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43] 단군조선 문화제도 10
(나) 단군조선 삼한관경 내의 반역 또는 반란
1) 열양 욕살 색정(索靖)
서기전2177년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이 약수(弱水)에 종신극치(終身棘置)에 처해졌는데 이후 사면되어 약수(弱水)에 봉해졌으며, 흉노(匈奴)의 조상이 되었다 한다.
색정(索靖)의 죄명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나 아마도 단군의 명을 어기거나 백성들을 잘못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약수는 흉노의 활동지역에 포함되는 태원(太原) 서쪽의 황하북류(黃河北流) 상단(上端)지역의 동쪽을 포함하는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에 있는 황하의 지류에 해당하는 강이 될 것이다. 종신극치는 죽을 때까지 가시나무로 둘러 쌓인 울타리속에 같혀 지내는 형벌인데, 주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열양은 요동(遼東)이라고도 하는데,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선은 당시 대요수(大遼水)가 되는 지금의 북경근처를 흐르는 영정하(永定河)가 되어, 지금의 고하(沽河) 지역이 된다.
흉노는 단군조선으로 보면 "서쪽지역"에 해당하는데, 고구려의 계루, 연나, 소노, 절노 등 오부(五部)의 방향에서 연나(椽那)와 관련된 말로 보이는데, "하늬바람"의 하늬는 서쪽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 "하늬"와 통하는 말이 될 것이다.
소위 흉노족은 단군조선의 한 부족(部族)으로서 서기전6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팽창하였고, 서기전2세기경까지 선비, 몽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적도 있으며, 후에 이들 흉노의 땅은 견이(畎夷:견족)의 후예가 되는 돌궐(突厥:투르크:터키이 차지하게 되었다.
2) 강거(康居)의 반란
강거의 땅은 지금의 티벳지역이 되는데, 서기전2175년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강거는 인명(人名)으로서 후대에는 씨족이나 부족의 이름이 되며, 지백특(支伯特)은 티베트라는 소리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가 된다. 배달나라 시대에 치액특(蚩額特) 한웅(桓雄)이 계셨는 바, 이 티벳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치액특(티벳)에 봉해졌던 일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티벳지역은 파미르고원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티벳의 동쪽 지역으로 서안의 서쪽 지역은 한배달조선의 백족(白族:백이, 西夷, 서융)과 견족(畎族:견융)이 활동하던 지역이 된다. 티벳지역은 단군조선 삼한관경 내 36주(州)에는 속하지 아니하나 단군조선 9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된다.
천산(天山)의 남동쪽에 위치하는 삼위산(三危山)과 서안(西安)에 걸치는 지역이 견족 즉 견이의 활동지역이 되는데, 고대중국은 이 견이를 견융(犬戎)이라고도 하고 경우에 따라 서융(西戎)으로 포괄적으로 부르기도 한 것이 되는 바, 견이는 황족(黃族. 황이)의 일파로서 후대에는 돌궐로 이어진다.
백족 즉 백이(白夷)는 서기전7197년경 파미르고원에서 사방분거하기 이전에 먼저 파미르고원의 마고성(麻姑城)을 떠나 동쪽의 사막지대로 가서 정착한 지소씨족(支巢氏族)의 후예가 되는데, 한국(桓國)시대에 서안(西安) 서쪽으로 주로 사막지대에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이후 새로이 이주해 오던 웅족(熊族)들에게 해를 가하며 텃세를 부리던 호족(虎族)은 백족(白族)의 일부족속이며, 서기전3897년경에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 천왕에 의하여 사방으로 추방당하여 흩어졌던 일이 있는데, 서기전2698년경 헌구(軒丘)에 살던 일부의 호족(虎族)인 토착인은 유웅국(有熊國) 황제헌원(黃帝軒轅)의 백성이 되기도 하였다. 후대에 황하상류 지역에 살던 백족은 서이(西夷)라고도 불리며 주(周)나라의 주축세력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 된다.
