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51] 고려(高麗) 연대기 13

양해천 2018. 1. 23. 13:21

[홍익인간 351] 고려(高麗) 연대기 13

2012년 06월 15일 (금) 08:07:5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31. 제29대 충목왕(忠穆王:서기1345년~서기1348년) 

충혜왕의 세자 흔이 8세로 즉위하였다. 이에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였다. 덕녕공주는 원나라 무정왕의 딸이며 서기1330년에 충혜왕이 세자로 있을 때 혼인하였다. 

덕녕공주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충혜왕이 신축하였던 궁을 헐고 그 자리에 숭문관을 세웠다. 또, 충숙왕 때 지으진 고려왕조 역사책인 편년강목을 보충하도록 하고, 이제현과 안축에게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3대 실록을 편찬토록 하였다. 

서기1347년에 정치도감을 설치하였다. 

서기1348년에 충목왕이 병으로 붕하였다. 

32. 제30대 충정왕(忠定王:서기1349년~서기1351년) 

충혜왕의 차남인 희비 윤씨의 아들 저 왕자가 12세로 즉위하였다. 이에 희비윤씨와 덕녕공주가 세력 다툼을 하게 되었다. 

서기1350년에 경상도 일대에 왜구가 출몰하였다. 약탈과 방화, 살인을 일삼으로 벽상들을 괴롭혔다. 

서기1351년 신묘년(辛卯年) 3월에 직사(直使) 이강(李岡)은 은밀히 명을 받고 참성단에 올라 제를 지냈는데, 당시의 감회를 시로 읊어 나무판에 글을 새겼다. 

서기1351년에 원나라는 충정왕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충혜왕의 아우인 강릉대군을 왕으로 세웠다. 

33. 제31대 공민왕(恭愍王:경효왕(敬孝王):서기1352년~서기1374년) 

원나라에 의하여 충혜왕의 아우인 강릉대군이 22세로 즉위하였다. 

원나라 마지막 제16대 순제(順帝)가 라마교에 빠져 요승들과 어울리며 나라일을 돌보지 아니하여 나라는 날로 어지러워졌으며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으니, 홍건적도 그 중의 하나였다. 

공민왕은 개혁을 시작하였다. 정방을 폐지하고, 몽고풍의 옷, 머리, 풍속을 폐지하였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기철을 포함한 친원세력이 득세하고 있었다. 기철의 여동생인 기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팔려간 공녀였으나 순제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되었던 것이다. 

서기1354년에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가 벼슬길에 올랐다. 

서기1355년에 정지상(鄭之祥)이 전라도 안렴사가 되어서 전주(全州)에서 야사불화(埜思不華)라는 자를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지상은 하동(河東) 사람으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敬孝王:恭民王)을 만나 모셨는데, 서기1352년에 경효왕이 즉위하자 즉시 뽑히어 감찰(監察)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세도가를 만나보고서는 별안간 그를 사로 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도(道)가 온통 다 가슴이 써늘했다. 야사불화(埜思不華)라는 자는 원래 고려 사람인데, 원나라에 있으면서 순제(順帝:서기1332년~서기1370년)의 총애를 받아 세력을 믿고 위세를 부려 나라 사람들이 그를 꺼렸다. 야사불화가 향사(香使)로서 고려에 와서는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부려 멋대로 하였으니, 존무사(存撫使)나 안렴사(按廉使)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 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게 굴다가 전주(全州)에 이르렀는데,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하였으나 야사불화는 정지상을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접사(伴接使) 홍원철(洪元哲)이 정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으나 정지상은 무시하였다. 이에 홍원철이 격노하고 야사불화는 “지상(之祥)이 천사(天使)를 업신여긴다”고 하면서, 야사불화가 정지상을 결박하였다. 이에 정지상은 성을 내며 거짓말로 크게 외쳐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모든 기씨(奇氏)를 주살하고 다시는 원(元)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宰相) 김경직(金敬直)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이 사신은 통제하기 쉽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너의 주(州)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는 것이냐?”라고 하였더니, 읍리(邑吏)들이 소리 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 주었고, 이에 정지상은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야사불화와 홍원철을 사로 잡아 가두고는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를 뺏아 서울로 달려 오던 중, 공주(公州)를 지나면서 응여(應呂)를 잡아 철퇴로 치니 며칠만에 죽어 버렸다. 정지상은 왕에게 이를 보고하니, 왕이 경악하여 순군(巡軍)을 내려보내고,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 정휘(鄭暉)에게 명하여 전주목사(全州牧使) 최영기(崔英起) 및 읍리(邑吏)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車蒲溫)을 보내어 야사불화에게 내온(內醞:하사 술)을 주고 위로하며 그 패를 돌려 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보내와 정지상을 국문(鞠問)케 하였다. 서기1356년 여름 4월에 왕은 뭇 기씨를 주살하고는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戶部侍郞) 어사중승(御使中丞)을 거쳐 벼슬이 판사(判事)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이 엄격하여 대개 큰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정지상의 처는 과부로 담양(潭陽)에 살다가 왜인(倭人)의 해를 입어 죽으니, 아들이 서기1389년에 박위(朴葳)를 따라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했다. 

서기1356년, 천수(天授)기원 439년, 경호왕(敬孝王) 5년 여름 4월 정유(丁酉)일에, 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이(盧頉) 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鄭之祥)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을 삼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이문소(理問所)를 물리치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은 강소(江蘇)에서 기병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했다. 최영(崔瑩) 등은 이때 고우(高郵)로부터 돌아왔다. 임금께서는 처음 최영 등과 함께 의논하시어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印璫), 최영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압록강 이서의 8첩(帖)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어 쌍성(雙城) 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쌍성총관부 폐지> 
서기1356년에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3성6부제의 관제를 회복시켰다.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원나라가 화주 이북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쌍썽총관부를 폐지하였다. 공민왕은 인당과 강중경을 불러 서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압록강 건너 땅을 수복하도록 하여, 인당은 압록강 건너의 파파부 등 세곳의 원 수비대를 격파했다. 이에 원나라는 공민왕을 협박하였는데, 공민왕은 서북면 일대의 방비를 철저히 하였다. 

원나라에 반란이 일어나자 최유는 원나라 순제에게 고려에 군사를 청하라고 간하여 반란진압군 10만을 고려에 와서 전하였다. 얼마 후 다시 최유가 원나라 중상감승 자격으로 고려에 와서 요구하였다. 이후 공민왕이 기화후의 오빠인 기철을 제거하자 최유는 기황후에게 접근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 왕혜를 즉위시키려 모의하였다. 이에 기황후가 공민왕의 옥새가 가짜라며 순제에게 고자질하자 순제가 최유를 고려의 좌정승에, 연경의 고려인들을 고려의 대신에 임명하였는데, 최유가 고려로 침입하였으나 최영의 군대에게 참패하였고, 원나라로 쫓겨간 최유는 순제에게 1고려를 정벌하도록 간하였으나, 원나라는 이미 국력이 쇠하여 고려를 정벌할 힘이 없어졌다. 이에 원나라는 고려와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원나라 신하들의 반대로 고려정벌이 취소되었다. 이후 최유는 공민왕의 요청으로 몽골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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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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