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344] 고려(高麗) 연대기 6

양해천 2018. 1. 23. 13:16

[홍익인간 344] 고려(高麗) 연대기 6

2012년 06월 08일 (금) 06:33:28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17. 제17대 인종(仁宗:서기1123년~서기1146년) 

예종의 태자 해가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이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이며 인종의 모인 것이다. 이에 이자겸은 수태사 중서령이라는 최고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여보냈다. 또, 이자겸은 당시 군사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금나라가 송나라를 하남성으로 쫓아낸 뒤, 고려에 군신관계를 강요하므로, 고려는 이자겸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신관계를 맺도록 하여 금나라를 군주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하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 
서기1126년에 인종이 이자겸에게 불만을 품었고 어명을 받은 지녹연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가 척준경의 아우인 척준신과 척순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은 즉시 궁을 포위하였고, 지녹연의 군대는 패하고 말았다. 이에 인종은 후원인 산호정으로 피신하였다. 

서기1127년에 이자겸은 궁궐에 불을 지르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자겸은 시기가 아니라 하여 조서를 돌려보내고 인종을 연경국에 유폐시켰으며, 지녹연은 귀양을 보냈다. 이로써 고려는 이자겸과 척준경의 시대가 되었다. 

이후 이자겸은 인종을 독살하려 시도하였으나 이자겸의 넷째딸인 왕비의 기지로 독약을 마시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내시 최사전이 인종에게 척준경에게 명을 내려 이자겸을 처단하라고 간하였다. 인종은 척준경에게 밀서를 보내고 백마와 은병 등의 선물을 주었으며, 이후 인종은 이자겸이 연경궁을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자 즉시 척준경에게 밀서를 보내어 이자겸을 처단하라 하였으며, 이에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와 이자겸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이자겸과 그 가족은 전라남도 영광으로 귀양을 가고 두 왕비는 축출되었다. 이후 척준경도 탄핵을 받아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서기1127년에 인종은 이자겸의 난으로 불탄 개성의 궁궐을 다시 지었다. 

문신 정지상이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하였으며, 이에 인종은 묘청을 국사로 삼았다. 

서기1129년에 서적소를 설치하였다. 

서기1132년 임자년(壬子年)에 광주목(廣州牧)을 지낸 윤언이(尹彦頤)가 서경으로 행차한 인종(仁宗)에게 건원칭제(建元稱帝)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군(中軍)의 김부식은, “윤언이가 정지상(鄭知常:?~서기1135년)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서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였을 때에는 건원(建元)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國學生)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上奏)하도록 하였으니, 대저 대금국(大金國)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타서 제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여 임금께 상주(上奏)하였다. 

이러한 김부식의 상주에 대하여 윤언이는 스스로 변명하는 자해표(自解表)에서, “건원칭제를 청한 근본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태조(연호 天授, 神聖太王)와 광종(연호 光德, 峻豊, 皇帝)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하였어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大金)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라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 땅에 침입해 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 것인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라고 하는 것인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보았자 패하여 오히려 몸둘 곳초차 없어질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을 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으로 정벌의 역(役:싸움)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義)로써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道)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서기1133년에 무학재를 폐지하였다. 

<묘청의 난> 
서기1135년에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을 벌였다. 이에 서경 출신의 정지상, 백수한이 동조하였다. 

이후 인종은 자주 서경으로 행차하였으며,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을 지었다. 묘청은 인종에게 칭제건원하라 간하였으며, 금나라를 정벌하도록 권하였다. 이때 조정은 묘청 등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서경파와 이에 반대하는 김부식 등의 개경파로 나뉘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서경의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져 궁이 파손되고, 인종이 서경 행차할 때 폭풍우가 몰아쳐 사람과 말이 피해를 입는 등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묘청이 사술로서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권하였으나, 인종이 묘청의 사술을 알고서는 서경천도계획을 완전히 취소하게 되었고, 이에 묘청은 조광 등과 함께 난을 도모하였다. 

묘청은 서북면 병마사 이중병 이하 관리들과 개경 출신의 민간인을 모두 잡아 소금 창고에 가두었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서북면 각지의 수령을 새로이 임명하였고, 개경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반란 소식을 들은 인종은 묘청을 회유하려 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렸으나, 묘청이 임금을 바꾸기 위한 난이 아니며 서경천도를 실현하고자 일으킨 것이라 하며 거부하고 오히려 사신을 통하여 서경천도를 권하는 표문을 올렸다. 이에 개경파들이 모두 묘청의 반란군을 토벌해야 한다 하자 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김부식이 토벌군의 원수가 되었으며, 정지상과 백수한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임종에게 간하여 정지상과 백수한은 결국 참수형을 당하였다. 김부식은 서경의 외곽을 포위한 다음 조광에게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목숨을 살려 준다는 확신을 주고 조광을 회유하니 조광이 묘청을 배신하여 항복하고, 묘청의 목을 베어 윤첨을 시켜 인종에게 바쳤다. 인종이 윤첨을 용서하려 하자 대신들이 반대하여 윰첨이 감옥에 갇혔다. 이에 조광은 조정의 약속이 거짓임을 알고서 김부식과 전쟁을 계속하였다. 김부식이 지구전을 펼치자 조광의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날이 갈수록 사기가 떨어졌다. 

서기1136년 2월에, 김부식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서경성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조광은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부하들도 뒤를 따름으로써 묘청의 난은 막을 내렸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인종의 신임을 얻어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서기1141년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서기1145년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하였다. 

서기1146년 인종은 38세의 나이로 붕하였고, 태자 현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태자 현은 학문은 뒷전이고 오락이나 격구 시합을 즐겼다. 태자의 어머니 공예왕후가 인종에게 태자를 둘째 아들로 바꾸라고 간하였으나, 인종의 신임을 받던 예부시랑 정습명이 태자를 잘 보필하겠다 하여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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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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