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81] 북부여(北夫餘) 연대기 6
2012년 04월 12일 (목) 07:58:51 | 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
6. 북부여(北夫餘) 제6대 고두막(高豆莫) 천왕(天王)(서기전86년~서기전60년)
[동명왕 고두막한의 천왕 즉위와 동부여왕 해부루]
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고두막 천왕이 즉위하였다. 북부여가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고두막(高豆莫) 천왕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山分 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都城)에 들어와 북부여(北夫餘)라 칭하였다.
이에 해부루는 분릉의 왕 즉 동부여왕으로 봉해졌는데, 고두막 천왕의 제후에 해당한다. 분릉(山分 陵)은 일명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한다. 분릉은 낮은 산이나 언덕 형태를 나타내고, 가섭원은 숲이 우거진 벌판을 나타낸다.
해부루 천왕이 강등되어 동부여왕으로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곳이 상춘(常春)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길림(吉林)이 된다. 길림(吉林)이라는 글자는 가섭원(迦葉原)과 의미상으로 통한다. 상춘이 북부여로서 북부여 전체의 수도(首都)라면, 길림은 동쪽의 부여 땅이 되어 동부여(東夫餘)가 되는 것이다. 길림의 동쪽 송화강 건너의 땅은 숙신(肅愼)의 땅이 된다.
이때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아사달의 신궁(新宮)인 천안궁(天安宮)이며, 동명왕 고두막한이 해부루 천왕을 동부여로 옮기게 하고, 여전히 수도로 삼아 북부여라 칭한 것이 된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천왕은 국호를 북부여라 칭한 것이 아니나 후대의 역사로 보아 북부여라 불리는 것이 되고, 고두막 천왕이 국호를 북부여라 칭한 것이 된다.
[동부여 제1대왕 해부루(解夫婁:서기전86년~서기전48년)]
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해부루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분릉)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부여 고두막 천왕으로부터 강등되어 제후(諸侯)인 지방의 왕(王)으로 봉해졌다. 가섭원은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법,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동부여 땅의 정춘요(正春謠)]
서기전84년 정유년(丁酉年)에 동부여 해부루왕이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릉을 기름지게 하는 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정춘이란 “진짜 봄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한(漢)나라 도적들을 격파하다]
서기전86년 을미년 가월 8월에 서압록하(西鴨綠河)의 상류에서 한구(漢寇)와 여러 차례 싸워서 이겼다.
서압록하는 지금의 요하(遼河)를 가리키는데, 서기전86년 이후 서기전82년에는 서압록하 서편에 위치한 진번과 임둔을 북부여가 수복하게 된다.
[진번과 임둔을 수복(收復)하다]
서기전82년 기해년(己亥年)에 한사군의 속하였던 진번군과 임둔군을 수복하여 북부여에 속하게 하였다.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서기전82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과 현도에 소속시켰더니 뒤에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 갔다<東夷傳 濊>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소위 춘추필법에 의한 기록이며, 실제로는 진번군과 임둔군이 북부여에 수복된 것이 된다.
[고모수(해모수)와 유화부인]
서기전80년 신축년(辛丑年)에 하백녀(河伯女:하백의 딸) 유화(柳花)가 나들이를 나갔는데 북부여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昇天)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고진의 손자가 된다. 여기서 승천하였다는 말은 고모수가 정사(政事)를 보러 중앙조정(中央朝廷)으로 복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하백(河伯)의 땅은 지방이 된다.
[고주몽의 탄생]
서기전79년 임인년(壬寅年) 5월 5일에 고주몽이 탄생하였다.
유화부인의 부모가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는 것에서 고주몽은 외조부 하백(河伯)의 집 즉 어머니 유화부인의 친정에서 태어난 것이 되고, 이후 유화부인이 어린 고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갔다가 사방을 주유(周遊)하다가 동부여로 간 것이 된다.
고모수가 승천(昇天)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는 것은 고모수가 유화를 임신시키고는 북부여 조정(朝廷)으로 들어가서는 찾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고모수가 사망하였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서는 유화가 나중에 고주몽을 데리고 고모수의 친가(親家)인 시가(媤家)가 있는 북부여 웅심산으로 갔던 것이며, 이후 사방을 주유하다가 고주몽이 5세경에 동부여로 간 것이 되므로, 고모수는 아마도 고주몽이 어릴 때 사망한 것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해부루왕이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으며, 이에 유화부인이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라고 기록되는데, 이때 고주몽은 이미 5세였던 것이 된다. 해부루와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는 6촌형제 사이가 된다.
이름을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朱蒙)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 된다. 추모(鄒牟)는 주몽(朱蒙)과 같은 소리를 적은 이두식 표기가 된다.
