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30] 단군조선과 고대일본의 관계역사 2
-일본 신대역사(神代歷史) 개관 2-
[단군조선 제후(諸侯)의 역사]
<언파불합(彦波不合)>
언파불합은 서기전723년경 사람이다.
서기전723년 언파불합이 마한(馬韓) 관경 내 장수(將帥)로서 일본 땅 구주에 있던 웅습(熊襲:熊本:구마모또)의 난을 진압하도록 명을 받아 공을 세웠다.
천조대신(天照大神:대일령존)의 5세손이 되는 장군 언파불합이 웅습(熊襲:구마모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발한 장소는 마한(馬韓) 땅이 되는 한반도의 춘천(春川) 또는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되며, 그 아들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槃命:稻飯命)이 삼도(三島)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선500척을 이끌고 서기전667년에 출발한 장소 또한 한반도의 춘천 또는 남부지역이 된다.
장군 언파불합은 웅습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구주(九州)의 남쪽에 있는 협야(陜野)라는 땅에 제후로 봉해진 것이 된다. 그래서 언파불합의 후손들은 협야후(陜野侯)의 족속이 된다.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槃命)>
서기전667년에 단군조선에서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는데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여기서 삼도는 지금의 일본 땅인 구주(九州:큐슈), 사국(四國:시코쿠), 본주(本州:혼슈)로서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관경에 속한 땅이 된다.
서기전723년에 구주 땅 웅습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협야후로 봉해졌던 인물이 되는 언파불합(彦波不合)의 둘째 아들인 배반명(裵槃命)은, 협야후로서 삼도(三島)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삼도는 마한의 관할에 속하였으므로 협야후가 삼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667년 지금의 일본 땅 삼도(三島)에 난이 일어나자 단군조선(진조선) 제36대 매륵(買勒:서기전704년~서기전646년) 천왕이 마한(마조선)에 난을 진압하라 명을 내리고, 이 명을 받은 마한 궁홀(弓忽:서기전677년~?)은 협야후 배반명에게 명을 내렸던 것이며, 이에 협야후 배반명이 가족들을 마한 땅에 남겨둔 채 전선500척을 이끌고 삼도(三島)의 난을 진압한 것이 된다.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 토벌에 참여한 협야후의 무리들은 일본 땅에 정착하게 되고, 이에 배반명의 막내동생인 신무(神武)가 반란을 꾀하고서 반역하여 서기전660년에 천황이라 참칭하게 되는 것이다.
협야후 배반명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언파불합의 둘째 아들인 도반명(稻飯命)이다.
<반역자 신무(神武)>
신무는 언파불합의 막내 아들이며, 협야후 배반명(도반명)의 아우이다.
서기전667년에 협야후 배반명이 협야의 무리들과 군사를 이끌고 삼도의 반란을 진압하여 12월에 모두 평정하였던 것인데, 이후 막내아우인 신무(神武)가 반역하여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바다에 빠뜨려 죽인 후, 스스로 제후가 아닌 천황(天皇)이라 참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무(神武)의 7년 동정(東征)의 역사는 신무가 반역을 꾀하여 구주(九州)에 있던 협야(陜野)를 떠나 동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면서 3년 사이에 세 형들을 모두 바다에 수장시켜 죽이고는, 서기전660년 신유년(辛酉年)에 단군조선의 제도를 흉내내어 스스로 천황(天皇)이라 칭하기까지의 역사를 적은 것이 된다.
이로써 일본의 신대역사(神代歷史)는, 서기전2173년부터 서기전723년경까지는 두지도리로서 추장(酋長)의 역사가 되고, 서기전723년경부터 서기전660년경까지는 협야후(陜野侯)로서 제후(諸侯)의 역사가 되는 것이며, 서기전660년에 신무(神武)가 단군조선을 반역하고 천황(天皇)을 참칭함으로써 왕국(王國)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신무가 천황을 참칭할 당시에 삼도(三島)에는 많은 소국들이 있었다.
