 이어 신돈은 성균관을 열어 유학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하여 유학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권력을 독접하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신돈은 따르는 무리를 모아 파당을 만들었고, 신돈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당하였다. 이에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잃었다. 신돈은 역모를 꾸몄으나 모든 것이 탄로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서기1370년에 이성계가 왜구를 소탕하였다. 

서기1370년경 원동중(元董仲) 선생이 삼성기(三聖記) 하편(下篇)을 지었다. 삼성기 상편은 신라시대인 서기600년경에 안함로(安含老)가 썼다. 

서기1370년경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선생이 북부여기(北夫餘紀) 상, 하와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를 지었다. 

서기1371년, 경효왕(敬孝王) 20년 신해년(辛亥年) 2월 갑술(甲戌)일에, 여진(女眞)의 천호(千戶) 이두란(李豆蘭), 첩목아(帖木兒)는 백호(百戶) 보개(甫介)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 왔다. 

서기1371년 윤3월 기미(己未)일에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의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 왔다. 이때에 조정의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매우 어지러웠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鄭夢周)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金義)는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 이 사실을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성(海城), 요양(遼陽)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여 버렸다. 

서기1374년에 공민왕은 우 왕자를 강녕대군에 봉하고 백문보, 이임임 등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왕자 우는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이던 반야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는데, 신돈이 죽자 우 왕자를 궁으로 데려와 명덕태후에게 맡겼다. 그러나 명덕태후는 우 왕자가 공민왕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 공민왕은 귀족의 아들 홍륜 등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기1374년에 홍륜은 내시 최만생 등과 공모하여 공민왕을 살해하였다. 이때 공민왕은 45세였다. 이에 이인임은 홍륜과 최만생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조정의 권력을 잡고 우 왕자를 즉위시키려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덕태후는 우왕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이임임의 지지로 우 왕자가 10세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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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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