서기전7197년경 파미르고원에서 사방분거할 때, 동쪽으로 이주한 청궁씨족(靑穹氏族)의 일부가 티벳고원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청궁씨는 황궁씨와 함께 마고(麻姑)의 딸인 궁희(穹姬)의 아들이며, 운해(雲海)의 땅 즉 황하와 양자강 유역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후대에는 적족(赤族:赤夷:남만)과 남족(藍族:藍夷)으로 불려진 것이 된다. 청궁씨족은 황궁씨족과 함께 푸른반점 즉 몽골반점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3)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반란
서기전2173년 두지주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가 그 추장(酋長)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하였다. 이후 이 예읍은 소시모리로 불리다가 음이 변하여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소시모리의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에서 천왕을 참칭하였다.
두지주 예읍은 예국(濊國)의 제후 여수기가 봉해진 나라의 한 읍으로서 그 추장인 소시모리가 반란 주모자였는데, 여수기가 제3대 가륵 천왕의 명을 받아 토벌하여 소시모리를 처형한 것이다.
소시모리의 후손에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 되는 천조대신(天照大神:대일령존:요하유)이 있고 그 후손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도반명)과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 형제들 중 막내인 신무(神武)라는 자가 서기전667년 협야후를 따라 삼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서기전663년까지 사이에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서기전660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이것이 일본역사의 시작이다. 여기서 협야노는 곧 반역자(反逆者)인 신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4) 청해(靑海) 욕살 우착(于捉)의 반란
서기전1984년에 청해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 궁성을 침범하니 제9대 아술(阿述) 천왕이 상춘으로 피하였고, 구월산의 남쪽에 신궁을 지었으며, 우지(于支)와 우율(于栗)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여 죽였고, 3년 뒤인 서기전1981년에 아사달로 환궁하였다.
여기서 청해(靑海)는 티벳고원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지역이 된다. 청해지역은 단군조선 삼한관경 내 36주(州)에는 속하지 아니하나 단군조선 9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영역은 36주(州)의 땅이 되는 삼한관경 밖으로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땅이며, 파미르고원의 동쪽 지역 전체로서 약1,000주(州)에 해당하는 땅이 된다.
1주(州)는 가로와 세로가 각 1,000리 즉 방(方) 1,000리가 되는데, 천자국인 고대중국은 9주의 나라로서 방 3,000리의 나라가 되고, 단군조선 삼한의 1/4에 해당하며, 단군조선 전체영역으로 보면 조공국이 되어 단군조선에 속하는 나라로서 그 영토는 1/111에 해당하는 나라가 된다. 제후국들은 바깥 경계가 있으나, 단군조선은 제후국들의 천조(天朝) 즉 하늘나라로서 외곽 경계가 없는 것이 된다.
우착의 난을 진압한 우지와 우율은 이름으로 보아 우착의 친족으로 보인다. 즉, 청해 욕살인 우착이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조선 조정에서는 그 형제나 친족인 우지, 우율에게 명하여 난을 진압하게 한 것이 된다.
우착의 난으로 서기전1984년부터 서기전1981년까지 3년간 상춘(常春)의 신궁(新宮)에서 지낸 것이 된다. 이 신궁은 나중에 색불루 천왕이 서기전1285년에 제22대 천왕으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5)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의 혁명
서기전1286년에 조부(祖父)인 우현왕 고등(高登)을 세습하여 우현왕이 된 색불루는 제21대 소태(蘇台) 천왕이 종실(宗室)인 서우여(徐于餘)에게 천왕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우현왕 색불루가 여러차례 간(諫)하여 말렸으나 소태 천왕이 끝내 듣지 않자 스스로 부여(夫餘:상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니, 소태 천왕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선양(禪讓)하게 되었고, 이에 서우여를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으며, 스스로는 아사달에 은퇴(隱退)하여 붕어하셨다.
