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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65]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대청(大淸) 연대기

양해천 2018. 1. 23. 13:32

[홍익인간 365]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대청(大淸) 연대기

2012년 06월 29일 (금) 08:19:33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청나라는 소위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滿洲)라는 말은 지명이나 원래는 만주(滿珠)라는 족속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만주(滿珠)는 주신(珠申)이라고도 불리는 숙신(肅愼)의 후예이다. 숙신은 곧 단군조선 초기에 마가(馬加) 신지(神誌)가 송화강 동쪽 지역에 봉해진 제후국인 것이다. 

숙신은 이후 말갈, 읍루, 여진으로 불렸다가 역사상 마지막으로 만주(滿洲)로 불리고 있는 것이 된다. 

청나라 왕족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애신(愛新)의 만주말이 금(金)을 가리키며 신라 김씨에서 파생된 각라(覺羅) 김씨(金氏)임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만주족의 청(淸)나라의 왕족인 김씨는 신라(新羅) 출신 김씨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즉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는 금아지라는 말로서 신라 김씨 시조인 김알지와 같이 금(金)의 후손(後孫)이라는 뜻이 된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은 명나라가 만주족에게 7가지 큰 한(恨)을 품게 하였기 때문에 청 태조가 복수한 것이라고 서기1777년에 지어진 흠정만주원류고에서 그 명분을 밝히고 있다. 

1. 제1대 태조(太祖:金努爾哈赤(누르하치):서기1616~1626) 

서기1616년에 김아골타의 후손인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웠다. 누르하치의 누르는 황금색을 나타내는 말로서 금(金)이며, 하치는 아지, 아기라는 말로서 후손을 뜻하는 것이 된다. 

서기1619년 천명(天命) 4년에 조선의 왕 이혼(李琿:광해군)이 장수 강홍립(姜弘立)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를 도왔는데, 부찰(富察)의 들에서 전쟁하였으나 크게 패하였으며, 강홍립은 5,000명의 군사로 항복하였다. 태조는 강홍립을 머물게 하고 그 부장 장응경(張應京) 등 10여인을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2. 제2대 태종 홍태제(太宗:皇太極:서기1627~1643) 

서기1626년에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가 죽고 아들 태종 황태극(홍타이지)이 즉위하였다. 

서기1627년 천총(天聰) 원년에 이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조선의 한윤(韓潤)과 정매(鄭梅)가 후금으로 도망쳐 귀순하였는데, 태종에게 청하여 향도가 되어 군사를 꾸렸다. 이에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을 위하여 복수를 한다는 구실로 조선침략을 결정했던 것이 된다. 

서기1627년 1월에 패륵 아민(阿敏) 등에게 명하여 3만여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치게 하였다. 이때 후금의 군사들은 용천, 곽산, 정주를 점령하고, 이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홍이 전사하였는데, 정봉수, 이립 등의 의병이 일어나 활약하였으나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었던 것이 된다. 

서기1627년 2월에 후금의 군사가 황해도 황주(黃州)에 이르자 나라 안이 공포에 떨었고, 사신 구성(求成)이 길을 찾아 드디어 왕경을 핍박하였는데, 이종(조선 인조)은 강화도로 피난 갔다. 유도대장으로 서울을 지키던 김상용은 후금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국고와 병조, 호조의 창고 등에 불을 질렀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장만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종(조선왕 인조)이, “마을이 모두 부서져 도망하였으니 죄가 없습니다. 오직 상국의 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하였고, 이에 화친을 허락하였다. 

이해 2월 9일에 사신으로 부장 유해를 강화도로 보내어 이종에게 유시하게 하였으며, 군사는 평산(平山)에 주둔시켜 대기시켰다. 이에 이종은 최명길과 이귀 등이 화친을 간하여 화친을 맺게 되었는데, 이에 유흥조(劉興祚), 파극십(巴克什)을 강화도로 보내어 동맹을 맺게 하였다. 

이해 3월 경오일(3일)에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 천지에 알리고 화친이 성립되었으니,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서기1628년 천총 2년 2월에 중강(中江)에 개시(開市)를 열었다. 

서기1631년 천총 5년에 피도를 비롯한 모든 섬을 치려고 조선으로부터 병선(兵船)을 징수하고자 사신이 조선에 이르렀는데, 3일째에 이종(인조)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명나라는 우리의 아버지 나라이다. 남을 도와 어찌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공격하겠는가? 배로서 구실 삼을 수 없다!” 하였다. 이로부터 동맹이 점점 느슨해졌다. 

