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여유(餘裕)/비움과 채움

산다는게 반복이 아닐까

양해천 2024. 10. 29. 08:24

산다는게 반복이 아닐까
                             엄상익변호사

그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부모가 걱정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야 할텐데 날라리가 됐다는 것이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매일 노래하고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내게 충고를 해 달라고 부탁 했었다. 그 아이를 만났었다. 아이는 오히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같은 노래를 백번 반복해서 부를 수 있어요? 아마 못할걸요 나는 같은 노래를 천 번이상 반복할 수 있어요. 춤도 마찬가지예요. 체육관에서 같은 동작을 밤새 반복하다보면 운동화 한 개가 다 닳아버려요. 아저씨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못할걸요. 내가 그냥 노느라고 그런 것 같아요?”
그 아이가 던지는 말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 안에 집요하고 섬찟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마다 무엇을 꾸준히 반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그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기획사에 스카웃이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명한 가수가 됐다. 나오는 음반마다 백만장 이상이 팔렸다.
엊그제 나를 찾아온 그 아이의 부모가 중년의 가수가 된 아들 집 영상을 보여주었다. 드넓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은 초현대식 집이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풀장과 테니스장이 보였다. 노래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공예 부분에서 은주전자로 대상을 받은 엄씨가 있다. 그 가 만든 은주전자를 대통령이 국빈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은주전자를 만드는 장면을 봤다. 낡고 허름한 작업장에서 장인인 엄씨가 은가루를 녹여 판을 만들었다. 그는 은판을 방바닥의 낮은 작업대 위에 올려 놓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망치로 한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보조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수작업방법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수천번 반복해서 은을 두드리는 행위는 기도같아 보이기도 했다. 소년시절부터 반복해서 꾸준히 은을 두드리다 보니 장인이 됐다고 했다.
같은 걸 반복하면 싫증이 난다. 그걸 참아내야 뭔가가 이루어진다. 뮤지션이나 장인뿐 아니라 공부도 반복인 것 같다. 나는 머리가 둔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한번 읽으면 나는 열번을 반복해서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남들이 백번을 읽으면 천 번을 반복하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나무에 물을 주듯 그렇게 꾸준히 반복하는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인공지능같이 단번에 모든 것이 입력이 되지 않게 만들어 놓았다. 무수히 반복해야 두뇌도 근육도 간신히 기억을 하는 것 같다. 반복을 하지 않으면 입력됐던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삭제되어 버렸다.
인내하면서 얼마나 반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하얀 도화지 위에 동그라미를 반복해서 그리게 했다. 앉아서 착실하게 동그라미를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마지못해 대충 그리다 마는 아이도 있었다. 동그라미가 아니라 네모나 세모같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그리지 않고 도화지를 돌돌말아서 다른 아이들의 머리를 때리면서 장난치는 아이도 있었다. 어린 싹들이지만 그 품질을 가늠할 수 있는 테스트가 아닐까. 바보도 같은 일을 삼십분은 반복할 수 있다. 보통 사람도 같은 일을 삼일은 할 수 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그러나 같은 것을 삼십년간 반복하는 사람은 내공이 있는 사람이다.
추사 김정희는 같은 글자를 만 번 반복해서 썼더니 그 글자에서 강물이 흘러나오더라고 했다. 그는 일생 붓 천자루를 닳게 하고 벼루 열개가 구멍이 날 정도로 글쓰기를 반복했다.
공자님은 주역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바람에 가죽으로 장정된 책이 몇번이나 닳아 없어졌다고 한다. 논어는 배웠어도 반복해서 복습을 하라고 알려주고 있다.
나는 일생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진리를 얻은 것 같다. 그리고 노년이 되어 성경 속에 있는 다윗의 시 한 편을 손 글씨로 반복해서 써 나가고 있다. 한 자 한자 또박또박 기도하듯 정성을 들인다. 그렇게 만 번을 반복해서 쓰면 그 시에서 무엇이 흘러나올까 기다려진다. 산다는 게 반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