우현왕 고등(高登)은 장당경이 있는 개사원(蓋斯原)의 욕살로서 서기전1289년에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서북의 땅을 차지하여 세력이 강해졌으며, 이에 소태 천왕에게 우현왕에 임명해 줄 것을 청하여 끝내 우현왕에 봉해졌던 것이다. 고등왕을 두막루(豆莫婁)라고도 부른다. 개사원(蓋斯原)은 개원(開原)의 땅으로서 지금의 심양(瀋陽)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단군조선 시대의 장당경(藏唐京)이 있던 곳이다.
귀방은 단군조선의 서남쪽 지역이 되고, 은(殷)나라로 보면 은나라의 북쪽이 되는 지역으로서 태원 이북지역이 된다. 특히 태원 이북지역은 서기전1120년경에는 은 왕족 기자(箕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망명하여 자리 잡은 땅으로 기후국이 있었던 것이 된다. 기후국(箕侯國)의 이북에는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국(句麗國)이 있었고, 동쪽으로 태항산(太行山) 동쪽에는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다.
우현왕 색불루는 고씨(高氏) 천왕(天王)의 시조가 된다. 서기전239년 해모수가 고리국(구려국) 출신으로서 북부여를 차지하여 서기전232년에 단군조선을 접수하니 북부여 시조라고 하고 또한 고구려(高句麗)라고도 부른다. 고구려는 곧 고씨(高氏)의 구려(句麗)라는 말도 된다. 고구려의 직계(直系)로 먼 시조가 곧 고등(高登)으로서 고구려는 고등을 제사지내 시조로 삼은 것이 된다. 해모수를 천왕랑(天王郞) 또는 천제자(天帝子)라 함은 곧 단군조선 고씨 단군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색불루 천왕은 군사력으로 천왕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소위 성공한 쿠데타의 주인공이 된다. 색불루가 천왕 자리를 소태 천왕의 의사에 반하여 차지하자, 제후들과 백성들이 등을 돌렸는데, 색불루 천왕이 서우여를 번한(番韓)으로 봉하고 여원흥(黎元興) 등이 제후들을 설득하는 등 하여 결국 천왕으로 인정받았던 것이 된다.
이로써 이후 일부 사서에서 소태 천왕까지를 단군조선의 역년으로 기록하고 이후에는 조선이 아닌 부여시대로 기록하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단군의 나이를 1908세라 하여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 단군조선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서기전1286년의 사건으로 군신관계 즉 나라는 없어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은 역사로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두막루(豆莫婁)라는 말은 "큰 머리", "큰 마루"의 뜻으로 고구려 재상인 대막리지(큰 머리치: 큰 마루치)와 통하는 말이 된다. 서기전108년에 출현한 졸본(卒本) 출신의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도 두막루이다.
6) 신독(申督)의 반란
서기전1250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兵力)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색불루 천왕은 백성들과 함께 영고탑(寧古塔)으로 피하였다. 이후 서기전1237년 가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백악산아사달(상춘, 부여)의 신궁(新宮)으로 환궁하였다.
여기서 신독의 반란은 서기전1250년부터 서기전1237년까지 약13년에 걸친 반란으로 상당히 긴 기간에 걸친다.
영고탑은 재난이 있을 때 피하여 머물던 이궁(離宮)이다. 서기전1250년부터 서기전1237년까지 13년간 색불루 천왕이 영고탑에 머물렀는데,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서기전1112년부터 서기전238년까지의 수도를 영고탑으로 기록하고 있는 바, 이 단기고사는 대진국(大震國:발해) 시대에 지어진 것이어서 장당경 시대가 누락되어 있는 한편, 영고탑을 수도로서 강조한 것이 된다.
이궁(離宮)은 별궁(別宮)이라 할 수 있는데, 고대중국도 주(周)나라 춘추전국 시대에 이궁(離宮)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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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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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역법(曆法)의 시초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441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2.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던 것임을 밝혔음.
3.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역(易), 역법(曆法), 음양오행(陰陽五行), 단군조선의 정치행정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4.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음.
5.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격의 천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