서기1635년 천총 9년에 찰합이(察哈爾)와 임단한(林丹汗)을 평정하여 원(元)나라에서 내려온 국새(國璽)를 얻었다. 8명의 화석패륵과 외번 몽고의 49명 패륵이 표로써 존호를 청하여 올렸다. 태종이 이르기를, “조선은 형제의 나라이니 의당히 함께 그것을 논의해야 한다.” 하였다. 이에 내외의 모든 패륵들이 각각 글을 써서 사신을 보내어 조선도 함께 추대하도록 약속하였는데, 조선의 모든 신하들이 말을 다투다 불가하다 하였으며 또 사신들을 병사로 지키게 하였다. 사신 영아이대(英俄爾岱)가 무리를 이끌고 말을 빼앗아 문으로 돌진하자 조선왕 이종이 사람을 보내어 따라와서는 글로 알렸는데, 또 글에 변경의 신하들의 경계가 엄하다고 유시하였으며, “정묘년에 맺은 강화(講和)에 잘못이 있어 이제 마땅히 끊기로 결정한다.” 라는 말이 있어, 영아이대가 아울러 그것을 빼앗아다가 바쳤다. 

서기1636년 천총 10년 4월에 숭덕(崇德)이라 개원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다. 조선은 사신 이곽(李廓) 등을 보내어 와서 조정에 하례하였으나 절은 하지 않았고, 태종이 조선에 글로 질자(質子)를 보내라 명을 내렸으나 또 응답하지 않았다. 

서기1636년에 조선의 왕비 한씨가 죽자 후금의 용골대, 마부대 등이 조의를 표하러 왔다가, 조선이 후금을 섬기라 하자 조선의 신하들의 위협으로 겁에 질려 달아났던 것이 되고, 후금은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바꾸었던 것이 된다. 

서기1636년 11월에 태종은 조선과의 맹약을 깨뜨리고, 대군을 이끌고 직접 정벌하기로 하였다. 

서기1636년 12월 신미삭(辛未朔:1일)에 정친왕(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郞)에게 명하여 머물러 지키게 하고,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제격(阿濟格), 다라요여패륵(多羅饒餘貝勒) 아파태(阿巴泰)는 요하(遼河) 해구(海口)에 나누어 주둔하여 명나라의 해군이 원조하여 기습하는 길을 방비하도록 하였다.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패륵 호격(豪格)은 왼쪽 날개의 만주(滿洲)와 몽고병을 나누어 통솔하여 관전(寬甸)을 따라 장산구(長山口)로 들어가고, 호부승정(戶部承政) 마복탑(馬福塔) 등을 보내어 병사 300인을 이끌고 잠입하여 가서 조선(朝鮮)의 왕경(王京)을 포위토록 하였으며, 예친왕(豫親王)은 호군(護軍) 1,000명을 이끌고서 뒤를 잇게 하였다. 패륵 악탁(岳託) 등은 병사 3,000명으로써 군사를 구제하게 하고, 태종은 친히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전진출발하였다. 

9일이 지난 경진(庚辰:12월 10일)에 진강(鎭江)을 건너고, 임오(壬午:12월 12일)에 곽산성(郭山城)에 행차하고 정주(定州), 안주(安州)를 항복시켰으며, 정유(丁酉:12월 27일)에 임진강에 행차하였다. 임진강은 조선국의 도성의 북쪽 100여리에 있으며 도성 남쪽의 한강(漢江)과 더불어 왕성을 껴 받들고 있다. 이때 강의 얼음이 흡족하지 않았으나 차와 가마가 이르자 얼음이 재빨리 굳어 여섯 군대가 모두 건넜다. 마복탑 등은 이달 갑신(甲申:12월 14일)에 왕경을 잠입습격하여 조선의 정병 수천을 패배시켰는데, 이종(李倧:인조)은 갑자기 사신을 보내어 성외의 관병들을 영접하여 위로하고는, 그 처자를 강화도로 옮기고 스스로는 친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지켰다. 

