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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362]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7

양해천 2018. 1. 23. 13:30
[홍익인간 362] 조선-대청 남북국시대 조선(朝鮮) 연대기 7
2012년 06월 26일 (화) 07:41:40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19. 제19대 숙종(肅宗:서기1674년~서기1720년) 

현종의 세자가 14세로 즉위하였다. 이에 또다시 예론논쟁이 벌어져 결국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은 송시열의 처리문제를 놓고, 처형해야 한다는 허목의 청남파와 귀양을 보내면 된다는 허적의 탁남파로 대립하였는데 허적이 승리하여 송시열은 귀양을 갔다. 

서기1678년에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서기1680년에 숙종이 허적의 조부에게 시호를 내리는 날에 비가 오므로 유악(기름 바른 천막)을 갖다 주도록 하였는데, 이미 가져갔다 하므로 괘씸하게 여기어, 화가 난 숙종은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때 남인들은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상처를 입었다. 서인들도 남인의 처리문제로 노장파와 소장파로 대립하였다. 

인경왕후가 20세로 병들어 죽자 숙종은 나인 장씨와 가까이 지냈다. 이에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는 이 사실을 알고 장씨를 궁에서 내쫓았다. 이에 숙종은 서인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맞았는데 인현왕후이다. 

서기1682년에 명성대비가 죽자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장씨를 불러들여 정2품의 후궁인 소의에 봉하였다. 이에 장씨를 불러들이는 데 가장 공이 큰 남인 조사석이 우의정이 되었다. 장씨 소의의 오라비 장희재를 금군별장에 임명하였다. 이때 서포 김만중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김만중을 귀양보냈다. 

서기1688년 10월에 장씨 소의가 왕자 균을 낳았다. 

서기1689년 1월에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삼고 장씨는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송시열이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송시열을 귀양 보내고 남인인 권대운을 영의정에 임명하니 남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송시열은 사약을 받아 죽었다. 희빈 장씨가 왕비 민씨 인현왕후를 모함하니 왕비 민씨는 폐비되었고 장씨가 왕후가 되었다. 

<안용복과 독도> 
서기1693년에 조선 수군 안용복이 훈련중 폭풍을 만나 울릉도에 피신하였는데, 왜선 7척을 발견하고는 물러가라 하였으나, 왜인들이 안용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끌고갔다. 이에 안용복은 관백에게서 울릉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문서를 받아 조선으로 향하였는데, 왜인들이 다시 납치하여 대마도로 끌고 갔다. 

그러자 대마도 도주는 일본 조정에 연락하였다가 안용복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라는 연락을 받고서는 오히려 문서를 빼앗고 50일 뒤에야 안용복을 동래에 있는 왜관으로 보냈고 왜관에서는 다시 40일간 붙잡아 두었다가 동래부사에게 넘겼다. 이때 왜인이 안옹복이 일본에서 말썽을 피웠으니 벌주라고 하였고, 이에 동래부사는 왜인의 말만 듣고 안용복을 2년이나 옥에 가두었다. 

서기1694년 3월에 우의정 민암과 함이완이 서인을 없앨 음모를 꾸미다 이를 안 궁녀가 숙종에게 고하자, 숙종은 민암, 권대운 등의 남인들을 내쫓고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에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후궁이 되었다. 

서기1696년에 풀려난 안용복은 사람들을 모아 다시 울릉도로 갔는데, 예상대로 왜인들이 고기를 잡고 있으므로 쫓아냈고 다음날 독도로 들어가니 전날의 왜인들이 있으므로 또한 이 왜인들을 쫓아 일본으로 가서 따지게 되었다. 

서기1697년에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하는 문서를 보내왔다. 

서기1701년에 인현왕후가 죽자 희빈 장씨의 저주 탓이라 하여 사약을 내리고, 장씨 처리문제로 대립하던 노론과 소론 중 반대했던 소론과 남인들을 귀양보냈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광해군 이래 토지의 넓이를 측정하던 양전을 마무리 지었다. 

