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77]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2
2012년 04월 07일 (토) 07:04:41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연제조(燕齊趙) 사람들의 망명귀순]
서기전209년 임진년(壬辰年)에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사람들이 도망하여 번조선(番朝鮮)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上下)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
서기전221년에 진시황(秦始皇)이 통일하였으나 진승(陳勝)의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에 망하였던 연, 제, 조 나라의 사람들이 진나라 땅을 벗어나 번조선으로 들어와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때 망명귀화한 사람들이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馬韓) 땅인 한반도의 남쪽으로 들어가 살기도 하였던 것이 된다.
[소백손(蘇伯孫)이 마한 땅 동쪽에서 진한(辰韓)을 세우다]
서기전209년 임진년(壬辰年)에 소백손(蘇伯孫)이 마한 땅 서라벌에 이르러 진한(辰韓)을 세웠다. 소백손은 소백림(蘇伯琳)이라고도 적힌다.
원래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으로서 소성(蘇城)에 봉해져 소씨성을 가지게 된 것이 되는데, 이 소성은 단군조선 초기에 도산회의(塗山會議)를 계기로 단군조선의 영역에 편입되었던 것이 되고, 후대에 단군조선이 망하자 유민(遺民)들이 동으로 이동하여 한반도로 유입되었던 것이며, 그들 중 소백손(蘇伯孫)이 서기전209년에 단군조선의 제도를 본따 진한(辰韓)을 건국한 것이 된다.
이때 남쪽에는 변한(弁韓)이 세워진 것이 된다. 남쪽의 변한은 진한(辰韓)과 같은 계통이 되는 바, 함께 변진(弁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된다.
[한(漢)나라와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다]
서기전202년 기해년(己亥年)에 한(漢)나라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다시 요동(遼東)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灤河)이다.
한(漢)나라는 유방(劉邦)이 세운 나라인데, 유방은 요임금의 후손으로 서기전206년에 군사를 일으켜 한왕(漢王)이라 불리고, 서기전202년에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격파하고 중원 천하를 통일하여 한고조(漢高祖)가 되었다.
여기서 요동은 한나라에서 본 요동이 되는데, 원래의 대요수(大遼水)였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을 가리키며, 북부여에서 보면 패수의 서쪽 지역이므로 요서(遼西)지역이 된다.
서기전281년에 연나라 진개가 만번한(滿番汗)을 국경으로 삼은 이후 다시 동쪽으로 국경이 이동한 것이 된다.
이후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우리 역사기록에서는 대진국 시대까지 패수인 난하를 기준으로 하고, 고대중국의 기록으로는 한(漢)나라 때까지는 대요수(大遼水)인 영정하(永定河)가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되고, 이후 하북성에 존재하였던 북방국들은 그들의 정책에 따라 요수(遼水)를 대요수인 영정하에서 동쪽으로 이동시켜 고하(沽河, 白河), 난하(灤河, 원래의 浿水), 대릉하, 지금의 요하(遼河, 원래의 西鴨綠) 등으로 설정하였던 것이 된다.
특히 지금의 요동반도 서편으로 흐르는 지금의 요하는 서기980년경 거란의 요(遼)나라가 대진국(大震國)을 멸망시킨 후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요하(遼河)를 이동시킨 결과로 생긴 것이다. 원래 거란의 요하는 서안평(西安平) 부근에 남북으로 흐르던 강으로서 소요수(小遼水)이며, 대요수인 영정하의 중상류 지역에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합류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가 된다. 즉 원래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소요수(小遼水)와 대요수(大遼水)를 기준으로 한 것이 된다.