대군이 도성에 들어가고 다택과 악탁이 역시 평양을 평정하고 왕경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으며, 조선의 각 도에서 온 원군들을 연패시켰다. 태종이 이르러 군사를 나누어 도성을 수색하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군사를 더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서기1637년 숭덕(崇德) 2년 1월 임인(壬寅:2일)에 전라도 원병을 격패시키고, 사신을 보내어 칙서로써 조선의 대신들에게 유시하였다. 갑진(甲辰:1월 4일)에 대군이 북쪽에서 한강을 건너 왕경(王京)의 동쪽 20리의 강 언덕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정미(丁未:1월 7일)에 전라도, 충청도의 군사들을 격파하였다. 다이곤과 호격의 왼쪽 날개의 군사는 장산구를 거쳐 창주성을 이기고 안주(安州)와 황주(黃州)의 군사 500과 영변성의 병사 1,000을 패배시켜 원병 15,000의 군사를 죽였고, 이에 이르러 와서 군사에 합쳤다.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더욱 급박하자 계축(癸丑:1월 13일)에 이종(인조)이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기미(己未:1월 19일)에 다시 청하였고 경신(庚申:1월 20일)에 항복하여, 칙령으로 성을 나와 친근(親覲)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논란을 일으키고 동맹을 파기한 모든 신하들을 포박하였다. 이날에 이종(인조)이 처음으로 상주(上奏)하여 신하를 칭하고 성을 나가는 것을 면해달라 구걸하였다. 태종은 다이곤에게 명하여 작은 배를 당겨서 육지를 거쳐 바다로 나가게 하여 큰 함선(艦船) 30척을 포탄으로 침몰시키고, 작은 배로 건너서 섬으로 들어가 왕비, 왕자, 종실 76인, 신하 166가구를 잡아다가 별실에 묵게 하였다. 

갑자(甲子:1월 24일)에 이종(인조)에게 이전의 조서를 속히 준수하여 성을 나와 알현하도록 유시하였다. 이에 이종은 논란을 일으키고 동맹을 파기토록 내세운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윤집(尹集), 수찬(修撰) 오달제(吳達濟), 대간관(臺諫官) 홍익한(洪翼漢)을 군대 앞으로 보내어 바쳤다. 

태종은 칙령을 내려 명나라 연호를 없애고 명나라가 하사한 고명책인(誥命冊印)은 그냥 두었으며, 두 아들을 인질로 잡고 대청국의 정삭(만수절과 중궁황자의 천추, 동지, 원단 및 모든 경조사)을 받들게 하고 함께 공납(貢納)의 예를 행하게 하였다. 

이종은 성에서 홀로 되고 처자는 포로가 되었으며, 팔도의 병사들은 모두 붕괴되어 흩어지고, 종묘사직이 끊기게 되니, 이에 머리를 조아리고 명을 받았다. 경오(庚午:1월 30일)에 수십의 기병(騎兵)을 따라 나와 항복하였다. 

서기1637년 2월에 한강의 동쪽 언덕인 삼전도(三田渡)에 단을 축조하고 누런 천막을 설치하였으며, 태종이 의장대와 호위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단에 올라 즐거워 하였으며, 장수와 사졸들은 둥그렇게 엄숙히 사열하였고, 이종(인조)은 여러 신하를 이끌고 남한산으로부터 5리에서 걷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영아이대와 마복탑에게 명하여 1리 밖에서 영접하도록 하여 의장대 아래에 서게 인도하였고, 태종은 자리에서 내려와 이종(인조)과 그의 여러 아들을 데리고서 하늘에 절을 올렸다, 예를 끝내고 태종은 자리에 돌아와 앉았으며, 이종은 따르는 무리들과 땅에 엎드려 죄를 청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사면하고는, 단 아래 왼쪽에 앉게 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여 모든 왕들의 위에 자리하게 하였다. 

연회를 끝내고 군신(君臣)의 가속(家屬)들을 돌려 보내고 모든 도(道)의 병사들을 모두 회군시키고는 군사를 움직여 서쪽으로 향하였다. 조서를 내려 조선이 병란을 회복하도록 하여 우선 정축년(서기1637년)과 무인년(서기1638년)의 공물을 면제하고 기묘년(서기1639년)의 가을부터 시작으로 삼아 힘을 다하여 지체하지 않도록 하며, 임박할 때는 빼앗는다 하였다. 조선의 신하와 백성들은 삼전도의 단 아래에 비를 세워 태종의 덕을 노래하였다. 

