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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245] 단군조선 문화제도 12

양해천 2018. 1. 22. 11:25

[홍익인간 245] 단군조선 문화제도 12

2012년 03월 06일 (화) 11:17:14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3)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위치 고찰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 등 단군조선의 서보(西堡)이던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城)은 서기전2301년에 쌓은 것이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지역에 있어 요중(遼中)이라 하며, 당시 요동과 요서의 구분 기준선은 대요수(大遼水)이던 지금의 북경 부근을 흐르는 영정하와 소요수(小遼水)이던 지금의 장가구 북동에서 남서로 흘러 영정하에 합류하는 청수하(靑水河)가 된다. 여기서 요중 12성은 대체적으로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나누어 쌓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 기록에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요수(遼水)는 대체적으로 서기전365년 이전까지는 대요수(大遼水)이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되며, 서기전365년 이후부터 서기980년경까지는 패수(浿水)이던 지금의 난하(灤河)가 된다. 한편, 중국측의 기록에서는 서기250년경 위오촉(魏吳蜀)의 삼국시대는 물론, 서기980년경 거란의 요(遼)나라가 요하(遼河)를 지금의 요하 즉 요동반도 서편에 흐르는 강으로 옮기기 이전까지, 줄곧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은 대요수(大遼水)이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고정적인데, 이후 중국의 기록에서 요수(遼水)를 고하(沽河:백하), 난하(灤河), 대릉하, 요하(遼河) 등으로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수법으로 날조하고 있는 것이 된다. 

번한 요중 12성을 쌓은 이유는 서기전2300년경 당시 잠재적인 반역자가 되는 당요(唐堯)와 순(舜)을 경계하고 방비하기 위한 것이며, 이후에는 하은주(夏殷周)를 감시하고 경계한 것이 된다. 

아래에서는 번한 요중 12성의 위치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험독(險瀆) 

험독은 번한(番韓)의 가장 중요한 수도이기도 하다. 번한의 최초의 수도이기도 하고 마지막 수도이기도 하며, 줄곧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된다. 서기전194년에 번조선을 차지한 위만(衛滿)도 험독을 수도로 삼았으며, 서기전108년에 한(漢)나라에 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험독은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자리이다. 지금의 난하(灤河)가 되는 옛 패수(浿水)의 동쪽으로 발해만 유역에서 해안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번한의 수도이므로 왕검성(王儉城)이라 불리며 때로는 검(儉)을 험(險)으로 오기하여 왕험성(王險城)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험독은 번한의 5개 수도 중에서 동경(東京)에 해당하여 소위 오덕지(五德地)의 하나이다. 대요수이던 영정하는 물론 난하의 동쪽에 위치하여 요동지역에 위치한다. 이는 단군왕검 천제(天帝)가 서보(西堡)로서의 번한의 수도를 개국 초기에 동쪽에 위치한 곳을 택하여 최적지로서 삼았던 것이 된다. 

(2) 영지(令支) 

영지의 위치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춘추시대인 서기전665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한 기록으로 볼 때, 연나라의 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연나라의 북쪽은 당시로는 대체적으로 탁수(涿水) 지역 이남이 되는데, 탁수 이북 즉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고죽국이 되며, 영지국이라 불리는 영지성(永支城)은 고죽국의 수도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영지성은 고죽국의 수도가 있던 곳이 되는 탁수지역으로 볼 때 유수(濡水)라 불리던 지금의 탁수(涿水) 최상류에 위치한 것이 되며, 북경의 남서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지금의 대동(大同)과 천진의 중간 쯤에 위치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영지성은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 남서쪽에 위치한 것이 되어 항상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707년 단군조선이 연(燕)나라를 돌파하여 제(齊)나라와 제나라 수도이던 임치(臨淄) 부근에서 전쟁을 하여 승리한 후, 서기전665년에 제나라 환공이 영지국과 고죽국을 정벌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서기전653년에 다시 단군조선이 수유(須臾:箕侯國:기자족)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치니 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고죽국에 크게 쳐들어 왔으나 곧 화해하고 물러갔으며, 서기전651년에 제나라와 연나라가 다시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국을 정벌하였다고 기록된다. 

