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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22]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18

양해천 2018. 1. 22. 09:57

[홍익인간 222]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18

2012년 02월 09일 (목) 09:37:55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단군조선(번한,마한)과 하은주(夏殷周)의 관계역사 12- 

[단군조선과 주(周)나라 춘추(春秋)시대 1] 

13. 주나라 제13대 평왕(平王) 

주나라 평왕은 서기전770년부터 서기전720년까지 51년 재위하였다. 

평왕의 이름은 의구(宜臼)이다. 

평왕은 서주(西周)시대의 수도이던 서안(西安)의 동쪽에 있는 낙양에 수도를 두었으므로 이때부터 동주(東周)시대라 부른다. 

[한] 서기전753년 무자년(戊子年)에 마한(馬韓) 사우(斯虞) 때 주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하였다.<馬韓世家> 

서기전753년은 주나라 평왕 18년이 되는 해이다. 주나라 왕 의구가 곧 주나라 제14대인 동주(東周)시대의 제1대 평왕(平王)이 된다. 

주나라 왕 의구가 마한에 신년인사를 올린 것이 되는데, 마조선은 천왕격의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로서 천자국(天子國)인 주나라의 상국(上國)이 된다. 즉 주나라는 천하의 왕인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로서 단군조선의 체계로 보면 군국(君國)의 아래인 일반 제후국에 해당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군(君)이하 일반 제후를 한(汗)이라 하였고, 한(汗)의 윗 단계로 특히 삼한(三韓)의 한을 한(韓)이라 한 것이 된다. 물론 한(韓)과 한(汗)은 비왕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한의 사우는 마조선의 제26대 임금으로 서기전754년부터 서기전678년까지 77년 재위하였다. 서기전753년은 마한 사우의 즉위 2년이 되는 해이다. 

서기전741년에 초(楚)나라의 웅거(熊渠)가 왕을 칭하였다. 주나라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왕을 칭한 나라가 초나라이다. 

서기전722년이 되는 해를 시작으로 하여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라는 역사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14. 주나라 제14대 환왕(桓王) 

주나라 환왕은 서기전719년부터 서기전697년까지 23년 재위하였다. 

[한] 서기전707년 갑술년(甲戌년)에 단군조선 제35대 사벌(沙伐) 단군이 조을(祖乙)을 파견하여 연(燕)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다는 것을 알려왔다.<檀君世紀> 

서기전707년은 주나라 환왕(桓王)의 13년이 되는 해가 된다. 

단군조선 제35대 사벌 천왕은 서기전772년부터 서기전705년까지 68년 재위하였으며, 서기전707년은 재위 66년이 되는 해가 된다. 

이때 단군조선이 국경을 접한 주나라의 제후국인 연(燕)나라와, 연과 접한 제(齊)나라와 전쟁한 것이 되는데, 춘추시대 이후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떨어져 제후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것을 단군조선이 간파하고 군사를 움직인 것이 된다. 이때의 단군조선의 군사는 연나라와 근접하였던 고죽국(孤竹國)과 기후국(箕侯國)과 구려국(句麗國) 또는 번한(番韓)의 군사가 될 것이다. 

여기서 연나라 서울은, 지금의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며, 서기전650년경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연합군이 영지국(永支國), 고죽국(孤竹國) 등을 정벌할 때,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인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 수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 것이다. 당시 고죽국의 수도가 탁수(涿水)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하면 연나라 서울은 탁주(涿州)의 서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이현(易縣)이 될 것이다. 

연나라는 서기전650년경 고죽국이 망한 이후에 수도를 탁수 부근으로 옮겨 계(薊)라고 한 것이 되며, 서기전226년에 진(秦)나라에 쫓기어 요동(遼東)으로 간 때의 수도는 지금의 북경으로서 또한 계(薊)라고 한 것이 된다.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해 있는 계(薊)는 진한(秦漢)시대 이후에 생긴 것이 된다. 

서기전707년 이때까지 산동(山東)지역과 회대(淮岱)지역에 단군조선의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되고, 특히 회이(淮夷:회국) 등은 서기전221년 진시황(秦始皇) 때 진(秦)나라에 완전히 흡수되어 복속한 것이 된다. 

15. 주나라 제15대 장왕(莊王) 

주나라 장왕은 서기전696년부터 서기전682년까지 15년 재위하였다. 

서기전690년 제(齊)나라 양공이 기국(紀國)을 멸하였다. 이 기국은 산동지역에 있었으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될 것인데, 기국(杞國)을 다르게 적은 것이 될 것이다. 기국(杞國)은 하(夏)나라의 제후국이었다라고도 하나, 기국(杞國)이 망할 우려가 없다라는 뜻의 기우(杞憂)라는 고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산동지역에 존재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나라인 것이다. 기국(紀國)이 기국(杞國)이라면 기국(杞國)이 하(夏)나라 때부터 존속한 나라이므로 최소한 서기전2200년경부터 이때까지 약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16. 주나라 제16대 이왕(釐王) 

주나라 이왕은 서기전681년부터 서기전677년까지 5년 재위하였다. 