서기1708년에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서기1712년에 백두산 정계비를 건립하였다. 

20. 제20대 경종(景宗:서기1720년~서기1724년) 

숙종의 세자인 희빈 장씨의 아들이 33세로 즉위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에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하는 후계자 문제를 꺼내니, 소론이 거세게 반대하였다. 

서기1721년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였다. 

노론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 청정 문제로 소론과 싸우니, 소론이 노론을 반역으로 몰아 노론의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등이 사약을 받고 많은 사람이 귀양을 갔다. 

서기1724년에 경종이 병으로 붕하자 연잉군이 즉위하였다. 

21. 제21대 영조(英祖:서기1724년~서기1776년) 

무수리 출신이던 숙빈 최씨의 아들인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였다. 이에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등용되었다. 

서기1725년에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노론이 옛일을 들추어 소론을 보복하려 하자 영조는 노론을 쫓아내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서기1727년 영조는 암행어사 박문수를 시켜 탐관오리를 벌주게 하였다. 이때 박문수는 경상도를 시찰하다가 홍수가 나자,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에 장계를 올리면 10일이나 걸리므로 먼저 경상도에서 곡식 천여석을 모아 세척의 배에 싣고 강원도로 가서 나누어 주었다. 이때 명을 받은 경상감사가 박문수의 죄상을 고발하니 노론인 대사헌 이병상이 소론인 박문수를 벌하라 간하였으나, 영조는 돌아와서 조치한 내용을 보고한 박문수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서기1728년 3월에 소론과 남인측의 이인좌, 심유현, 이유익 등은 영조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을 올립하려, 평안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 군사력이 있는 무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는 청주성을 공격하여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인 후 전국에 격문을 돌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청주로 보냈는데, 이때 종사관 박문수가 따라갔다. 안성에서 반란군과 관군이 격렬하게 싸웠는데, 전투에서 밀린 반란군이 산으로 후퇴하여 지원군을 기다리다 종사관 박문수가 이끄는 관군이 나타나 격파되고 이인좌는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지고 달아나다가 붙잡혀 그의 무리 수십명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영조는 노론의 우두머리 민진원과 소론의 우두머리 이광자를 불러 화해하도록 주선하였고, 이들이 화해를 받아들여 영조는 노론인 홍치중을 영의정에, 소론인 이태좌를 좌의정에 임명했다. 

서기1736년에 박세당이 색경을 저술하였다. 

서기1742년에 영조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웠다. 

서기1749년에 영조는 15세가 된 장헌세자에게 섭정을 맡겼다. 이에 세자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후궁 숙의문씨 등이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서기1750년에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세금 부족분을 메우기 위하여 어업세, 염세, 선박세 등을 국가에서 직접 거두어 들였다. 토지 1결당 2두씩 거두어 들였다. 농민들이 가뭄으로 피해를 보자 저수지 등 수리시설을 고치거나 새로 쌓게 하였다. 

서기1756년에 박문수가 66세로 졸하였다. 

서기1758년 7월에 술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 

서기1762년에 형조판서 윤급의 집을 드나들던 나경언이 형조에 세자를 모함하는 내용으로 투서하였다. 이에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과 세자를 따르던 신하들이 나경언이 모함한다고 간하여 나경언은 투옥되었고, 이때 세자는 맨발로 경희궁 뜰에 엎드려 사죄하였다. 영조는 세자를 미워하여 뒤주에 가두니 8일만에 세자가 죽었다. 이후 영조는 벽파의 모함으로 쫓겨났던 홍봉한을 불러들였고, 세자에게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서기1763년에 성호 이익 선생이 돌아가셨다. 고구마가 전래되었다. 

서기1776년에 영조가 붕하자 대리청정을 하던 세손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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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한 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였으며, 우비는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등에 새겨진 문자를 단군조선 문자로서 최초로 해독한 학자 허대동 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의 연구에 검증차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그 위헤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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