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27] 단군조선과 고대중국의 관계역사 23
-단군조선과 진(秦)나라와의 관계역사 2-
[진(秦)]
1. 제1대 진시황(秦始皇) 정(政)
진왕 정은 서기전221년 제(齊)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皇帝)라 칭하였다. 처음으로 황제라 칭하였다 하여 시황제(始皇帝)라 한다.
진시황 정(政)은 하은주(夏殷周) 이래 고대중국의 임금들이 모두 천자(天子)로서 왕(王)이라 한 것을 뛰어넘어, 하은주 이전의 태호복희(太皞伏羲)와 염제신농(炎帝神農)과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삼황(三皇)과 그 이하 소호금천(少昊金天), 전욱고양(顚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요(堯), 순(荀)의 오제(五帝) 등의 삼황오제(三皇五帝)와 못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이를 본 따서, 왕(王) 위의 왕(王)으로서 최고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쓴 것이다.
한편, 우리 역사로는 고대중국의 삼황(三皇)은 배달나라의 천군(天君)과 천자(天子)이며, 오제(五帝) 또한 배달나라와 단군조선 초기의 천자(天子)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배달나라의 본 임금은 천군의 아버지가 되는 한웅(桓雄)으로서 천왕(天王)이며, 단군조선의 본 임금 또한 천왕격의 비왕(裨王)이 되는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을 거느린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 이하 천왕(天王)들이다.
천자(天子)는 천제(天帝)나 천왕(天王)이 봉하는 천국(天國)의 자작(子爵)이다. 천군(天君)은 천왕(天王)의 아들이다. 또, 천왕(天王)은 천제(天帝)의 아들이다. 한웅은 천제(天帝) 한인(桓因)의 아들이며, 단군(檀君)은 곧 천군(天君)인 바, 단군왕검은 한웅 천왕의 아들인 천군(天君)으로서 조선(朝鮮)을 개국하여 본 임금인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고, 이어 천왕격의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거느려 천왕(天王) 위의 천제(天帝)로 받들어졌으며, 부루 천왕 이하는 천제자(天帝子)이며 후손으로서 천왕(天王)이 된다.
즉, 고대중국의 최고 임금들은 모두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의 천자(天子)로서 천하왕(天下王)이었던 것이다. 특히 요와 순이 제(帝)라고 기록되면, 단군왕검은 천제(天帝)로 기록되는 것이 된다.
한편, 진시황을 지나 한(漢)나라 시대에는 최고의 임금을 황제(皇帝)라 하면서 그 아래에 왕(王), 군(君), 제후(諸侯) 등을 두었는데, 황제를 또한 천자(天子)라고 함으로써, 진시황과는 달리 천자를 황제(皇帝)로 하여 나름대로 승격시켰던 것이 된다. 그리하여 후대에 일반적으로 천자는 일반 왕(王)을 거느린 황제(皇帝)라는 의미가 되고, 원래의 작위천자(爵爲天子)의 천자라는 의미보다 왕(王)을 봉하는 천왕(天王)과 같은 위치로 끌어 올려 버린 것이 된다. 즉, 천자(天子)를 천왕(天王)으로 만들어 원래의 의미를 와전(訛傳)시키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것이 된다.
원래의 천자(天子)는 천왕이나 천제의 제후(諸侯)로서 역법제정권(曆法制定權)이 없었다. 그런데, 당요(唐堯)나 하우(夏禹)처럼 천자(天子)가 반역(反逆)하여 독단(獨壇)을 차리고 스스로 역법(曆法)을 제정하는 등 하여 천왕의 권한을 훔쳐 흉내 내었는 바, 이러한 무도(無道)한 횡포를 후대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등 스스로 황제(皇帝) 또는 천자(天子)라고 칭하는 고대중국의 왕들이 답습하였던 것이 된다.
원래 봉선(封禪)은 제사장인 천군(天君), 천왕(天王), 천제(天帝)가 행하는 제천(祭天)의식이 아니라, 천왕(天王)이나 천제(天帝)에게 고(告)하는 의식으로서, 결국 천국(天國) 천조(天朝)의 상제(上帝)에 보고하는 것이 된다. 봉선(封禪)이라는 글자가 곧 자동적으로 아비의 대를 이은 것이 아니라, 진정이든 강압적이든 간에 선양(禪讓)을 통하여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음을 상제(上帝)에게 고함으로써, 사후에 정식으로 봉해지는 의식인 것이다. 봉선(封禪)의 봉(封)을 제단(祭壇)을 봉(封)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논리로 윤색한 것이 된다.
