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뿌리를 찾아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홍익인간 286] 북부여(北夫餘) 시대 동부여 역사

양해천 2018. 1. 22. 12:59

[홍익인간 286] 북부여(北夫餘) 시대 동부여 역사

2012년 04월 17일 (화) 07:01:05천산(天山)  sppopsj@yahoo.co.kr

[동명왕 고두막한의 천왕이 해부루를 동부여후에 봉하다] 

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고두막 천왕이 즉위하였다. 북부여가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고두막(高豆莫) 천왕께서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山分 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北夫餘)라 칭하였다. 

이에 해부루는 분릉의 왕 즉 동부여왕으로 봉해졌는데, 고두막 천왕의 제후에 해당한다. 분릉(山分 陵)은 일명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한다. 분릉은 낮은 산이나 언덕 형태를 나타내고 가섭원의 숲이 우거진 벌판을 나타낸다. 

해부루 천왕이 강등되어 동부여왕으로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곳이 상춘(常春)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길림(吉林)이 된다. 길림(吉林)이라는 글자는 가섭원(迦葉原)과 의미상으로 통한다. 상춘이 북부여로서 북부여 전체의 수도(首都)라면, 길림은 동쪽의 부여 땅이 되어 동부여(東夫餘)가 되는 것이다. 길림의 동쪽 송화강 건너의 땅은 숙신(肅愼)의 땅이 된다. 

이때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아사달 부근의 난빈(蘭濱)이었으며, 동명왕 고두막한이 해부루 천왕을 동부여로 옮기게 하고 여전히 수도로 삼아 북부여라 칭한 것이 된다. 

1. 동부여 제1대왕 해부루(解夫婁:서기전86년~서기전48년) 

서기전86년 을미년(乙未年)에 해부루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분릉)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부여 고두막 천왕으로부터 강등되어 제후(諸侯)인 지방의 왕(王)으로 봉해졌다. 가섭원은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법,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동부여 땅의 정춘요(正春謠)> 

서기전84년 정유년(정유년)에 동부여 해부루왕이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릉을 기름지게 하는 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해부루왕이 금와를 얻다> 

서기저77년 갑진년(甲辰年)에 해부루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해부루왕은 몸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를 금와라 하고 그가 성장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을 따라 동부여에 살다> 

서기전75년에 유화부인(柳花夫人)이 5세의 고주몽을 데리고 해부루왕을 따라 동부여로 가서 살게 되었다. 

고주몽은 서기전79년 임인년(壬寅年) 5월 5일에 분릉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유화부인의 친정인 하백(河伯)의 집에서 태어난 것이 되고, 고주몽이 어릴 때에 어머니 유화부인이 고주몽을 데리고 웅심산(熊心山)으로 갔으며 이후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동부여의 해부루왕을 따라 가서 살게 된 것이며, 이때 고주몽은 이미 5살이 되었던 것이 된다. 해부루왕과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해모수:불리지)는 6촌형제가 된다. 

서기전73년 고주몽이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북부여 졸본으로 탈출하다> 

서기전59년 고주몽이 21세 되던 해에 동부여에서 동부여 사람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며 죽이려 하므로, 남동쪽으로 도망하라는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덕으로 사귄 친구인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렀다. 이때 고무서 천왕은 아들이 없어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둘째 딸 소서노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자 금와의 즉위> 

서기전48년에 해부루왕이 훙(薨)하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였다. 

2. 동부여 제2대왕 금와(金蛙:서기전47년~서기전7년) 

<동부여가 북부여에 조공하다> 

서기전47년 갑술년(甲戌年)에 북부여(고주몽의 북부여: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쳤다. 동부여는 북부여의 제후국이므로 조공을 한 것이 된다. 

<유화부인이 돌아가시다> 

서기전24년 정유년(丁酉年)에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돌아가셨다. 이에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유화부인을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皇太后)의 예로 산 같은 능(陵)을 만들고 곁에 묘사(廟社)를 지었다. 

<태자 대소의 즉위> 

서기전7년 갑인년(甲寅年)에 금와왕이 훙하고 태자 대소가 즉위하였다. 

3. 동부여 제3대왕 대소(帶巢:서기전6년~서기22년) 

<동부여가 고구려에 국교를 청하다> 

서기전6년 을묘년(乙卯年) 봄 정월에 대소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청하고 왕자를 인질로 삼자고 하였다. 이에 고구려의 제2대 유리명제는 태자 도절(都切)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유리명제가 크게 꾸짖었다. 

<고구려를 치다> 

서기전6년 겨울 10월에 대소왕이 병력 5만을 이끌고 졸본성으로 가서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 퇴각하였다. 

<학반령 전쟁> 

서기13년 계유년(癸酉年)에 대소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 밑에서 고구려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임금은 제3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이다. 

<대소왕의 전사> 

서기22년 임오년(壬午年) 2월에 고구려가 크게 쳐들어와서 대소왕이 몸소 출전하였으나 진흙탕에 빠져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고구려의 대장군 괴유(怪由)가 바로 앞에 있다가 대소왕을 살해하였다. 이때 동부여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 계속되어 고구려의 대무신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가 버렸다. 

[동부여의 후예]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국(曷思國)을 세우다> 

서기22년 여름 4월에 대소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길을 떠나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여 그 길로 갈사수(曷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갈사(曷思)라 한다.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고구려에 투항하다> 

서기22년 가을 7월에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동부여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뒤에 낙(絡)과 같은 무늬가 있으므로 낙씨라 사성을 하였으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의 서북으로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연(燕)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갈사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갈사국은 서기68년 8월에 고구려의 태조무열제 때, 제3대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갈사국은 3대 47년이다. 

<고구려가 갈사국 도두왕을 동부여후에 봉하다> 

서기68년 8월에 고구려는 항복한 도두왕을 우태(于台)라 부르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하였다. 

<낙씨(絡氏:연나부 낙씨) 부여(夫餘)가 고구려에 망하다> 

서기494년 고구려의 문자제(文咨帝)가 낙씨 부여를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가 끊겼다. 연나부 낙씨 부여의 역사는 고신백가(高新百加)의 사국시대(四國時代) 역사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천산(天山)의 다른기사 보기
ⓒ 데일리전북(http://www.dailyjeonbu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