서기668년에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大震國)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의 요서(遼西)지역을 포함하여 지금의 발해만 유역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인하여 발해(渤海)라는 이름이 난겨진 것이 된다. 대진국은 당나라를 공격하여 등주(登州) 등 산동지역에 발해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의 번조선 망명]
서기전195년 병오년(丙午年)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해모수 천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천왕께서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衛滿)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서기전195년 병오년 겨울에 최숭(崔崇)이 낙랑(樂浪)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서울 왕검성(王儉城:백아강:평양)에 이르렀다. 아마도 서기전194년 바로 이후에 낙랑홀(樂浪忽)이 위씨조선에 들어간 것이 될 것이다. 낙랑홀은 패수가 되는 난하 중상류의 동서에 걸친 지역으로서 번조선의 북쪽, 구려의 남쪽 사이에 끼인, 보통 크기의 군(郡)과 비슷한 넓이인 지름 약 100리의 땅이 될 것이다.
[태자 모수리 즉위]
서기전195년 겨울에 해모수(解慕漱) 천왕께서 붕하시어 웅심산(熊心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태자 모수리(慕漱離)가 즉위하였다.
웅심산은 해모수 천왕의 근거지였는데, 연고지(緣故地)에 장사를 지낸 것이 된다.
2. 북부여(北夫餘) 제2대 모수리(慕漱離) 천왕(天王)(서기전194년~서기전170년)
[번조선의 멸망]
서기전194년 정미년(丁未年)에 번조선왕 기준(箕準)은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수유(須臾)는 수유족(須臾族)이 사는 곳을 가리키며 수유족은 소위 은(殷) 기자(箕子)의 후손인 기후족(箕侯族)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수유는 번조선 땅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기준왕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기준왕이 번조선을 위만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멀리 떠난 것을 가리키는데, 역사적으로는 서기전194년에 기준왕이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갔는 바, 처음에 최숭(崔崇)이 먼저 정착한 낙랑국(樂浪國)이 있는 지금의 평양(平壤)에 도착하였으나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다시 남하하였던 것이고, 이에 한반도의 남서쪽 금마(金馬)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에 마한왕이 되었는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훙(薨)하였던 것이다.
이에 번조선의 탁(卓)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월지(月支)에서 중마한(中馬韓)을 세웠는데, 금마(金馬)의 마한(馬韓)을 이어 제2대 왕이 되었던 것이며, 서기전194년부터 서기9년에 백제에게 멸망할 때까지 후삼한의 마한(馬韓)은 합 10대왕 203년의 역사를 가진다.
[마한 땅의 후삼한]
서기전194년 위만(衛滿)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긴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준(箕準)은 배를 타고 마한(馬韓) 땅의 낙랑(樂浪)에 들어갔으나,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쫓겨나니,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마한 땅의 서쪽 지역인 금마(金馬)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마한(馬韓)이다.
이리하여 기준왕(箕準王)은 마한(馬韓)의 제1대 무강왕(武康王)이라 하며 1년만에 붕하니, 월지(月支)에서 중마한(中馬韓)을 세운 탁(卓)이 제2대 마한왕이 되었다.
서기전194년 번조선이 망하자 오가의 무리들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마한땅 서쪽 지역에 있는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서기전193년에 기준왕의 뒤를 이어 제2대 마한왕이 되니 강왕(康王)이라 한다.
마한 땅에 기준왕(箕準王)과 탁왕(卓王)의 마한이 세워지기 전인 서기전209년에 동쪽에 진한(辰韓)이 세워지고, 이때 남쪽에는 변한(弁韓)이 세워졌는데, 이후 진한과 변한은 마한(馬韓)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즉 마한의 임금인 마한왕(馬韓王)이 진한과 변한을 모두 아우르는 진왕(辰王)이 되었고 진한과 변한은 왕이라기 보다 비왕(裨王)인 한(韓)인 것이다. 이는 진한(眞韓), 진조선(眞朝鮮)의 임금인 단군이 천왕(天王)으로서 마한(馬韓), 마조선(馬朝鮮)과 번한(番韓),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진한(眞韓), 진조선(眞朝鮮)의 임금이 진왕(辰王)으로서 본왕(本王) 즉 상국(上國)의 왕인 천왕(天王)이며, 마한(馬韓), 마조선(馬朝鮮)과 번한(番韓), 번조선(番朝鮮)은 비왕(裨王)이 다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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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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