<청의 조건> 
1. 조선은 앞으로 청나라와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다. 
2. 명나라와 당장 국교를 끊는다. 
3. 세자와 왕자 및 신하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다. 
4. 명나라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낸다. 
5.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6. 매년 원하는 만큼 조공을 바친다. 
7. 서로 국제결혼을 권할 것 기타 등등 

이리하여 서기1637년 4월에 조선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로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는 삼학사를 달래었으나 척화론을 포기하지 않자 협박과 고문으로 죽였다. 

서기1637년 10월에 영아이대와 마복탑과 달운 등을 보내어 인조를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봉하였다. 11월에 이종은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만수절을 하례하였고, 동지에 방물을 공납하였다. 12월에 원단(元旦)을 하례하였다. 무릇 만수성절과 원단과 동지는 모두 배신을 보내어 하례를 표하도록 하고 방물을 바치는 것을 해마다 상례로 하였다. 이해에 공납의 길을 정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경유하게 하였다. 

서기1638년에 조선의 군사를 징병하여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따르게 하였는데 기한을 맞추지 못하여 조서를 내려 질책하였다. 

서기1639년 6월에 사신을 보내어 이종의 계실 조씨(趙氏)를 조선왕비로 봉하였다. 동쪽의 고이객이 반하여 동해의 웅도(熊島)로 들어가니, 조선에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종이 장수를 보내어 경흥(慶興), 서수라(西水羅), 전포(前浦)를 거쳐 군사를 진격시켰다. 7월에 반란의 수괴 가합선을 잡아와서 바쳤는데, 이종에게 은 200냥을 하사하였다. 

서기1640년 10월에 탄신을 기하여 이종에게 은혜를 베풀어 세공(歲貢)으로 쌀 9,000포를 감해 주었다. 

서기1641년 정월에 명나라의 금주(錦州)를 공격하고 조선에 배 5,000척과 식량 1만석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이종이 진언하여 군선과 식량운반선 32척이 표류하여 침몰하여 사라졌다하므로, 임금(태종)이 글을 꾸민 것을 알고는 조서를 내려 질책하였고, 기한을 정하여 독촉하니 다시 식량 1만석을 운반하고 배 155척을 대소릉하(大小凌河)의 하구를 거쳐 삼산도(三山島)에 이르렀는데, 도중에 풍랑을 맞아 좌초되어 50여척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명나라의 수군의 공격을 받아 근근히 52척이 남게 되었고, 개주(蓋州)에 이르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육지로 운반하고자 청하였는데, 조선의 3척의 배가 명나라 경계의 통신소에 표류하여 들어가자 명나라의 병선이 적으로 대하지 않고 또 수로를 거쳐 나아가지 않으므로 조서를 내려 엄중히 배척하였다. 조선의 신하 임경업(林慶業)이 크게 두려워하여 수로를 나가는 것을 모험하고자 청하니, 임금께서 이에 허락하여 육지를 따라가게 하고 정병 1,000은 머물게 하고 졸병 500을 이끌고 가게하여 나머지 병사는 돌아오게 하였는데, 이미 식량운반하는 사졸과 말이 오랫동안 이르지 아니하여 사신을 보내어 꾸짖었다. 

서기1641년 3월에 처음으로 조선의 총병 유림(柳琳)과 부장 작하량(勺何良) 등이 병사를 이끌고 금주(錦州)의 군대에 이르게 되었다. 6월에 이종은 배신(陪臣) 이완(李浣) 등을 보내어 신라(新羅)의 서금(瑞金)을 바치고, 함양군의 신계서원에 대하여 진언하였는데, 신라의 고찰에 사는 백성 원년(袁年)이 땅을 파다가 와담(瓦罈:기와 술단지) 한장을 얻으니, 덮개에는 “一千年(일천년)”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지고, 안에는 황금 20근이 들어있었는데 그 하나에는 “宣春大吉(선춘대길)”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 특별히 조서를 내려 답하고 황금은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서기1642년에 금주대첩으로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청하므로, 임금께서 칙령으로 조선왕 이종에게 의견을 진술하라 하였는데, 이종이 “지살안민(止殺安民) 상부천의(上符天意)”라고 대답하였다. 이미 다시 명나라의 병선 2척이 조선의 경계에 이른 것을 정탐하고는 임금께서 대노하였고, 아울러 각신(閣臣)인 최명길(崔鳴吉)과 병사(兵使) 임경업이 명나라와 몰래 통하여 국서를 왕래하므로 체포하여 신문하고 죄를 다스렸다. 

