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75] 북부여(北夫餘) -후삼한(後三韓) 시대 2
2012년 04월 05일 (목) 07:11:43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후삼한]
후삼한(後三韓)은 단군조선의 진한, 번한, 마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즉 단군조선의 유민(遺民)들의 나라인 것이다. 유민(遺民)이란 남은 백성이라는 말로서 그 백성이 그 백성인 것이다.
진한(辰韓)은 주로 단군조선의 진한 땅인 서쪽의 고죽국(孤竹國), 기후국(箕侯國), 구려국(句麗國), 낙랑국(樂浪國), 진번국(眞番國) 사람들이 동쪽으로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의 동쪽 지역에 자리잡아 서기전209년에 세워진 나라이다. 만리장성 부근이나 난하(灤河) 유역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고, 진시황의 진(秦)나라를 피하여 망명해 온 사람들도 섞여 있어 진한(秦韓)이라고 적기도 하는 것이 된다.
변한(弁韓)은 진한(辰韓)과 거의 같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동하여 세운 나라가 되는데, 단군조선의 번한, 번조선 사람들도 다소 섞여 있던 것이 되며, 진한과 더불어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 자리잡았다. 진한(辰韓)과 구별하지 않고 통칭하여 변진(弁辰)이라 적기도 한다. 진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나라가 된다.
마한(馬韓)은 진한과 변한과 같이 마찬가지로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에 자리잡은 나라이면서, 발해만 유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번한(番韓:번조선)이 서기전194년에 위만(衛滿)에게 망하면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의 서쪽에 자리잡고 세운 나라인데, 번조선의 마지막 기씨(箕氏) 왕이던 기준왕(箕準王)이 금마(金馬:益山)에서 제1대 왕이 되었으며, 제2대 왕은 번조선의 상장(上將) 출신인 기씨(箕氏)의 탁(卓)이 목지(目支:月支:稷山)에서 이었는p, 이후 기씨의 마한이 합 10대를 이어 서기9년 백제 제1대 온조왕에게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 후삼한의 성립시기
단군조선은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고열가 천왕이 나라를 오가들에게 맡긴 때 사실상 망하였으며, 이후 서기전232년까지 6년간 오가공화정이 실시 되었고,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에 의하여 북부여로 접수되었던 것이다.
후삼한 시대는 단군조선이 북부여로 계승된 후 유민(遺民)들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서기전209년에 진한(辰韓)을 세움으로써 시작된 것이 되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변한이 세워진 것이 되고, 서기전194년에 마한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반도에서 후삼한인 진한, 변한, 마한이 모두 세워져 병립(竝立)한 시기는 서기전194년이 된다.
2. 후삼한의 영역
진한(辰韓)은 서라벌(경주)을 수도로 한 나라로서 한반도의 동쪽 지역을 차지한 것이 된다. 지금의 강원도 태백산(太白山)을 포함한 강원도 남부지역에서 경상북도와 그 동해안에 걸친 것이 된다.
변한(弁韓)은 주로 가야(伽倻) 지역과 일치하는데, 한반도의 남중부 지역에서 남부 해안에 걸친 나라가 된다. 동쪽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서쪽으로 마한과 접한 것이 된다. 지금의 전라북도 동부 경계지역과 충청북도의 남부 경계지역을 거쳐 전라남도의 동부지역과 경상남도 전역을 포함하여 남해안에 걸친 고깔모양(삼각형)의 지형이 된다.
마한(馬韓)은 주로 지금의 한강(漢江) 유역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에서 직산(稷山)을 거쳐 충청도를 포함하고, 전라북도의 익산(益山)을 거치고 남쪽으로 전라남도의 지리산(智異山) 동쪽을 포함하여, 서해안에 걸치는 지역이 된다. 한강유역은 서기18년에 온조에게 땅을 떼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직산은 지금의 천안(天安)과 평택(平澤) 사이에 있는 땅으로서, 서기전194년에 번조선의 상장(上將)이던 기탁(箕卓)이 무리를 이끌고 중마한(中馬韓:단군조선 마한 땅 중부지역)을 세웠던 곳으로 월지(月支)라고 기록되는데, 월지는 목지(目支)의 오기(誤記)가 될 것이다. 이 중마한의 왕이 곧 후삼한의 진왕(辰王)으로서 서기9년까지 후삼한을 통할한 임금이 된다.
익산은, 서기전194년에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단군조선 마한 땅의 수도였다가 서기전195년에 낙랑홀(樂浪忽)에서 이동해와 자리 잡은 최숭(崔崇)의 낙랑(樂浪)이 있던 한반도의 평양(平壤)으로 갔다가,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자리 잡지 못하고, 다시 배를 타고 한반도의 남부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다. 익산에서 기준왕은 마한왕(馬韓王)이라 칭하였으며 1년 재위하고, 마한왕의 자리는 이후 직산(稷山)의 기탁(箕卓)이 이었던 것이다. 기탁은 기준왕의 아들이거나 종실이 된다.
