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第十二節
麗末 儒佛武三派爭權 國勢將危 殆忘立國之本
려말 유불무삼파쟁권 국세장위 태망입국지본
世人目寧海爲卜筮仙述之家
세인목녕해위복서선술지가
時 李太祖奉命 犯潦已發大軍 儒者金生甚憂乃求言於寧海
시 이태조봉명 범료이발대군 유자김생심우내구언어녕해
金生得言直走太祖陣中 密禀回軍之事
김생득언직주태조진중 밀품회군지사
太祖前夜夢得金尺云 一說則有僧自東海走來
태조전야몽득김척운 일설칙유승자동해주래
稟回軍事云 此僧或非無學之徒耶
품회군사운 차승혹비무학지도야
自東海走來則如有關於寧海 而無學者本非佛徒卽仙流 而常伴一人云
자동해주래칙여유관어녕해 이무학자본비불도즉선류 이상반일인운
金生之事則見於史錄之上 太祖回軍事 有二人之稟達歟
김생지사칙견어사록지상 태조회군사 유이인지품달여
[해설]
12절
고려말에 유(儒), 불(佛), 무(武) 세파가 권력을 쟁탈하므로
국세가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나
거의 입국(立國)의 근본(根本)을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이 영해(寧海)를 보니 복서선술(卜筮仙術)1)의 집이었다.
때에 이태조(李太祖)2)가 명을 받들어 장마를 무릅쓰고 이미 대군을 동원하였으므로
선비 김생3)이 심히 걱정하고 곧 영해(寧海)에 조언을 구하였다.
김생이 조언을 얻어 태조의 진중으로 곧바로 달려가서 회군할 것을 몰래 의논하니,
태조(太祖)가 전날 밤 꿈에 금척(金尺)을 얻었다4)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일설에는 중이 동해에서 달려와서 회군할 것을 아뢰었다고도 하니,
이 중이 혹 무학(無學)의 무리가 아닐까.
동해에서 달려왔다면 영해(寧海)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무학(無學)5)이 본래 불도(佛道)가 아니요, 즉 선류(仙流)며
언제나 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다고도 하였다.
김생(金生)의 일은 사록(史錄)6)에 보이니
태조(太祖) 회군의 일은 두 사람이 여쭌 것인가?
[세부해설]
1) 복서선술 : 선술로 점을 침. 또는 복서와 선술.
복서는 점을 치는 일이고 선술은 신선이 되는 술법을 일컫는다.
2) 이태조 : 1335~1408. 재위 1392~1398
공민왕 5년 1356년에 아버지 자춘과 함께 고려에 와서 복종한 뒤,
이듬해 유인우가 쌍성총관부(원이 고려 화주에 두었던 관청)를 공격할 때 비밀히 적과 내통했다.
우왕 14년 1388년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후에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한 후 7월에 왕이 되었다.
3) 김생 : 누군지 확실치 않다.
4) 금척을 얻었다 : 이성계가 꿈에 신인한테서 금척을 받아 왕이 되고
(용비어천가 13장, 83장 참조),
뒤에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몽금척을 만들어 거기에다
“천사금척수명지상(天賜金尺受命之祥)”이라 새겼다.
5) 무학 : 1327~1405. 속성은 박. 이름은 자초. 호는 무학이다.
묘향산 금강굴에서 수도했다.
6) 사록 : 어떤 책인지 확실하지 않다.
* 무학대사
고려말 행촌 이암 선생도
1335년 양주 천보산 태소암에서 소전도인(素佺道人)에게 비결을 얻어
단군세기와 태백진훈을 전하였고
무학대사도 양주 천보산 자락 회암사에 기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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