여기서 이지(離支)는 영지(永支)가 되며, 산융(山戎)은 이지와 고죽국의 북쪽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句麗)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이때의 산융은 위치상으로 보면 고죽국과 낙랑의 북쪽에 위치한 구려국 땅이 된다. 태항산의 서쪽이 되는 서화(西華)라는 땅은 은(殷)나라 태사 기자(箕子)의 망명지가 되며, 기자의 후손을 수유라고도 불리는데, 수유, 고죽 외의 구려(句麗)가 산융(山戎)이라 적힌 것이 된다. 

(3) 탕지(湯池) 

탕지는 탕지보(湯池堡)라고도 하며 고구려의 요서(遼西) 10의 하나인 안시성(安市城)이다. 이 탕지는 번한의 수도인 오덕지(五德地) 중의 하나로서 구 안덕향(舊安德鄕) 즉 옛날의 안덕향이라 불리우는 곳으로 중경(中京)이 되는 개평(蓋平)의 북쪽이자 동경(東京)이 되는 험독(險瀆)의 서북에 위치하여 북경(北京)이 되고, 패수이던 지금의 난하의 서편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며, 난하를 지나고 있는 현재의 만리장성으로 볼 때 그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된다. 난하(灤河)를 가로 지나는 소위 만리장성은 위씨조선(衛氏朝鮮)이 한(漢)나라에 망한 서기108년 이후에 쌓은 것이 된다. 

탕지는 대요수이던 영정하의 동쪽에 있어 요동지역이 되며, 서기전365년 이후 우리 기록에서 패수(浿水)이던 지금의 난하를 요동과 요서로 구분할 때는 요서지역에 해당한다. 난하는 서기980년경 요(遼:거란)가 수도를 임황(臨潢)에서 동쪽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을 흐르는 강을 요하(遼河)라고 하기 전까지는 요동과 요서의 구분하는 강이었다. 즉, 거란의 요(遼)라는 나라 이름이 곧 요수(遼水) 등으로 불리는 요(遼)라는 땅에 있어 붙인 국호가 되며, 요의 초기 수도이던 임황은 대요수이던 영정하와 후대에 소위 요수가 되는 난하(패수)의 동쪽에 위치하고 또한 소요수(청수하)의 동쪽에 있어 요동 땅으로서 서안평(西安平)으로 불리던 곳이다. 

(4) 통도(桶道) 

통도성은 고려진(高麗鎭)이라고 불리며, 지금의 북경(北京)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즉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북경의 동쪽 또는 동북쪽으로 60리가 된다. 

통도성은 지금의 북경과 함께 대요수이던 영정하의 동쪽에 있어 요동지역이 되며, 패수이던 난하를 요동과 요서로 구분하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요서지역이 된다. 

(5) 거용(渠鄘) 

거용성의 위치는 불명인데,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와 패수이던 지금의 난하 사이에 위치한 것이 된다. 대요수이던 영정하의 동쪽에 있어 요동지역이 되며, 패수이던 난하를 요동과 요서로 구분하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요서지역이 된다. 

(6) 한성(汗城) 

단군조선 번한의 한성(汗城) 고구려(高句麗) 요서(遼西) 10성 중의 하나인 한성(韓城)이 틀림없으며, 위치상으로 고하(沽河)의 최하류 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되고, 서기전323년에 기자(箕子)의 먼 후손인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력으로 선점(先占)한 성으로 번한성(番汗城)이라고도 기록된다. 

번한의 5개 수도가 되는 오덕지(五德地)의 하나에 해당하며, 중앙의 안덕향이라 불리는 중경(中京)인 개평의 서쪽에 위치하여 번한의 수도 중 서경(西京)에 해당한다. 

한성은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위치하여 요동지역이 되며, 난하가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이 되는 소위 요수(遼水)가 되는 때를 기준으로 하면 요서지역이 된다. 

(7) 개평(蓋平) 

번한 수도의 오덕지의 하나로서 안덕향(安德鄕)이라 불리며, 동서남북중 다섯 개의 수도 중에 중앙에 위치하여 중경(中京)이 된다. 개평은 지금의 당산(唐山) 바로 위에 개평(開平)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개평은 대요수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있어 요동지역이 되며, 난하가 소위 요수가 되는 때를 기준으로 하면 요서지역이 된다. 

(8) 대방(帶方)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가 되는 대방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낙랑(樂浪)의 위치를 고려하면 낙랑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대방은 개평의 동쪽이자 험독의 서쪽이며 탕지의 남쪽이 되고 난하의 서쪽으로 발해만에 가까운 곳이 된다. 이 대방지역에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된다. 