3. 후삼한의 백성
후삼한의 백성으로는 기존의 단군조선의 마한 땅 사람도 당연히 있었던 것이며, 이동해 온 사람들이 나라를 주도적으로 다스린 것이 된다. 모두 단군조선의 진한, 번한, 마한의 유민(遺民)들로서 지배층은 이동해 온 유민들이 된다.
4. 후삼한에 소속된 소국들
후삼한은 진한(辰韓)이 건국된 서기전20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미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이던 곳이므로 수 많은 소국(小國)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고, 여기에 이동해온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거나 차지하였던 것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변진(弁辰) 24국과 마한(馬韓) 54국으로 모두 78개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지배왕족과 상세한 역사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변진 24국으로는, 기사국(己私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진국(弁陳彌離彌陳國), 변진누도국(弁辰樓塗國), 근기국(勤耆國), 난리미동국(難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원국(冉爰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군미국(弁軍彌國), 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 여담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시로국(尸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 변진정조마국(弁辰定漕馬國), 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유국(優由國)인 바, 실제로는 25국이 기록되어 있다.<삼국지 동이전 弁辰>
마한 54국은, 원양국(爰襄國), 모양수국(牟襄水國), 상수국(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록국(優休牟淥國), 신분첨국(臣濆沾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남국(怒藍國), 자지국(自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고리비국(古卑離國), 신첩국(臣疊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곡(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만국(古滿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매로국(邁盧國), 군비리국(群卑離國), 전사오차국(田斯烏且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우반국(友半國), 구소국(狗素國), 정로국(挺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랑국(古榔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神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이다<삼국지 동이전 韓>
5. 후삼한의 계승국 - 신라, 백제, 가야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와 가야(伽倻)는 초기에 모두 한반도에 수도를 둔 나라이면서 각각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을 계승하거나 병합한 나라이다.
신라는 서기전57년에 13세의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辰韓)의 6부(部)의 추대에 응하여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는 박혁거세가 북부여의 거서간(居西干)의 대를 이었으므로 거서간이란 왕호를 썼으며, 북부여의 제후임을 나타낸 것이 되고,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박혁거세의 족보를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서기57년에 북부여 졸본(卒本)에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대통(大統)을 이었다.
백제는 서기전18년에 온조가 지금의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마한왕(馬韓王)으로부터 땅을 떼어 받아 세운 나라이다. 서기전42년 북부여 시대에 고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를 따라 이복형 비류와 함께 진번(眞番)의 패대(浿帶)지역으로 갔다가, 서기전31년에 어머니 소서노가 고구려 고주몽 성제에 의하여 어하라국에 책봉되었고, 서기전19년에 훙하시니 비류가 이었는데, 이때 온조는 따로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미추홀(밑골)인 인천(仁川)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산(漢山) 아래에 터를 잡아 위지성(尉支城)을 쌓고 시작하니 곧 온조의 십제(十濟)인 것이다. 이후 아하라국(비류백제)이 온조의 나라에 병합되니 온조의 백제(百濟)라 불리는 것이 된다.
가야는 서기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국(金冠國)을 세우면서 시작한 나라인데, 모두 6국이라 전한다. 가야는 변한(弁韓)을 이은 나라가 되는데, 변한 12국이 가야 6국으로 불리지만 그 외 기록되지 아니한 가야국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특히 지금의 창녕(昌寧)지역에 있었던 비사벌의 불사국(不斯國)이 후대에 비사벌가야(比斯伐加耶)라 불리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위씨조선]
1. 번조선 망명자 위만
서기전195년에 한(漢)나라의 요동지역의 연왕(燕王)이던 노관이 흉노(匈奴)로 망명하자, 그 신하이던 위만(衛滿)은 번조선에 망명하였다. 당시 한나라와 번조선의 경계는 패수라 불리는 강으로서 지금의 난하(灤河)였다. 이때 번조선왕 기준(箕準)은 위만(衛滿)을 박사(博士)로 대우하여, 지금의 난하 건너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떼주어 머물게 하였다.
상하운장에는 서기전209년에 번조선왕이 진(秦)나라 땅에서 망명하여 온 연제조(燕齊趙) 유민(流民)들을 살게 하였는데, 여기에 위만이 살면서 세력을 키웠던 것이 된다.
2. 번조선왕 자리 찬탈
서기전194년에 위만은 번조선 기준왕(箕準王)의 은혜를 저버리고, 기준왕을 보위한다며 속여서 공격하여 험독을 빼앗고 스스로 왕이 되어 조선왕(朝鮮王)이라 칭하였다.