3. 제3대 세조 순치제(世祖:順治帝:서기1643~1661) 

서기1644년에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각라 김씨)라고 하다. 

서기1644년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다. 

서기1645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조선으로 보내주었다. 청 태종은 최명길과 김상헌이 충신임을 알고서 귀국시켰다. 명나라로 도망하였던 임경업은 청나라가 명나라 도읍인 북경을 점령하자 청나라에 붙잡혔는데, 청 태종이 임경업이 아까워 설득하였으나 귀복하지 않자 감옥에 가두었다가, 조선에서는 김자점이 반대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으려 하던 중에 임경업을 도망시킨 심기원이 역모에 연루되어, 김자점이 청나라에 임경업을 요구하여 귀국시켰고, 이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 임경업은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서기1646년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서양서적을 수입하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간하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귀국한지 3개월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서기1649년 8월에 예신(禮臣) 계심랑(啓心郞) 악혁(渥赫) 등을 조선에 보내어 이종(조선왕 인조)의 제사를 유시하도록 하고 시호를 장목(莊穆)이라 하사하였고, 또 호부 계심랑 포단(布丹), 시위 철이대(撤爾岱)를 정부사(正副使)로 보내어 칙서로 알려 세자 호(淏)를 조선국왕으로 봉하고, 처 장씨는 왕비로 하였다. 

서기1653년 3월에 조선국왕에게 청나라 문자로 된 인장은 있으나 한(漢)나라 전자(篆字)로 된 것이 없으므로, 예부에 명하여 주조글자를 고치게 하여 청나라와 한나라 글자가 겸해진 인장을 만들어 하사하였다. 12월에 호(효종)의 아들 연(棩)을 세자로 봉하였다. 

서기1658년 2월에 나찰(羅刹)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조선(朝鮮)에 유시하여 간단하게 조창수(鳥槍手) 200을 보내어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는 서기1658년에 조선으로 하여금 제2차 나선(러시아)정벌에 나서게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1659년 5월에 이호(李淏:조선왕 효종)가 훙하였다. 9월에 공부상서 곽과(郭科) 등을 보내어 제사를 유시하게 하였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사하였으며, 또 대학사 장혁덕(蔣赫德)과 이부시랑 각라박석회(覺羅博碩會)를 보내어 정부사로 삼아 세자 연(棩)을 조선국왕으로 봉하게 하고, 그 처 김씨를 왕비로 봉하게 하였다. 

4. 제4대 성종 강희제(成宗:康熙帝:서기1662~1722)] 

서기1662년 원년에 조선에 명하여 동지와 만수절을 표를 올려 하례하도록 하고, 세공(歲貢)을 진상함에 조정의 사신들이 모두 행하도록 하였다. 수년에 걸쳐 나라에 큰 잔치가 열려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서기1674년 12월에 이연(조선왕 현종)이 훙하여, 예부에 유시하기를, “이연은 극진히 번직을 수행하였으므로 가히 우급술전(優給卹典)에 따라 상례의 예외로서 제(祭)를 한 차례 더하라!” 하였으며, 시호를 장각(莊恪)이라 하사하였고 내대신 수서특(壽西特)과 시위 상액은극(桑厄恩克)을 보내어 제사를 유시하게 하고, 겸하여 사자(嗣子) 이돈(李焞)을 봉하여 조선국왕으로 삼고, 처 김씨를 왕비로 봉하게 하였다. 

서기1671년 11월에 돈(焞: 조선왕 숙종)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전에 명(明)나라 십육조기(十六朝紀)의 한 글 중에 본국에서 계해년에 광해군 이혼(李琿)을 폐하고 장목왕 이종(李倧)을 세운 일을 실은 것은 모함으로 바꾼 것인데, 이제 명사(明史)를 찬수(纂修)한다는 것을 들으니, 특별히 시작과 끝을 진술, 상주함으로써 고치어 믿을 수 있는 역사를 밝히기를 애걸합니다.” 하였는데, 예부에서 의논하여 따라 행하지 않았다. 

서기1681년 정월에 조선의 왕비 김씨가 상을 당하니, 관리를 보내어 제를 지내게 하였다. 

서기1682년 5월에 사신을 보내어 돈(焞)의 계실(繼室) 민씨를 왕비로 봉하도록 하였다. 이해에 임금께서 조릉(祖陵)을 배알하니, 돈(焞)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성경(盛京)에 이르러 알현하고 방물을 조공하였다. 