서기전42년경 북부여의 졸본에서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떠나 정착한 곳이 되는 패대(浿帶)지역이라고 할 때의 패(浿)는 패수(浿水)로서 지금의 난하가 되고 대(帶)는 대수(帶水)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여기서 대수는 지금의 요동반도의 서편에 흐르는 요하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요하에 합류하거나 요동반도 서쪽으로 흐르는 어느 강이 되어,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가 있는 대방과는 다른 지역이 된다. 

난하가 되는 패수(浿水)와 소위 요동반도 북쪽에 있는 대수(帶水) 사이에, 낙랑(樂浪)이 패수에 동서로 걸쳐 있고, 진번(眞番)은 그 동쪽에 위치하는 것이 되는데, 진번(眞番)은 바로 진한(眞韓)과 번한(番韓) 사이의 땅이 되고, 진번의 동쪽지역은 요동반도 북쪽에 흐르는 대수(帶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되는 바, 진번 땅인 진번국(眞番國)은 지금의 요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서 구려(句麗)의 동쪽이자 번한(番韓)의 동북쪽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된다. 

대방은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 동쪽으로 고하의 동쪽에 위치하고 난하의 서쪽에 위치하여 요동지역이 되며, 패수이던 난하가 요동과 요서의 구분선이 되는 때에는 요서지역이 된다. 

(9) 백제(百濟) 

일단 발해만 유역에 있었던 성이 되며 대방(帶方) 부근으로 추정된다. 

(10) 장령(長嶺) 

장령은 후대에 쌓은 소위 만리장성이 지나는 고개로 추정되며, 난하 중류지역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즉, 난하 동쪽으로 장령을 지나는 소위 만리장성은 서기전108년 위씨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한 이후에 축조한 것이 된다. 

장령은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 동쪽이자 패수이던 난하의 동쪽에 위치하여 항상 요동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11) 갈산(碣山) 

지명으로 보아 갈석산(碣石山)이 틀림없는데,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이 위치한 곳이 된다. 갈석산은 난하(灤河)의 동쪽으로 험독(險瀆)의 서쪽에 위치하고, 소위 진황도(秦皇島)의 서쪽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소위 진황도는 진시황이 들렀던 곳이라 하나, 서기전202년 한(漢)나라의 연왕 노관(盧綰)이 번조선(番朝鮮)과 난하(灤河)를 국경으로 삼은 것을 보면, 난하의 동쪽지역은 곧 번조선의 영역인데 서기전221년부터 서기전210년 사이에 진시황이 들렀다는 진황도는 날조된 것이 명백한 것으로 된다. 즉, 지금의 진황도 자리는 진시황 시대에 진(秦)나라 영역이 아니라, 후대에 동쪽으로 옮긴 것이거나, 진시황이 유람차 잠깐 들렀다 간 곳을 진나라 땅인 것처럼 과장하여 이름 붙인 것이 된다. 

한편, 중국의 삼국시대에 위(魏)나라 조조(曹操)가 요동을 정벌하고 이 갈석산에 올라 시를 지은 것이 있다고 전한다. 

갈산 즉 갈석산은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의 동쪽이자 후대의 소위 요수가 되는 난하의 동쪽에 위치하여 항상 요동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12) 여성(黎城) 

번한 요중 12성에 속하는 여성(黎城)의 위치는 불명이나, 대요수이던 지금의 영정하 부근에서 지금의 난하 부근 사이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한편, 여성(黎城)은 단군조선 초기인 서기전2267년 이후 우순(虞舜) 때 구려분정(九黎分政)을 실시한 곳이 되는 산동(山東)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서기전1266년에 단군조선의 장수인 여파달(黎巴達)이 서쪽의 빈(邠), 기(岐)의 땅 가까운 곳으로 가서 유민들을 규합하여 세운 나라 이름이 여(黎)인데, 이 빈, 기의 땅은 주(周)나라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인 여성(黎城)이 산동지역에 있는 것이라면, 대요수이던 영정하의 서쪽에 위치하는 것이 되어 항상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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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역법(曆法)의 시초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441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2.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던 것임을 밝혔음. 
3.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역(易), 역법(曆法), 음양오행(陰陽五行), 단군조선의 정치행정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4.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혔으며,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음. 
5.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격의 천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 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 예읍의 추장의 후손임을 역사적으로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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