[중]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6국을 병합하니, 그 회이(淮夷)와 사이(四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후한서 동이열전>
이때까지 회대(淮岱)지역의 회이(淮夷)와 진(秦)나라 주위의 사방에 사이(四夷)가 있었는데, 진시황에 의하여 진나라에 복속한 것이 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리장성 부근의 단군조선 백성들이 대거 한반도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진한(辰韓:서기전209년~서기전57년)과 변한(弁韓:서기전209년경~서기42년)이 먼저 세워졌고, 이후 위만(衛滿)에게 쫓긴 번조선왕 기준(箕準)과 상장군 탁(卓)의 마한(馬韓:서기전194년~서기9년)이 세워졌다.
서기전217년에 회사(淮泗) 출신이던 서복(徐福:徐市)이 진시황(秦始皇)을 속여, 동남동녀, 전문기술자 등 500명과 함께 배를 타고 진나라를 떠나 일본 땅 기이(紀伊)의 불이산(不二山)에 도착하였으며, 서복은 서기전208년에 사망하였다.
여기서 사이(四夷)가 진나라의 동서남북에 있던 이족(夷族)이 아니라 회이(淮夷)가 있던 회대지역의 사이(泗夷) 또는 사이(沙夷)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회대지역에 있던 내륙 8이(夷) 중에서 후대까지 잔존하던 4이(夷)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 된다. 회수지역 부근에 사수(泗水)와 사수(沙水)도 있었던 것이 되어, 여기서 적고 있는 사이(四夷)가 정확하게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불명이나, 사이(泗夷)의 오기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로써 고대중국의 동쪽에 있었던 회대(淮岱)지역의 소위 내륙 8이 등의 동이족(東夷族)의 나라로 서기전221년까지 존속하던 나라는 모두 진(秦)나라에 흡수통일 되었는데, 이후의 기록에서 동이(東夷)는 만리장성 밖의 동쪽에 위치한,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여, 발해만 유역의 번조선, 마한 땅인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
서기전221년까지 고대중국의 내륙 동쪽인 회대지역에 존재하였던 동이족의 나라로서, 남이(藍夷)는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700년경까지 약1,634년의 역사를 가지고, 엄이(淹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700년경까지 약 540년의 역사를 가지며,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의 역사를 가지고, 회이(淮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221년까지 1,026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 밖의 래이(萊夷), 개이(介夷), 양이(陽夷), 우이(隅夷) 등의 생몰(生沒)의 역사가 불명인데, 이 중에서 래이는 서기전567년에 제나라에 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회대(淮岱)지역은 배달나라 후기가 되는 청구(靑邱) 시대의 중심지가 되고, 단군조선 시대에는 번한(番韓) 관경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이곳에 존재하던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은 단군조선의 서쪽에서 하은주(夏殷周)를 견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역사가 당우하은주진(唐虞夏殷周秦)의 6대(代)에 를 거쳐 2,102년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 된다.
서기전219년에 진시황이 태산(泰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봉선(封禪)을 행하였다.
서기전217년에 회사(淮泗) 출신이던 서복(徐福:徐市)이 진시황(秦始皇)을 속여, 동남동녀, 전문기술자 등 500명과 함께 배를 타고 진나라를 떠나 일본 땅 기이(紀伊)의 불이산(不二山)에 도착하였다.
서기전215년에 몽염을 대장으로 삼아 30만 대군으로 흉노를 치게 하고, 서쪽 감숙성(甘肅省)의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의 요양군(遼陽郡)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여기서 요양군의 요양(遼陽)이라는 말은 요수(遼水)의 남쪽이라는 말로서 소요수(小遼水)의 남쪽이 되는 곳이며, 지금의 장가구(長家口:장쟈커우) 부근 지역이 된다. 만리장성을 처음 쌓은 것이 아니라 주(周)나라 전국시대에 쌓아 두었던 기존의 성을 연결시킨 것이 된다.
장가구 북쪽에는 흉노(匈奴)가 있었고, 장가구 동남쪽에 위치한 만번한의 동쪽에는 북부여의 비왕(裨王)의 나라인 기씨(箕氏)의 번조선(番朝鮮)이 있었는데, 북부여와 번조선은 남의 나라를 명분없이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군자(君子)의 나라로서 만리장성을 굳이 쌓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한(漢)나라 때인 서기전202년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번조선과 동쪽으로 패수(浿水)인 지금의 난하(灤河)를 국경으로 삼았는데, 이때 진나라 장성과 연나라 때의 장성을 이어 지금의 북경 북쪽에 위치한 창평(昌平:襄平) 또는 지금의 계현(薊縣) 부근까지 만리장성을 이은 것으로 된다.
