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부도지(符都誌)

징심록연의후기_제4장

양해천 2018. 1. 26. 14:49

* 박제상 선생의 요증 징심록연의(要正 澄心錄演義) 후기(後記)_4장 

- 박금 씀 

* 4장(四章) 

今原文이 雖不在手나 幸賴前日飜譯之記憶하야 系綴記得者數篇故로 謂之澄心錄演義하야 
供於原數理硏究之基本而原文回收之間은 姑付󰡔正要󰡕二字하야 以俟後日之正訂也라 
然이나 錄中重要者는 殆明瞭而又槪濟考證故로 庶幾無誤오 雖些少者라도 注意於本義之不失也라 
但其文體與句節之順序는 必多不符於原文하니 此則無可奈何者也오 
原文文體가 金尺誌以外는 亦非古體而殆變於近古則此轉寫之時에 難澁者를 必從俗而使易讀也라 
原文은 今在於文川錦湖綜合理學院(通稱梁山宅)而未知何處에 或有同本歟아 
금원문이 수부재수나 행뢰전일번역지기억하야 계철기득자수편고로 위지징심록연의하야 
공어원수리연구지기본이원문회수지간은 고부󰡔정요󰡕이자하야 이사후일지정정야라 
연이나 록중중요자는 태명료이우개제고증고로 서기무오오 수사소자라도 주의어본의지부실야라 
단기문체여구절지순서는 필다불부어원문하니 차칙무가내하자야오 
원문문체가 금척지이외는 역비고체이태변어근고칙차전사지시에 난삽자를 필종속이사역독야라 
원문은 금재어문천금호종합이학원(통칭양산택)이미지하처에 혹유동본여아 

[해설] 

비록, 지금 원문은 내 손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 전 날에 번역한 기억에 의지하여, 
그 실마리를 이어서 기록하고 얻어낸 것이 여러 편이 되었다. 

고로 이를 이름하여 <징심록연의>라 하고, 원 수리의 연구를 위한 기본으로 제공한다. 
다만 원문을 회수하는 동안에는 
정요, 즉 교정을 요함이라는 두자를 엄밀히 붙여, 이로써 후일의 정정을 기다리고자 한다. 

그러나 
기록 중의 중요한 것은 대단히 명료하며 또 대부분 고증을 거친 것이므로, 거의 오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사소한 것들이라도 본 뜻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다만 그 문체와 구절의 순서는 반드시 원문과 부합되지 아니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문의 문체는 금척지를 제외하면 역시 고체가 아니고, 대부분이 근고체로 변해 있었다. 
이는 필사로 전하는 시기에, 
어렵고 껄끄러운 것들을 반드시 시속에 따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에 틀림없다. 

원문은 지금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통칭 양산댁이라 한다)에 있으니, 
모르는 어느 곳에 혹시 이와 같은 본이 있지는 않을까 한다. 

(운영자 주) 

* ‘징심록’의 이동 

1) 박제상 선생이 양산백으로 있을 때 징심헌에서 최초 징심록 기술 : 현재의 경남 양산이 맞을까? 
2) 아들 백결선생이 증보하여 영해로 이주할 때 가져감 : 현재의 경북 영덕의 영해가 맞을까? 
3) 조선조 세종때 서울로 이동 
4) 조선조 세조때 함경도 문천으로 피신(김시습 선생 동행) 
 → 원문은 금강산 운와공집에 있던 것을 김시습 선생이 수습하여 문천으로 가져와 전하게 됨 
  * 함경남도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 (운림폭포 근처로 추정) 

박금선생은 징심록 전체를 보고 복원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후일 진본 발견시 보완을 위해 "요증" 두글자를 붙였다. 
줄기는 정확하다는 증언과  금척지 이외에는 근고체로 바뀌어 있다고 하였고 
다른 본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금척지는 고체로 되어있다는 의미인데 참으로 원문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박금 선생의 징심록 복원 노력은 참으로 의미있고 눈물겨운 작업 이었습니다. 

북두칠성에서 평안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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