서기전2224년에 우순(虞舜)의 신하이면서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고 있던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스스로 하왕(夏王)이라 참칭하여 고대중국의 왕조를 시작하였고, 서기전660년에는 협야후(陜野侯)의 무리인 신무(神武)가 협야후 배반명(도반명)을 비롯한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스스로 천황(天皇)이라 참칭하였던 것이 된다. 이로써 고대중국과 고대일본의 역사는 단군조선에 대한 반역의 역사로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왕국 왜(倭:야마토) 역대기-
1. 제1대 신무왕(神武王) : 서기전660년~서기전585년(76년)
신무왕은 신일본반여언존(新日本磐余彦尊)이라 불리며 서기전711년생으로서 서기전660년에 천황(天皇)이라 참칭하여 왜(倭) 왕조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서기672년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이후에 붙여진 것이 된다.
2. 제2대 수정왕(綏靖王) : 서기전581년~서기전549년(33년)
3. 제3대 안녕왕(安寧王) : 서기전548년~서기전511년(38년)
4. 제4대 의덕왕(懿德王) : 서기전510년~서기전477년(34년)
5. 제5대 효소왕(孝昭王) : 서기전475년~서기전393년(83년)
6. 제6대 효안왕(孝安王) : 서기전392년~서기전291년(102년)
7. 제7대 교령왕(敎靈王) : 서기전290년~서기전215년(76년)
서기전217년에 회사(淮泗) 출신이던 서복(徐福:徐市)이 진시황(秦始皇)을 속여, 동남동녀, 전문기술자 등 500명과 함께 배를 타고 진(秦)나라를 떠나 일본 땅 기이(紀伊)의 불이산(不二山)에 도착하였다.
8. 제8대 효원왕(孝元王) : 서기전214년~서기전158년(57년)
서기전208년에 진(秦)나라에서 귀화한 서복(徐福)이 죽었다.
9. 제9대 개화왕(開化王) : 서기전157년~서기전98년(60년)
10. 제10대 숭신왕(崇神王) : 서기전97년~서기전30년(68년)
11. 제11대 수인왕(垂仁王) : 서기전29년~서기70년(99년)
서기전5년 3월에 왜희명(倭姬命)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祠堂)을 이세(伊勢)에 세웠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이 곧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곳이다.
12. 제12대 경행왕(景行王) : 서기71년~서기130년(60년)
13. 제13대 성무왕(成務王) : 서기131년~서기169년(39년)
일본서기에서는 성무왕의 재위기간이 서기131년부터 서기190년까지 60년이라 기록하고 있고, 중애왕이 서기192년부터 서기200년까지 9년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신공왕후가 서기179년부터 서기247년까지 69년간 섭정을 한 것이 되며, 이에 중애왕은 서기170년부터 서기178년까지 9년 재위한 것이 되는 바, 성무왕의 69년간의 재위기간은 실제로는 서기131년부터 서기169년까지 39년이 된다.
14. 제14대 중애왕(仲哀王) : 서기170년~서기178년(9년)
일본서기에서는 중애왕을 서기전192년부터 서기200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기170년부터 서기178년까지 9년 재위한 것이 된다.
15. 제15대 신공왕후(神功王后:卑彌呼) : 서기179년~서기247년(69년)
신공왕후는 비미호(卑彌呼)라 기록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서기201년부터 서기269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기179년부터 서기247년까지 69년 섭정한 것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신공왕후의 시대에 신공왕후가 신라(新羅)를 정벌(征伐)하였으며,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조공받았다는 식으로 하여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서기346년~서기375년)시대의 칠지도(七支刀) 역사를 포함시켜 백제의 실제역사를 약120년 앞당겨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공왕후의 업적과 관련시킨 기록들은 신공왕후의 역사를 터무니 없이 과장날조한 것에 불과하다.
16. 제16대 대여왕(臺與王) : 서기248년~서기269년(22년)
일본서기에서는 대여왕이 존재하지 않고 대여왕의 재위기간이 신공왕후의 재위기간에 포함되어 있으나, 실제로 신공왕후의 종녀(宗女: 宗室의 여자)인 대여(臺與)가 서기248년에 13세에 왕으로 즉위하여 서기269년까지 다스린 것이 된다.
