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무예(武藝)’란 용어를 퍼뜨린 지 30년이 되어간다. 1987년 12월 22-23일 서울 동숭동 바탕골예술극장에서 ‘해범 김광석 한국무예발표회’(한국민속극연구소 주최)를 개최하면서 ‘한국무예’ ‘전통무예’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무술(武術)’ ‘무도(武道)’란 용어가 유행하던 때여서 ‘무예’란 용어가 대단히 생소했었지만 어느덧 지금은 한국의 대부분 호신술들이 ‘무예’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중국은 ‘무술’, 한국은 ‘무예’, 일본은 ‘무도’로 거의 굳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땅에서는 ‘무예’를 제도권에서는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구태가 있다. 가령 체육계에서는 무예를 전통문화 쪽으로 밀어내고, 문화계에서는 체육계로 가라고 내친다. 예술계에서는 그저 콘텐츠의 일부로 필요할 때만 차용할 뿐이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많은 예술에 관한 용어 중에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아트(arts)로서의 ‘예(藝)’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갑골문에서 ‘藝’자는 사람이 나무를 가꾸는 모양이라 한다. 주나라 때에는 귀족 자제들이 공부해야 할 필수과목을 ‘육예(六藝)’라 하였다. 그 외에는 ‘무예(武藝)’가 유일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藝術’이란 용어가 몇 차례 나오는데 모두 의술이나 기술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 중 하나가 정조(正祖) 때 편찬한 조선의 국기인 십팔기(十八技) 교본《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렸다. 영조 25년 소조(小朝, 사도세자)께서 서무(庶務)를 섭정(攝政)하실 때, 죽장창(竹長槍) 등 12기(技)를 더하여 도보(圖譜)를 만들어서 (이전의) 6기(技)와 통관하여 강습케 하였다. …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뜻으로서 십팔기(十八技)의 명칭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원속(原續)의 도보(圖譜)를 모아서 의(義)․예(例)․전(箋)의 잘못을 바로잡고, 그 원류(源流)를 찾아 제도를 품평하여 정하고, 명물(名物)로 하여금 예술(藝術)의 묘용(妙用)으로서 한 권의 책을 펴냈으니, 그 책 이름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 한다. 정조가 친히 지은 서문에서 ‘예술지묘용(藝術之妙用)’이라 하여 무예십팔기(武藝十八技)에 ‘예술(藝術)’이란 용어를 붙였다. 《조선왕조실록》에‘武藝’는 무수히 나오지만 ‘武術’이나 ‘武道’란 용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기예(技藝)’ 역시 무예를 가리켰으며, ‘예인(藝人)’ ‘기인(技人)’도 무사를 일컫는 용어였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에서 ‘藝’란 곧 무예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학계는 물론 어느 누구도 무예를 예술의 범주에 넣어 주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藝術’이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흔치 않으며, 그마저도 역시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청(淸)말 유희재(劉熙載, 1813-1881)가 시(詩)‧문(文)‧사(詞)‧곡(曲) 등을 평론한 《예개(藝槪)》란 저서를 펴내면서 처음으로 현대적 의미의 ‘예(藝)’자를 사용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서양 학문이 들어오면서 칸트와 쇼펜하우어 미학의 영향을 받은 왕국유(王國維, 1877-1927)가 ‘미술(美術)’ ‘예술(藝術)’이란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아시아에서 먼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아트(arts)’를 예술(藝術)로 번역하면서 자연스레 한자문화권이 이에 따른 것이리라. 이후 서예, 도예, 다예 등으로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켜나갔다. 전통적으로 한국이나 중국에선 춤이나 갖가지 재주를 연희(演戱), 잡희(雜戱)라 하였다. 그리고 그림이나 노래, 춤 등의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재인(才人)이라 불렀다. 고려시대 과거에 제술과(製術科)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관장하는 재인청(才人廳)이 있었다. 그 외에도 잡과(雜科), 잡학(雜學)이란 용어도 사용되었다. 기실 불과 1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예술(藝術) 혹은 예능(藝能)이라 칭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감히 예(藝)자를 붙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技)자조차 함부로 붙이지 않았다. 예능(藝能) 역시 잡기(雜技) 또는 잡희(雜戱), 연희(演戱)로 불리던 것들이다. 만약 서양문물을 조선이 먼저 받아들였더라면 아마도 아트(arts)를 재술(才術), 잡술(雜術) 혹은 제술(製術)로 번역했을 것이다.
무예사(武藝史)를 공부하려면 먼저 용어가 적확해야 개념도 바로 세울 수 있을 터, 안타깝게도 《조선왕조실록》의 ‘무예’를 국역하면서 ‘무술’ ‘무도’로 해놓은 곳이 많다. 해서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무예와 관련된 용어들의 빈도수를 원문 검색해보았다. 武藝(469), 技藝(219), 武技(40), 射藝(76), 六藝(52), 尙武(65), 武德(33), 武器(5), 劍術(24), 長槍(35), 習射(220), 射習(40), 槍術(0), 射術(0), 弓術(0), 武道(4), 柔術(1), 擊劍(6), 劍道(0), 柔道(0), 武術(0), 武魂(0), 藝術(10), 藝能(16), 茶藝(0), 陶藝(0), 書藝(3), 武人(668), 文人(105), 武士(1,838), 文士(364), 藝人(5), 技人(5) 여기서 ‘무도(武道)’는 일본식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다. ‘유술(柔術)’과 ‘격검(擊劍)’은 개화기 고종에게 일본의 정세를 보고할 때 언급되었으며, 1920년 무렵에 일본 학교 체육에 군사체육으로서 무도(武道)과목을 강제하면서 유도(柔道), 검도(劍道)로 바뀌었다. 당시 우리나라도 조선총독부의 지침으로 학교 교육에 이식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자에 나도는 ‘궁중무술(宮中武術)’은 어디에도 없는 창작용어다. 당연히 궁중에서 행해진 무예라면 모두 십팔기예(十八技藝)와 습사(習射)였다.
우리나라 문헌을 다 뒤져도 십팔기(十八技, 騎藝4技 포함) 18종목 외의 무예 명칭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격구(擊毬)와 마상재(馬上才)는 군사오락으로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부록하였고, 택견은 다만 《재물보》와 《해동죽지》놀이[유희]편에 언급되었을 뿐이다. 무예서(武藝書)에서 무예 종목으로 단 한 차례도 언급한 적이 없는 민속놀이를 무예 종목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하였으니 당시 이 업무를 담당했던 문화재위원들의 무지와 과오가 중차대하다 하겠다. 무지하거든 용감하지나 말 것을! 한술 더 떠 택견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까지 해놓았으니 이 오류를 이제 누가 바로잡으랴! 아무렴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그런 나라가 무슨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있으랴!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시대에 따라 풍속이 바뀔 수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있을 리 없다. 오류도 역사라고 주장하려면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는 있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