서기1683년에 청나라가 대만(타이완)을 점령하였다. 

서기1686년에 조선 사람 한득완(韓得完) 등 28인이 강을 건너와 인삼을 채취하였는데, 창(槍)으로 관청의 그림과 지도를 상하게 하여 임금께 고하니 한득완 등 6명의 머리를 배고 나머지는 죽임을 면해주었는데, 이돈(조선왕 숙종)이 표를 올려 사죄하고 함께 방물로써 조공을 하니, 임금(성종)께서 조선왕이 사죄를 하고 조공을 진상하므로 의당히 받지 않으시고 연공(年貢)에 따랐으며, 사죄에 따른 조공을 분명하게 그만두게 하셨다. 

서기1689년경에 청나라에 고증학이 유행하였다. 

서기1697년 7월에 돈(焞:조선왕 숙종)의 아들 균(균)을 세자로 봉하였다. 11월에 돈(숙종)이 중강무역(中江貿易)의 쌀 곡식에 관하여 소청하니 윤허하셨다. 

서기1698년 정월에 시랑 도대(陶岱)를 보내어 쌀 3만석을 조선으로 실어 가게 하여 1만석으로써 구휼하고, 2만석은 통상대로 팔게 하였는데, <어제해해운진제조선기(御製海運賑濟朝鮮記>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1701년 12월에 조선의 왕비 민씨가 상을 당하니 관리를 보내어 제를 올리게 하였다. 

서기1702년에 원외랑(員外郞) 등덕감(鄧德監)을 보내어 중강(中江)의 세금을 거두게 하였는데, 4,000냥이 되었다. 

서기1703년 2월에 사신을 보내어 이돈(숙종)의 계실 김씨를 왕비로 봉하게 하였다. 

서기1706년 10월에 대학사에게 유시하여 이르기를, “조선국왕은 우리 조정을 받들어 마음을 졸이며 공경하고 근신하는데, 그 나라에는 들으니 8도가 있어, 북도(北道)는 와이객(瓦爾喀) 지방의 토문강(土門江)에 접하고, 동도(東道)는 왜자국(倭子國)에 접하며, 서도(西道)는 우리의 봉황성에 접하고, 남도(南道)는 바다 밖에 접하여 여러 작은 섬이 있는데, 태종께서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군대 주둔지에 비를 세워 덕을 노래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명나라 말년에 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명나라를 섬기어 일찍이 배반하지 않아 실로 예의를 중히 여기는 나라이니, 더욱 취할 만하도다!” 하셨다. 

서기1710년 5월에 조선의 상인 고도필 등이 풍랑을 맞아 배가 부서져 표류하여 해주(海州)에 이르러 구출되었는데, 강소(江蘇)의 순무(巡撫) 장백행(張伯行)이 듣고서 고도필 등에게 유시하여 령을 내리고 문서를 발급하여 주어 말을 타고 귀국하도록 하였다. 

서기1711년 5월에 임금께서 대학사에게 유시하여 이르기를, “장백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이미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토문강은 장백산의 동쪽 변두리에서 흘러 나와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며,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그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며, 역시 강으로 경계를 삼고 있다. 그러나, 압록과 토문의 두 강 사이 지방은 다 알지 못한다.” 하셨다. 이에 목극등을 파견하여 보내서 경계를 조사하게 하셨다. 10월에 임금께서 유시하여 조선국왕에게 조공물납의 백금 1,000sis과 홍표피(붉은 표법가죽) 142장을 면해 주시고, 조선국 사신의 연도관사(沿途館舍)를 설치하셨다. 

서기1712년 5월에 돈(조선왕 숙종)이 상주하여 조공을 감해 준 것에 사례하면서 방물을 조공하니, 임금께서 사은예물(謝恩禮物)은 동지(冬至)와 원단(元旦)의 예물에 준하도록 명하셨다. 이해에 목극등이 장백산에 이르러 조선의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관찰사(觀察使) 이선부(李善溥)와 회동하여 소백산(小白山) 위에 비를 세웠다. 

서기1716년에 강희자전이 완성되었다. 

서기1717년에 청나라가 기독교를 금하였다. 