서기269년에 서기179년부터 시작된 2대에 걸친 여왕의 시대가 끝나고, 서기270년에 다시 남자인 응신(應神)이 왕이 되었던 것이다.
17. 제16대 응신왕(應神王) : 서기270년~서기310년(41년)
18. 제17대 인덕왕(仁德王) : 서기313년~서기399년(87년)
19. 제18대 이중왕(履中王: 贊) : 서기400년~서기405년(6년)
20. 제19대 반정왕(反正王: 珍) : 서기406년~서기410년(5년)
21. 제20대 윤공왕(允恭王: 濟) : 서기412년~서기453년(42년)
22. 제21대 안강왕(安康王: 興) : 서기454년~서기456년(3년)
23. 제22대 웅략왕(雄略王: 武) : 서기458년~서기479년(23년)
이때부터 일본서기의 역사기록이 실제 연대기 역사와 일치하게 된다.
<이하 중략>
36. 제35대 서명왕(舒明王) : 서기629년~서기641년(13)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딸 즉 보황녀(寶皇女)인 제명(濟明)이 왕후가 되었다.
서기631년에 백제에서 무왕의 손자 부여풍(夫餘豊:태자 의자(義慈)의 아들)이 파견되어 왔다.
37. 제36대 황극왕(皇極王) : 서기642년~서기644년(3년)
황극왕은 제명(濟明)이라 기록되며,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딸이다.
38. 제37대 효덕왕(孝德王) : 서기645년~서기649년(5년)
39. 제38대 백치왕(白雉王) : 서기650년~서기654년(5년)
40. 제39대 황극왕(皇極王: 天豊) : 서기655년~서기661년(7년)
제36대 황극왕이 다시 왕이 되었다.
서기660년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여 망하였다.
서기660년에 부여풍(夫餘豊)이 백제로 급히 되돌아가니, 무왕의 조카인 복신이 부여풍을 왕으로 세워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백제에서 부흥운동이 3년간 이어졌다.
41. 제40대 천지왕(天智王) : 서기662년~서기671년(10년)
백제 제30대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용(夫餘勇)이라고 하며, 황극왕(제명)의 조카로서 고모(姑母)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서기663년 6월에 부여풍이 반역을 꾀하던 복신을 죽였다.
백제 풍왕이 왜(倭)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독촉하니, 왜가 구원병 27,000여명과 전함 1,000여 척을 보냈다.
이에 당나라는 백제부흥군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왕자 융을 백제왕으로 삼아 손인사와 함께 파견하였다. 이에 민심이 흔들렸다. 이때 유인궤는 주류성을 치기로 하였고,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과 문무왕의 신라군이 주류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인궤는 부여융과 함께 전함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진격하다 왜군을 만났다. 당군은 4전4승하여 왜 전선 400여척을 불태웠다. 이에 풍왕이 사라졌다. 백제의 모든 성이 함락당한 뒤에도 지수신이 홀로 임존성을 지켰는데, 흑치상지가 당군에 투항한 후, 흑치상지에 의하여 임존성이 무너져, 백제의 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났다.
풍왕(豊王)은 이때 왜(倭)로 돌아갔던 것이며, 서기672년에 형 부여용(夫餘勇)인 천지왕(天智王:서기662년~서기671년)을 이어 천무왕(天武王:서기672년~서기686년)이 되었던 것이고, 서기672년에 국호 왜(倭)를 고치어 일본(日本)이라 한 것이 된다. 백제 제30대 의자왕에게는 태자 효, 이하 왕자로 태, 융(隆), 용(勇), 풍(豊) 등이 있었던 것이다.
42. 제41대 천무왕(天武王) : 서기672년~서기686년(15년)
천무왕은 천지왕(부여용)의 아우가 되는데 부여용의 아우인 부여풍(夫餘豊:豊章)이 된다. 서기672년에 국호 왜(倭)를 고치어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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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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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