[해부루왕이 금와를 얻다]
서기저77년 갑진년(甲辰年)에 해부루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모양이었다. 해부루왕은 몸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를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성장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 고무서의 즉위]
서기전60년 신유년(辛酉年)에 고두막 천왕께서 붕하시니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지내고, 태자 고무서가 즉위하였다.
7. 북부여(北夫餘) 제7대 고무서(高無胥) 천왕(天王)(서기전59년~서기전58년)
[수도를 졸본으로 삼다]
서기전59년 임술년(壬戌年)에 고무서 천왕이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역사에 따른 실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고무서 천왕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神)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解慕漱)라고 불렸다. 한편,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북부여 시조 해모수를 가리킨다.
[한나라 도적들을 격파하다]
서기전59년 임술년에 한나라 도적들이 요좌(遼左)에서 소란을 피우므로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여기서 요좌(遼左)는 요수의 동쪽으로서 요동(遼東)을 가리키며,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되는 소요수(小遼水)와 난하를 기준으로 그 동쪽이 되며, 현도군과 낙랑군의 동쪽이 될 것이다. 진번 땅과 임둔 땅은 서기전82년에 북부여에 이미 귀속되었던 것이 된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북부여 졸본으로 탈출하다]
서기전59년 고주몽이 21세 되던 해에 동부여에서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며 죽이려 하므로, 남동쪽으로 도망하라는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덕으로 사귄 친구인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엄리대수)에 이르렀는데,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으므로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 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자(天帝子)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인데 오늘 도주함에 추격하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라고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 등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여기서 물고기와 자라 등은 하백의 다스림을 받고 있던 어민이나 어부들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다리를 만들었다라는 것은 배와 배를 서로 이어서 다리처럼 만들었다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고주몽은 졸본으로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서 다시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墨居)를 만나니 모두 7의인(義人)이 되어 무리들 앞에서 다물흥방(多勿興邦)을 맹세하며 하늘에 제를 지냈다. 이때 하늘에 고(告)한 제천문(祭天文)이 있다.
<고주몽 다물흥방(多勿興邦) 고천문(告天文)>
한한상존(桓桓上尊)이시여!
구한(九桓)에 비추어 내리시사 밭을 일구고 황무지를 바꾸어 우리 땅에 우리 곡식으로, 오직 우리 진한(辰韓)이 융성하고 부강하게 하소서!
7인이 같은 덕(德)으로 큰 원을 회복하고자 맹서하고 도적들을 물리쳐, 우리 옛 강토를 완전하게 하고, 오래된 숙병(宿病)을 제거하고, 우리의 누적된 원한을 풀고, 기근과 병란을 일거에 없애고, 도를 따라 백성을 사랑하고, 삼한(三韓)이 함께 다스려져,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어려서는 반드시 전(佺)을 따르고 늙어서는 종(倧)이 있을 바이다!
노래와 춤으로 마땅히 취하고 배부르게 되오며, 구한(九桓)이 하나의 땅으로서 오래오래 계승되오리다!
이제 소자 과덕하여 근면에 힘씀에, 머리를 조아려 받드니, 신(神)께선 흠향을 마다하지 마시고, 소자들이 가는 정벌에 이롭게 하시고, 공을 빛나게 하소서. 우리나라를 도우시사 우리백성들이 오래 살게 하소서!
(桓桓上尊 照臨九桓 畇畇闢荒 我土我穀 惟我辰韓 旣殷且富 七人同德 誓復弘願 斥逐寇掠 完我旧疆 去彼宿病 解我積寃 飢饉兵亂 一幷掃盡 引道愛民 三韓同治 自西而東 自北而南 幼必從佺 老有所倧 以歌以舞 且醉且飽 九桓一土 齊登壽域 今朕寡德 甚勤而時 叩頭薦供 神嗜飮食 以利我征 俾光我功 佑我國家 壽我人民)
고주몽의 일행이 졸본(卒本)에 이르렀는데, 고무서 천왕은 아들이 없어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둘째 딸 소서노(召西弩)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흰 사슴(白鹿)을 얻다]
서기전58년 계해년(癸亥年)에 고무서 천왕이 영고탑(寧古塔)을 순시하다가 흰 사슴을 얻었다.
[고무몽의 북부여 단군 즉위]
서기전58년 계해년(癸亥年) 10월에 고무서 천왕께서 붕하시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大統)을 이었다. 이에 고주몽도 또한 단군(檀君)이 된다.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에는 시호가 동명성제(東明聖帝)로서, 일반 왕(王)을 거느리거나 봉하는 제(帝)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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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총재.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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