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二章
於是 衆論遂定 人望歸於王國主張之昔氏
어시 중론수정 인망귀어왕국주장지석씨
昔氏者 東堡謫人之裔 自昔世住居於海濱者也
석씨자 동보적인지예 자석세주거어해빈자야
壯大而有知略 南解氏以女妻之
장대이유지략 남해씨이여처지
至是依於衆望而繼位 稱脫解王 卽脫解於保守桎梏之意也
지시의어중망이계위 칭탈해왕 즉탈해어보수질곡지의야
又稱徐羅國 始用干戈 平定境內 用兵過度 畢竟受斥
우칭서라국 시용간과 평정경내 용병과도 필경수척
衆論 復歸於朴氏之保守 於是 朴氏復繼 廢王國之稱
중론 복귀어박씨지보수 어시 박씨복계 폐왕국지칭
經四世 衆論再歸於昔氏 但不願征伐之事 於是 昔氏復繼
경사세 중론재귀어석씨 단불원정벌지사 어시 석씨복계
誓衆以不行征伐 是爲伐休氏也
서중이불행정벌 시위벌휴씨야
昔氏四世之間 征伐又作 衆論 歸於金氏之中和
석씨사세지간 정벌우작 중론 귀어김씨지중화
金氏者 元來符都東遷之族 而溫讓德厚 祗摩氏以孫女妻之
김씨자 원래부도동천지족 이온양덕후 지마씨이손녀처지
至是繼位 是爲味雛氏也
지시계위 시위미추씨야
當此之時 西北之患繼作一無所措 衆論 復歸於昔氏
당차지시 서북지환계작일무소조 중론 복귀어석씨
於是 昔氏又復繼位 三世之間 征事許多 蕩盡民物 大受時斥
어시 석씨우복계위 삼세지간 정사허다 탕진민물 대수시척
衆論 再歸於金氏 於是 金氏復繼 至于今日也.
중론 재귀어김씨 어시 김씨복계 지우금일야.
[해설]
제32장
이에, 마침내 중론(衆論)이 결정되었으므로
인망(人望)이 왕국 수립을 주장하는 석(昔)씨에로 돌아 왔다.
석씨는 동쪽 작은성(東堡)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바닷가(海濱)에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있었으므로, 남해씨(南海氏)가 딸을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자리를 이어 탈해왕(脫解王)이라 칭하니,
즉 보수(保守)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또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경내(境內)를 평정하였다.
용병(用兵)을 과도하게 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昔氏)1)에게로 돌아 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니, 이에 석씨가 다시계승하여
무리에게 서약하고 정벌을 행하지 않으니, 이가 벌휴씨(伐休氏)였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김씨의 중화(中和)로 돌아왔다.
김씨는 원래 부도(符都)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살던 씨족으로,
따뜻하고 겸손하고 후덕(溫讓德厚)하여, 지마씨(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자리를 이으니, 이가 미추씨(味雛氏) 였다.
이 때를 당하여 서북에서 계속해서 우환이 일어나되,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전쟁이 허다하여 백성과 물자를 탕진하므로
크게 시대의 배척을 받았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세부해설]
1) 석씨 :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신라 제4대 국왕, 재위 57∼80
→ 언제 한반도로 들어온 것일까? 503년 그래서 동진하여 경주로 들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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