<분서갱유>
서기전213년에 승상 이사가 분서갱유의 단초가 되는 글을 올렸고, 시황제는 그대로 명령으로 포고하였다. 이에 맏아들 부소가 간하니 시황제가 크게 노하여 부소를 섬서성(陝西省)의 상군(上郡)에 귀양 보내어 몽염의 군사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
서기전212년에 방사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시황제를 비방하고 달아나니, 시황제가 크게 노하여 검찰관에게 명하여 엄중히 조사토록 하였으며, 이에 혹독한 검문으로 죄를 범한 464명이 검거되어 모두 함양에서 구덩이에 묻혀 죽었다.
<진시황의 사망>
서기전210년에 시황제가 호북, 호남, 강소, 절강 지방을 순시하다가 도중에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죽었다. 이사, 조고 등은 상의 끝에 천자의 상을 발표하지 않고, 시황제가 장남 부소를 불러다가 즉위시키라는 조서를 받았으나, 부소가 몽염과 결탁하고 있어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우므로 조서를 없애버리고, 거짓으로 시황제의 조서가 내렸다 하고 막내 아들 호해를 즉위시키고, 부소에게는 자살을 명하였다.
2. 제2대 호해(胡亥)
진나라 시황제의 막내 아들 호해가 즉위하였다. 호해 황제는 서기전209년부터 서기전208년까지 2년 재위하였다.
<진승(陳勝)의 난>
서기전209년에 진승(陳勝)이 공자 부소(扶蘇)와 초나라 장군 항연(項燕)을 내세우고 안휘성(安徽省)의 기(蘄)에 웅거하여 대초(大楚)라 하고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 되고 오광(吳廣)은 도위가 되었다.
이에 연제조(燕齊趙) 사람들 수만명이 번조선(番朝鮮)으로 망명하였고, 이에 번조선 기준왕(箕準王)은 그들을 상하운장(上下雲障)에 살도록 하였다.
이어 진승은 장이(張耳), 진여(陳餘)를 맞아들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장초(張楚)라 고쳤다.
진승은 친구인 무신(武臣)을 장군에 봉하여 조(趙)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니, 무신은 독립하여 조왕(趙王)이 되었다.
강소성 서주(徐州) 사람인 유방(劉邦)이 패(沛)에서 군사를 일으켜 패공(沛公)이 되었다.
제(齊)나라 사람 전담(田儋)이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었다.
조왕(趙王) 무신이 대장 한광(韓廣)에게 명하여 연(燕)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니, 한광은 연나라 땅을 점령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 되었다.
초나라 장수 주시(周市)가 위(魏)나라 땅을 평정하고, 위나라 공자 구(咎)를 맞아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서기전208년에 진승은 부하 장가(莊賈)에게 죽고, 장가는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이 위나라를 치니, 제나라와 초나라가 구원하다가 제왕 전담과 위왕 구는 주시와 함께 패하여 죽었다.
조왕 무신은 그의 부하 이량(李良)에게 죽고, 장이(張耳), 진여(陳餘)는 조헐(趙歇)을 내세워 조왕(趙王)으로 삼았다.
항량(項梁)이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을 찾아 회왕(懷王)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니, 초나라 회왕은 상장 송의(宋義)와 차장 항우(項羽)로 하여금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군사를 빼앗았다. 항우는 진나라 군사를 대파하여 상장군이 되었다.
진나라 군사가 계속 패하자 이를 숨겨왔던 조고(趙高)가 호해 황제의 노여움이 두려워 마침내 염악(閻樂)을 시켜 망이궁(望夷宮)에서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공자 자영(子嬰)을 진왕(秦王)으로 세웠다.
3. 제3대 영(嬰)
부소의 아들 공자 자영(子嬰)을 세워 진왕(秦王)으로 삼았다.
서기전207년 영은 왕위에 오르자 조고와 그 삼족을 죽였다.
항우가 패공과 함께 관중을 치려고 하였으나, 노장(老將)들이 성미 급한 항우 대신에 패공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패공(沛公)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치고 장량이 패공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였는데, 패공이 진나라 군사를 대파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 패상(覇上)에 이르니, 진왕 자영이 나와서 항복하였다. 진나라 영 황제는 서기전207년에 즉위하였으나 이해에 진나라는 망하였다.
이로써 진나라는 서기전221년부터 서기전207년까지 3대 15년만에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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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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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음.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군(天君)임을 최초로 밝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