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80]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5

양해천 2018. 1. 22. 12:55

[홍익인간 280]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5

2012년 04월 11일 (수) 07:30:55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동명왕 고두막한이 한(漢)나라를 격파하다] 

서기전106년 을해년(乙亥年)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으며,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의 의병이 모여 한(漢)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고, 이에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漢)나라 도둑들은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으니 바로 옛 고리국(槀離國)의 땅이었다. 

동명왕 고두막한이 스스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침략자인 한(漢)나라 군사와 전쟁을 한 것은 단지 북부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愛國心)의 발로로서 북부여의 부흥(復興)을 꾀한 것이 된다. 물론 서기전87년부터 서기전86년에 걸쳐 북부여의 천왕 자리를 내놓으라고 고우루 천왕과 해부루 천왕을 위협하였던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막강한 군사력(軍事力)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서 요동(遼東)은 북부여(北夫餘)의 요동으로서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의 동쪽 지역이자 소요수(小遼水)가 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청수하는 지금의 영정하 중상류 지역에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합류하는 강이며 이 합류지점에도 요(遼)와 관련된 지명이 있었다. 

서안평(西安平)은 요동에 있는 땅인데, 소요수가 되는 청수하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되며, 패수가 되는 난하의 최상류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고리국(槀離國)은 곧 단군조선 전기의 군국(君國)이던 구려국(句麗國)을 가리키는데, 고리(槀離)라는 말과 구려(句麗)라는 말은 같은 말을 나타낸 표기가 되는데, 구려의 려(麗)를 땅이라는 의미로서 구리라 읽으면 같은 말임이 드러나게 된다. 

서안평(西安平)은 서쪽에 위치한 안평(安平)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원래의 안평은 대요수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위치한 땅이며, 여기 서안평은 대요수(大遼水)와 소유수(小遼水)의 동쪽에 있어 요동 땅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구려하(九黎河)의 최상류지역 부근에 있는 서안평은 곧 소요수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땅이 되어 구려국 즉 고리국 땅에 있었던 것이다. 

서안평(西安平)은 고구려의 요새이기도 하며 후대에 거란(契丹, 遼)의 수도가 된 곳으로서 원래의 거란의 요하(遼河)가 되는 소요수(小遼水)가 있는 곳이고, 구려하(九黎河) 즉 지금의 서요하(西遼河)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된다. 신(新)나라의 왕망(王芒)은 서안평을 북안평(北安平)이라 불렀는데, 상대적으로 남쪽에도 안평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 된다. 

[고두막한이 배천(裵川)의 한(漢)나라 도둑들을 격파하다]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年)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遺民)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漢)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하였다. 

배천(裵川)은 진번(眞番)이나 임둔(臨屯)의 땅에 있었던 작은 강으로 추정되는데, 진번국(眞番國)의 유민(遺民)이자 번조선(番朝鮮)의 유민(遺民)이며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유민(遺民)이 되는 사람들과 합세하여 한(漢)나라 군사를 물리친 것이 되고, 실제로 서기전82년에는 진번과 임둔 땅을 수복한 것으로 된다. 

[동명왕 고두막한이 천제자(天帝子)라 칭하며 나라를 비키라 하다]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년) 10월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자(天帝子)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王)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고우루 천왕은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고우루 천왕은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실제로 동명왕 고두막한은 졸본의 제후인 한(汗)으로서 단군 고열과(高列加) 천왕의 후손이며, 돌아가신 단군천왕을 높이면 천제(天帝)가 되어, 고두막한 자신은 현재는 천왕(天王)은 아니지만 천왕이 될 자격을 가진 천제자(天帝子)가 자연스레 되는 것이다. 즉 천제자(天帝子)는 천왕(天王)과 동격이라 보면 된다. 

고우루 천왕은 서기전120년에 고진(高辰)을 고구려후로 봉하여 위씨조선을 방어하게 하였고, 이후 우거왕의 군사들이 동침하여 해성(海城) 이북의 50리를 잃고서 서기전115년에 수복하기도 하였으나, 북부여의 군사력이 약화일로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서기전108년에 한나라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킬 때 북부여 조정이 속수무책으로 있어 졸본의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漢)나라와 대적한 것이 된다. 

이로써 보면, 당시 북부여의 세력은 약화되어 있어 고두막한이 동명왕이라 칭한 것을 제지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어서 고우루 천왕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시기가 된다. 이리하여 걱정만 하다가 병사한 것이 된다. 

[아우 해부루 즉위]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年)에 고우루(高于婁) 천왕께서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위협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하시니, 고우루 천왕의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태자나 아들의 세습이 아니라 형제세습이 되는데, 이는 고우루 천왕에게 태자나 아들이 없었거나 어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5. 북부여(北夫餘) 제5대 해부루(解夫婁) 천왕(天王)(서기전87년~서기전86년) 

[동명왕 고두막한의 위협으로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다]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年) 말에 해부루(解夫婁)가 천왕으로 즉위하였는데, 동명왕 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나라를 비키라고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았으므로,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으며, 이때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통하의 물가 가섭원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잘 됩니다. 서울을 둘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해부루 천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迦葉原) 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이리하여 동명왕 고두막한이 천왕의 자리에 오른 서기전86년 이후에는 해부루는 북부여 고두막 천왕의 제후인 동부여후(東夫餘侯)로서 뒤에 동부여왕(東夫餘王)이라 불리게 된다. 

동명왕 고두막한은 무기를 사용한 전쟁이 아닌 위협적인 말로써 천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된다. 이는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왕으로 즉위하여 사후(事後)에 소태 천왕으로부터 선양(禪讓)받은 것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군사력을 기반으로 천왕의 자리를 차지한 점에서 강압적(强壓的)인 선양(禪讓)에 해당한다. 물론 고두막 천왕의 즉위는 무혈(無血) 군사혁명에 해당하는 점에서 약간의 유혈전쟁(流血戰爭)이 있었던 색불루 천왕의 즉위 때와는 차이가 있다. 

물론, 해부루의 국상인 아란불이 정세를 잘 판단하여 조절을 잘 하였던 것이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군사력을 앞세운 고두막한이 유혈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어 백성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108년에 동명(東明)이라 칭한 졸본(卒本)의 고두막한(高豆莫汗)은 북부여의 부흥(復興)을 꾀하였고, 서기전59년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탈출해 온 고주몽(高朱蒙)은 서기전57년에 졸본(卒本)에서 북부여의 대통을 이어, 한(漢)나라와의 다물전쟁을 하였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유업(遺業)을 계승함으로써, 고구려의 동명성제(東明聖帝)로 불리는 것이며, 확대된 다물정책(多勿政策)으로써 단군조선의 고토(古土)를 회복(恢復)하는 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 된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