이리하여 북부여는 위만을 번조선을 이은 자라 하지 않고 도적이라 부른 것이 된다. 즉, 위씨조선은 북부여의 제후국이 아니라 도(道)를 어겨 번조선을 망하게 한 나라로서 대적(對敵)한 나라가 된다.
그러나, 위만이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한(漢)과 구별한 것이 되는데, 북부여 시대의 열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물론 지배층은 위만의 측근이지만 기본 백성은 번조선 사람으로서 원래 단군조선의 백성들과 망명한 연제조(燕齊趙)의 유민들이다. 그리하여 서기전108년에 위씨조선이 망하자, 졸본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려 북부여 부흥(復興)을 기치로 내걸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한(漢)나라와 전쟁한 것이 된다.
3. 우거왕의 북부여 침략
특히 위씨조선의 3대왕인 우거(右渠)는 수시로 북부여의 서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서기전118년에 우거왕이 북부여를 침공하여 해성(海城) 이북의 50리를 차지하였다. 해성은 서기전425년에 시작된 단군조선의 말기의 수도이던 장당경의 남쪽에 있으며, 이궁(離宮)으로서 평양(平壤)이라 불린 곳이다.
서기전115년에 북부여가 위씨조선이 차지한 해성(海城)을 격파하여 수복하였다.
서기전194년부터 서기전108년경까지 위씨조선과 북부여는 전쟁을 하면서 위씨조선이 차지하였던 진번(眞番) 땅의 거의 대부분을 결국 수복한 것이 된다. 서기전108년에 설치된 소위 한사군(漢四郡)이 되는 진번군(眞番郡)에는 서쪽의 진번 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며, 이 진번 땅은 서기전82년에 임둔군(臨屯郡)과 함께 모두 수복한 것이 된다.
4. 위씨조선의 멸망
서기전108년에 한(漢)나라가 위씨조선을 결국 멸망시켰는데, 위씨조선은 반역 등 내부의 분란으로 멸망한 것이 된다.
당시 위씨조선을 망하게 한 대신들은 한(漢)나라의 제후로 각각 봉해졌다.
5. 소위 한사군 문제
서기전108년에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한(漢)나라는 소위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된다.
소위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현도군(玄ꟙ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인데, 낙랑군은 서기전108년에, 현도군은 서기전107년에 각 설치되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설치연도가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으나 서기전108년에 설치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들 소위 한사군의 명칭은 단군조선 시대 또는 번조선이나 위씨조선 시대부터 있어온 지명이나 국명이 된다. 낙랑군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낙랑홀(樂浪忽)에서 나온 것이며, 현도군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句麗) 땅의 남부지역으로 단군조선 시대 또는 번조선이나 위씨조선 시대에 생긴 명칭이 되고, 진번군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진번국(眞番國)에서 나온 것이며, 임둔군 또한 진번국의 남쪽으로 발해만 유역에 걸친 지역으로서 단군조선 시대 또는 번조선이나 위씨조선 시대에 생긴 명칭이 된다.
중국기록에서는 소위 한사군 중에서 진번군과 임둔군은 서기전82년에 낙랑군에 붙였다 하다, 이는 고대중국 기록의 애매모호한 춘추필법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실제로는 서기전86년에 북부여 천왕이 된 고두막 천왕에 의하여 북부여에 수복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기전42년에 소서노(召西弩)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북부여 졸본에서 진번(眞番)의 패대(浿帶)지역으로 가서 땅을 개척하여 서기전31년에 어하라국(於瑕羅國)으로 책봉받았는데, 이 진번의 패대지역이 소위 진번백제(眞番百濟)라 불리는 곳이 되며, 곧 소위 한사군의 진번군과 임둔군이 위치하던 곳이 되고, 이 진번백제의 땅이 후대 발해만 유역에 있던 백제의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晋平郡)이 성립된 기초기지(基礎基地)가 되는 곳으로서, 서기전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이 북부여에 수복되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한사군 중 낙랑군과 서기204년에 낙랑군에서 파생된 대방군은, 서기313년에 고구려의 미천제(美川帝)에 의하여 완전히 축출되었으며, 현도군도 이때 정벌당하여 이후 고구려 역사에서 소위 한사군의 명칭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
'얼(뿌리를 찾아서)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익인간 277]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2 (0) | 2018.01.22 |
---|---|
[홍익인간 276]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1 (0) | 2018.01.22 |
[홍익인간 274] 북부여(北夫餘) -후삼한(後三韓) 시대 1 (0) | 2018.01.22 |
[홍익인간 273] 단군조선 문화제도 40 (0) | 2018.01.22 |
[홍익인간 272] 단군조선 문화제도 39 (0) | 2018.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