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361]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6
2012년 06월 25일 (월) 07:30:43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16. 제16대 인조(仁祖:서기1624년~서기1649년)
서인들에 의하여 선조의 5자인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즉위하였다. 이에 대북파는 모두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반정의 주역들은 모두 1등공신이 되었는데, 이괄은 2등공신으로 한성판윤에 봉해졌으나 불만이 많았다. 이에 이괄은 평안도 병마 절도사가 되어 영변으로 쫓겨났다. 이후 이괄은 자신과 아들 전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에 인조는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괄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괄의 난>
서기1624년 1월에 이괄은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도원수 장만이 머무는 평양을 피하여 한성으로 향하였고, 황주에서 관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이괄의 군대는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지키던 관군까지 격파하였다. 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공주로 피난하였다. 2월 11일에 이괄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한성으로 들어왔다. 이괄은 선조의 10자인 흥안군을 즉위시켰다. 이괄은 죄수들을 풀어주고 곡식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평양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장만이 군사를 모아 한성을 향하였는데, 길마재(무악재)에서 이괄의 군사와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크게 패한 이괄은 기익현, 이수백 등의 부하를 이끌고 경기도 광주로 도망쳤다. 그런데, 부하 기익현과 이수백이 이괄을 살해하였다. 이에 이괄의 부하들은 모두 흩어지고 왕이 되었던 흥안군도 도망치다 잡혀 죽어 이괄의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서기1626년에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가 죽고 아들 태종 홍태제가 즉위하였다. 이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쳤는데,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을 위하여 복수를 한다는 구실로 조선침략을 결정했다.
<정묘호란>
서기1627년 1월에 후금의 아민은 3만여 군사로 조선을 쳐들어 왔다. 후금의 군사는 용천, 곽산, 정주를 점령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홍은 전사하였으며, 정봉수, 이립 등의 의병이 일어나 활약하였으나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 황주에 이르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갔다. 유도대장으로 서울을 지키던 김상용은 후금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국고와 병조, 호조의 창고 등에 불을 질렀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장만은 적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2월 9일에 후금의 부장 유해가 강화도로 찾아와 화친을 청하였다. 최명길과 이귀 등이 화친을 간하여 3월 3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후금과 조선은 형제관계가 되었다.
서기1628년에 벨테브레가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서기1631년에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등을 수입하였다.
서기1632년에 후금이 사신을 보내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
서기1636년에 왕비 한씨가 죽자 후금의 용골대, 마부대 등이 조의를 표하러 왔다가 조선은 후금을 섬기라 하자 조선의 신하들의 위협으로 겁에 질려 달아났다. 이해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바꾸었다.
<병자호란>
서기1636년 12월 초에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12월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넜으며, 13일에는 평양까지 도달하였고, 14일에는 장단(파주)까지 이르렀다. 적군이 홍제원에 이르자, 인조와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산성에는 1만2천여 군사와 50일분의 식량 밖에 없었다.
<삼전도 항복>
서기1637년 1월 초에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그 사이 청나라 군사들은 강화도로 피난갔던 세손과 왕자들을 모두 잡아왔다. 1월 30일에 인조는 서울 송파구 삼전동인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청의 조건>
1. 조선은 앞으로 청나라와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다.
2. 명나라와 당장 국교를 끊는다.
3. 세자와 왕자 및 신하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다.
4. 명나라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낸다.
5.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6. 매년 원하는 만큼 조공을 바친다.
7. 서로 국제결혼을 권할 것 기타 등등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로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로 끌려갔다. 청나라는 삼학사를 달래었으나 척화론을 포기하지 않자 협박과 고문으로 죽였다.
서기1645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조선으로 보내주었다. 청 태종은 최명길과 김상헌이 충신임을 알고서 귀국시켰다. 명나라로 도망하였던 임경업은 청나라가 명나라 도읍인 북경을 점령하자 청나라에 붙잡혔는데, 청 태종이 임경업이 아까워 설득하였으나 귀복하지 않자 감옥에 가두었다가, 조선에서는 김자점이 반대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으려 하덩 중에 임경업을 도망시킨 심기원이 역모에 연루되어, 김자점이 청나라에 임경업을 요구하여 귀국시켰고, 이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 임경업은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서기1646년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서양서적을 수입하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간하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귀국한지 3개월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7. 제17대 효종(孝宗:서기1649년~서기1659년)
인조의 둘째 아들로 세자인 봉림대군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등용하였다. 군사의 수도 늘리고 군비를 강화하였다. 효종은 이완과 북벌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완은 훈련대장이 되어 군사를 훈련시켰다. 네덜란드 사람으로 귀화한 박연이 명나라에서 수입된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가르쳤다.
서기1653년에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서기1658년에 제2차 나선(러시아)정벌에 나섰다.
서기1659년에 효종은 북벌을 결심하였다. 5월 5일에 출발하여 하였으나 5월 4일 밤에 발등에 난 종기가 낫지 않고 커져 결국 북벌을 포기하였다. 이에 효종이 41세로 붕하였다.
18. 제18대 현종(玄宗:서기1659년~서기1674년)
효종의 세자가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현종은 예론논쟁에 휘말렸다. 효종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죽은 둘째 아들 효종을 위하여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들의 주장대로 장자가 아니라서 일단 1년으로 정해졌다.
서기1674년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하여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 하는 예론논쟁이 다시 생겼다. 이때 서인들은 9개월이라 하고 남인들은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여 1년이라 주장하였다. 현종은 남인 편을 들어 1년으로 결정하였다.
서기1674년 8월에 현종이 38세로 붕하고 세자가 14세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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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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