서기전680년경에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서국(徐國:서이)을 정벌하여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옮기게 하였다. 

주나라 목왕(穆王) 때인 서기전1000년경에 서국(徐國:서이)의 소위 서언왕(徐偃王)이 주나라를 쳐서 황하까지 몰아 부치고 36국을 거느린 대국(大國)이 되었고, 이에 주나라 천자(天子)인 목왕이 동방의 제후국들을 서언왕을 받들도록 용인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초나라 문왕에게 수도를 함락당한 서기680년까지 약 300년간 서국이 전성기를 누린 것이 된다. 

서국은 초나라 문왕에게 패하여 서산(徐山)으로 옮겼다가, 패자가 된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며, 차차 독립을 하였다가, 다시 초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을 받았고, 결국 서기512년에 오나라 합려왕에게 완전히 망하였다. 

서기전679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었다. 

17. 주나라 17대 혜왕(惠王) 

주나라 혜왕은 서기전676년부터 서기전652년까지 25년 재위하였다. 

서기전675년에 왕자 퇴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서기전673년에 혜왕이 복위되었다.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가 서국(徐國)을 병합하였다. 이에 서국은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는데 얼마 후 다시 독립하였던 것이 된다. 

서기전665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단군조선의 영지국(永支國),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제나라 환공이 영지국과 고죽국을 정벌한 것은 분명히 이 이전에 연나라나 제나라가 단군조선의 국경을 침범하여 이에 대하여 단군조선이 정벌하였던 것이 되고, 이를 다시 연나라와 제나라가 반격한 것이 될 것이다. 서기707년에 단군조선이 연나라의 수도를 돌파하여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 부근에서 전쟁하여 승리한 적이 있다. 

이때 제나라가 주나라의 제후국 중에서 패자가 된 것은 소위 관중(管仲) 때문이다. 제나라 환공이 단군조선의 영지국과 고죽국을 정벌한 것도 관중이 제나라의 국력을 신장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제나라가 패자가 되어 주나라 천자를 대신하여 주나라를 지킨 것이 된다. 

서기전660년에 위(衛)나라 의공이 북적(北狄:북융)의 수만족(鄋瞞族)에게 망하고 제나라 환공에 의하여 위(衛)나라가 부활되었다. 여기서 수만족은 수유족(須臾族) 즉 은나라 왕족으로서 단군조선에 망명한 기자(箕子)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며, 수유족을 비하한 명칭이 된다. 

즉,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수만이라 불리는 기후국(箕侯國)이 주나라의 제후국인 위(衛)나라를 멸망시켰다가, 당시 주나라의 패자였던 제나라가 주나라 천자를 대신하여 위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 된다. 위(衛)나라는 서기전1122년경 주무왕의 아우인 강숙(康叔)이 봉해진 나라이다. 

위(衛)나라는 주나라 제후국 중에서 가장 나중에 망한 나라로서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胡亥:서기전210년~서기전207년)가 위공(衛公)인 군각(君角)을 폐하여 평민으로 만들어 위나라를 없앴던 것이다. 물론 소위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진(秦)나라 외 육국은 차례로 망하였는데,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마지막으로 망하였다. 

[한] 서기전653년 무진년(戊辰年)에 단군조선 제36대 매륵(買勒) 단군이 병력을 보내어 수유(기자의 후손)의 군대와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케 하였고, 이에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檀君世紀> 

서기전653년은 주나라 혜왕 25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까지 고죽국(孤竹國)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 된다. 고죽국은 연나라의 북쪽으로 발해만 서쪽에 위치한 것이 되고, 구려국(句麗國)의 남쪽이자 태항산 서북에 위치한 기후국(箕侯國)의 동쪽이며 번한(番韓)의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즉 고죽국은 지금의 북경(北京)과 탁수(涿水)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된다. 

고죽국은 고리국(藁釐國) 즉 구려국(句麗國)과 북쪽으로 접하여 구려국과 인연이 깊은 나라이다. 고리국은 해모수의 고향이며 해모수의 원래 성씨가 고씨(高氏)이므로 고구려라고도 한다. 해모수(서기전239년~서기전195년)는 북부여 시조로서 번조선의 기비(서기전232년~서기전222년)와 모의하여 서기전232년에 오가연정을 철폐하고 단군조선을 접수하여 단군(檀君:천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서기전653년 당시 고죽국의 국력이 쇠약해져 단군조선이 연나라를 정벌할 때는 군사를 내지 못하였던 것이 되는데, 이는 서기전665년에 제나라의 침공으로 약화되었던 것이 될 것이다. 이때 기후국(箕侯國)이 단군 천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내어 본국 군사와 함께 합공으로 연나라를 친 것이 된다. 이에 연나라는 당시 종주국(宗主國)이나 다름없던 패자(覇者)의 나라인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고 이에 제나라는 서기전651년까지 걸쳐 군사를 내어 단군조선의 영지성, 고죽, 구려 등의 서쪽 변경을 침공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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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음.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군(天君)임을 최초로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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