서기1720년 10월에 이돈(조선 숙종)이 훙하니 산질대신 사극단, 예부우시랑 나첨을 보내어 조문하게 하여, 시호를 희순(僖順)이라 하사하고, 겸하여 세자 균(균)을 조선국왕으로, 계처(繼妻) 어씨(魚氏)를 왕비로 봉하셨다. 

서기1722년 2월에 균(조선 경종)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위약하고 후사가 없으니 아우 이금(李昑)을 세제(世弟)로 삼아 종묘를 잇게 할 수 있도록 청합니다.” 하였는데, 임금께서 그 청을 받아들이셨다. 

5. 제5대 세종 옹정제(世宗:雍正帝:서기1723~1735)] 

서기1724년 12월에 이균(조선 경종)이 훙하니 산질대신(散秩大臣) 각라서로(覺羅舒魯), 한림원학사 아극돈(阿克敦)을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고 시호를 장각(莊恪)이라 하사하였으며, 겸하여 세제 금(昑)을 조선국왕으로, 그 처 서씨(徐氏)를 왕비로 봉하였다. 

서기1735년 9월에 고종이 즉위하였다. 

6. 제6대 고종 건륭제(高宗:乾隆帝:1736~1795)] 

서기1777년 건륭 43년에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原流考)를 지었다. 여기에는 숙신에서 만주에 이르는 역사에서 만주 땅에 걸쳐 존재하였던 나라의 역사를 이전의 역사서 등을 참고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만주 땅이란 대체적으로 지금의 난하 동쪽 지역이 되며, 이들 나라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숙신을 포함하여 부여, 읍루, 삼한, 옥저, 예,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거란(요), 여진(금), 몽고(원) 등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 인용되고 있는 기록으로는 죽서기년, 공자가어, 상서, 사기, 공자세가, 후한서, 회남자, 삼국지, 위서, 진서, 책부원구, 통고, 위략, 양서, 수서, 북사, 통전, 요사, 신당서, 오대사, 대금국지, 한서, 구당서, 송사, 태평환우기, 금사, 북맹록. 송서, 제서, 남사, 후주서, 원사, 전진록, 통지, 수동번풍토기, 당육전, 장구령집, 오대회요, 제번지, 고려도경, 봉사행정록, 거란국지, 괄지지, 후주서, 구오대사, 통감, 송회요, 송설영기, 속통고, 송막기문, 금사세기, 원일통지, 명실록, 당회요, 양서, 당 가탐도리기, 고려재기, 압강행부지, 명일통지, 호교북행기, 북맹회편, 허항종봉사행정록, 요동행부지, 금완안라색비, 전요지, 산해경, 명통지, 수경, 수경주, 주례직방씨, 북위서, 당육전, 문헌통고, 명회전, 삼국위지, 위지, 국어, 주서, 야율리묘지명, 신록기, 서사회요, 석묵전화 금도통경략낭군행기, 마확 묘재자사, 정대창연번로, 왕증행정록, 철경록 등 86종의 기록을 참고하고 있다. 

서기1782년에 청나라가 사고전서를 완성하였다. 

7. 제7대 인종 가경제(仁宗:嘉慶帝:1796~1820)] 

서기1796년에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다(~1803년). 이에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였다. 

서기1815년에 청나라가 아편 밀수를 엄금하였다. 

8. 제8대 선종 도광제(宣宗:道光帝:1821~1850)] 

서기1829년에 청나라가 외국과의 통상을 금지하였다. 

서기1840년에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1842년). 

서기1842년에 난징(남경)조약이 체결되었다. 

9. 제9대 문종 함풍제(文宗:咸豊帝:1851~1861)] 

서기1851년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1864). 

서기1860년에 베이징(북경)조약이 체결되었다. 

10. 제10대 목종 동치제(穆宗:同治帝:1862~1874)] 

서기1862년에 양무운동이 일어났다. 

11. 제11대 덕종 광서제(德宗:光緖帝:1875~1907)] 

서기1880년에 해군을 창설하였다. 

서기1884년에 청나라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서기1894년에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1895년). 

서기1898년에 무술변법을 시행하였다. 

서기1899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서기1901년에 신축조약아 체결되었다. 

서기1905년에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되었다. 

12. 제12대 선통제(宣統帝:溥儀:1908~1912.2.12.)] 

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3년간 황제로 재위하였던 선통제 김부의(1906.2.7~1967)는 서기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제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북경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으며 스스로 헨리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상으로 청나라의 역사는 12대 296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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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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